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章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언어철학자들에 의해 주로 논의되어온 다음 다섯 가지 영역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그 과정에서 앞선 章들에서 탐구된 개념 및 이론들이 종종 활용될 것이다): (1) 주장(主張)(단언(斷言), 긍정적 서술)assertion, (2) 맥락-상대성context-relativity, (3) 허구적(虛構的) 실체fictional entity, (4) 추론주의(推論主義)inferentialism, (5) 슬러slur. 다만 이 주제들에 관한 모든 논의들을 철저하게 살펴보기보다는 독자의 흥미를 고취하는 정도로만 개관할 것이다.
주장
Frege는 판단(判斷)judgement을 ‘한 명제를 참이라고 받아들임acceptance of a proposition as true’으로, 그리고 주장(主張)(단언(斷言), 긍정적 서술)assertion을 ‘판단을 언어적으로 표출(表出)함(현시(顯示)함)verbal manifestation of judgement’으로 특징지었다. 그는 주장이라는 표현 대신 말하기to say, 주장하기proclaim, 진술(陳述)하기state, 긍정(肯定)하기affirm, 언명(言明)하기declare, 선언(宣言)하기proclaim, 공표(公表)하기announce, 제언(提言)하기put forward, 공언(公言)하기avow 등등 미묘하게 다른 개념들을 표현하는 여타 용어들을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Frege의 선례를 따라 주장 개념을 핵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7章에서 우리는 Austin을 따라 주장이라는 화행(話行)speech-act이 규약(規約)convention에 지배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바 있다. 지면상의 이유로 주장 화행이 주장하는 사람asserter의 심리psychology 내지 의도(意圖)intention의 측면에서 非-규약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관점은 여기서 차치해두기로 한다. 이러한 견해는 Grice의 영향력 있는 두 논문 「의미Meaning」(1957) 및 「화자 의미와 의도Utterer’s Meaning and Intention」(1969)에 개진된 것으로서, 두 글에서 Grice는 다른 무엇보다도 주장을 화자의 의사소통적 의도communicative intention의 측면에서 정의하고자 시도하였다(이에 대한 맛보기로서 이번 章 말미의 ‘탐구문제’를 참조할 것).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도외시한 채 주장 화행을 최소한 부분적으로 규약적인 종류의 행위로, 즉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관습행위socially constituted practice로 가정할 것이다. 이러한 논점을 Michael Dummett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내비친 바 있다:
언어적 행위linguistic act는 내적 상태interior state의 외적 표현으로 분류될 게 아니라 규약적 행위conventional action로 분류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주장이라는 행위는 한 사람이 해당 문장을 참이라고 판단하는 내적 행위(혹은 믿는다는 내적 상태)를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그 문장을 발화하는 행위로 설명될 게 아니라, 주장적 효력assertoric force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장의 사용을 지배하는 규약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Dummett 1973[『Frege: 언어철학Frege: Philosophy of Language』], 311쪽.)
주장이 규약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이러한 특정 화행을 특징짓는 그 규약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Elizabeth Anscombe과 John Rawls를 따랐던) Searle을 따라 규제적(規制的) 규칙regulative rule과 구성적(構成的) 규칙constitutive rule이라는 구분을 도입하고자 한다. 먼저 규제적 규칙이란, 가령 영국 도로에서 통용되는 ‘좌측통행’ 운행규칙과 같이, 이미 이루어진활동pre-existing activity을 사후적(事後的)으로 규제하는 규칙이다. 영국 도로에서 좌측통행 규칙을 어긴다고 해서 그 행위가 자동차 운행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다만 이는 운전자의 목숨을 그의 것이 아니게 만들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성적 규칙이란 그 규칙의 지배를 받는 해당 활동 내지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 그 규칙 자체가 반드시 필요한 규칙이다. 가령 체스나 풋볼을 정의하는 규칙들은, 단순히 체스말을 再배치하거나 공을 차서 네트에 넣는 방식을 규제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체스에서 말들을 운용하거나 풋볼에서 득점하는 것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규칙이다. 좀 더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체스나 풋볼에서 통용되는 규칙이 없다면 우리가 아는 바로서의 체스나 풋볼 게임 역시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가령 어떤 게임에서 체스말과 체스판이 사용되더라도 우리가 아는 체스 규칙에 따라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는 어쨌든 체스게임이 아니다.] 앞 章에서 살펴본바 삶의 형식들forms of life이 구성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 재산을 소유하는 것, 혼인하는 것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제도(制度)social institution 내지 삶의 형식들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들이 존립할 수 있게 해주는 특정한 구성적 규칙들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규제적/구성적 규칙 구분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 구분을 일단 문제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러한 구분을 도입하는 요지는 주장이라는 언어행위가 구성적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착상을 염두에 둔 채, 이제 Moore의 역설(逆說)Moore’s paradox(이는 Russell과 대략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향력 있는 철학자 George Edward Moore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이라 알려진 역설의 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Gia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냉장고에 치즈가 있지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Gia의 발언은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진다. 단, Gia에 의해 발화된 문장 자체는 (‘p&∼p’ 형식과 같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냉장고에 치즈가 있는데도 Gia가 냉장고에 치즈가 없다고 믿는 것은 명백히 논리적으로 가능한 사태이기 때문이다.1) 여기서 문제는 그녀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를 표상하는(드러내는)represent 방식’에, 즉 ‘냉장고에 치즈가 있다’의 내용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믿는 동시에, 그 내용을 믿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요컨대 위 발화의 부적절성infelicity은 문장의 진리치와 관련되는 의미론적인 층위에 있는 게 아니라, 문장의 발화와 관련되는 화용론적인 층위에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주장의 본성에 속하는 사안이다. 따라서 다음 규칙은 주장에 대한 구성적 규칙으로서, 이를 위반하는 것은 주장을 지배하는 규약을 위반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믿음-규칙Belief-rule) p라고 믿는 경우에만 p라고 주장해야 한다.
1) ‘x는 치즈이다’를 ‘Cx’로, ‘x는 냉장고에 있다’를 ‘Rx’로, ‘s는 p라고 믿는다’를 ‘Bs[p]’로 각각 기호화한 뒤, 본문의 예시문을 술어논리의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지표사 ‘나’와 연관된 구문론적⋅의미론적 문제는 차치한 채 단순히 ‘i’로 기호화하기로 한다):
(∃x)(Cx&Rx)&Bi[∼(∃x)(Cx&Rx)].
첫 번째 연언지 ‘(∃x)(Cx&Rx)’의 부정문은 두 번째 연언지에서 믿음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바, 이 문장은 ‘p&∼p’ 형식의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주의할 사항이 있다. Gia가 냉장고에 치즈가 있다고 믿지 않으면서 단지 ‘냉장고에 치즈가 있다’고만 주장한다면(어쩌면 그녀는 실제로도 냉장고에 치즈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수 있으며, 그 경우 Gia는 거짓말을 한 셈이다) 위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그 경우에도 어쨌든 그녀는 ‘냉장고에 치즈가 있다’는 주장을 한 셈이다. 즉 믿음-규칙은 주장행위가 이뤄질 때마다 자동적으로 적용되지만, 가령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하는 경우처럼, 그러한 규칙 내지 규범(規範)norm이 준수되지 않는 경우가 가능한 것이다. 약속의 경우 약속을 한 당사자는 그것을 이행할 의무(義務)obligation를 반드시 떠안게 된다. 즉 약속한 바를 이행할 의무가 부여된다는 것은 약속 행위에 대해 구성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주장 행위에 대해 구성적이다. 믿음-규칙을 위반하는 주장행위는 신뢰할 수 없는 불성실한 행위이다.
지금까지의 관찰은 우리를 Grice적인 영역으로 이끄는 듯하다. 믿음-규칙을 위반하는 것은 Grice가 제시한 협조원리들 중 질의 준칙을 위반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긴 하다. 그런데 Grice의 준칙들은 규제적인 규칙인 동시에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대강의 규칙rules-of-thumb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 구성적 규칙이 가능할 수 있는지, 말하자면 주장을 정의해 줄 구성적 규칙이 무엇인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Grice의 질의 준칙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른 가능성이 발견될 수 있을 듯하다. 우선 질의 준칙 자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이라 믿는 바를 말하지 말라’, ‘적절한 증거가 결여된 바를 말하지 말라’. 이에 두 항목을 각기 적절히 활용하여 다음과 같은 두 규칙을 정립할 수 있겠다:
(참-규칙Truth-rule) p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라고 주장해야 한다.
(정당화-규칙Justification-rule) p라는 정당화된 믿음을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라고 주장해야 한다.
유의할 사항은, 믿음-규칙과 마찬가지로 위 두 규칙 역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주장하는 데 대한 충분조건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두 규칙은 적절한 주장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만을 명시하고 있다. 다르게 말해 두 규칙은 우리가 무언가를 주장할 때 준수할 것이라 기대되는 제약조건만을 나타낸다.
이제 믿음-규칙과 위의 두 규칙을 모두 결합하면 다음을 얻는다:
(JTB-규칙JTB-rule) p라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 that p을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라고 주장해야 한다.
정당화된-참인-믿음(약칭 JTB)은 전통적으로 지식(知識)knowledge에 대한 정의항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런데 Edmund Gettier는 유명한 논문에서 JTB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지식이 아닌 사례를 제시하였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나는 우리 집 울타리 건너편에 개가 한 마리 있다고 믿는다. 울타리가 워낙 빽빽한 정원수로 뒤덮여 있기에 내가 개를 본 적은 없지만, 늘상 그 방향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하지만 사실 평소 내가 들었던 소리는 실제 개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녹음된 개소리였다. 그런데, 비록 나는 모르고 있지만, 울타리 건너편에서는 개 한 마리가 늘상 조용히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건대, 나는 울타리 건너편에 개가 있다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을 갖고 있긴 하지만, 울타리 건너편에 개가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내가 이러한 기이한 상황에 놓인 것은 순전한 우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을 정당화해 주는 요인(녹음된 개소리)이 내 믿음을 참이게 만들어 주는 요인(조용히 어슬렁거리는 개)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의 믿음은 지식에 대한 JTB 조건을 만족함에도 이는 우연의 일치에 지나기 않기에 지식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JTB 조건은 지식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지식에 대한 소위 Gettier 반례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지식에 대한 정의인 JTB 조건을 약간만 수정하면 Gettier 사례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전개된 현대 인식론의 역사를 보면, 최초 Gettier 사례의 미묘한 변형태들이 수정된 JTB 정의의 반례로서 계속 제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JTB 정의를 만족스럽게 수정하려는 시도는 지난한 일로 판명되었다. 이에 Timothy Williamson은 지식이 이런 식으로 분석될 수 없으며 지식을 원초적(原初的)인primitive(즉 정의불가능한indefinable)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는 주장에 대한 제약사항으로 다음을 제안한다:
(지식-규칙Knowledge-rule) p라는 것을 아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는 구성적 규칙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규칙들과 유사하게, 지식-조건이 만족되지 않는 주장들은 매우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약속할 때 약속 당사자가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미에서, 무언가를 주장할 때 주장하는 사람은 지식-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제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화행은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된다(이 예시는 Moore의 역설을 확장시킨 것이다):
냉장고에 치즈가 있지만, 나는 그것을 모른다.
