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수 없는 모중석 스릴러 클럽 30
할런 코벤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할런 코벤 (Harlan Coben) - 용서할 수 없는 (Caught 2010), 비채 (2012, 6)

 

[용서할 수 없는]을 읽다.

 

이 책의 원제는 Caught지만, 출판사측에서 [용서할 수 없는]이란 제목으로 변경하여 국내 출간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원제보다 오히려 한결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고 느꼈다. 작가 스스로도 이 작품을 누가 용서를 받아야 하고, 누가 용서 할 수 없는지에 대해 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용서에 관한 소설이다(a novel of forgiveness)라고 말하고 있다.

용서라는 묵직한 단어가 들어간 제목 때문일까, ‘기다림이란 마치 용서와 같아 언제나 육체를 지치게 하는 법이란 기형도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그리고 가장 고귀한 복수는 용서하는 것이다(The noblest revenge is to forgive)’라는 금언도 떠올랐다. 어느 쪽이나 용서가 육체와 정신을 마모시킬 만큼 힘든 것이라는 사실을 머금고 있는 말들이다.

타인을 용서하는 과정은 고통을 참고 흡수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기에 용서를 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자신을 희생자가 아닌 생존자로 여긴다. 그 정도로 어떤 종류의 용서는 쉽지 않다.  

 

자신의 남편을 차로 죽인 알코올 중독자 아리아나 나스브로에 대해 웬디는 이렇게 일갈 한다.

 

당신이 더는, 다른 아이의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을 실행하란 말이에요. 버스를 기다렸다가 그 앞에 뛰어들라고요. 이도 저도 싫다면 나와 내 아들한테 다시는 찝쩍거리지 말란 말이에요. 우린 당신을 용서할 생각이 없어요. 추호도.”(p.86)

 

작가는 이 대목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드리워진 불편한 관계의 한 예를 드러낸다. 독자는 이를 통해 피해자가 직면한 분노의 깊은 골과 치유되지 않고 곪은 상처가 존재하는 한 용서란 요원(遙遠)한 것이라는 비관적 인식을 아프게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엔 이 둘의 관계뿐 아니라, 웬디와 댄 머서를 포함하여 여러 인물 간의 가해자/ 피해자(용서자)의 구도가 등장한다. 그 구분되지 않고 뒤엉켜있는 구도 속에서 이 소설의 이야기는 전개되고 물론 어느 순간 접점이 등장한다. (그 구도의 자세한 관계는 이야기의 핵심이라, 아직 읽지 않은 독자에게 미리니름이 될 수 있기에 적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떤 인간은 항상 가해자이고 다른 인간은 피해자(용서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가해자/ 피해자로 가름하는 분명한 선긋기란 불가능하다. 후반부를 읽어보면, 작가는 피해자가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가해자도 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는 듯 보인다.

 책을 덮고 나면, 작가의 목소리에 동조하면서도 용서하면 과연 잊을 수 있을까?’ ‘가해행위를 간과하고 덮어주는 것과 진정한 용서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도 작가가 말하는 참된 용서를 체현할 수 있을까?’와 같은 피할 수 없는 질문들로부터 도주하기 힘들게 된다. 

 

 

 

 

(코벤은 그림에 비유하여, 스탠드 얼론(stand-alone)을 완전한 공백의 캔버스라고 말한다. 마이런 볼리타나 미키 볼리타 같은 시리즈물은 몇가지 것들이 이미 채워져 있는 상태라, 시작은 살짝 수월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에 의해 제한되어지기에 더 어렵다고 한다. 그둘은  사용처가 두개의 다른 근육이며, 따라서 다소 다른 목소리가 나는 셈이다. 하지만 그 매일 매일 고통스럽고,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을 증오하며 쓰는 과정은 거의 항상 똑같다며 털어놓는다. 이 작품은 스탠드 얼론으로 한정했을 때, 국내에 일곱번째 출간된 작품이다.) 

 

 

이 책의 한 축이 용서에 관한 것이라면, 또 다른 축은 방송과 인터넷을 포함한 미디어의 위험한 힘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선 자극적 소재로 시청률을 높이는 현장체포프로그램 리포터인 웬디의 함정에 빠져 빈민가의 어린 농구선수들의 덕망 있는 감독인 댄 머서의 인생은 파멸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그가 정말로 파렴치한 소아성애자인가,하는 궁금증도 이 책을 이끌어가는 힘 중 하나이니,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 바란다.)

