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달과 6펜스

-예술과 삶. 왜?.

 

 

비가 올 것만 같은 저녁이다. 점심 무렵만 해도 해가 좋았던 것을 기억한다. 날씨란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것인가보다. 아들은 날씨를 예측하는 슈퍼 컴퓨터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많은 수치를 입력하고 계산을 해서 결과를 내놓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날씨를 알게 된다고도 했다. 그때 내가 반문했다. 결국은 날씨가 틀릴 때도 있는 걸로 봐서는 정밀하게 똑똑하다는 슈퍼 컴퓨터도 실수를 하는구나. 그렇지? 완벽한 것은 세상에 없는가보다. 그때 아들이 말했다. 엄마는 세상에 완벽한 게 있다고 생각하나요?

 

완벽한 존재는 없지만 완벽을 위해 앞으로만 달려가는 존재는 있지 않을까. 혹시 어느 비좁은 구석에서는 인생을 아까워하지 않는 이들이 분명 있을 것만 같다. 사실은 말이다. 늘 그랬지만 완벽이란 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는다.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타히티의 풍광이 눈에 그려질 듯하다. 뜨거운 태양, 벌거벗은 건강한 구리빛의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내는 맑은 웃음. 짙푸른 커다란 야자나무의 잎사귀가 바로 옆에서 그늘은 만들어내면, 책 속에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가 그 그늘 어디쯤에서 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만 같다. 그리고는 나한테 관심 끄쇼! 라고 쏘아붙일 것만 같다.

 

이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평범함을 너무나도 쉽게 버린 사람이다. 포기가 아니라 버렸다고 해야 더 어울릴 듯하다. 증권 중개인의 삶, 아내와 자식을 둔 평범한 가장이라는 보편적인 삶을 그의 표현대로 그저 ‘집어치우고’ 자신의 영혼이 이끄는 길을 새롭게 선택하는 인물이다. 아무도, 정말이지 그 누구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어찌보면 그 스스로 원했다기보다는 그의 예술성이 무심하게도 한 사람의 인간성을 끝간데 없이 끌어당겼으며 그는 그저 끌려다녔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신의 부름처럼 자신을 끌어당기는 거대한 힘에 의해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삶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선택은 예술계에서도,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조차도 인정받지 못한다.

책을 읽다보면 때론 불운해 보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거대한 성자처럼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어느 순간에서도 당당하게 굴하지 않았던 스트릭랜드 그만의 배짱? 자신감? 자신만의 세계에서 혼자 즐기며 자랑스러워했을 법한 그 거칠기만 한 당당함이 불편해보이기 보다는 부러워보였다면 이상한 것일까.

 

가끔은 당대에는 외면 받았으나 후대에 이르러 유명해지는 예술가들을 만나는 것처럼 이 막되고 막무가내의 붉은 수염의 사내 역시 다시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타히티 어느 외진 곳에서 원주민 아내와 마지막을 보낸 이 기이한 예술가의 이야기를 입에 오르내리며 그를 불러 소환하고 그렇게 어느 불행했을 화가를 기억하는 것이다.

책 속에 남자 스트릭랜드는 화가 고갱을 생각하며 구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 고갱은 타히티 섬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고 그곳에서 질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사랑보다, 사랑으로 가슴을 아파하는 여인보다, 재물 혹은 그 어떤 명예보다 가장 최우선 순위에 두려했던 그의 예술적 감흥(예술성)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예술가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존귀함을 담아 올려다보고자 하는 것은 예술 작품에 대한 감탄과 함께 그들의 예술적인 삶에 대한 경외심이 작용해서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고갱을 모델로 삼았든 아니든간에 달과 6펜스에 등장하는 괴짜 화가 스트릭랜드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고 싶은 그들만의 완벽한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말이다. 세간의 시선으로 바로 보는 그 삶이란 때론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온하기까지 하다. 그런 까닭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고, 멸시와 조롱을 받아내야 하는 인내심을 시험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희한하게도 그 모든 것을 견디며 이겨내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먼 시간 저편에서 강건하게 우뚝 서 있다.

 

딴은 말이다. 우리는 예술혼이 뜨겁게 살아있는 삶은 건강하지 못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의 삶이 비범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그런 예술가들의 삶을 때론 경외심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평범하지 않는 삶에 대한 아려한 열망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문에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가끔 그런 말을 하더란 말이다.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요’. ‘나에게도 예술적인 감흥이 있거든요.’ ‘예술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내게도 있거든요.’

