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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연속 세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0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2년 3월
평점 :
(온다리쿠의 작품은 응당 맥주와 함께 찍어야했겠지만,-그녀가 맥주광인것은 잘 알려진 사실-나는 커피한잔 하면서 읽기에 적당한 책이라 여겼고, 그래서 이렇게 찰칵~ㅋㅋ)
단편읽기를 너무 좋아해서, [달의 뒷면(2000)]이 먼저 출간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후속작인 [불연속 세계(2008)]를 먼저 읽었다. 하지만 이것이 달디단 초콜릿을 먹은 후, 신맛이 나는 귤을 먹는 것과 같은 순서상의 치명적이고 우둔한 실수는 아니다. 오히려 장점이 있다. 이 연작 단편집을 먼저 읽으면 젊은날의 다몬부터 중년의 다몬까지 모두 만날 수 있고 , 덩달아 장편에선 상대적으로 미미하게 다루어지는 주변인물들의 면모도(가령 다몬의 아내 '잔') 사건의 전개와 함께 엿볼수 있다.
그리고 장편 [달의 뒷면]과 연작단편 [불연속 세계], 두권을 모두 읽고 난 다음에 최종적으로 내가 내린 결론은 [불연속 세계]는 그 자체로 완결된 작품이기에 꼭 [달의 뒷면]을 우선적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 단편집을 읽으면, 십중팔구는 장편에서 등장하는 다몬이 궁금해서 [달의 뒷면]을 읽지않고는 견딜수가 없겠지만.
온다리쿠는 자신의 단편에 장편의 번외편을 많이 쓰는 걸로 잘 알려져 있는데,나역시도 단편 [수정의 밤,비취의 아침]에서 미즈노 리세 시리즈의 번외편에 매료되어, 장편 [보리의 바다에 가라앉는 열매],[황혼녘 백합의 뼈]를 서둘러 찾아 읽어던 기억이 있다.
순서상에는 마지막에 박혀 있지만 [새벽의 가스파르]가 작품집 [불연속 세계]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가림없이 드러내주는 단편이라는 말을 우선해야겠다. 흔들리는 야간 열차 안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밤을 세워 벌어지는 괴담 베틀이 이 단편의 주된 소재인데,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가 말하자면, '괴담 대결'같은 양상을 띄고 있음은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한편이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술렁거리는 으스스한 괴담들이다. 괴담이 오고가는 한밤중의 기차 안. 사람은 이율배반적이게도 그 자리를 피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함께해서 이야기를 엿듣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을 갖게된다. 작가는 작중 인물의 입을 통해 "세분화된 세계에서 세대와 집단 간의 가치 차이가 현저해진 지금 공유할 수있는 것은 공포감뿐 일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작품의 의도를 밝히면서 이런 우리의 마음을 설명해준다.(p.238) 공포감이란 생명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감정으로 하등동물이나 고등동물 모두에게 공통으로 발달된 감정이라 하니 이말이 십분 이해가 된다. 우리 유전자엔 공포감이 생명 유지측면에서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온다리쿠의 이 작품집을 단순하게 '괴담 모음집'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것이 온당한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역시 손사레를 치며 '아니'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온다리쿠가 이 책의 어딘가에 스스로 이야기했듯 이 책은 "아닌게 아니라 장르를 나누기가 불가능한 책"(p.188)이다. 독자는 이 책을 어느 장르에 수납해야 할지 망설이게 될 것이다. 호러적인 측면도 있고, 추리 소설적인 요소도 있고, SF적인 면도 있으면서 순수 문학적인 색채를 띄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스타일은 온다리쿠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굳혀졌기에 기존의 팬이라면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을 것이다. 기실 이런 전통적인 장르 규칙의 뒤집기야 말로 온다리쿠의 장점이자 매력이기 때문이다.이런 일관성 없음과 장르의 혼합에 냉담한 독자도 물론 있겠지만, 나는 이런 작가에게 매력을 느낀다. 작가는 이 작품집의 [사구 피크닉]에서 자신의 작풍을 대변하듯 이렇게 말한다. "거꾸로 뒤집힌 건 어떤 의미에서 패덕적이라든지 불손하다든지 그렇잖아? 그런 부분에도 끌리는 게 아닐까.(p.193)"
