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김보경 옮김 / 시공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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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일곱 번째 서평

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영원한 꿈의 비상, 모든 것을 동경하다.




종일 끄물끄물한 하늘이 무거워 보이더니 새벽이 돼서야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소리만 들어보면 꼭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보라가 거세게 몰아칠 것 같은 기세다. 마른 바람이 먼지처럼 눈꺼풀에 들러붙을 것 같은 건조한 사막에 이 비가 내린다면 어떨까. 문득 사막 한가운데서 비가 내리는 것을 상상한다.

그동안 너무 어린왕자와 여우만을 사랑했었나보다. 생텍쥐페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가 비행기 조종사였다는 사실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였다는 사실만이 각인되고 있었을 뿐, 그의 내면을 들여다볼만한 기회를 접할 기회가 부족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가 조종사라는 직업보다 작가라는 직업에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무한한 애정을 그려갔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왔었다. 물론 작가로서 그의 삶 역시 소중했겠지만 책을 통해 보았던 그는 작가라는 직업, 글을 쓰는 자긍심 보다는 역시 비행기를 조종하는 일에 만족감을 더 크게 품고 살았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는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제한된 조건에(연령제한에 걸린 듯하다)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로 군대에 편입해 들어가 다시 비행기 조종사라는 위치 한 가운데 자신을 서게 한다.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 그에게 있어 조종사라는 존재감은 자존감과 더불어 애국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 모든 정신적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시공사에서 빛을 보게 된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내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는 작가가 소년기에서부터 청년기에 이르는 시기동안 어머니와 누이들 ,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서간집이다. 이 책이 갖는 첫 번째 의미는 작가 앙투안의 인간적이면서도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는 작가적 영향력일 것이다. 편지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그의 이미지는 부드러움과 강한 이지적인 면이 동시에 깔려져있는 고독과 안정감일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애정, 그리고 가족들에게 보내는 진솔한 이야기와 친구에게 보내는 글 속에서 그는 작가라는 또는 조종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뒤로 하고 평범한 한 사람, 정 많고 따뜻한 어느 누군가의 아들, 다저한 오빠, 믿음직스러운 좋은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시종일관 어머니에게 보내는 작가 앙투안의 따뜻한 내면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좋은 글은 보이지 않는 어떤 ‘전염성’을 갖는 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어서 간과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은, 이 책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기까지 한 어머니의 사랑과 슬픔, 고뇌와 견딤이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책은 앙투안의 어머니가 오랜시간 아들과 교감하며 나누었던 편지와, 그가 실종된 뒤 일년이 지나서 마지막으로 받게 된 편지까지 어머니라는 한 여인의 가슴에 담아 간직해왔던 모든 추억에서부터 출발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절절한 가슴앓이의 근원은 앙투안도, 그가 남긴 편지들도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보고 싶지만 볼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안타까움과 애절함이 밑바탕에 깔린 모성애가 아닐까. 이 책에서 기실.. 우리는 작가 앙투안 생텍쥐페리와 그의 어머니를 함께 만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영원한 꿈을 꾸고 대자연을 동경하는 어린왕자처럼 그만의 미지의 세계로 떠나버린 앙투안. 그리고 남겨진 가족들과 친구들. 책은 작가 생텍쥐페리와 그 주변의 지인들의 교감 속에서 작가의 인간적인 면모, 비행기 조종사라는 직업과 작가라는 직업에서 순수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노력하며 살아간 한 사람의 모습을 아주 천천히 돌아가는 활동사진처럼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로 다가온다.