그렇지만 그들의 짧은 이야기들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누구나 예술을 보고, 느끼며,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있기 마련이니까.

 

이제 달과 6펜스를 읽고 난후의 지극히 사소한 넋두리를 적는다. 그저 그런 넋두리다.

모든 예술가들이 이런 식의 삶을 추구한다면 인생은 지금보다 더 많이 드라마틱해지려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니다. 굳이 예술가들의 삶을 따라가지 않더라도 모든 인생은 그만큼의 가치와 무게로 한없이 흔들린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 순간까지 흔들리는 존재는 그들이나 보통의 삶을 선택한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며, 싸우며,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며, 만났다가는 헤어지고, 돌아섰다가도 다시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며, 죽음과 대면하는 순간도.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 위로 스미는 슬픔과 기쁨, 분노와 좌절, 절망. 수줍음이 불러오는 크고 작은 다양한 전율은 모두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저 이렇게 한순간 어느 작가의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말 그대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으로 호사스러운 위로를 받으면 되는 일이다.

그거면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걸리버 여행기

-진실에서 다시 진실을 찾다

 

걸리버 여행기 완역본이다. 늘 그렇지만 완역이라는 표현이 가져오는 느낌과 생각은 상반된다. 이를테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몰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그 첫 번째요, 기존에 번역된 책들에 대해 미비함을 다시 살피게 되는 순간이 그 두 번째로 찾아오는 생각들인가보다.

이번 책은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 그리고 읽는 이의 가치에 따라 다양한 방향성을 가지고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화책이든, 풍자문학이든 읽는 이의 목적에 의해 선택되어져왔으며, 오랫동안 그렇게 읽혀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분명하게도 온전한 완역본이 나온 이상, 선택의 결정권은 독자가 아닌 어쩌면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에게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책에서 독자에게 맞게 그들의 취향에 따라 읽을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하나의 목적성을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봐야한다. 스위프트 그는 자신의 목적성을 위해 곁가지로 새지 않으려 노력했다. 독자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극 속에서, 허구의 옷을 입은 ‘감춰진 진실’에 대한 문제들을 뾰족한 창처럼 계속해서 하늘위로 던져 올린다.

생각해보면 작가는 ‘걸리버 여행기’ 작품을 통해 최선을 다한 글쓰기를 했다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만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문제는 역시 독자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때문에 이번 책에 대한 마지막 생각과 판단도 역시 작가와 독자 양쪽의 입장 모두 조금은 더 신중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싶다.

 

그는 왜 주인공을 여행자로 삼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상의 나라로 여행을 시켜야 했을까. 소인국의 나라, 거인국의 나라, 하늘 위에 떠 있는 도시를 상징하는 라퓨타와 일본 여행기, 그리고 수많은 동물 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말이라는 동물을 선택해서 가장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갔던 것일까.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다분히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위장 장치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뛰어난 상상력을 쏟아내고 있는 이 작가, 스위프트의 의식체계는 정말 신비롭기까지 한 것이다.

 

이제 걸리버와 함께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을까. 막이 열리면 그가 어떤 계기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소개되면서 ‘이야기는 긴 여정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제일 먼저 그가 도착한 신기한 섬 바로 ‘릴리펏이라는 소인국의 이야기가 펄쳐진다.

릴리펏에서 그는 당연히 상대적으로 거인으로 취급된다. ‘산악인간’이 그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이와 반대로 그가 거인국인 ‘브롭딩낵’이라는 곳에 머물게 될 때는 거인을 상대하는 릴리펏(소인)의 입장에서 많은 것을 비교하고 해석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소인과 거인은 반대적인 설정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정반대의 상황과 마주하는 동시에 한 인간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어떤 대처를 하며 나아가는가를 보여준다.

물론 각각의 국가에서 걸리버는 상황에 걸맞는 언행을 보이며 그 스스로가 그들과 함께 동화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1부에서부터 4부까지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야기는 공통된 모습과 동일한 흐름 하나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사상에 대한 담론을 풀어가는 모습들이 그 예다. 각각의 국왕이나 지배자들과 함께 정치와 권력, 독재와 반란, 탐욕, 배신, 분노, 광기, 시기, 악의 등등 수많은 부조리와 인간의 이기심과 질투 욕망과 같이 어떤 선과 악을 구별할 때 악을 가리키는 면면들에 대해, 그러한 요소들이 가져오는 어두운 면면들을 소재로 토론하고 비교한다. 그리고 때론 그 과정에서 새로움을 깨닫는 과정을 거쳐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우리의 주인공 걸리버에게 여러 곳을 두루 여행시키며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또 독자들에게는 우매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나라는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무엇보다 이성적인 존재로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모든 결정을 내렸을 때여야만 한다는 조건부는,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며 비판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전제조건인 셈이다.