나무 지킴이 사내
다몬의 방송작가 선배가 나무지킴이 사내이야기를 한후 다몬이 실제로 나무지킴이 사내를 보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나무 지킴이 사내가 등장하면, 도쿄가 불바다가 된다는 미신을 작품 중간에 온다 리쿠는 어린아이의 입을 빌려 슬쩍 흘리는데, 작품의 끝부분을 살펴보면, '도쿄 대공습 후 불바다'의 이미지는 거품경제 후 국가 재정파탄을 겪는 일본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 나무지킴이 사내의 이야기를 방송 작가 선배의 꿈 이야기와 교차시키면서 SF작가 JG 발라드를 언급한다. 이것은 특유의 발라드(Ballardian)적 분위기를 차용하여 독자가 차가운 현대사회의 디스토피아적 세계와 기술만능의 살풍경한 이미지 속으로 은연중에 내달리게 만든 것이다. 이 역시 끝부분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는 이 이야기 속에서 '나무 지킴이 사내(고모리오토코)'라는 다양한 의미망을 가진 단어를 가지고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도 했는데 그점이 꽤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 미리니름이 두려워 자세히 말할 수 없지만) 문학의 언어라는 것이 말놀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없음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되었고, 개인적으론 일본어 원문을 이해하고 읽었다면 그 미세한 결을 느끼게 되어 작가가 풀어놓은 언어유희를 조금 더 즐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악마를 동정하는 노래
이 이야기는 "들으면 죽고 싶어지는 음악이란 게 있잖아?"라는 매력적인 도입부로 시작하는 소설이다. 얼핏 소개글을 읽고, 나는 일본의 공포 만화가 이토준지가 그렸던 비슷한 테마(살인을 일으키게 만드는 음악에 관한 내용이다)의 [중고레코드]라는 작품을 떠올렸는데, 읽어보니 내용은 사뭇 달랐다. MD에 녹음된 '세이렌'이라는 가수가 부른 '산 소리'라는 곡을 듣고 사람들이 죽는다는 소재에 호러와 추리적 요소를 덧입힌 이야기였다. 간명하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온다 리쿠라는 렌즈를 통해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산소리]라는 작품'이라고 할까. [산소리]에 대해 온다리쿠가 가졌던 생각을 확대 재생산한 것이 본작이라 할 수 있는데, 장편[달의 뒷면]중 문학작품 끝말 잇기 게임을 하는 장면에선 [산소리(야마노 오토)]가 슬며시 등장( p.251)하기도 하는 것을 보아, 오래 전부터 벼르던 이야기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다음 발췌문을 읽어보면 추측은 '확신'의 옷으로 갈아입는다.
"[산소리]. 가와바타 야스나리지?"
"응 자세한 내용은 잊어버렸지만 거기서 산 소리는 죽음의 상징이었던 것 같아."
"나한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괴기 작가란 이미지인데 말이야. 에로도 농후하고." (불연속 세계, p.95)
예컨대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대한 이미지에도 반발심을 느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하면 [설국]. 아니면 [이즈의 무희]. 여러 차례 영화화된 이미지. 주연을 맡은 아이돌 가수가 미소를 짓는 상큼한 포스터. 그것들은 그래봤자 그의 세계의 거죽에 불과하다. 나에게 그는 그로테스크하고 끈적 끈적하며 괴기 취향의 작가다. (달의 뒷면,p.232)
예를 든것 처럼 장편 [달의 뒷면]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대한 온다 리쿠만의 해석이 등장한다. 데칼코마니까지는 아니더라도 각각 떨어진 두 글을 함께 괄호안에 묶어 읽어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비슷한 논조의 이야기다.
