연신은 갖고 있는 옷 중 , 가장 최신의 화사한 옷을 골랐다. 특별히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손질하고 잘 신지 않던 하이힐을 신고 핸드백도 갖춰 들고 거울을 본다.

서른 살이 조금 넘은  연신은 이젠 시골 때가 벗겨지고 적당하게 살집이 붙고 적당하게 균형잡힌 몸매가 활짝 핀 모란이다.

그는 눈 부신듯 연신을 응시한다. 잠시 동안 그는 여기가 어디인지 왜 와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머리가 텅 비었다.

선생님 음식 주문하셔야지요 연신이 장난스레 웃으며 그의 팔을 가볍게 꼬집는다.

찌릿한 감전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앞에 선 웨이트리스를 쳐다보곤 메뉴 판을 받는다.

오늘은 우리 특별한 쌍칼잡이 식사다. 비프스테이크  이인분 주세요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걸까 , 연신은 벅차게 용솟음치는 행복감에 살그머니 가슴을 누른다. 그렇치만 이렇게 맘 놓고 좋아라만 할 수 없지

선생님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싶어요. 만나 뵙게 해 주세요

그는 화들짝 놀란다. 취한듯 화사했던 얼굴에 짙은 구름이 낀다.

그래, 저 이를 처음 봤을 때는 늘 저런 얼굴이었어. 요샌 좀 표정이 환해졌는데.’

연신은 생각하며 이왕 말을 꺼낸 이상 망설이던 얘기도 쏟아낸다.

근데, 저어 아이 딸린 홀엄씨를 며느리로 받아 주실까요 ? 그게 걱정이 돼요. “

변기섭은 이마를 아드득 꾸기며 눈을 아래로 깐다. 투명한 유리잔 가득한 물을 들어 벌컥벌컥 마신다. 한참 대답이 없다.

뭐 고민이 있나요 ? 말해 봐요

마침 아직도 철판 위에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 비후스테이크가 왔다.

갓 구운 구수하고 말랑한 빵이 담긴 바구니와 버터, , 그리고 수북하게 담긴 싱싱한 셀러드 .

한 상이 잘 차려진다.

연신아 어서 먹자. 먹고 힘내고, “ 그는 눈을 찡긋한다. 연신은 살짝 눈을 흘기며 나이프과 포크를 양 손으로 잡고 비후스테이크 해체작업에 들어 간다.

 

연신아 걱정 마. 부모님은 장성한 아들이 객지에서 하숙집 밥 먹고 사는 걸, 몹시 걱정하셔. 널 데려가서 보이면 무척 좋아하실꺼야. 우리 부모님은 아들 밥 잘 해 먹이고 뒷바라지 잘 해 주면 그걸로 만족하실꺼야. 니 음식 잘 하나 ? “

 

그럼요 선생님 서울 세련된 멋쟁이 음식은 못하지만 우리 고향 경상도 음식은 모두 잘 해요 . 장어탕, 육게장,

, 네가 차려주는 밥, 빨리 먹고 싶다

연신은 그를 본다. 손색없이 잘 생긴 얼굴, 강한 뼈를 유연하게 감싼 면도자국이 파르스럼한 턱선은 연신을 숨 막히게 한다. 그는 부자는 아니지만 성실하게 일하는 공무원이다. 별 볼일없는 나를 몇 년이나 친절하고 열심으로  지도해 준 선생님, 아마 예나에게도 좋은 아빠가 되 줄꺼야.

인물, 학식, 직업 출중하고 , 나이도 나랑 비슷하고 ,거기에 우리는 마그마 같은 뜨거운 사랑을 하고 있어.

연신은 결심하고 말한다.

선생님, 우리 집 뜰 아랫방이 비어 있어요. 거기 들어 오셔서 하숙하세요. 물론 하숙비는 톡톡히 내시구요

뭐락 하나 ? 네 집에 들어와 살라꼬 ? 네가 밥도 해 준다꼬 변기섭은 깜짝 놀라 얼결에 고향 사투리 발음이 그대로 튀어 나온다.

직장까지 거리가 멀어 출퇴근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마을 버스 타고 다녀도 되잖아요 ?

 

연신은 저녁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밥상을 차려놓고 시계를 본다. 배곺은 예나를 위해선 따로 조그만 소반에 차린 밥을 먹인다.

엄마도 나하고 같이 먹자아 예나가 혼자 먹기 싫다고 조른다.

