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레게와 논리철학 ㅣ 프레게 철학 시리즈
박준용 지음 / 동연출판사 / 2026년 2월
평점 :
1. 전문적인 연구논문들을 엮은 단행본이기에 프레게의 1차저술이나 논리/수학철학에 상당히 숙달해 있는 독자층 혹은 전문가들에게만 읽는 의의가 있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논리학의 본성 내지 특성에 대한 프레게의 견해와 연관된 논의들이 1부를 이루고, 논리철학적 사안들과 접점을 갖는 메타적 사안들에 관한 논의가 2부를 이룬다. 연구논문들을 엮은 형태의 단행본들이 으레 그렇듯이 해당 주제를 다루는 여타 연구들에 대한 참조, 해석, 평가 위주의 전문적인 논증들이 주를 이루다 보니, 프레게 고유의 사유체계에 대한 초보적인 해설 격의 내용을 기대하고 읽으면 큰코다칠 것이다(프레게 당대나 그 이후 가까운 시기에 이뤄진 메타논리적 발전을 다루는 2부가 그나마 해설적인 부분이 많은 편이긴 하다). 해당 주제들을 심층적으로 공부하는 연구생이나 그런 수준에 준하는 배경지식을 갖춘 독자층이 아닌 이상은 읽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프레게의 논리/수학절학은 물론이요 일반적인 수학철학사,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논리학 및 수학기초론의 역사, 논리학/수학에 대한 메타적인 이론 등에 폭넓고도 깊게 숙달해 있어야, 복잡하고 전문적인 논증들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평가하며 읽어나갈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어야 할지 정 고민된다면, 도서관에서든 서점에서든 각 부의 머리글 및 각 장들(즉 각 논문들)의 들어가는 말과 나오는 말 부분만 일별하여도, 본인이 이 책에 덤볐을 때 다소나마 승산이 있을지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2. 개인적으로는 전술한 사안들에 대해 갖춰놓은 지식이 미진하고 겉핥기 식일 뿐이어서, 1부는 거의 글자만 읽었고 해설적인 비중이 많은 2부를 그나마 상대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힐베르트식 메타이론, 증명론과 유한유의, 이념적 방법 등에 대한 논의 및 데데킨트식 논리주의/구조주의적 관점과 자연수론이 다뤄지는 장들에서 얻은 소득이 많은바, 이전에 희미하거나 파편적으로만 알던 사안들을 좀 더 명확하게 다듬어가면서 프레게 사유와의 접점도 맛보기로 포착해볼 수 있어서 지적인 흥미와 갈증을 동시에 느꼈다. 최근 코파의 "의미론적 전통"을 5회차 재독하면서 이해하는 부분이 확 늘고 한 챕터를 번역하기도 했는데, 정의에 대한 견해차나 독립성 증명에 대한 메타적 관점차 등 번역하며 공부한 장에서 간략하게 다뤄졌던 힐베르트-프레게 간 논쟁의 핵심적인 결절점들이 이 책 6, 8, 9장에서 상세히 논구되고 있어서 무척 반갑고 지적으로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물론 솔직히 터놓자면 코파의 보수적 해석과 이 책 저자의 최신 해석이 정확히 상반되는 편이어서 기실 혼란만 가중된 거긴 하지만, 기존 지식에 대한 혼란 역시 모종의 인식적 확장의 편린 내지 확장을 위한 단초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단순무한체계와 단위집합을 시초항으로 삼는 자연수 사슬 등 데데킨트의 자연수론 및 그 논리주의적/구조주의적 성격을 좀 더 명확하고 상세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소득도 컸다. 이외에도 논리주의에서 추상화 절차와 흄 원리, 헤일이나 라이트 등의 신논리주의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논리철학적 의의, 모형론적 귀결개념과 타르스키의 논리상항 정의, 이 책에서도 언급 및 간략히 논구되는 데틀렙슨의 형식주의 해석, 프레게 데데킨트 러셀의 고전적 논리주의 개요 등ㅡ미구에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재독할 예정인 "수학철학 및 논리철학 옥스포드 핸드북"에서 다뤄지는 주제들과도 겹치는 지점이 많았어서, 그 책도 빨리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독서였다. 늘상 그렇듯 책권 하나를 읽으면 그것 하나로 지식체계나 사유방향이 그 책에서 얻은 만큼 딱 꼴지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 이전에 읽어놓은 것이나 앞으로 읽어나가야 할 책들에 대한 욕망이 더 커지게 마련이다. 독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전반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및 그 이해를 기반으로 세계에서 행동하는 여하한 방식 모두가 그러하다. 하나의 방식이나 절차가 적당히 마물러지면 그 다음 과제가 전연 떠오른다. 신이 아닌 바에야 유한한 존재인 우리 모두-각자의 살아지는 방식이 으레 그러하다.
