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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서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2년 5월
평점 :
내가 너에게 보내려다 만 편지를 찾아낸 것은, 지난 일요일 세 번째 책상서랍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바쁘게 지내다보니, 책상 서랍을 열어보는 것조차 어떤 종류의 동물들이 1년에 한 번 정도만 발정기를 갖는 것처럼 연례행사가 되어버린 터였다.
전달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책상서랍 속에 숨죽이고 있는 편지가 불러일으키는 쓸쓸함은 각별하다. 거기에는 망설임이랄까, 때를 놓침이랄까, 용기없음이랄까, 후회랄까 뭐 그런 것들이 잔뜩 묻혀져 있다. 그것은 어쩐지 불발탄이나 뚜껑을 잃어버린 사인펜처럼 서글프다.
세상에는 또 얼마나 보내지 못한 편지가 바닷가의 모래 알갱이처럼 산재해 있을 것인가.그 모든 편지에 대해서 언뜻 떠올려 보기만해도 마음이 무척 무거워진다. 어쩌면...그 무렵 나는 너에게 보내지 못한 편지 뭉치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내가 보내려다 만 편지를 꺼내 읽어보니 지금 와선 정확히 기억해 낼 수 없는 감정들과 이야기들이 촘촘히 박혀있다. 세월이란 그런 것이다. 많은 것들이 시간의 비를 타고 유실(流失)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를 읽으니,신기하게도 서서히 그 시절의 내가 복원된다.
지금은 편지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의 쓰지 않지만, 편지를 많이 썼던 시절이 분명있었다. 짜디짠 외로움의 방증이랄까. 아마도 내 인생에서 보낸 편지의 8할을 그 시절에 보냈던 것 같다. 요리 프로그램을 본다고 해서 배가 부르지 않는 것처럼, 편지가 내 외로움을 채워주지는 못했지만, 그럴수록 나는 편지에 매달렸다. 편리한 이메일의 시대가 도래했음에도 손으로 직접 쓰는 편지를 내가 쓰려고 했던 것을 보면, 편지에는 다른 매체가 주지 못하는 독특한 힘과 매력이 있음에 틀림없다.
한자 한자 밤을 새워 편지지를 메꿔나가는 모습이나, 보내지 못한 편지가 일깨워주는 상념, 옛 편지를 서랍에서 꺼내 읽고 추억에 잠기는 일, 기대감으로 우체통을 들여다보는 마음, 편지를 받은 상대방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반송된 편지 뭉텅이들의 안타까움... 이런 것들은 편지만이 줄 수 있는 정서이고, 편지만이 가진 힘인 것이다.
여기, 편지만이 줄 수 있는 이런 정서와 힘을 이용한 작품이 있다.
[왕복서간]을 읽다.
서간체 소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편지 형식으로 이루어진 3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편집이다.
미나토 가나에가 이번에 선택한 틀은 다름아닌, 18세기에 인기 있었다는 서간체 소설 스타일이다. 서간체 소설 방식을 차용해서일까, 독자는 편지글 특유의 친밀성을 통해 감정의 솔직한 흐름을 따라가며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게다가 작가는 기존의 작품들이 비슷한 스타일을 반복적으로 보여왔고, 그로인한 상투화의 우려가 있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가나에는 이번 작품에서 프레임으로 서간체 형식을 사용하여 변화를 모색했고, 그 결과 타작품들과는 구별되는 뚜렷한 변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서간체 소설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는데, 하나는 한사람이 쓴 편지들로 이루어진 소설이고, 또 하나는 두 사람이나 그 이상의 사람이 쓴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은 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장르쪽 소설에서는 스티븐 킹의 예루살렘 롯(Jerusalem's lot)도 대부분 주인공인 찰스가 쓴 편지로만 이루어져 있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스티븐 킹의 데뷔작인 '캐리(Carie)'역시 서간체 구조로 되어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편지,신문 잡지기사, 책에서의 발췌가 작품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근자에는 서간체 소설을 편지에만 국한 시키는 것이 아니라,일기, 잡지, 블로그, 이메일, 녹음, 책으로부터의 발췌, 인터뷰까지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터뷰로 이루어져 화제가 되었던 맥스 브룩스의 [세계대전 Z]도 서간체 소설로 분류된다. ) 그밖에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아모스 오즈의 [블랙박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이 경우는 이메일)등 역시 서간체 스타일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소설들로 유명하다.
