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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규약, 분석성, 전체론’, ‘“규약에-의한-진리”: Quine의 반론)

 

3. “규약에-의한-진리”: Quine의 반론

 

규약이 진리를 만든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Quine의 첫 번째 요지는, 정의(이는 규약에-의한-진리에 가장 자연스럽게 부합하는 사례일 것이다)가 진리를 창조create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난데없이 그럴 수는 없다. 차라리 정의가 하는 일이란 명시적으로 논리적 참인 형태의 진리를 그렇지 않은 형태로 변환하는transform 것이다(WP[역설의 방식들The Ways of Paradox] 87-8[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 논리적 참에 대한 앞선 정의에 따르면 모든 암말은 암컷이다는 논리적 참이 아니다. (“암말로 대체하면 거짓인 문장이 되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한 생각을 더 자연스럽게 말해보자면, “모든 암말은 암컷이다모든 암컷 말은 암컷이다와 정의상by definition 동일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둘은 동일한 즉 동일하게 참인 명제를 표현한다. 뭔가 혼동하지 않는 이상은 모든 암말은 암컷이다가 그 자체로 정의상 논리적 참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Quine이 지적하는 점은 이게 아니다. 그의 타겟은 어떤 진술들의 참(특히 모든 논리적 참)이 전적으로 규약의 문제로서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모든 암말은 암컷이다가 참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규약에 호소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암컷 말은 암컷이다가 논리적 참이라는 사실에도 호소해야 하기 때문에, 논리적 참 자체가 규약에 의해 설명되지 않는 이상 전자의 참됨이 전적으로 규약에 의해서만 설명된다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의가 진리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은 기껏해야 규약으로서의 참에 대한 조건적인 설명만을 제공할 뿐이다: 즉 논리적 참에 대한 설명이 주어질 경우에라야, 몇몇 진리들의 참됨은 논리적 참에 대해 주어진 그 설명과 더불어서만 규약에 의해 비로소 설명된다. 하지만 정의는 논리적 진리 자체를 설명해낼 수 없다. 정의는 -논리적 참을 논리적 참으로 변환해줄 것이며, 논리적 표현들이 다른 논리적 표현들에 의해 정의되는 경우라면, 일부 논리적 참 역시 정의에 의해 다른 논리적 참으로 변환된다. 하지만 모든 논리적 표현이 정의될 수는 없기 때문에(가장 마지막에 남는 논리적 표현을 정의할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는 논리적 진리의 참됨이 여전히 설명되지 않은 채 남아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Carnap이 실질적으로 제안하는 전략은, 한 언어의 일부 문장들을 이것들을 참이라고 결정하자!” 하는 식으로 그저 참이라 명시한 뒤, 그 문장들로부터 여타 문장들을 도출하는 규칙을 정하는 것이다. 논리적 참을 포함하여 그러한 모든 문장들은 약정에 의해 참인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Quine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두 가지 반론을 제시한다. 우선 첫 번째 반론은 상대적으로 덜 심각한 종류의 것이다. 이론가들이 어떤 이론에 대해 특정 일부 문장들을 결정에-의한-진리truth-by-decree로 명시할 권한을 갖고 있다면, 물리학이나 생물학 등 무엇이 되었든 여타 분야의 이론가들에게는 그러한 권한이 왜 없겠는가? Einstein의 상대성이론이 앞으로는 규약에 의해 참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물리학자들이 결정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분명 그런 과학자들은 그런 규약들을 때때로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그리 결정적인 사안은 아니다. 분명 과학에서 사용되는 이론은 변화하는 이론적 압력에 맞춰 시간에 따라 변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이러한 제안을 여전히 수상쩍게 여길 것이다. 과학의 인식론적 토대 전체를 뒤엎는 것은 그리 녹록하지 않은 막중한 작업인 것이다.

Carnap은 수상쩍게 여겨진다는 점이 논증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고 응수할 것이다. 분명 일부 이론가들은 물리학 법칙들 내에 규약적 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 주제는 경험주의의 두 독단에 대한 에서 더 상세히 논의하고자 한다.

이제 좀 더 실질적이면서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Quine의 두 번째 반론(WP 103-5)을 살펴보자. Carnap이 이해한 대로의 규약은 진술되어야stated 한다. 이를 명료하게 보이기 위해 Quine은 다음 예를 제시한다:

 

(1) 모든 x, y, z에 대해, ‘p이면 q이다에서 ‘p’‘q’를 각각 xy로 대체한 결과가 z이고, xz가 참이면, y는 참이다.1)


1) WP 103. 논의에 맞는 스타일로 약간 변형함.

 

이 진술이 말하는 바는, 참인 전건을 갖는 참인 조건진술이 있을 경우 그 조건문의 후건도 참이 된다는 것이다. (가령 ‘Mary가 키가 크면 John은 키가 크다‘Mary는 키가 크다가 둘 다 참이라 가정하면, ‘John은 키가 크다역시 참이다.) 이제 x, y, z(1)에서 말해진 대로 처리되었다고 가정하면 다음을 얻는다:

 

(2) ‘p이면 q이다에서 ‘p’‘q’를 각각 xy로 대체한 결과가 z이고, xz는 참이다.

 

이로부터 다음을 추론할 수 있다

 

(3 y는 참이다.