Williamson의 제안은 많은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을 들자면, 지식-규칙은 주장행위가 지식을 전달하는transmitting 하나의 방식이라는 생각 및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은 주장한 바를 방어하는defending 입장에 개입하게 된다는 생각과 잘 부합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지식-규칙보다 약한 규칙들, 가령 참-규칙 내지 심지어 믿음-규칙 역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서 주장되었다. 그리고 주장 개념을 언어철학 내지 화용론에서 핵심적인 사안으로 간주하는 것부터가 애초에 잘못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현실에서 실제로 수행하는 서술적 화행declarative speech-act들이 언어철학에서 생각되는 것만큼 균일하고 통일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기, 상기(想起)하기, 경고하기, 유발하기, 조언하기, 상담하기, 표현하기, 지도(指導)하기, 기술하기, 보고하기 등의 다양한 화행들이 지닌 차이점들은 매우 미묘하겠지만, 어쨌든 그 각각은 나름의 고유한 규범들 집합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맥락-상대성
독자들은 이제 지표사(指標詞)indexical에 익숙할 것이다. 지표사에 속하는 표현들로는 ‘나’, ‘너’, ‘우리’, ‘그he/him’, ‘그녀’, ‘지금’, ‘그 때’, ‘오늘’, ‘어제’, ‘여기’, ‘저기’, ‘저것’, ‘이것’ 등이 있다. 이러한 단순한 형태의 지표사뿐만 아니라 ‘너희 어머니가 기르시는 고양이’처럼 여러 표현들이 혼합된 형태의 지표적 표현도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맥락-상대적이다context-relative 내지는 맥락에-민감하다context-sensitive고 말해진다. 즉 지표적 표현들은 오로지 특정한 맥락(脈絡)context에서만 지시체를 가지며, 그것들이 사용되는 맥락(이러한 맥락으로는 시간, 장소, 화자 및 청자의 동일성, 實-지시화된demonstrated 대상의 동일성 등이 있다)에 따라 각기 다른 대상을 지시한다.
일찍이 지표사에 관한 章에서 우리는 ‘크다’, ‘부유하다’, ‘가깝다’ 등 단어들을 언급한 바 있지만, 이에 관해 상세히 논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형용사들 역시 맥락에 민감한 것처럼 보인다.2) 예를 들어 누군가 쥐 한마리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보자:
(1) 저거 엄청 크다!
이 경우 이 문장에 의해 할당되는 사이즈의 범위는, 그와 동일한 문장이 하마를 가리키면서 말해질 경우 그 하마에게 할당되는 사이즈의 범위와 분명 다를 것이다. 그 하마가 평균적인 하마에 비해 현저히 작다면 전자는 참이더라도 후자는 거짓일 것이다. 물론 아무리 작은 하마라 하더라도 쥐보다는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하마는 ‘하마치고는’ 작은 셈이다. [즉 전자에서 할당되는 사이즈가 ‘크다’고 말해질 수 있다면 후자에서 할당되는 사이즈 역시 당연히 ‘크다’고 말해질 수 있어야 하겠지만, 이는 ‘크다’가 사용되는 맥락이 무시될 수 있는 경우에만 올바르다.] 이렇듯 크기에 대한 표준(標準)standard 내지 적절한 비교집합comparison calss은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2) (原註) 이외에도 맥락-상대성을 갖는다고 추정되는 표현들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1) 한 용어가 자동사 형태로 나타나지만 암묵적으로 타동사 역할을 하는 경우. 가령 ‘난 준비됐어’라는 문장은, 어떤 행위나 사건을 나타내는 용어 𝜙에 대해 ‘나는 𝜙할 준비가 되었다’라는 문장의 줄임말인 셈이다. [그리고 𝜙가 나타내는 행위/사건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이 문장이 사용되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신나는 파티에 가기 위해 이제 막 외출하기 직전 상황에서 당신이 ‘Berta는 준비 안됐대’라고 말한다. 통상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슨 준비?’ 하는 물음에 무리 없이 답할 수 있겠지만, 당신이 말한 문장 그 자체만으로는 Berta가 무슨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
(2) Putnam은 ‘물[水]’과 같은 자연종(自然種) 용어natural kind term가 암묵적인 지표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논증한다. 자연종 용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그 용어가 사용되는 가능세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서 2차원주의 의미론two-dimensional semantics을 논할 때 살펴보았듯이, 현실세계와는 다른 가능세계non-actual possible world에서 ‘물’이 발화될 경우, 표현되는 개념 내지 의미는 동일하겠지만 그 지시체는 분명 다르다. 예를 들어 현실의 발화맥락context of utterance과는 다른 발화맥락에서 ‘물’로 칭해지는 물질은 H2O가 아니라 XYZ일 수 있다.
(3) 통상적인 고유명ordinary proper name에는 지표성이 결부되어 있거나 혹은 그 자체가 지표적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한 학생이 ‘John Smith’를 발화한다면 이는 누구를 지시하겠는가? 답은 다음과 같다: ‘John Smith’라는 이름을 가진 실존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발화가 지시하는 이는, 그 이름에 대한 화자의 사용과 연결된 인과적 연쇄의 기원에 있는 한 사람이다. 따라서 화자와 연관된 적절한 인과연쇄를 골라내는 매개변수 x를 취하여, ‘John Smithx’와 같은 식으로 표기할 수 있다.
‘부유하다’에 대한 표준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하의 사람을 보고 부유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샌프란시스코 시민의 중위소득은 78,378달러이다. 그런데 중위소득이 590달러인 에티오피아에 사는 사람이 앞의 샌프란시스코 거주민과 동일한 소득을 번다면, 우리는 그 에티오피아 사람이 부유하다고 말할 것이다. ‘가깝다’는 형용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녁을 먹기 위해 괜찮은 식당을 물색하면서 ‘꽤 가깝네’ 하고 말하는 경우와, 여행할 나라를 고르기 위해 지구본을 돌려보면서 ‘꽤 가깝네’ 하고 말하는 경우, 각각에 적용되는 근접성에 대한 표준은 분명 다르다.
이러한 비교급 형용사 및 비교급 전치사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표준 내지 비교집합에 대한 암묵적 상대성implicit relativity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설득력 있는 가설은 ‘크다’와 같은 단어들에는 각기 다른 표준 내지 비교집합을 지시하는 암묵적 지표사가 수반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암묵적 지표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크다x와 같은 식으로 표기할 수 있다(종종 지표사는 특정 규칙에 의해 논의영역이 제한된 자유변항free variables처럼 간주되고는 한다).
맥락-민감성이 부각되는 또 다른 종류의 사례는 양화사가 포함된 문장 및 ‘모든 사람’과 같은 양화사句quantifier-phrase이다(이는 6章 첫 번째 節 말미에서 잠시 언급된 적이 있다). 다음 문장을 보자:
(2)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무례했다.
Sally가 파티장을 빠져나오면서 이 말을 중얼거렸다고 해보다. 이 경우 (2)에 대한 Sally의 발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무례한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인 게 아니라, 그 파티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혹은 그 파티에서 Sally와 대화하면서 무례하게 굴었던 모든 사람)이 무례한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사례에서 발화와 연관된 맥락은 부분적으로 화자의 의도intention에 의해 결정되는 듯하다. 다른 맥락에서 발화된다면 (2)에 대해 의도된 일반화의 범위는 이 이상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모든 사람’은 Sally가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와 대화했던 모든 사람들을 아우를 수도 있다.
비교급 형용사에는 비교집합을 지시하는 암묵적 지표사가 수반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과 유사하게, 양화사에는 대상들의 집합을 지시하는바 사실상 암묵적 지표사인 ‘논의영역 제한자domain restrictor’가 수반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한정 기술구가 사용되는 방식을 Russell의 기술구 이론에 따라 생각해본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선 Russell에 따르면 ‘그 F’는 사실상 양화사이다. ‘그 F는 G하다’는 정확히 하나의 F가 존재하고 모든 F가 G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다. 정확히 하나의 F가 존재할 경우 한정 기술구 ‘그 F’는, Russell의 용어법에 따르면 특정 대상을 지칭denote하며, 우리의 느슨한 용어법에 따르면 특정 대상을 지시한다. 그런데 예를 들어 ‘그 고양이’라는 한정 기술구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양이가 그 논의영역으로 취해진다면 (고양이가 딱 한 마리만 남아있는 슬픈 세계가 아닌 바에야) 지시체는 특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그러한 표현은 분명 지시체를 갖는다. 굳이 고양이가 딱 한 마리만 남은 슬픈 세계가 아니더라도, 이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종종 ‘그 고양이는 침대 위에 있다’는 말을 무리 없이 사용한다. 따라서 그 말은 ‘그 고양이’(그리고 목전에 있는 침대를 가리키는 ‘그 침대’)에 아래 첨자가 부가된 ‘그 고양이x는 침대y 위에 있다’와 같은 식의 발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x와 y에 대한 논의영역 제한자는 가령 화자가 기르는과 이 방에 있는 따위가 될 것이다.
암묵적인 맥락-상대성이 드러나는 또 다른 사례로서 일상에서 친숙한 것을 들 수 있다. 비근한 일이지만 ‘비가 온다’가 에딘버러에서는 참이면서도 아테네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 동일한 한 진술의 진리치가, 발화의 시점이 주어진 경우 발화가 이뤄지는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발화의 장소가 주어진 경우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에딘버러에 있는 사람이 명시적으로 ‘아테네에는 비 와’ 하고 말함으로써 아테네의 날씨에 관해 말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분다’, ‘시끄럽다’, ‘자스민 향기가 난다’, ‘밝다’ 등의 진리치 역시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 및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철학적 개념Ⅰ: 가치(價値)value. 익숙하지만 다소 논쟁거리인 또 다른 사례는 일부 가치진술value statement들이 지닌 암묵적 상대성이다. Joe는 ‘Beatles가 제일 위대한 가수야!’ 하고 말하고 Karen은 ‘Rolling Stones가 제일 위대한 가수야!’ 하고 말한다. 두 사람의 의견 불일치는 진정한 불일치인가? 두 입장은 상호 모순되는가? 물론 두 사람은 이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두 사람은 각자의 진술에 암묵적 지표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서 Joe는 Beatles가 그에게for him 가장 위대한 가수라고 말한 셈이며, Karen은 Rolling Stone가 그녀에게 가장 위대한 가수라고 말한 셈이다. 그 경우 두 사람의 입장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이와 동일한 종류의 트릭은 윤리적 진술, 미학(美學)적aesthetic 진술, 취향(趣向)taste에 관한 진술 등 가치에 관한 그 어떤 진술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가치평가와 얽힌 논쟁에 숨은 이러한 혼동은 Joe와 Karen 사례에서 충분히 해명되었을 것이다. 좀 더 뚜렷한 경우를 들자면, 민트초코가 맛있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과 같이 미각적 취향에 관한 논쟁에서 이러한 혼동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민트초코는 어떤 사람에게는 맛있게 느껴지고 그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오로지 극단적인 객관주의자라든가 음식 스노비즘에 취한 사람만이, 둘 중 어느 취향이 옳은지를 결정해줄 객관적인 사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민트초코를 좋아하고 그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하는 것일 뿐, 그게 전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령 임신중절이 올바른지 여부와 같은 무겁고 심각한 윤리적 사안에 관한 논쟁에서는 의견대립이 이런 식으로 해소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임신중절은 어쨌든 나한테는 나쁜 게 아냐!’ 하고 말한다 해서, 낙태를 공공연히 긍정하는 입장에 가담하지 않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중간지대로서, 외견상 분명해 보이는 논쟁이 진정한 논쟁인지, 혹은 n항 술어를 n+1항 술어로 변환하여 지표사를 삽입시킴으로써 그 논쟁이 진정 축소될 수 있는지 여부는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할 사안이다.[?]