 

그 빨간색 문을 열면 내 인생이 끝장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책의 서두에서 등장하는 그 빨간 문으로의 접근이란, 미디어의 무자비한 횡포를 경험하게 되어 무너져 내리는 개인의 삶을 우의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어떤 시인의 말처럼 이 문()은 칼날과 같다. 댄 머서는 그 문을 열고 들어가고, 그의 세계는 두 쪽으로 잘려 두 동강이 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과 이후의 세계는 다시는 봉합될 수 없는 별개의 세계다.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기에 누군가의 사회적 일탈이 방송되거나 기사화되면, 인터넷과 연동되면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수많은 군중들의 분노의 발화를 피할 수 없다. 복제된 기사가 셀 수 없이 많은 블로그에 도배되고 성난 댓글들이 폭주하고 질주한다. 혹자는 마녀사냥이라 부르고 혹자는 현대판 인민재판이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이제 전 세계에 편재해 있는 현상이다.  디지털 전과기록은 썩지 않는 미이라처럼 온라인 상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인터넷은 나다니엘 호손이 쓴 [주홍 글씨]에 등장하는 ‘A(간통(Adultery)’을 뜻하는 단어의 첫 글자)’라는 글자가 붉게 수놓아진 옷처럼 개인의 잘못을 만천하에 공개한다. 일생이 아니라, 죽고 난 후에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족쇄와 같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위험천만한 온라인상의 시민저널리즘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미디어의 먹이사슬 안에서 포식자의 위치였던 웬디가 먹이로 전락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그녀가 표범에서 톰슨 가젤로의 존재변이 되는 대목은 그 높이의 낙차가 너무 커서 아찔할 정도였다. 

 

 (코벤의 또다른 스탠드 얼론인 숲(Woods 2007 )이 올해 비채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코벤이 페이스북-리얼리티 티비 세대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세계에 사는 작가로서 이런 소재로 글을 쓰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피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작가란 존재는 자신의 작품에 그 시대의 성격을 투영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코벤은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던 소아성애자를 체포하는 TV 뉴스 쇼를 보다가 만약 나와 친한 사람이 이런 쇼에 지금 등장하여 체포 된다면 어떨까?’ ‘만약 그가 내가 알고, 신뢰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존재라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이 작품에 착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의 모든 상상력의 발원지는 바로 선정주의로 물든 TV뉴스 쇼였던 것이다.) 내가 잘 알고 지내던 친한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 범용한 인물들이 대응하는 방식을 결코 범상치 않은 방식으로 풀어가는 그의 장기가 이번 작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는 느낌이다.

   코벤은 이렇듯 일상성을 강조하는 작가다. 세상엔 잔인한 살육과 선정성에 의지하여 독자의 주목을 끄는 타입의 작가들이 있지만, 그는 그런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코벤은 마치 저희 음식점은 그렇게 자극적인 조미료로 맛을 내지 않아요, 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일급 요리사와 같다. 그는 일상 안에서 긴장감을 창조하는 것이 더 쉽다라고 밝히면서 백악관의 음모 같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이야기나,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을 난도질하며 죽이는 사람에 대해서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의 스타일은 평범한 방식으로 살아가던 보통 사람이 어떤 사건에 휘말렸을 때 어떻게 그 상황을 헤쳐 나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의 작품에 편만해 있는 이러한 일상성을 응시하다 보면, 나와 가까운 평범한 이웃에게 일어나는 사건처럼 보이기에 독자는 감정이입을 수월해져, 몰입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작가는 이 밖에도 현대자본주의 사회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들을 능숙한 솜씨로 작품 가득 부려 놓았다. 앞서 말한 미디어의 횡포나 새로운 권력으로 부상한 인터넷의 문제 뿐만 아니라, 진위를 따지지 않고 자극적인 사건만을 쫓는 언론의 황색 저널리즘과 사건을 오도하는 기사와 오보, 그리고 신문사나 방송국 기자들과 경찰들의 함정수사에 대한 윤리적 문제, 소아성애자들에 대한 대중적 공포, 해고로 인한 자존심을 구긴 가장들의 문제, 빈부격차로 인한 사회적 차별까지 사회의 어두운 환부에 대한  작가의 근심 어린 시선을 책 안에 담아냈다.