 

하지만 이는 이면 이다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1)(2)가 주어질 경우 우리가 (3)을 추론할 수 있는 이유는, (1)에서 괄호 밖에 나타나는 이면 이다를 우리가 이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해 자체는 (1)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1)은 그 단어에 대한 이해를 선제하고 있는바, 우리가 이면 이다를 이미 이해하고 있지 않은 이상 (1)의 의미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말해 규약에 대한 진술은 논리적 참이나 논리적 관계를 결정할 수 없다. 논리적 참이나 논리적 관계를 규약 진술로부터 도출할 수 있게 해주는 요인부터가 바로 논리적 관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Quine이 말하듯이:

 

한 마디로 말해 난점은, 논리가 규약으로부터 매개적으로mediately 진행되어야 한다면, 규약으로부터 논리를 추론하는 데에도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혹은 다르게 말하자면, 이 이설이 스스로를-선제self-presupposition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난점은, [논리적] 원초용어들을 자체적으로-선제하고 있다는 데에서 초래되는 것으로 기술될 수 있다. 이면-어구if-idiom, 가 아니다-어구, 모든-어구 등이 최초에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 상정된 뒤 그 어구들의 의미를 획정하는circumscribing 방식으로 우리가 규약을 채택한다고 상정된다. 문제는 그것들 자체그 규약들 자체에 대한 의사소통이, 우리가 그 의미를 획정코자 하는 바로 그 어구들을 무리 없이 사용하는 데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어구들에 이미 친숙해 있는 경우에만 성공적일 수 있다는 점이다.2)

(WP 104.)

2) Hillary Putnam, Paul Benacerraf, 수학철학(1983, 2nd ed.), 박세희 , 아카넷, 2002, 539쪽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있다:

 

한 마디 말로, 난점은, 만약에 논리가 규약들로부터 중간단계를 거쳐(mediately) 진행되어야 한다면, 논리는 규약들로부터 추론하는 논리가 필요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와 같이 학설의 자기-전제(self-presupposition)로서 나타나는 난점은 근원어들의 자기-전제로 바꾸어서 나타낼 수 있겠다. if-어법, not-어법, every-어법 등은 시초에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은 것으로 가정되었으며, 우리는 규약들을 그 어법들의 의미를 한정하는 방식으로 채택한다; 난점은 규약들 자신의 전달이, 우리가 제한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바로 그 어법들의 자유로운 사용에 의존하고, 또 우리가 그 어법들에 이미 정통하고 있을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두어야 할 사안이 있다. 학생들에게 그들이 모르는 새로운 언어를 가르칠 경우라면, 그 언어의 논리적 표현들에 대한 설명은 당연히 언어의 논리표현들에 대한 이해를 선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 논리에 대한 지식을 구성하는가? 하는 인식론적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경우라면(혹은 무언가를 논리적 참으로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설명코자 한다면), 그러한 인식론적 설명은 그 설명에서 이미 사용되는 언어 그대로 표현된 논리를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에도 적용될 수 있게끔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Quine의 요지는 규약에만 의존할 경우 순환성 없이 이 일을 처리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Gary Kemp, Quine‘s Philosophy: An Introduction, Bloomsbury Academic, 2023, 19-21.

 

 


cf. 콰인은 논리적 진리에 대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대답 역시 받아들이지 않는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논리적 진리란 정의에 의한 진리요, 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라고 본다. 이런 입장을 규약론(conventionalism)이라 한다. 논리적 진리의 체계란 하나의 형식체계(formal system), 즉 정의 없이 주어지는 기본술어(primitive terms)로부터 정의를 통해 다른 단어들을 얻어내고, 또 증명 없이 받아들이는 공리들(axioms)과 추리규칙들로부터 다른 진리들을 연역해 내는 체계로 정식화될 수 있다. 규약론자들은 여기서 정의와 공리들을 일종의 언어젹 규약(linguistic convention)으로 이해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中略)

 

콰인은 먼저 논리학이 규약에 의한 진리라고 한다면 상당히 많은 경험 과학의 이론적 명제들도 마찬가지로 규약에 의한 진리라고 말해야 할 것이라 주장한다. 논리학의 공리체계에 대해서만 규약적 진리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가 어디 있는가? 예를 들어 이론물리학의 공리계도 기본 술어와 공리에서 시작하는데, 그렇다면 잘 공리화된 이론물리학도 마찬가지로 규약적 진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결코 규약적 진리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 않을 많은 진리들이 규약적 진리의 범위에 들어오게 된다.

더 나아가 콰인은 규약에 의한 진리라는 개념이 논리적 진리의 성격을 드러내 주기보다는, 거꾸로 논리적 진리들을 전제로 하고서만 규약의 체계라는 것이 이해될 수 있다고 논증한다. ‘총각=미혼의 성인 남자라는 언어적 규약이 있다고 하자. 이 규약과 모든 미혼자는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다라는 명제로부터 모든 총각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명제를 도출할 수 있다. 어떻게 두 규약으로부터 이런 제3의 문장을 도출할 수 있는가? 그것은 대충 말해서 ‘AB이고 BC이면 AC이다라는 논리적 원칙에 의거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공리와 정의가 규약들이라고 해도, 거기서 정리들이 연역되려면 다시 논리적 진리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논리란 규약보다 깊은 차원의 것이다(Logic goes deeper than any convention)”. 이렇게 해서 콰인은 개념적-분석적 진리들을 종합적 진리와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구별하려는 생각뿐 아니라, 논리적 진리가 다른 경험적 진리와 달리 규약에 의해 참이 되는 진리라고 보는 견해들을 모두 근거 없는 것이라고 물리친다.