상대화된relativised 형태의 가치진술에서 적절한 관계항이 될 수 있는 것은 개별 화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즉 ‘A는 x에게 가치가 있다’라는 형식의 진술에서 x는 개별 화자뿐만 아니라 특정 인종, 국가, 사회집단의 구성원들과 같은 복수의 사람들로 이뤄진 한 집합일 수도 있다.
철학적 개념Ⅱ: 지식. 당신이 다음 문장을 말한다고 상상해보자:
(3) 나는 그녀가 욕실에 있는 것을 안다.
(당신은 방금 그녀가 욕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 이후로 욕실 문은 줄곧 닫혀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철학 강의 시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4) 나는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두 진술은 동시에 참일 수 있는가? 우선 한편으로, (4)가 참이라면 (3)은 참일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꿈꾸고 있는 게 아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당신의 친구가 욕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경험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녀가 욕실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식에 대한 기준이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도 있다. 가령 회의론을 논하는 철학 강의 시간에서라면 지식에 대한 엄밀한 기준을 가정하는 것이 올바른 반면, (3)과 같은 문장을 말하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그 기준이 다소 완화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위 두 진술은 동시에 참이 될 수 있다.
인식론적 맥락주의epistemic contextualism에 따르면 'S는 p라는 것을 안다' 형식의 주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S가 누구이고 p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뿐만 아니라, 발화의 시점에 어떤 기준이 적용되고 있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식’은 숨겨진 지표사를 지니고 있는바, ‘알다x’와 같이 발화의 맥락에 의해 고정되는 변항을 암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매개변항 ‘x’의 자리는 특정 맥락에 따라 그 맥락에서 우세하거나 의도된 지식의 기준 내지 종류를 기술하는 어구로 채워진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가 욕실에 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simpliciter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욕실에 있다는 것은 알일상적인 목적에서 수는 있으며, 그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는회의론을 논박하려는 목적에서 못한다. 우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일상적인 목적에서, 자신이 꿈으로 꾸고 있지 않음을 알지는회의론을 논박하려는 목적에서 못한다.
이보다 더욱 급진적인 견해로서 인식론적 맥락주의보다는 인식론적 상대주의epistemic relativism로 알려진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나는 바닥이 평평하다는 것을 안다'가 발화될 경우 설사 그 발화맥락과 관계된 모든 사실들이 고정되더라도, 그 발화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갖는 정확히 하나의 진리치 같은 것은 없다. 발화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의 진리치는 진리치를 귀속시키는 [즉 명제의 진리치를 평가(評價)evaluate하는] 사람의 관점(觀點)perspective과 목적purpose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대체로 진리치 평가자는 발화가 이뤄졌던 맥락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시로 든 발화가 동일한 특정 바닥에 관한 것이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표현되는 동일한 명제는 일상적인 목적에 따르자면 참이겠지만 물리학 실험에 요구되는 엄밀한 기준에 따르자면 거짓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론적 상대주의자에 따르면, ‘A는 s라는 것을 안다’에 대해 A와 s와 발화맥락이 결정됨으로써 특정 명제 내지 내용content이 고정되더라도, 그 명제 내지 내용의 진리치는 평가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이 결코 주관주의(主觀主義)subjectivism는 아니다. 주관주의에 따르면 특정 표준들 집합이 선택되더라도 진술의 진리치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틀릴 수 있다(그리고 선택된 표준들이 올바른지 여부는, 항상 그렇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지식-주장을 평가하는 사람이 처한 맥락의 특징에 따라 합리적으로 제약된다).
철학적 개념Ⅲ: 反사실적 조건문. 5장에서 우리는 反사실적 조건문counterfactual conditional을 간략히 살펴본 바 있다. 反사실적 조건문은 진리-함수적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다. p와 q의 진리치는 통상적인 (‘직설법적indicative’) 조건문 ‘p이면 q이다’의 진리치를 결정해준다. 실질적 조건문의 진리표에 따르면 (ⅰ) 일단 전건 p가 참일 경우, 후건 q가 참이면 조건문 ‘p이면 q이다’ 전체는 참이고 q가 거짓이면 조건문 전체는 거짓이며, (ⅱ) 일단 전건 p가 거짓일 경우, 후건 q가 어떤 진리치를 갖든 조건문 전체는 참이다. 따라서 실질적 조건문은 ‘p가 아니거나 q이다[∼p∨q]’와 동치이며, 이는 p가 거짓이거나 q가 참일 경우 참이다. [그래서 실질적 조건문의 진리-조건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전건이 거짓이거나 후건이 참일 경우 조건문 전체는 참이다.]
물론 실질적 조건문을 진리-함수적으로 설명하는 데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p라면 q일 것이다If p were so, then q would be so’ (혹은 ‘p였더라면 q였을 것이다If p had been so, then q would have been so’)와 같은 형식의 反사실적 조건문 내지 가정법적subjunctive 조건문의 경우에는 명백히 진리-함수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反사실적 조건문을 발화하는 경우 우리는 p가 사실이 아님을 (그리고 보통 q 역시 사실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反사실적 조건문이 참인지 여부가 분명하게 결정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다음 문장을 생각해보자:
(5) 만약 Ronald Amundsen이 최초의 남극 탐험가가 아니었다면, Robert Scott이 최초의 남극 탐험가였을 것이다.
실제로 최초의 남극 탐험가는 Scott이 아니라 Amundsen이었지만, 이 사실은 (5)의 진리치를 결정해주지 않는다.
反사실적 조건문에 대한 영향력 있는 설명으로서 David Lewis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문의 진리치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결정된다: 전건이 참이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현실세계actual world와 가장 유사한 가능세계를 생각해보자. 위 사례의 경우 그 가능세계에서 Amundsen은 최초의 남극 탐험가가 아니다. 나머지 모든 가능한 사항들이 현실세계와 정확히 동일한 그 세계에서, 후건은 참인가? 만약 그렇다면 조건문 전체는 참이며 그렇지 않다면 조건문 전체는 거짓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마저 진리치를 결정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은 反사실적 조건문의 사례들이 있다. 다음 두 문장을 보자(이는 Quine이 제시한 것으로서, 이 문장에서 배경으로 깔린 전쟁은 1950-3년까지 일어났던 한국전쟁이다):
(6) 만약 Caesar가 총사령관이었다면, 그는 원자폭탄을 사용했을 것이다.
(7) 만약 Caesar가 총사령관이었다면, 그는 투석기(投石機)를 사용했을 것이다.
일견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Lewis에 따르면 이 두 조건문은 발화의 맥락에 따라 각기 참일 수 있다. 우선 우리가 Caesar의 무자비한 성격을 고정한 채, 전쟁무기에 대한 그의 지식을 기원적 1세기에 이용할 수 있었던 것에만 제한하는 게 아니라 그가 20세기의 전쟁무기 또한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가능세계를 선택할 것이며 그에 따라 (6)은 참이고 (7)은 거짓으로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신적 상태나 성향들을 더욱 많이 반영하여 그의 성격 뿐 아니라 그가 과거에 지녔을 전반적인 지식(과 무지)마저 그대로 유지시킨다면, 우리는 (7)이 참이고 (6)은 거짓이라 판정할 것이다. 이렇듯 反사실적 조건문의 진리-조건은 부분적으로 발화의 맥락에 의존적인바, 특히 조건문의 주제, 암묵적인 가정, 대화에서의 관심사 등에 따라 달라진다.
철저한 맥락주의radical contextualism. 우리는 명시적 지표사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맥락-의존성을 띠는 많은 사례들이 있음을 확인해왔다(이번 章의 각주1)(原註) 참조). 이쯤 되면 독자들은 맥락-의존성이 도대체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견해에 따르면 모든 언어표현들이 맥락에 민감할 수도 있다! 7장에서 만났던 인물인 Austin은 이러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유명한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정 언어에서 온전하게 형성된 … 여러 다양한 문장들을 생각해본다면 … 그것들을 참인 것과 거짓인 것으로 단순하게 분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 참과 거짓의 문제는 문장이 무엇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따라서만 좌우되는 게 아니라,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문장이 발화되는 환경에 따라서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장들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Austin, 1962[「단어를 사용하여 어떻게 행위가 이뤄지는가How to Do Things With Words」], 110-11쪽.)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한다:
다음 문장을 생각해보라: ‘Raglan 경은 알마 전투에서 승리했다’. 여기서, 알마 전투는 설령 단 한 명만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병사가 수행한 전투였으며, Raglan 경의 명령이 일부 부하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그렇다면 Raglan 경은 알마 전투에서 승리한 것인가, 아닌가? 물론 특정 맥락에서라면, 가령 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교과서에서라면 그렇게 말하는 게 충분히 정당화될 것이다. 이는 약간 과장된exaggerated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Raglan에게 승리의 메달을 부여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 ‘Raglan 경은 알마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많은 세부사항들이 생략된 채 나머지 일부가] 과장된 문장으로서, 어떤 맥락에서는 적합하겠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 그 문장이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한사코 고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143-4쪽.)
Austin의 이러한 기본 착상에 동의하는 인물들로는 後期 Wittgenstein과 John R. Searle 및 비교적 최근의 인물들인 Charles Travis와 Avner Baz 등을 들 수 있겠다. 그 어떤 문장의 진리-조건도 맥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급진적인 맥락주의적 견해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면서도 문제될 것이 없는 명백한 사례를 통해서 살펴불 수 있다(이는 Travis에 의해 논의된 사례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당신이 새로 산 값비싼 명품 신발에 관해 내가 ‘야, 니 신발 니 침대 아래 있더라’ 하고 말한다. 근데 사실 그 신발은 당신의 방 안에 있지 않다. 그러니 대부분의 발화맥락에서라면 내 말은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신발이 당신의 방 아래층에 있다고 해보자. 즉 그 신발은 당신의 침대와 지구표면 사이의 공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당신의 침대는 물침대인 데다가, 이전에 한 번 터져서 아래층에까지 물난리가 난 적이 있다 해보자. 그러니 나는 그 비싼 신발을 포함하여 무엇이 되었든 당신의 침대보다 아래에 놓아진 물건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런 맥락에서라면 나는 참된 무언가를 말한 셈이라는 것이다.
