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온 스노우 Oslo 1970 Series 1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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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스뵈의 <블러드 온 스노우>를 읽다.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펄프 소설 도전
작가들은 펄프 소설(갱지에 인쇄한 B급 통속소설)에 대한 향수가 있는 듯 하다. 스티븐 킹도 1973년을 시간배경으로 조이랜드(Joy Land)를 그런 회고적인 과거향수에 젖어 펄프 소설스러운 표지로 출간한 일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요 네스뵈다.
네스뵈는 펄프 작가군중에서도 [내 안에 살인마]같은 누아르 소설의 걸작을 쓴 '짐 톰슨'을 특히 좋아했으니, 이번에 독자들에게 보여준 과감한 시도에는 적잖게 그 영향도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본작은 [오슬로 1970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단숨에 읽고난 소감은,-비유적으로- 펄프 소설의 값싼 재질의 펄프(pulp)보다는, 펄프잡지들이 나오던 당시(1900대초부터 1950년대까지)에 상대적으로 훨씬 비쌌던 슬릭(Slick)이나 글로시(Glossy)같은 광택이 많이나는 고급 종이에 인쇄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펄프 픽션을 표방했지만, 궁극적으로 일급 작가다운 아름다운 산문이 촘촘하게 박혀있는 세련된 작품이 나왔다고 할까. (새로운 시도를 위해서일까,영어 번역본은 해리홀레 시리즈를 늘 번역해주던 Don Bartlett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학을 연구한 Neil Smith가 맡았다. )



네스뵈의 창작 스타일 그리고 스노우맨을 떠오르게 만드는 분위기

요 네스뵈는 세부적으로 이야기의 계획을 짜는 행위를 반복적으로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리에 앉아 글을 쓰기 시작할 때, 가야할 방향과 해야할 일을 정확히 알게되며,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글을 쓸 때는, 뭔가를 창조하고 있는게 아니다. 나는 그저 이미 그곳에 있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내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해준다. 왜냐하면, 내가 이야기를 하다가 삼천포로 빠지더라도 언제나 그것을 통제할 수 있는 입장에 있게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앉아봐. 들려 줄 엄청난 이야기거리가 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 이번 작품도, 요 네스뵈는 비록 백열하는 상태에서 창조성을 분출하며 짧은 시간동안 작품을 완성했다고는 했지만, 이 이야기는 늘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는 그저 부유하던 이야기를 정돈하여 받아적었을 뿐이다. 그래서일까, 짧지만 완성도 높은 이 작품에 요 네스뵈의 팬들은 올라브가 코리나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렸듯이, 속절없이 매료되고 만다. 특히 배경적으로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오슬로의 차디찬 겨울인지라, 어쩔수 없이 작가의 대표작인 [스노우맨]을 여러번 떠올리게 되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단란한 가족의 삶이 정원의 눈사람과 대조되었다. 결국 소년은 눈사람을 만드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거나, 약간의 물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아주 제대로 만든 눈사람이었다. 모자를 썼고,검은 돌로 된 기계적인 미소를 지었으며, 나무 막대로 만든 팔은 이 부패한 세상과 거기서 일어나는 미친 짓을 모두 포용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p.166))
눈내리는 스칸디나비아의 차가운 겨울이라는 배경은, 이쪽 미스터리에 취향을 공고히 한 독자들이 은연중에 기대하게 되는 전형적인 분위기임에 틀림없다. 마치 아이스크림하면, 시원함을 기대하는 것이 자명하듯 말이다. 그 기대를 저버릴수 없다는 듯, 요 네스뵈는 눈내리는 노르웨이의 겨울 이미지를 마음껏 이용한다.

