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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ophy of Language (Paperback, 3 ed)
Alex Miller / Taylor & Francis Ltd / 2018년 1월
평점 :
1, 엄밀한 내용으로 토대부터 탄탄하게 다져나가기 시작해 논증적인 구성과 서술을 통해 심화된 주제들로 진행하는 숙련자용 교재이다. 크게 세 파트로 나눠보자면, 우선 1~4장은 언어철학적 기초사안을 도입함과 더불어, 프레게에서 시작해 크립키의 관점 일부와 콰인(후술하겠지만 의미 개념에 회의적인 콰인 입장의 특성으로 인해 4장은 두번째 파트에도 속한다)에 이르기까지 의미에 관한 철학적 이론들을 대강 역사 순으로 살펴본다. 더욱 초보적인 수준의 여타 언어철학서적에서도 소개되는 이론들 중 기초적이고 중요한 것들의 핵심을 간추려 다소 해설적으로 제시하기에, 일견 이 파트는 초심자도 읽어나갈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1장 전체와 2장 초입에서부터 의미에 관한 비형식적 직관을 프레게가 도입한 개념적 장치들과 이론적 프레임을 활용해 엄밀하게 정식화하면서 논의의 토대를 다진 뒤, 이렇게 정식화된 개념, 논제, 원리들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균일하게 활용하면서 여타 인물들의 입장에 관한 논의를 전개한다. 프레게 철학은 물론이요 언어철학 전반에 대한 배경지식이나 막연한 윤곽이라도 파악해놓지 않은 쌩 초보자라면, 전문가의 해설과 지도가 없이 혼자 내용을 따라가기 무척 벅찰 듯하다. 반면 그런 배경지식을 갖췄거나 적어도 언어철학적 논의를 생소하게 여기지 않을 만한 수준을 갖춘 독자라면, 파편적이거나 미비하게 얻어 놨던 지식들을 다시 기초부터 탄탄하고 엄밀하게 갈무리해 나가면서 전반적인 그림의 틈을 메꾸고 짜맞추는 데 활용하기에 아주 효과적이다.
2. 초판 서문에서 저자는 20세기 분석적 언어철학의 핵심 테마로서 의미의 체계성과 의미 회의론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 파트가 주로 의미론적 체계성에 초점을 맞춘 이론들을 다뤘다면, 두 번째 파트인 4, 5, 6장은 의미 회의론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들을 논증적으로 재구성 및 평가한다. 특히 5장과 6장은 저자 스스로도 칭하듯 이 책의 하이라이트로서, 5장에서는 크립키가 해석한 비트겐슈타인식의 의미 회의론(소위 크립켄슈타인의 규칙 따르기 역설)과 그에 대한 회의적 해결책skeptical solution들을, 6장에서는 KW식 회의론에 응하는 또 다른 해결책으로서 의미에 관한 사실을 구해내기 위한 실질적straight 해결책들을 각각 살펴본다. 크립키가 해석해낸 비트식 회의론 논증 자체가 무척 복잡하고 오묘한 데다가, 여타 초보적 언어철학 서적들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다양한 이론들이 논증적 수준에서 높은 강도로 치밀하게 논구되고, 다뤄지는 이론들 특성에 따라 논의가 인식론적, 메타윤리적, 심리철학적, 형이상학적으로 진행되기도 하는바, 이 책에서 가장 난도 높고 빡빡한 파트라 할 수 있겠다. 당연히 초심자는 혼자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하지만, 반대로 이 주제에 강한 흥미를 느끼는 사람에게는 좋은 자료일 수 있겠다. 여타 서적들에서는 후기 비트의 입장이나 크립키식 규칙따르기 역설의 핵심 사안만이 간략히 해설되는 편이고 그마저도 비유적이고 이미지적인 언어로 제시되기에, 이해가 다소 미진하고 논의 자체가 불명확하다는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는 해당 쟁점을 철학적으로 정석적인 논증형태로 이해해 볼 수 있는 동시에 그에 대한 비교적 최근의 논의성과들도 접할 수 있으니, 저자가 자부하는 어조로 책의 핵심파트라 자칭하기에 걸맞는 독보성을 확보해준다 하겠다.
