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에 모인 학급 아이들은 키가 좀 더 자라고 햇볕에 그을려 검으스럼한 건강한 모습들이다. 반갑기 이를데 없어 서로 그 동안의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 이번 학기에 새 선생님이 오신다더라” 소식통 영희의 말이다. “ 무슨 과목?” 아이들의 눈이 반짝인다.

“ 미술과 음악을 담당한대.”  “ 미술과 음악을 한 사람이 한다구? “

“ 서울대 미대 아직 학생인데 일주일에 하루, 강사로 수업해 준다나 봐” 꽤 자세한 정보다. “ 넌 어떻게 그리도 잘 안다니?” 하경이 묻자 영희는 생글거리며 말한다. “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지난 주말 우리 집서 회식했잖니? 심부름 하면서 줏어 들었지.”

우리 반 특히 여자아이들은 서울대학교에, 미술 전공인, 그리고 아직 재학 중이라는 핸섬한 젊은 선생을 상상하며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과연 그는 우리 반 반장 김혁제와 비슷해 보일 만큼  젊다못해 어려 보였다. 짙은 눈섭에 두툼한 입술,약간 그을린 피부가 야성스럽다. 흠이라면 키가 평균치를 넘을까 말까 , 바지 입은 다리가 짧막해 보인다는 것이다. 숱 많고 뻣뻣한 머리털이 밤송이처럼 곤두서 있어 빗자루 선생이란 별명이 금새 붙었다.

그에게는 사회생활 첫 번 째 직업이어서 그런지  교재연구를 꼼꼼이 하여 알차고 열성적인 수업이다 . 해서   졸거나 한눈 파는 학생이 없고 평판이 좋다. 구닥다리에 후줄근한 대다수 선생님에 비하여 신선하고 생기 넘치고 또 교과서에 없는 새로운 노래도 가르쳐 주었다.

< 산 좋고 물 좋은 우리의 나라

 봄 여룸 가을 겨울 살기도 좋다

조상이 대대로 물리워 주신

이 논과 이 밭을 누구가 지을까

부지런 부지런 갈고 닦으면

해마다 가득히 거두어 보세

해마다 가득히 거두워 보세 >

빗자루 선생의 약간 허스키한 바리톤 목소리는 힘차고 매력있다.


아이들은 방학 동안 집 안에 갇혀 지낸 것에 보상이나 하듯 방과 후에는 떼를 지어 돌아 다녔다. 앞장 서는 건 이점순이었다. 점순이는 좁은 바닥 ㅇ 읍 내 학생들 일이라면 뭐든지 빠삭했다. 소문을 실어 나르기 보다는 걔 스스로가 소문의 중심이었고 항상 바람을 몰고 다니는 아이였다.믿거나 말거나 들리는 말로는 따라다니는 남학생들이 그렇게 많고 점순에게 간택 당하지 못해 그렇게 안달들이라는 것이다. 점순이는 비쩍 마른 몸매에 길고 가느다란 와리바시  다리다. 매력 포인트는  헷라이트처럼  큰 눈에 숱 많고 길다란 속눈섭이 낙타의 눈 같다 할까.. 그런데 그 예쁜 눈은 늘 텅빈듯 졸리운듯 힘이 없어 영양실조같고 당연히 성적도 중하위였다.그런 점순이가 학교 밖으로만 나가면 꿩처럼 날래고 고양이 눈처럼 광채가 났다. ‘ 말만 해, 원하는 대로 소개해 줄께, 잘 생긴 애? 공부 잘 하는 애? 잘 노는 애? ‘ 하며 중매장이를 자처했다.해서 이런저런 이유나 핑게를 대며 우리 짝패들은 읍내 극장이나 숲 속 공터, 또는 중국빵 집에 들어가 공갈빵을 땅땅 터트려 먹고 웃으며 잡담을 하며 그렇게 소일했다. 단골 메뉴는 선생들 골려 먹은 얘기, 그 중에도 빗자루 선생.

하루는 조숙한 영희가 빗자루 선생에게 물었다.

“ 선생님, 에로의 뜻이 뭐얘요? “ “ 음, 애로란--- ‘어렵고 힘든 ‘ 이런 뜻? “

“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에로 잡지, 에로 영화 에로 사진, 뭐 이런 말 많잖아요? 그게 힘 들다는 뜻인가요?”

영희는 아주 천진하고 진지한 얼굴로 빗자루를 말끄럼이 보며 되묻는다. “ 글쎄다 , 그건 그건,”  귓바퀴까지 새빨개져서 허둥허둥하는 빗자루를 얘기하며 짝패들은 허리를 잡고 웃는다.


