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역사 크로노스 총서 20
데이비드 벌린스키 지음, 류주환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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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어가며 고전수학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적당한 교양서이다 원서 제목에도 ‘역사‘라는 단어가 들어가긴 하지만 정통적인 수학사 서적이라 보긴 어렵고, 고전수학에서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이론이나 개념을 몇 선별하여 그와 얽힌 에피소드적 사건들을 곁들이면서 핵심적인 착상이나 내용을 평이하게 풀어내는 식이다 저자가 철학으로 학위를 받은 이력이 있어서인지 철학적, 자연과학적 의의나 연계점도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간간히 언급하고 있어, 수학적 사안들이 무미건조하게 나열된 통상적인 교양서들과 달리 지적인 자극과 긴장감을 적당히 안겨주면서 텍스트로서 읽는 재미도 느끼게 해준다 수식이나 형식언어는 최대한 배제하며 일상언어 위주로 논의를 이어가기에, 학창시절 배웠던 수학지식을 다 까먹은 일반성인은 물론이요 고등학생 연령의 청소년들도 흥미롭게 즐기며 읽을 수 있겠다 다만 정보의 양으로 보나 질적인 깊이로 보나 구매소장하여 여러번 활용할 만하지는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 가볍게 일독하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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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chyoung123 2026-05-16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글을 읽고 궁금한 점이 생겨서 질문드립니다.솔 크립키 철학에 관심이 생겨서 유튜브 ˝논리학당˝ 채널을 통해 명제논리와 1차 술어논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상들로는 완전한 이해가 되는 것 같지 않아서 논리학 서적을 구매하려고 하는데, 혹시 추천해 주실 만한 공부 순서가 있을까요?

depaysment 2026-05-16 20:24   좋아요 0 | URL
1. 우와! ㅎㅎ 안녕하세요! 질문 맥락으로 추측건대 온라잉이든 오프라인이든 실시간으로 전문가와 상호작용하며 지도받으실 수는 없는 실정에서, 비판적 사고와 논술 류라든가 교양 수준 비형식논리가 아니라 기초 형식논리에 관심하고 계신 것 같네요 사실 이분야는 전문가에게 면대면으로 지도, 교수받으며 연습해나가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하긴 하지만, 현실 여건이 안된다면 전문교재로 독학하면서 유튜브 등 다른 컨텐츠를 활용해서도 충분히 숙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급하신 채널은 저로선 처음 알았는데 대충 훑어보니 제대로 된 전문가분이 정석적이면서도 알찬 내용들로 영상 구성해서 채널 운영하고 계신 것 같아 저도 관심이 가게 되네요 ㅎㅎ 근데 그것만르로 뭔가 이해가 미진하다고 느껴지신다면, 그리고 아직 초입 단계로서 전문교재를 한 번도 접해보신 적이 없다면, 일단은 유튭영상이나 파편적인 온라인 자료보다는 체계적으로 짜여진 교재나 텍스트를 우선적으로 통독하시며 개념 익히고 숙달해 나가시는 게 가장 좋다는 면에서, 책을 구매하시기로 하신 결심은 아주 좋은 방향설정인 거 같아요 ㅎㅎ


