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가 일곱 살이 되어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날이다.

연신은 사랑스런 딸, 예나의 머리를 빗어준다. 미리 준비해 둔 분홍  드레스와 짙은 핑크 코트를 입히고

어깨에 가죽 란드셀을 메워 준다. 오른 쪽 가슴에 < 이 예나 >라는 이름표와 그 아래에 길게 느러진 하얀 손수건, 영락없는 햇병아리 학생이 된 것이다.

“ 예나야, 이제 넌 으젓한 학생이야. 선상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 학생이 되야 하는기라. “

“ 엄마, 알았다카이. 이젠 쫌 그만 하그라 “

제 언니 가영이의 되바라진 말투 따라 예나도 말투가 고약하다.

그러나 새 옷 입고 학교에 간다는 설레임으로 반짝이는 눈과 벌름대는 콧구멍은  먼 초원을 향해 달리려는  어린 준마의 그 모습이다.

“ 가스나가 나대기는 , 얌전히 좀 기다리그라, 어매 옷 갈아 입고 나올게니.”

그 때 전화 벨이 울린다. 마을 금고에서 일하는 장주사이다.

“ 사모님, 큰 일 났어예. 사장님이 쓰러지서 병원으로 실려 갔어예 “

“ 음마 , 으찌 그리 되셨습니까 ? 어느 병원 가싰어요 ? “

“ 우선 가까운 늘사랑 병원으로 가싯습니다. 한 이십 분 됐실거로. “

“ 그걸 와 이제 알려주십니꺼 ? “ 연신은 소리를 빽 지르며 대답도 들을 새 없이 전화를 끊고


“ 할무이예 , 예나를 학교에 데리꼬 가 주소. “ 일하는 할매에게 예나를 부탁한다.

그리고  남편의 형인 시아주버님 댁에 전화한다. 동서가 전화를 받는다.

“ 행님 큰 일 났어예 예나 제아범이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갔답니다. 늘사랑 병원이라 합디더. 지는 지금 곧 가 보꾸마요 “

연신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만석씨는 응급수술을 하고 있었다. 서너 시간을 기다리느라 피를 말리는 긴 수술이 끝나고 수술실을 나오는 만석씨의 침상은 하얀 시트로 얼굴까지 모두 덮혀 있다.

주치의사 김형식 박사는 연신과 형님 가족 앞에 다가와 정중히 고개를 숙인다.

“ 죄송합니다. 병원에 왔을 때 이미 많은 피가 뇌 속에 차 있어 신속히 핏줄을 차단하고 고여있는 피를 뽑아내었으나 목숨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

만석씨의 사망 원인은 다량의 뇌출혈이라는 것이다.

오일장으로 치룬 만석씨의 장례기간 동안은 연신에게 시공이 아듣히 멀어져 간 무중력 우주 공간 같았다. 머릿 속은 텅 비어 아무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모든 감각은 마비되어 느낌이 없었다. 곡기도 제대로 때우지 못하여 홀쭉하고 창백한 볼에 눈만 퀭하게 번쩍일 뿐이었다.

“ 지어매, 내 숭늉을 진하게 끓였으니 한 모금이라도 마시게 “ 할매의 권에도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듯 멍한 시선만 보이는 연신이다.

그런 연신이가 우주 속 무중력 공백 속의  현실에서는 엄청난 용틀임의 변화가 있는 줄, 어찌 알았을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장례 의식이 끝난 뒤, 연신의 집은 믿을 수 없도록 적막과 고요로 무겁게 가라 앉았다.개 한 마리 얼씬대지 않았고 이웃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

연신은 기진하여 어두운 안방에 누워있고 예나마져 고양이 같이 가벼운 발자국으로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리며 아버지의 흔적과 냄새를 찾는다. 할매도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그릇의 소음도 조심하며 가만가만 음식을 만들고 안 먹고 남은 숫한 음식을 공연한 죄책감으로 가슴을 조이며 몰래 두엄더미에 내다 버린다.


그동안 밖에서 시아주버니는 만석씨의 마을 금고를 차지하고 금융자산을 조사하여 명의를 바꾸고 그리고 상속인의 서열을 날조하여 많은 부동산을 합법적으로 차지한다.

연신이 문득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는 집 안의 식량이나 당장의 살림비용 마저 텅 빈 상태였다.

만석씨와 함께 산 이후로는 그가 항상 빈틈없이 만사를 배려해 주었으므로 연신은 일상 필요한 살림살이 비용이나 , 더구나 그의 재산 상태에 대해선  알 필요도 없었고 아는 바도 없었다.

연신의 살아 온 생애 중 가장 안락하고 행복했던 십 년 세월 가운데는 만석씨가 있다.

만석씨는 언제나 연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고 완벽하게 감싸 주었다.

“ 아 ! 당신 , 나와 어린 예나를 두고 어찌 이리도 허망하게 떠나셨습니꺼 ? “

그와의 이별 앞에서 절망과 아쉬움으로 피를 토하듯 울부짖건만 아무 대답이 없다.

당장에 살 길이 막막해진 연신은 생각다 못해  큰아주버님을 찾아 간다.

