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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여행기 (무삭제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27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9월
평점 :
걸리버 여행기
-진실에서 다시 진실을 찾다
걸리버 여행기 완역본이다. 늘 그렇지만 완역이라는 표현이 가져오는 느낌과 생각은 상반된다. 이를테면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몰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그 첫 번째요, 기존에 번역된 책들에 대해 미비함을 다시 살피게 되는 순간이 그 두 번째로 찾아오는 생각들인가보다.
이번 책은 여러 가지 이유와 목적 그리고 읽는 이의 가치에 따라 다양한 방향성을 가지고 번역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화책이든, 풍자문학이든 읽는 이의 목적에 의해 선택되어져왔으며, 오랫동안 그렇게 읽혀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분명하게도 온전한 완역본이 나온 이상, 선택의 결정권은 독자가 아닌 어쩌면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에게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책에서 독자에게 맞게 그들의 취향에 따라 읽을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하나의 목적성을 가지고 이야기한다고 봐야한다. 스위프트 그는 자신의 목적성을 위해 곁가지로 새지 않으려 노력했다. 독자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극 속에서, 허구의 옷을 입은 ‘감춰진 진실’에 대한 문제들을 뾰족한 창처럼 계속해서 하늘위로 던져 올린다.
생각해보면 작가는 ‘걸리버 여행기’ 작품을 통해 최선을 다한 글쓰기를 했다고 그 가치를 인정받을만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문제는 역시 독자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때문에 이번 책에 대한 마지막 생각과 판단도 역시 작가와 독자 양쪽의 입장 모두 조금은 더 신중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싶다.
그는 왜 주인공을 여행자로 삼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상의 나라로 여행을 시켜야 했을까. 소인국의 나라, 거인국의 나라, 하늘 위에 떠 있는 도시를 상징하는 라퓨타와 일본 여행기, 그리고 수많은 동물 중에서도 왜 하필이면 말이라는 동물을 선택해서 가장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갔던 것일까. 의문들이 꼬리를 문다.
다분히 사회 비판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한 위장 장치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뛰어난 상상력을 쏟아내고 있는 이 작가, 스위프트의 의식체계는 정말 신비롭기까지 한 것이다.
이제 걸리버와 함께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었을까. 막이 열리면 그가 어떤 계기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부터 소개되면서 ‘이야기는 긴 여정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제일 먼저 그가 도착한 신기한 섬 바로 ‘릴리펏이라는 소인국의 이야기가 펄쳐진다.
릴리펏에서 그는 당연히 상대적으로 거인으로 취급된다. ‘산악인간’이 그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이와 반대로 그가 거인국인 ‘브롭딩낵’이라는 곳에 머물게 될 때는 거인을 상대하는 릴리펏(소인)의 입장에서 많은 것을 비교하고 해석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소인과 거인은 반대적인 설정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정반대의 상황과 마주하는 동시에 한 인간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어떤 대처를 하며 나아가는가를 보여준다.
물론 각각의 국가에서 걸리버는 상황에 걸맞는 언행을 보이며 그 스스로가 그들과 함께 동화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1부에서부터 4부까지 다양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이야기는 공통된 모습과 동일한 흐름 하나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테면 사상에 대한 담론을 풀어가는 모습들이 그 예다. 각각의 국왕이나 지배자들과 함께 정치와 권력, 독재와 반란, 탐욕, 배신, 분노, 광기, 시기, 악의 등등 수많은 부조리와 인간의 이기심과 질투 욕망과 같이 어떤 선과 악을 구별할 때 악을 가리키는 면면들에 대해, 그러한 요소들이 가져오는 어두운 면면들을 소재로 토론하고 비교한다. 그리고 때론 그 과정에서 새로움을 깨닫는 과정을 거쳐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가는 우리의 주인공 걸리버에게 여러 곳을 두루 여행시키며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또 독자들에게는 우매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나라는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무엇보다 이성적인 존재로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모든 결정을 내렸을 때여야만 한다는 조건부는,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며 비판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한 전제조건인 셈이다.