2. 근데 일단 변명조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오래전 대학시절 논리학 강의에서 명제논리와 일부 술어논리만  배워본 게 전문가에게 수학한 경험 전부이고 이후로는 혼자 이런저런 단행본들 뒤적여가며 독학한바, 양적으로도 깊이 측면에서도 전혀 전문가 수준이 아니라서요...ㅎㅎ 그러니 지금 드리는 말씀은 그냥 취미수준 독서에 기반한 간략한 방향제시 정도로만 받아들이신 채, 어떤 텍스트가 되었든 실질적으로는 혼자 열심히 읽고 컨텐츠도 찾아보고 반복숙달하시면서 구체적, 세부적인 방향과 순서는 스스로 차근차근 확립해나가시길 추천드려요 현실적인 논리, 논술 준비라든가 논리학적 지식을 요하는 공인 시험같은 거에 급박하게 대비하시는 게 아니라, 저처럼 취미 차원에서 논리학에 관심하시는 거라면, 체계적이고 정석적인 공부순서나 방향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고 당장은 이해가 안가시는 지점에서 너무 초조해하지도 마시고, 이해가 가면 가는 대로 정리 및 메모해보고 안가면 안가는 대로 언어나 맥락만이라도 머리에 욱여넣으면서, 한 달이든 일 년이든 꾸준히 유관 저서나 자료들을 탐색하고 읽어나가시다보면, ‘아 그때 유튭에서 본 게 이런 얘기였구나‘ 하면서 이해의 결절점들이 자연스레 해소되는 수준에 도달하실 수 있을 거예요 ㅎㅎ 

3. 이런 변명과 대략적인 조언을 전제로 실제 텍스트를 말씀드려보자면 이병덕의 ˝코어논리학˝이랑 최원배의 ˝논리적 사고의 기초˝가 독학하기에도 무리 없는 가장 좋른 선택지인 거 같아요 ㅇㅇ (손병홍의 ˝논리학˝도 옛날부터 눈여겨봐오긴 했는데, 아직 제가 읽어본 바가 없어서 이건 제외...ㅎㅎ) 둘다 번역서가 아니라 국내 전문가가 우리말로 쓴 교재이고, 내용의 양과 질, 연습문제 수준과 다양성, 설명의 난이도나 친절함, 구성의 깔끔함 등 대부분의 평가지표상에서, 개인적으로는 동등한 수준으로 좋은 교재들이라믄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굳이 사소한 차이점을 꼽자면 최원배의 것이 양적으로 약간 더 많은 내용(명제논리 결정절차로서 진라표 방법 이외의 진리나무방법 및 메타논리적 증명 일부)을 담고 있고, 둘 다 논리상항의 도입/제거 규칙을 통한 자연연역법을 채택하되 그 표기방식이 다르다는 것 정도에요 ㅇㅇ 근데 이병덕이 채택한 피치증명법이 개인적으로는 입문자게에 피로ㅛ감이 덜힐 것 같다 생각하는 편이어서, 구매소장하여 반복적르로 활용할 물건으로 둘 중 하나만 꼽자면 이병덕의 것을 최종적으로 추천드립니다! ㅎㅎ

4. 혹여 논리학 초심자이신데 앞의 책들이 너무 전문교재같고 교과서 같아서 약간의 플러스알파가 아쉬우시다면 송용진, ˝수학자가 들려쥬는 진짜 논리 이야기˝ 이거 가볍게 읽독하시면서 워밍업 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테크니컬한 교재가 아닌 교양수준 논리학 관련 서적중에서는 이게 가장 재밌고 유익하고 덜 오도적이더라고요 ㅎㅎ (다만 이건 구매소장보다는 빌려서 일별해보시기를 추천!)

