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니의 비탄 >

엄마한테는  미안해요. 그런데 나 이 세상 살기 싫어졌어. 사는게 무서워. 사람들이 무서워. 무서운 이 세상에서, 이 삶에서 도망가고 싶었어.

알아요 엄마, 엄마가 나를 얼마나 극진한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고 언제나 부족한 것 없이  챙겨 주시는 것 알아요. 그렇지만 엄마, 엄마가 내 인생 대신 살아 줄  수  없어요.

나한테는 나름대로   살아가는데 부딪치는 여러 어려움이 있어요. 그건 누구에게 미룰 수 없는 나만이 겪고 내가 그 결말에 책임져야 하는 그런 일 들 말얘요. 난 여지껒 그런 어려운 일들이 있어도  별 망설임이나 두려움 없이 잘 헤쳐왔어요.  그 결과도 괜찮았구요. 그런데 살아가며 사람으로 인해 부딪치는 일이 제일 어렵고 두려운 걸 알았어요. 앞으로도 나는 인간이기에 사람 속에 섞여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건대,나  자신이 없어졌어요.

케빈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대학 들어가자, 처음 만나면서 부터  늘 내게 친절하게 잘 해 주고 늘 곁에 있으니  나도 모르는 새 그를 믿고 많이 기댔나 봐요.

그가 나를 떠났다고 생각하니 내 존재가 갑자기 텅 비어 허무한 비누방울 같더라구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져 공중으로 올라가다 탁 터질 일만 남은 비누방울 말이얘요.

나 여지껒 살며 물론 엄마의 도움도 컷지만 누구한테도 지면서 산 적 없잖아요?  내 라이벌이며 반드시 이겨야 할 적수, 수아는 그래도 대결해 볼만한 대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애는 예쁘고 발랄하고  부러울게  없이 다 갖추었다지만 공부는 나만 못 하잖아요? 좋은 성적으로 좋은 대학을 다니고 또 더하여 멋진 남자애를 사귄다면 수아 부러울 거 없다고 자부했어요. 잘 생기고 가문 잘 나가는 사람 거기다 나만을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한다면 난 단숨에 상류 사회로 수직 상승하여 수아 따윈 얼마든지 무시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엄마, 왜 하필이면 수아냐구요? 캐빈이 맘 변하게 된 건 수아 때문이라구요. 수아가 캐빈을 빼앗아 간거얘요.  난 수아와 친척이잖아요? 그들에게  즐겁게, 행복하게 살라고 축복해 줄 수 없잖아요? 그들이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것 난 곁에서 지켜 볼 자신이 없어요. 엄마 미안해요. 이런 내가 무척 경박하고 경솔하고 유치하여 실망스러우신가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나를 어리석다고 비웃어도 이게 나의 진심이얘요. 나는 공부도 잘하고  친구도 많고 활발하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 난 이렇게 단 한 사람 때문에 어이없이 무너지는  단순 경박 유치한 애얘요. 난 앞으로 살 자신이 없어요.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시지 그랬어요 ? 다시 살아났다 해도  그냥 암담하기만 한 걸요. 난 앞으로 어떻게 살라구요?

딸에게서 살고 싶지 않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가? 차라리 나를 낳지 말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하는 원망을 듣는 부모의 마음은 어떤가. 인생 초보 애니가  하고 하필이면 그 애인을 사촌에게 뺏겨 생전 곁에서 그 꼴 보고 살 수 없다는 딸 애니의 통곡을 들으며 나는 그냥 심장이 얼음 속에 담궈진 것처럼 저릴 뿐이었다.

사실 나는 수아를 없애겠다는 생각은 애초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다만 의논을 하고 싶었다. 사촌끼리 그러면 안 되지. 남자 친구도 중요하지만 친척이기도 한 애니에게 그토록 상처를 주면 안 되지. 그런 의논 아닌 하소연을 해 볼 생각이었다.