 


민찬홍, 윌라드 반 콰인: 현대철학의 흐름, 박정호 外 編, 동녘, 1996, 4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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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Kant에 대한 반응’, 3, ‘분석적 진리’)

 

3. 분석적 진리

 

Kant의 최초 착상은 이렇다: ‘분석적진리가 어떻게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지를 이해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이미 지닌 개념들을 분석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때의 분석이 정확히 무엇인가에 대해 Kant가 지녔던 생각, 즉 분석이란 어떤 개념을 그 부분들로 나누는 과정일 뿐이라는 생각은 과도하게 단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Frege는 좀 더 중립적인 태도로 오로지 논리와 정의(定義)definition에만 의존하는 증명proof에 관해 말하는바, 여기서 Frege가 말하는 정의Kant분석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을 포착하고자 하는 동시에 그보다 덜 제한적인 것이었다. 확실히 Frege는 개념에 대한 모든 올바른 정의가 그 개념을 구성하는 부분들을 명시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1)


1) 관계의 선조성(先祖性)’‘ancestral’ of a relation에 대한 Frege의 정의는 확실히 이런 식으로 기술될 수 없다. R을 임의의 관계라 해보자. 그러면 (고유적인improper) '선조성' R*은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R*(a,b) ↔ ∀F((Fa∧∀xy((FxR(x,y)) Fy)) Fb)

 

(中略)

 

하지만 여기서 나는 Frege의 정의와 관련하여 조금 다른 지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Frege식 정의개념은 분석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그가 칭한바 논리 역시 분석적인 것들의 항목에 포함시킨다. 그의 설명이 주목시키고자 하는 바는 일상적으로 이해된 정의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진리도 보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표준적인 사례를 들어보자면, ‘총각의 정의는 그 단어가 미혼 남성과 동의어임을 말해준다. 이 정의를 적용하면 다음문장

 

모든 총각은 미혼이다.

 

 

모든 미혼남성은 미혼이다.

 

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후자의 참을 보장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가장 자연스런 답변은, 또 다른 추가적인 정의라든가 의미에 대한 추가적인 분석이 아니라, 그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인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Frege가 보기에 논리적 진리는 자동적으로 분석적인 것으로 간주되지만, 이는 우리가 애초에 시작한 지점인 Kant의 단순한 착상에 균열을 낸다. Kant의 말대로 우리가 이미 지닌 개념을 분석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사실(그것이 정말 사실이긴 하다면)만으로는, 우리의 선험적 지식이 전부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Frege식 정의개념을 따를 경우, 우리가 논리적 참을 어떻게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지 역시 설명되어야 한다. Frege 자신은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이에 나는 분석성을 설명하기 위한 좀 더 야심적인 시도로서, 앞서 언급된 한계점들(가령 분석을 명시적 정의explicit definition에만 한정하는 것)을 극복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논리학 자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 역시 설명해내고자 하는 관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바로 다음과 같다: 분석적 진리란, 단순히 그것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단어들의 의미에 의해 참인 것으로 결정되는 진리이며, 이는 논리적 참을 포함하여 모든 분석적 진리에 적용된다. 이러한 관점의 사례로서 A. J. Ayer언어, 진리, 논리Language, Truth and Logic4에서 제시한 설명을 살펴볼 것이다. 영어권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이미 익숙할 것이기 때문이다.

 

Ayer는 논리학과 수학의 진리가 분석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친숙한 정의를 제시한다: “한 명제proposition의 타당성validity이 그 명제에 포함된 기호들의 정의에만 의존할 경우, 그 명제는 분석적이다.”(78)2) 그런데 이 뒤에 이어지는 논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정의라 생각하는 바에 거의 호소하지 않는다. 사실상 그는 정의에 대해 말하지 않고 그가 다양하게 칭하는바 언어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77), ‘단어의 기능’(79), ‘우리의 단어사용을 지배하는 규약(規約)convention’(79), ‘단어를 특정 방식으로 사용하겠다는 우리의 결정’(84) 등에 관해 말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경우 그가 사용하는 용어들이며 이는 특히 논리학의 법칙들에 대해 논의할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2) Ayer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명제는 문장에 의해 표현된다. 문장은 기호들을 포함하고 있는 반면 명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본문의 정식화는 이 구분을 무시한 다소 부주의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리 깊이 천착할 사안은 아니다.

 

(中略)

 

Ayer의 핵심 주장은, 이런저런 명제들이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음이 언어적 규약linguistic convention들 그 자체만으로도 보증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유일하게 제시해볼 수 있는 명백한 답변은, ‘언어적 규약이란 여차여차한 것이 참이 된다는 규약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규약들 중 일부, 가령 논리적으로 올바른 추론규칙rule of inference에 상응하는 규약들은 다음과 같은 조건문 형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여차여차한 명제가 (규약에 의해서든 혹은 여타 수단에 의해서든) 참이라면, 여차여차한 다른 명제들 역시 참이 된다. 하지만 어떤 명제가 그저 규약 자체에 의해서 참이 된다면, 적어도 일부 규약들은 직접적으로outright 참을 약정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다.3) 다소 인신공격처럼 느껴지겠지만 어쨌든 내가 논평하고자 하는 것은, Ayer 자신은 추론규칙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초점은 분석적인 명제였기 때문이며, 그는 분석명제가 단순히 우리의 언어적 규약에 의해 참이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도 그는 연역이 분석성에 관한 논의와 무관하다는 점을 논리학을 염두에 둔 맥락에서 명시적으로 표명한다.