 작가로서뿐 아니라 어떤 온전한 인간성을 향한 그의 치열한 사유도 책을 읽는 과정에서 매력적인 부분으로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직접 먼 곳까지 날아가 다리품을 팔아가며 작가의 정신적 실체까지 스케치하려 노력했던 옮긴이 김보경씨의 부단한 노고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본다. 책의 뒷부분에 진정성이 녹아드는 ‘옮긴이의 말’ 또한 앙투안의 편지와 더불어 읽어볼만 하다. 앙투안의 편지만 읽었다고 서둘러 책을 덮지 말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앙투안 생텍쥐페리가 늘 간직하고 있는 진정한 그 무언가에 대한 생각과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부분을 적어보자.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떠난 이 착한 아들은 그토록 정신적으로 존경하며 사랑하는 어머니와 서로 너무나 닮아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두 편의 인용을 통해 두 사람이 동시에 지니고 있는 그 무언가에 대한 느낌을 받는다. 그걸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사고를 제외한 모든 것을 단련시킵니다. 글을 쓰고, 노래하고, 말을 잘 하고, 감동하는 법까지도 배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말에 따라 움직이는데, 말은 감성까지도 속입니다. 하지만 전 책에서 얻은 이론만을 따르는 그가 아니라, 인간적인 그를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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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추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언가를 이해하려고, 말을 이어 나가는 단계를 거쳐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말이 모든 것을 왜곡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말을 신임하기 때문입니다.”   

                                                      1924년, 파리...P271




1945년 부활절




예수님이 부활하시던 날 새벽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막달라 마리아 묘석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기도문을 외루고, 또 외웁니다.

“주여, 제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셨나요?”




여기로 저기로, 제 제 아이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던 날,

전 울부짖었습니다. 그 아이를 세상에 나오게 하려고,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울부짖습니다.

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서,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무덤조차도 저는 모습니다.




하지만 “너무 빛을 갈망한 나머지 그만

하늘로 올라가버린 거라며,” 별들의 순례자님

하늘의 순례자님, 제 아이가 왔었나요?

하느님의 항로 표지를 보았군요?

아아! 그 사실을 제가 알았더라면,

미사포 아래서 그토록 울지는 않았을 것을.




                                   옮긴이의 말 중에서....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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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 쉼표를 찍다 -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명랑 가족 시트콤
송성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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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여섯 번째 서평

촌놈, 쉼표를 찍다- 송성영 지음


    미쁘고도 치열한 이야기.

충청도 사투리가 구수한 우리시대 신지식인의 자연주의 귀농이야기다. 무채색의 향연이 소박하면서도 충만한 흑백사진은 시간의 흐름을 살짝 바꿔 과거로의 여정을 이끌어가는 듯하다. 더불어 오랜시간동안 사진을 붙잡고 견뎌내던 사진첩의 낡은 테이프 흔적처럼 노르스름한 띠를 디자인해 곁들인 것도 무심히 지나가기에 아쉬운 보석 같은 장치들이다. 찾아보면 조금은 독특하고 이례적인 저자 송성영의 이력을 살펴보고 있으면 고향땅에 그와 같은 존재들이 남아있다는 일이 복이며 행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는 자본을 앞세워 고개를 드는 물질만능주의 시대적인 양태를 통으로 야산에 묻어버리고, 문명의 이기적인 혜택과 편리함을 뒤로한 채 야생의 순수함을 찾아 떠나는 이단아적인 인물이다. 남들은 다 앞으로만 나아가기를 원하고 지지 않으려고 옆도 돌아보지 않는 순간에, 그는 독야청청 홀로 뒷걸음으로 슬그머니 대열에서 벗어난다.




사람들마다 생각의 틀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른 것까지 딴지를 걸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그 스스로가 만족하면서, 적극적으로 적응해가며 몰입하면 그것이 최선이 아닐까.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는 내 방식대로 산다는 말이 있다. 촌놈이란다. 그러나 분명 그냥 촌놈은 아니다. 당당한 촌놈이며 의식이 깨어있는 촌놈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지칭하는 저자 송성영이 말하는 책 속의 주인공 바로 ‘촌놈’의 안과 밖은 구수한 사투리 속에 당당함과 뿌듯함,  스스로의 존재를 다독여 줄 수 있는 내적인 충만함이 가득 차고 넘치는 걸 느낀다.

책 속에는 송성영 그가 선택한 귀향과 귀농의 생활이 현실적이면서도 감동적으로 살아 꿈틀댄다. 개인 소유의 땅하나 없으면서 자갈이 뒹굴고 돌멩이가 박힌 투박한 땅을 옥토로 일궈가는 그의 소박한 삶은, 그 자신과 더불어 많은 이들에게 무한의 원동력이 되는 듯하다. 