 

클리셰 그리고 올라브

해리 홀레라는 캐릭터의 일부는 배트맨의 영향을 받았다고 작가는 고백한다. (정의감, 결코 포기하지 않는 면, 특히 충동적이면에서) 요 네스뵈는 한 인터뷰에서, 처음으로 '해리홀레'(Harry Hole)라는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 당시, 홀레의 일부는 '닐스 아르네 에겐(Nils Arne Eggen)'이라는 노르웨이의 괴짜 축구 코치에서, 일부는 프랭크 밀러가 창조한 배트맨(Batman)의 조합물이었음을 밝힌다.
(한 인터뷰에서 네스뵈는 가장 좋아하는 가공의 영웅으로 '배트맨'을, 가장 좋아하는 악당으로 '조커'를 꼽았다. 프랭크 밀러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
거기에 더하여 작품을 쓸 수록 작가 본인의 이미지가 주인공인 홀레에 투영되어 갔다. ('모든 작가는 자신에 대해 쓸수 밖에 없다는 헤닝 만켈의 말처럼, 이것은 피할수 없는 일.부지불식간에 작가는 해리 홀레에게 자전적인 요소를 심어넣게 되었다. 정확히는 해리 홀레 시리즈 세번째인 [레드브레스트]때부터.) 결국 해리 홀레는 Nils Arne Eggen이란 축구코치에 배트맨 그리고 요 네스뵈 자신을 뒤섞어 만든 인물인 셈이다.
작가가 줄기차게 해리 홀레를 주인공으로 10권의 책을 쓴 후,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 올라브(Olav)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이전에 일관되게 유지하던 주파수와는 사뭇 이질적이다. 다시말하면 올라브는 해리 홀레와는 매우 다른 인물이다. 장 필립 투생의 말처럼, 쓴다는 것은 우주와의 만남. 작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우주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삶의 모질음, 삶의 전망없음으로 버무려진 고독한 킬러 올라브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작가가 그를 통해서 응시하고 가닿고자 하는 어떤 장소에 다다를 수 있다.
(특히 그 아름답게 쓰인 종결부는 한동안 올라브의 녹아내리는 눈물처럼, 쉬 마르지 않고, 마음속을 계속해서 흘렀다.)


전형성의 극복과 스칸디나비아 범죄소설

그런데, 요 네스뵈는 이번에 '보스의 여자를 사랑하는 킬러'라는 그다지 새롭지 않은 소재를 들고 나왔다. 클리셰로부터 벗어나려는게 보통의 작가들의 태도인데, 요 네스뵈는 정 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이 점은 해리 홀레라는 작가의 분신과 같은 캐릭터를 만들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외롭고, 알콜중독에, 여자를 좋아하고, 시니컬하면서 로맨틱한 인물인 해리 홀레. 작가는 이 모든 특징이 중년의 남자 형사에게 있어서 지독하게 상투적인 특징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이 때 그는 자신의 역할 모델이었던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말을 떠올린다. "상투성을 껴안고, 그것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라." 그렇게 상투성을 넘어서서 탄생한 캐릭터가 바로 우리가 열광하는 해리 홀레다.
본작 [블러드 온 스노우] 역시, 전혀 새롭지 않은 소재에서 출발하지만, 전형성과 진부함을 극복하고, 미적 긴장감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
펄프픽션을 표방한 범죄소설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왔지만, 우리가 흔히 규정하는 장르의 전형성을 모호하게 만들며 그 경계를 지운다. 그저 단순히 오락거리로 읽는 평면적인 책 (이런 책은 깊이가 없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에서, 당대의 상황에 정직하게 반응하며, 개인 실존에 관한 삶의 숨겨진 비밀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입체적인 책으로 육박하며 다가온다.
이에 관련하여 요 네스뵈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스칸디나비아 산(産) 범죄소설 (crime fiction)은 다른 나라의 범죄 소설보다 약간은 독자들에게 도전의식을 북돋아준다. 스칸디나비아에서만들어진 책 표지에 "범죄 소설"이란 딱지를 보게된다면, 그것은 '펄프 픽션' (싸구려 통속소설)과 동의어는 아니다. 물론 펄프 픽션이면서, 가벼운 읽을 거리일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사람(entertainer)으로 보고 있지만, 하지만 오락거리(entertainment)가 꼭 가벼운 오락거리일 필요는 없다. 나는 내가 만든 오락물을 꽤 진지하게 여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것이 스칸디나비아 범죄 소설가를 타국의 범죄소설가 사이에 차별성이 존재하는 지점이다. 그들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이러한 권한을 갖는다. 모든 책들이 작가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간에 정치적이다."