( 가나에의 작품은 직소 퍼즐처럼 조각 조각이 모여 전체의 그림을 보여준다)
미나토 가나에와 직소 퍼즐(jigsaw puzzle)
미나토 가나에가 채택한 방식은, 두 사람 이상이 편지를 주고 받는 타입인 후자다. 이렇게 되면,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 속에 다수의 화자(話者)를 둘수 있고, 여러 시점에서 이야기가 해석되고 말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다시점(多視點) 방식'인데, 이것은 데뷔 때부터 감추기 어려울 만큼 한결 같이 유지해 온 미나토 가나에의 특징이자, 장기라 할 수 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본 이야기들이 조금씩 합쳐져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스타일이다. 비교하자면, 직소 퍼즐(jigsaw puzzle)과 비슷하다고 할까. 전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각 조각이 어떻게 생겼고, 색깔과 모양을 기억해야 하는 직소퍼즐 맞추기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뇌를 자극한다. 직소퍼즐은 문제풀이로 자극받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좌뇌와 큰 그림을 바라봐야하는 창조적인 우뇌, 양쪽을 모두 발달시킨다. 한 조각, 한 조각 모아 전체의 형태를 만들어 가다 보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좌뇌와 직관적이고 주관적인 우뇌가 둘다 자극을 받게되는 셈이다. 이것은 어쩐지 미나토 가나에의 작풍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가나에는 이미 데뷔작 [고백]이나 [속죄]에서도 같은 상황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게 하면서 종국에는 큰 그림이 완성되는 방식을 보여준 바 있다. 작가는 이미 잘라낸 조각들이 갖고 있는 단면의 모양을 생각하고, 그것과 잘 들어맞는 조각을 만들어 서사를 전개해 나간 느낌이다. 실제 직소 퍼즐은 퍼즐 상자 위에 완성된 그림이 인쇄되어 있어 그것을 보고 맞춰 나가면 되지만, 글을 읽거나, 쓸 때는 그런 완성그림이 없기에 전적으로 상상력으로 전체 그림을 그려나가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종적으로 그림이 짜맞춰졌을때 돌아오는 보상과 성취감은 독자나 작가 모두에게 대단히 짜릿할 수밖에 없다. 이 계통의 전문가에 따르면, 이러한 성취감을 느낄때에 신경전달물질의 일종인 도파민(dopamine)이 생산되는데,이 물질은 사람들의 집중력과 동기에 영향을 주며, 쾌락과 중독과 스릴에 관여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미나토 가나에의 소설에, 더 나아가 추리소설에 중독되고 빠져드는 이유가 설명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반신욕하면서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을 정도로 놀라운 가독성을 보여준다)
서간체라는 틀
첫 번째 이야기부터 세 번째 이야기까지 공통점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주인공들이 과거의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진실에 바투 다가선다는 것이다. 물론 그 사건에는 상처가 옹이처럼 패어있다. 각 이야기에서 등장인물들의 마음에 패인 생채기의 내역들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이 현재의 삶에 많건 적건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십 년 뒤의 졸업문집], [이십 년 뒤의 숙제],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각 제목은 보다시피 현 시점에서 과거를 바라보는 제목인데, 등장인물 간의 편지는 결국 과거를 되새김질 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오고가는 편지 속에 주인공들의 희미하고, 불완전했던 과거는 빠르게 복원된다. 편지가 얼어붙어 있던 기억의 영토을 쇄빙선처럼 부숴버리는 것이다. 물론 오가는 편지에 쓰인 말들이 불편한 사건에 접근하면 할수록 감정의 진폭이 큰 어휘가 사용되기도 하고, 거짓의 가면을 쓰기도 하고,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풀 먹은 창호지가 마를 때처럼, 서로 팽팽하게 당기는 긴장감을 독자가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미나토 가나에는 고조되는 긴장감뿐만 아니라, 편지의 특징을 십분 발휘해서 속도감을 높였다. 편지는 아무래도 글자수를 늘이기엔 적합하지 않은 매체이기에 최소한의 글자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속도는 역시 글자 수에서 나온다. 작가가 세부를 잘라내고 행위에 집중한 결과 놀라운 가독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편지글이라 해서 미문 취향이나, 서정적 나르시시즘에 매몰되지 않고, 필요한 말만 명료하게 사용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읽은 책중 가장 빠르게 읽은 책이었다. 주인공들이 주고 받는 편지를 탁구 랠리 구경하듯 고개를 움직여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읽다 보면, 어느새 끝나 버린다. [왕복서간]은 속도감과 몰입감 높은 책의 좋은 증좌가 될 것이라 말해도 무리가 없다. 읽으면서 가나에게 감탄했던 것중 또 하나는, 서간체 문장의 단조로움을 극복한 방식이다. 두 번째 이야기 [이십 년 뒤의 숙제]에서 방송부를 맡고 있는 오바 아쓰시가 녹음이라는 방식을 통해 편지를 좀더 생생하게 전달하게 하는 설정을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저 사실 전달이아닌, 대화체의 등장이 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듯한 묘사를 할 수 있게 된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다. 서간체 소설이라는 그릇이 갖고 있는 한계때문에 작가는 빈약한 묘사에 대한 고민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탁월한 묘사는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것이 없는 소설은 놀랄 만큼 밋밋하기 때문이다.
