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납은 확증도 개념에 대한 실질적 설명을 의미론적으로 제시하였다 확증도 개념은, 임의의 대상언어 문장 h와 e를 논항으로 취하여, 그 한 쌍의 문장으로부터 0과 1 사이의 값이 사상되는 2항 메타언어적 함수인 c(h, e)로서 도입되는바, 가설 h가 근거 e에 토대했을 때 갖는 확증도의 산출값은 ‘c(h, e)=r‘로 표기된다 귀납논리적 문장 자체와, 구체적인 앎의 상황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일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문장 h가 실제로 적법한 가설을 서술하고 문장 e가 참인 경험적 지식을 표현하는지 여부의 문제는, 귀납논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상황에 대한 적용의 문제에 속한다˝

- v. 스테그뮐러, 현대 경험주의와 분석철학

예전에는 ˝논리는 논리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인간 실격˝의 한 구절을 혐오했었다 카르납 같이 똑똑하고 냉철한 사람도 그런 내포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마당에, 연금복권 한 번 안맞았다고 풀죽은 멍청이가 함부로 혐오하기에는 참 큰 말이었다 로또번호의 확증도를 어떠한 귀납적 함수체계를 이용해 사상시키는지는 몰라도, 뛔잉 하고 울리는 당첨번호 계산기 어플 알림을 보고는 노오란 각종 세금 지로서나 내가 과속해서 날아온 과태료 고지서 등지에 당첨번호를 메모했다가 복권방에 들고가 고개 멀리 눈 찡그리며 번호를 마킹해서 복권을 사는 엄마의 옆얼굴은, 답해질 수 있는 모든 문제가 과학적으로 대답되더라도 삶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거라 말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초상을 떠올리게 한다 가구도 몇 안 되는 방에서 살았던 그가 생각한 삶의 문제란 것은, 당첨금으로 존나 큰 냉장고랑 김치냉장고 한 두 대 사서 반찬걱정 쉰김치 걱정 없이 살자는 엄마가 생각한 삶의 문제보다 과연 컸을까 작았을까 궁금하다 노르웨이 통나무집에서도 켐브리지에 복귀해서도 콩요리 통조림만 먹고 살아도 별 문제될 게 없다 생각한 비트처럼, 엄마가 볶아놓고 데쳐놓고 무쳐놓은 매일 같은 밑반찬만 먹어도 하냥 질릴 일 없다 생각하는 나의 삶의 문제는 또 어떠할까 궁금하다 세상에 나만 남고 아무도 없어지는 L-공간 집합이 주어지면 ˝세상 모든 맛있는 음식의 맛은 신이 보내신 엄마들의 수 만큼이나 많다˝는 보편 양화문은 L-거짓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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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각은 강한 상기력과 동시에 강한 휘발성을 갖고 있다 맡으면 특정 시점과 특정 공간이 바로 떠오르지만, 맡지 않는 이상 그 특정 후각에 인지적으로 연계된 정보는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력의 가용범위를 벗어나 소멸한다 인간 두뇌에 일말이나마 저장된 휘발적 정보를 역으로 읽어 데이터화하여 그 정보를 선명하게 다시 꼴지어줄 수 있는 냄새를 재창조해내는 수준으로 인공지능기술력이 발달하는 날, 그 기술로 엄마냄새를 되살려 엄마의 얼굴 기억이나 목소리 기억이나 상처투성이 엄마손의 감촉기억보다 그 데이터화된 냄새만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엄마들을 인식론적으로 명료히 표상 가능하게 되는 날-그 날이 천사가 일곱 번째 나팔을 부는 날일지도 모른다 날 적부터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자란 우리 모두-각자는 신의 얼굴을 감히도 훔쳐본 영광되고도 가련한 죄인이어서, 말 못하고 울기나 할 적이면 우주의 모든 빛을 쥔 그 손에서 자라 살아지는 축복을 먹으며 크다가도, 살아있어 죄를 많이 지으며 나이가 들면 부신 빛 푸지던 그 손에 우툴두툴 부푸는 비지에 얽어 틀어진 손마디 상처들을 명징히 봐야하는 벌을 받는다

‘엄마‘는 일반명사도 아니고 그 지시체는 보편자도 아니다 ‘어떤 x에 대해: x는 엄마이다‘는 논의영역이 되는 가능세계가 제한됨에도 필연적으로 참인 존재 양화문이다 엄매가 존재하는 세계는 신이 만들 수 있었던 ‘최선의 가능세계‘가 아니라 신이 만들 밖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던 ‘바로 그 가능세계‘이다 ‘바로 그‘라는 정관사를 이렇듯 세계에 대해 양화하면 러셀과 콰인이 펄쩍 뛰겠지만, 내가 지시하는 세계는 곧 신이 보여준 세계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각자의 양화문은 엄마적-신적 개입에 따라서만 그 진리치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엄마에 관한 임의의 문장 m은 신에 관한 임의의 문장집합 G의 귀결이다

*참고문헌: 장미여관, 엄마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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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오늘 자신의 성격을 삶의 표출에 투입하여 표현한 것,
이것이 만일 내일까지 남아 있다면 역사가 된다˝


- w. 딜타이, 정신과학에서 역사적 세계의 구조


그러니 살아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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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 논리주의 대 직관주의

 

예컨대 데데킨트는 공간과 시작의 직관으로부터 수를 도출할 수 없으며 다만 수는 "사고의 순수 법칙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발현되어 나온다"라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수로부터 공간과 시간의 명확한 개념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논리학파의 기본 이론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지만, 거기에 깊이 천착하지는 않았다.