 

블러드 온 스노우 & 레미제라블

혹자는 1인칭 주인공시점으로 이야기하는 난독증을 갖고 있는 청부킬러 올라브가 독자들을 노르웨이 범죄의 어두운 뒷골목으로 인도했다라고 말하면서 요 네스뵈가 썼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어둡다고 평하기도 했다. 또 혹자는, 올라브의 가슴 찢어지도록 애절하게 망가진 영혼을 통해, 그 주름진 영혼을 통해 새어나온 슬픔과 도달할 길 없는 속죄에 대한 희구가 이 책 [블러드 온 스노우]가 갖는 매혹의 발원지점이라고 보기도 한다. 거기에 요 네스뵈는 70년대 오슬로의 어두운 분위기와 빙하기를 방불케하는 차가운 노르웨이의 겨울 이미지를 실로 솜씨있고 요령있게 뒤섞으면서, 이 작품을 살인과 사랑에 관해 잊기힘든 서글픈 동화의 층위로까지 끌어올린다.
이 작품에서 반복등장하는 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가 살짝 감추고 있는 이 이야기 전체의 맨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집에 책은 딱 한 권 뿐인데요?"
"도서관에서 빌려 봐요. 책은 자리를 차지하니까. 게다가 난 짐을 줄이는 중이라서요."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레미제라블? 무슨 내용이에요?"
"아주 많은 것에 대한 이야기죠."
그녀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가장 큰 줄거리는 한 남자가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과거를 보상하며 여생을 보내죠."
"흠, " 그녀는 책을 들어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꽤 무겁네요. 이안에 로맨스도 있나요?"
"네."
(p.57)

 

밀도를 높인 군더더기 없는 작품

 

기가 질릴정도로 두꺼웠던 전작들과는 달리, 최소한의 단어들만을 사용하여 군살없는 작품을 만들었다. 마치 무너진 탄광에 갇힌 광부가 남은 공기가 얼마남지 않아, 숨을 아끼듯 작가는 최대한 단어 수를 줄이고 하고 싶은 말을 아꼈다. 작가는 작심한 듯이, 낭비한 문장이 없이, 필요한 말들만 배열하여 밀도와 순도를 높였다.
그러나 독자를 향해 깜짝 놀랄만큼 강력한 감정적 펀치를 날린다. 묵직하고 둔중한 펀치다. 휘청, 그렇다. 휘청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책장을 덮어도, 잠시동안 세계의 공기가 진동한다.

'가로등 불빛 아래 눈송이가 솜털처럼 춤을 췄다. 정처 없이, 위로 올라가야 할지 아래로 떨어져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채 그저 몸서리치게 차가운 칼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p.5)
'마치 그의 몸에 얇은 얼음 살갗이 돋아나고, 그 아래로 얇고 푸른 정맥이 생겨난 것 같았다. 피를 흠뻑 빨아들인 눈사람처럼.'(p.196)
'그녀는 봉투가 떨어졌던 자리를 보았다. 눈과 피를 보았다. 희디흰 눈. 붉디붉은 피.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왕의 망토처럼. '(p.197)