보통사람들과 프레임을 달리보는 것. 그래서 평온한 풍경 이면에 숨은 암흑에 가까운 기이한 것을 들춰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이 온다리쿠의 짖궂은 성향이라 말해도 틀림은 없다. 그녀의 다른 단편 [바다에 있는 것은 인어가 아니다]에서 '나카하라 주야'의 시(詩)를 비틀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 것을 기억하는 독자는 이것이 온다리쿠의 장기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다몬과 로버트가 검은 고양이을 쫓아 어떤 장소로 인도되는 장면은, 그 장면이 매우 짧았지만 [달의 뒷면]에서 다몬과 아이코가 고양이 '하쿠우'를 뒤쫓는 장면과 겹쳐졌기에 꽤나 인상적이었다. 이집트인들은 고양이를 달과 관련시켜 생각했으며 (달!), 검은 고양이는 그 빛깔을 전제로 암흑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산에 둘러싸인 저택으로 유도하는 동물이 검은 고양이인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어째서 많은 장르소설에서 주인공을 이끄는 영험한 동물이 너구리나 다람쥐가 아니라, 고양이인지 납득할 수 있는 대목이다.)
(MD에 녹음된 '세이렌'이라는 가수가 부른 '산 소리'라는 음악이 죽음을 불러일으키는 단편-악마를 동정하는 노래.)
환영시네마
이성복 시인이 말했던 '구원이 온다면 망각과 함께 오리라'라는 구절이 떠오르는 단편. '네버모어'라는 인디밴드의 베이시스트인 다모쓰의 트라우마와 에드거 앨런포의 [까마귀]라는 시(詩)의 상징성을 포갰다. 포가 직접 밝혔듯이 까마귀는 죽은자를 애도하고, 영원히 기억하는 것을 상징하는데 이 단편 모티프와도 맞아떨어진다.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남자의 시 [까마귀].
개인적으로는 단편 전체중에서 가장 소름끼쳤던 작품이었다. 영화 촬영하는 장면을 보면 주변 사람이 죽는다는 다모쓰의 고백 부분부터 이 소설의 공포감은 증폭된다. 재구성을 통해 왜곡을 즐겨하는 기억의 속성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뇌에 대한 성찰을 온다리쿠 특유의 화법으로 풀어낸 빼어난 작품이다. 이 단편에 등장하는 '서브리미널 효과'라는 말은 온다리쿠의 팬이라면 그녀의 [금지된 낙원]에도 나왔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을 거대한 바다 속으로 보고, 바다 위에 나와 있는 빙산을 '의식'으로 보는 전형적인 비유에서 바다표면을 리미널(경계)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의식은 대부분 경계 아래(sub)인 무의식에 의해 좌우된다는 이야기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새빨간 강아지"에 대한 다모쓰의 기억이지만, 그것의 진실은? 과거사의 모든 사건이 잠들어 있는 다모쓰의 깊은 무의식의 심연을 들여다 보는 일은 선뜩하다.
