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마를 먹으면 암을 예방하고, 위장을 보하기도 한다는 말을 듣고, 난 새벽 잠을 깨는 즉시 주방에 들어가서 냉장고 야채칸에 보관한 팔뚝만하게 굵고, 긴 마를 꺼내 12센치미터 쯤 잘라 껍질을 벗기고 얇팍하게 썬 다음 그걸 비스듬히 눕혀 착착착 채를 썬다. 채 썬 마를 작은 접시에 담고 계란 노른자를 가운데 올리고 들기름을 살짝 뿌려 우리 서방님께 공손히? 진상한다.나로선 암예방에 좋다고 하여 시작을 했건만 이 분은 그게 보양에도 좋다며 흐믓하게 즐긴다. 하여 우리 주방에서는 채를 써는 칼도마 소리가 매일 아침마다 낭낭히 온 집 안을 울리게 되었다.지금 도마질 소리야 넓은 집 안에 아무리 메아리 쳐도 들어 줄 이도 없지만 채를 써는 내 자신이 이 소리를 들으며 너무도 정답고 그리운 먼 기억을 떠올린다. 내 어린 열 살 안팎의 나이 쯤, 이십 여 호 옹기종기 모여 사는 우리 동네는 내 남 없이 무척도 가난했다. 세 끼니 꼬박꼬박 챙기는 집은 거의 없이 점심은 그냥 건너고, 아침을 걸르는 집도 적지 않았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많은 식구에 아버지가 타오는 배급 쌀- 그 때는 공무원도 월급의 일부는 쌀이나 식량으로 주었다.- 로 한 달을 때우기가 어려워 얼마는 죽으로 보충하고도 또 얼마는 양식이 떨어진 상태로 넘어가야 했다. 쌀 독에 양식이 떨어졌는지 어쨌는지는 우리 어린 것들은 잘 모르니까 엄마가 부엌에서 힘차게 불을 지피고 달그닥거리며 그릇 소리가 들리면 곧 따뜻한 밥상이 들어온다는 즐거운 기대를 하게 된다. 그 때는 저녁 밥만 먹으면 곧 한 구석에 가서 일찍부터 자버렸으니 으례 새벽에는 일찍 잠이 깬다. 바깥으로 향한 창호지 문이 파라스름하게 밝아오면 어느 덧 잠이 깨어 가만히 귀부터 기울인다.부엌이 조용하고 방바닥이 그대로 써늘하면 어린 마음에도 마냥 적막하고 쓸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부엌에서 엄마의 잘 숙련된 리드미컬한 칼도마 소리가 낭낭하게 들려오면 얼마나 푸근하고 아늑한 행복을 느꼈던가. 아침 밥을 짓느라 불을 지핀 방구들은 차츰 따뜻해 오고, 밥 뜸들이는 구수한 냄새가 간막이 문 틈으로 스며들 때쯤은 화로에 이글이글한 불을 잔뜩 담아 들여오며 " 얘들아, 어서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어야지." 하는 엄마의 말씀은 또 얼마나 정답고 그리운지! 그럴라치면 공연히 " 응응 , 싫어 쫌 더 있다 일어날꺼야." 하는 응석도 통했던 다정했던 어머니. 요즘은 음식을 해도 별로 칼 도마질을 요란하게 할 일은 없는거 같아 크고 작은 칼 셋트는 거의 장식용으로 비치해 두는성 싶다. 이렇게 풍요하고 편리하게 사는 이 때에, 가난한 부엌에서 간격이 일정하여 거의 타악기를 연주하는 듯하던 엄마의 칼 도마 소리가 너무도 그립고, 내 자신의 칼 도마 소리를 들으며 어린 시절 그 행복감이 가만히 가슴을 적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