허구적 대상
Frege의 의미론에서는 문장에 포함된 이름이 아무 것도 지칭하지 않을 경우 문장 전체는 사고(思考)though(온전한 뜻)를 표현하더라도 진리치를 갖는 데에는 실패한다(단, 그 이름이 ‘…라고 믿는다’와 같은 명제태도 연산자의 범위 내에 나타나는 경우는 제외). 그런데 이에 따르면, 일례로 〈Odyssey〉가 꾸며낸 이야기이고 그 등장인물들이 허구적(虛構的)fictional이라는 점(이러한 허구적 대상이 이번 節에서 논의될 주제이다)을 감안했을 때, ‘Odysseus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백히 참인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Russell의 이론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좀 더 나은 위치에 있다. 그에 따르면 일상적인 고유명ordinary proper name은 위장된in disguise 한정기술구이다. 일상적인 고유명 ‘Odysseus’는, 특정 발화를 가정하건대 대략 ‘Cyclops를 눈멀게 만든 그리스의 전사’ 정도의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다. 그리고 이 한정기술구는 Russell이 제시한 기술구 이론에 따라 분석될 것이다(3章, ‘기술구 이론의 적용’ 節 참조). 그렇다면 가령 ‘Odysseus의 아내는 20년 동안 그를 기다렸다’와 ‘Odysseus의 아내는 20년 동안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이름 ‘Odysseus’를 대체하는3) 한정기술구에 대한 넓은-범위 해석에 따르면) 똑같이 거짓인 것으로 판명된다.
3)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서 대체된 뒤 분석되어야 할 표현은 이름 ‘Odysseus’만이 아니라 ‘Odysseus의 아내’라는 한정기술구인 듯하다.
(특정 사용 맥락 내에 있는) 이름이 ‘실제로는’ 기술구라는 생각은 다소 작위적이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Russell의 추정에 따르면 가령 다음과 같은 한 쌍의 문장들을 거짓이라 해야 한다는 점이다:
(8) Odysseus의 아내는 20년 동안 그를 기다렸다.
(9) Odysseus의 아내는 그가 떠난 지 3개월 만에 그를 기다리길 포기하고 구혼자들 중 가장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였다.
기술구 이론에 따르면 두 문장 모두 거짓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8)이 옳고 (9)는 뭔가 잘못되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언어철학을 접해본 바 없는 사람이라면 (8)을 주장하고 (9)는 부인하고자 할 것이다. 즉 (8)은 참인 반면 (9)는 거짓이라 말할 것이다.
가능적인 대상possible object.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자연스러운 답변은, Odysseus가 현실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가능적인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Homer의 이야기가 실제 역사인 가능세계가 있어서 그 세계에는 Odysseus가 실존하며 그 Odysseus는 Homer가 이야기해준 일들, 즉 Calypso에게 유혹을 당하고 외눈박이 괴물 Cyclops를 눈멀게 하고 전쟁과 모험이 끝난 뒤 20년 만에 자신의 신실하고 총명한 아내에게 돌아오는 등의 일들을 하였다. 위 두 문장의 앞부분에 ‘Odysseus가 실존하는 가능세계들에서는 …’라는 구가 암묵적으로 덧붙여져 있다고 상상한다면, (8)은 참이고 (9)는 거짓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안은 허구적 실체fictional entity들이 가능적 실체possible entity들의 부분집합이라는 견해로서, 그 대부분은 非-현실적인 가능세계에만 존재한다(그리고 Odysseus와는 달리 결코 생각되어본 적도 없는 허구적 실체들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여기서 제시된 상태 그대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문제점은 허구적 대상에 대한 과소-기술under-described의 문제이다. Odysseus에 관한 명제로서 Homer의 이야기와 일관적이지만 그 거짓 역시 Homer의 이야기와 일관적인 그러한 명제 p를 취해보자. 그 명제가 덧붙은 이야기에서는 가령 Odysseus는 Cyclops를 눈멀게 하던 날 아침에 열일곱 개의 올리브 열매를 먹었다는 점 이외의 모든 것이 Homer의 원래 이야기와 정확히 동일하다고 해보자. Homer의 원래 이야기와 p가 둘 다 참인 세계를 Wp라 하고, Homer의 원래 이야기는 참인 반면 p는 거짓인 세계를 W∼p라 해보자. 둘 중 어느 세계에 존재하는 Odysseus가 진짜real Odysseus인가? Wp에-존재하는-Odysseus-유형인가 아니면 W∼p에-존재하는-Odysseus-유형인가?4) 현실에 존재하는 실제 인물에 관해서라면 그 사람이 특정 어느 날 아침에 올리브 열일곱 개를 먹었는지 여부와 같은 문제에 대한 명백한 사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Odysseus의 경우엔 그러한 사실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
4) ‘Wp’로 칭해지는 가능세계, 즉 Odysseus가 본문에서 말해진 여차여차한 일을 한 가능세계는 많으므로, 그 중 특정 하나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Odysseus-개항이 아니라 그러한 가능세계들을 통틀어 존재하는 Odysseus-유형이 문제시된다. W∼p들에 존재하는 Odysseus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그럴 듯한 대응은 우리가 Odysseus에 관해 말할 때 실제로는 가능세계들의 한 집합에 관해, 즉 Odysseus가 Homer에 의해 명시적으로 귀속된 속성들 (및 그렇게 Homer에 의해 귀속된 속성들 집합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따라 나오는 속성들)을 갖고 있는 그러한 가능세계들의 집합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Homer에 의해 작품 〈Odyssey〉에서 Odysseus에 관해 표현된 명제들이라 할지라도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Homer가 Odysseus에 관해 기술한 여타 이야기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가령 그가 Siren의 노래를 들었을 때 뱃머리가 아니라 돛대에 묶였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인물은 여전히 Odysseus이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Homer가 Odysseus에게 연관시킨 속성들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다르게 상상해볼 수 있겠는가? 어느 정도라야 그것이 여전히 Odysseus의 특징을 이루는 이야기라고 인정될 수 있겠는가? 이는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바늘 위에서 춤출 수 있는가?’ 하는 고전적인 문제와 비슷하다. 이렇듯 명백히 쓸모없는 물음에도 분명한 해답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이론이라면 그저 제쳐두어도 좋을 것이다.
新-Meinong주의Neo-Meinongianism. 이는 19세기 말 Alexius Meinong에 의해 제안되었던 도식의 현대화된 버전이다. 허구적 실체가 통상적인 대상과는 달리 未결정적indeterminate이라는 점을 받아들임으로써 허구적 실체를 그 어떤 의미에서든 확정적인definite 가능적 대상과 동일시하길 거부한다면, 앞서 살펴본 문제로부터 다소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Odysseus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는 Cyclops를 죽이는 등등의 일을 하긴 했지만, Cyclops를 죽이던 날 아침에 올리브 열매 열일곱 개를 먹지도 않았고 안 먹지도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Odysseus는 가능적인 대상들과 달리 未결정적이다.
新-Meinong주의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변형은 허구적 대상이 통상적인 대상과 마찬가지로 구체적(具體的)concrete이라고(하지만 여전히 실존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Odysseus가 Cyclops를 눈멀게 하는 따위의 물리적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잘 부합한다. 두 번째 변형은 허구적 대상이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모종의 추상적인abstract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이 특정 속성들 조합에 의해 개별화(個別化)individuate되는 포괄적(일반적)인 개별자들generic individuals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샌 프란시스코 49er 팀의 쿼터백이라는 것은 여러 속성들이 조합된 것으로서 시간을 걸쳐 다수의 구체적 개별자들에 의해 현실화된다. 이를 Russell이 제안하듯이 한정기술구로 간주하기보다는, 시간을 걸쳐 동일성을 유지하는 추상적 대상으로 간주해볼 수도 있다(그래서 가령 Joe Montana가 이 역할에 대해 맺는 관계는 특정 기간 동안 그 역할을 수행함이라는 관계이다). Odysseus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허구적 대상이 추상적이든 구체적이든 新-Meinong주의가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非-실존적인nonexistent 대상들이 지니는 속성들에는 대체로 상당한 여유가 있다quite spare in their properties는 것이다. 그래서 매우 적은 수의 속성이라도, 심지어 단 하나의 속성이라도 非-실존적 대상이 되는 데에는 충분하다.
창조주의Creationism. 그런데 허구적 대상에 대한 新-Meinong주의적 관점은, 가령 〈Odyssey〉 가 2,800년 전에 지어진 작품이기에 Odysseus는 2,800살 먹은 우연적인contingent 대상이라는 생각과 잘 부합하지 않는다. Kripke에 따르면 전형적인 고유명의 지시체는 한 대상에 대한 최초 명명(命名)식에까지 이어져 있는 의사소통의 연쇄 내지 지시 의도referential intention의 연쇄에 해 결정된다. 대체로 그 최초 명명식은 칭명하고자 하는 대상을 목전에 둔 채 ‘이 대상을 ‘N’이라 칭하자’와 같은 식으로 말함으로써 이뤄진다. Kripke는 허구적 이름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도입된다고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Odysseus보다는 훨씬 최근의 예시로서 Jane Austen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등장인물인 Darcy를 생각해보자. Austen은 그 작품을 저술함으로써, 가령 Elizabeth Bennet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여러 행위들을 한 특정 인물 Darcy에 관해 말하는 하나의 관습practice을 도입한 셈이다. 그녀가 Darcy를 창조한 것은 하나의 추상적 대상을 창조한 것이긴 하지만, 이 대상은 마치 지구의 적도와도 같은 우연적 대상으로서 시간 내에서 시작점을 가지며, 부분적으로는 언어적⋅개념적⋅지향적intentional 실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녀의 창조이다. 그러므로 이 견해는 앞서 가능적 대상 이론에 가해졌던 반박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물리칠 수 있다: 어떤 하나의 기술구가 Jane Austen의 창조에 대해 참이고 인과적으로 올바른 방식에 따라 Darcy와 연결된 경우, 그 기술구는 오로지 Darcy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非-실존과 얽힌 퍼즐은 아무것도 없다. Darcy는 Snoopy나 Odysseus와 마찬가지로 정말로 실존하되 살과 피로 이뤄진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기술구의 형태로서, 지향된 것으로서, 이미지로서, 혹은 영화에서 배우에 의해 연기된 역할로서 존재할 뿐이다.
허구성 연산자fictional operator. 또 다른 견해는 우리가 Odysseus에 관해 말할 때 그 화행을 지배하는 암묵적인 연산자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 연산자를 언어적으로 명시하자면 ‘다음곽 같은 이야기에 따르면 〔…〕’ 내지는 ‘통상 Homer가 지었다고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와 같은 식이 될 것이다. 이 연산자는 超-내포적인hyper-intensional 연산자로 간주될 수 있는바, 그 경우 허구적 대상에 관한 화행은 그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 나타나는 문장(및 그 문장이 함의(含意)implicature하는 바와 그 문장에 선제(先提)presupposition된 바)의 뜻 내지 개념적 내용에 기반한다. 이러한 접근법에 속하는 한 가지 흥미로운 관점으로서 가식(假飾) 이론pretense theory으로 알려진 견해에 따르면, 허구성 연산자를 특정 심리적 태도인 가장하기(…인 척하기)pretending라는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즉 허구성 연산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태도를 취하게끔 지시한다instruct. 이는 어린아이들이 허구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진지하게 들으며 즐긴다는 평범한 사실과 잘 부합한다.