 

모든 논리적 명제는 그 자체로 타당하다. 논리적 명제의 타당성은 그 명제가 어떤 체계에 포섭된다거나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특정 명제로부터 연역된다는 데에 의존하지 않는다. 논리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분석명제를 발견하거나 어떤 명제에 분석성을 인가하는 데에 유용한 수단이긴 하지만, 그러한 목적에 대해서마저 그 자체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분석명제에 대해 오로지 그 형식에 의해서만 분석성 여부가 판별될 수 있는 표기체계를 생각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81)4)

 

그렇다면 Ayer의 최종 결론은, 단순히 언어적 규약이 명제의 참을 즉각적으로 약정하며 그렇게 약정된 것들이 바로 분석명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명제들 그리고 오직 그런 명제들만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다.


3) 자연연역natural deduction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물론 Ayer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할 당시에는 자연연역법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대를 제기할 것이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참이라 규정되는 것이 일절 없을 경우에는 그 반대가 충분하겠으나, 우리는 본문에 제시된 바와 같은 식의 조건화 원리를 감안해야한다. 그런 식의 규약에 따르면, ‘P’가 참이면 ‘Q’가 참이라는 것이 규약일 경우, ‘P이면 Q이다가 참이라는 것 역시 규약이다. 이는 한 규약을 다른 규약에 적용한다는 착상과 상당히 복잡한 방식으로 연관되어있지만, 이하에서 이런 복잡한 사안은 대체로 도외시될 것이다.

4) 짐작건대 여기서 Ayer, 가령 Wittgenstein論考Tractatus(1921)4.27-4.442 등지에서 발전시킨 바와 같은, 진리함수들에 대한 명료한 표기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사실 Ayer는 전문적인 논리학자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가 염두에 둔 방식으로든 혹은 다른 방식으로든, 1계 양화논리마저 결정가능decidable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어규약이 (심지어 조건적 진리도 포함하여) 진리를 그저 약정할 뿐이라면, 이러한 약정은 의미meaning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에 제시될 수밖에 없는 대답은, 우리가 특정 문장을 참이라고 약정함으로써 그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들에 즉각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 단어들은 그것이 나타나는 문장의 참됨을 보증하는 의미를 지니게끔 약정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적 규칙들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의미를 명시하되, 이를 다소 우회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셈이다. 무엇이 참인지가 언어규칙에 의해 먼저 명시되고 나면, 그로부터 우리는 단어들의 의미와 관련된 사안을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석적 참은 약정된 참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전통적 의미에서 분석적이라고, 의미에 의해 참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문장을 참이게 하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 자체가 약정되기 때문이다. 의미가 그 자체만으로 참을 보증하는 방식에 대해 이와 다른 설명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이설은 궁극적으로는 소기의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러한 관점이 개념분석에 적절한지 여부를 문제 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우리의 논리적 지식과 관련하여 무엇을 함축하는지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논리규칙들이 단순히 우리에 의해 약정되며 약정되는 것은 곧바로 참이어야만 한다고 선제하지만, 사실 이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Prior가 제시한 ‘tonk’ 연결사이다(Prior, 1960[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추론티켓The Runabout Inference-Ticket]). Prior가 관련 논문을 저술할 당시에는 자연연역법이 유행하던 시절이었기에, 그 역시 여기서의 논의와 유사한 방향에서 이 사례를 제시하였다. 새로운 문장연결사로서 ‘tonk’가 도입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이 연결사의 문법은 논리학의 그리고또는과 동일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tonk’의 의미는 자연연역의 두 가지 규칙을 만족하는 것으로 약정되는바, 다음과 같이 그 첫 번째는 도입규칙이고 두 번째는 제거규칙이다: 임의의 명제 PQ에 대해 다음 논증들은 올바르다:

 

P

P tonk Q

P tonk Q

Q

 

물론 위 예를 Ayer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바꿔 쓰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건문이 언제나 참이 된다고 약정할 수도 있다:

 

P이면, P tonk Q이다.

P tonk Q이면, Q이다.

 

명백히 이러한 약정은 성공할 수가 없다. 올바른 추론에 대해, 혹은 이면 이다의 의미에 대해 우리가 가진 기존의 약정들을 계속 유지한다고 가정하면, PQ가 어떤 명제든지 간에 다음과 같은 논증을 늘상 올바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P

Q

 

혹은 다음 조건문을 항상 옳은 것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P이면 Q이다.

 

동일한 가정 하에서, 우리 언어에 이러한 ‘tonk’ 연결사가 부가될 경우 그 언어가 일관적(가령 Post가 말한 의미에서의 비일관성으로서, 모든 문장은 어떤 것이든 증명 가능하다는 것)이게 됨을 쉽게 보일 수 있다. 이로부터 이끌어내야 할 교훈은, ‘tonk’가 이런 사례들을 올바른 것으로 만들어주는 의미를 갖는다고 약정하는 것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문장연결사도 그런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친숙한 사례로서 Grelling의 역설을 들 수 있다. 내가 당신에게 타술적(他述的)heterological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약정한다 해보자: (i) 이 단어는 형용사로서 통상적인 형용사와 동일한 문법을 지니며, (ii) 이 단어는 모든 형용사 x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타술적이다x에 대해 참이다 ↔ ¬(xx에 대해 참이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의 통상적인 의미를 가정한다면 내가 시도한 약정은 모순으로 이끈다. ‘타술적이다는 스스로에 대해 참이 아닐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스스로에 대해 참이 되며, 이에 우리는 또다시 위의 약정이 틀렸다고 추론해야 한다. 모순문은 참일 수 없으며, 따라서 그 어떤 단어도 모순을 참이게 만드는 식의 의미를 지닐 수는 없다. 약정될 수 있는 것에는 모종의 제한이 존재하는바, 논리 자체가 그러한 제약을 가하기 때문이다.