 

미국 내에 아동폭력에 대한 공포는 지난 20년 동안 어린이들에게 적절한 교육, 영양, 주택공급, 양육, 의료 등을 베풀지 못한 탓에, 그러한 죄의식을 소아성애자나, 아동 학살자등에 투사한 것이며, 낯선 이들에게 점점 아이를 맡기는 일이 많아지는 데 따른 부모들의 불안과 죄책감을 부추기기 위해, 미디어의 보도 역시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는 흥미로운 의견 (베리 글래스너(Barry Glassner)-공포의 문화(The culture of fear))이 있어 이곳에 부기한다. 이러한 공포의 조장에는 자극적인 소재를 선호하는 언론이 배후 세력임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 더. 실제로 FBI순수 이미지라는 작전으로 온라인상에서 거짓 아이디로 어린 10대나 아동인척 하면서 소아성애자들을 단속했다고 한다. 게다가 방송국 기자들도 (이 소설에서처럼) 상대가 나타나면, 카메라를 들고 경찰과 함께 약속장소로 나타나는 함정수사를 하곤 했는데, 이러한 행동은 유혹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죄를 짓지 않았을 사람들에게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확언하긴 힘들지만, 코벤은 이러한 정황들을 받아들여 그것을 자신의 소설 공간 속으로 형상화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는다.   

 

 

(코벤의 다른 책들,단 한번의 시선(Just one look2004), 결백 (The innocent 2005)) 

 

 

코벤은 여성의 관점으로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말하면서, 여성 페르소나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남성 페르소나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비해 그리 어렵지 않게 느낀다고 한다. 때로는 그것이 오히려 쉽다고 밝히며, 아마도 약간의 거리감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하고 작가는 생각하고 있다. 개인적으론 [용서할 수 없는]의 여성 주인공 웬디의 존재는 남성작가 썼음에도 불구하고, 위화감이 없었다. 몇몇 남성 작가의 경우, 여성 주인공을 너무 사실성이 떨어지게 그려내, 공감가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는 뭐랄까, 마치 남자가 양산을 쓰고 다니는 것 마냥 어색하다. 어떤 작가는 여성 캐릭터를 너무 매력적으로만 보여지게 해서 단조로운 캐릭터 안에 가둬버리는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코벤이 [용서할 수 없는]에서 그려낸 웬디는 전형적인 호감 가는 주인공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독자가 밉상이라고 여길만한 요소가 다분히 포함하고 있는 인물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이 비현실적 인물로 착색되는 것을 경계한다. 코벤은 호감가는 캐릭터보다 현실감이 있는 캐릭터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밝히며, 자신은 구태의연한 위험에 빠진 가련한 여자 주인공 캐릭터를 싫어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는 상투적인 정형화를 거부하며 실제에 가까운 인물로 자신의 텍스트를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상처로 그늘진, 착하고 매력적인 여주인공은 휴가지 해변가의 하와이언 꽃무늬 셔츠만큼이나 흔하디 흔하지 않은가. 코벤은 19권의 책을 쓰는 동안 (이 책의 출간 기준) 여자 주인공을 내세운 것은 단 두권에 불과할 정도로 남성 주인공 위주의 글을 썼는데, 그래서인지 웬디(Wendy)라는 캐릭터를 그의 시리즈물 주인공인 마이론 볼리타(Myron Bolitar)를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는 주인공으로 선정할 만큼 애착을 보인다. 코벤의 작품에는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누가 선()한 인물이고, 누가 악()한 인물인지 구분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도 웬디와 에드 그레이슨을 비롯해서 등장인물의 다수가 착한 사람/ 나쁜 사람과 같은 이분법적 도식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코벤은 흑과 백처럼 색깔이 분명한 인물들 보다,소위 회색 인물들(gray characters)에 대해 쓰는 것이 훨씬 흥미롭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러한 모호한 인물들이 그의 작품을 견인하는 힘 중 하나라 할 수 있겠다. 여담인데, 이 작품 [용서할 수 없는]에는 코벤의 충성스런 독자를 위해 시리즈 물에 나오는 마이론 볼리타의 친구 윈(윈저)를 등장시켜 읽는 재미를 배가 시킨다.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반색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코벤은 마이론의 페르소나와 어떤 이야기가 어울리지 않으면 굳이 그를 주인공으로 쓰지 않고, 독립작품(스탠드얼론)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코벤의 이런 태도가 한 캐릭터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색깔의 작품을 보여주게 된 배경이다. 어떤 경우라도, 반복은 곧 진부해지고, 철면피하기 때문에 이는 작가로서 바람직한 모습이라 하겠다.(이 작품은 코벤의 통산 10번째 스탠드얼론이다. )   