“ 예나 아부지의 많은 재산은 다 우찌 된 것입니까 ? 우리는 우찌 살아야 합니꺼  “

시아주버니 대신 동서의 싸늘한 대답이 먼저 날라 온다

“ 아니, 자네는 냄편 잃은게 며칠이나 됐는데 벌써 냄편 보다 재산 부터 챙기는가 ? “

하지만 시아주버님 , 선기침을 흠흠 하며

“ 걱정 마시요, 제수씨 , 내가 이녁  살도록은 돌봐 줄꾸마 “

진정 없이 허울  뿐인  무뚝뚝한 대답이다.

시아주버니가 내어 준 몇 푼의 돈을 손에 쥐고 나오며 연신은 비로소 정신을 차린다.

연신은 서울서 사법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생 정연을 부른다.

“ 내 배운게 짧으니 으찌 알것나. 니가 매형의 재산일체와 그게 으찌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 봐 도고. “

정연은 누이의 부탁에 두 말 없이 내려 와 남겨진 서류랑 대조하며 실물을 살핀다.

며칠 후 전연은 누이에게 말한다.

“ 누나 정말 무섭십니다. 마치 매형이 이래 될 줄 미리 알고 꾸며낸 일처름 모두 치밀하게 처리됫십니다. 다만 이 집만이 남아 있지만 이것도 언제 날라갈지 모립니다. “

“ 매형과 누나의 가짜 인감도장도 모두 완벽하더만요. “

연신은 눈 앞이 캄캄했다.

‘ 내가 뭐 으쨋다고 ‘

남편 여읜 슬픔 이전에 내 처신을 찾고 살아갈 일이 사막이다.

“ 아주바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 내 남편과 그의 딸 예나의 재산 지분을 강탈하시면 안 되지요 “

연신은 다만 직선적인 항의 외에 방법을 몰랐다.

“ 에이 , 이 보게, 나는 자네를 내 동생 만석이가 엄청 싸고 도니 으쩔 수 없었고만 자네를 우리 가족으로 인정한 일은 전혀 읎네. 자네 에미의 해괴한 소문이 내 동상을 얼매나 힘들게 했는지 아는가 ?  자네 복은 여기 까정인게 이젠 보따리 싸게. 한영이와 가영이는 우리 사돈과 잘 타협하여 갸들 사는데 지장 읎이 한 자락 떼어 줄테니 그건 걱정 말드라고. “

연신의 무지개  다리는 만석씨이고 이제 그 무지개는 스러져 갔는가 ?


동생 정연이가 하는 말이,

사귀고 있는 아가씨가 있는데 그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한다.

정연은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녀를 따라 이민을 갈 것인가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 누나, 여기 있어봤자 , 똥밭이다 . 누가 우리를 옳게 봐줄까 말이다. “

“ 아직 그누마들의 손길이 안 간 몇 뙈기 논 밭이 있더라, 내 단대이 넘어가지 않게 손 봐 났다.

이걸 잽싸게 팔아 거두면 우리 미국 가서 자리 잡는데 도움이 될꺼로. ‘

연신에게 남은 건 소중한 딸 예나, 할매는 워낙 이 집 안에서 오래 살아왔으니 이 집 안의 소속이고 연신이 책임 질 일 없으니 그녀의  입지는 가볍다.


연신은 한밤 중에 그 곳을 떠났다.

예나에게 두툼한 겉 옷을 입히고 큼직한 가방을 든 채 가벼운 행장으로 야밤, 사랑하던 만석씨의 집을 떠난 것이다.하도 분위기가 으스스하고 삼엄하여 슬픔에 빠질 경황도 없었다.

학에 국어 과목과 영어 과목을 가르치는 교사다.

본래는 시청에 근무하는 공무원인데 삼양동 산동네에 몰려 사는 저학력 계층에게 글을 가르치는 자원봉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많은 시간을 쪼개어 야학에 모이는 각종 사람들을 열심히 지도했다.

도시에 나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 연신은  학력의 필요성을 실감했다.

동생 정연도 미국으로 떠나기 전 누나 연신에게 간곡하게 총고했다.

이다호기심과 궁금함으로 이제 연신은 장로님의 기도 밀씀이 귀에서 멀어진다옆자리 인물에 급관심이 쏠린다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 연신은 살그머니 실눈을 뜨고 옆자리를 살짝 훓어 본다.

‘어멋 ! 변기섭 선생님이 ! .< 연신의 봄 >


변기섭 선생은 연신이 다니는 야, 공부해야 해. 지금도 늦지 않아. 야학이나 학원에 다니며 뒤떨어진 실력을 보충하고 검정고시를 보고 고졸 자격증만 따면 대학 갈 수 있어. 누나는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아서 결심만 하면 잘 할 수 있어. “

삼양동 산동네는 무허가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 차있고  주로 시골서 도회지로 나온 사람들이 처음 수월하게 자리잡는 곳이다. 전세나 월세가 비교적 헐했고 없는 사람들이 어깨를 맞대고 사는 만큼 악을 쓰고 싸우는 소리도 자주 있지만 서로 도와주고 기대는 인정도 훈훈한 곳이다.