그러나 시작도 부드럽고 사투리도 구수하지만 한편으로 책이 품고 있는 느낌은 때론 강직했던 것 같다. ‘촌놈, 쉼표를 찍다’ 는 피아니시모와 포르테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매력을 갖췄다. 이를테면 피아니시모처럼 마냥 여리고 살랑이지 않은 까닭은, 송영성의 삶의 모습이 어떤 포장이나 비유가 섞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호남고속도로 건설건으로 오래도록 정들어왔던 집을 떠나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 앞에서 갈등하고 번민한다. ‘사는 게 참 좋아유. 이렇게 행복해유’. 라고만 할 것 같은 그 역시 생존과 부조리 앞에서는 가열차게 할 말을 품어내는 뚝심 있는 한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피아니시모처럼 부드러움과 관조적 시각으로 들여다보는 시골 생활의 희노애락이 있다면, 포르테처럼 강하게 어필하고 있는 다른 하나는 현재 농촌이 맞닥뜨리고 있는 개발문명의 대한 고발과 부조리에 대한 저자 나름의 경고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성영의 이야기는 유쾌하다. 진실과 과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했던 그의 이야기만으로도 무게가 있으면서도 유쾌하다.

더불어 두 아들과 그림을 그리는 아내와 살뜰하게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이웃들의 소박하면서도 정이 넘치는 이야기는 책이 갖는 유쾌함에 힘을 더하는 데 그 몫을 톡톡히 하고 있다.




외지고 거친 곳에 터를 잡고 사는 까닭에 아이들 등교하는 길도 멀고 지루하다. 부지런떨며 새벽길을 나서는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 펼쳐지는 교감을 그는 개똥철학이라는 말로 촌스럽게 풀어낸다. 말이 개똥철학일지 모르지만 좌우당간 철학임에는 분명하다. 어슴푸레 동이 터오는 버스정류장에서 저만치 달려오는 버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따라 조금씩 발을 움직이는 아이들의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재래식 화장실 문을 열고 올려다보는 밤하늘의 별, 장마철이 되면 똥통에 물이 차올라 공습경보라도 울릴 것 같이 초긴장하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린다는 그의 이야기가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까닭은 왜일까.




“이쁘쥬? 신기하쥬? 어디서 온 것일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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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집밥 - 영양과 건강을 한 상에 차리다
김은아 지음 / 미디어윌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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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쉰다섯 번째 서평

따뜻한 집밥- 김은아 지음




독특함과 퓨전의 조화


요리책을 이렇게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본적은 이번이 처음인가보다. 각각의 책마다 그 성격에 맞는 글을 쓰고 싶은데, 요리책은 어딘지 어설프다. 아니 어렵다. 요리책에 맞는 글맛으로 써야 되는건지, 늘 하던 그대로 해야할지 잠시 고민에 빠진다. 요리책에 굳이 걸고 넘어갈 딴지가 있기는 한 걸까. 그렇긴 한데 천편일률적으로 좋다, 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조금은 아쉬운 감이 있어 보이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따뜻한 집밥이란 제목의 이 요리책은 푸드스타일링 분야에 몸담고 있는 김은아에 의해 구성되어 만들어졌다. 제목만 봐서는 토속적이고 푸근한 이미지로 청국장이나 된장찌개가 주를 이룰 것 같은 이미지다. 그러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할 것이고 책은 마지막장까지 넘겨봐야 진정한 가치를 아는 것이리라. 처음 느낌은 평범한 생각과는 같지 않았다.

집에서 갓 지은 따뜻한 밥과 반찬이라는 의미에서의 따뜻한 집밥은 어느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선다. 먹을거리가 차고 넘치는 시기, 다양한 각국의 요리가 마음만 먹으면 내집 밥상위에 척 하고 올라오는 요즘에도 어딘지 모르게 시골밥상 내지는 한식, 무엇보다도 따뜻한 밥과 국의 이미지는 아직까지도 한국 사람들에게 묘한 끌림으로 다가서는 게 아닌가 싶다.