3. 이런 전문적인 연구논문 모음 형태를 지닌 단행본의 장점을, 내용의 난이도와 그에 따른 이해 가능성을 떠나서 굳이 추가적으로 찾아보자면, 최신성인 듯하다. 논증이 너무 전문적이어서 읽는 의의가 없다고 느껴진다는 단점은, 2년 전 가을에 글자만 꾸역꾸역 읽어간 박정일의 "논리-철학 논고 연구"나 당해 여름에 읽다 중도포기했던 선우환의 "때문에"에서 느꼈던 바와 동일하다. 반면 해당 주제에 관한 최신 논문이나 해외 서지사항들을 참조하며 평가하는바 그 주제에 관해 이뤄진 그간의 논의동향이 어떠했는가를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은, 전문적 학술적인 접근이 어려운 일반 독자층에게는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이는 오년 전 송하석의 "거짓말쟁이 역설에 관한 탐구"를 읽을 적에 느꼈던 바와 같다. 일반 독자층 대중들의 관심이 미약한 마이너 분야에서도 이렇듯 최신성을 갖춘 전문연구서가 나왔다는 것은, 해분야에 관심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신나고 즐겁고 긍정적인 징조가 아닐 수 없다. 책표지 뒷날개에 해당 출판사에서 출간된 저술목록을 보면 동 저자의 "프레게와 수학철학"이 근간으로 예정되어있는데, 알라딘 어플에서 늘상 신간을 알아보는 일로 아침을 시작하는 내가 이 책의 출간을 처음 접하고 바로 구매했을 때처럼, 그 책의 출간도 무척이나 기대된다.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한 우물 파며 연구해온 결실을 단행본 형태로 출간함으로써 일반 독자층에게도 접근성을 조금이나마 제고해준 저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사족.
4. 4학년 막학기 심리철학 강의 교재는 김재권의 심리철학 2판이었다. 기능주의 파트에서 썰의 중국어 방 논증이 나오는 대목에 이르자, 교수님은 썰이 내한하여 한 심리철학 쎄미나에서 강연했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썰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시간에 좌중에 있던 김용옥이 '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냐'며 일갈하는 식으로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쎄미나 사회자였던 김재권 교수는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둥그렇게 매듭지으려 멋쩍게 웃으며 "우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고 답하면서 상황을 정리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5. 그런 김재권에게서도 의도치 않은 편협함이 드러난 일화를, 해당 강의의 다른 시간에 교수님이 들려주었다: 말년의 김재권이 한 심리철학 학회에 청중으로만 참석해 듣던 중, 후배 교수에게 '요즘 학자들은 이런 것도 다 연구하냐'고 조용히 물었다고 전해진다. 에피소드를 들려준 주차는 교재의 8장이었나 9장이었나, 여하간 의식에 관한 인지과학 내 성과들이 다뤄지는 파트의 진도를 나가던 주차였다. 분석형이상학 전공이었던 교수님은 본인도 해당 부분은 적확히 아는 바가 적다며 시험범위에서 제외시켰다. 고전적인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유에 비했을 때 지엽적이어보이는 자연주의적 연구결과들이 논의되던 당시 세미나가, 심리철학분야의 대학자인 김재권에게마저 생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짧게 언급한 뒤, 교수님은 강의를 이어갔다. 대학자에게마저 그럴진대 범부인 우리들에게는 항차 어떠하겠는가.
6. 이제 나는 20대 초중반에 견지했던바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인식과 관련하여 극단적인 형태의 상대성과 관점주의를 관철하는 철학에 더이상 관심하지 않는다. 당시 학과공부나 과제까지 뒷전으로 미뤄가면서 버스에서 열차에서 캠퍼스 영내에서 탐독하던 니체 푸꼬 데리다는 지금 틈틈이 작성해가는 도서구매목록에서 몇 줄 차지하지도 않을 뿐더러, 어쩌다 일년에 두어 번 그런 저술들을 읽을 때도, 이전과는 달리 일관성을 기하는 우호적인 해석적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전면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읽게 된다. 하지만 지식체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동일성의 경계가 모호한 <삶의 태도> 내지 <방식>에 대해서는 상대주의적 관점이 여전히 유효하고 심지어 당위적이라고 느끼는 때가 갈수록 많아진다. 철학에 대한 대다수 대중들의 생각이 '실생활에 쓸모라곤 일절 없는 저딴 현학을 뭐한다고 다 씨부리나'로 수렴하는 현상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층이 이런 연구서를 읽을 때 느끼는 바가 '프레게 철학에서 뭐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걸고 넘어지나'로 수렴하는 현상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철학을 읽고 사유하는 사람이 '적어도 나는 그걸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변명할 수 있는 것처럼, 치열하게 전문 연구를 이어가는 학자들도 '우리는 이런 사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변명할 여지가 있음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프레게 학자들은 이딴 것도 다 연구하나? 쉬운 책이나 좀 써줄 것이지' 하는 아집과 욕심을 스스로 해독해낼 줄 아는 게, 건강하고 비폭력적인 형태의 지성을 갖출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삶의 모든 부문과 양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7. 다만 이것이 추상적인 사유나 가치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아니라 이를 실제 행동과 실천으로 현시하는 일은 또 다른 층위의 성숙함에 관한 사안이다. 그 성숙함을 향한 기도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패하는 나를 자주 본다. 이런 측면에서라도 나는 아직 데리다를 이따금 만지작거리<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