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가 다음 주로 다가왔다. 4교시 물상시간, 선생님은 시험문제 정리해 주시느라 열강인데 학급 아이들은 거의가 꿈나라로 왔다갔다 하며 눈들이 풀렷다. 일이등을 다투는 이원호와 손영란, 그리고 언제나 정자세인 박정호는 빼고 . 하경의 책상으로 쪽지가 살짝 밀려 온다 ‘ 쟤들은 사람도 아냐, 로봇이다’ 영희가 장난스레 윙크한다. 정말 이렇게 싱그럽고 아름다운 초여름, 어떻게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단 말인가. 활짝 열린 창문으로 살몃살몃 불어드는 바람에는 수목과 야생화로 조합된 그윽한숲 냄새에 마치 수면제 성분이 듬뿍 들어 있는듯 사정없이 잠 속으로 끌어들이고, 거기에 심상한 뻐꾸기의 리듬 타는 노랫소리는 자장가마냥 아득한 꿈 속으로 또한 사정없이끌어들인다. 하경도 현실과 꿈 속 중간 쯤에서 선생님의 지루한 말씀보다는 바람과 뻐꾸기의 화답하는 소리, 후덥지근한 교실 안의 공기 속에서 나른한 충일감에 잠겨든다. 시간은 느릿느릿 한여름 땡볕에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드디어 끝종, 아이들은 소스라치듯 졸음에서 깨어나며 선생님도 서둘러 출석부 챙겨 나가신 교실 안, 다시 생기가 돈다. ‘ 아, 점심시간 밥 먹자. 밥, 밥’ ‘아주 노래를 불러라. ‘ ‘ 우리 나가서 밥 먹자. ‘ 조오치,날씨되지, 기분되지, 난 김밥 싸왔다는거 아냐’ 왁자지껄 , 끼리끼리 도시락 주머니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 우리 백자광산으로 가자. 거기 되게 시원하고 조용하고 좋잖아" " 그래 ,가자’
교사 후면 산골짜기로 들어서면 가느다란 산길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노라면 일제시대 때 백토를 파다 도자기를 굽던 동굴이 지금은 폐쇄되어 있다.’ 얘 거긴 학생 출입금지구역이쟎아’ 평소 소심쟁이 순애가 한 마디 안 할 수가 없다. ‘ 까잇것 괜찮아 잠간 밥만 먹고 오는건데. 광순이가 큰 소리치고 ‘ 거기 굴 안에 샘물이 아주 시원하고 달다. 하며 옥순이가 하경에게 설명해 준다.
과연 그 곳은 우묵하게 그늘지고 굴 안 샘에서 흐르는 맑고 차가운 실개천이 졸졸 흐르고 있다. ‘ 어머, 어쩜 이런 멋진데가 있니? 여기 산신령님 사시는 곳 아닌가.’하경이 신기해서 중얼거리니까 “ 신령님 우리 잠깐 밥 먹으러 왔습니다, 허락해 주세요”하고 영희가 동굴 속에 대고 장난스레 외쳤다. 그러자 마치동굴 속에서 대답하듯 웅웅대는 메아리가 울려 모두들 깔깔 웃어댄다. 밥 먹는 순간은 조용하다. 배도 고플 때였고 하나 밖에 없는 입은 우선 먹는 일에 분주했으니. 옥순이가 제일 먼저 도시락을 비우고 굴 안으로 들어가 깨끗이 씻어낸 빈 도시락에 맑은 물을 가득 떠 왔다. " 아, 시원하고 맛있다."돌아가며 한 모금 씩 마신 후 다시 얘기가 쏟아진다.