'그때 상황을 가급적 정확하게 써보겠습니다.(p.97)'나 '선생님께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마호 씨가 잘못 기억하는 부분이 있으면 곤란하니 마호씨의 말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p.98)' 혹은 '앞으로 만약 나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신경쓰지 말고 그대로 알려주렴(p.106)'..같은 말을 작가가 집어넣긴 했지만, 편지에 지나치게 많이 등장하는 '따옴표'와 묘사의 '세세함'을 설명하기엔 다소 위화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다음과 같은 말로 편지의 대화체나, 오바 아쓰시가 쓴 글의 자세한 묘사등이 모두 설명된다.
"눈치채셨는지 모르지만 처음에 마호 씨를 만났을 때부터 저는 쭉 대화를 녹음하고 있었습니다. 방송부에서 취재하던 버릇이지요. 양해를 구할까 했지만 그러면 속내를 감출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무단으로 녹음했습니다.(p.160)'
비슷하게 첫 번째 이야기 [십 년뒤의 졸업 문집]에도 촬영 비디오와 CD라는 매개를 이용하여 옛기억을 상세하게 되살린다.( '지아키의 사고가 신경쓰여서 옛날 비디오랑 CD를 자꾸 보고 들었더니 취재 때 있었던 소소한 일들이 떠오르는 거야.(p.60)')
십 년 뒤의 졸업 문집
방송부 동아리 친구끼리의 결혼식때문에 십 년 만에 만난 고교 동창생 사이에서 행방불명된 친구 지아키를 둘러싼 사건을 주축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작품은 작가의 전작들인 [속죄]나, [소녀]등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빼어난 여성심리 묘사가 이제는 원숙한 경지에 도달했음을 느끼게 한다. 고등학교 시절을 반추하며 여자친구들끼리 주고 받는 편지 속에서 우리는 예의 심리 저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질투와 선망, 오해와 위선, 비밀과 거짓말등을 목도하게 된다. 그들이 펼쳐보이는 옛 시절의 풍경과 에피소드에 소소한 재미를 느끼다가도, 그들이 격앙된 감정을 드러내며 진상에 다가가면, 돌연 긴장감에 포박되기도 한다.
이 이야기와 다음 이야기인 [이십 년 뒤의 숙제] 사이에는 흥미로운 점접이 있는데, [십 년 뒤의 졸업 문집]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지도하던 방송부 동아리 선생님이 바로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 '오바 아쓰시'라는 점이다. ("밤중에 너희끼리 돌아다니다가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랬니?" 오바 선생님께 그런 꾸지람을 들었잖아? ([십 년 뒤의 졸업문집],p.63)) (저는 지금 방송부를 맡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과 연인을 데리고 강에 물놀이를 갔는데 학생과 연인이 동시에 물에 빠진다면, 과연 주저 않고 학생을 먼저 구할 수 있을 지 고민해 봅니다.([이십 년 뒤의 숙제]p.105) 여기에 등장하는 '그 아이들'이 [십 년 뒤의 졸업 문집]에서 편지 릴레이를 벌이는 '그 아이들'인 셈이다.) 작가는 전면적으로 드러내지않고, 슬쩍 두 이야기에 연결고리를 만들어 놓았다. 사견이지만, 세번째 이야기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에 등장하는 '야스타카'와 두번째 이야기 [이십 년 뒤의 숙제]에 등장하는 '요시타카(물에 빠진 학생이다)'는 묘하게 포개지는 이미지의 인물이다. 둘다 왕따를 당했다라는 공통점도 있고, 무엇보다도 음성학적으로 서로를 연상케하는 비슷한 발음이다.
(문자 메세지나 카카오 톡 같은 가볍고 편리한 소통수단이 편재해 있는 세상에서 온기를 담고 있는 편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 작품이었다.)