보다시피 시처럼 아찔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산문이다. 이것은 마치 노래 가사 같다. 요 네스뵈가 작가생활을 하기 이전에 밴드 생활을 하며, 자신의 노래에 작사를 하던 음유 시인이었음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되는 대목이다.
어떤 장면에선 감정적으로 무뎌져 굳게 닫혀 있던 문(門)조차 어찌할 바 모를 정도의 짙은 슬픈 방향으로 밀어젖힌다. 누군가가 감정적으로 들썩거리고 있는 내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고 토닥거려 주었으면 하는 느낌을 한동안 받았다. 이것은 스릴러이기 이전에 이것은 우아하고 솜씨좋게 세공된 사랑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여지껏 읽었던 요 네스뵈가 쓴 어떤 글보다도 슬픈 발라드같다는 생각. 비록 겉모습은 몸속의 신경다발을 쥐고 흔드는 흥미진진한 스릴러이지만, -그 장르의 이름을 한꺼풀 벗겨내고 바라보면-어떤 장면에선 작가가 육성으로 들려 줄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한 듯 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책은 작가에 의해 씌어진 말은 길지 않지만, 책을 읽은 후, 독자에 의해 씌어질 말이 길어지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작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쓰고, 독자는 책을 읽으며 자기 자신을 읽는다. 작품의 중간중간 복원되는 올라브의 과거와 유년의 기억은 상처를 헤집으며 주인공 내면에 펼쳐진 폐허의 풍경을 보여준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기억의 방울들이 밤송이처럼 아프게 쏟아진다.
"불신보다 더한 외로움이 어디 있을까?" ..이 책 어딘가에 나온 조지 엘리엇이 말한 이 문장은 먼 훗날 온 힘을 다해 이 책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그리워질 문장일 듯 싶다. 불우했던 과거를 가진 올라브였던 도피처이자 구원의 희망이었던 코리나는 쓸모없어진 파리행 비행기표처럼, 올라브 삶에서 돌연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방향성을 잃고 방황하는 올라브. (거리는 형태와 방향이 사라지고 사자갈기 해파리의 촉수가 되어 부드럽게 흔들렸기 때문에 길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계속 방향을 틀어야만 했다. 아무것도 그대로 남아 있으려고 하지 않는 이 고무 도시에서는 내가 어딘지 알기 힘들었다. p.180)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아주던 버팀목에 대한 배신이 한 남자를 진한 외로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장면에 마음이 안타까웠다.삶이 올라브를 조롱하고 내동댕이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이 특히 중요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올라브가 현실로부터 도망치며 도모하려 했던 구원(여기서는 코리나와의 행복)이 '사이비 구원' 혹은 '유사 행복'이었던 것 뿐이라는 축축하고도 씁쓸한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초반과 중반에 코리나 호프만에 대한 묘사를 보자. '팔과 얼굴, 가슴, 다리의 희디흰 살결, 맙소사, 마치 햇빛에 반짝이는 눈(雪) 같았다. 보는 사람의 눈(目)을 몇 시간 동안 멀게 만들 정도로 반짝이는 눈(雪).(p.28)'에 비유하며, 설맹(雪盲)이 되어버린 올라브와 희디흰 코리나를 구원의 대상처럼 작가가 설정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녀의 하얀 피부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마치 달빛을 타고 있는 기분이었다. (p.85)'
'내 아래에서 그녀의 가슴이 하얗게, 새하얗게 빛났다."(p.107)
어둠을 밝혀줄 구원의 달빛이라 여겼던 코리나의 본연의 모습은 들춰진 잔인한 현실이었고, 주인공은 돌연 자신의 희망을 의심하며 가장 고독한 세계로 등떠밀리게 된다.
그 압도적인 행/불행의 색깔대비가 흰 눈위에 떨어진 붉은 색의 피만큼이나 분명하다.

제목의 상징성, 그리고 코리나

제목의 상징성을 색채적으로 풀어보면, 피의 적색과 눈의 흰색의 대비.
적색은 피, 상처, 죽음의 고통, 희생, 사랑, 승화와 관련되고, 흰색은 용서와 순수,천국, 영원의 세계를 의미한다.
킬러인 올라브는 피와 죽음, 고통의 상징적 존재에서 사랑과 희생을 통해, 용서와 구원을 받고자 발버둥쳤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환상을 대하는 냉혹한 현실은 결코 친절하지 않다. 올라브의 구원에 대한 헛된 희망을 작가는 무너져 내리는 눈(용서와 구원)에 비유한다.

'내린 지 얼마 안 된 눈에 양 손바닥이 따가웠다. 양손을 움직여 보슬보슬한 눈을 긁어모았다. 하지만 보슬보슬한 눈으로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순백색이고 아름답지만 그걸로 뭔가 오래가는 걸 만들기는 힘들다. 뭐든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뭘 만들든 결국에는 무너진다. 손가락 사이로 무너져버린다.(p.183)'

코리나는 곧 무너져내릴 아슬아슬한 현실 세계의 찰라로 존재하는 유사(거짓)행복일 뿐이다. 그것으로 영혼을 감싸안을 수는 없다.