난 선생님 오시면 먼저 드리고 먹을꺼야

피이, 엄마는 뭘 몰라 예나는 눈섭을 꼿꼿이 세우며 엄마를 똑바로 본다.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 “

그 선생님은 엉큼하단 말이야, 속이 꺼멓다는거야

어머, 얘가 무슨 소리 하는거야 뭘 보고 하는 말이야 ?”

그 사람은 솔직하지 못해 단언하듯 소리를 빽 지른다.

예나는 서둘러 밥을 먹고 후다닥 제 방으로 들어 간다. 예나가 제법 컷다고 질투를 하나.

연신은 쓰게 웃지만 한편 예나의 경고에도 신경이 쓰여  그이를 객관화시키며  꼼꼼히 점검한다. 그는 사소한 약속을 어긴 적은 없다. 또 연신에게 대학 진학을 목표로 꾸준히 공부할 것을 권하며 수학 문제지도 계획적으로, 단계적으로 만들어 지도해 준다.

그의 짝이 되려면 대학은 나와야지 않것나, 그나저나 어서 그이의 시부모님을 뵈어야 할긴데. ‘ 그기 맘에 걸리는구만 .오늘 저녁은 그 문제를 좀 더 확실히 해 두려 한다.

 

 

 

그 날도 연신은 식당 일을 일찍 끝내고 집에 오자, 그이의 방을 청소하고 때묻은 옷들을 걷어내어 마당 수도가에서 빨래를 한다. 속옷은 애벌 빨은 다음 뽀얗게 삶아서 햇빛 쨍쨍한 빨랫줄에 널어 놓으니 기분이 산뜻하고 흐믓하다.

그 때 철문에 달린 종이 뗑그렁 울리며 사람 기척이 난다.

예나 왔니 ? “ 하며 나가서 문을 여니 아이를 업은 젊은 여인과 늙수그레한 두 여인이 서 있다. 자세히 보니 애 엄마 뒤에 또 한 사내아이가 엄마 치마에 얼굴을 묻고 수줍게 서 있다.

여기가 변 기섭씨 하숙하는 집이우 ? 늙수그레한 여인이 나서며 묻는다.

, 맞는데요. 무슨 일로 찾아 오셨습니까 ? ‘

아직 문을 막은 채 묻고 있는 연신을 확 제쳐 밀은 것은 젊은 애 엄마다.

엄니, 묻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당게요. 제가 다 알고 있구만이라. 저 년이 바로 애 아버지를 꼬신 여시랑께요. ‘그 여자는 보란듯 부끄럼 타는 아이 손을 부여잡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적의로 번득이는 눈초리가 사방을 훓는다 이윽고 그녀는 바닥에 주저 앉아 악을 악을 쓴다. 등에 업은 아이까지 덩달아 쇳되게 울음을 터뜨린다.

어머이 저 것 좀 보소, 제 서방맨치로 빨래까정 저렇게 해 널었당게로. 아주 이것들이 살림을 차려 꿀떡 같이 살고 있구만이라아이구 억울해라 이일을 어짤꼬 ? 어쩔꼬

벌써 그녀의 입 가장자리는 게거품으로 허옇게 엉긴다.

이를 어쩌노 ? 기도 안 찬다. 이 보소, 남의 서방을 이리 가로채면 되는교 ? 이 아들은 변선생 아들이란 말이시. 난 그 어매고, 여긴 아 어맨게라 . 정말 몰랐던교 ? “

연신은 하얗게 질려서 이들의 모습을  크게 뜬 눈으로 똟어지게 바라 본다.

시어매의 역성에 힘을 얻은 애엄마가 벌떡 일어서더니 댓짜고짜 달려들어 연신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휘휘 흔들어 댄다. 힘이 여간 쎈게 아니다. 연신도 제법 한 힘하는 편이지만 지금은 너무 갑자기 당하는 사태에 속수무책이다.

연신은 바늘 끝 같이 따가운 시선을 느끼곤 우쭐 힘을 써 그 여자를 떼어 밀쳐낸다.

학교에서 돌아 온 예나가 이 난장판을 날카롭게 쏘아 보고 있는 것이다.

애를 업은 채 땅바닥에 주질러 앉았던 애엄마가 다시 벌떡 일어서며

내 이 연놈들의 세간을 빠삭빠삭 뽀사 버릴끼다 하며 우르르 마루에 올라서 안방으로 향한다. 그 때 , 여리지만 쇳소리 나게 쨍쨍한 목소리가 마당을 울린다.