책에서 작가는 가장 마지막의 여행지로 ‘후이늠국’을 소개한다. 이곳은 이성적으로 뛰어난 존재인 말들의 세계다. 걸리버는 이곳에서 그동안 자신이 여행했던 곳과 자신이 타고 자란 본국(영국)에서 보고 느꼈던 모든 위선의 것들을 정리하며, 스스로가 행해야하는 가장 바람직한 이상세계 즉 긍적의 이데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가 매료되었던 나라는 악에 대한 그 어떤 의미나 미비한 느낌조차 알지 못하는 순수한 선의 세계를 지향하는 나라였다. 작가가 후이늠국의 여정을 가장 마지막에 실은 의도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반면에 이성적인 세계관 속에서 완벽한 정의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 사이에서도 맹점은 존재했으니 본능에 충실한 존재 바로 ‘ 야후’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쯤에서 조용히 딴지 하나를 걸어보자. 모든 인간에게는 후이늠국의 말들처럼 이성적인 면과 동시에 책에서 등장하는 야후에게서 느낄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사실은 이 두 가지 면 중에서 하나만 분리해 오로지 이것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는 문제이다. 후이늠국의 존재들은 스스로 우월한 존재로 우월감에 빠져 살지는 않는다해도 상대적으로 야후보다는 우월하다는 의식이 강하다. 후이늠국의 존재들은 세상의 악을 모른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야후를 인지하는 인식들은 상당히 부정적임을 알 수 있다. 야만인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뿌리가 그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다면 그 판단은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게 내가 말하는 딴지의 핵심이다. 물론 그들 중 몇몇 무리들은 야후의 교화를 논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적대시한다.

그런데 말이다. 딴지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 사소한 에피소드는 다소간에 희망을 내포하는 메타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후이늠국의 지배자와 같은 이성적 분별력을 지닌 ‘인간존재의 실존’이 먼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 인간은 우리보다 사악하고 치졸하며 야만적인 인간본성에 빠져있는 이들을 교화하고 개화할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되는 거다.

진부하게도 길어졌지만 어쨌든 이러한 낭설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개인의 사심이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걸리버 여행기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을 적어보자. 3부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소개되고 있는 ‘스트럴드브럭’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하다. 아니 어쩌면 내 의식들과 잘 들어맞는다고 해야할까. 걸리버는 영원한 삶에 대한 긍정적 끌림을 길게 표현하고 있었지만, 스트럴드브럭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영원한 삶은 불행으로 점철된 암울한 시간을 선사해줄 뿐이라는 이야기. 시간을 잊고, 기억을 잃어버리며, 가족을 잃고, 결국에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상실해가면서까지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스트럴드브럭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기에 숨이 찰 정도다. 정치적 비판과 풍자와 해악이 가득하다고는 하나, 나는 조금은 더 개인적인 시선으로 침잠해서 작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정치와 권력, 인간의 욕망 이기심 질투.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 개인의 역사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역사와 역사가 서로 얽히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더 복잡한 사회문제로 확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디 정치적으로만 갇혀 해석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사소한 부탁하나를 내려놓는다.

 

저자의 의도(사실 작가를 옆에 데려다 놓고 직접 대화하지 않는 이상 그의 사상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 다양한 동시에 애매할 뿐이다)를 떠나서 생각하기를 하나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 어떤 부와 명예, 돈과 권력도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다 무의미하다. 죽을 때는 다 빈손으로 돌아간다던 어른들의 말이 생각난다. 영원한 삶을 사는 비련의 주인공 스트럴드브럭을 보며 나는 감히 생각한다. 주어진 시간만큼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으로 가장 보편적인 동시에 이상적인 이데아를 꿈꾸기를.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기를...

 

오늘은 살아가는 모두에게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도 굳건한 건투를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거짓말을 먹는 나무

 

 

세상에 어떤 나무가 거짓말을 먹고 자랄 수 있을까. 이건 넌센스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분명 ‘거짓말을 먹는 나무’였다. 언젠가 음악을 듣고 자라는 식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매일아침마다 일정한 햇빛과 물 그리고 양분과 함께 부드러운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면 나무가 그에 반응해서 더 좋은 성장률을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식물이 외부 환경에 반응하는 것일까.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책의 제목치고는 신선하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다. 작가의 상상력이란 어디까지일까.

