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경이 등교하는 길,

외삼촌 병원을 나서면 ㄷ읍을 가로지르는 큰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5 분 쯤 걷다 외돌아

병목안 마을로 들어서는 작은길, 여기엔 차 두 대가 겨우 스칠 정도로 좁다. 포장도 안되어

차라도 한 대 지나가면 온통 흙먼지가 풀썩거리고  분가루처럼 뽀얗게 내려 앉는다.해서 하경은 다시  옆 길 농로 쪽으로 길을 바꾼다.

왼 쪽으로는 콩밭이나 배추밭이 널려있고 바른 쪽엔 작은 농수로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그 너머엔 좁다란 두렁을 낀 드넓은 논들이 있어 하경은 이 곳에 들어서면 우선 콧구멍을 넓히고 입을 벌려 심호흡을 한다. 푸른 논을 휩쓸고 온 푸른 바람, 풀냄새가 가득하다. 그러나 지금은 가을 하고도 끝자락 . 벌판은 이미 밭걷이가 끝나  텅비어 썰렁하다, 길가 남은 풀마저도 하얀 서리로 잔뜩 시들어 있다. 그런데 오늘 하경은  그 풍경들이 눈에도   맘에도  깊이 들어오지 않는다.그녀는 젖은 풀로 인해 축축한 운동화의 발끝을 보며 묵묵히 걷는다.새들도 아직 서두르는 기척없이 사방이  고요하다. 하경은어젯 밤 늦도록 읽은 에밀리 브론테의 <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 > 소설의 충격적인 여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랑은 당연히 달콤하고 아름답고 설레고, 어린 소녀라면 누구나 갖고 싶은 로망이다. 그러나 히스클립과 케서린의 야릇한 관계, 사랑이란 감정으로 벌이는 집착과  질투,그래서 벌어지는 광적인 히스클립의 악행.그래서 그가 사랑하는 케서린을 짓밟고 괴롭히고  또 스스로도 자멸해 나가는 스토리에   하경은 적쟎이 놀란다.

심지어 죽어 장사지낸 케서린의 무덤을 파혜쳐 시체를  꺼내  포옹하는 히스크립의 깊은 슬픔, 어두운 열정.  케서린의 영혼마져 그 광경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모습은  하경도 연민으로 가슴 저며 한숨지으며 그를 미워할 수 없는 묘한 감동을 느낀다. 배신감과 질투, 복수심으로 갈등하던 그들이 비로소 죽음의 저 너머에서   행복하게 손을 잡고 히스꽃 가득한 워더링 하이츠 초원을 거닐고 있을까., 열정으로 인하여 스스로 산화되는 사랑,  캐서린과 히스클립이 싦과 죽음을 넘나들며며, 끝내는 영혼으로 화합하는 그들의 사랑에 징글징글하면서도 그 끈끈하게 빠져드는  늪 같은 사랑이 이렇게 마음에 긴 여운으로 남다니 .


하경은 생각에 골돌한 채 학교에 당도했다.

짝꿍 영희,  한 쪽 눈을 안대로 가렸다. 다른 한 눈 마져 퉁퉁 부어 한 2 미리 정도 밖에 열려있지 않다. “ 영희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 늘 명랑하고 솔직한 영희, 오늘은 아무말 없이 얼굴을 책상 위에 박는다. 그리고 또 쿨적인다. 하경은 가만히 영희의 등을 토닥여 준다.


좀 잘 통한다 생각한대로 영희와 반장 김혁제는 사귀고 있었다. 혁제는 영희를 보호하고 영희는 그를 오빠처럼 의지하고, 가끔 만나 어른들처럼 데이트도 하고,- 이 말을 영희한테 직접 듣고 하경은 못마땅하여 눈꼬리가 찢어지도록 영희를 흘겨 봤다. -

그런데 어제, 혁제가 늦도록 붙잡고 집에 보내지를 않았다는거다. 여관업을 하는 영희네는 그 곳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   혁제도 그런 의도를 갖고 있다는 데에 짐작이 가자 영희는 너무 화가 나고 혐오스러워 강력하게 반항했다.

어느 뒷골목 으슥하고 허름한 여관까지 끌려간 영희. 방 안으로  떠밀리는 순간 이건 아니다 싶어  와락 뛰쳐나오며 소리를 질렀다. 곧  그 조그만 공간에 호떡집에 불 난듯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사방에서 질타하고 투덜대는 소란 속에 영희는 밖으로 줄행랑을 쳤단다. 도망쳐 한숨 돌리려는 순간에 곧바로 따라온 혁제가 “ 계집애 건방지고 재수없어 “ 하며 한 방 쳤다는 것이다. 한 방 맞은 것이 하필 눈두덩을 맞아 밤탱이처럼 부어터져 안대를 했단다. 그리고 아픈 것 보다 혁제의 무식하고 불량한 태도가 너무 실망스럽고 분해서 밤새 울었다고,