허구성 연산자를 도입하는 견해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는 난점은 참과 허구가 혼합된 진술들, 가령 ‘Snoopy는 종종 자신의 개집 위에 누워있고는 한다. 그런 이미지는 매우 널리 알려져 있다’라든가 ‘Platon은 Odysseus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그를 만나본 적은 없다’와 같은 진술들을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진술들에서 허구성 연산자가 작동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면, 특정 단일 문장 내에서는 그 연산자가 외견상 임시방편적인ad hoc 방식으로 소멸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번 단락에서 제시된 사례들에서는 두 번째 문장들에서 그 연산자가 소멸되어야 하는바, 그 문장들은 허구적 이야기 내의 사태들에 관한 문장이 아니라 그 허구적 이야기 자체에 관한 현실의 사태를 말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허구성 연산자의 범위를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임의적으로 이뤄질 수 밖에 없는 듯하다는 점이다.]
추론주의
의미에 관한 전통적인 이론가들은 언어의 사용에 관한 화용론이 의미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여기고는 한다. 의미론은 다음과 같이 기본적으로 지시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단칭용어는 전형적으로 대상을 지시하며 술어는 속성 및 관계를 지시한다. 일단 의미론을 학습하고 나면 우리는 갖가지 단어들을 다양한 화행에서 사용할 수 있는바 이에는 추론(推論)하기drawing inference라는 화행 역시 포함된다.
이러한 전통적 관점과 대조적으로, Wilfrid Sellars(1912-89)에 의해 표명되고 최근 Robert Brandom과 Jaroslav Peregrin에 의해 옹호된 견해에 따르면, 언어에서 근본적인 것은 화용론 특히 추론하기라는 화행이다. 이러한 견해는 추론주의inferentialism이라 불린다. ‘그리고’라는 논리상항을 생각해보자(여기서 말해지는 ‘그리고’는 ‘Laurel과 Hardy’처럼 주어나 명사를 결합시키는 역할이 아니라, 온전한 문장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논리적 연결사로서의 ‘그리고’이다). 우선 표 12.1은 ‘그리고’의 진리표로서, 여기서 ‘P’와 ‘Q’는 임의의 서술문을 나타낸다:
표 12.1 ‘그리고’의 진리표
이 표에 따르면 P와 Q 양자 모두가 개별적으로 참일 경우 ‘P 그리고 Q’ 역시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P 그리고 Q’ 전체는 거짓이다. ‘그리고’에 대한 표준적인 추론규칙inference rule, 즉 ‘그리고’가 형식적인 추론reasoning⋅증명(證明)proof⋅도출(導出)(유도(誘導))derivation에 도입되는 경우의 규칙은 표 12.2와 같다:
표 12.1 ‘그리고’의 추론규칙
P, Q | P 그리고 Q | P 그리고 Q |
P 그리고 Q | P | Q |
이 표에 따르면 P와 Q 각각이 전제로 주어진 경우 ‘P 그리고 Q’를 추론하는 것이 허용되며, ‘P 그리고 Q’가 전제로 주어진 경우 P와 Q 각각을 추론하는 것이 허용된다.
전통적인 이론가들은 논리적 연결사에 대한 진리표를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우리가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지도하는 지침으로서의 추론규칙은 진리표에 토대를 두고based 있는바, 진리표는 ‘그리고’의 의미 내지 의미론을 명시한다. 하지만 추론주의자에 따르면 실상은 그 역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언어사용에서 근본적인 것은 오히려 추론규칙이다. 우리가 ‘그리고’라는 낱말[의 의미]을 숙달mastery했다고 장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추론규칙[즉 추론에서 ‘그리고’를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암묵적으로라도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에 관한 추론규칙에 숙달되어 있는 한 그 낱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 이상의 것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고’에 대한 추론규칙에 의해 명시된 바에 따라 그 낱말을 사용할 줄 아는 한 우리는 그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추론규칙은 한 단어가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방식, 즉 그 단어에 대한 명제적 지식(무엇-에 대한 지식)know-what과 대비되는 실천적 지식(어떻게-에 대한 지식)know-how을 명시한다.
상술한바 ‘그리고’에 대한 추론규칙은 “언어-間” 규칙“inter-linguistic” rule이다. 반면 “언어-內intra-linguistic” 규칙은 “언어-진입linguistic-entry”규칙과 “언어-이탈linguistic-exit” 규칙으로 구성되는데, 이들 규칙들은 논리-外적인non-logical 단어들의 사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빨갛다’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경우 그 단어의 지시가 특정 속성이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단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명시할 수 있다: 한 대상이 빨갛게 보인다면 ‘그것은 빨갛다’고 주장하는 것이 허용되며[(언어-진입 규칙)], ‘빨간 거 가져와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빨간 것을 가져와야 한다should[(언어-이탈 규칙)]. (그리고 이 경우 다음과 같은 언어-間) 규칙 역시 존재한다: ‘그것은 빨갛다’로부터 ‘그것은 색깔을 갖고 있다’, ‘그것은 파랗지 않다’ 등을 추론하는 것이 허용된다.)
이러한 접근법은 지시 및 진리개념보다는 상술한 바와 같은 규칙들에 대한 진술을 더욱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추론규칙은 특히 우리가 단어들을 갖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obligated 그리고 무엇을 하는 게 허용되는지may를 말해준다. 요컨대 추론규칙은 의미론적 개념이 아니라 규범적normative 개념이다. ‘…를 지시하다’나 ‘…은 참이다’라는 낱말들 자체 역시 이런 식으로 다뤄져야 한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는 P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는entiled to assert경우에만 P는 참이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다. 마찬가지로 b = A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경우에만 ‘b’의 지시체 = A라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추론들 중 단어에 대한 우리의 숙달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합당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방에 샌드위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보자. 그 경우 그 사람이 ‘여기 내 가방이 있다’로부터 ‘여기 점심거리가 좀 있다’를 추론하는 것은 정당화되지만, 이는 그 사람이 몇몇 단어들에 숙달해 있기 때문에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 추론들은 이런 식으로 단어의 숙달로 인해 정당화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는 B의 북쪽에 있다’와 ‘B는 C의 북쪽에 있다’로부터 ‘A는 C의 북쪽에 있다’를 추론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추론주의의 요지는 이런 종류의 추론들의 총체가 언어적 숙달 및 의미에 대한 지식을 구성한다constitute는 점이다.
슬러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게 될 슬러slur5)란 보통 특정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사회집단 등에 속하는 사람들을 폄하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들을 말한다. 남부 유럽, 특히 이탈리아인에 대한 멸칭표현인 ‘wop’이라든가, 여성을 비하하는 ‘…년’, 동성애자를 낮잡아 부르는 속어 ‘fairy’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번 절에서 주의할 점은, 슬러 표현의 경우 그것을 실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가령 인용 부호로 처리함으로써 그 표현을 단지 언급한다고 해도, 그에 담긴 모욕감이나 무례함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용되든 언급되든 슬러가 그 자체로 모욕적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슬러를 논함에 있어 마치 끔찍한 질병의 표본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같은 자세로 그 불쾌감을 무릅써야 한다. 여기서는 ‘짱깨’라는 단어를 예시로 삼아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6)
5) ‘slur’란 특정 대상이나 대상들 집단에 대한 멸칭표현 내지 경멸적 비속어를 총칭하는 용어로서, 우리에게 친숙한 역어로는 ‘혐오표현’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혐오표현’은 ‘혐오발언’으로 번역되는 ‘hate speech/utterance’와 더불어 경멸적인 느낌을 지닌 모든 형태의 언어적 표현 및 非언어적 행위까지도 총칭하는 용어로 통용되는 편이다. 반면 이번 節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듯이, ‘slur’는 기본적으로 대상 내지 대상들 집합을 지시하는 단칭용어 혹은 일반용어 형태의 언어표현만을 일컫는바, 슬러의 뜻 및 지시와 같은 의미론적 속성은 무엇인지, 슬러가 문장에서 나타나는 경우 진리-함수적 상항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슬러가 사용되는 경우 화용론적으로 어떤 특성을 보이는지 등이 이번 節의 주된 논의사항이다. 이런 구문론적⋅의미론적⋅화용론적 사안을 감안하여, ‘혐오표현’이라 번역하는 대신 원단어를 굳이 번역하지 않고 한글로 ‘슬러’라 표기하였다. (참고로 William G. Lycan, 『언어철학: 현대적 입문Philosophy of Language: A Contemporary Introduction』, 서상복 譯, 책세상, 2012에서는 ‘중상/비방’으로 번역되었다.)
6) 원문의 사례는 앞서 언급된 ‘wop’으로서, 저자는 이 표현을 사례로 삼은 이유로 친숙하면서도 작금엔 잘 쓰이지 않는 구식 단어라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짱깨’는 지금도 일상에서 아주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이다.
슬러는 (과연 의미라는 것을 갖고 있다면) 대체 어떤 종류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우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은, 슬러 표현의 슬러적-의미slurry-meaning란 그 표현과 동일한 외연을 가지되 모멸적이지는 않은 용어의 뜻 내지 내용에 부가되는 뜻 내지 내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짱깨’는 ‘중국인’(또는 ‘중국 혈통’)과 동일한 외연을 갖지만 ‘중국인’과 달리 모욕적이다. 즉 ‘짱깨’는 ‘단지 중국인이라는 것만으로 경멸을 받을 만하다’와 같은 식의 내용이 부가된 슬러이다.
하지만 혹자는 슬러가 非-슬러적인 대응표현non-slurry counterpart과 동일한 외연을 갖는다는 주장을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다. 분명 다음 문장이 참이라는 주장에는 논쟁의 여지가 매우 많다고 하겠다:
(10) 모든 중국인, 그리고 오로지 중국인만이 짱깨이다.
어떤 사람은 적어도 일부 중국인들,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짱깨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사실상 아무도 짱깨가 아니라 말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필연적으로 아무도 짱깨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어쨌든 슬러가 뜻 내지 내용의 층위에서 불쾌감을 유발하도록 작동한다는 다소 일반적인 관점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슬러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러한 불쾌한 작용이 부정될negated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짱깨도 …하지 않다'는 ‘짱깨’의 모멸함을 무효화시켜야만 한다. 어떤 인종차별주의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보자:
(11)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올 것이다.
이 화행에 포함된 불쾌감은 다음을 주장함으로써 거부될 수 있어야 한다:
(12) 아니다, 그 어떤 짱깨도 파티에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12)를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인종차별적 용어를 묵인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종차별적 화행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 문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13) 짱깨가 파티에 온다면, 나는 다른 맥주를 마실 것이다.