5. 여하간, 많은 철학자들이 얘기하듯 논리학(그리고 수학)도 엄연히 하나의 언어인 만큼,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듯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데는 별다른 왕도가 없어 실질적인 반복숙달이 느리지만 빠른 길인 만큼, 너무 초조해하거나 답답해하시지 말고 유관 텍스트나 자료들 꾸준히 접하시면서 논리학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ㅎㅎ 워낙 마이너하고 비인기인 분야라 단행본도 잘 안나오고 하는 마당에, 이렇게 관심사가 겹치는 분을 만나면 반갑고 즐겁고 신나고 그래요 ㅎㅎ 논리핫 연습 안한지 이년 째가 다 돼가는데, 말쓴해주신 채널 시간 날 때 보면서 저도 다시 논리학 연습 많이 해야겠어요 ㅋㅋㅋ 문의답글 주셔서 감사드리고, 모쪼록 공부에 진척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Porchyoung123 2026-05-16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추천해주신 책들부터 시작하여 공부해볼게요!!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현대미술계의 진짜 모습
오자키 테츠야 지음, 원정선 옮김 / BOOKERS(북커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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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독 후 돌아보니 서두에 실린 한 미술평론가의 추천글이 책의 특성과 장점을 아주 잘 요약해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 미술이 "무엇보다도 미술이 산업화된 시대의 미술"이라는 현실에 착안하여, "그 사조와 미학의 전개"를 소개하는 데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 "시장이나 제도, 관계 전문가들의 역할이나 역학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현미술의 틀 안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여러 영역들의 모습을 개관"하는바, "매우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알찬 안내서"이다. 목차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나듯 작품, 작가, 사조 내적인 흐름이나 논리보다는, 미술시장과 큰손 컬렉터, 미술관, 비평계와 이론가, 큐레이터와 전시, 예술가와 관객 등에 두루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추출되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보를, 미술 저널리즘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저자가 쌓아온 지식과 길러온 통찰력을 곁들여 제공한다. 미술계 외부의 일반인들이 파악하기 어려운바 동시대 미술계 전반의 현장생리에 대한 대략적인 시선을 갖추게끔 돕는 안내서 역할을 십분 해내는 동시에, 책의 제목인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저자 고유의 답변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방향으로 고민하게끔 사유를 고취해주기도 한다. 요컨대 저자 스스로의 말처럼 "가십"과 "견해"를 두루 제시하되, "견해는 말할 것도 없고, 가십거리도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요소"라는 스탠스에서 쓰였다는 특성이 여실히 묻어나는 책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18세기 말 이후 미술사나 사조흐름 및 동시대 미술의 여러 작품과 경향을 잘 모르더라도, 양적인 부담감만 이겨낸다면 흥미롭게 읽어가면서 미술계 관련 정보에 대한 저자의 폭넓고 상세한 서술을 통해 현대미술이라는 분야에 대한 그림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의 토대가 된 저자의 과거 글들이 2015-17년 사이의 글들이어서인지, 8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계에 대한 정보 비중이 높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장점이라 여겨졌다. 작품이나 사조 내적 논리에 대한 논의 비중이 크지 않다보니, 역사적 평가가 분분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 미술에 대해 이론적 관점이나 틀을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비교적 최신 정보나 담론들을 가벼운 통찰력이나 평가와 곁들여 제시하면서 동시대 미술계 현황에 대한 감각을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키워주는 효과가 있다. 오랜 기간 미술 저널리즘에서 활동한 저자의 글솜씨가 원체 탁월한 탓인지 역자의 번역실력이 준수한 탓인지 둘 다인지, 다채로운 어휘를 구사하면서도(읽으면서 사전을 검색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난해하거나 지저분하지 않고 유려하게 읽히게끔 만드는 문장력 역시, 이 책을 단순한 정보매체로서가 아니라 읽고 즐길 수 있는 텍스트로 꼴짓는 데에 일조하는 장점이다. 미술서적임에도 도판이 흑백인 점은 아쉬운 사항일 수 있으나, 전술하였듯 미술사나 사조가 책의 구심점은 아니라는 특성상 사소한 성격의 단점이라 생각한다. 정 아쉬우면 정윤아, "미술시장의 유혹"; 켈리 그로비에, "현대미술강의"; 피터 칼브, "1980년대 이후 현대미술" 정도를 함께 일독하길 추천해본다. 개인적으로는 그 책들을 읽어놓은 경험이 이 책을 읽고 즐기며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반면 긴 기간 연재되었던 글들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어낸 데에서 기인하는바 통일적인 모양새가 좀 떨어진다는 느낌은 좀 더 유의미한 단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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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게와 논리철학 프레게 철학 시리즈