“ 야 그 자식 깡패라는 것 너도 잘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 무슨 실망?” 하경의 눈이 더욱 째지고 하얗게 흘긴다. “ 하경아, 그 오빠, 나한테 너무 잘 해줘서 그런 사실을 깜빡했어. 나한테만은 천사 같았어” “ 천사 ? 미안하지만 나 웃을께, 우하하하 “ 그러나 영희는 하경의 빈정댐을 고까워하지도 않고 또 눈물을 글썽인다.  “ 난 아버지나 오빠같은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없쟎아 ,  혁제 오빠가 내 든든한 빽이었어. 내게 다정했고 내가 해달라는 건 모두 군말없이 해 주고, 그래서 내가 철없이 너무 의지했었나 봐.” 이제 하경은 더 이상 웃지 않는다. 좀 전에 웃었던게 미안스럽다.  “ 영희야, 네 말 들으니 이해할 만 해. 그래, 그럴 수 있어. 근데 네가 어젯 밤 용감하게 박차고 뛰어나온 건 정말  잘했어. 근데. 왜 맞기만 했니? 너도 한 대 치지” 하경이 다시 도전적으로 눈을 치뜬다.  “ 왜 내가 맞기만 했겠니? 쪼인트 한 대 깟다.쎄게 쳤는지 오빠가 주저앉는 동안에 냅다 뛰어 집에 왔다.” “ 잘 했어 영희야, 영희는 용감해.”


그 날 혁제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어젯 밤 과음을 했는지, 아님 영희 보기 쪽 팔렸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안 보니 안심이다. 하경은 이상하게 영희의 보호자라도 된 것 처럼 치떨리고 어떻게 해결할 건가를 심각하게 고민한다. ‘ 이 자식을 어떻게 엿 먹이지?


외시촌 큰 언니는 직장 때문에 서울에 가 있어 언니의 빈 방을 뒤져 본다.. 플리츠 스커트에 화려한 꽃무늬 실크 불라우스를 골라 입고 머리를  스트레이트로 풀어 내린다. 그리고 입술에 연한 색 루즈도 발라 본다.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며 등신대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본다.갸름한 얼굴에 찰랑찰랑 긴 머리, 호리호리한 몸매, 성숙하고 세련되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한다.


그리고 그가 항상 죽치고 있다는 K당구장을 찾아 간다. 정말 낯선 곳이다. 우선 담배냄새가 지독하고 흘금흘금 쳐다보는 낯선 눈길들, 그걸 감당하기 벅차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 카운터 언니에게 김혁제를 찾는다고 말한다.  < 김혁제 >를 되뇌이는 눈이 어느 지점을 바라본다. 그 곳에 그가 있다. 불길하게 창백하고  하얀 얼굴, 찢어진 사나운 눈, 매부리의 코, 어깨는 딱 바라지고 다리는 땅딸막하다.  영희가 좋다는 사람, 아, 난 이해 못해, 하필 저런 놈을--

“ 여긴 웬 일이냐?”  벌써 혁제가 눈 앞에 와 있다. 혁제는 기분 나쁘게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하경의 아래 위를 훑어 본다.  “ 오빠 어디 가서 얘기 좀 할까?” 하경은 이미 후회하고 있다. 이 골치 아픈 와중에 내가 왜 드리대고 있느냐 이거다. 그러나 이왕 엎질어진 물, 앞으로 가.


하경에게 다방은 처음이다. 혁제가 앞장 서 들어 온 다방, 그는 익숙하게 턱으로 레지를 불러 차주문을 시킨다. “ 넌 뭘로 할래?” “ 응, 응 아무거나 “ 혁제는 피식 웃으며 “ 카피 둘 “ 한다. 다방 안은 낮으막한 라이트 팝이 흐르고 조용하다. 커피가 날라오고 혁제는  다리를 벌리고 등을 기대  여유부리며 앉는다. 하경도 일단 다리를 꼬아 본다. 짧막한 치마가 더욱 올라가 무릎 위 넓적 다리가 살짜기 들어난다. 하경은  손수건을 꺼내  드러난 다리 위에 살그머니 얹는다. 혁제가 또 씨익 웃는다. 하경은 품위를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순간 속이 확 뒤집힌다.

“ 난 영희의 친구얘요. 내겐 영희가 소중해요 그래서 얘기 좀 하려구요”  갑자기 튀어나온 영희라는 이름에 혁제는 뜨악한 표정이다.  “ 영희를 사랑하는 거얘요? 아니면 소유하고 싶은 거얘요?” 당돌한 질문이 혁제에겐 대답하기 너무 곤란한듯 하다. 해서 화부터 낸다. “ 야. 너 ㅈ만한 계집애가 뭘 알고 싶은데” “ 영희는 이제 겨우 15 살이야,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영희를 유린한다면 넌 짐승이야, 그러나 기특하게도 사랑을 한다면 이래선 안 돼지. “ 하경 , 별로 맘에 외워 둔 말도 없건만 이렇게 말이 술술 나올 줄이야. 그리고 두려운 존재 혁제에게 설교조의 반말 까지.