설사 이 조건문의 전건이 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이 문장을 발화하는 것은 명백히 인종차별적이다. 요컨대 슬러에 담긴 모멸감은 ‘아니다’나 ‘…라면 …이다’와 같은 진리-함수적인 수단에 의해 격리quarantine하고자 하여도 그 시도를 ‘벗어난다leap out’.
뿐만 아니라 슬러性slurriness은 타인의 발화에 대한 간접보고indirect report, 즉 ‘그녀는 S라고 말했다said that S’ 형식의 문장을 통해 분리confinement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벗어나버린다. (14)는 (15)에 비해서는 조금이나마 덜 무례한 발언으로 여겨질 것이다:
(14) Jolind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올 것이다.’
(15) Jolinda는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올 것이라고 말했다.
두 문장은 각각 직접보고와 간접보고의 형태를 띠고 있는바, 전자에서는 단어들이 발화되었던 그대로 보고되는 반면 후자에서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다보니 (14)와 달리 (15)는 (11)에 포함된 인종차별적 느낌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듯하다. [간접보고에서는 발화된 슬러를 그대로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도 (15)는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5)를 말하는 사람은 중국인을 대하는 Jolinda의 태도를 공유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찰하다 보면 슬러를 화용론적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지는 듯하다. 슬러가 지닌 경멸적 내용이 Grice的인 대화적 함의(含意)conversational implicature에 속하는 사안이라 해보자. 그 경우 슬러性은 취하될 수cancellable 있어야 한다(7章, ‘함의 개념의 적용’ 節 참조). 친구가 나를 저녁 파티에 초대했는데 내가 ‘나 지금 과제 중이야’ 하고 말한다면, 나의 말은 ‘파티에 가지 못한다’를 대화적으로 함의한다. 하지만 내가 곧바로 ‘근데 한 시간이면 끝날 듯?’ 하고 덧붙인다면 앞선 발화에서 함의된 바는 취소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슬러가 발화될 때 진행되는 모든 일들이 단지 함의에 속하는 사안이라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분명 모욕적이지 않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16)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오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16)이 (11)만큼이나 인종차별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역시 7章, ‘Russell의 기술구 이론에 대한 Strawson과 Donnellan의 반박’ 節에서 살펴본 바 있는 전문적인 의미의 선제 개념을 활용하여, 인종차별적 태도가 슬러의 사용에 선제(先提)되어presupposed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내용이 대화에 선제되어 있다면 그 선제된 바는 취소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냉장고에서 맥주를 가져올 사람을 정하는 상황에는 ‘냉장고에 맥주가 있다’가 참이라는 것이 선제되어 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내가 ‘야, 그거 알아? 여기서 누가 갔다 올지 정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 사실 냉장고에 맥주 없음ㅋ’ 하고 말한다면, 우리의 대화에 선제된 바는 취소되고 냉장고에 갔다 올 사람을 정하는 일 자체가 중단될 것이다. 하지만 슬러의 경우 그것이 지닌 경멸적 내용은 특정 화행을 통해 일단 표현되고 나면 결코 소멸될 수 없다.7) 스컹크가 방귀를 뀌면 그 냄새가 자연히 퍼지듯, 슬러性은 일단 표현되고 나면 되돌릴 수가 없다.
7) 앞선 냉장고 맥주 사례의 경우, 사실은 냉장고에 맥주가 없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냉장고에 다녀올 사람을 정하는 우리의 대화 자체가 소용없어지게 되었다. 즉 선제된 바가 취소됨으로써 그 선제에 토대를 둔 화행이 무효화되었다. 이는 7章에서 살펴본바 임의의 문장 P와 Q에 대해, P가 Q를 선제할 경우, Q가 거짓이라면 P는 진리치를 결여한다는 선제 개념의 분석과 일치하는 결과이다. 반면 슬러의 경우 적어도 슬러性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내가 ‘야, 오늘 파티에 짱깨 한 명 온다더라.’하고 말한다. 여기서 말해지는 중국인을 a라 한다면, 나의 발화에는 ‘a는 짱깨이다’가 참이라는 것과 더불어 ‘짱깨’에 결부된 경멸감이 선제되어 있다. 그런데 곧바로 내가 ‘근데 전에 봤는데 걔는 짱깨는 아니더라. 깔끔하고 얌전해.’ 하고 덧붙인다면, 설령 ‘a는 짱깨이다’가 참이라는 선제는 취하될지 몰라도, 앞선 발화에 결부되었던 경멸감마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중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슬러에 관한 논의의 주된 영역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런 사안들이다. 슬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과 더불어 이 문제에 대한 많은 해결책들이 제안되어왔다. 언어철학 입문서로서 그 모든 것들을 낱낱이 살펴보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다만 여기서는 David Kaplan이 제시한 해결책의 대략적인 윤곽 정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슬러에 관한 Kaplan의 견해. Frege는 뜻과 지시 이외에도 단어의 “어조(語調)tone” 내지 “색채colouring”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가령 ‘똥개cur’가 ‘개’와 다르다는 점을 설명할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러한 어조 내지 색채이다. 두 단어는 동일한 지시 및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지만, 발화에서 사용될 경우 그가 칭한바 각기 다른 주관적⋅심리적 이미지가 환기(喚起)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p 그리고 q’는 ‘p 그러나 q’와 다르다. 전자와 달리 후자의 연언문은 청자로 하여금 첫 번째 연언지(連言枝)와 대조적인 내용이 두 번째 연언지로 말해질 것이라 기대하게끔 유도한다. [하지만 연언문 전체의 진리-조건은 둘 다 동일하다. 이렇듯 언어표현의 인지적 내용과 분명 구분되는 특성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 바로 어조 내지 색채 개념이다.]8)
8) “Frege는 표현의 사고와 그가 말한 색채라는 것을 구분한다. 과학적 언어는 사고를 명확하게 나타내고자 한다. 반면 인문학의 문장들은 ‘아뿔싸!’라 ‘맙소사’와 같은 단어나 구를 중간에 삽입함으로써, 혹은 ‘개’ 대신 ‘개새끼’와 같이 비하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특정 느낌을 표현하는 색채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문장의 그런 특성이 문장의 참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개’가 사용된 자리에 ‘개새끼’를 대체한 문장의 경우, 설사 그 문장을 발화하는 화자가 그 말이 표현하는 적대감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 문장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PW[『遺稿集Posthumous Writings』, Blackwell, 1979], 140쪽.) (中略) 자연언어의 문법에는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언어는 동일한 문법을 지닐 것이다. 언어의 미묘한 색채는 번역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긴 하지만, 다른 언어를 학습할 때 그 뼈대가 되는 논리적 뜻과 그 언어가 지닐 수 있는바 뜻과는 다른 종류의 요소를 구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색채가 문장의 아름다움에 중요할 수는 있겠지만, 아름다움이 진리는 아니며 그 역도 아니다.” (Anthony Kenny, 『Frege, 현대 분석철학의 창시자에 대한 소개Frege: An Introduction to the Founder of Modern Analytic Philosophy』, 최원배 譯, 서광사, 2002, 255-6쪽. 본디 해당 저서에서는 ‘colouring’가 ‘묘미’로 번역되었다.) 이에서 알 수 있듯 Frege가 어조나 표현의 색채 개념에 주목한 본래 목적은 언어의 객관적인 뜻(및 지시)과 주관적⋅심리적 느낌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슬러性을 이러한 어조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슬러性과 비슷하게 어조의 경우에도, 단어가 사용됨으로써 그 어조가 일단 작동하고 나면 그것을 격리하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건문 형식의 ‘니가 그 똥개를 데려온다면, 우리 고양이는 달아나버릴 거다’는 말은, ‘너 그 똥개를 기어이 데려왔구나!’ 못지않게 비방적인 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어조 개념이 슬러性을 적절히 설명해줄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지 여부는 다소 의심스럽다. ‘그녀는 흡연자이고 술은 마시지 않는다’와 ‘그녀는 흡연자이지만 술은 마시지 않는다’의 어조 차이, 즉 후자 연언문의 경우 첫 번째 연언지에서 기대되는 바[(그녀는 흡연자이니 자연스레 음주도 할 것이라는 예상)]가 두 번째 연언지에서는 좌절될 것이라는 어감의 차이가 환기된다는 사실은 관습(慣習)convention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어조가 관습에 속하는 사안이라면, 어조는 그저 의미의 일부로 편입되어버리는 그 무언가인 셈이다. 다시 말해 어조는 Frege가 예상한 식으로 단지 주관적 세계에 속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객관적 사용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짱깨’의 슬러性 역시 언어에 관한 객관적 사실이 되어버린다.
이 지점에서 Kaplan이 제안하는 방책은, Frege적인 어조를 본질적으로 “객관화objectivise”하는 규약적 의미convention meaning라는 범주를 도입하는 것이다.9) 이에 따르면 적어도 일부 단어들의 경우 지시 및 진리-조건과 같은 기술적(記述的) 기능descriptive function 이외에도, Kaplan이 칭한바 표현적(表現的)expressive 의미 내지 기능을 지니고 있다. 단어의 표현적 의미란 화자의 상태state 내지 태도attitude로서, 이는 기술적으로 전달descriptively convey되지는 않지만, 즉 문장의 진리-조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그 용어의 사용에 관습적으로 결부된다conventionally tied. 예를 들어 ‘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네’는 ‘저기 Smith 씨가 오고 있네’와 기술적으로 동등descriptively equivalent하지만 표현적으로는 동등하지 않다expressively inequivalent. 또한 표현적 의미는 진리-함수적 연산자 내부에 삽입되지 않는다. ‘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와 ‘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는 상호모순이지만, 양자의 표현적 의미는 동일하다. 즉 표현적 의미 역시 진리-함수적 수단으로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벗어난다. 그렇기에 만일 당신이 Smith 씨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아냐, 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말하기보다는] ‘야! 뭔 말을 그렇게 해!’ 하는 식으로 반응할 것이다.
9) (原註) 물론 윤리학 이론에서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정서주의(情緖主義)emotivism를 옹호하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견해에 개입한다.
표현적 의미를 도입하는 이론이 그 자체로 합당하게 여겨지는 이유들 중 하나는, ‘아야!’, ‘젠장!’, ‘안녕!’과 같은 표현들이 문장 내에 적절히 삽입될 수 없음에도 왜 유의미한지를 잘 설명해낸다는 점이다. 그런 표현들은 기술적으로 무의미하기에 의미론의 구성적 규칙에 따라 적절히 연산될 수 있는 항목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표현적으로는 유의미하다. 하지만 각기 다른 언어로 된 인사말들이나 감탄사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표현들은 모두 관습적이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짱깨’와 ‘중국인’의 기술적 기능은 동일하지만 양자의 표현적 기능은 극적으로 다르다. ‘짱깨’의 표현적 기능은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나 경멸감을 표현하는 것to express이다. 이를 화행론(話行論)speech-act theory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슬러가 사용될 때 이뤄지는 발화수반행위는 모욕하기 내지 욕설하기라는 행위이다(이런 점에서 슬러는 V자 표시나 손가락 욕설과 표현적으로 다소 비슷하다). 그리고 이것이 슬러가 불쾌한 말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이다. 보통 상황에서라면 ‘짱개’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중국인에 대한 경멸감을 표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아무 짱깨도 파티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인 단어racist word이다.
