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신은 가슴이 터지도록 벅찬 감동으로 산기슭을 통통통 뛰어 내려 온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 오면서 오늘같이 자존감을 벅차게  느껴 본 적이 없다.역시 살아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야

‘ 그 꼽꼽스런 요석 오빠가 설마 내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는지를 내 어찌 알았겠나’ 심장이 너무 부풀어 목까지 꽉 차 오른다.

그러나 곧 연신은 한숨을 포옥 내쉰다.  ‘ 하지만 그 오빤 내게 먼 별빛일 뿐이제. 그와 내 시이에 어디 통하는게 있어야제.내 오빠를 그여코 잡으려 한다면 서로 불행이제. 다만 -- 다만 내 살아온 세월이 헛 것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는거 아이가? 그래도 나는 좋대이.’

마치 무지개 구름 위로 날고 있는 듯 황홀한 기분에 취해있던 연신은 벼락같이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돌비탈길에 우뚝 멈춰 선다.

“ 아이고 간 떨어질 뻔 안 했나? 동연아 네 웬일이고 ? “ 손 아래 이제 열 다섯 살인 남동생이다.

“ 누부야 어데 이리 쏴돌아 댕기노 ? 아부지가 지금 큰일났다.”

“ 왜? 어찌된 긴 데? “ 연신도 화들짝 놀라  동생과 함게 허겁지겁 산을 내려와 집으로 향한다.

집안은 썰물이 빠져나간 듯 휑하고 사립짝 문 밖에 마을 노인 서넛, 혀를 끌끌 차고있을 뿐이다.

“ 우리 어맨 어데 갔는데요? “ 연신이 누구랄 것도 없이 외치자 아직 눈믈자국이 마르지 않은

막내 남동생이 뛰어나오며 “ 어맨 아부지랑 병원으로 갔다. “

“ 엄마가 어째 아부지를 업고 갔나? “

“ 아니, 만석 아재가 차를 가지고 와서 태우고 갔다. “

‘ 만석 아재가?’ 되뇌이는 연신은 가슴이 부르르  떨린다. ‘ 안 되는데. 그 사람한테 신세지면 안 되는데.’하지만 연신은 지금 이런저런 생각할 때가 아니다. 차도 끊긴 도로에서  읍내를 향해

냅다 뛰어간다. 한 삼십 여 분 어두운 거리를 달려온 남매의 얼굴은 땀 범벅이고 등도 땀으로 흥건히  젖은 옷이 등에 착 붙었다.

“ 우리 아배는 어디 있십니까 ? “  숨차게 묻는 연신에게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간호사가

“ 여기선 응급조치만 하고 서울 큰 병원으로 가싰습니다 “ 나른하게 대답한다. 이미 밤이 깊은 것이다. 좁은 읍바닥이라 웬만하면 모두 서로 아는 얼굴들, 영신은 간호사와도 약간의 안면이 있다.  “ 언니, 울 아배가 어떻게 아픈긴데요 ?  어떻게 응급했는지 알려주소 . 내 답답해서 안 그러요?  이제 서울 갈 수도 없고. 서울 큰 병원가면 살 수는 있는거라 요? “

연신은 오도가도 못하는 이 밤, 답답한 심사를 간호사에게 매달린다.

“ 아버님은  간경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더랍니더 . 간기능이 거의 정지되어 독소가 온 몸에 퍼지고 소화가 안 되어 위 속에 싸인 음식을 세척해내 고 뱃 속에 쌓인 혈변을 관장해 드렸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고요, 근본적으로 간기능을 다시 살려야 하는데 그 방법이 -- “

자세하게 설명해 주는 간호사의 얼굴엔 안타까움과 연민이 짙게 깔려있다.


차도 인적도 끊어진 어두운 신작로를  터덜터덜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남매는 말이 없다. 그러나 마음은 천근만근  태산에 깔려 있다. 저녁녘에 소동으로 저녁밥도 짓지 못하고 불도 때지 않아 싸늘한  방바닥 구들은 고픈 배를 안고 누운 삼남매의 등허리를 더욱 시리게 한다.

“ 누부야, 아배는 살아 돌아 오것나 ? “ 첫 째가 망설이듯 입을 뗀다

“ 에이씨, 아배는 없는게 낫다. 아배는 우리 집안의 흉물이다. “ 열 두 살 막내는 씹 어뱉듯 말한다.