사구 피크닉
나는 개인적으로 읽던 책을 멈추고, 이 단편에 묘사된 우에다 쇼지(Ueda Shoji)의 돗토리 사구 사진이 궁금해서 그가 찍은 Mode in Dunes같은 사진집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사진과 이야기를 병치시켜가면서 읽어보니 온다리쿠가 그의 사진 이야기를 도입부에 한 이유는, 이 이야기의 소재를 펼쳐나가기 전에 독자에게 내보인 착시와 교묘한 트릭의 설정에 대한 힌트였다. 추리소설의 소실 트릭, 시선의 밀실, 트윈픽스, 여체의 신비..등등 짧은 단편임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런데도 결코 방만한 느낌이 들지않는다. 시계태엽처럼 유기적이다. 이 단편에 본인 스스로 쓴 말을 온다리쿠에게 되묻고 싶을 정도다. "엄청난 상상력이다. 대체 어디서 그런 발상이 생겨나는지 머릿속을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p.54)"
새벽의 가스파르
주인공 이름 다몬(多聞)에 대한 설명이 단편집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장편 [달의 뒷면]에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다"라는 표현으로 알려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신인 음악인을 발굴하는 음반회사 프로듀서로서도 꽤나 어울리는 이름이다. 제목 짓기의 달인으로 알려진 (특이한 그녀 소설들의 제목을 떠올려보라) 온다리쿠가 주인공 이름을 허투루 작명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온다리쿠가 주인공의 이름에서 demon(악마)를 떠올리게 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다고 느꼈다. demon..영어 발음으로는 '디몬', 일본식 영어 발음으로 '데몬'쯤 될텐데, 보다시피 '다몬'은 발음상 사촌형제 정도로 닮아있다. [달의 뒷면]에서 다몬에 대한 묘사만 보아도 그런 심증은 굳어진다. "마치 계시 같은 목소리. 이 남자를 만날 때마다 동자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쩌면 세상의 중심은 이 남자인지도 모른다. 이 남자가 여기에 있었던 게 사건의 중심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남자를 이곳에 있게 하기 위해 준비된 조역인지도 모른다.(p.314)" 마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같은 신비한 존재.(데미안 역시 데몬(demon)에서 나온 말이다)
이 단편의 제목에 들어있는 '가스파르(garspard)'라는 말도 프랑스어로 '작은 악마'를 뜻하는데 이것도 영적인 세계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한 주인공 '다몬'의 분위기를 잘 전달해주는 타이틀이다.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다몬의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열차 안에서의 괴담 베틀을 소재로 삼고 있다. 물론 서사의 중심은 다몬의 이야기인데, 예상치 못한 결말이 정통으로 독자의 복부를 가격한다.
여담인데, 이 단편엔 온다리쿠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맥주가 또 다시 등장하여 기존 팬들에게 작은 즐거움을 안겨주니 주목해서 읽으시길. (맥주가 등장하지 않은 소설을 찾아보기 힘들정도 온다 리쿠는 맥주광.)
총평
모든 사람은 달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싫은 어두운 면을 갖고 있는것이다.
(Everyone is a moon, and has a dark side which he never shows to anybody.)
(장편 [달의 뒷면]을 읽기도 해서였을까) 나는 영화 문스트럭(Moonstruck)에 나온 이 말이 생각났다. 온다리쿠는 보통사람들이 볼 수 없는 이면을 펼쳐 보여주는 작가라고 생각해왔는데, 이 연작 단편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연작집 제목인 '불연속 세계'라는 말은, 연속되어질 거라고 예상되는 이 세계와 내일의 세계 사이에 뜻밖에 벌어져 있는 공백이다. 독자는 다몬이라는 주인공을 따라 여행하며 그 공백 안에 고여 있는 어둡고 습한 뒷면을 목도하게 된다.
각 단편마다 온다 리쿠만이 포착해낸 독특한 이야기들이 매력을 뿜어낸다. 그 독특함의 지층에는 때로는 눈을 돌리고 싶을 정도로 기괴한 영상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지만, 기괴함이라는 말이 간직한 '보통이 아님'과 '괴상함'에 대한 함의가 커지면 커질수록 묘하게도 우리는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정신을 차렸을 땐, 다몬이 등장하는 다른 작품 [달의 뒷면]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공산이 크다. (경험자의 이야기다)
이 단편집의 작품들은 2000년 [흑과 다의 환상]을 쓰면서 부터 굳어진 전통적인 온다리쿠의 열린 결말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는 듯하다. 하므로 이 책은 비교적 끝마무리가 명확하기 때문에, 깔끔하게 마무리하지 않는 점이 싫어서 그녀의 소설에 불만인 독자에게 조차 매력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단편 내에 자기 작품의 열린 결말에 대한 세간의 품평에 대해 털어놓는 저자의 볼멘 목소리 들을 수 있는데 재미삼아 한번 찾아보시길.("다몬 이야기는 늘 그렇다니까. 종잡을 수가 없고, 종잡으려고 하면 벌써 끝났어." "결말이 없다는 말 많이 들어. 딱히 결말이 있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닌데(p.43).")
이게 온다 리쿠의 매력이기에 나는 크게 신경쓰지 않지만. 홍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