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뽀오얀 안개가 사방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다. 우유빛 기체는 자잘한 물기 머금어 무겁게 아래로 쳐지고 나뭇잎 풀잎에 이슬로 맺히며 또르르 또르르 굴러 내린다.

온 세상 소음은  안개가 모두 먹어치운 듯 적막하다. 풀벌레들의 기척도 찾을  수 없다.

발 밑 삼 사미터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가시거리에, 새로 밀어낸 신작로의 하얀 흙과 자갈이 습기로 차분하여  한낮 땡볕 아래 그 뽀얀 흙먼지는 비현실적인 기억이다.


언뜻 멀리에서 부터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 온다. 자박자박 가벼운 발자국 소리도 들린다.

계속 재잘대는 쪽은 어린 여자아이, 그리고 가끔 짤막한 댓구로 응수하는 사내아이. 차츰 목소리가 가까워지며  등교하는 초등학생 두 아이의 모습이 안개 속에 윤곽부터 서서히  드러난다.

“오빠야  니 오늘 점심밥 건건이는 뭐꼬 ? “ 묻는 여자아이.

“ 응 외숙모님이 싸주시는 대로 들고 나와서  나도 모 르겠는데.” 남자 아이는 싱겁게 대꾸하고

“ 너 오늘 밥만 싸왔구나, 점심시간에 느티나무 아래로 나와. 같이 밥 먹자” 부드럽게 말한다.

남자아이는 까까중 머리에 책보자기를 왼쪽 어깨부터 오른 쪽 허리께에 비스듬이 둘러 묶고 여자아이는 책보자기를 허리에 감았다. 그리고 손에 들린  작은 베보자기 보퉁이에는 소중한 점심 밥이 들어있다.

요석은 어젯 밤에도  바로 뒷집 사는 연신이 집에서 일어난 소동을 알고 있다. 번번히 일어나는 소동이라 놀랄 것도 없다 .  그건 연심의 아버지가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늦은 저녁상에 둘러 앉아 먹는 자기 식구들의 밥상을 뒤엎고  잡아 족치는 것이다.

그 바람에 연신이와 엄마, 어린 두 남동생들은 밥도 다 먹지 못한채  구석에 오그려 공포에 떨다 그대로  잠 들어버린다는 것도 요석은  사진을 보듯 훤히 안다.

연신이는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저녁 내동댕이 쳐져 흐트러진 밥알을 대충 모아서  밥그릇에 담아 왔다는 말을 장황하게 하지만 듣는 요석은 가슴 속에 뜨겁게 차오르는 연민을 차마 말하지 않는다.

외삼촌과  외숙모도 그 소동을 들으며 탄식 하시지 않던가

‘ 저 한서방이  어서 회개하고 교회에 나와야 저 집 식구들이 살아날텐데, ‘

“ 그러니 여보 저 가족들  구원을 위해 우리 더 열심히 기도 합시다”

요석은 외삼촌 부부의 두런거림을 들으며 연신을 걱정하며 힘들게 잠을 청했다.


학교 뒷편의 그늘진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아이들은 운동장에 모여 노느라,  여긴 조용하고 웅숭깊다.

요석이 기다린지 얼마 안되 연신이 통통 뛰어 온다. 두 손으로는 점심 밥 그릇을 감싸듯 들고서.

요석은 자기 점심 보자기를 끌러낸다. 밥주발과 따로이 싼 벤또에는 계란말이 , 멸치볶음, 그리고 무장아찌도 들어 있다. 연심이는 얼른 무짱아찌를 집어들어 이 세상 더 없이 맛있는 음식처럼 아삭아삭 먹성 좋게  씹는다.

“요석이 오빠야, 난 오빠가 있어 참 좋아 “

“ 연신아 이 계란말이와 멸치 볶음도 먹어,  많이 먹어.”

둘이는 각자 싸온 점심밥을 맛있게 먹는다. 물론 연신은 오빠의 반찬을 실례하고 있지만 망설임이나 거리낌은 별로 없다.

요석은 잠시 먹는 일에 열중한 연신을 본다. 볼살이 통통한 연신은 이제 사학년이고 집에 가면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하여 동생들을 돌봐주고 저녁밥도 해내느라 손은 어린애답지 않게  거칠고 뻣뻣하다.

요석은 문득 가여음과 귀엽고  사랑스런 느낌이 벅차게  목으로 차오른다. 언제까지나 자신이 연신에 곁에 있어 연신이 배곯지 않고  편하게 살도록 지켜주고  싶다는 성숙한 생각을 해 본다..

“ 요석이 오빠야, 내년이면 니 졸업이네. 상급핵교 진학은 준비하고 있나?”

열심히 밥을 퍼 먹던 영신이 문득 생각난 듯  묻는다.

“ 물론 그러제, 외삼촌과 외숙모님은  내를 서울 핵교로 보낼려고 하신다.”



“ 니 공부 잘 하나, 서울은 되기힘들다든디”

“ 그러나 마나, 그건 걱정 없데이 . 그란디 -- “

“ 그란디, 뭐?”

요석이 마냥 머믓댄다. 요석은 연신을 두고 떠난다는게 너무 믿업지가 않다. 술주정꾼인 아버지 밑에 가난한 살림, 그리고 두 어린 동생의 큰 언니, 연신의 짐이 너무 애처러워 요석은 차마 떠난다는 말이 쉽지 않다.

‘ 연신아, 너 마음 굳게 먹고 살아야 한다. ‘

눈을 호둥그레 뜨는 연신을 바라보며 요석 혼자 입 안으로 중얼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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