이십 년 뒤의 숙제
두 번째 이야기 [이십 년 뒤의 숙제]는 이십 년전에 강에 빠져 떠내려가는 학생을 구하려고 뛰어든 남편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했던 여교사와 그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의 후일담을 다룬 작품이다. 유년시절에 겪은 커다란 트라우마가 등장인물들이 성장한 후 어떤 결과를 미치는지 보여주었던 [속죄]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아이들이 여섯 명 있더구나. 그 아이들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그걸 확인하고 교사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겠다고 결심했지.(p.93)) 그리고 여교사가 등장하는 부분에선 일견 [고백]의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미나토 가나에는 작가 이전에 고등학교 가사 선생님이었던 이력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학교나 선생님과 관련된 그녀의 목소리에는 유달리 힘이 실리는 듯 하다. 졸업한 제자가 옛스승에게 편지를 쓴 편지글이라서, 온다 리쿠의 단편 [당신의 선량한 제자로부터]라는 작품이 즉각적으로 떠올랐으나, 읽어보니 악의 현현을 통해 오싹한 기분을 준 온다리쿠의 작품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에서 쓴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이야기에서 여교사의 남편이 만든 머위 된장 주먹밥의 맛과 새우와 흰 살 생선을 다져넣은 계란말이를 아이들이 이십 년이 지난후에도 기억해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남편의 따뜻한 마음씨를 부각시키는 효과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음식 맛도 기억할 정도인데 하물며 그날의 사건은 어떻게 잊을 수 있게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직선운동을 해왔지만, 그 기억만큼은 언제나 제자리 걸음으로 고여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의 맹점은 결국 다케자와 마치코 선생님이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남편과 열 살짜리 제자중 누구를 구해야 했나,라는 잔인한 질문에 놓여있다. 그 일로인해 사망한 남편을 제외한 그 사건에 연루된 어느 누구도 이 질문의 자장(磁場)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이 질문은 그 사건에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고 믿는 아이들과 당사자에게 죄책감을 심어주었고, 그 감정에 평생을 휘둘리게 된다.
이 선택의 장면과 그것이 낳은 결과는 윌리엄 스타이런이 썼던 [소피의 선택(Sophie's Choice)]을 떠올리게 한다. 이 책에서 어머니인 소피는 아들과 딸 중에서 한 아이만 살리고, 다른 한 아이는 가스실로 보내 죽게 해야했던, (나치에게 강요받은) 가혹한 선택을 하게된다. 어느쪽을 선택하더라도 후회하게 되는 결정이다. 이 소설에서 소피는 결국 두 아이를 모두 죽일 수 없어, 아들 쟝을 선택하게 되고, 평생토록 딸인 에바에 대한 끔찍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차라리 나치가 결정했더라면, 이토록 괴로운 죄책감에 내던져지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잔인했던 것은 그녀에게 선택권이 쥐어졌다는 사실이다. 선택이 불러올 결과를 감당할 수 없는 경우의 극단적인 예이다. 소피의 선택을 썼던 윌리엄 스타이런이나 본작 [이십 년 뒤의 숙제]를 쓴 미나토 가나에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인생이란 '선택의 연속'이란 것이다. 우리가 매순간 선택을 하며 살아가며, 그러한 선택의 결과들이 차곡차곡 쌓여 현재 우리의 인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선택에는 '커피'를 마실지, '녹차'를 마실 것인가 처럼 깊게 생각해볼것도 없이, 사소하고 간단하게 처리될 문제도 있지만, 삶의 기반을 뒤흔들정도로 아주 중요한 일도 있다. 이 소설에는 등장하는 선택의 딜레마역시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간단히 끝낼 수 없는 곤혹스러움을 내재한 문제였고, 그것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등장 인물의 편지를 통해 작가는 개진한다. 그 과정을 밟으며 그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응어리졌던 감정이 조금씩 풀려 갔음이 밝혀진다.
다케자와 마치코 선생님이 마음에 걸리는 여섯명아이들을 만나볼 사람으로 오바 아쓰시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잊지않고 그녀에게 매년 연락을 해왔던 학생이기도 하고, 또 그녀처럼 선생님의 길을 걷고 있는 제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중요한 이유가 작품 후반부에 밝혀지는데 이 부분이 무척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 작품의 끝부분에선 공명되어 울리는 가슴아픈 사연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편지글 특유의 온기때문일까, (내 독서이력에서 드문 일인데) 가슴 한 켠이 먹먹해졌음을 고백한다. 이것이 미나토 가나에가 의도했던 것이라면,- 까뮈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이 작품에서 작가와의 진정한 만남을 이룬' 셈이다.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
편지를 쓰는 행위는 새삼 당신과 나 사이의 올바른 시간과 거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p.181)
이 편지가 도착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일주일? 아니 열흘? 그보다 더 걸릴까? 당신 담장이 도착할 때까지 걸릴 시간도 계산해야겠지.
