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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철학 - 비판적 연구
니킬 무커지 지음, 한상기 옮김 / 서광사 / 2024년 5월
평점 :
생소한 신생분야를 매끄러운 구성으로 평이하게 소개하고 있는 전문 입문서이다. 역자는 물론이요 저자 스스로도 강조하듯이 체계적인 구성이 우선 돋보인다. 주제분야의 특성상 흥미롭고 이목을 끌만한 연구결과나 사례, 방법론 등을 파편적, 일회적으로 나열하면서 논의를 다소 지리멸렬하게 이어나갈 책이 되기 쉬운데, 이 책에서는 이를 피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논증적으로 논의를 구성하고자 했던 기도가 역력히 드러나며 실제도로 책의 꼴이 그러하다. 이에 1장에서 전통철학/실험철학의 방법론과 그에서 귀결하는 내용적 특성을 메타적으로 구분지으며 각각을 명료화하고(해설부), 2장에서 는 앞 장에서 제시된 구분점들을 토대로 실험철학의 방법론적 도식을 상세히 분석 및 정리하면서 그 철학적 함의를 논증해낸 뒤(논증부), 3장과 4장에서는 두드러진 연구사례와 반론/재반론을 각기 다룬다(적용 및 반성부). 이렇듯 건축술적으로 매끄럽고 알뜰하게 구성된 내용을 최대한 쉽고 간명한 언어와 어조로 풀어내고 있어서, 낯설고 직관적으로도 희한하게 여겨지는 분야의 학술서임에도 기죽지 않고 읽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메타적인 분야를 다룬다는 특성상 1계수준의 전통철학 및 그 특수 주제들에 대한 논의에 익숙해 있다는 전제 하에서야 이런 특성들이 유의미한 장점으로 여겨질 것이다. 직역투 번역이 자주 거슬리긴 하지만, 원체 원서가 탁월한 탓인지 읽어나가는 데에 크게 방해가 된다거나 내용을 알아먹을 수 없는 정도는 아니다. 양적으로 적당하고 질적으로도 견실한 책이니 해당 분야에 관심하는 정도에 따라 구매소장도 적극 고려해 봄직하다.
책에서 논의에 종종 삽입되고 사례분석 파트에서도 한 절을 꿰차고 있는 주제 중 하나가 지식 개념에 대한 JTB분석과 게티어 논증이다. 대학시절 분석적 전통의 인식론을 처음 배울 때도 그러하였고 그 이후로 인식론 책을 읽을 때마다 느껴온 바인데, 게티어가 JTB조건에 대해 제시한 반례를 진정한 반례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부터가 그 논증을 이해하는 데에 관건이 된다고 생각해왔다. 모든 인식론 책에서는 이를 반례로서 당연시하고 게티어 사례 이후 제안된 인식론적 입장들에 대한 논의로 곧잘 넘어가버리지만,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의 직관에서는 그 반례가 도대체 왜 반례가 된다는 것인지부터를 받아들이기 어려워 이후의 복잡한 논의들도 무의미하고 현학적인 말장난으로 여겨지기 쉽다. 막연하게 이 정도만 생각했을 뿐 깊이 천착해볼 엄두를 내지 못했었는데, 이 지점을 철학적으로 건드려볼 여지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 신선했다. 실험철학이 전통철학을 그저 비맥락적으로 대체하거나 무효화하는 게 아니라, 전통철학의 방법론과 그것이 함의하는 바에 유의미하게 기여할 수 있을 거라는 저자의 최종적인 주장에 설득력을 느낄 수 있었던 많은 지점들 중 하나였다. 기존에 배워온 철학이론이나 방법론이 분명 미심쩍지만 그 미심쩍은 지점이 어디이며 그것을 어떻게 건드려야할지 막막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많다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반복학습해온 소위 <철학적 직관>이라는 것부터가 의심스럽고 외려 반직관적이라 여겨진다면, 의문 해소의 실마리나 개략적인 조망점을 기존의 1계철학 분야에서가 아니라 실험철학 분야에서 진지하게 찾아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강 과감히 표현해 철학이 인간과 세계를 가장 근원적인 수준에서 탐구하는 학문이라 할진대, 그런 근원적인 학문을 함에 있어서마저 무비판적으로 당연시되어온 철학적 직관 역시 근원적인 의문에 부쳐보되, 이를 전통철학과는 다른 메타적인 층위로 가져가 다소 현대적인 방법론으로 검토해본다는 점에서, 실험철학은 분명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으면서도 우리가 받아들이는 철학관에 부합하는 철학함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심어준 독서였다. 읽으면서도 리뷰를 쓰면서도 많은 생각이 자꾸 슝슝 떠올라, 지적인 활력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