 

이 작품 [용서할 수 없는]용서라는 큰 주제를 전경화하면서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불편하고 달갑지 않는 주제들을 배경에 오롯이 담아낸 수작이라 말 할 수 있다. 타인의 잘못을 껴안고, 상처를 보듬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서도 반추하게 만드는 작품이라 책을 덮은 후에도 한동안 강한 정서적 울림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매양 작품을 쓸 때마다 이 문장이 마음을 끄는가? 독자의 흥미를 끄는가? 이것이 이야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는 작가의 작법은 이 책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독자는 그가 자신의 작품을 세심하게 다듬고 연마했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코벤은 부조리한 현실을 겨냥하고, 동시대의 치부를 까발리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장르 소설에 독자들이 중시하고, 기대하는 경탄할만한 반전과 짜릿한 재미또한 잊지 않는다. 애초에 작가가 지향하는 글쓰기의 세계가 작품에 좀 더 서스펜스(suspense)를 담아 독자들을 다음 단어, 다음 문장, 다음 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고, 그러한 것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스릴러라고 믿고 있기때문이다. 어느 정도 이 계통의 작품들을 읽어 반전에 익숙하고 단련된 독자라도, [용서할 수 없는]이 선사하는 후반부에는 만족할 것 같다. 독자는 직구를 기다리다 갑자기 떨어지는 커브에 속수무책으로 헛스윙을 하는 타자의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익히 알려졌듯이, 코벤은 반전의 달인이고, 그의 책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작가와의 머리싸움에 도전하려는 독자들의 일급 대련상대다. 독서의 주안점을 재미와 흥미에 두어도 만족감을 줄 것이고, ‘깊이와 작품성에 두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작품은 특급 스릴러의 견본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주변에 망설임 없이 소개해 줄 양질의 스릴러를 찾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이 바로 명쾌한 답변이 될 것이다   

 

   ( 코벤은 이번 작품에서 국내독자들에게 자신의 색깔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빨간 색 문을 열면 내 인생이 끝장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매우 인상적인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작품.

늘 첫문장을 신경써서 만들었던 코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작품 중 첫문장들을 이곳에 부기해 놓는다.

 

"스콧 덩컨은 킬러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단 한번의 시선)

" 당신은 그를 죽일 의도가 없었다." (결백)

"매리앤은 비참한 삶 속에 그나마 남아있던 미덕을 깡그리 파괴해버리는 자신의 저주스런 능력을 한탄하며 쿠엘보(멕시코산 데킬라)를 석잔째 천천히 마셨다. (아들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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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02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세르님,
조심스레 물어보건대, 설마 사진작가 아니어요?
굳이 알라딘에 리뷰를 쓰기 위해 이 많은 장소를 다니면서 이토록 양질의 사진을 찍는 것 같지 않아보여요. 다른데 쓰는데 있죠! 뭐랄까, 작품전에 낸달까. ㅋㅋㅋ
글도 대박이지만 사진에 눈이 더 가는데, 전부터 그랬네요, 에세르님의 글은요.
사진이 정말 예뻐요... ㅎㅎ

에세르 2012-07-09 09:16   좋아요 0 | URL
하하하 소이진님, 사진 작가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요..(언감생심입니다)
좋은 말씀 너무 감사하네요~^^ㅋㅋ
다른 사진 찍을 때 책 사진도 덤으로 찍는데,
요즘 나오는 책들이 멋져서 찍으면 그럴싸하게 나오는 듯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