박준용 지음 / 동연출판사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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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문적인 연구논문들을 엮은 단행본이기에 프레게의 1차저술이나 논리/수학철학에 상당히 숙달해 있는 독자층 혹은 전문가들에게만 읽는 의의가 있는 책이다. 제목 그대로 논리학의 본성 내지 특성에 대한 프레게의 견해와 연관된 논의들이 1부를 이루고, 논리철학적 사안들과 접점을 갖는 메타적 사안들에 관한 논의가 2부를 이룬다. 연구논문들을 엮은 형태의 단행본들이 으레 그렇듯이 해당 주제를 다루는 여타 연구들에 대한 참조, 해석, 평가 위주의 전문적인 논증들이 주를 이루다 보니, 프레게 고유의 사유체계에 대한 초보적인 해설 격의 내용을 기대하고 읽으면 큰코다칠 것이다(프레게 당대나 그 이후 가까운 시기에 이뤄진 메타논리적 발전을 다루는 2부가 그나마 해설적인 부분이 많은 편이긴 하다). 해당 주제들을 심층적으로 공부하는 연구생이나 그런 수준에 준하는 배경지식을 갖춘 독자층이 아닌 이상은 읽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프레게의 논리/수학절학은 물론이요 일반적인 수학철학사, 19세기 중후반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진행된 논리학 및 수학기초론의 역사, 논리학/수학에 대한 메타적인 이론 등에 폭넓고도 깊게 숙달해 있어야, 복잡하고 전문적인 논증들을 이해하고 나름대로 평가하며 읽어나갈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어야 할지 정 고민된다면, 도서관에서든 서점에서든 각 부의 머리글 및 각 장들(즉 각 논문들)의 들어가는 말과 나오는 말 부분만 일별하여도, 본인이 이 책에 덤볐을 때 다소나마 승산이 있을지 판가름할 수 있을 것이다. 


2. 개인적으로는 전술한 사안들에 대해 갖춰놓은 지식이 미진하고 겉핥기 식일 뿐이어서, 1부는 거의 글자만 읽었고 해설적인 비중이 많은 2부를 그나마 상대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특히 힐베르트식 메타이론, 증명론과 유한유의, 이념적 방법 등에 대한 논의 및 데데킨트식 논리주의/구조주의적 관점과 자연수론이 다뤄지는 장들에서 얻은 소득이 많은바, 이전에 희미하거나 파편적으로만 알던 사안들을 좀 더 명확하게 다듬어가면서 프레게 사유와의 접점도 맛보기로 포착해볼 수 있어서 지적인 흥미와 갈증을 동시에 느꼈다. 최근 코파의 "의미론적 전통"을 5회차 재독하면서 이해하는 부분이 확 늘고 한 챕터를 번역하기도 했는데, 정의에 대한 견해차나 독립성 증명에 대한 메타적 관점차 등 번역하며 공부한 장에서 간략하게 다뤄졌던 힐베르트-프레게 간 논쟁의 핵심적인 결절점들이 이 책 6, 8, 9장에서 상세히 논구되고 있어서 무척 반갑고 지적으로 확장되는 느낌을 받았다(물론 솔직히 터놓자면 코파의 보수적 해석과 이 책 저자의 최신 해석이 정확히 상반되는 편이어서 기실 혼란만 가중된 거긴 하지만, 기존 지식에 대한 혼란 역시 모종의 인식적 확장의 편린 내지 확장을 위한 단초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또한 단순무한체계와 단위집합을 시초항으로 삼는 자연수 사슬 등 데데킨트의 자연수론 및 그 논리주의적/구조주의적 성격을 좀 더 명확하고 상세한 형태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소득도 컸다. 이외에도 논리주의에서 추상화 절차와 흄 원리, 헤일이나 라이트 등의 신논리주의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논리철학적 의의, 모형론적 귀결개념과 타르스키의 논리상항 정의, 이 책에서도 언급 및 간략히 논구되는 데틀렙슨의 형식주의 해석, 프레게 데데킨트 러셀의 고전적 논리주의 개요 등ㅡ미구에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가 재독할 예정인 "수학철학 및 논리철학 옥스포드 핸드북"에서 다뤄지는 주제들과도 겹치는 지점이 많았어서, 그 책도 빨리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독서였다. 늘상 그렇듯 책권 하나를 읽으면 그것 하나로 지식체계나 사유방향이 그 책에서 얻은 만큼 딱 꼴지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 이전에 읽어놓은 것이나 앞으로 읽어나가야 할 책들에 대한 욕망이 더 커지게 마련이다. 독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전반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및 그 이해를 기반으로 세계에서 행동하는 여하한 방식 모두가 그러하다. 하나의 방식이나 절차가 적당히 마물러지면 그 다음 과제가 전연 떠오른다. 신이 아닌 바에야 유한한 존재인 우리 모두-각자의 살아지는 방식이 으레 그러하다. 