“ 동연아, 정연아 , 그래도 살아가노라면 아배가 우릴 세상에 낳아준게 얼마나 고마운지 알게 될 때가 있어 . 너무 아배를 원망하지 말아라. 그라고 이 누나가 너들을 잘 길러줄 기다. “

“ 피이. 우리도 다 자랐다 아이가 ? “  하는 동연의 말에

“ 아유 요것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 연신은 동생들의 머리를 한방 씩 콩콩 쥐어박고  셋이는 큭큭  웃으며 각자 잠을 청한다.

“ 아, 요석오빠를 오늘 안 만났더라면 난 지금처럼 씩씩하지도 않고 자신있지도 못하고 징징 울며 투덜거리기만 했겠지. 오빠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일깨워 주었어. 새로 태어난 나는 씩씩하고 당차고 지혜롭고 햐 ! 뭔 일이 닥쳐도 겁내지 안을꺼야 ‘  

심장에서 따뜻한 체온이 모락모락 온몸으로 퍼지고 몸이 따뜻해지자  연신은 평정을 찾아 고요하게  잠이 든다.


과연 연신의 아버지는 살아 돌아오지도 못하면서 남은 가족들에게 엄청난 빚만 남 겨 주고 떠났다. 읍내 병원에서의 치료비는 새발에 피이고 서울 적십지 병원에 입원하여 열흘 간 치료받은 비용은 이 가족들에게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거금이었다. 그리고 그 곳서 곧장 홍제동  화장터로 옮겨져,  집으로 돌아온 건 흰  보자기에 싸인 유골상자였다.  물론 장례식도 절차대로 규모있게 치루어야 하겠지만 서울서 이 곳 까지 운구하는 비용이며 또 쌀독에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말간 집안 형편에 삼일장이니 묘지매입이니 모든게 감당이 전혀 안 되어 이렇게  약식이 된 것이다.

그래도 고마운 것이 이만석씨가 엄마 곁에서 모든 일을  도맡아   급전을 대주고  화장 아이디어나 절차를 밟아준 덕분이다. 덕분이라고 하기에는너무 야박한 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모르고 가진 것도 없이 우왕좌왕하며 울고 짜고 할 이 가족을 위해 이만큼 발 벗고 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말끔하게 처리해 준게 감사할 뿐이라 할 밖에.


아버지 곁에서 병수발하랴 , 화장터까지 쫒아다니며 애쓴 어머니는 거의 초죽음이 되어있다. 그래서 하룻 밤을 새우고  다음 날 이른 새벽,  세 남매만이  아버지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고 산길을 오른다. 이 오목한 동네에 살며 가장 높다고 생각되는 산봉우리를 목적지로 하여  올라가는 것이다.산길도 끊어지고 간간히 약초군이나 지날만한 험하고 먼 길을 돌아 올라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세 남매는 유골함을 향하여 엄숙하게 세 번 넙죽 절하고 그래도 맏아들이라고   동연이가 침착하게 함 뚜껑을 연다. 휘리릭 바람이 고운 회색의  가루를 휩쓸며 지나간다. 먼저 연신이가 맨 손에 유골가루를 한 줌 쥐고 바람결 따라 사르르 손을 편다. ‘ 아부지 저 세상에서 행복하게 잘 사시이소  ‘ 목이 꽉 차올라 맘 속으로만 중얼댄다. 동연도 한 줌 쥐어 바람에 날리며 코를 훌쩍인다. “ 아부지 죽어서나마 우리 가족들 좀 지켜주시고 도와주소 “ 퉁명스럽게 외친다.

“ 아부지 하늘나라에서 이젠 술 좀 작작 마시이소 “ 막내 정연이 악을 쓰듯 말한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가득 젖어있다. 셋은 서로 손을 잡고 주저앉아 마음껒 소리내어 엉엉 울어 버린다.

얼마 후 , 그들은 슬프고 허전한 마음으로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 온다. 그러나 산을 올라갈 때 보다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일이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이 번엔 어머니의 시름이 깊어간다.