물론 논리 자체가 단순히 약정되는 것이라면, 논리가 약정에 대해 어떻게 그런 식의 재가권을 가질 수 있는지는 불분명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여기서 우리가 본격적으로 씨름해야 할 사안은 아니다. 의미에 관한 임의의 약정들 집합에서 특정 일부를 다른 것들에 비해 어떤 식으로든 더 권위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에 회의적이라고 해도, 그러한 임의의 약정들 집합이 모두 일거에 만족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Ayer가 옹호하는 형태의 규약주의conventionalism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치명적인 타격을 입는다. 규약주의의 기본 착상은 선험적 지식이 의미에 대한 지식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의미는 우리에 의해 약정되는 것인바, 우리 스스로가 약정해놓은 바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놀라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인정해야 하는 바는, 우리 스스로가 약정해놓은 것을 아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 외에도 여전히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결정한 약정이 정말로 성공적인지 여부, 약정들이 진정한 의미를 도입하는 데에 (규약주의 이론 측면에서) 성공했는지 여부 등을 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규약주의는 이러한 사안들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일절 제시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말해온 바는 그러한 사안들을 아는 데에 논리학이 어떻게든 개입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던바, 이는 다음과 같은 나의 두 번째 반론으로 이끈다: 규약주의는 우리의 논리적 지식을 어떤 식으로든 만족스럽게 설명해낼 수 없다.

기본적인 요지는 무적 단순하다. 논증 목적상, 참이라고 약정되는 것의 참됨을 우리가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을 일단 받아들여보자. 그 경우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약정되는 바의 논리적 귀결(歸結)logical consequence 역시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약정의 논리적 귀결 그 자체는 약정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알려지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런 설명도 제시되지 않은 셈이다.

이러한 요지는 정통적인 명제논리에서 골라낸 극도로 단순한 사례를 통해 예시될 수 있다. 이를 선택한 이유는 약정 것을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데에 아무런 불합리함도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리-함수들의 의미는 그것들에 대한 진리표에 의해 주어진다. 이제 진리표를 통한 계산의 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가령 ‘P∨∼P’라는 에는 항상 값이 할당됨을 보여주는 단순한 계산이다. 이를 도표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P

P

P

T

F

T

F

T

T

F

T

T

F

이 진리표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요소들로만 축소된) 추론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i)

‘P’는 참이거나 거짓이다.

(ii)

‘P’가 참이라면 ‘P∨¬P’는 참이다.

(iii)

‘P’가 거짓이라면 P’는 참이다.

(iv)

P’가 참이라면 ‘P∨¬P’는 참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다:

 

(v)

P’가 참이라면 ‘P∨¬P’는 참이다.

 

(i)-(iv)까지의 전제들은 논증의 목적상 직접적으로 약정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i)은 문장문자sentence-letter의 용법에 대한 규약, 즉 문장문자들은 참 혹은 거짓이라는 확정적인 진리치를 갖는 문장들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규약에 의해 주어진다. (ii)(iv)기호를 정의하는 선언문 진리표에 의해 주어진다. (iii)기호를 정의하는 부정문 진리표에 의해 주어진다.) 하지만 결론 (v) 그 자체는 직접적으로 약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그것은 최초 약정의 귀결이이라고 주장된다argued. 전제들의 참됨을 선험적으로 안다고 가정했으므로, 이 논증을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든 결론의 참됨 역시 선험적으로 안다고 추측할 것이다. 하지만 전제들은 직접적으로 약정된 반면 결론은 그렇지 아니하다. 이보다 훨씬 복잡한 논리식의 사례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그 경우에도 우리는 최초의 규약을 명백히 이해하지만 그 규약들이 여차여차한 특정 식에 야기할 효과는 전연 알지 못할 것이며, 후자를 파악하게 되면 그럼으로써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의 시작점이 선험적 지식이었다면 그 새로운 지식 역시 명백히 선험적인 것이다.

혹자는 존재론적견지에서 말하길, 전제들의 참은 그 자체만으로도 결론의 참을 결정하거나 보장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응수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나의 요점은 그런 의미에서 존재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인식론적인 것이다: 결론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제공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바는, 그러한 요인에는 전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뿐만 아니라 결론이 그것들로부터 따라 나온다follow from는 사실을 이해하는see우리의 능력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나는 전제에 대한 지식이 직접적 약정에 대한 지식으로 설명된다는 점을 논증의 목적상 받아들였다. 하지만 전제들로부터 무엇이 따라 나오는지를 이해하는능력 자체는 약정에 관한 지식이 아니다. 결론은 단순히 따라 나올 뿐인바 우리는 이를 이해할 수 있지만, 이는 따라 나오기로 약정된 것이 아니다.

