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삼촌, 저는 그냥 여기 근처에 있는 근명 종합 기술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요.
졸업하면 외삼촌과 농사지으며 잘 모시고 살께요 “
요석이 서울 K중학교에 합격 통지를 받은 날, 요석은 외삼촌 부부 앞에 어려운 청을 한다.
그러나 외삼촌 부부의 대답은 단호하다.
“ 네 아버지와 어머니는 괴뢰군 앞에 예수 신앙을 지키려다 순교한 분들이다. 어린 너를 우리에게 밑기시며 너를 굳센 믿음의 자식으로 키워달라 부탁하셨어. 부모님의 소망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에게도 이런 특별한 임무가 있어 너를 평범하게 키울 수가 없구나.”
외삼촌의 엄격하고도 결단에 찬 음성, 그리고 외숙모님의 눈물 가득한 슬프고 간절한 시선,
요석은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다.
요석의 아버지는 시골 자그마한 개척 교회의 목사였다.
육이오 변란 때, 괴뢰군들은 이 작은 시골 마을까지 들어와 교회와 신자들을 박해했다. 그리고 끝까지 신앙을 지키며 오히려 그들을 회개시키려는 요석의 부모는 최고 악질 반동으로 몰려 깊은 산 속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미리 피신시켜 달아났던 외삼촌 부부의 덕분으로 생명을 지킨 요석의 나이 , 그 때, 겨우 다섯 살,
신앙 깊은 외삼촌 부부는 요석을 순교당한 부모의 아들로서 그 부모의 대를 잇는 신실한 교역자로 키우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이다.
요석이 서울 k 중학교와 K고등학교 6 년의 교육과정을 졸업하고 Y 대 신학대학에 무난히 합격된 뒤 요석은 다시 한 번 외삼촌 부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외삼촌, 저는 그냥 보통의 남자가 되어 외삼촌을 어버이로 섬기며 아내랑 아이들이랑 한 가정을 이루고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저는 특출난 인간이 아닙니다. 신학교 포기하겠습니다.”
그 동안 요석을 뒷바라지하느라 힘들게 농사지으며 살아 온 세월 속에 한결 늙고 초췌한 모습의 외삼촌 부부는 여전히 고개를 가로 흔들며 단호하게 답한다.
“ 요석아, 너는 한 두 인간, 가족만이 아니라, 세상에 많은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네 힘을 쏟아야 할 사명이 있다. 그걸 명심하고 거역하지 말아라. 그리고 네 모든 고민이나 걱정은 주 님께 맡겨라.하나님은 반드시 너와 함께 계시니 너를 잘 인도해 주실게다.”
요석은 언젠가 부터 기도가 낮설지 않다. 고요한 가운데 눈을 감고 높은 그 곳으로 정신을 집중하면 한없이 부드러운 기체가 자신을 감싸는듯 누군가의 따뜻한 숨결이 느껴진다. 신의 숨결일까? 하늘에서도 아들을 위해 신께 중보소망을 올리는 부모님의 숨결일까. 잘 모르지만 요석은 편안하다. 그래서 청춘의 회오리치는 욕망도 외로움도 느끼지 않고 십대를 공부와 독서와 사색으로 십대를 보냈다.
그런데 오늘의 기도는 특별히 간절하다.
‘ 하나님 , 저는 못나고 부족한 인간입니다. 주님의 사명이란게 저로선 두렵고 겁이 날 뿐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착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 아이들을 낳고 외삼촌 , 외숙모를 부모삼아 평범하고
건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소서. 응답해 주소서.’
젊은 요석의 기도는 마음 깊은 염원을 담고 있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다. 그러나 요석은 자신을 응시하는 슬프고 근심에 찬 깊은 시선을 온 감각 으로 느낀다. 따뜻한 에너지가 전해져
심장이 쩡하니 울린다. 요석은 가만히 한숨을 내어쉰다.
며칠 후 요석은 뒷산 얕으막한 빈터에서 연신을 기다린다 .
그 빈터는 웬만한 야구장 넓이로 한 편에는 나무로 만든 철봉틀, 그리고 역시 다듬지 않은 거친 나무로 만들어진 긴 의자 , 이곳은 이 마을에 아이들의 놀이터이고 어르신의 마실 터, 한여름 개를 잡아 보신탕을 추렴하기도 하는 마을 모두의 쉼터이다.
한 밤 어두울 땐 , 때로 젊은 청춘, 그들의 은밀한 밀회장소가 되기도 하는 곳.
아직 해는 지지 않았지만 석양이 멀지 않아 하늘은 연한 살구빛이다.
별로 변할 것 없는, 어렵고 궁색한 삶이였을 터이나 연신은 그럼에도 훌쩍 자라 호리호리한 몸매, 가느다란 종아리가 회초리처럼 날렵하고 탄탄하다.
이제 조금 더 석양이 짙어져 발그스레한 복숭아 빛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연신을 요석은 찬찬히 바라 본다.
까무잡잡한 얼굴이 매끄럽고 요석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가을 포도알처럼 깊게 빛을 빨아 들인다. 그리고 야무진 입술.
“ 연신아, 네가 많이 생각나더라,언제나 궁금하고 걱정되고 .”
“ 피이, 그짓말 마라. 그란데 편지 한 장 없었노? “연신은 옛날 도시락 같이 먹던 때 모양 허물없이 입을 비쭉한다.
“ 그러치만 네게 잡념이나 욕심을 품은 적은 없어, 다만 너를 언제나 항상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거기에 내 인생을 몽땅 바친다 해도,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을 때때로 했어. “
“ 오빠야 그기 뭔 소린고? 내도 오빠에게 아무 것도 바란게 읎다. “
“ 근데 내 외삼촌은 내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내 인생을 살라고 하신다. 그게 하나님이 내게 주 신 사명이라고. “
요석은 이제 해가 떨어져 서서히 부드러운 비둘기 빛으로 변해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하얗고 뾰죽한 옆 얼굴, 검은 눈은 한없는 걱정스러움과 우수를 담고 있어 연신과의 만남은 차라리 그의 또 다른 하나의 십자가이다.
연신은 애초 감히 요석 오빠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으젓하고 수재이고, 서울서도 최고의 학교를 다니며 마을 소문으로 그가 제일 훌륭한 신학대학에 진학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나 국민학교 때부터 각별한 친절과 이해로 더없이 다정하고 친했던 오빠. 너무 좋기만한 하늘에 별 같이 빛나는 요석 오빠.
“ 오빠야, 나는 누구의 보살핌을 받을 사람은 이니제. 오히려 내가 보살펴야 하는 내 가족이 있데이, 아버지도 이제 힘이 빠져 처량하게 누워 지낸데이. 어매와 난 우리 가족 사는 일에 보탬 이 된다면 무슨 일이고 열심히 한데이, 난 바쁘고 책임이 크니 난 내삐리 둬라.
그리고 오빠야, 난 잘 모르지만 오빠의 받은 바 사명을 잘 이루거라. “
연신은 비록 국민학교만을 졸업했으나,지난 6 년의 험하고 고달픈 세월이 스승이 되어 더더욱 어른스럽고 야무져 있다. 요석은 오히려 자신의 여리고 허약함을 느끼며 할 말을 잊는다.
요석은 연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보듬어 안으며
“ 정말 굳건하게 살아라, 정 어려울 땐 날 찾아 오너라.”
하고 등을 토닥인다.
그리고 속으로 다시 한 번 되뇌인다.
‘ 내가 사랑하여 지켜주고 싶은 한 가족, 나의 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