3. 이런 전문적인 연구논문 모음 형태를 지닌 단행본의 장점을, 내용의 난이도와 그에 따른 이해 가능성을 떠나서 굳이 추가적으로 찾아보자면, 최신성인 듯하다. 논증이 너무 전문적이어서 읽는 의의가 없다고 느껴진다는 단점은, 2년 전 가을에 글자만 꾸역꾸역 읽어간 박정일의 "논리-철학 논고 연구"나 당해 여름에 읽다 중도포기했던 선우환의 "때문에"에서 느꼈던 바와 동일하다. 반면 해당 주제에 관한 최신 논문이나 해외 서지사항들을 참조하며 평가하는바 그 주제에 관해 이뤄진 그간의 논의동향이 어떠했는가를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은, 전문적 학술적인 접근이 어려운 일반 독자층에게는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이는 오년 전 송하석의 "거짓말쟁이 역설에 관한 탐구"를 읽을 적에 느꼈던 바와 같다. 일반 독자층 대중들의 관심이 미약한 마이너 분야에서도 이렇듯 최신성을 갖춘 전문연구서가 나왔다는 것은, 해분야에 관심하는 사람에게는 분명 신나고 즐겁고 긍정적인 징조가 아닐 수 없다. 책표지 뒷날개에 해당 출판사에서 출간된 저술목록을 보면 동 저자의 "프레게와 수학철학"이 근간으로 예정되어있는데, 알라딘 어플에서 늘상 신간을 알아보는 일로 아침을 시작하는 내가 이 책의 출간을 처음 접하고 바로 구매했을 때처럼, 그 책의 출간도 무척이나 기대된다.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한 우물 파며 연구해온 결실을 단행본 형태로 출간함으로써 일반 독자층에게도 접근성을 조금이나마 제고해준 저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사족.


4. 4학년 막학기 심리철학 강의 교재는 김재권의 심리철학 2판이었다. 기능주의 파트에서 썰의 중국어 방 논증이 나오는 대목에 이르자, 교수님은 썰이 내한하여 한 심리철학 쎄미나에서 강연했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썰의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시간에 좌중에 있던 김용옥이 '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냐'며 일갈하는 식으로 언성을 높였다고 한다. 쎄미나 사회자였던 김재권 교수는 날카로워진 분위기를 둥그렇게 매듭지으려 멋쩍게 웃으며 "우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고 답하면서 상황을 정리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였다.  


5. 그런 김재권에게서도 의도치 않은 편협함이 드러난 일화를, 해당 강의의 다른 시간에 교수님이 들려주었다: 말년의 김재권이 한 심리철학 학회에 청중으로만 참석해 듣던 중, 후배 교수에게 '요즘 학자들은 이런 것도 다 연구하냐'고 조용히 물었다고 전해진다. 에피소드를 들려준 주차는 교재의 8장이었나 9장이었나, 여하간 의식에 관한 인지과학 내 성과들이 다뤄지는 파트의 진도를 나가던 주차였다. 분석형이상학 전공이었던 교수님은 본인도 해당 부분은 적확히 아는 바가 적다며 시험범위에서 제외시켰다. 고전적인 철학적, 형이상학적 사유에 비했을 때 지엽적이어보이는 자연주의적 연구결과들이 논의되던 당시 세미나가, 심리철학분야의 대학자인 김재권에게마저 생경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짧게 언급한 뒤, 교수님은 강의를 이어갔다. 대학자에게마저 그럴진대 범부인 우리들에게는 항차 어떠하겠는가. 