요 네스뵈가 독자들에게 전언하는 비극적 세계인식은 후반부에 독자들의 마음을 몽땅비처럼 닳게 만든다. 작가가 주인공을 난독증 겪고 있는 인물로 상정한 것은, 열매맺음에 실패한 불모의 사랑을 통해 세상 읽기에 실패한 한 고독한 사내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일 듯 싶다. (내겐 더이상 저들이, 일반인들이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저 음파, 산호초에 부딪혀 사라져버리는 저 음파를 해석할 도구가 없었다. 나는 뜻이 통하지 않는 세상, 일관성 없는 세상을 내다보았다. p.179)

"하지만 글자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읽을 수가 있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가끔씩 잘못 보죠. 그래서 다시 봐야 해요." 나는 눈을 떴다. 그녀의 손은 아직 내 팔에 있었다.
"하지만...잘못...잘못 봤다는 걸 어떻게 알죠?"
"대개는 말이 안 되는 단어들을 보고 알아요. 하지만 가끔씩 한 참 후에야 단어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죠. 그래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알 고 있는 경우도 있어요. 책 한 권 값으로 두 개의 이야기를 읽는 셈이죠."
그녀가 웃었다. 큰 소리로 꺄르르. 옅은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누군가에게 내가 난독증이라고 말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누가 그에 관해 계속 물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p.81)
어떻게 생각하면, 코리나라는 존재가 잘못 인식한 단어같은 존재. 한참뒤에야 올라브는 그녀를 완전히 잘못 읽었다는 걸 깨닫는다.결국 코리나는 그가 화해의 리듬을 이루고 싶은 '세상'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헛된 욕망.
세상에 대한 오독(誤讀). 세상과의 불협화음을 겪고 있는 올라브는 자신이 원하는 시선으로 세상을 읽고 싶어한다. 이것이 영민한 작가가 주인공을 난독증을 갖고 있게 설정한 또다른 이유일 터이다. 자신이 내키는대로 세상을 읽는 것. 그것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어내고픈 바램에 다름아니다.
"더는 이야기를 지어낼 필요가 없어요.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지어낼 순 없을 거에요." (p.192)
"이보다 더 좋은 이야기를 지어낼 순 없다."...
이 아름다운 책에서 단 한 문장의 문장만 허락된다면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과거의 적나라한 무서운 기억들로 점철된 나쁜 스토리 안에서 살고 있던 남자가 그 기억들과의 만남을 유보하고, 다시 쓰고자했던 이야기.
"죽고 싶다는 게 아니에요. 엄마, 난 그냥 이야기를 지어내고 싶어요.(p,142)"
잔인하게도 작가는 올라브가 갖고 싶었던 최소한의 온기를 느낄수 있는 아랫목같은 세상을 독자가 살짝 엿보게 해준다. 그 이룰 수 없는 따스한 이야기를 읽고 난 독자는, '나'와 '등장인물' 간의 거리두기를 지우고, 기적적으로 책이라는 공간 속에서 주인공과 내가 어떤 느낌 안에서 함께 만나는 짧지만 소중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마리아 미리엘

올라브가 더 낫게 고쳐 쓰고자했던 바로 이 대목.
줄기차게 작품 내에서 울림을 갖는 레미제라블의 이야기.
"장 발장은 프랑스 전체에 수배령이 내려진 악명 높은 살인자다. 그리고 가여운 매춘부 팡틴을 사랑했다.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기꺼이 했다. 그가 한 일은 모두 다 그녀를 위해, 그녀를 향한 사랑, 광기,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지 자기의 부도덕한 영혼을 구원하거나 인류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아름다움에 굴복했을 뿐이다. 그래, 그런 것이다. 치아도 머리카락도 없이 망가지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 매춘부의 아름다움에 굴복하고 순종한 것이다. 아무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 못한 여인에게서 그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랬기에 그 아름다움은 오로지 그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아름다움의 것이었다." (p.142)

그런데 이 이미지와 후반부에 매춘부 출신의 마리아 미리엘에 대한 묘사가 절묘하게 포개진다.

"슈퍼마켓 계산대에 앉아있고, 그가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여자, 왜냐하면 그는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불완전하고, 결함과 하자가 있고, 늘 스스로를 희생하고,사랑의 한심한 노예가 되고, 그저 다른 사람의 입술을 읽을 뿐 결코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줄 모르고 스스로를 누군가에게 굴복시키고 거기서 보상을 얻는 여자.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가 원치 않았던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그 자신의 굴욕이었다. 그리고 그가 아는 최고의 인간이자 가장 아름다움운 피조물이었다. (p. 191)