“ 니 아부지 치료비랑 입원비, 기타 경비로 만석아재께 빌린 돈이 십이만 팔천 원 쯤 된데이. 이걸 어찌 갚아야 하것노 ? 물론 만석아재는 재촉은 안 하고 있지만서두, 그 집이 꽤 부자라카지만  그만큼 신세를 지고도 가만 있음 이게 사람짓이라 할꺼로 ? 어째야겠노? “

두 동생들은 벌써 입이 쑥 나오고 눈알을 부라린다. 다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쏟아질 판이다. 그들이 입을 열기 전 얼른 연신이 말한다.

“ 어무이 너무 걱정 마소.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것소 . 내 생각이 있으니께니. “

순간 엄마의 눈과 연신의 눈이 날카롭게 마주치며 챙 쇳소리가 들린다.

“ 앙이 된다. 택도 읎는 소리 생각도 마라 “  엄마는 홱 돌아 이불을 쓰고 누워 버린다.

사실, 이 만석씨는  몇 년 전 상처하고 어린 두 남매를 기르고 있는데 ,  작년 갈,  먼 친척 할매를 중간에 넣어  은근히 청혼을 한 일이 있었다. 열 여덟 연신과 거의 나이 두 배, 그리고 키워줘야 하는 어린 아이들, 아무리 그 사람됨이 덕망있고  살림이 윤택하다 하지만 안 될 일이라 하여 어매는  영신의 어린  나이를 핑게삼아 딱 자르고 더 이상 말도 못 꺼내게 하였다.

‘ 그가 우리에게 무한 호의를 보인 것은 빼도박도 못하는 함정이 깔려 있는게 아니것 나 ‘ 연신과 어매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조바심치게 만든 원인이다.

그러나 연신은 생각한다. ‘ 내가 우리 집 안의 살림밑천이다이 . 꽉 막힌 집안 형편에  열쇠 노릇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다행인가  ‘


내린 눈이 녹을 새도 없이 첩첩이 쌓이고 매운 바람이 얇은 스레이트 지붕과 흙벽을 핥듯이 유린하던 음울한 겨울이 지나갔다. 양지터에 햇살이 한결 상냥해지고, 앙상한 가지만 세찬 바람에 하느적대던 수양버들도  나날이 연두빛이 짙어가는  봄이다.

연신은 큰 맘 먹고 읍내로 나가 미장원에 들렀 다. 이제까지 손대지 않고 칠칠하게 길렀던 머리를 풀어내어  귀밑 단발로 쌍둥 자른다.

그 다음엔  옷가게에 들러 포기배추 속고갱이같은 노란빛 어린   연두색  불라우스, 그리고 깊은 바다 물색같은  군청색 주름치마를 산다. 아래 위 입어보고 ,  얼마전 아배를 여읜 상제로서의 처신을  벗어난 건 아닌가 곰곰히 들여다 본다. 그러나 앞 이마위로 가지런히 꼽은 조그만 흰빛 리본달린   실핀이 모든걸 한 눈에  정리해 준다.

며칠 후 읍내 한 다방에서 영신은 이 만석씨를 만났다.

“ 연신아 네가 웬 일이고 ? “ 먼저 와서 새초롬히  앉아있는 연신을 눈 부신듯 바라보며 만석씨는 싱글벙글 웃는다.

“ 아자씨 안녕하싯습니까? 바쁘신데 폐가 되는건 아닌지요 ?”

“ 내사 바쁘기는 뭐 --” 하는 이 만석씨는 사실 바쁜 시간에 매달린 사람은 아니다. 읍내 노른자위땅에  기다란 상가 건물은 세입자들에 의해 장사가 잘 되고 두둑한 보증금을 깔고 앉아 그 위에  매달 월세만 챙기면 된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고 있는 마을 금고, 여기도 주사 한 사람에 여직원 둘,  사환 한명으로  척척 잘 돌아가며 만석씨는 금고에 쌓인 돈의 출납과 사장으로서 직함으로 유지들과의 교류, 돈의 흐름을 잘 간파하며 적절하게 손을 쓰는 그런 일들을 시간 제약 없이 느긋하게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부동산으로 논마지기와 밭도 적잖이 소유하고 있으나 모두 소작인의 손에 부쳐 가을 추수만 관장하면 집안의 가용과  식량, 몫돈도  넉넉하게 충당되며 재산이 쌓여간다.

