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역사 크로노스 총서 20
데이비드 벌린스키 지음, 류주환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4월
평점 :
절판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어가며 고전수학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적당한 교양서이다 원서 제목에도 ‘역사‘라는 단어가 들어가긴 하지만 정통적인 수학사 서적이라 보긴 어렵고, 고전수학에서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이론이나 개념을 몇 선별하여 그와 얽힌 에피소드적 사건들을 곁들이면서 핵심적인 착상이나 내용을 평이하게 풀어내는 식이다 저자가 철학으로 학위를 받은 이력이 있어서인지 철학적, 자연과학적 의의나 연계점도 초보적인 수준에서나마 간간히 언급하고 있어, 수학적 사안들이 무미건조하게 나열된 통상적인 교양서들과 달리 지적인 자극과 긴장감을 적당히 안겨주면서 텍스트로서 읽는 재미도 느끼게 해준다 수식이나 형식언어는 최대한 배제하며 일상언어 위주로 논의를 이어가기에, 학창시절 배웠던 수학지식을 다 까먹은 일반성인은 물론이요 고등학생 연령의 청소년들도 흥미롭게 즐기며 읽을 수 있겠다 다만 정보의 양으로 보나 질적인 깊이로 보나 구매소장하여 여러번 활용할 만하지는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 가볍게 일독하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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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chyoung123 2026-05-16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의 글을 읽고 궁금한 점이 생겨서 질문드립니다.솔 크립키 철학에 관심이 생겨서 유튜브 ˝논리학당˝ 채널을 통해 명제논리와 1차 술어논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상들로는 완전한 이해가 되는 것 같지 않아서 논리학 서적을 구매하려고 하는데, 혹시 추천해 주실 만한 공부 순서가 있을까요?

depaysment 2026-05-16 20:24   좋아요 0 | URL
1. 우와! ㅎㅎ 안녕하세요! 질문 맥락으로 추측건대 온라잉이든 오프라인이든 실시간으로 전문가와 상호작용하며 지도받으실 수는 없는 실정에서, 비판적 사고와 논술 류라든가 교양 수준 비형식논리가 아니라 기초 형식논리에 관심하고 계신 것 같네요 사실 이분야는 전문가에게 면대면으로 지도, 교수받으며 연습해나가는 게 가장 효율적이고 안전하긴 하지만, 현실 여건이 안된다면 전문교재로 독학하면서 유튜브 등 다른 컨텐츠를 활용해서도 충분히 숙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언급하신 채널은 저로선 처음 알았는데 대충 훑어보니 제대로 된 전문가분이 정석적이면서도 알찬 내용들로 영상 구성해서 채널 운영하고 계신 것 같아 저도 관심이 가게 되네요 ㅎㅎ 근데 그것만르로 뭔가 이해가 미진하다고 느껴지신다면, 그리고 아직 초입 단계로서 전문교재를 한 번도 접해보신 적이 없다면, 일단은 유튭영상이나 파편적인 온라인 자료보다는 체계적으로 짜여진 교재나 텍스트를 우선적으로 통독하시며 개념 익히고 숙달해 나가시는 게 가장 좋다는 면에서, 책을 구매하시기로 하신 결심은 아주 좋은 방향설정인 거 같아요 ㅎㅎ


2. 근데 일단 변명조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오래전 대학시절 논리학 강의에서 명제논리와 일부 술어논리만  배워본 게 전문가에게 수학한 경험 전부이고 이후로는 혼자 이런저런 단행본들 뒤적여가며 독학한바, 양적으로도 깊이 측면에서도 전혀 전문가 수준이 아니라서요...ㅎㅎ 그러니 지금 드리는 말씀은 그냥 취미수준 독서에 기반한 간략한 방향제시 정도로만 받아들이신 채, 어떤 텍스트가 되었든 실질적으로는 혼자 열심히 읽고 컨텐츠도 찾아보고 반복숙달하시면서 구체적, 세부적인 방향과 순서는 스스로 차근차근 확립해나가시길 추천드려요 현실적인 논리, 논술 준비라든가 논리학적 지식을 요하는 공인 시험같은 거에 급박하게 대비하시는 게 아니라, 저처럼 취미 차원에서 논리학에 관심하시는 거라면, 체계적이고 정석적인 공부순서나 방향에 너무 얽매이지 마시고 당장은 이해가 안가시는 지점에서 너무 초조해하지도 마시고, 이해가 가면 가는 대로 정리 및 메모해보고 안가면 안가는 대로 언어나 맥락만이라도 머리에 욱여넣으면서, 한 달이든 일 년이든 꾸준히 유관 저서나 자료들을 탐색하고 읽어나가시다보면, ‘아 그때 유튭에서 본 게 이런 얘기였구나‘ 하면서 이해의 결절점들이 자연스레 해소되는 수준에 도달하실 수 있을 거예요 ㅎㅎ 