아니나 다를까, 눈 앞이 번쩍하며 뺨을 한 대 맞는다. 눈 앞에 잔뜩 인상을 쓴  혁제 얼굴만 가득하다. “ 영희는 너를 다만 보호자나 오빠처럼 믿었단다. 그런 영희를 넌 짓밟고 싶냐? 영희의 앞 날을 네가 책임져 줄래? “ 이왕 시작한 거 하경은 나오는대로 씹어 뱉는다.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뺨을 한 손으로 감싸안으며 하경은 분노에 찬 눈으로 혁제를 쏘아 본다.  다방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다방 안 여왕벌 같은 마담과  레지 아가씨가  당황하며 다가온다. “ 잘 들어 둬라, 히스크립처럼 이기적이고 심술궂고 집착하면 네 인생이 다쳐!” 혁제는 하경의 손을 잡아 끌고 밖으로 나온다.

“ 나 창피해서, 이런 ㅈ만한 계집애들이 나를 우습게 보네, 너 나한테 뒤져 볼래?” 혁제는 주먹을 불끈쥐어 높이 쳐든다. 바깥의 싸늘한 바람이 하경의 얼굴에서 흥분과 열기를 거둔다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찾아  부드럽고 침착하게 말한다.

“ 오빠, 영희의 인생도 귀중한거야. 우선 그것을 존중해 줄 때, 오빠도 인간 대접을 받는거야.”

혁제는 하경을 역겨운 표정으로 째여보다 그녀를 밀어 제치고  뒤돌아 터덜터덜 가 버린다.

거리에 하경 혼자만 남았을 때, 비로소 그녀는 정신을 차린다. 내가 뭔 짓을 한거지? 내 오지랖, 내가 감당이나 될까. 얻어맞아 화끈대는  뺨을 다시 손으로 살짝 감싼다.맞은건 억울하지 않다. 아마 내 말펀치가 그를 더욱 아프게 깟을테니.


연말이 다가오는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요란하고 각종 상점에는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과 선물용 상품, 그리고 반짝이로 치장한 예쁜 카드들이 눈과 귀를 유혹한다. 기말고사도 끝났겠다, 짝패들은 다시 읍내 번화가로 나와 거리를 어슬렁거린다. 각자 누군가를 머릿 속에 그리며 팬시 상품울 만자작거리고 또는 문방구에 들어가 여러가지로 반짝이는 카드를 고르기도 한다. 대개는 가벼운 학생들의 주머니를 감안한 조악하고 값싼 물건들이지만 어린 소녀들의 부푼 가슴을 들썩이게 하는데는 부족함이 없다. 한참을 쏘다닌 짝패들은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픈데, 시장통 안 만두집의 유혹을 무심히 지나칠 수 없다. 출입구 앞 거리에 커다란 찜가마솥을 놓고 언제나 김을 폴폴 풍기며 만두나 찐방을 푸짐하게 만들어 수북하게 쌓아 놓은 그 집을 참새가 방아간을 그냥 지나갈 수 없듯이  우르르 들어간다.

꼬질꼬질한 테이블이 몇 개 놓인 가게안에선 시큼한 빙초산식초 냄새가 배어 있다. “ 아줌마 빵하구 만두 10 인분 주세요.” 식욕 왕성한 정옥순이 거의 두 배를 주문한다.” 난 일인분만 먹고 일인분 값만 낼꺼야. 소심쟁이 순애, 미리 못 박는다. “ 걱정 마 모자라는 몫은 내가 내 주마” 역시 통 큰 이광순 여유 부린다. 찐빵과 만두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간장에 식초를 타서 와리바시로 콕콕 찍어먹거나, 단무지를 아삭아삭 씹어대며 느려터진 아줌마의 넓은 등짝에 눈총을 쏘아댄다.

“ 우리 이번 크리스마스 올라이트하자. “ 점순이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꺼낸다. “ 올라이트가 뭐야?” 서울 촌놈 하경은 어리둥절 한다. “ 남자 여자 아이들 모여 밤새도록 노는거다. “ 뭘 하고 놀지?  어디에서 ? 아직 알고 싶은게 많은 하경을 앞지르며,  순애가 김을 뺀다.” 난 교회 학생회서 밤샘하기로 했어. 새벽에는 새벽송도 나가야 되고.” 이어 영희가 시큰둥하게 말한다. “ 난 싫다 , 우린 아직 어리쟎니? 좀 더 자란 후에 근사하게 놀자” 부정적 반응에  분위기는 급속도로 식어가고 날라온 만두, 빵들만 우걱우걱 먹는다.


모두 뿔뿔이 헤어지고 영희와 둘이서만 집으로 향하는 길, 하경이 영희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묻는다.

“ 혁제 오빠랑 크리스마스  약속 있는거야”  영희는 쓸쓸하게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 혁제 오빠, 다음 주 화요일에 군 입대한대.” 힘없이 말한다. 하경이 화다닥 놀라며 “ 그럼 너넨 이젠 끝난거네 ,  잘 됐네.” 과장되게 톤을 높여 말하며 신중하게 영희를 본다.

“ 몰르지, 지는 군대가서 좀 더 쓸모있는 인간이 되가지고 올테니 나더러 얌전히 기다리랜다.”

하며 영희는 피시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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