이러난 논지에 대한 논증이 요구된다면 이는 다음과 같이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제시될 수 있다. 기본 착상은 최초 약정이 의미를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의미가 파악될 수 있다면(그리고 이 경우 의미는 분명 파악될 수 있어야 한다), 최초 약정들의 수는 유한할 것이며 사실상 상대적으로 무척 적을 것이다. 하지만 상기한 바와 같은 단순한 경우에마저 그 약정들은 무한하게 많은 귀결들을 갖는다. 따라서 그 모든 귀결들 자체가 약정일 수는 없다. 이러한 반론은 Quine의 유명한 글 규약에 의한 진리Truth by Convention(1936)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제시되었지만, 거기 제시된 논증은 일반화로부터 그 사례를 얻는 문제에 더 집중한다. 왜냐하면, 최초 약정들이 무한하게 많은 귀결을 가질 경우, 그 약정들은 일반문장 형식으로 주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나의 예시를 활용하자면) ‘임의의 명제 “P”“Q”에 대해, “P”가 참이면 “PQ”는 참이다와 같은 식으로 주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 경우 우리의 추론은, 임의의 명제 ‘P’에 대해 그 부정인 또 다른 명제 P’가 존재함을 그 약정으로부터 추론하는 식으로 진행될 것이며, ‘P’가 참이면 ‘P∨¬P’는 참이라는 것이 그 경우에도 성립할 것이다. 이것 역시 최초의 일반 규칙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특정 사례에 적용하는 하나의 추론이다.5) 나의 논의와 달리 Quine의 글은, 이러한 추론이 일반적인 약정으로부터 특정 사례들로 진행하는 추론일 뿐만 아니라, 다수의 특정 사례들에서 시작해 그로부터 연역되는 추가적인 결론으로 진행하는 추론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하지는 않는다. 두 가지 모두 우리가 고려해 보아야 할 적절한 사항들이다.6) 어쨌든 전반적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의미-부여적인 약정meaning-giving stipulation들로부터 어떻게든 단어의 의미를 배우고자 한다면, 그러한 규약들의 수는 유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규약들로부터 귀결되는 바는 잠재적으로 무한하며, 명백히 우리는 실제로 무엇이 하나의 귀결인지를 종종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이해란 전통적으로 선험적인 것이라 간주되었다. 하지만 그 경우 따라 나오는 바는 선험적 지식이 의미-부여적인 규약들(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5) 이 경우에도 하나의 추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최초 규칙을 메타언어적 정식으로 바꿔 시작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본문의 규칙을 메타언어적으로 바꿔보면 임의의 식 φψ에 대해, φ가 참으로 해석되면 φ∨ψ는 참으로 해석된다이다. 다음으로 ‘P’가 식이며 따라서 P’도 식이라는 추가전제가 필요하다. 이 모든 전제들을 합침으로써, ‘P’가 참으로 해석되면 ‘P∨¬P’는 참으로 해석된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6) Quine규약에 의한 진리에서 제시된 또 다른 요점은, ‘이면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간주되는 규칙을 진술할 때마저 이면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P’가 참이고 ‘Q’가 거짓이면, ‘P이면 Q이다는 거짓이다.) 따라서 이면의 의미를 말해준다고 가정된 약정을 이해할 수 있기 전에, 그 단어의 의미를 이미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 역시 규약주의 이론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긴 하지만, 이 반론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는 독창적인 방식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겠다. (그러한 시도는 Boghossian, 1996 2000에서 제시된 바 있다.)

 


David Bostock, Philosophy of Mathematics, Wiley-Blackwell, 2009, 7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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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논리학과 수학: 논리주의적 환원)

 

Russell의 논리학 체계

 

다음으로 이러한 산술체계를 환원시키는 토대가 되었던 Russell의 논리학 체계를 살펴보자. 여기서 P∨∼P, x(FxFa), xy(x=y(FxFy)) 등과 같은 논리적 참을 증명하는 데 사용되는 통상적인 논리적 원리들은 상세히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Russell의 체계가 산술을 환원하는 과업에는 충분할 정도의 논리적 장치들을 지니고 있다 가정할 것이다. 하지만 Russell의 논리학이 지닌바 그의 환원작업에서 두드러지는 몇 가지 특징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집합의 원소관계(y가 집합이고 xy의 원소일 때 귀속되는 관계)를 나타내는 새로운 원초기호primitive symbol 이다. 또 다른 특징은 이 원초기호를 지배하는 공리들 및, 충분한 수의 논리적 대상들을 보장하는 공리이다.

우선 첫 번째로 집합의 원소관계를 나타내는 기호를 지배하는 새로운 공리집합은, 포괄공리도식the axiom scheme of comprehension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L1의 사례들로 이루어져있다.

 

L1. yx (Fx xy)

여기서 변항 ‘y’는 집합들을 아우르며range over, Fx는 변항 ‘x’가 자유롭게 나타나는 (그리고 이외에는 자유롭게 나타나는 여타 변항을 포함하지 않는) 임의의 formula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 Fx의 역할을 수행할 각기 다른 식들을 대입함에 따라 이 도식의 각기 다른 사례들이 얻어진다. 그 사례들 각각은 해당 식을 만족하는 (즉 해당 식에 의해 표현되는 속성property을 지닌) 대상들 그리고 오직 그러한 대상들만으로 이뤄진 집합의 존재를 주장한다.

