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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 - 시대가 만든 운명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2년 10월
평점 :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백 예순 한 번째 서평
정조시대와 정약용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이덕일
이덕일과 정병설의 대립되는 논지를 접한 이후 이덕일의 책을 바라보는 시선의 어떤 관점이라고 할지, 소소하지만 개인적인 기준이 꿈틀하는 것을 느낀다.
그간의 이덕일의 저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몇 권 접하지 못한 까닭에 함부로 거론하기는 어려운 문제이겠지만, 적어도 사도세자를 중심으로 한 시기의 이덕일과 정병설 각각의 이론과 주장의 충돌은 여전히 허탈한 이미지로 남는 듯하다.
이번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은 개정 증보판이다. 1.2권중 1권만 접했다. 책에 대한 기대치는 무엇보다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데서 출발했었다. 그러나 기실 이번 책도 정약용이라는 한명의 인물이 중심이 아닌, 정조와 정조시대를 아우르며 이어지고 있는 전대의 영조와 사도세자 노론과 소론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인식을 받게 된다.
정약용이라는 인물이 정조시대의 인물이라는 점 또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듯하다. 늘 날선 공세로 뜨거운 시대(사도세자와 정조시대)를 격론함에 있어, 굳이 다양한 시대와 인재를 대신해서 원점으로 회귀하듯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정약용을 거론하고 있는 저자의 선별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왜 정약용을 이야기하기로 했던 것일까. 결국 저자는 영조와 정조 시대를 쥐고 흔들었던 사상적 이합이 가져오는 무리의 충돌과 그들의 시대상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떤 주제로 접근하든 도착점에서 만나게 되는 결론은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 된다.
이 역시 저자의 의도된 결과일까. 딴은 지금까지 봐왔던 책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과 비슷한 시각에서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정약용과 그의 가문이 천주교와의 관계를 통해 일개 개인이 아닌 가문의 수난과 몰락의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해서 주의를 기울이며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책을 쓰는 저자에게도 관점이 있듯이 책을 읽어내는 이에게도 관점은 존재한다. 물론 내가 어떤 관점으로 책을 읽어내는가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번 책을 읽기 위해 준비했던 관점은 천주교였을까.
처음 시선을 잡는 이야기가 천주교와 관련한 정약용을 거론하는 부분이기에, 이 부분에서는 작가적 의도에 개의치 않은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과 종교라는 측면으로 곧바로 접근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일예를 들면 어떤 의도된 정치편향(현대적 노, 소론의 시각)의 성향을 벗어나 새로운 소재로 정약용을 읽어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당대 시대적 배경과 흐름을 간과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책은 다시 노론과 소론의 치열하고 냉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야기는 천주교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다가, 다시 정조 시대의 정치와 각각의 당이 갖는 힘겨루기 모습을 자주 언급한다. 그럴 때 정약용을 어디에 있었을까.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부의 이야기에서는 노론의 견제를 받으며 임금인 정조와의 군신 관계를 돈독히 하는 정약용의 모습이 언급된다. 실질적으로 화성축조와, 정조의 부친 사도세자와 관련한 일화를 소개하며 정약용이 당대 정치선상에서 어느정도의 위치에 있었는지 파악할만한 정황을 보여준다.
그러는 와중에 다시 천주교 이야기가 시작되고 반복된다.
그런 까닭에 책은 천주교와 정약용이라는 하나의 정해진 관점이 아닌, 정조 시대의 천주교와 관계했던 정약용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해석하면 좋을 듯하다.
정조 원년 정조 9년. 혹은 정조 17년. 정조의 재임 시기에 따라 각 년도에 부각되는? 혹은 역사에 기록된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천주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 일가의 이야기라는 메리트는 어찌보면 늘 반복되고 있는 이 시기의 정치적 논거에 의해 그 힘의 기운이 한쪽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면, 일개의 오만함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일까.
솔직히, 정조는 그렇다고 치고 또 약간의 당대 정치 흐름의 배경설명이야 필요 불가불 한 일인지라 수긍은 하겠지만, 늘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에는 책을 읽어내는 내 식견이 부족한 것인지. 같은 내용을 이리저리 소소한 소재의 변화로 접근하는 접근성의 문제점인지 잘 모르겠다.
사람을 대할 때나 책을 접할 때 무엇보다도 이전에 지녔던 선입관을 버려야 함이 마땅한 일인데, 그러지 못하는 듯해서 스스로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솔직히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역사를 대하는 인식이 그 오래된 역사적 관점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왜 아직도 이것을 뛰어넘지 못하고 한 곳에서 힘겹게 격론을 이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회의감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넋두리 역시, 편향성이 짙어 보이기는 하다.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책이 갖는 시대적, 정치적 혹은 사변적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각설하고, 몇 가지 아쉬움 속에서도 천주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어서 배우고 담아감에 감사한 일이다.
이 역시 조선과 천주교 역사에 관련된 책을 읽고 나면 노론과 소론 위주의 관점이 아닌, 오롯하게 세계 천주교 포교라는 측면에서 실학과 연계한 조선의 천주포교와 박해 및 그 영향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려놓을 것은 좀 내려놓고, 새로 얻고자 하는 것은 가리지 말고 두더지마냥 찾아보고 싶은 욕심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