3. 이런 변명과 대략적인 조언을 전제로 실제 텍스트를 말씀드려보자면 이병덕의 ˝코어논리학˝이랑 최원배의 ˝논리적 사고의 기초˝가 독학하기에도 무리 없는 가장 좋른 선택지인 거 같아요 ㅇㅇ (손병홍의 ˝논리학˝도 옛날부터 눈여겨봐오긴 했는데, 아직 제가 읽어본 바가 없어서 이건 제외...ㅎㅎ) 둘다 번역서가 아니라 국내 전문가가 우리말로 쓴 교재이고, 내용의 양과 질, 연습문제 수준과 다양성, 설명의 난이도나 친절함, 구성의 깔끔함 등 대부분의 평가지표상에서, 개인적으로는 동등한 수준으로 좋은 교재들이라믄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 굳이 사소한 차이점을 꼽자면 최원배의 것이 양적으로 약간 더 많은 내용(명제논리 결정절차로서 진라표 방법 이외의 진리나무방법 및 메타논리적 증명 일부)을 담고 있고, 둘 다 논리상항의 도입/제거 규칙을 통한 자연연역법을 채택하되 그 표기방식이 다르다는 것 정도에요 ㅇㅇ 근데 이병덕이 채택한 피치증명법이 개인적으로는 입문자게에 피로ㅛ감이 덜힐 것 같다 생각하는 편이어서, 구매소장하여 반복적르로 활용할 물건으로 둘 중 하나만 꼽자면 이병덕의 것을 최종적으로 추천드립니다! ㅎㅎ

4. 혹여 논리학 초심자이신데 앞의 책들이 너무 전문교재같고 교과서 같아서 약간의 플러스알파가 아쉬우시다면 송용진, ˝수학자가 들려쥬는 진짜 논리 이야기˝ 이거 가볍게 읽독하시면서 워밍업 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테크니컬한 교재가 아닌 교양수준 논리학 관련 서적중에서는 이게 가장 재밌고 유익하고 덜 오도적이더라고요 ㅎㅎ (다만 이건 구매소장보다는 빌려서 일별해보시기를 추천!)