 

모리스 클라인, 수학의 확실성, 381




2. 수의 무한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대한 Dedekind의 설명

 

DedekindFrege가 자연수를 취급하는 방식은 대체로 유사하다. Frege의 정리가 보여주는 바는, 유한 기수(基數)finite cardinalsHume의 원리Hume's principle에 따라 도입되고 직후자(直後者) 관계(계승수 관계)successor relation가 기수성 연산자cardinality operator에 의해 정의되고 나면, 후자와 더불어 유한기수는 Dedekind-Peano 공리Dedekind-Peano axioms를 만족한다는 것이다. 역으로 Dedekind(정리 120)는 개념 변항concept variable이 오직 유한 개념finite concept만을 아우르는range over[유한 개념만을 논항으로 취하는?] 형태의 Hume의 원리가 무엇인가?[수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에 제시된 체계 내에서 얻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자연수의 존재와 무한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앞서 Frege의 방법론을 꽤 상세히 살폈으므로 여기서는 Dedekind의 설명을 살펴보기로 한다.

Dedekind의 정의에 따르면 한 체계system[집합]는 그것의 -부분체계proper subsystem와 일대일 대응one-to-one correspondence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Dedekind적으로) 무한하다(Dedekind) infinite. 이에 비해 단순 무한한simply infinite 체계란 Dedekind-Peano 공리를 만족하는 관계의 논의영역을 형성하는 임의의 체계로 정의된다. 이렇게 정의하고 난 뒤 Dedekind는 모든 무한체계가 단순 무한한 부분체계를 포함하고 있음을 증명한다(정리 72). 우리가 하나의 무한체계의 존재를 우선 증명했다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단순 무한체계 역시 존재해서 그 체계 및 체계 관계들이 Dedekind-Peano 공리의 모형이 됨을 알 수 있다. 단순 무한체계를 얻고 나면 우리는

 

[그 체계를 이루는] 요소element들의 고유한 특성special character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각 요소들의 구별가능성distinguishability만을 유지하면서 그것들이 체계 내에서 맺는 상호관계만을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자연수natural numbers序數ordinal numbers 내지 그냥 단순히 수라고 불린다. 체계의 요소들이 갖는바 여타 모든 내용을 제거(추상화)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수를 인간 정신human mind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라고 정당하게 부를 수 있다. (무엇인가?, 68.)

 

여기서 수에 관한 FregeDedekind의 설명 간의 중요한 차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Dedekind의 관점에서, 단순 무한체계를 제시하는 일은 수에 대한 개념을 창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 [Frege가 겨냥하였듯이] 개별 수들 간의 동일성을 고정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다. 실지로 Dedekind는 자신의 착상을 그런 식으로 확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했다. 반면 Frege는 개별 수들의 지위가 자립적인 대상self-subsistent object임을 보장하고자 그러한 작업[수 동일성 진술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것]을 수행했다. Dedekind의 분석에서 수의 존재는, 단순 무한체계를 이루는 요소들의 특정 성질들을 추상화함으로써 그 순서구조ordinal structure만을 얻게 해주는 정신적 능력mental power의 귀결일 따름이다.

Dedekind 방법론의 성공 여부는 무한체계의 존재에 달려있다. Dummett(1991a[Frege와 분석의 역설Frege and the paradox of analysis, 49ff.])이 지적했듯이, Dedekind는 방금 살펴본 방식에 따라 추상화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수 개념을 창출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체계의 존재를 보장하고자 했다. 그 경우 그의 정언성 정리categoricity theorem(정리 132)에 따르면, 구성 초기에 드러났던 특수성peculiarity은 사라지고 무한체계 구성의 일반성generality이 보장될 수 있다. 이는 정리 66의 목표로서 그 증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나의 사고thought의 세계, 즉 내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물들로 이뤄진 총체 S는 무한하다. 왜냐하면, sS의 한 요소를 지칭할 경우, s가 나의 사고의 대상이라는 내용의 사고 역시 S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s´를 요소 s에 대한 image φ(s)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그렇게 결정된 S로의 사상(寫像)mapping φ on S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갖는다: φ의 상 S의 부분이자 진-부분proper part이다. 왜냐하면 S에는 [φ에 의해 결정되는] 그러한 모든 사고 과는 다르기에 에는 포함되지 않는 요소(가령 나의 자아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abS의 각기 다른 요소들이라면 그것들의 상 역시 각기 다르며, 그런즉 사상 φ는 명백하게 잘 정의된다. 따라서 S는 무한하다. q.e.d.