책에서 작가는 가장 마지막의 여행지로 ‘후이늠국’을 소개한다. 이곳은 이성적으로 뛰어난 존재인 말들의 세계다. 걸리버는 이곳에서 그동안 자신이 여행했던 곳과 자신이 타고 자란 본국(영국)에서 보고 느꼈던 모든 위선의 것들을 정리하며, 스스로가 행해야하는 가장 바람직한 이상세계 즉 긍적의 이데아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그가 매료되었던 나라는 악에 대한 그 어떤 의미나 미비한 느낌조차 알지 못하는 순수한 선의 세계를 지향하는 나라였다. 작가가 후이늠국의 여정을 가장 마지막에 실은 의도가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반면에 이성적인 세계관 속에서 완벽한 정의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 사이에서도 맹점은 존재했으니 본능에 충실한 존재 바로 ‘ 야후’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쯤에서 조용히 딴지 하나를 걸어보자. 모든 인간에게는 후이늠국의 말들처럼 이성적인 면과 동시에 책에서 등장하는 야후에게서 느낄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면이 동시에 존재한다. 사실은 이 두 가지 면 중에서 하나만 분리해 오로지 이것만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는 문제이다. 후이늠국의 존재들은 스스로 우월한 존재로 우월감에 빠져 살지는 않는다해도 상대적으로 야후보다는 우월하다는 의식이 강하다. 후이늠국의 존재들은 세상의 악을 모른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야후를 인지하는 인식들은 상당히 부정적임을 알 수 있다. 야만인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 뿌리가 그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다면 그 판단은 이성적이지 못하다는 게 내가 말하는 딴지의 핵심이다. 물론 그들 중 몇몇 무리들은 야후의 교화를 논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적대시한다.
그런데 말이다. 딴지라고 했지만 사실은 이 사소한 에피소드는 다소간에 희망을 내포하는 메타포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후이늠국의 지배자와 같은 이성적 분별력을 지닌 ‘인간존재의 실존’이 먼저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다음에 우리 인간은 우리보다 사악하고 치졸하며 야만적인 인간본성에 빠져있는 이들을 교화하고 개화할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되는 거다.
진부하게도 길어졌지만 어쨌든 이러한 낭설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며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개인의 사심이다. 그리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걸리버 여행기에서 기억하고 싶은 것을 적어보자. 3부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로 소개되고 있는 ‘스트럴드브럭’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나 강렬하다. 아니 어쩌면 내 의식들과 잘 들어맞는다고 해야할까. 걸리버는 영원한 삶에 대한 긍정적 끌림을 길게 표현하고 있었지만, 스트럴드브럭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영원한 삶은 불행으로 점철된 암울한 시간을 선사해줄 뿐이라는 이야기. 시간을 잊고, 기억을 잃어버리며, 가족을 잃고, 결국에는 스스로의 존재감을 상실해가면서까지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스트럴드브럭의 존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가.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기에 숨이 찰 정도다. 정치적 비판과 풍자와 해악이 가득하다고는 하나, 나는 조금은 더 개인적인 시선으로 침잠해서 작품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정치와 권력, 인간의 욕망 이기심 질투.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 개인의 역사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 역사와 역사가 서로 얽히고 관계를 형성하면서 더 복잡한 사회문제로 확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부디 정치적으로만 갇혀 해석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사소한 부탁하나를 내려놓는다.
저자의 의도(사실 작가를 옆에 데려다 놓고 직접 대화하지 않는 이상 그의 사상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 다양한 동시에 애매할 뿐이다)를 떠나서 생각하기를 하나의 것에 집착하지 말고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보기를 바란다.
그 어떤 부와 명예, 돈과 권력도 종교적으로 말하자면 다 무의미하다. 죽을 때는 다 빈손으로 돌아간다던 어른들의 말이 생각난다. 영원한 삶을 사는 비련의 주인공 스트럴드브럭을 보며 나는 감히 생각한다. 주어진 시간만큼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으로 가장 보편적인 동시에 이상적인 이데아를 꿈꾸기를.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기를...
오늘은 살아가는 모두에게
사랑하는 아들과 딸에게도 굳건한 건투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