5. 여하간, 많은 철학자들이 얘기하듯 논리학(그리고 수학)도 엄연히 하나의 언어인 만큼,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듯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데는 별다른 왕도가 없어 실질적인 반복숙달이 느리지만 빠른 길인 만큼, 너무 초조해하거나 답답해하시지 말고 유관 텍스트나 자료들 꾸준히 접하시면서 논리학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ㅎㅎ 워낙 마이너하고 비인기인 분야라 단행본도 잘 안나오고 하는 마당에, 이렇게 관심사가 겹치는 분을 만나면 반갑고 즐겁고 신나고 그래요 ㅎㅎ 논리핫 연습 안한지 이년 째가 다 돼가는데, 말쓴해주신 채널 시간 날 때 보면서 저도 다시 논리학 연습 많이 해야겠어요 ㅋㅋㅋ 문의답글 주셔서 감사드리고, 모쪼록 공부에 진척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Porchyoung123 2026-05-16 2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추천해주신 책들부터 시작하여 공부해볼게요!!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현대미술계의 진짜 모습
오자키 테츠야 지음, 원정선 옮김 / BOOKERS(북커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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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독 후 돌아보니 서두에 실린 한 미술평론가의 추천글이 책의 특성과 장점을 아주 잘 요약해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 미술이 "무엇보다도 미술이 산업화된 시대의 미술"이라는 현실에 착안하여, "그 사조와 미학의 전개"를 소개하는 데에만 치중하는 게 아니라, "시장이나 제도, 관계 전문가들의 역할이나 역학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현미술의 틀 안에서 다채롭게 펼쳐지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여러 영역들의 모습을 개관"하는바, "매우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알찬 안내서"이다. 목차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나듯 작품, 작가, 사조 내적인 흐름이나 논리보다는, 미술시장과 큰손 컬렉터, 미술관, 비평계와 이론가, 큐레이터와 전시, 예술가와 관객 등에 두루 초점을 맞춘다. 이를 통해 추출되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정보를, 미술 저널리즘 현장에서 활동하면서 저자가 쌓아온 지식과 길러온 통찰력을 곁들여 제공한다. 미술계 외부의 일반인들이 파악하기 어려운바 동시대 미술계 전반의 현장생리에 대한 대략적인 시선을 갖추게끔 돕는 안내서 역할을 십분 해내는 동시에, 책의 제목인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저자 고유의 답변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방향으로 고민하게끔 사유를 고취해주기도 한다. 요컨대 저자 스스로의 말처럼 "가십"과 "견해"를 두루 제시하되, "견해는 말할 것도 없고, 가십거리도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요소"라는 스탠스에서 쓰였다는 특성이 여실히 묻어나는 책이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18세기 말 이후 미술사나 사조흐름 및 동시대 미술의 여러 작품과 경향을 잘 모르더라도, 양적인 부담감만 이겨낸다면 흥미롭게 읽어가면서 미술계 관련 정보에 대한 저자의 폭넓고 상세한 서술을 통해 현대미술이라는 분야에 대한 그림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의 토대가 된 저자의 과거 글들이 2015-17년 사이의 글들이어서인지, 80년대 이후 동시대 미술계에 대한 정보 비중이 높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장점이라 여겨졌다. 작품이나 사조 내적 논리에 대한 논의 비중이 크지 않다보니, 역사적 평가가 분분할 수밖에 없는 동시대 미술에 대해 이론적 관점이나 틀을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 비교적 최신 정보나 담론들을 가벼운 통찰력이나 평가와 곁들여 제시하면서 동시대 미술계 현황에 대한 감각을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키워주는 효과가 있다. 오랜 기간 미술 저널리즘에서 활동한 저자의 글솜씨가 원체 탁월한 탓인지 역자의 번역실력이 준수한 탓인지 둘 다인지, 다채로운 어휘를 구사하면서도(읽으면서 사전을 검색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난해하거나 지저분하지 않고 유려하게 읽히게끔 만드는 문장력 역시, 이 책을 단순한 정보매체로서가 아니라 읽고 즐길 수 있는 텍스트로 꼴짓는 데에 일조하는 장점이다. 미술서적임에도 도판이 흑백인 점은 아쉬운 사항일 수 있으나, 전술하였듯 미술사나 사조가 책의 구심점은 아니라는 특성상 사소한 성격의 단점이라 생각한다. 정 아쉬우면 정윤아, "미술시장의 유혹"; 켈리 그로비에, "현대미술강의"; 피터 칼브, "1980년대 이후 현대미술" 정도를 함께 일독하길 추천해본다. 개인적으로는 그 책들을 읽어놓은 경험이 이 책을 읽고 즐기며 더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반면 긴 기간 연재되었던 글들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어낸 데에서 기인하는바 통일적인 모양새가 좀 떨어진다는 느낌은 좀 더 유의미한 단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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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투성이인 사람으로 자라버렸구나

십 년만 되돌린다면 그 모든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으며 다시 자랄 수 있을까 눈 뜨고 입만 벌리면 푸르딩딩 멍든 살점들마냥 어버버 쏟아지는 죄의식들, 한새벽까지 잠 못들면 여직껏 소화시키지 못해 푸더덕 게워내는 잘못의 시간들, 붙들고 통사정하며 용서를 구할 만한 옷자락도 없는 통한에 하릴 없이 깨먹은 술잔들ㅡ열흘, 열 시간, 혹여 십 초를 되돌린다 해도, 내가 받은 사랑과 보살핌 만큼한 기여를 세상에 유의미하게 덧칠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악마는 멀리 있는가