요리책이다. 요리책에 대한 정석이 있을까. 아니 필요한 것일까. 김은아의 요리책은 개인적인 동시에 대중적이다. 그녀의 요리는 자신의 선호도에 의해 음식과 요리법이 선별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찌보면 김은아의 따뜻한 집밥은 새로운 요리와 함께 다양한 요리법의 대중화의 필요성과 보편적 요리와 조리방법의 소개라는 양단의 문제를 가운데 두고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생각을 한다. 요리책에서 딜레마를 운운하는 것도 좀 이상하기는 하다.

일절하고 내용을 들여다보자.

처음 워밍업과 파트별로 4개의 파트가 구성되어 있으며 아침과 저녁 그리고 별책부록 같은 느낌의 다이어트 식단과 이색요리 부분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구성을 갖췄다.

워밍업에서 소개되어 있는 저자만의 톡톡 튀면서 개성이 있는 다양한 드레싱의 소개가 신선하게 다가온다. 요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재료의 손질과 밥 짓기, 국물내기 등 워밍업에서의 김은아의 이야기는 교과서 보다 더 차분하고 명쾌하며 분석적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저자의 이야기처럼 설탕, 소금을 줄여가면서 요리를 하는 데 있다고 보여지는데, 그런 이유로  올리고당(프락토 올리고당)의 쓰임이 아주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책 속에는 설탕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프락토올리고당이 등장하는 것이다. 또한 된장에서도 전통적인 한국 된장 보다는 일본식 된장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에 발맞춰 일본식 음식에 많이 등장하고 있는 가쓰오브시 역시 친근한 존재감으로 확인되고 있다.

아침파트에서는 요리선별의 순서나 배열이 따로 없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선택해서 고르기 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건강관리 관련한 요리나, 또 한걸음 깊이 들어가 소화관련 요리 또는 간단한 스피드를 강조한 요리가 혼합된 듯한 인상을 받는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건강은 건강 쪽으로, 좀더 세부적으로 소화나, 피로회복, 노화방지 식의 구분이 필요한 요리는 따로 몰아 정리하는 것도 좋아보인다. 저녁상차림 역시 선별위주의 요리배열은 동일하다. 
 
 마지막 부분에 실렸던 이색요리의 소개는 개성 있는 김은아 표 요리책의 특징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하는 듯한 인상이다. 다만 이색요리의 소개에 있어 다양한 요리와 각국의 문화와 음식의 유래를 짧게라도 실었더라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요리가 단순한 요리로서가 아닌 문화적 콘텐츠로서의 그 역할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진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딱히 저자가 그런 이유로 이색요리를 소개한 의도는 아니었을지라도, 색다른 별미의 맛과 더불어 그 요리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찾고 소개하는 사소한 노력도 읽는 이로 하여금 긍정의 요소를 더 많이 표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입가심으로 먹기 좋을법한 다양한 디저트의 눈길을 보냈던 것을 기억하면서 고구마 견과류 조림이라든지, 요구르트 아이스크림은 필히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주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볼까 생각중이다.

  퓨전일까. 혼전의 이미지가 접시에 덩그마니 남은 것 같지는 않아서 심오한 퓨전은 아닌듯 하면서도, 저자만의 다양한 응용 레시피와 요리선별은 평범한 것에서 살짝 업그레이드 된 듯 보인다. 눈으로 이쁘고 혀끝으로 맛나면 그만인 것을...각설하고 말도 참 많다.
  

이제 열심히 보면서 만들어 맛있게 먹을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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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 개정판
이황 지음, 이장우.전일주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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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네 번째 서평

퇴계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이장우 전일주 옮김




노력하는 자. 진정한 표상




이상한 일이다. 우연일까. 작년에 퇴계가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묶어낸 책을 읽고 기록으로 남기던 날도 비가 왔던 것을 기억한다. 순차적으로 보면 퇴계가 아들인 준에게 보낸 편지를 먼저 보는 게 맞는 이치인데, 손자에게 보낸 편지묶음의 책이 먼저 내 책꽂이에 꽂힌 까닭에 나는 퇴계가 향한 아들에 대한 지극함보다, 손자에게로 향하는 측은함과 대견함을 먼저 만나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다.

