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r on the G-string                                               

     (G선상의 아리아)         


   그녀는 이사짐을 다 꾸려놓았다. 아끼던 책 몇 무더기와 꼭 필요한 간소한 가구, 옷 이부자리,그리고 최소한의 부엌살림.

집안은 조용했고 딸 방에선 아무 기척이 없다. 14 살 12 살 손자 아이들도 제 어미가 단속했는지 꼼짝하지 않는다.아마 나서진 못해도 섭섭한 마음을 품고 어디선가 이 할미의 거동을 유심히 살펴볼 터이다.

그냥 떠나야 할 것 같다.

" 나미야, 나 간다. 케이, 더스틴 잘 있어라. 짐차 올 시간이 다 되었구나" 

중얼대며 일어서는 그녀는 목이 메이며 살픗 서러운 눈물이 고였다.

예약한 무빙 트럭이 와서 크락션을 울리자 마음씀이 순하고 활달한 미국인 사위가 얼른 나와 짐을 날라주곤 언어권이 달라 섬세한 말이 통하진 못하지만 애처럽고 걱정스런 눈길로 인사한다. "어머님 굿럭!"

이제 출발만 남았다. 현관을 나서며 지난 30 여 년 살아온 집을 돌아 보았다. 처음 이민 와서 20년 함께 살았던  남편이 먼저 갔고 그 후 딸 나미 가족과 함께 살았던 10년. 초여름 뒷뜰 키큰 참나무의 무성한 이파리가 지붕 너머 무수한 푸른 손수건 되어 굿바이 하듯 바람에 팔랑팔랑 흔들린다. 그녀가 정성껏 가꾸었던 덩굴 장미는 붉은 꽃이 만발하여 현관 앞 아치 벽면을 화사하게 뒤덮었다. 지난 삼십 여년 쓰리고 매운 추억과 즐거움이 서린 정든 집에서 인경은 꼭 필요한 자신의 물건들만 챙겨 그 곳을 미련없이 훌훌 떠나는 것이다.


 인경은 함께 살던 딸에게 말했었다.

 "얘야 이제 나 혼자 나가서 독립해서 살고 싶어.아이들도 다 자랐고 더 이상 내 도움이 네게 필요하지 않게 되었어. 이젠 나도 나를 위해 쉬엄쉬엄 살고 싶구나"

물론 딸 나미는 질색하며 반대했다.

 "엄마, 이제야말로 엄마는 우리가 필요할 때라구요, 늙고 허약한 몸으로 어떻게 혼자 살겠다는 거예요?" 딸은 이치 정연하게 말이야 하면서도  인경이 이해할 수 없도록 오버하여 뽀로퉁하게 토라져 말했다.

'너와 같이 산다는게 나에겐  피곤하고 힘들어.'

인경은 독단적으로 이사를 감행한 것이다.



  적응해야 한다. 

이사 나온 인경이 부딪친 첫번 째 화두다.이제껏은 사회 계층에 구애받지 않고 상류는 아니지만 적어도 중산층이라는 개념 속에 당당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홀로 뚝 떨어져 빈민층의 값싼 실버 아파트에서의 삶은 그녀에게 새로운 하향성 재가치 정립을 강조했다. 그리고 없는 것 투성이의 빈한한 살림살이가  그녀를 당혹케 했다. 사람이 사는데 이렇게 소소하게 많은 것이 필요했던가?

그러한 현실 앞에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없거나 부족한 것에 대응하여 적절한 대안을 찾든지 없는 것에 적응해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침대가 없어 바닥에서 첫밤을 자고 난 아침 온몸이 뻐근하다. 적당한 침대를 구하기 까지는 일단 이렇게 견뎌야 한다. 배가 몹시 곺아 키친으로 들어갔다. 작은 공간이지만 렌지, 오븐, 냉장고, 그리고 수도물이 연결된 싱크대는 깔끔히 갖추어 있으니 이것도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당장 음식 만들 식재료가 없어 우선 비상식량으로 준비했던 라면을 끓였다. 평소에 안 먹던 라면이지만 시장하니 먹을 만하다.

 한 오십 여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던 처녀 때 혼자 도시에 나와 자취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비록 손바닥만한 작은 방이며 부엌이었으나 무한대의 가능성과 자유가 있어 세상은 달콤했다. 서쪽으로 보자기만한 창문이 있어 보라색 천으로 커텐을 치고 저녁이면 얕으막한 산 너머 저무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이 무척  충만하고 행복했다. 

결혼하고 여러식구와 살며, 사회적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동안에 그 오붓한 행복은 먼 옛이야기가 되었고 지금의 <이 자유는 외로움이란 값비싼 댓가>를 주고 산 메마른 결과이나 젊은 처녀시절의 어렴픗한 낭만을 상기시켜 막연한 해방감을 주기도 한다. 


  저녁 어스름 산책길을 한 바퀴 돌아오려니 건물 앞 숲길 벤치에 한 쌍의 연인이 몸을 바짝 밀착시키고 앉아있다. 남자는 희미한 보안등에 반짝이는 은빛 머리칼이었고 이목구비가 멀쑥하여 젊은 날 록허드슨을 연상시키는 꽤나 미남이었을 모습이다. 그 남자의 넓은 가슴에 머리를 기댄 여인은 흰색 털부츠에 분홍 실내복을 입었는데 어딘지 연약하고 아파보였다. 노연인의 ,그래서 더욱 흐르는 시간이 안타까워 비장함이 느껴지는  애잔한 풍경이었다. 그녀는 그들 곁을 지나며 조그만 소리로 " 안녕? 좋은 저녁이예요" 하고 인사했다.

그들은 미동도 않은채 손만 들어 까딱 눈으로 답했다.

실버 아파트, 아이들의 놀이터도 없고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젊은 부부들도 안 보이는, 그래서 언제나 조용하고 적막한 이 동네다. 울창한 나무사이로 띄엄띄엄 십여 채의 건물이 들어서 숲 속 빌라같이 그림은 좋지만 소리없는 저승사자의 날개짓이 연한 바람을 일으키며 뺨을 스치는 이 곳.


  이 곳이 내 인생 종착역에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보너스 시공이다.

자연 닳아 아름답고 빛나게 살아야 할 사명과 의무가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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