- ‘19.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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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년 전 초여름 일이다. 엄마가 오토바이로 신문배달을 하다 넘어져 왼손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떨어졌을 때였다 아프고 겁나는 와중에도 엄마는 피투성이 마디 하나를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다 부모님 주변 누군가 절단된 데 봉합 신경치료는 평택 모모한 병원이 알아준다길래 그 곳으로 갔다 마침 2학년 여름방학 초엽이던 나는 달포 조금 넘는 동안 병원에서 엄마와 지냈다 보르헤스와 데리다를 많이도 읽던 날들이었다 8인실 넓은 창으로 지는 초여름 오후 태양이 그리는 동그라미가 나만의 알렙 같다고 느꼈다 매일 아침 회진을 올 적마다 모호하거나 별 정보적이지 않은 허툰 말만 되뇌던 주치의는, 결국 신경이 살아나지 못해 다시 절단수술을 해야겠다는 통첩을 팔 월 중순에야 내뱉었다 작으나마 신체 한 부위가 없이 살아야된다는 생각에 엄마는 손가락 마디 떨어지던 날보다 더 섧게 울었다 그 해를 비롯, 몇 녗간 가을 겨울만 되면 엄마는 중앙시장서 장봐온 껌은 봉투를 왼손에 들질 못하였다 마디 없는 절단면이 시렵다 했다

2. 재작년 12월 말일이자 딱 연말이던 낮, 오토바이 사고로 발목 골절을 당했다는 전화를 아빠에게 받았다 코로나 검사로 아산 충무병원에 갔다가 별 문제 없으면 천안 충무병원으로 이동한다 하였다 늦오후 즈음에야 코로나 음성이 확정되어 나는 해 져가는 매선 바람에 충무병원으로 가 응급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 관련 사항은 아빠를 실어온 사설 응급차 관계자가 알려주었고 응급실 접수처 측에도 그리되었다 병실을 안내받고 올라갔는데, 코로나 검사결과가 어떻게 됐냐는 질문을, 간호사를 비롯 병원 내 서로 다른 관계자들이 도대체 세 번 씩이나 묻는 꼬라지를 보며, 여기는 이런 사소한 사항에도 일을 개떡으로 처리하는 곳이구나 바로 직감이 왔다 사흘 뒤 수술 집도가 예정된 의사에게 내려가 동의서를 쓰기 앞서 아빠의 다친 상태에 대한 설명과 수술 계획을 듣는데, 대충 여차저차 배치된 이런 형태의 뼈 두 개 이상에 발생한 복합골절을 필론식 골절이라 한다 했다 방금까지 논리학사를 읽으며 필론식 조건언에 대해 읽다 내려온 나는, 필론식 골절 수술이 무척 까다롭고 실패율도 대체로 높단 말에, 논리학 강의에서 필론식 실질 조건문의 진리조건을 처음 배우던 때처럼 긴장이 되었다 이레 조금 지나 수술날, 수술이 끝난 직후 의식이 돌아온 아빠는 동물처럼 울부짖으며 아파했다 수술 동의서에서 동의체크했던 추가 마약성 진통제를 간호사에게 신청하려 중앙으로 가 말하니, 집도 의사의 구체적인 지시가 있어야는데 지금 바로 연속으로 다른 수술을 들어가 당장은 지시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란다 이게 도시 뭔 쌉똥같은 소린지, 이미 동의체크한 사항이면 미리 지시받고 준비를 해둬야 하는 거 아닌지, 일을 왜 이따구로 처리하는지 따져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렇게 아빠가 세시간 여를 울부짖는 소릴 듣고 나서야 진통제가 왔다 주변에 개 웬수같은 새끼가 혹여 손모강지나 발모강지라도 뿌러지면 반드시 천안 충무병원을 추천하겠다고 저주스런 마음으로 다짐짓했다.

3. 병원을 동네 근처로 옮기고, 재활과 물리치료를 받고, 퇴원을 하고 나서도, 한달 두달 세달이 지나도록 아빠 발목의 붓기는 여름 초입에 시장으로들 나오는 통연근마냥 땡땡하게 부어만 갈 뿐 가시질 않았다 미심쩍었던 아빠가 다시 충무병원을 찾았는데 당시 집도했던 의사는 그만 두고 새 의사가 와 있었다 사진을 찍어보고 난 그 의사가 하는 말이 ‘수술이 안 되었다‘ 이런 표현을 썼다 작은 뼛조각 하나가 봉합되지 않아 염증이 발생해 속에서부터 난 부종이 계속되어온 것이다 분명 수술 직후 확인했던 사진은 뼈 모양새가 아주 온전하고 이렇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된거냐는 아빠의 물음에, 겉모양과 다르게 애초에 수술이 제대로 안된 케이스라 했다 한다 그 얘길 들은 나는 몇 달포 전의 저주스런 마음을 더욱 강하게 되새김하고는 다가동에 지진이라도 나서 병원 건물이 폭삭 무너지길 신에게든 악마에게든 간절히 염원했다 결국 그 뼛조각은 그 의사가 써준 추천서로 순천향 병원에서 빼게 되었다