만석씨는 손목 시계를 들어 보이며  “ 아따, 점심시간이 됐네 그려, 어데 가서 식사나 하며 천천히 얘기하제 “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읍내 거리에서 제일 크다는 용궁각 중국요리집으로 앞서 들어간 만석씨는 반겨 맞는 뽀이에게 귓속말을 한다. “ 예이 예 ! 알겠슴다. 이리로 오시소 “ 안내된 방안은 밖의 소음이 완전 차단된 고요하고 말쑥한 방이다. 뽀이는 두툼한 비단 방석을 내놓으며 주문을 받는다.

사실 연신에게는 처음 와보는 무척 생소한 곳이다. 그러나 스스로 촌티내지 말자 , 기 죽을거 없어. 주문처럼 뇌이며 침착하게 방 안을 살핀다. 뽀이가 나가고 잠시 망설이던  연신은

“ 인사가 늦었십니다 ,  제 아배의 일을 잘 돌봐 주세서 고맙습내다. 아저씨 아니었으면 어쨋을까 아찔하구먼요.  정말 감사합니다.” 공손히 머리를 숙인다.그리고 만석씨가 대답도 하기 전에 말을 계속한다.

“ 요즘 어매가 걱정을 많이 하십니다. “  “ 머를 ? “ 만석씨가 눈을 치뜨며 묻는다.

“ 너무 많은 신세를 져서 이를 어찌 갚나 하고 말입니더. “

만석씨는 잔잔한 웃음을 띄우고 연신을 본다. 살집좋은 두툼한 얼굴에 코가 너부죽하여 연신에겐 천만 낯선 얼굴이다. 그러나 약간 아래로 쳐진 두리두리한 눈매는 사납지 않다.

또 연신이 먼저 입을 뗀다. 마치 신중하게 써놓은 원고를 달달 외어 그걸 까먹을까봐 성급하게 써내려가는 논술 시험지 같이.

“그래서  제가 생각했십니다. -- 제가  아제씨 집으로 들어가 살림을 살아주면 안 되겠습니꺼 ? “

마침 노크 소리가 들리고 주문한 요리가 몇 접시 들어 온다.  양파와 고기와 버섯을 넣어  볶은 화려한 색감의 음식, 거창한 기름냄새, 생전 첨 보는  요리며 냄새지만 이에는 전혀 신경 쓸 수  없는 연신.

만석씨도 이제까지 재미있다는듯이 웃음짓던 얼굴이 굳어진다.

“ 그 무슨 뜻이고 ? 네 살림 산다는 말의 의미나 알고 하는 말이가 ? “

연신은 눈 하나 깜짝않고 그를 마주 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고 칼로 그은듯 붉은 입술이 야무지다.  “ 제가 아아들의 엄마 노릇도 잘 하겠십니다. 제 두 동생들도 제가 키운거나 잔배없어 아아들을 잘 다룹니더. “

만석씨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연신을 바라보는 눈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 알았다  알았어, 네가 효녀 심청이맹쿠로  인당수로 뛰어드는구나.  “

한심하다는 듯, 비웃는듯 하는 그의 말에

‘ 아임니더, 그건 아이고요 제 하나로 여러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래는 맘 뿐입니다. 지도 행복하면 더 바랄 것두 없겠지만서두 “  

요건 원고지에 없던 말이다. 아직 원고지에 써 놓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불쑥 나온 말이다. 감히 내 행복을 꿈꾸다니. 또 원고지에 없던 돌발상황, 후두둑, 눈물이 떨어진다. 요건 전혀 계획에 없던 순서인데 감정의 통제가 안 된다. 후두둑 눈물 따라 흐느낌마져 따라 온다.

무너져 버렸다. 연신의 계획과 통제가 와락 무너져 버리고 열아홉 철부지 여자애의 여리고 겁나는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다. ‘ 다 망친게 아이가 ‘ 부끄러움과 실망으로 연신은 엉망진창에 빠져 그대로 엎드려 흐느낌에 맡겨버린다

“그라믄  네 행복은 내 책임이 되겠구마  “  의외에 그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린다. 어깨에 얹은   그의 두툼한 손도  느껴진다.  그가 곁으로 다가와 연신을 가볍게 안은 것이다.

“ 자자, 밥부터 먹자. 다 식는거 아이가 , 어서 먹자 “

그는 연신의 접시에 음식을 몇 가지 덜어준다. 한 번 더 어깨를 토닥이고 난 후 ,그는 몸을 일으켜 그의 자리로 들아가 천연스레 식사를 시작한다. 좋은 먹성이고 침착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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