연신은 이 곳에  안방, 건너방, 손바닥만한 마당 건너 뜰아랫방까지  갖춘 조그만 집을 구입했다. 비록 무허가 집이지만 연신이 딸 예나와 함께 살기에는 넉넉한 공간이다.. 뜰아랫방이 맘에 들었던 건 거기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 수입이 불확실한 연신이 월세로 놓아 생활비에 보태 쓰기 위함이었다.

예나를 지역에 있는 학교로 전학시키고 연신도 시청에서 무료로 교육시키는 야학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연신은 문맹은 아니어서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준비반으로 들어 갔다. 일년이 지난 후 이 시험에 합격했을 때, 자기 일처럼 기뻐핸 준 이가 변기섭 선생이었다. 그는 연신이 고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 준비도 도와 주겠다고 계속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 그러나 그 후 연신은 동네 어귀에 있는 한 식당에서 허드레 일을 하기 시작하며 그 주인의 인도로 교회에도 나가게 되어 바쁘고 고된 생활에 공부는 등한하게 되었다. 사실 연신이 결정적으로 야학을 멀리 한데에는 어느 때 부터인가 변선생의 눈초리가 끈적하게 변해있던게 무척 거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학원에 나가는 둥 마는 둥, 일상에 쫒기는 바쁜 나날이 거의 일 년이나 지난 거다.

 

이 사람이 여길 어떻게 알고 왜 찾아왔단 말인가. ‘ 연신은 뜨악한 마음으로 눈을 내리깔고 아는체를 하지 않았다. 예배시간이 끝난 후 교육관으로 이동하여 성경공부를 하는 곳에도 그는 따라 왔다. 연신은 시선을 돌려 그를 무시했다. 새침하게 대하는 연신에게 그는 말을 걸어오지 못 했다.

성경공부가 끝나고 어린이 예배실에 들러 예나를 찾았다.예나는 간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이제 열 한 살이 되어가는 예나는 다리가 길쭉하고 살빛이 하얘 금방 눈에 띄었다.

예나야, 오늘 목사님 설교 말씀 잘 들었어 ? “

엄마, 난 다행이야

? “

요셉은 형제들이 많아 질투와 시기를 받아 죽을 뻔했고 애급의 노예로 팔려 갔잖아 ? “

나도 사실 , 한영이 오빠, 가영이 언니한테서 많이 맞았다. 아빠가 나만 예뻐한다고 가영 언니는 나를 마구 꼬집기도 했어. “ 예나는 심각하게 눈을 내리 깔았다.

, 그랫구나. 왜 그 때 내게 말하지 않았어 ? 아빠한테 일렀으면 걔들 혼 났을텐데.”

엄마, 언니 말이 맞잖아 ? 아빠가 나를 얼마나 귀애했는지 언니 오빠들에게 미안했어. 그래서 그냥 맞았어. “

기집애, 네가 몇 살이나 됐다고 어린게 그런 생각까지 했니 ? “ 예나는 엄마 말에는 딴청을 하며

아빠 보고 싶어, 고향 가면 아빠 거기 있지 않을까 ?”

변선생은 아직도 모녀의 뒤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따라 오고 있다.

집에 도착한 연신은  예나에게 쥬스를 한 잔 주며 책상 앞에 않아 숙제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그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연신은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가 본다. 역시 그는 거기 있었다.

좀 짜증스런 맘이 났지만 꾹 누르고 그에게 다가 간다.그 둘은 나란히 경사진 동네 어구 길을 내려 온다.

사 월 정오가 살짝 지난 한낮의 햇볕은 밝고 따사로우며 이 메마른 산동네에도 듬성듬성 봄꽃들이 피어 있다.

문득 연신은 옛날 푸른 들판에서 소에게 먹일 꼴을  낫으로  써억썩 베어 낼  때 강하게 풍기던 풀냄새를 맡는다. 쌩뚱맞게 이 냄새는 뭔가. 옆에 나란히 걷는 그 남자를 스치며 불어오는 바람결에서 그 냄새는 연신을 어느 한 때, 싱싱하고 달콤한 환상으로 이끈다.

이 냄새! ‘ 코를 흠흠대며  중얼대는 연신을 보며 변기섭은  샤쓰를 펄럭여 슬쩍 냄새를 맞으며 씩 웃는다. ‘ 오데콜론 바꾸기 잘 했다

그리고 그참에 용기를 내어 말한다.

연신아 고졸 검정고시 날짜가 정해 졌어. 7 월 말 쯤인데 아직 세 달이 남았으니 우리 다시 한 번 더 노력해 볼까 ? 그 말을하려고 널 찾아 온거야. “

연신은 지나친 걱정으로 그를 경계헸던 자신의 행동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믿어도 될까 ? 꺼려졌지만 시침을 떼고 관심 없다는 듯 심상하게 묻는다.

선생님 제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요 ?”

당연하지, 넌 틀림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까지 찾아 온거야

 변선생은 열열하게 말한다. 

연신은 그의 과장된 어투체 피식 웃는다.

그도 뒤 늦게 씩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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