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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과 철학 - 마음 뇌 통합 과학을 위하여
패트리샤 처칠랜드 지음, 박제윤 옮김 / 철학과현실사 / 2006년 2월
평점 :
1. 상세하고 전문적이어서 수월하게 읽히지는 않지만, 많은 생각거리들과 사유의 전환점을 제시해주는 흥미로운 학술서이다. 1부에서는 신경과학의 역사와 방대한 연구성과를 기술하고, 2부에서는 현대의 과학철학, 심리철학, 인식론 등을 개관 및 평하가며, 3부에서는 저자가 설득력 있다고 여기는 신경과학 이론과 연결주의 모델에 입각한 마음-뇌 통합과학의 전망을 개략적으로 소묘해 보이는데, 이 모든 방대하고 상세한 내용들을 제시하면서 저자는 책 전체를 통틀어 자신의 주장을 끈질기고 일이관지하게 관철해낸다. 심리철학이 종래의 선험적인 개념분석방법을 미련 없이 탈피하고 신경과학과 뇌과학의 연구성과에 기반하여 탐구되어야 하는 동시에, 신경과학, 뇌과학 역시 혼란스럽고 미숙한 초기단계에서 적절하고 성과 있는 방향을 잡기 위해 철학적, 심리학적 상위 차원의 물음 및 이론들과 연계하면서 연구의 큰 틀을 잡아나가야 하는바, 추상적 마음이론과 물리적 뇌신경 이론의 공진화를 도모해야 하며 또 필시 사태가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가 파악한 이 책의 요지이다(물론 상향적 접근에 더 역점을 두는 물리주의자로서 저자는 철학에 대해 전자를 더 강조하는 듯하다).
2. 읽어가며 전반적으로 내가 받은 인상은, 이러한 주장을 <철학적으로> 세련되고 설득력 있게 논증해 낸다기 보다는, 현대과학 및 그것이 기대고 있는 물리주의에 대해 우리가 직관적, 초견적, 총체적으로 부여하는 인식론적 우위성에 부수하는 설득력에 기대어 논증 내지 논의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저자는 종래의 선험적, 분석철학적 방법 자체를 거부하면서 그 방법론의 테두리 내에서 제기되는 문제와 그를 해결하려는 논증들 자체도 원리적으로 오도된 것으로서 거부한다. 그러니 이런 인상을 근거로 이 책을 비평하는 것은 적절치도 않을 뿐더러, 책의 요지를 그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억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인상비평을 언급함은, 심리철학에는 개론 수준의 지식만을 갖고 있고, 신경생리학이나 뇌과학에 대해 배경지식이 전무한 나로서는, 통상적이고 만만한 심리철학서 내지 과학철학서를 기대하며 읽었다가 이런 인상을 받게 되어 당혹스러운 한편, 그 중심주장을 거부하기 쉽지 않은 설득력도 느꼈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정리 및 시인하기 위함이다. 현대과학의 성과를 인식론적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로서는, 이 세계를 이루는 가구들, 즉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그것들이 예화하는 속성들이 전부 물리적 기반을 갖는다는 점을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처칠랜드가 미묘하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는 60, 70년대의 기능주의 역시, 결국은 이러한 인식론적 직관을 기본 틀로 잡은 채, 마음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통속심리학적 개념체계를 그 틀에 어떤 식으로든 정합적으로 꿰어맞추려던 이론적인 시도이다. 이 책에서 그녀가 거듭 환기시키는 점은 그 이론적 시도가 낡고 오도적인 선험적, 개념적, 하향적 방법이었던바, 이를 더욱 철저한 물리주의적, 자연주의적 테두리 내에서 시도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3. 이렇듯 상당히 총체적이고 원리적인 층위에서의 방향전환을 주장 및 촉구하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기에, 분석철학 전통에서 친숙한 심리철학적 논제나, 대중적인 수준의 뇌과학적, 인지과학적 교양학술서를 기대하고 이 책을 읽었다가는 큰코다칠 공산이 크다. 방대한 신경생리학적 지식에 압도되지 않을 정도로 내공을 쌓은 동시에, 기존 심리철학적 논제들에 대한 저자의 미묘한 평가논증들의 맥락을 제대로 짚어낼 수 있을 정도로 철학적도 논의에 익숙해 있어야, 이 책의 논의방식을 온전히 따라가며 핵심주장을 유의미하게 간파해낼 수 있다(기존에 올라온 리뷰가 말하듯, 이 책이 신경과학도과 철학도 모두에게 도서관에서 의아함을 자아내는 현상은 책의 이런 특성 때문이지 않겠는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전자에 대한 지식이 전무해 1부와 3부는 무척 읽기 지루하고 재미없는 사례나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AI기술에 대한 관심과 논쟁이 들끓는 작금에 철학과 뇌과학 양자에 관심갖는 사람들이 혹할 법한 모양새의 책이지만, 상당한 내공과 깊이를 갖추지 않은 채 심심파적으로 집어들고 쉬이 향유할 텍스트는 결코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두고 싶다.
4. 사족. 다른 한편으로는 (책에서도 명시적으로 종종 환기되는) 콰인식 자연주의와 전체론을 실제의 하위 학문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나갈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목도한 듯한 느낌이 들어, 무척 신선하기도 하였다. 콰인식 자연주의의 요지는 대강 머리로 이해했어도, 그래서 실제 학문현장에서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궁금증이 늘상 해소되지 않았었는데, 이 책은 심리철학과 뇌과학이라는 영역에서 그런 식의 자연주의가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실례들 들어가며 상세히 소묘해내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의 본디 의도와 진가는 핵심 주장을 향한 전통철학적인 논증을 제시하기보다는 이러한 자연주의적 가능성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그려내면서, 미래에 기대될 마음-뇌 통합과학의 기획을 (비트겐슈타인의 구분법을 억지로 빌어보자면) 논증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보여줌>으로써 그 설득력을 배가시키는 데에서 드러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이러한 기조가 철학의 여타분야에서도 도모된다면, 언젠가는 심리철학뿐만 아니라 인식론과 지식이론, 형이상학과 존재론, 논리철학 및 언어철학, 수학철학, 심지어는 사회과학과 도덕철학 분야에서까지ㅡ자연과학의 여러 분야와 밀접히 제휴하는 이런 식의 자연주의적 기획이 설득력을 포섭하는 영역을 확장해가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정합적이고 합당한 믿음체계를 인류가 지니게 될 시기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고 사변적인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텍스트로서는 그리 재미있게 읽지 못했어도, 많은 생각거리들을 환기하면서 발상의 간접적인 전환을 고취시켜준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