두 권의 책은 저자인 퇴계가 작성한 것이 동일하기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느낌이나 분위기는 사뭇 비슷하다. 다만 정리하고 요약하며 다시 편집의 노력을 기울인 이들이 서로 다르고 출판사 또한 다르기에 거기에서 오는 약간의 신선함이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서신을 받는 대상이 아들과 손자라는 차이가 어찌 보면 비슷하면서도 분명한 차이를 갖는 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는데, 예를들면 아들에게는 조금 더 엄격하고 교육적인 반면에 손자에게로 향하는 서신은 조금은 부드러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 그 차이일 것이다. 안도에게 주는 서신 역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퇴계와 안도의 서신에서 느껴지는 점은 손자에 대한 측은함과 애잔함 그리고 대견함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개인적인 소견임에 분명하기는 하지만 각설하고 한 아비가 아들과 손자에게 주었던 편지를 같이 읽고 비교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연암서가에서 나온 퇴계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는 2008년 발행된 책의 개정판이다. 내용은 제목에서 익히 잘 드러나는 것처럼 퇴계가 아들인 준과 주고받았던 서신을 싣고 있다. 다만 퇴계가 보낸 편지만을 싣고 답으로 받았을 서신은 배제한다.

책은 차분하면서도 분석적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이 그런 게 아니라 퇴계가 남긴 서신의 총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말이 될 것이다. 퇴계를 향한 평범한 시선들과 고착화된 이미지를 생각하고 책을 품에 안았다고 한다면 첫 장을 열고 다음 장을 열고 다시 몇 장을 열어가면서 독자는 처음의 지닌 이미지를 서둘러 떨쳐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우리가 맞이했던 그 이미지들이 모두 틀린 것인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직접 책을 통해 각자가 만나게 될 퇴계에게 물어볼만한 질문이지 않을까.




 퇴계와 손자 안도의 서신에서도 느꼈던 대목이지만, 퇴계와 준 사이의 서신 모음인 이번 개정판을 통해 조금 더 명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퇴계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퇴계 그에게서도 감히 장단점이 보였노라,고 중얼거리고 싶다. 그것이 그에 대한 세간의 시선과 이미지에 누가 될 지라도 말이다.

그는 조심스러운 인물이다. 한 가지 일을 행함에 있어 생각에, 생각에 꼬리를 잇고 다시 질문을 던지고, 답을 내놓을 때도 언제나 마음 한켠으로는 소심증을 숨기지 못하는 듯 했다. 이것을 그만의 ‘사려깊음’이라 할 수 있을까. 그만의 지고지순한 ‘배려심’이라 할 수 있을까




학문의 입지와 정치적 행보에 있어 그는 스스로에게 지극하고 당연하게 또는 과할정도로 엄격했다. 또한 정치적 혼란기에 접어들어서는 건강 등 일신상의 문제를 이유로 매번 벼슬을 유보하고 물러날 것을 선처받기 원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그의 자녀들 준과 채 또 손자인 안도에게는 학문의 필요가치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며 늘 학문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충언을 아끼지 않으며, 과거에 임하는 자세와 과거를 행해야 하는 필요성을 각성시키는데 많은 자문을 할애하고 있다. 퇴계 스스로 자주 정계에서 물러날 결심을 하는 동시에 자녀들에게는 정계입문을 적극 지향하고 있는 이 모습은 어찌보면 이율배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감히 누가 퇴계의 낯빛에 눈꼬리를 치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는 엄밀하게 말하면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간파하며 판단하는 명석함을 지닌 인물이다. 때문에 자신이 물러날 시기와 나설 시기를 간파하는 동시에 제자들과 아들인 준, 손자인안도 등과 더불어, 가까이 지내는 문인들의 행보에 아낌없는 관심과 격려 그리도 세심하면서도 날카로운 직언을 아끼지 않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책은 비단 학문과 정치계에 거목으로 선 퇴계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책속에 담긴 서신의 내용 중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퇴계 이황의 진솔한 인간미를 말 그대로 맘껏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 상당부분 보여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다른 기타 퇴계를 향하는 많은 수식적 향연보다 더 많은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한다.