3. 세 번째 파트인 7, 8, 9장은 의미 회의론을 떠나 다시 의미론적 체계성 내지 의미의 본성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는 사안들을 다룬다. 화자의도 및 언어사용과 의미론적 의미 간의 관계에 관한 논의들, 데이빗슨식 의미이론과 그에 활용되는 타르스키식 진리론, 의미의 본성에 관한 이론이 형이상학적 실재론/반실재론 논의에 대해 갖는 함축을 각각 살펴본다. 7장은 순수 화용론적인 내용보다는 언어사용과 의미이론 간 관계에 관한 철학적 논증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편이어서, 화용론의 철학적 측면이나 일상언어철학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이는 적절히 소화해내기 어렵다. 반대로 8장은 해설적인 비중이 훨씬 많긴 하지만 데이빗슨식 의미이론의 개요와 그에 활용되는 타르스키 이론 자체가 워낙 테크니컬한 주제이기에 이 역시 유관 논의에 생소하다면 읽는 난도가 높을 것이다. 9장은 저자 스스로 시인하듯 상당히 개괄적인 윤곽만이 제시되기에 앞 장들과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해가 미진할 수 있겠다. 더밋식 반실재론의 핵심 착상, 실재론에 대한 모종의 만족조건으로서 C. 라이트가 더밋의 착상을 발전시켜 제시하는 객관성의 등급들, 파트2에서 살펴본 KW식의 구성적인 의미 회의론이 실재론/반실재론에 가져오는 귀결 등을 논증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9장의 핵심 내용들은 건지는 셈이다.
4. 이렇듯 엄밀한 서술과 강도 높은 논증들로 구성되어 의미론적 체계성과 의미 회의론이라는 두 중심축에 천착하기에, 언어철학적 기초사안이나 개별 철학자들의 이론을 객관적으로 평이하게 해설하는 여타 언어철학 입문서들과는 확실히 궤를 달리하는 심화교재의 느낌이 강하다. 3판이 거듭되기까지 꼬박꼬박 추가된 서언과 감사의 말만 보아도, 저자가 각종 강의나 학회참석, 연구기간 내 논문집필 등의 왕성한 학계활동을 거치면서, 이 책을 아주 본격적이고 내실 있는 교재로 완성시키고자 한 동시에 본인의 연구 역량이 반영된 저술의 모습도 갖추게끔 도모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자연히 책을 소화하는 데에 요구되는 바도 넓어서, 일반적인 분석철학사는 물론이요 언어철학 전반에 대한 다소의 배경지식, 그에 더해 논리(철)학, 형이상학, 인식론, 메타윤리, 심리철학 등의 개별 하위분야에 대한 기초적인 감각 정도를 갖춰 놔야, 길을 잃거나 흥미를 잃지 않고 논의를 따라갈 수 있겠다. 게다가 책의 핵심파트인 의미 회의론에 강한 흥미를 느끼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굳이 책 전체를 통독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할 터이니, 고전적이고 기초적인 이론들에 대한 그림만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반면 국내 문헌을 통해 기초적인 사안들에는 충분히 숙달해 있으되 좀 더 탄탄하고 심화된 이해에 대한 갈증이 느껴지는 지점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 고유의 주제적 특성이나 구성적 엄밀함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미진하다 여겨졌던 부분을 영리하게 메꿀 수 있는 선택지가 될 것이다.
5. 대학 시절 언어철학을 수강할 적에 규칙 따르기 파트의 강의자료는 당시 강의교재가 아니라 교수님이 이 책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별도로 꾸며졌었다. 책의 존재를 마음에만 담아두었다가, 언어철학 하나 읽을 때가 됐다 싶어 작년 연말에 무턱대고 주문하여 읽어나갔다. 책의 고유한 특성도 간파해내지 못한 채 다 아는 내용이라 자부하며 3장까지는 훌훌 신나게 읽어나가다가, 4장 후반부 콰인에 대한 에번스나 라이트의 비판부터 슬슬 낌새가 이상하더니, 결국 5장부터는 전연 이해하지도 못하고 글자만 꾸역꾸역 읽어나갔다. 실망한 채로 마지막 장을 덮어두었다가, 10개월이 지나 미뤄논 숙제 다시 건드려 보자는 다짐짓으로 초반부터 정신을 차리고 차근차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초독 시 이미 다 아는 내용이라 자부했던 앞부분에서마저도, 내가 알던(혹은 안다고 잘못 생각했던) 것들을 저자의 서술과 구성을 제대로 따라가며 전면적으로 재배치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근래 솜즈 책을 4회차 재독할 때도 절실하게 느껴지더니, 텍스트를 대하는 내 독서태도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끔 만드는 경험을 무장 자주 하게 되는 듯하다. 그나마 이번엔 2회독 만에 이를 깨달았으니, 발전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구나 하고 위로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