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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 - 개정판
이황 지음, 이장우.전일주 옮김 / 연암서가 / 2011년 4월
평점 :
쉰 네 번째 서평
퇴계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이장우 전일주 옮김
노력하는 자. 진정한 표상
이상한 일이다. 우연일까. 작년에 퇴계가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 묶어낸 책을 읽고 기록으로 남기던 날도 비가 왔던 것을 기억한다. 순차적으로 보면 퇴계가 아들인 준에게 보낸 편지를 먼저 보는 게 맞는 이치인데, 손자에게 보낸 편지묶음의 책이 먼저 내 책꽂이에 꽂힌 까닭에 나는 퇴계가 향한 아들에 대한 지극함보다, 손자에게로 향하는 측은함과 대견함을 먼저 만나보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다.
두 권의 책은 저자인 퇴계가 작성한 것이 동일하기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느낌이나 분위기는 사뭇 비슷하다. 다만 정리하고 요약하며 다시 편집의 노력을 기울인 이들이 서로 다르고 출판사 또한 다르기에 거기에서 오는 약간의 신선함이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또한 서신을 받는 대상이 아들과 손자라는 차이가 어찌 보면 비슷하면서도 분명한 차이를 갖는 다는 점을 상기할 수 있는데, 예를들면 아들에게는 조금 더 엄격하고 교육적인 반면에 손자에게로 향하는 서신은 조금은 부드러운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점이 그 차이일 것이다. 안도에게 주는 서신 역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퇴계와 안도의 서신에서 느껴지는 점은 손자에 대한 측은함과 애잔함 그리고 대견함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개인적인 소견임에 분명하기는 하지만 각설하고 한 아비가 아들과 손자에게 주었던 편지를 같이 읽고 비교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연암서가에서 나온 퇴계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는 2008년 발행된 책의 개정판이다. 내용은 제목에서 익히 잘 드러나는 것처럼 퇴계가 아들인 준과 주고받았던 서신을 싣고 있다. 다만 퇴계가 보낸 편지만을 싣고 답으로 받았을 서신은 배제한다.
책은 차분하면서도 분석적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이 그런 게 아니라 퇴계가 남긴 서신의 총체적인 분위기가 그렇다는 말이 될 것이다. 퇴계를 향한 평범한 시선들과 고착화된 이미지를 생각하고 책을 품에 안았다고 한다면 첫 장을 열고 다음 장을 열고 다시 몇 장을 열어가면서 독자는 처음의 지닌 이미지를 서둘러 떨쳐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우리가 맞이했던 그 이미지들이 모두 틀린 것인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직접 책을 통해 각자가 만나게 될 퇴계에게 물어볼만한 질문이지 않을까.
퇴계와 손자 안도의 서신에서도 느꼈던 대목이지만, 퇴계와 준 사이의 서신 모음인 이번 개정판을 통해 조금 더 명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퇴계를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퇴계 그에게서도 감히 장단점이 보였노라,고 중얼거리고 싶다. 그것이 그에 대한 세간의 시선과 이미지에 누가 될 지라도 말이다.
그는 조심스러운 인물이다. 한 가지 일을 행함에 있어 생각에, 생각에 꼬리를 잇고 다시 질문을 던지고, 답을 내놓을 때도 언제나 마음 한켠으로는 소심증을 숨기지 못하는 듯 했다. 이것을 그만의 ‘사려깊음’이라 할 수 있을까. 그만의 지고지순한 ‘배려심’이라 할 수 있을까
학문의 입지와 정치적 행보에 있어 그는 스스로에게 지극하고 당연하게 또는 과할정도로 엄격했다. 또한 정치적 혼란기에 접어들어서는 건강 등 일신상의 문제를 이유로 매번 벼슬을 유보하고 물러날 것을 선처받기 원했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그의 자녀들 준과 채 또 손자인 안도에게는 학문의 필요가치를 분명하게 인식시키며 늘 학문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충언을 아끼지 않으며, 과거에 임하는 자세와 과거를 행해야 하는 필요성을 각성시키는데 많은 자문을 할애하고 있다. 퇴계 스스로 자주 정계에서 물러날 결심을 하는 동시에 자녀들에게는 정계입문을 적극 지향하고 있는 이 모습은 어찌보면 이율배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감히 누가 퇴계의 낯빛에 눈꼬리를 치켜 바라볼 수 있을까.
그는 엄밀하게 말하면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간파하며 판단하는 명석함을 지닌 인물이다. 때문에 자신이 물러날 시기와 나설 시기를 간파하는 동시에 제자들과 아들인 준, 손자인안도 등과 더불어, 가까이 지내는 문인들의 행보에 아낌없는 관심과 격려 그리도 세심하면서도 날카로운 직언을 아끼지 않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책은 비단 학문과 정치계에 거목으로 선 퇴계만을 바라보지 않는다. 책속에 담긴 서신의 내용 중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퇴계 이황의 진솔한 인간미를 말 그대로 맘껏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 상당부분 보여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다른 기타 퇴계를 향하는 많은 수식적 향연보다 더 많은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을 한다.
당대 시대적 유교사상이라든지, 이미 오랜시간동안 전통으로 뿌리박혀 내려오던 것에 대한 반기를 들어 흔들 줄 알았던 그는 물론 드러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겠지만, 숨은 자리에서 꾸준하게 쉬지 않고 번민하고 고뇌하며 또 실천하는 학자의 면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의 재가건도 그렇고, 서모의 상을 두고 친모의 상과 같이 상복을 입고 돌아간 자에 대한 예를 다하게 했던 점들은 비단 그 당시에 큰 이슈가 됐을 법하지만, 진정한 인간애를 알고 행했던 실천주의자의 의지를 보여준 대목이 아닌가 말이다. 집에서 부리는 종들 한명 한명에 대한 특징과 성격을 세밀하게 알고 있으며, 측은지심에 입각해 애정과 관심을 갖고 오래도록 그들을 관리하며 동등한 인간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었다는 데서도 퇴계가 지닌 인간미는 당시에도 지금에 와서도 그 가치를 존중받아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한 개인으로서는 불행하게 잔병치례가 많아 심적으로 예민하고 쇠약해서 늘 지병으로 고충을 받은 퇴계. 부부의 연이 길지 못해 첫 부인과의 사별, 둘째 부인과도 오래 해로하지 못한 점과 둘째 아들인 채의 너무 이른 죽음등과 같이 퇴계 개인사적으로는 서글픈 면모도 적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완벽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일, 그 인간적인 자성과 깨달음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준 은사가 아닐까. 그는 주변의 부족한 면을 스스로 채워가며 빈자리를 기꺼이 매워가는 일에 노력했던 인물이었다. 집안 대소사와 제사 관련일등 사대부집 안채에서 거론되어야 할 부분까지 일일이 살뜰하게 살폈던 퇴계. 그는 훌륭한 학자인 동시에 든든한 가장이며 속 깊은 지아비였으며, 매서우면서도 인자한 스승이었다. 그는 아마도 이 모든 것의 끈을 힘겹게 이어가기 위해 매일 밤마다 스스로 고군분투하며 자성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그는 노력하는 자의 진정한 표상일지도...
여담이지만 가끔은 무한 시간의 경계선을 훌쩍 뛰어넘어 그에게 달려가 참으로 불경스럽게 무작정 물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확답을 주시지요. 그런데 확답이란 게 있기는 한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