결국 올라브에게 있어서 마리아 미리엘은 자신을 되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인 것이다. 악몽의 산실인 과거의 기억에 매몰된 출구없는 존재. 폭력과 절망적인 삶의 구덩이에서 허덕이는 존재.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추레한 모습. 올라브는 마리아인 동시에 올라브가 어릴 때 오슬로 공공도서관에서 빌린 [동물의 왕국]이란 책에 나오는 비쩍마른 상처입은 하이에나같은 존재라고도 할수 있다. 이형 동질체같은 것. 부정하고픈 진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올라브는 그런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하고 싶지 않은 존재"라고 말하기도 하고, 팡틴에게 빗대어 "아무도 찾아내지 못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찾아냈다"고도 말한다.
마리엘은 올라브의 보듬어야할 상처이자 응시해야할 자아였던 것이다. 결국 작품 내에서 팜므파탈임으로 확인된 코리나는 구원의 영토가 아닌 거짓 희망이었다. 따라서 관속에 들어가는(후반부에 올라브가 장례식장의 관속에 숨어있는 장면을 상기할것) 유사 죽음으로는 악몽속에서 구원의 출구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상처를 비껴가려는 행위이므로 진정성이 획득되지 않는다. 코리나가 나타나기 전에 마리에 미리엘은 이미 있었다. 올라브의 마음 속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그녀. 그것은 그녀가 올라브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자신과의 불화와 화해하고, 집요하게 상처를 응시하는 것, 그리고 그안에서 의미를 찾는것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자기구원에 이르는 일임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구원과 속죄는 올라브가 피를 흠뻑 빨아들인 눈사람처럼, 가게 앞에서 마리아가 앉게 될 자리를 응시하다 생의 맨홀을 닫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대부분의 구원이 그러하듯, 희생에 의해서. 그의 상처입은 영혼을 가두던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벽에 부딪칠 때 울리는 소리를 듣고 벽 뒤에 또 다른 방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 희망이 반짝 생겨난다.

우리를 조금씩 갉아먹지만 그렇다고 무시해버릴 수도 없는, 우리를 지치게 하는 끔찍한 희망.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죽음에 의미가 있고 이야기가 있으리라는 희망.(p.30)

벽 뒤에 또 다른 방이 있다고 믿으며, 반짝 빛나는 희망을 꼭 쥐고 있던 이 고독한 남자의 소원은 이루어졌는가.

[블러드 온 스노우] 읽기는, 결국 이 남자가 도망치려했던 현실과, 지름길 찾기에 대한 실패를 묵묵히 들여다 보는 일에 다름아니다.

종결부의 숨막히는 아름다움 때문에, 우리의 감수성은 참을수 없을만큼 예민해진다.

책을 덮은 후에도 한 동안 우리 주변에 이 외로운 남자의 긴 그림자가 서성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모험 그리고 기대

몇 몇 독자들은 이 작품이 너무 짧다고 불평하지만, 개인적으로 [블러드 온 스노우]는 이 정도의 길이(중편 소설)가 더 어울리는 작품이었다고 본다. 기존에 쓰던 장편소설보다 이야기의 주제와 더 부합되는(더 몸에 잘 맞는) 장르를 작가는 개척한 것이다. 이 작품을 읽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짧은 시간동안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독자 사이에 교감과 몰입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읽어본 사람만이 안다. 견고한 장르의 규칙을 엄격하게 지키는 듯 하면서도, 묘하게 어떤 부분을 일그러뜨리며 지루한 되풀이를 피했다. 참신성은 그 맥락에서 태어 났다.
작가의 새로운 모험은 계속될 전망이다. 이번에 기존 틀을 지우고, 다른 방향성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스릴러가 아닌 다른 장르도 도전하고 싶은 작가적 욕심을 드러냈다.
요 네스뵈에 따르면,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총에 관한 이야기인 [The Gun]이란 소설을 구상중이라고 한다. 톨스토이풍의 대하 역사소설. 독자들은 총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가문 대대로 물려받은 독일에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총. 이걸 통해 작가는 폭력의 역사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것은 요네스뵈가 최초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머리 속에 맴돌던 이야기였다고 한다. 독자에게 꼭 쓰고 싶다고 약속했으니 언젠가는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기대된다.

 


조만간 번역되어 나올 [미드나잇 선] 오슬로 1970 시리즈 두번째 작품이다.

 

[블러드 스노우]와 요 네스뵈 작가의 해리홀레 시리즈 & 또다른 스탠드얼론인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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