 

Frege와 마찬가지로 Dedekind는 사유의 영역을 객관적인 것으로, 즉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한 영역에 무리 없이 접근할 수 있음은 사고가 우리 이성에 투명하게 비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 영역은 무한체계의 범형인바, xy라는 나의 사고의 대상이다라는 관계란 내 사고의 대상으로 이뤄진 부분체계로부터 그것 자체의 진-부분으로 사상하는 일대일 함수one-one function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형으로부터 우리는 무한체계의 개념을 추상화하며, 그에 따라 수 개념을 추상화한다. Dedekind의 증명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사고라는 것 자체가 진정한 대상proper object이어야 한다. 1차 개념의 논항, 정확히 말해 사고와 그 자체로는 사고가 아닌 대상 간에 성립하는 관계로서 x는 나의 사고의 대상이다라는 개념의 논항이 될 수 있어야 한다. Dedekind가 사고의 본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기에, [수 개념에 대한] 그의 설명이 일관적이지 않은 사고이론에 토대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Dedekind(사고가 진정한 대상이라는 추가조건을 받아들임과 더불어) Frege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고이론을 암묵적으로 가정했다고 간주한다면, [Frege의 사고이론에서 야기되는] 개념/사고 역설1)은 수의 무한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다. 즉 정리 66이 실패할 경우 우리는 수 개념을 추상화할 수 있는 범형을 잃는 셈이며, 그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수의 핵심적 속성을 알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불분명한 것으로 남게 된다.


1) 같은 책, 149(‘Russell의 명제적 역설과 Frege의 사고 개념) 참조.

 

William Demopoulos, Peter Clark, "The Logicism of Frege, Dedekind, Russell": S. Shapiro . The Oxford Handbook of Philosophy of Mathematics and Logic,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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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쪽


1. 어떤 형태 어떤 분야의 학문을 하든, 명시적으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기초적이고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적 개입이 그 학문에 필요불가결함을, 샤피로는 인정하고 들어가는 듯하다 그 학자가 그렇게 개입하는 형이상학적인 무언가something가 정확히 무엇<으로> 기술될 수 있는지, 아니면 여하간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지 정도의 수준에서만, 우리가 명시적으로 말할 수 있는 형이상학과 인식론 둘 중 하나에의 가중치가 변별될 수 있다* 이상화된 수학적 대상을 무엇<으로> 식별하는 일, 가령 논리주의마냥 논리학으로, 혹은 형식주의마냥 기호들과 그 체계의 규칙으로 식별하는 일이 가망이 없다면, 직관주의자는 이상화된 <대상>에서 눈을 거둬들이고 <이상화>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샤피로가 지적하는 점은 그런 식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 자체도 형이상학적 개입이 이미 이뤄진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ㅡ그에 덧붙여, 형이상학과 인식론 양자에서 제기돠는 부담을 덜고자** 비숍식의 중립적 구성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여하한 수학철학적 사유도 경유하지 않은 채, 그저 일상적이고 평화롭게 이해되는 바로서의 수학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인바, 이는 ‘수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수학은 수학이다‘라고 답하는 격이다 그리고 이는 그 질문을 그냥 무시하는 것과 진배없다 직관주의 입장에서 ˝자유선택 수열이 없어˝진 그 수학을 하겠다는 말이 이러한 무시(무시1)에 해당한다면(즉 직관주의가 이해한 <수학>을 ˝빈약하게˝ 만든다면), 고전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중간 배제[배중률]가 없˝어진 그 수학을 하겠다는 말 역시 그러한 무시(무시2)에 해당한다(즉 고전주의가 이해한 <수학>을 ˝빈약하게˝ 만든다) 샤피로가 지적하는 점은, 전자가 그러한 무시1을 용납할 수 없을진대, 후자도 그러한 무시2를 용납할 수 없는 충분한 근거가 있으며, 그 근거는 초두에 말한바 그 어떤 학문분야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 개입이 상정된다는 역사적, 원리적, 철학적 현실이라는 점이다

2. 불분명하고 무심하지만 날카로운 비평적 논증의 한 사례이다 (내가 재구성한)

3.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상적인 직관을 벗어나는 수준에서라면, 존재론적으로 기운 철락자에겐 인식론적 부담이 큰 반면, 인식론적으로 기운 철학자에겐 존재론적 부담이 크다는 일반적 경향이 철학사를 통틀어 관찰된다


** 나는 언어철학에서 내포 문재와 관련하여 비슷한 스탠스를 취한 인물로 R. 몬테규를 생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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