이봐요, 아저씨 방은 거기가 아니고 저 방이얘요 하고 뜰아랫 방을 가리킨다.

애엄마와 할머니는 흠칫 놀라고 기세가 한껏 누그러진다. 그들이 그 방으로 물러 간 뒤 연신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이 사태를 정리해 본다.

그 이는 유부남이다. 두 아이의 아버지고 그 아내는 여간 아니게 사납고 무대뽀이다. ‘

예나는 아무 말 없이 뽀로퉁해서 제 방으로 들어가고 연신은 생각난 듯 밖으로 나간다.

동네 입구에 있는 전화부스로 가서 그의 사무실에 전화를 건다. 그는 외근 나가고 자리에 없다고 한다.

, 나는 어떻게야 되는거야 이게 뭐야 이마를 전화 부스 창에 콩콩 박는다.

어쩌면 좋아  난 너무 바보, 어이없는 실수를 한거야 머리를 더 세게 박는다.

연신아, 여기서 뭐 하는거야 반가운 소리, 그러나 지금은 한 없는 고뇌의 근거가 되는  원망스런 그 목소리. 등에서 목덜미로 찬바람이 소름끼치듯 지나간다.

당신, 뭐야 내를 속인거야 ? “ 그가 난해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 온다.

우린 이제 끝장이야 !   나 어떻게 살아 ? “ 연신이 그의 목을 끌어 안는다. 그는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된 채 연신을 마주 껴안는다. 둘은 서로 죽도록 껴안는다. 사방은 투명한 유리박스 , 그러나 둘은 세상을 잊는다.

아니, 이 것들이 여기서 만나 엉키고 설키고  있당게. 내 이상타 하고 나와 보니 --애시당초 이럴 줄 알았당게 벼락 같이 울려 퍼지는 애 어메의 고함소리, 그녀는 또 우르르 들어와 대짜고짜 연신을 끌어내어 갈구리 손으로 머리칼을 잡아  전화 부스에서 끌어내  바닥으로 팽개치고는 사방으로 외친다.

동네 사람들 나와 보드랑게, 이 꼬랑지 열 둘 달린 여시년이 남의 서방 꼬셔내어 살림을 차렸당게. 이 육실한 년 좀 보드라고 그 기세가 워낙 등등하여 연신은 그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기섭은  망연실색 사색되어  보고 있다. 근처 주민들과 지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큰 구경거리가 난 듯 흥미있게 지켜 본다. 그가 한 박자 늦어 상황을 알아차리고 두 여자를 양손으로 질질 끌어 집으로 향한다.

아랫 채 방에서는 큰 소동이 났다. 밤 늦도록 애어매의 패악치는 소리 노파의 울음 섞인 꾸지람과 하소연간간이 젖먹이 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그리고 그이의 낮은 , 아주 낮은 달래는 목소리. 그리고 자정이 넘으며 소음도 잦아든다. 조용해진다. ‘ 어떻게 달랫을까 ? 어쩌면 그 막무가내 아내를 품에 안아 잠 재웠을까 ? ‘ 상상만으로도 명치가 뻐근해지며 불꽃이 정수리까지 치솟아 뜨겁다.

이튿 날 이른 아침 일어난 연신은 밥과 국을 넉넉히 하고 예나를 학교에 일찌기 보낸 뒤, 그리고 아랫채 낮선 가족에게도 아침상을 보냈다.

그이는 일찍 직장에 출근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밥을 다 먹은 후 애엄마가 빈상을 들어 연신의 부엌으로 들여 논다.

잘 먹었당게, 아우. “ 일단은 순하게 말했지만  다음 단호하고 고집스럽게  말한다.

우리 아이들과 여기에 눌러 살기로 했당게, 냄펜을 객지로 보낸 후 언제나 맴이 펜찮았는디 겔국에는 이 꼬라지 된게 아닝가. 그라니 자네가 물러나세.”

이 내용을 간밤에 의논한게 아닌가 ? 연신은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이봐요, 여긴 내 집이얘요. 당신네들이 나가 살아야지요. “

아니 이 년이 안즉도 주뎅이가 살았당가 ? 내 서방 붙어묵는 년을 어예 놔두고 내가 나가 살꼬. 네 못믿어 난 여기 살란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

그 여자의 막된 언행은 거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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