6. 이제 나는 20대 초중반에 견지했던바 세계에 대한 지식이나 인식과 관련하여 극단적인 형태의 상대성과 관점주의를 관철하는 철학에 더이상 관심하지 않는다. 당시 학과공부나 과제까지 뒷전으로 미뤄가면서 버스에서 열차에서 캠퍼스 영내에서 탐독하던 니체 푸꼬 데리다는 지금 틈틈이 작성해가는 도서구매목록에서 몇 줄 차지하지도 않을 뿐더러, 어쩌다 일년에 두어 번 그런 저술들을 읽을 때도, 이전과는 달리 일관성을 기하는 우호적인 해석적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전면적인 거부감을 느끼며 읽게 된다. 하지만 지식체계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동일성의 경계가 모호한 <삶의 태도> 내지 <방식>에 대해서는 상대주의적 관점이 여전히 유효하고 심지어 당위적이라고 느끼는 때가 갈수록 많아진다. 철학에 대한 대다수 대중들의 생각이 '실생활에 쓸모라곤 일절 없는 저딴 현학을 뭐한다고 다 씨부리나'로 수렴하는 현상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층이 이런 연구서를 읽을 때 느끼는 바가 '프레게 철학에서 뭐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걸고 넘어지나'로 수렴하는 현상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철학을 읽고 사유하는 사람이 '적어도 나는 그걸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변명할 수 있는 것처럼, 치열하게 전문 연구를 이어가는 학자들도 '우리는 이런 사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변명할 여지가 있음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프레게 학자들은 이딴 것도 다 연구하나? 쉬운 책이나 좀 써줄 것이지' 하는 아집과 욕심을 스스로 해독해낼 줄 아는 게, 건강하고 비폭력적인 형태의 지성을 갖출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삶의 모든 부문과 양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7. 다만 이것이 추상적인 사유나 가치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아니라 이를 실제 행동과 실천으로 현시하는 일은 또 다른 층위의 성숙함에 관한 사안이다. 그 성숙함을 향한 기도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실패하는 나를 자주 본다. 이런 측면에서라도 나는 아직 데리다를 이따금 만지작거리<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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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프랑스 철학사
한국프랑스철학회 엮음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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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된 구성을 통해 핵심 사안을 깔끔하면서도 알차게 전달하는 좋은 입문서이다. 5부 구성으로 실증주의 형이상학과 과학철학적 인식론 전통, 프랑스 현상학과 실존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이후 동시대의 두 인물이 다뤄진다. 각 부의 서론에서 해당 흐름을 개괄한 뒤 장별로 한 철학자의 사상이 해설되는데, 인물의 생애와 저작을 소개하고, 이론의 핵심 개념과 내용을 시간순, 발전순으로 해설하며, 다소 공인된 철학사적 의의와 영향을 간략히 제시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구성 면에서 통일적일 뿐만 아니라 내용의 난이도 측면에서도 균일성을 기하고자 했다는 점이 느껴진다. 다뤄지는 각 인물들의 사유 자체의 특성에서 느껴지는 어려움을 차치하면, 각 글들의 서술 스타일과 읽는 난이도가 매우 균질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복수 저자들이 참여했음에도 이렇듯 통일되고 일관적인 모양새를 갖춘 동시에 학술적 견실함도 여실한 단행본이 탄생했다는 건 분명 해당 학회에서 많은 논의와 검토가 이뤄졌음을 증거하는바, 책 전체 머리말에서 드러나는 자부심과 뿌듯함은 결코 알맹이 없는 수사적 자화자찬이 아니다. 