실제로든 가짜로든 화자의 태도를 표현하는 것은, ‘빌어먹을 Smith 씨’라든가 ‘고결한 Smith 씨’와 같은 별칭표현들이 일반적으로 지니는 표현적 기능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불식할 필요가 있겠다. 한 태도를 표현하는 것과 그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왜냐하면 ‘Smith 씨가 오고 있다’와 ‘저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의 진리-조건이 동일하다면, 분명 둘 중 어느 것도 화자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진술과 동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표현적 의미는 진리-조건과 같은 기술적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두 문장의 진리-조건은 동일하다. 그런데 특정 태도를 표현하는 것과 화자가 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진술이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후자 문장은 화자의 태도에 관한 진술인 셈이고, 따라서 전자 문장과 다른 진리-조건을 지니게 되어버린다. 이러한 귀결은 (동일성의 이행성 원리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표현적 의미가 기술적 의미와 무관하다는 기본 논제와 배치되는바, 이를 막기 위해서는 태도를 표현하는 것과 화자의 태도를 진술하는 것 간의 동일성 가정이 거부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단어가 전용(轉用)appropriation되는 현상과 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술적 내용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표현적 의미가 변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퀴어queer’라는 단어를 들 수 있겠다. 이는 과거에 동성애자들을 비하하고 모욕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지만, 작금에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뿐만 아니라 이성애자들 사이에서도 모욕적이지 않은 용어로 통용되는 추세이다.
이번 章의 요약
우리는 주장이 규칙에 지배되는 행위, 특히 규제적 규칙과 대조되는 구성적 규칙들 집합에 의해 성립하는 행위라고 가정하였다. 구성적 규칙이란 그 규칙이 없이는 특정 행위가 존재할 수 없는 규칙이다. 예를 들어 체스에서 한 게임말을 특정 방식으로 움직이는 수가 룩의 운용법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체스의 규칙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체스의 규칙은 구성적이다. 반면 속도제한과 같은 도로교통법은 규제적 규칙이다. 도로교통법이 준수되지 않는다고 해서 차량운행행위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논의 초입에 우리는 주장을 구성하는 규칙으로서 p라고 믿는 경우에만 p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규칙을 고찰해보았다.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주장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경우 Moore의 역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역설에 따르면, ‘p이지만 나는 p라고 믿지 않는다’ 형식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은 아니지만, 이러한 문장을 말하는 사람은 모종의 논리적 곤경에 처한다. 여기서 감지되는 부적절성은 A를 이행할 의도가 없으면서도 ‘A를 하겠다고 약속한다’고 말하는 경우와 유사하다. A를 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약속을 지배하는 규범, 즉 A를 이행해야만 한다는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p를 주장하는 사람은 주장을 지배하는 규범, 즉 p를 믿어야한 한다는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약속의 경우 진실되지 못한 약속을 하는 게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장의 경우 거짓말(혹은 실제로 참이지만 주장하는 사람 자신은 거짓이라 생각해서 의도한 거짓 말)을 하는 게 가능하다. 주장을 비재하는 규칙의 후보로서 믿음-규칙 이외에도 진리-규칙, 정당화-규칙, 지식-규칙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는 맥락-의존성이 언어에서 명시적 지표사 이외의 부분들로 확장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탐구하였다. 다음 사례들을 고찰해보면 그렇게 확장되어야만 하는 듯하다: (1) ‘크다’와 같이 암묵적 상대성이 포함된 표현들. 이러한 표현들의 경우 맥락-의존성과 연관된 지표는 정도의 표준 내지 비교집합이다. (2) 일상에서 사용되는 양화사句. 가령 담임선생님이 학급 학생들에게 ‘다들 준비 됐니?’ 하고 묻는 경우, 그 발화에 사용된 보편 양화사의 속박범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 그 학급 학생들로만 암묵적으로 제한된다. (3) 발화의 시간 및 공간이 암묵적으로 제한되는 경우. 일상에서 사용되는 ‘지금 비 와’ 같은 문장은 ‘여기’라는 지표사에 의해 암묵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4) 가치에 관한 진술. ‘그것은 좋다’와 같은 가치진술은 실상 ‘그것은 나에게 좋다’와 같이 암묵적으로 상대적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암묵적인 관계항은 단일 화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 집합일 수 있다. 이외에도 지식-주장이 맥락에 민감하다는 견해를 살펴보면서 ‘인식론적 맥락주의’와 ‘인식론적 상대주의’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反사실적 조건문과 얽힌 퍼즐, 즉 적형well-formed이면서 동일한 전건을 갖되 상충하는 후건들을 지닌 두 反사실적 조건문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문제에 대한 Lewis의 맥락주의적 해결책을 살펴보았다. Lewis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조건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자 의도되는 맥락에 상대적이다. 마지막으로 보통 Austin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간주되는 견해로서 사실상 일상언어의 모든 문장들이 맥락-민감성을 갖는다는 제안을 고찰해보았다.
허구적 이름에 대한 Frege와 Russell의 설명을 거부한 채 그러한 이름들이 진정한 고유명 즉 지시적 이름referring name이라고 가정해보자. 따라서 우리는 그런 이름들이 지시하는 적절한 대상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한 가지 가능한 방책은 허구적 이름이 단지 가능적 대상들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여타 목적을 위한 가능자(可能者)들possibilia 내지 가능세계들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능적 대상이 [속성의 측면에서] 충분히 결정되어 있는 데 반해 허구적 대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Snoopy와 동일한 대상이 되는 후보는 한 배에서 태어난 특정 수의 강아지들 중 하나여야 한다. 하지만 Snoopy 만화의 작가 Charles Schultz는 Snoopy와 함께 태어난 강아지들이 정확히 몇 마리인지 언급한 바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Schultz의 이야기를 참이게 하는 대상들 부류에 개의치 말고 그 가능적 대상을 생각해야 한다.하지만 이조차도 너무 엄격한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 전부 Snoopy가 Charlie Brown의 개라고 알고 있더라도, Snoopy가 Linus의 개라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전략은 허구적 대상이란 매우 기이한 종류의 대상으로서 특정 속성들을 지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하한 사실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Snoopy의 형제 강아지들이 몇 마리였는지에 관한 문제를 결정해줄 사실이란 일절 없다. 이러한 新-Meinong주의에 따르면 허구적 대상은 실존하지도 않고 가능적 대상을 통해 설명되지도 않는바, 단지 존재론적 未결정성ontological indeterminacy이라는 기이한 특성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방책은 상당히 범용한 관점으로서 Schultz가 Snoopy를 창조했다는 평범한 사실을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Snoopy는 만화에 그려진 그림으로서, Schultz가 지어낸 이야기에 따른 여차저차한 기술구들로서, 혹은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등의 형식으로서 실존한다. 요컨대 Snoopy는 우연적 대상이자 문화적 산물의 형태로 실존한다.
의미론 및 언어표현의 지시적 힘은 표현의 사용 및 특히 추론에서의 사용에 우선하는 것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추론주의는 이러한 그림을 역전시켜 추론을 지시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실제로도, ‘그리고’라는 논리상항이 사용된 특정 추론 패턴을 올바르거나 그릇된 것으로 식별하는 일 자체가 바로 그 논리상항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이는 여타 논리상항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추론 개념을 확장하여, 가령 빨강색 공의 색깔에 관해 질문을 받을 경우 ‘빨갛다’라고 답하는 것, 그리고 ‘빨간 공 가져와라’는 명령을 받을 경우 실제 빨강색 공을 가져오는 것 역시 ‘추론’에 포함시킨다면, 이런 식의 추론주의적 설명은 언어 전체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기존에는 명백해 보였던 지시 개념의 필요성은 상당 부분 축소된다(하지만 추론주의적 설명은 우리가 ‘지시하다’와 같은 단어에 숙달되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다). 추론주의자에게 핵심적인 개념은 규칙 혹은 규범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이다. 언어란 근본적으로 대상이나 사태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들의 체계system of rules이며, 전자는 원리적으로 후자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슬러 현상은 일견 슬러 표현의 뜻 내지 내용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추정컨대 모든 슬러에 대해, 그와 동일한 외연 혹은 지시를 지니되 그 뜻을 달리하는 非-슬러적인 표현이 존재한다. 가령 ‘짱깨’에 대응하는 非슬러적 표현은 ‘중국인/중국 출신의’ 정도가 될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견해가 ‘모든 중국인 그리고 오로지 중국인만이 짱깨이다’가 참임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 중국인은 짱깨라는 것인가? 아니면 아무 중국인도 짱깨가 아닌가? ‘그 어떤 중국인도 필연적으로 짱깨가 아니다’는 어떠한가? [이 모든 질문에 어떻게 답하든, ‘짱깨’라는 단어가 갖는 모욕감은 소멸되거나 상쇄되지 않는다.] 진짜 난점은 그 어떤 목적으로 ‘짱깨’를 사용하더라도 불쾌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가령 부정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서 ‘여기엔 아무 짱깨도 없다’는 ‘여기 짱깨가 있다’만큼이나 무례하게 받아들여진다. 슬러 현상을 선제라든가 대화적 함의와 같은 화용론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더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슬러 현상에 대한 수많은 설명들이 제시되었는데, 그 중 우리는 상술된 문제를 아주 간편히 처리하는 관점 한 가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Frege는 슬러가 지닌 무례함을 슬러 표현이 환기하는 주관적⋅심리적 태도의 측면에서 고찰한다. 이를 Frege는 슬러 표현의 ‘어조’ 혹은 ‘색채’라 칭하였다. 하지만 색채가 언어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작동하게 된다면, 이는 표현에 의해 환기되는 경향이 있는 주관적 연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습에 속하는 사안이며, 따라서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의미와 연관된 사안인 셈이다. Kaplan은 기술적 의미 이외에 의미의 또 다른 차원으로서 그가 칭한바 ‘표현적 의미’라는 것을 상정한다. 표현적 의미는 기술적 의미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언어표현의 지시 내지 그것이 기여하는 문장 전체의 진리-조건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와 ‘Smith 씨가 오고 있다’의 진리-조건은 동일하지만, 전자는 대체로 화자가 Smith에게 좋지 않은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경우에만 사용된다(그 태도가 정당한지 여부는 무관하다). 표현적 의미는 객관적이고 규약적인 사안이라는 점에서는 기술적 의미와 일치하지만, 의미론적으로 ‘구성적’이지는 않다는 점에서 기술적 의미와 다르다. 가령 언어표현이 부정문에 나타나거나 조건문의 전⋅후건에 삽입되더라도 그 단어의 표현적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도 가해지지 않는다.
탐구문제
1 주장에 대해 Williamson이 제시한 지식-규칙은 너무 엄격하지 않은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주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생각해보라.
