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장생도를 찾아서 >
그가 떠난다고 한다. 카운터 미스 손이 무심코 전해준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가득히 부풀어 올랐던 만조가 썰물되어 빠져나가듯 마음이 휑해지고 눈 앞이 아득하더니 그대로 어두워 진다.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더 내 자신의 두 가지 약점을 확인한다. 하나는 내 자신의 허약함과 어수룩함. 그리고 허락없이 들어와 자리잡은 그의 존재. 내가 즉시 겪는 이 무너질 듯한 소멸감, 이 모자라는 내 자신에 연민으로 남 모르게 혀를 끌끌 찬다. 그가 일하고 있는 앞 쪽 프레스 대를 본다.땀으로 젖은 등판이 쩔어있어도 여전히 꼿꼿이 선 자세를 유지한 채 푹푹 스팀을 내뿜으며 자켓을 다리고 있다. 빠르고 익숙한 솜씨는 아니지만 꾸준하게 꼼꼼하고 신중하게 일하는 그의 모습은 주인도 호감을 갖고 있었다. 주인이 먼저 자르는 건 아닐텐데 그가 이 곳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이 손에 안 잡힌 채 하루가 엉뚱쌩뚱 지나고 그가 모든 직원들과 작별의 악수를 나누는 것을 보며 나는 먼저 주차장으로 향했다. 낯 익은 그의 검은 색 랜드로바 뒷 쪽으로 몸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오랜만에 보는 듯 낮설게 다가오는 하늘은 아직 한 낯의 더위를 품은채 대지와 함께 지글지글 끓고 있다.해가질려면 한참을 더 있어야 하는기인 여름 오후의 한나절.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보인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누군가 ‘ 이젠 뭐 하실려구요 ? 하는 물음에 우선 천천히 여행이나 할겁니다.’ 하는 그의 말과 ‘ 우와! 팔자 좋으십니다.여행 좋지요’하는약간의 선망과 질투의 분위기에 당황한 듯 상기되었던 그의 얼굴이 이젠 창백하도록 굳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그가 나를 보고도 아직 내면의 생각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채, 느린 반응으로 겨우 “ 설란 씨, “ 하며 몽롱하게 바라 본다. “ 네, 좀 의논드릴 일이 있어 얘기 좀 하려구요.”
하지만 아이스티가 가득 든 컾에 물기가 흘러 컵 받침에 물이 흥건이 고일 때까지도 피차 아무 말도 없다. 다만 흐르는 음악 속에 각자 생각에 깊이 잠겨있을 뿐.
![정물.jpg 정물.jpg](http://blog.chosun.com/web_file/blog/398/16898/2/20140726_122712_acf32bad9db4f34b6b7c7deddaa78127.jpg)
< 정물 >
설란은 할 말이 있다고 했으나 그게 무언지 곰곰 생각하고 설란이 떠나보내기 감당이 안 되었던 그는 낮으막한 음악이 흐르는 허공 그 어디 쯤인지에 멈추어 있을 뿐. 그들에겐 서서히 저물어 가는 여름 한 날에 대한 , 또 쉬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의 움직임도 전혀 관심없이 온 우주 공간에 단 둘만이 표류하고 있는 듯 그렇게 멍하니 서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간이 무척이나 아늑하고 편안했다. 그대로 영원으로 지속된다 할찌라도 좋을 정도로.
" 십장생을 아시나요?" 오랜 침묵을 깨고 설란이 불쑥 물었다. " 자면물 속에서 영원한 해나 달, 물 돌, 구름, 또 생명이 있는 모든 것 중에서도 장수한다고 생각하는 거북이나 소나무 불노초라고 하는 영지 버섯 등 등 따지고 보면 열 가지가 넘지요. 그 모든 걸 십장생 안에 포함하였지요." 그는 막힘없이 말한다. " 네, 난 조상님들의 그런 여유가 좋아요. 언제나 가감해도 그렇게 크게 바뀌지 않는 테두리 말이얘요.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조상들의 순박한 꿈도 볼 수 있어 좋지 않은가요? 영생불사의 형상들을 생활 주변에 가까이 놓고 건강한 장수를 기원하는 소망이요." " 건강한 장수---- " 문득 그가 되뇌이며 입가를 비틀어 시니컬하게 웃는다. " 어머! 미안해요, 내가 뭐 잘 못 말한건가요? " 아니, 아니 아닙니다 . 다만 내가 좀 딴 생각을 하느라고 아, 내가 미안해요." 강하게 부인하는 그에게 설란은 이제 핵심을 꺼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정면을응시한다. 지치고 공허한 그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더 피곤하고 늙어 보였으나 그의 눈은 설란을 향해 따뜻하게 웃고 있다.