교양서 수준으로 평이하게 읽힌다고 할 수는 없지만, 철학과 학부생 2, 3학년 내지 전통철학사와 현대철학사 서적을 두어권 읽어본 독자층이라면 각 철학자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한 밑그림을 그려내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될 법한 학술적 입문서이다. 현대 프랑스철학 내지 대륙철학 전통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철학적 기반 등에 관심하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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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철학 케니의 서양철학사 4
앤서니 케니 지음, 이재훈 옮김 / 서광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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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뤄지는 시대의 특징으로 인해 전권들에 비해 포괄성 및 논쟁적 대비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시리즈 고유의 구조가 단점을 자연스레 보강해준 권이었다. 저자의 철학적 배경과 성향으로 인해 대륙철학과 분석철학의 비중차가 뚜렷하고, 개별 철학자들 간의 이론적, 논쟁적 대비점을 명시한 부분도 전권들에 비해 적은 편이다. 반면 통상적인 철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케니 고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강도는 더 강해졌다. 이에 대륙철학이든 분석철학이든 현대철학에 배경지식이 없는 초심자로서는 전반적, 맥락적으로 선명하거나 탄탄한 그림을 얻기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이는 저자의 저술실력에 기인하는 게 아니라 다뤄지는 시대의 특수성에 기인하는바 책 외적인 단점이라 생각한다. 이전 시대에 비해 더할 나위 없이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전개된 20세기 철학에 대해, 현저한 다수가 무리 없이 받아들일 법한 철학사적 평가가 우리 시점에서도 아직 만족스럽게 내려지지 않은 마당에, 이 책에서 다뤄지는 내용들은 케니가 학문적으로 활동하며 성장해가던 시기엔 그가 함께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동시대의 사유 흐름들이었다. 이러니 전권들의 머리말에서 느껴지던 견실한 기백과 달리 이번 권의 머리말에서 케니가 인물 및 사조의 선별과 관련하여 변명조로 주저스러움을 내비친 것은 철학사가로서 솔직하고 투명한 태도였다 여겨진다. 현대철학 파트에서 서술 및 내용의 견고함이나 포괄성이 아쉽다는 점은 여타 철학사 서적들에서도 심심찮게 드러나는 단점이니, 이 책을 선택지에서 제외시킬 이유는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외려 여타 철학사 서적들과 달리 이러한 내용상의 단점을 이 책 고유의 구조를 통해 상쇄해냈다는 점은 이 책을 선택할 이유를 하나라도 더해준다. 1권에서부터 꾸준히 이어져온 역사별/주제별 서술방식의 병행을 통해, 파편성과 비맥락성을 조금이라도 희석하면서 현대철학에서 기초적이고 교과서적인 사안들을 최대한 평이하게 전달하는 데에는 분명 성공하고 있다. 

 여하간, 4권까지 끈기있게 읽고 난 뒤 지적인 갈증을 느끼고 더 도전해볼 지적 체력도 남는다면, 대륙철학이든 분석철학이든 각 전통을 배타적으로 다루는 여타 현대철학 단행본들로 보완하는 편이 좋겠다. 1-3권과 다른 역자가 번역해서 번역에 조금 걱정을 했었는데, 전권들에 비해 딱히 더 못한 번역이라는 느낌은 전연 들지 않았다. 기등록된 평에 프레게 파트에 오역이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는데, 원문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프레게에 대해 아는 배경지식에 비추었을 때는 (프레게의 'Bedeutung'에 대해 케니가 선택한 영단어 'reference'를 '언급'으로 번역한 것 말고는) 그다지 이상하거나 명백하게 잘못 기술된 부분은 없다고 여겨졌다. 프레게 사유에 숙달해 있으면서 이 책의 원서를 읽은 독자의 좀 더 구체적인 지적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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