 

이 공리도식 배후의 기본 착상은, 이 언어에서 하나의 자유변항이 나타나는 모든 개방식open formula에 대해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이 언어에서 대상들이 갖는 하나의 속성을 표현하는 모든 식에 대해), 그 식을 만족하는 (그 식에 의해 표현되는 속성을 지닌) 대상들만으로 이뤄진 집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를 논리적 원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상, 개체 x가 여차여차하다는 말과 x가 여차여차한 대상들 집합에 속한다는 말이 상호대체가능함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L1의 사례들에 의해 주장되는 집합들의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i) Fx를 대체하는 식이 <29인 자연수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임의의 식일 경우, 29보다 작은 자연수 집합의 존재가 주장된다.

 

(ii) Fx를 대체하는 식이 xNx=x일 경우, 모든 자연수들 집합의 존재가 주장된다.

 

(iii) Fx를 대체하는 식이 xx일 경우, 집합empty set 즉 아무런 원소도 갖지 않는 집합의 존재가 주장된다.1)

 

(iv) Fx를 대체하는 식이 z (zx zz)2)일 경우, 공집합만을 유일한 원소로 갖는 집합의 존재가 주장된다. (여기서 ‘x’는 집합들을 아우른다.)

 

포괄공리도식에 따르면 모든 식 Φ(x)에 대해 그것을 만족하는 사물들 그리고 오직 그 사물들로 이뤄진 집합이 존재한다.


1) (譯註이에 해당 개방식을 포괄공리도식 L1에 대입하여 공집합 공리를 온전히 표현해보자면 yx (x↔ xy)이다.

2) (譯註) z는 보편양화사에 의해 속박되어있는바 ‘x’ 이외의 자유변항이 아님에 주의.


집합의 원소관계를 나타내는 Russell의 원초기호 을 지배하는 또 다른 공리는 외연성 공리the axiom of extensionality로 알려진 다음의 L2이다.

 

L2. ab [x (xa xb) a=b]

ab가 동일한 원소를 갖는 집합들이라면 a=b이다. 즉 그 어떤 두 집합도 동일한 원소를 공유하지 않는다. (‘a’‘b’는 집합들을 아우르는 변항이다.)3)

 

3) (譯註) 공집합 공리와 외연성 공리에 의하면 공집합은 유일하게 결정된다(즉 모든 공집합은 동일하다, 공집합은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우선 譯註1)의 공집합 공리를 다음과 같이 수정하여 서로 다른 공집합이 두 개 있다고 가정해보자.

 

y1y2x((xx xy1) (xx xy2) y1y2)

 

각 변항 ‘y1, y2, x’에 개체상항 ‘ya, yb, t’를 대입하여 예화하면 다음 연언문이 얻어진다.

 

(tt tya) (tt tyb) yayb

 

다음으로 본문의 외연성 공리에서 변항 ‘a, b, x’를 가찬가지 개체상항들로 대체하면 다음 조건문이 얻어진다.

 

(tya ↔ tyb) ya=yb

 

이 조건문의 전건은 앞선 연언문으로부터 명제논리 규칙에 따라 도출되며, 전건긍정규칙을 적용하면 후건 ‘ya=yb가 도출된다. 이는 앞선 연언문의 마지막 연언지 ‘yayb와 모순이다. 따라서 귀류법에 의해 서로 다른 공집합이 둘 존재한다는 가정은 거짓이다


Russell의 논리체계에 고유한 마지막 공리 L3은 소위 무한공리the axiom of infinity이다. 이 공리의 목적은, 산술을 논리학으로 환원하는 데에 필요한 논리적 대상의 수가 무한함을 보증하는 것이다. 이 공리가 요구되는 이유와 이 공리가 다음과 같은 기이한 방식으로 진술되는 이유는, 실제 환원작업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L3. ∅∉N

공집합은 자연수 집합의 원소가 아니다.

 

Scott Soames, Philosophical Analysis in the Twentieth Century: The Dawn of Analysis, vol.1, Princeton Univ. Press, 200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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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이전이나 이후의 것을 찾는 이들이 있다 게 무엇이든 우리게 이해될 수 있으려면 종내 언어적일 수밖에 없다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아온 명판도 언어로 쓰였을진대, 우리에게 말 걸 수 없으면서 전능하고 전지하고 편재한 존재자는 최소한 우리가 통상 표상하는 바로서의 신은 아닌 괴물에 불과하다 이를 암묵적으로라도 알았던 칸트는 신이 존재<한다>를 증명한 게 아니라 신이 존재<해야> 도덕과 자유와 인간이성이 의미있음을 증명하였다 무릇 칸트의 언어에서 ‘도덕‘을 일괄적으로 ‘삶‘으로 치환하여 이해해보자 이에 우리가 추론으로 그 존재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신의 존재근거는 도리어 우리 삶을 유의미하게 만든다는 데에 존립한다 (우리의 추론이 증명해주는 바는 신을 거쳐 우리일 뿐인가? 우리 언어가 거치는 신은 우리인가?) 우리는 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언어로 신을 찬양할 수도 있는 반면, 신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밖에는 우리게 말을 걸 수가 없다 이 점에서 인간 언어의 구조는 신의 것보다 풍부하다 이제 스피노자 명제는 언어적으로 전도된다ㅡ우리의 언어 중 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우리의 의미론 내로 한정된다 이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경계선 내외도 전환된다ㅡ세계의 의미가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언어가 세계 안에서만 의미론을 획득한다