" 나는 그런 간절한 꿈을 지닌 한 사람을 알고 있어요. 그 사람은 바로 나의 외삼촌이얘요. ' 건강한 장수’를 별로 의식하지 않던 젊은 시절 1970 년 대, 외삼촌은 정말 별 고생 다 하면서 돈을 벌었어요. 정말 아메리칸 드림이 현실이 될 수 있던 때였지요. 외삼촌의 부자가 되고 싶다는 꿈은 어느 만큼 이루어졌어요. 그러나 너무 거기에만 몰두하다 보니 인생에서의 다른 면은 온통 부실함 뿐이얘요.가정이란 조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리고 나이가 들며 몸이 무너지고 그리고 지금 가진거라고는 돈 밖에 없는 , 그리고 머리 속에 그리는 꿈과 소망과 염원만으로 지탱하는 가엾은 분이 되셨어요. " 꿈과 소망과 염원을 갖고 계시다구요? " 그가 놀랍다는 듯 반문한다. " 외삼촌의 뚝심은 굉장하세요.뭔가 하고자 하는 목표가 생기면 끝까지 밀어부치고 이루어 내는 힘,그게 그 분의 인생을 지배했지요. 그 분이 삼 년 전 폐암에 걸린 것을 알았을때, 그 스스로 말년에 안주할 이상적인 멋진 집을 계획하셨어요. 알아요. 말년을 안주하기는 너무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요, 근데 이상한게 뭔가 꼭 해야만 할 일이 있다는 신념 앞엔 죽음도 다가오지 못하나 봐요.아직 일을 하고 계시다니까요. 그러나 이제 집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며 우리 외삼촌은 다시 기력이 떨어져 가고 있어요. 저는 겁이 나요..집이 다 완성되면 아마 몸져 누우실 거 같애서요. 설란은 아이스티를 미신다. 외삼촌의 실의, 아픔을 생각하면 갈증, 입이 마르며 그래서 설란은 얼음이 다 녹아 홍차의 맛이 희미하게 남은 아이스티를 마신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실내가 더욱 밝은 조명으로 빛나며 , 조금 더 사람들로 북적인다. 내일이면 떠나 먼 거리로 흘러갈 사람에게 외삼촌 이야기라니, 참 나도 싱겁고 우습다.라고 생각하며 그를 보니 그는 전혀 정색하고 호기심으로 진지하게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다. " 부탁이 있어요. " 설란은 딱 끊어서 용건을 말한다. " 외삼촌의 새로 지은 집에 아직 빈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는 십장생도가 들어 갈 거실의 한 벽면이얘요. 외삼촌은 그 곳에 꼭 십장생도를 그리고 싶어 화가를 백방으로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데를 몰라 지금도 비어 있어요. 우리 외삼촌의 간절한 염원을 위해 십장생도를 그려 주세요. 당신이라면 훌륭하게 해 주시리라 믿어 부탁드리는 거얘요". " 아! 그거였군요."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너무 뜻밖에 엉뚱한 부탁임에도 놀라거나 거부의 몸짓이 아닌 따뜻한 미소 속에는 인간에 대한 근원적이고 폭 넓은 이해와 긍정이 설란의 마음을 또 다시 설레게 하고 있다. " 그럼 가능한 방향으로 잘 생각하시고 꼭 연락 주세요." 하며 일어서는 설란은 결코 이것이 마지막은 아니라는 믿음으로 가볍게 작별 인사를 고한다.
마치 미루었던 숙제를 다 해낸 어린 학생처럼 팔랑 팔랑 가볍게 걸어가는 설란의 뒷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천천히 주차장으로 가며 인생의 갑작스런 변수에 머리를 흔든다.우선 내일 일찍 출발하려던 여행을 미루고, 그리고 마무리하려던 모든 일을 일단 중지하고 그리고 십장생도를 연구해 봐야겠다. 정말 좋은 소재이고 좋은 의미이고 그리고아름다운 조화와 형상, 그리하여 한 번 몰두해 볼 만한 그런 기회 아닌가. 그거보다 더 중요한 건 아직 그가 세상에 남아 할 일이 있다는게 무척이나 가슴에 벅차고 뜨거워 지는게 아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