당대 시대적 유교사상이라든지, 이미 오랜시간동안 전통으로 뿌리박혀 내려오던 것에 대한 반기를 들어 흔들 줄 알았던 그는 물론 드러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겠지만, 숨은 자리에서 꾸준하게 쉬지 않고 번민하고 고뇌하며 또 실천하는 학자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의 재가건도 그렇고, 서모의 상을 두고 친모의 상과 같이 상복을 입고 돌아간 자에 대한 예를 다하게 했던 점들은 비단 그 당시에 큰 이슈가 됐을 법하지만, 진정한 인간애를 알고 행했던 실천주의자의 의지를 보여준 대목이 아닌가 말이다. 집에서 부리는 종들 한명 한명에 대한 특징과 성격을 세밀하게 알고 있으며, 측은지심에 입각해 애정과 관심을 갖고 오래도록 그들을 관리하며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었다는 데서도 퇴계가 지닌 인간미는 당시에도 지금에 와서도 그 가치를 존중받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는 불행하게 잔병치례가 많아 심적으로 예민하고 쇠약해서 늘 지병으로 고충을 받은 퇴계. 부부의 연이 길지 못해 첫 부인과의 사별, 둘째 부인과도 오래 해로하지 못한 점과 둘째 아들인 채의 너무 이른 죽음등과 같이 퇴계 개인사적으로는 서글픈 면모도 적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완벽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일, 그 인간적인 자성과 깨달음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준 은사가 아닐까. 그는 주변의 부족한 면을 스스로 채워가며 빈자리를 기꺼이 매워가는 일에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집안 대소사와 제사 관련일등 사대부집 안채에서 거론되어야 할 부분까지 일일이 살뜰하게 살폈던 퇴계. 그는 훌륭한 학자인 동시에 든든한 가장이며 속 깊은 지아비였으며, 매서우면서도 인자한 스승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 모든 것의 끈을 힘겹게 이어가기 위해 매일 밤마다 스스로 고군분투하며 자성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노력하는 자의 진정한 표상일지도...

  

여담이지만 가끔은 무한 시간의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어 그에게 달려가 참으로 불경스럽게 무작정 물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확답을 주시지요. 그런데 확답이란 게 있기는 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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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1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클래식 27
조르주 상드 지음, 이재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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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쉰 세 번째 서평.

편지1. 조르주 상드




온전한 자유, 굴레를 버리다




지만지 클래식에서 출간된 조르주 상드의 기획물이다. 책은 조르주 상드라는 한 인물 연구에 있어 평생을 바쳤던 조르주 뤼뱅에 의해 작성되었던 것을 번역가 이재희의 노력에 의해 고운 한글로 번역되어 새롭게 빛을 뿜어내고 있는 중이다.




조르주 상드. 그녀의 호적상의 본명은 ‘아망틴 오로르 뤼실’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책 속에서 조르주 상드라는 이름보다는 오로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조르주 상드라는 인물을 두고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에 그 안에서 무심하게 작용하고 있는 짖궂은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를테면 호기심 따위가 불쑥 고개를 내미는 것도 자연스런 이치가 아닐까.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조르주 상드가 비단 사람들의 가벼운 입술 언저리를 오르내리는 가십거리의 대상에서만 머물러야 하는 존재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언제까지나 지루하게 또는 애매하게 그대로 계속 갇혀 있어야 하는 걸까, 라는 의구심에서부터 이미 내가 상상하고 만들어가는 조르주 상드 그녀의 이미지는 출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책 맨 앞머리에 등장하는 해설 부분과 옮긴이와의 인터뷰 내용을 실은 의도는 상당히 긍정적으로 보여진다. 문학사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를테면 좁아진 시야를 크고 넓게 확대해 다시 태어나는 조르주 상드를 만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수순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책은 편지글의 모음이라는 독특한 매력을 지녔다. 실존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주고받았던 편지들이 보태거나 삭제 없이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태어나서 사춘기 시절을 지나고 결혼과 양육이라는 평범한 여인의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녀 스스로가 지녔던  생각과 이념 그리고 문학적 향취까지 많은 부분을 접할 수 있는 기회임에는 분명하다.