2 Grice는 주장이 그보다 넓은 범주로서 다음과 같은 “非-자연적 의미non-natural meaning”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S는 다음의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A의 행위에 의해 p라는 것을 非-자연적으로 의미한다non-naturally mean: 특정 청자 H에 대해 (1) A는 S를 통해 H로 하여금 p라는 믿음을 형성하도록 의도한다intend. (2) S는 H로 하여금 (1)을 알아채도록recognise 의도한다. (3) S는 H로 하여금 (1)을 근거로 p라는 것을 믿도록 의도한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무언가를 非-자연적으로 의미한다는 것은, 화자가 청자로 하여금 화자의 행위에 근거하여 무언가를 믿도록 의도하고 있음을 청자가 알아차리게끔 행위하는 것이다. Grice가 제시한 유명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내가 Y가 X의 부인과 부적절하고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는 그림을 그려서 X에게 보여줄 경우, 그럼으로써 나는 Y가 X의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非-자연적으로 의미한다. Grice의 견해의 반례로서 非-자연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주장의 사례가 있는가?
3 Le Verrier는 Vulcan 행성(수성의 공전궤도 안쪽에 있다고 믿어졌던 실존하지 않는 작은 행성)의 존재를 믿었다. Vulcan은 허구적 대상인가? 우리가 살펴본바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 관한 다양한 설명방식들을 이 사례에 적용해보라.
4 非-실존적 대상 내지 허구적 대상에 대한 또 다른 아이디어는 그러한 대상이 실제로는 단지 마음-속-관념idea-in-one’s-mind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박들이 가해질 수 있다: (1) 동일한 허구적 대상인 Santa Claus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관념은 분명 각기 다르지만, 위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일은 불가능해야 한다. (2) Le Verrier는 Vulcan이 실존하는 이유가 그가 특정 사고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는 Vulcan이 실존하는 것은 천문학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논박은 효력이 있는가?
5 자연언어로 이뤄진 거의 모든 문장들이 맥락에 민감하다는 생각은 정말로 합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6 Dummett(과 Brandom)은 슬러적 현상이 추론주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옛날에 독일인에 대해 쓰였던 인종차별적 용어 ‘Boche’는 다음과 같은 추론규칙에 의해 그 슬러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Boche’ 도입규칙: ‘x는 독인인이다’로부터 ‘x는 Boche이다’를 추론한다.
‘Boche’ 제거규칙: ‘x는 Boche이다’로부터 ‘x는 다른 유럽인들보다 상스럽고 잔혹한 경향이 있다’를 추론한다.
이는 ‘x는 녹색이다’로부터 ‘x는 색깔을 지니고 있다’로의 추론이 허용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전략은 합당한가? 이 전략은 ‘Boche’가 부정 연산자의 범위 내부나 조건문의 전⋅후건에서 나타나는 경우를 설득력 있게 처리해낼 수 있는가? 여타 슬러 역시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7 다음 추론을 생각해보자:
(a) Smith가 오고 있다. 따라서 저 빌어먹을 Smith가 오고 있다.
(b) 저 빌어먹을 Smith가 오고 있다. 따라서 Smith가 오고 있다.
두 추론은 올바른가? 타당성(妥當性)validity을 ‘진리-조건의 보존preservation’으로 간주한다면, 위 추론들은 타당한가? 타당성 개념을 ‘정보information의 보존’으로 간주한다면 어떻겠는가?
주요 읽을거리
이번 장에서 다뤄진 주제들에 관한 주요 문헌 및 추가적인 문헌 목록은 다소 역사적⋅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작성되었다. 실상 일반적으로 우리 논의에 더 적합한 것은 추가적인 문헌들이지만, 일부 ‘고전적인’ 참고자료들은 1차적인 주요 문헌으로 분류될 법하다. 각 목록은 우선 주제별로 나뉜 뒤 한 주제 내에서 연대순으로(즉 해당 문헌이 저술된 시기에 따라) 작성되었다.
주장: Charles Sanders Pierce, 「믿음과 판단Belief and Judgement」〔1877〕; Gorrlob Frege, 「사고(思考)Thought」〔1918〕, 『Frege 選集The Frege Reader』(1997), 325-45쪽에 수록; Herbert Paul Grice, 「의미Meaning」〔1957〕 및 「화자의미와 의도Utterer’s Meaning and Intentions」〔1987〕, 『단어 사용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Way of Words』(1989), 213-23쪽 및 86-116쪽에 각각 수록; Michael Dummett, 「의미이론이란 무엇인가?(Ⅱ)What Is a Theory of Meaning?(Ⅱ)」〔1975〕, 『언어의 바다The Seas of Language』(1993b), 34-93쪽에 수록: John Rogers Searle, 『화행: 언어철학 小論Speech Acts: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1969); Donald Davidson, 「의사소통과 규약Communication and Convention」, 『진리와 해석에 관한 탐구Inquiries into Truth and Interpretation』(1984), 268-80쪽에 수록, 그리고 그의 『Davidson 주요 選集The Essential Davidson』(2006)도 참고할 것.
맥락-상대성: John Langshaw Austin, 『단어를 사용하여 어떻게 행위가 이뤄지는가』, 第2版(1962); Ludwig Wittgenstein, 『철학적 探究Philosophical Investigation』〔1953〕, 第4版.
허구적 대상: Gottlob Frege, 「뜻과 지시에 관하여On Sinn and Bedeutung」〔1892〕, 『Frege 選集The Frege Reader』(1997), 151-71쪽에 수록; 「논리학Logic」, 같은 책, 230-31쪽에 수록; 「논리학 입문Introduction to Logic」, 『遺稿集Posthumous Writings』(1979), 191-2쪽에 수록; Alexius Meinong, 「대상에 관한 이론The Theory of Objecs」, 『실재론과 현상학의 토대Realism and the Backgrounds of Phenomenology』(1981), 76-117쪽에 수록; Bertrand Russell, 「지칭에 관하여On Denoting」(1905), 479-93쪽.
추론주의: Wilfred Sellars, 「경험주의와 심리철학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1956), 253-329쪽; Robert Brandom, 『이유를 명시하기: 추론주의 序說Articulating Reasons: An Introduction to Inferentialism』(2000)
슬러: 어조 혹은 색채에 관한 Frege의 견해는 「뜻와 지시에 관하여」, 『Frege 읽기』, 151-71쪽 중 155쪽 및 「논리학」, 같은 책, 227-50쪽 중 240쪽 참조.
추가적인 읽을거리
주장 개념을 다루는 최근 문헌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Timothy Williamson, 「아는 것과 주장하는 것Knowing and Asserting」(1996), 489-523쪽이다. 또한 그의 『지식과 그 한계Knowledge and Its Limits』(2000)는 인식론과 연계하여 주장 개념을 고찰한다. 이 노선에서 영향력 있는 논문은 Keith DeRose, 「주장, 지식, 맥락Assertion, Knowledge and Context」(2002), 167-203쪽이다. 주장 개념을 다루는 논문들을 모은 탁월한 選集으로는, 편자들의 글 역시 포함된 Jessica Brown, Herman Cappelen 編, 『주장: 최근의 철학적 小論들』(2011)이 있다. Sanford Goldberg 編, 『옥스포드 핸드북: 주장The Oxford Handbook of Assertion』(출간예정)도 참고할 것.
허구적 대상을 가능대상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David Lewis, 「허구에서의 진리Truth in Fiction」에서 탐구되고 있으며, 이 논문은 『철학논문 選集 卷ⅠPhilosophical Papers VolumeⅠ』(1983), 261-75쪽에 再수록되었다. 新-Meinong주의는 Terence Parsons, 「허구적 대상에 대한 Meinong주의적 분석A Meinongian Analysis of Fictional Objects」(1975), 73-86쪽 및 『非-실존적 대상Nonexistent Objects』(1980)에서 옹호되었다. 창조주의 견해에 대해서는 Saul Kripke, 〔1973[: Oxford대학교에서 행한 John Locke 강연]〕, 『지시와 실존Reference and Existence』(2013)와 더불어, Anthony Everett, Thomas Hofweber 編, 『공허한 이름과 허구, 그리고 非-실존에 관한 퍼즐Empty Names, Fiction and the Puzzles of Non-existence』(2000) 및 Graham Priest, 『非-존재에 대하여: 지향성의 논리학과 형이상학Towards Non-Being: The Logic and Metaphysics of Intentionality』(2005)도 참조할 것.
맥락-상대성을 옹호하는 문헌으로는 Charles Travis, 『상황-민감성: 選集Occasion-Sensitivity: Selected Essays』(2008), Avner Baz, 『단어가 요구되는 때-일상언어철학을 옹호하여When Words Are Called For-In Defense of Ordinary Language Philosophy』(2012), Anne Bezuidenhout, 「맥락주의의 정합성The Coference of Contexualism」(2006)을 보라. 맥락-상대성을 공박하는 문헌으로는 Herman Cappelen, Erine Lepore 共著, 『둔감한 의미론: 의미론적 최소주의와 화행 다원주의에 대한 옹호Insensitive Semantics: A Defense of Semantic Minimalism and Speech-Act Pluralism』(2005) 및 좀 더 최근의 것으로는 Emma Borg, 『의미를 추구하기Pursuing Meaning』(2012)를 보라. 맥락주의와 대조되는 상대주의에 대해서는 John MacFarlane, 『민감성 평가: 상대적 참과 그 적용Assessment Sensitivity: Relative Truth and Its Applications』(2014)를 보라.
추론주의에 관해서는 Jaroslav Peregrin, 『추론주의: 왜 규칙이 중요한가Inferentialism: Why Rules Matter』(2013)을 보라.
Slur에 관한 Kaplan의 예비적 논의에 대해서는 David Kaplan, 「아야와 이런의 의미The Meaning of Ouch and Oops」(2004)를 보라. Christopher Hom은 「인종차별표현의 의미론The Semantics of Racial Epithets」(2008), 416-40쪽에서 슬러에 관한 영향력 있는 설명을 개진하는데, 그에 따르면 슬러性은 내용 층위의 현상으로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에 의해 제공된 인종차별주의가 지닌 경멸적인 내용이다. Elizabeth Camp는 「슬러적 관점(觀點)Slurring Perspectives」(2013), 330-49쪽에서 흥미로운 “관점적perspectival” 설명을 제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는 슬러를 사용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구성된 관점perspective을 지니도록, 슬러의 대상 및 그와 연관된 집단을 대하는 모멸적 태도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Daniel Whiting은 「그건 당신이 말한 게 아니라 당신이 말한 방식이다: 슬러와 규약적 함의It’s Not What You Said, It’s the Way You Siad It: Slurs and Conventional Implicature」(2013), 364-77쪽에서 매우 통찰력 있는 착상의 윤곽을 제시한다. Luvell Anderson과 Ernie Lepore이 「슬러적 단어Slurring Words」(2013), 25-48쪽에서 개진하는 견해에 따르면, 슬러의 해악성은 아무리 넓게 해석하더라도 ‘내용’의 측면에서 설명될 게 아니라 금지(禁止)prohibits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David Sosa가 편집한 『나쁜 말Bad Words』은 매우 고무적인 책이 될 것 같다(이 책을 집필하던 당시에는 출간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