하경이 집에 돌아와 방에서 수학 정석울 풀고 있는데 외삼촌이 전화가 왔다고 알려 주신다. 누굴까, 의아하며 전화를 받으니 뜻밖에도 빗자루 선생. 근처 제과점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는 얘기다. 하경은 무슨 급한 일일까 걱정하며 두말 없이 달려 간다. 빗자루 선생은 어깨에 금빛 열쇠 로고가 새겨진 서울대 교복을 입고 자못 심각한 모습으로 앉아있다. 그는 다가온 종업원에게 일방적으로 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주문한 아이스크림이 테이블 위에 날라왔는데도 그는 말이 없다. “ 선생님 무슨 일이 있어서 예까지 오셨나요? 어서 말씀 하세요.”

구슬프고 끈적끈적 늘어지는 < 타프 > 일명 과부들의 행진 멜로디가 그들의 사이를 가로지르고, 아이스크림은 하염없이 녹는다. “ 저 늦으면 혼나요, 일어날께요” 하경이 참다못해 일어서자 “ 잠간만 “ 하며 메모지를 꺼내 글을 쓴다. 쪽지를 받으며 하경은 “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치렀지만 해괴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당연히 하경 , 방에 들어서자 쪽지를 펼쳐 본다 < 처음부터 마음이 끌렸고 지금도 그립고 앞으로도 사랑한다, 하경,너의 미소가 예뻐. > 하경은 얼굴이 화끈하고 심장이 터질듯 세차게 고동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육친이 아닌 남자로 부터의 러브레터, 아니 쪽지라도 하경의 마음이 소스라쳐 두근거리는 것, 난생 처음 겪는 느낌이다.  하경이  늦도록 잠 못 이룬 밤이었다.


시월 초순이다. 늦더위도 이제 더 이상 심술을 단념하고 더없이 푸르고 상쾌한 날, 우리 짝패들은 산 위로 오른다. 낮으막한 산 정상에 우리들의 친숙한 자리 , 정말 신기하게도 널찍한 바위에 덧대어 등받이 까지, 영락없는 카우치와 같은 큰 바위가 있다. 옆으로는 풀더미로 덮혀 숨은 듯 고요히 머무는 옹달샘 하나, 낮에는 햇살을, 밤에는 별빛을, 품고 때로는 개구리가 헤엄치고 소금쟁이가 스치듯 물위를 건너지르는 작은 옹달샘. 하경과 친구들은 날씨 좋은 날은 그 곳에 올라 수업 시간 중 미쳐 못한 필기를 베끼기도 하고 숙제를 하기도 하고, 또 잡담도 한다. 그 날은 주위에 지천인 어린 밤나무에서 밤송이를 따 꼬챙이로 아기 손가락 같은  풋밤을 꺼내어 오드득 맛을 본다.   풋밤은 어금니 사이로 깨물면 먼저 향긋한 풋내에 연하디 연한 고소하고 달착지근한 맛이 영글은 아람밤 보다 더  맛 있다. 밤 까기는 먹는 만큼 잔손질 노동력도 필요한지라 지치고 싫증앙다. 우리들은 손깍지를 머리 뒤로 받치고 베이비불루의 티없는 하늘을 본다.

“ 야 빗자루 선생 또라이 아냐? “ 영희가 느닷없이 입을 뗀다. “ 자꾸 우리 집에 찾아오고 나더러 만나자고 한다” “ 엄마는 선생님이라고 극진히 대하는데 나는 창피해 죽겠어”  하경은 피가 아래로 쑤욱 내려가는 듯 얼굴이 하얘진다.뚱하니 있던 점순이가 씹어 뱉듯이 “ 나쁜 자식”  소리친다. “ 어머, 너한테도?” “  철면피 낯가죽으로 한 반 여러 여자애들한테 문어발 축축한 촉수를 드리대다니 철면피, 문어발  .

“ 참 나쁜 놈! “영희와 점순 하경이 동시에 합창하듯 외친다.


오늘  금요일, 빗자루 선생의 수업 날이다. ‘ 어디 낯짝을 보자’ 하경은 입술을 깨문다.

하지만 그는 결근이고 수업은 자습으로 떼운다. 웬일이지? 묻는 하경에게 영희가 눈을 꿈적하며 “ 보고 싶으면 ㅇ 시립병원에 가 봐라.” “ 왜, 무슨 일이래?” 묻는 하경에게 “ 난도 모르지, 지난 밤 어두운 골목 길에서 깡패들에게 죽도록 얻어 맞았다더라. 아마 학교 이제 쫑일걸.”

그 따위 놈한테 내 첫 번 째 떨림으로 밤잠을 설치다니, 치떨리는

부끄러움과 모욕감으로 하경은 잠시 뇌 속 이성을 자랑하는 전두엽 영역이 혼돈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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