나는 이제 시인과 형이상학자의 차이를 알 것 같다
두 외연에서 내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이유 역시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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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점심을 먹으러 공장 대문을 잠그고 나왔는데 최부장님이 울타리 건너 갈대밭서 뭔 풀을 뜯어 씹어잣고 계신다 저기 대체 뭐 뜯어먹고 자시고 할 게 있는가 싶언 차에, 얘기 듣고 내가 바로 알아채니 찔레꽃순이다 정부장님은 그게 찔레꽃이었냐며 자긴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다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게 먼젓번에 자꾸 울타리 넘어오는 잡풀들 쳐낼 제 찔레꽃나무 줄기를 보고는 나도 정부장님도 대강 이름모를 까시나무겠거니 궁시렁차 뭐이리 많냐며 낫질하기에만 바빴어라 둘 다 서로 몰랐던 거다 그래도 나는 찔레꽃순 먹어는 봤다 이르니 정부장님은 시골서 자란 자기도 못먹어본 걸 네는 어찌 먹어봤냐 놀란치다 다 들어엎고 아파트 재개발 들어서 지금은 한참도 전에 없어지닌 천안 백석동 옛날 공동묘지에 할아버지 묫자리였는데, 공교롭게 할아버지 봉분 뒤가 다른 봉분줄이 아니라 풀숲 우거진 곳이어서, 근데 하필 거기에 찔레꽃 줄기가 갈 적마다는 무장 되 우거져서, 성묘 간 날마다 돗자리 깔아 아빠가 술 한잔 뿌리고 나면 시아버지 얼굴은 뵌적도 없어놔 심심하던 차 엄매는 늘상 그 순 따다 이게 찔레꽃이라며 연녹색 줄기껍데기 피르르 까줘 먹어보았다, 그래서 먹어보았다, 얘길 풀었다 이십 년을 건넌 세월에 최부장님한테 받아 까서 먹어본 맛짜기가 첫혀엔 달다가 이내 목젖찌 안쪽이 시고 썼다

2. 딱 십 년 전 그날 학교 끝나고 와보니 아무 없는 안방 불이 켜져 있었다 끄고 나서 씻고 나와보니 또 켜져있길래 또 껐다 그러자 엄매는 할아버지 오셔 앉아 켜놓았다고, 죄 어둔 데만 드러눕다 오셨는데 왜 자꾸 불 끄지를 말라 하였다 그러고 보니 화장대 위는 웬 흰 보따리 쌓인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한창 취해 검은 봄밤 검은 낯으로 비칠비칠 들어온 아빠는 나랑 누나를 불러놓고는 많은 얘길 쑤어렸다 오늘 파낸 늬들 할아버지 묫자리 휑그렁한 구덩 앞에서 혼자 쏘주를 세 병이나 넘겼다고, 소형굴삭기 그 대가리가 한 번 떨구럭져 파낼 적마다 그냥 보고만 있질 못하겠더라고, 한 달 전부터 전화해놨던 영선이놈새끼는 기어코 코빼기도 안보였다고, 옛날 어른들 말씀이 부모 묘지에 괸 물이 많으면 그게 그렇게 세상 큰 불효인데 금일 파내고 난 자리가 어찌나 그렁 흥건하더라고, 늬들은 내일에는 적어도 오늘보단 낫게 살아야 한다고ㅡ다음 날 아버지는 봄날 아침 동트는 빛따라 혼자 그 쌔하야니 골분보따리 품쳐 안은 채 말가니 해떠오른 동쪽엘 달려 영월에 다녀오셨다 열 시간 전이든 열흘 전이든 십년 전이든 그적보다 지금 내가 조금이나마 더 낫게 살고 있는지, 십 년 전도 몰랐을 거고 지난 사월 십팔일도 몰랐을 거고 지금도 모르겠다

3. 점심으로 나온 국이 청국장이었다 정부장님은 너 청국장 먹냐며 안 좋아하지 않냐며 시름해준다 고리짝부터 어머니 끓여준 청국장 잘 먹고 이게 자랐으니 걱정 말라 뒀다 한 숟갈 떠서 먹으며 떠오르기가, 그 옛날 늦봄마직 할아버지 묘지 뒤편에 봤던 찔레꽃이 참 엄마를 닮았다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은 가봤댄들 아파트 단지들만 즐비해진 그 녯날 공동묘지자리, 짐 가면 전에 눴던 할아버지도 없고 엄마 치마폭 닮은 쌔하양 찔레꽃잎도 없고 아빠 마셨던 녹디진 쏘주병 세 병일랑 어디 저 밑땅 축축진 데 다 묻혀놔 간 데가 없을거라ㅡ

4. 인생질 신맛이나 쓴맛은 의당 고사하고 이적지 단맛도 혀대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더니, 엄매는 딱 보길 못난 이새끼는 삼십 줄도 넘어서까리 인생 맛들랑 그적지나 여태 모르고 있을 개싹이구나 싶었는가보다 그래 봄날 햇따라 시아버니 성묘갈 적마다 찔레꽃순 두어줄기씩이나마 따내어 까 자식년놈들 아갈찌에 물려두는 게 일이었는가보다

그적 아직 부드러우시던 손마디골들 죄 까시에 찔려가며 찔레꽃순 따줄 일이었는가보다

- 21.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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