이게 지금 우리 사이의 시간과 거리야.(p.182)
개인적으로 편지만의 강점은, 자신의 감정을 시간차를 두고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자나 전화가 줄 수 없는 장점이다.
가령 2012년의 5월 29일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 밀봉한 것을, 2012년 5월 31일에 상대방이 개봉하는 장면. 멋지지 않은가? 이것이 내가 편지에 대해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다. 이것이 해외 우편인 경우 시간차가 더욱 벌어지게 된다. 시간차를 두고 상대방의 편지에 담긴 마음을 궁금증과 기대감을 갖고 꺼내본다. 인류 역사와 함께했을 정도로 케케묵은 소통 수단인 편지가 공룡처럼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드라마틱한 밀봉과 개봉에 있다.
세 번째 이야기 [십오 년 뒤의 보충수업]은 P국으로 자원봉사를 떠난 연인 준이치와 마리코가 주고 받은 해외 우편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당연히 편지를 주고 받는 시간차와 거리가 있다. 따라서 답장을 기다리며 느끼는 두 주인공의 불안과 기대감이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둘은 중학교때부터 알아오던 사이였는데, 그 시절, 화재 사고와 결부된 끔찍 한 사고로 인해 가까워지게 된 관계이다. 그것에 이르는 과정에 중고등학교시절 특유의 적의(敵意),집단 따돌림,서로에게 상처 입히기, 나약함, 거짓등이 틈입해있다.이야기는 그 은폐하고 싶은 진실에 조금씩 접근하면서 전개되어간다. 그 사건의 내막은 박남철 시인의 말을 빌어 이야기하자면, '진실의 칼날이 너무나 날카로운 것이어서 되도록 칼집 속에 진실을 깊이깊이 있게 하는 것이 좋은' 종류의 것이고, 작가의 말을 사용하자면, '0을 곱해서 모든 것을 무화 시키고 싶은 진실'인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기 위해선 반드시 응시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다. 후반부에 거짓 기억과 뒤섞이며 그녀를 괴롭혔던 사건의 진상에 마침내 접근하면서 뜻밖에 드러나는 진실의 얼굴을 작가는 정성스럽게 새겨넣었다. 진실이 밝혀진 후 둘은 새로운 1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가나에의 작품을 변함없이 견인해왔던 '사건을 다각도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은 아직도 건재하지만, 이 작품에는 다른 작품들과 뚜렷하게 유리되는 요소가 있다.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이다.
소위 일본 독자들이 이야기하는 '독(毒)이 있는 미나토 가나에'와 '독이 없는 미나토 가나에' 사이에서 작가는 이작품을 통해 후자에 발을 담그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특히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의 결말 부분을 읽어보면, 이러한 작가의 변모를 쉬이 수긍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발표했던 초기 작품들은 그녀가 '악의(惡意)'의 까발림에 전력을 기울였기에 읽은 후에 부대낄 정도의 어두운 뒷맛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작가는 사랑과 화해를 모색하고 있다.
미나토 가나에 자신도 "'업보의 연쇄'나 '악의(惡意)'같은 것은 자각하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힘껏 자유롭게 쓰자. 이른바 그 결의(決意) 표명이 제3화인 [십오 년 뒤의 보충 수업]에 있는 마지막 1행"이라고 밝히며 자신의 작풍에 관한 '제2막'을 선언하고 있다.
이 책 [왕복서간]에 수록된 세 작품 모두 짧지만, 높은 완성도와 짜임새가 있는 작품이었다. 편지글 형식을 취하고 있기때문에 친밀하고 고백톤의 느낌을 줘서 일까, 상당한 가독성이 생겨, 한번 펼치면 읽다가 중단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밝혀야겠다. 게다가 각 작품마다 작은 반전이 잠복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 작은 신음을 내뱉게 된다.
5현제 이후의 로마제국 황제들의 재임기간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극심한 자리다툼이 있는 (잠시 방심하면 순식간에 도태된다!) 장르문학계에서 미나토 가나에가 꾸준히 자신의 이름을 독자들에 각인시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분명 기존 스타일을 답습하려는 모습에서 벗어나,자신의 개성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꾸준한 노력 때문일 것이다.
(가나에의 작품들이 '데뷔작 [고백]의 벽을 넘을 수 없다'라는 말을 지금껏 셀 수 없을 정도로 들어왔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미나토 가나에'에게 편지를 썼다면, 지금쯤 우리는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왕복서간]은 [고백]을 잠시 잊어도 좋을 정도로 괜찮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