 

책의 저자는 ‘프랜시스 하딩’으로 1973년 영국출생이다. 표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검은 중절모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으며 두 뺨이 다소 붉게 물들어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영국의 빅토리아시대라고 한다. 빅토리아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 갑자기 궁금해져 찾아보니 영국의 큰 전환기인 듯했다.

이 시기에는 아마도 정치 경제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개혁과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는 시기인 동시에, 과거의 개념과 사상이 새로운 것들과의 충돌로 인해 소소하게는 개인들에게 있어서 혼란의 시기였을 법하다.

책 전반을 통해 드러나는 빅토리아시대와 같은 특이한 시대적 배경은 소설 ‘거짓말을 먹는 나무’의 분위기를 장악하며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책에 등장하는 자연주의 분위기라든지 과학자들의 등장. 종교와 과학의 대립에서 볼 수 있는 갈등과 함께 고고학의 발굴 같은 과정도 같은 맥락에서 들여다보면 좋을 것 같다.

 

각설하고 이제 주인공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주인공 페이스는 열 네살 소녀다. 그녀는 목사이자 자연과학자인 아버지(에라스무스 선더리), 허영과 백치미를 무기로 삼는 어머니(머틀 선더리), 외삼촌(마일스) 그리고 어린 남동생(하워드 선더리)과 함께 새로운 지역 베인 섬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이들의 이주는 고고학과 관련해 발굴 작업이 한참 진행 중인 ‘베인’ 섬으로부터의 초대에 응한 경우였다. 그러나 현실은 아버지이자 목사인 에라스무스 선더리에게 쏟아지는 스캔들과 다양한 억측을 포함한 사회적 멸시로부터의 도피 행각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베인 섬에서 아버지는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섬사람들이 페이스의 아버지인 에라스무스 선더리가 자살했다고 판단해 교회묘지에 안장하는 일조차 반대하며 섬을 사이에 두고 내부인과 외부인들과의 갈등은 고조된다.

 

소설은 주인공 소녀 페이스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린다. 또한 아버지의 죽음의 빌미가 되는 동시에 살인자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도움을 주는 대상이 바로 거짓말을 먹는 나무로 등장한다.

음흉하고 음산하며 두렵고 딴은 신비롭기까지한 이 나무는 사람들의 거짓말을 먹고 자란다. 거짓말을 영양분으로 삼아 열매를 맺고 거짓말을 한 대가로 소원을 들어주는? 열매를 선사하게 된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나무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된 페이스도 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거짓말을 만들어 나무에게 들려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작품에서도 자연주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표현을 자주 언급하고는 있지만, 사실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작가가 의도하는 상징성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 사람들은 사는 동안 의도하거나 의도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하게 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자신의 이득이나 욕심을 위해, 혹은 타인에 대한 복수심이나, 거대한 반항심으로 인해 화살의 촉이 나 아닌 타인을 향하든 나를 향하든 거짓말의 독을 담은 화살은 어디에서나 쏘아 올려진다. 그리고 그 행위의 주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거짓말은 도처에 존재하고, 거짓말을 했던 대상도 거짓말을 들어야 하는 대상도 주변에 너무나 많다. 생각해보면 거짓말을 듣고 있는 존재는 사람만이 아닌 나무도 될 수 있고, 유리컵이 될 수도 있으며, 소파에 있는 인형도 될 수 있고, 손가락에서 빼둔 반지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작품에서는 나무와 그 열매라는 연결성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과 욕심. 배신과 수많은 갈등. 패배에 따른 복수심과 같은 미묘하면서도 복잡한 심리와 거짓말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다. 작가 프랜시스 하딩의 작품 ‘거짓말을 먹는 나무’는 거짓말이라는 의문스럽고 은밀하며 비밀스러운 인간의 감추고 싶은 행동과 심리로 접근해 인간 내면의 모순된 감정을 건드리는 듯하다.

추리물인 듯 판타지물인 듯하면서도 사건 전개가 빠르고 집중하기 좋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관중 삼국지 원전 최신 완역판 박스 세트 - 전10권
나관중 지음,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장현주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삼국지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삼국지를 접한다. 오래전 지인이 말하기를 여성작가 작품이나 자잘한 소품에서 벗어나 스케일이 좀 큰 대작을 읽어보는 게 더 좋겠다, 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때 그이가 권했던 책이 삼국지였을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스무 살 언저리에 열권 전집으로 보았던 이문열의 세계문학전집 이후 다시 도전한 전집이 바로 이번에 읽은 삼국지였다.