조르주 상드는 한없이 여성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거침없는 남성적 면모를 지닌 이중적 이미지를 가진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 속에서 절친한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녀는 아이처럼, 때로는 감수성에 흠뻑 젖어든 순수한 사춘기 소녀처럼 봄날 포근포근 감겨드는 아지랑이같이 부드럽기만 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주장이 강하고 의지를 표출하며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과 무엇보다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이성적인 동시에 이지적인 면모 속에 감춰진 이면의 모습은, 시대가 요구해온 여성의 굴레를 후련하게 벗어던지며 단 한번도 되돌아보지 않은 채 앞만 보고 나아가는 당찬 기백이 느껴지는 이미지를 보이기도 한다.




‘고백편지’는 외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그녀가 변명처럼 남편의 사랑을 다시 쟁취하려 부단히 노력했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도 그녀 특유의 이중적인 모습이 등장하곤 한다. 기타 다른 편지 내용에 비해 비교될 만큼 장문의 편지인 이 ‘고백편지’ 속에서 그녀는 아주 솔직하면서도 대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자신의 변호를 위해서는 강직하며 작의적일 정도의 논리적인 주장을 펴기도 한다. 

통속적으로 보면 가슴에 주홍글씨라도 새겨야 할 판인데, 어쩌면 이 여인 오로르, 조르주 상드는 이다지도 할말이 많고 주장이 명확하고 논리적인가. 가련한 여인의 모습 뒤에는 ‘내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당신이 알아야 해요’ 식의 치명적인 칼끝을 상대에게 돌리고 있는 것을 보인다. 그 외의 서신은 사뭇 진지하고 섬세하며 부드럽다. 




처음 책을 접했던 의도라고 할까. 목적은 조르주 상드의 문학적 가치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책과 함께 하는 동안 그 목적을 어느정도 이뤘다고 믿고 싶어졌다. 물론 조르주 상드의 나머지 책이 남아있기에, 6권 마지막까지 어떤 독특한 마력이나 앞서 이야기한 ‘고백 편지’ 와 같은 끈끈한 끌림이 또 어딘가에 분명 있을 것으로 믿는다.

한가지 힘들게 했던 것은 서간문이 갖는 특징이 아닐까 싶다. 잔잔한 미풍 내지는 가벼운 포말처럼 비슷비슷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을까. 때로는 그 의미에 깊이 매료 되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지만, 무언가 격정적인 폭풍우나 번개가 치는동시에 책 속에서부터 들려오는 천둥소리가 듣고 싶어졌었다면 개인적인 망상일지 모른다.







[덧없이 짧은 인생에 대해 숙고하면서 체념하고 받아들이면서 스스로를 위안해야 해. 하지만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너희들은 내 삶에 한없는 기쁨을 뿌려주고 있고, 나를 삶에 애착하게 한단다]83P




[그러면서도 그런 씁쓸한 생각을 조심스럽게 감추었어요. 난 모든 일이 권태로웠고, 혼자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오싹 끼쳤어요.




남편이 알아주지도 않을뿐더러 내 행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 재능과 지식을 얻느라고 내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이 못내 아쉬웠어요]191P




[비록 오빠가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그러기에 상대방을 일깨워 주고, 보호해 줘야 할 위치이지만, 불관용과 냉혹함만으로는 빗나간 사람을 이끌 수 없다는 말씀을 감히 드립니다. 그 빗나간 사람을 제 궤도로 올려놓기 위해서는 온화함과 자상함이 더 효과적이고, 정작 정도를 벗어난 적이 없는 애매한 사람에게 상처나 슬픔을 안겨주지 않는 방법이죠] 234P

 




 자유의지. 굳어졌기에 갇혀버린 정신과 이념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한 자유를 위해 일상의 평온함을 뒤로하고, 세상의 문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나왔던 여인 오로르, 조르주 상드. 아직도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나는 조금 더 앉아서 그녀와 같이 생각을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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