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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평점 :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모든 순간의 가치
근 한 달이 넘게 멈추었던 시계를 다시 돌린다. 책 읽기의 시계가 멈추어버린 건 의도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딱히 거부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 시간들이었나보다. 긴 공백을 깨고 오랜만에 다시 집어 든 책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이었다. 이번 책은 이어령 교수와 인터뷰 작업을 진행했던 저자 김지수와의 두 번째 특별한 만남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찌보면 이 두 사람이 이전에 내놓았던 작업 ‘라스트 인터뷰’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의 ‘심화 편’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까? 두 사람의 대화로 이야기는 시작되고 확장된다.
때때로 이들의 이야기는 선문답처럼 아련하면서도 강렬하고, 흔들리는 듯하면서도 제자리를 찾아간다.
책 속에 김지수는 이어령 교수의 자택을 화요일마다 찾는다. 그는 기록하는 이인 동시에 대화의 상대자이고, 질문을 하면서도, 깨닫고, 교감하는 이로 이어령 교수 옆을 지킨다. 그가 단순히 기록하는 이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말이다. 질문을 하면서 교수의 깊이 있는 이야기를 세상으로 끌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건 김지수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본 책의 느낌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어령 교수를 중심으로 들여다본 책의 느낌은 어떨까. 여든여덟. 그의 인생은 대쪽 같다. 굳건하고 강건하다. 또한 동시에 유연하다. 노 교수의 이야기를 접하는 순간순간 문득 인간이 한평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깨달을 수 있을까, 라는 막연한 질문이 떠오르기도 한다.
교수는 암 환자의 입장에서 조금씩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하며 마지막을 준비해가는 그런 이야기에 국한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죽음이 모든 것의 최후 마지막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 이면에 존재하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의 생생한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책은 그가 평생 관심 갖고 노력해온 다양한 학문과 그만이 생각하고 지켜온 고뇌와 성찰의 문제들을, 오직 이어령만의 열쇠(지식과 영성의 열쇠)로 풀어내고 있다. 장르의 한계를 만들지 않았던 그 자신의 삶처럼, 그의 시선은 다방면으로 확장되고 주저함이나 쉼 없이 계속 뻗어나간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삶과 죽음, 인문학과 문학, 자연과학, 철학, 종교 등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어 깊이와 성찰이 빛나는 노 교수의 다양한 이야기를 접해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보면 책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다고 마냥 무겁거나 슬프거나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책은 진지하고 다정하다. 그래서 더 없이 생각하기에 좋다. 생각이 많은 내게 또 다른,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떤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선물로 준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삶의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는 교수의 말처럼, 이 순간도 역시 내게 과분한 선물이지 않은가.
‘죽음이 생의 절정’이라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그 죽음이, 그 절정이 어둠이 아닌 대낮이라고 했던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찬란한 순간이 죽음이라는 노교수의 이야기는 거룩하기 이전에 차라리 아련한 슬픔으로 다가온다.
교수는 멀고 험한 길의 안내자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듯했다.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어쩌면 우리 모두가 결국 깨달음을 비로소 얻게 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또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이야기에서 대자연이 지닌 무한의 에너지로 인해 한없이 작아지는 미약한 존재처럼, 마침내 숙연해지는 내면을 만났던 것을 기억한다.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p156
“오늘도 내일도 똑같으면 뭐하러 살 텐가. 진리를 다 깨우치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네. 이제 다 끝났잖아. 서울이 목표인 사람은 서울 오면 끝난 거야.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유지. 반환지가 있을지언정 목표는 없네. 평생을 모험하고 방황하는 거지. 길 위에서 계속 새 인생이 일어나는 거야. 원래 길의 본질이 그래. 끝이 없어. 이어지고 펼쳐질 뿐.” -p172∼173
“삶의 고통은 피해가는 게 아니야. 정면에서 맞이해야지. 고통은 남이 절대 대신할 수 없어. 오롯이 자기 것이거든.” -p192
상처와 고통을 거부하지 말고 끌어안아야 한다는 의미를 생각한다(필록테테스의 활). 그것이 결국 내게 방패가 되고 무기가 되어줄 거라는 의미도 함께 생각한다. 탕자로 방황하던 아들을 맨발로 마중나간 아버지와 방황한 아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존재의 가치를 다시 평가하는 노 교수의 깊은 성찰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천천히 모든 순간순간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본다.
“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p165 ”
이제 지극히 사사로운 사족 몇 개를 남겨본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서 겨울잠을 자야 할 것 같은 생각만 드는 요즘이다. 오늘도 인후염과 구내염으로 소염제를 추가해서 먹고 끄적이는 중이다. 비가 이틀 이어서 내리고나니, 낙엽이 바닥을 다 덮을 정도다. 가을은 왜 이다지도 짧은지. 다들 건강 잘 챙기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