삼국지에서 지,라는 글자가 한자어로 땅지(地)가 아닌 뜻지(志)라는 것을 알려준 건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세 나라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세 나라의 뜻을 담고 있다고 봐야 옳은 것일까.

 

삼국지라고 하면 매번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으로 보았던 내용으로, 세 남자가 만나서 의형제를 맺는 대목만이 기억이 날 뿐이었다. 실은 이렇게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저 유비가 나오고 그의 의형제들 관우와 장비가 나오고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만화 삼국지에서 보던 조조라는 인물까지가 내가 아는 등장인물이다. 이를테면 유비는 고결한 선비 같으며, 장비는 뚱뚱하고 성격이 급한 반면, 관우는 생각이 있고 일의 순서를 알았던 인물이라고 기억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조조가 무조건 간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사람으로 각인된 까닭을 모르겠다. 아마도 만화의 영향이 컸던가보다.

 

각설하고 삼국지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해보자. 우선 유비는 개인적으로 봤을 때 종종 너무 유약한 모습으로 보였다. 시대를 잘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각인되었던 명성에 맞지 않게 종종 그는 비참하게도 적군에 의해 쫒기며 이리저리 배회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인다. 물론 때로는 의연함과 비루함 사이에서 교묘하게 자신의 실리를 추구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하지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삼국지 하면 떠오르는 세 명의 인물보다도 오히려 장비와 비슷하면서 다른 매력을 보여주고 있는 인물인 여포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하면서도 때론 사랑에 중독되어 주군을 배신하는 위험한 순정파의 단면을 보여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조조 역시 무조건적으로 미워만할 그런 인물은 아니었다.

조조 역시 인재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나름의 배려와 아량을 겸비한 자라는 것을 책은 말하고 있다. 한때 이 사람 조조는 유비와 관우와도 각별한 관계였다. 그 관계라는 것이 완벽한 긍정의 목적과 의도를 갖는 것이 아니라하더라도 이들의 관계는 잠시나마 서로간의 신의를 느끼게 하는 관계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격돌한다.

 

책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주군을 섬기며, 그 아래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가릴 것 없이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주군을 위해 거침없이 적장으로 나아간다. 특이한 것은 아무리 짧게 등장하는 인물이라 하더라도 신분의 고하를 넘어 그 사람의 이름과 출신 배경을 짧게라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서로 맹렬하게 전투를 하면서도 서로 이름을 확인하는 내용(그게 무사들의 예의 인가보다)과 무관하지는 않아 보이기도하다. 주군이 누구든지 간에 그 아래에는 주군을 돕는 용맹한 장수가 반드시 있으며, 조언을 아끼지 않는 충신이 존재하는 모습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대목이기도 하다.

 

삼국지는 결코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과 전쟁을 통해 인물들의 계책과 처세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용맹한 장수와 장수들의 대격돌이 전부는 아니다. 이들은 서로 견제하는 동시에 전쟁을 통해 성장해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들의 복잡미묘한 관계를 정리하자면 어제의 적군이 오늘의 아군이 되기도 하고, 오늘의 동지가 너무나 쉽게 내일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상황으로 요약가능하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이들의 행보는 이해득실에 의해 합쳐지거나 분리되며 화친을 했다가도 적으로 다시 돌아선다. 정세의 흐름을 따르기보다는 정세의 흐름을 각자가 만들어간다고 해야 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재갈량의 뛰어난 재략이 있었기에 삼국지의 유비 관우 장비가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진정한 조연은 달리는 말 위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조자룡과 유비에게 재갈량을 소개해준 서서와 같은 많은 이들의 몫이 있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느 나라든 어느 시기든지 힘없는 군주와 그의 나라는 간신과 외세에 의해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는 영웅과 함께 간신(간웅)도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도 생각해볼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승패는 병가지상사(病家之常事). 사람의 성패는 모두 때가 있습니다. 때가 오면 스스로 열리고 때를 얻지 못하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 됩니다. 긴 인생을 살아가려면 일이 바라는 대로 되어도 자만하지 않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있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 가운데 있지만 흔들리지 말고 거기에 빠지지 말고 처신을 대범하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공명편-p188

 