“ 얘들아, 너네들 김금지라고 알지? “ “응 우리 국민학교 때 반장 하던 애,” “ 걔가 어쨋는데?”와, 너네들 모르는구나, 몇 달 전 4.19일어났잖어? 그 때 걔가 학교에서 돌아오다 총을 맞았다는구나. 많이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는데 정신이상이 되서 정신병원으로 갔대 “ 아니, 그거 확실해? 진짜 그래? 읍내 ㅇ초등학교 졸업한 아이들이 질색하며 합창하듯 물어댄다. “ 그럼 , 우리 엄마가 금지네 동네 사는 친구가 있어 소문이 쫙 났대. “ 옥순이는 정색하며 대답하고 아이들은 숙연해진다.” 금지가 어떤 앤데?”하경의 묻는 말에 남미가 말한다. “ 금지는 이름처럼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맘씨도 아주 착했단다. “ " 그리고 4 학년 때부터 도맡아 반장을 했지. “ 공부 잘하니까 당연히 서울 유명한 ㅅ여중에 들어갔어.” ㅇ 초등 동창들이 돌아가며 설명한다.
‘ 그 학교는 경복궁 근처에 있어 아마도 그럴 수 있겠다’ 하경도 그 때, ㄱ 여중에서 그 사건을 겪었다.” 도대체 대통령이 뭔데 학생들이 데모 한다고 총으로 학생들을 쏴서 죽게 만든다니? 평소 단세포 영희답지 않게 흥분하여 말한다. " 음, 김주열 학생 눈에 최루탄 맞아 죽어 바다에서 건진 사진 보았니? 그걸 보고 고등 학생들이 더욱 분개해서 사태가 커졌다는구나"" 4.19 데모가 뭔데" 남미가 촌닭스럽게 눈을 꿈적이며 묻는다. “ 이 승만 대통령이 너무 오래 통치를 하고도 또 더 대통령직을 연장하려고 부정선거를 했쟎니? 역시 부반장 손영란이 조금 안다는듯 차근차근 얘기를 해 준다. 이어서 아이들은 3.15 부정 선거에서 듣고 보아온 추접스런 얘기들을 침을 튀기며 중구난방하는데 하경이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난 4.19 데모하는 거 직접 봤다. 나 다니던 학교가 경무대 근처거던. 수업하는데 갑자기 담 밖에서 총소리가 탕탕 나며 흰 샤쓰에 검은 바지 입은 대학생들이 한 떼거리 담을 넘어 들어오는거야. 곧 비상종이 울려고 수업 중단한 선생님들이 교무실로 갔단다. 금새 담임이 들어왔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는거야. 아이들을 교실에서 꼼짝 못하게 하고 화장실도 몇 명 씩 조를 짜서 보내고 집에도 안 보내 주는거야.정말 우린 전쟁난 줄 알고 얼마나 겁나고 무서웠는지 몰라. 난 다행히 오빠가 근처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오빠가 날 데릴러 왔어. 오빠 따라 학교 밖에 나오니 와! 밖은 완전 살벌하게 바뀌었더라.행인도 없고 트럭이나 버스에는 이마에 흰띠를 두른 청년들이 마구 뭐라 외치며 지나가고 ‘ 아마 이승만 하야하라’ 하던가, 뭐 군가 같은 것도 부르고 , 그 뒤론 군대 차가쫒아가며 총을 쏘아대고, 그 때 금지 같은 죄없는 행인이 다치기도 했을거야. 서울 신문사가 대낮에 불이 나서 활활 타오르고, 정말정말 무서웠어. 버스도 전차도 끊어졌으니 오빠는 내 손을 꼭 붙잡고 뒷길로 골목길로만 해서 용산 우리집 까지 걸어갔단다. " 아이들은 팔에 오소소 소름이 끼치고 공포스런 얼굴로 심각한 모습이다.
갑자기 영희가 “ 아니, 이 사람 냄새” 화들짝 놀라며 저 쪽을 본다. 연기가 뭉실뭉실 흐르며 그 뒤로 김혁제가 담배를 비스듬히 꼬나문채 슬슬 다가 온다.” 야 니들, 점심시간 끝나고 5교시 수업이야. 여태 뭐하고 있는거야” 날카로운 뱁새눈을 치뜨며 낮으막한 소리로 으르렁거린다. “ 아이 오빠, 좀 얘기가 길어졌어 한 번만 봐주세요.” 영희가 생글거리며 앞장 서고 다른 아이들도 오빠,오빠하며 애교스럽게 웃으니 혁제도 어쩔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 어서들 뛰엇”하고 소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