애니를 생각해서 너도 캐빈에게서 멀어지라고, 그 따위 이리 저리 마음 옮겨 다니는 가벼운 놈이라면 너도 언젠가 애니처럼 당할지도 모른다는 말까지 나왔을 때, 수아는 차갑게 웃었다

“’외숙모 저를 애니와 비교하지 마세요. 애니와 나는 차원이 달라요. 애니는 그 수준에서 어울리는 사람과 사귀라고 하세요. “

수아는 내친 김에 할 말은 다 하겠다는 듯, 새촘하게 눈을 흘기며

“한꺼 번에 너무 많은 것을 가지려 욕심으로 똘똘 뭉친 외숙모 식구들, 질리고 역겨워요.”


아, 그 말을 듣자 내 이성은 사고를 멈추고 작동이 멈춘 내 브레인 속에는 낯선 한 마리 악마가 들어섰다. 나는 분명코 그 곳에 없었다. 악마가 내 육신을 빌려 모든 걸 휘두른 것이다. 나는 악마에 의해 땅 끝까지, 지옥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 시원하고 부드러운 밤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며  담담하고 침착하게 그 집을 나왔다. 악마는 떠나고 나의 행위만 처절하게 남은 그 집을.

수아를 화장하여 그 유골을 납골당에 안치하고 온 날 저녁

남편과 길버트, 딸 애니까지 온 식구가 한 자리에 모였다.

두 밤 세 날이 마치 긴 세월이었던 듯, 오래만에 만난 낮선 가족인듯,  피곤하고 시무룩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남편도 눈길을 피해 세운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다. 사람이 너무 순하니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자기 목소리 한 번 딱 부러지게  내지 못하고 언제나 양보만 해 오며 살아 온  착한 남편, 뭔가  불안감을 느끼나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속만 끓이는 그의 속이 훤히 보인다.감싸고 있는 침묵이 너무 버거운 양 길버트가 말문을 열었다.


“ 엄마 도대체 왜 그런  큰 일을 저지르셨어요 ? “

“ 길벗 너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단정 짓는거야? 왜 까발리지 못해 안달이야?”

애니가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엄마를 향해

“ 엄마가 아니지요? 길버트가 잘 못 안거죠 ? 엄마가 그랬을 리 없어. 엄마 아니라고 해요. 설마 엄마는 아니얘요.”

 남편도 그제사 얼굴을 들고 반평생 살아오며 유일했던 조력자 의지했던 사람, 사랑하는 아내를 바라 보았다.

“ 사실이요 ?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설마 당신이 할 수 있단 말이요 ? “

또 다시 한 참 동안의 긴장된 침묵이 지난 후 길버트가 단언하듯  말했다. “ 엄마 낼 변호사를 찾아 의논하고 함께 자수하러 가시지요. 그래야 엄마가 편해지세요. 엄마 그렇게 하세요.” 나는 한숨을 쉬며 매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 그러자꾸나. 나도 할 말이 많을 듯 하구나. “

아직 낮게 훌쩍이던 애니는 다시 사나운 울음을 터트리고 남편은 창백한 얼굴을 천정으로 향한다.

무겁고 괴로운 방 안 분위기를 뒤로 한 채 나는 조용히  방을 나왔다

찬물 한 잔으로 바짝 마른 입을 추기고 창가에 서서 하늘을 본다.

이제 와서 수아가 뱉어낸 독한 말을 원망해야 무슨 소용인가. 그 애는 가고 ,그 결과 업보를 등에 걸머진 나만 남지 않았나. 아 내가 지키려던 나의 가정 나의 아들,딸, 함께 사이좋게 늙어갈 남편까지 모두 이렇게 멀어지는 게 아닌가. 다시 한 번 더 올라오는 한숨을 가만이 눌러 삼키며 맑은 밤하늘에 천진하게 반짝이는 몇 개의 먼 별을 바라 본다.

우화의 강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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