왠지 모르게 아직도 나는 나의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라는 말을 해보고 싶어진다. 사는 동안 한번은 읽어볼만한 책 삼국지. 영웅호걸의 이야기 속에 삶의 진정한 교훈이 들어있는 대작이다. 그러나 책에 오탈자가 많은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블린 사람들 창비세계문학 68
제임스 조이스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작가의 소설이다. 내겐 한없이 낯선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집을 사다놓고 일 년이나 묵혔다.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모르겠다. 어찌된 일인지 성급하고 위험한 편견이 파놓은 함정에 내발로 자발적으로 기어들어갔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더블린의 이미지는 암울한 잿빛이다. 이 또한 한권의 소설로 인해 생긴 고정된 이미지겠지만 아일랜드 그리고 더블린의 이미지는 무척 강했다. 그래서였을까. 제임스 조이스의 이야기도 무척 무거울 거라는 생각을 했던가보다. 이제는 이 어설픈 선입관에서 걸어나와야한다.

 

더블린 사람들은 중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제목처럼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냈다. 어떤 환상이나 시적인 이미지를 쫒아가는 그런 것이 아닌, 그저 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사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소설은 정치와 종교, 인간관계에서 돌출되는 다양한 부조리와,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 개개인이 삶을 바라보는 관점, 혹은 현실과 이상사이에서 허우적거리며 하루하루 인내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모습을 꼼꼼한 시선과 상세한 묘사로 그려낸다. 소설이 자연주의 성향을 띄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 자연주의에 대해서는 아는 게 그다지 없다. 그저 오래되고 낡아버린 내 기준에 의해서 보자면 이 소설집은 사실주의에 입각한 리얼리즘 경향의 소설이다. 한국소설로 보자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나, 김승옥의 서울 1964 겨울을 떠올리게 했던 그런 글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너무 오래된 작품만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조금은 안됐다. 유행에 뒤처지는 걸 속일 수는 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사는 게 참 녹녹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아가게 되는가보다. 사는 게 남루하고 비루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는 이 교과서적인 대답을 쓰고 있으면서도 어찌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진다. 교과서적이면서 틀에 박힌 표현들. 어딘지 모르게 꽤나 진부하게 다가온다. 그 까닭은 지금 이 순간 어느 정해진 형식에 박힌 의식들로 가득한 교과서를 보았던 것이 아닌, 문학작품인 소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 아닐까. 삶과 죽음. 모든 삶의 공식은 누구에게나 다르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삶의 진실을 마주하며 순간순간을 버텨내는 자가 진정 용기 있는 자라는 사실을 끄적이게 되는가싶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소개해보자. ‘두 건달’과 ‘하숙집’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를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두 건달’은 두 명의 남자와 한명의 여자가 등장하고 돈이라는 물질적인 것들이 오고가면서 암울한 뒷골목의 어두운 모습을 보여준다. 묘한 긴장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자괴감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라고 기억한다. 그런가하면 진정한 사랑의 가치와 가식적이거나 지나치게 보여주기 식의 인위적이면서도 과장된 사랑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보았다고 해야할까. 단편 ‘하숙집’은 하나의 목적에 의해 가려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관계를 생각했다고 적어야 할 것 같다.

그런가하면 ‘가슴 아픈 사건’이라는 제목의 단편도 제목처럼 가슴이 아픈 기억으로 남게 되는 것 같다. 어긋났음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로 한줄평을 적으려한다. 조금은 억지스럽게 들리겠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아련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안타까움과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싶다.

 

인간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자의든 타의든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이 늘 따라다닌다. 지나고 나서 회상할 수 있는 모든 순간들은 결국 나의 선택들이 모아놓은 순간의 기록이고 역사일지도 모른다. 더블린에서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 더블린 사람들. 한번쯤 공감하며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가 보기엔 최선의 행동을 한 것이었다. 그가 비난받을 게 뭐가 있나? 이제 그녀가 가고 보니 그는 밤마다 그 방에 홀로 앉아 있던 그녀의 삶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이해가 되었다. 그의 삶 또한 외로울 것이고 그러다가 그 또한 죽고, 존재하기를 멈추고, 추억이 될 것이다. -기억해주는 이가 있기나 하다면.]p166

 

 

[그 타락한, 몰래 한 사랑이 그를 절망감으로 꽉 채웠다. 그는 자기 삶의 청렴함을 갉아먹었다. 그는 삶의 향연으로부터 추방되어버린 상태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 인간이 그를 사랑한 것 같았는데, 그는 그네에게 삶과 행복을 주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치욕을, 죽음 같은 수치를 선고한 것이었다.......]p1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