4. 아빠 사고나기 전 겨울 초입에 엄마는 눈이 자꾸 시리고 눈물이 나서 버들육거리에 있는 큰 안과를 찾아갔다 1층 안경집만 가본 바 있던 나는 접수실부터가 삐까번쩍한 걸 첨 보고 놀랐다 진료를 금방 마치고 내려온 엄마에게 어찌됐냐 물으니, 식당 일을 그만두는 수밖엔 없다는 말을 들었단다 식당일 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종일 눈앞에 섰는 가스불 때문에 으레 이렇게 눈시리고 아픈 거 세상천지 삼척동자 해남 윤씨 종갓집 막냇며느리 배냇딸도 다 아는 사실인데, 하나도 의학적이지 않은 그딴 개쌉소리를 진찰결과랍시고 내뱉으며 이 큰 건물로 안과 짓고 퍼질러 앉아 의사선생님 소리 들을라 치면 까짓거 나도 다 하겠다며, 삐까번쩍한 병원건물 뒤편 쥐좆만한 주차장에서 차를 돌리며 쌍욕을 퍼부었다

5. 아침에 일어나 앉자마자 목과 코 사이가 따끔거렸다 바로 감기임을 알아챘지만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닌 거 같아 출근을 했다 오전 내내 라인에 서서 물건 받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더 버티다 병 키우지 말고 오후엔 쉬자 마음먹어 부장님께 조퇴를 구하고 나왔다 숙소 근처 달랑 하나 있는 의료원이 신통찮다는 말에, 차로 삼십 분을 달려 백암 쪽으로 갔다 가보니 역시나 신속항원검사부터 하는데, 결과 뜰 때 까지 병원 밖 뒷골목에서 기다리다 들어가니, 코로나는 음성인데 이틀 후에도 상태가 호전이 안 되면 다시 오라는 말만 하고 진료가 끝났다 음성이어서 다행인 거도 알겠고 잠복기 고려해서 다시 오라는 말도 이해를 하겠는데, 정작 지금 내가 아파서 찾아온, 이틀 후에도 호전이 안 되면 다시 와야하는 바로 그 증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은 일절 없다 어디가 가장 아픈지 무엇이 가장 심한 증세인지 평소와 다른 부수적인 신체 변화는 없는지 아무 묻는 것 없이, 압설막대로 혀 눌러 목구녕 한 번 들여다보는 일 없이, 그저 처방전을 받으란다 으레 이런 식으로 처리해온 동네 병원이겠거니 싶다 환자가 ‘감기로 왔어요‘ 그러면 그 환자가 앓는 감기만의 특수성을 상세히 알아내려는 여하한 노력도 없이, 그저 이적진 처방해추면 귀납적으로 높은 확률로 잘 들어왔던 고만고만한 약들 띡 처방해주면 그만인 그런 형편없는 여러 동네 소아과들 중 하나였던 것뿐이다 몸살에 운전하느라 지친 나는 역시 또 따져 묻는 일 없이 병원을 나섰다 약 먹고 오후에 푹 자고 일어나니 괜찮아지긴 했지만, 모든 학문과 그 응용에서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답을 구내해는 과정이다

6. 일련의 크고작은 일들을 겪으며 나는 의사 및 의료 관계자란 존재자들을 일절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 믿는 것 이상으로 쌍욕을 퍼붓게 되었다 인간 신체를 탐구하며 그 기능적 결함을 해결하고자 분투해온 의학적 노력이 쌓아올린 지식 자체는 분명 찬란하고 대단한 것이지만, 그 지식을 여하한 창의성도 없이 기계적으로만 십 몇년을 달달 대가리에 쳐 욱여넣어 의사면허 받고 병원 하나 떵 차려놓고는 그저 매일 똑같은 모양새로 처방해내는 지식 소매상에 지나지 않는 의사들의 행태가 너무나 혐오스럽다 하나도 전문적이지 않아 보이는 형편 없는 똑똑한 멍청이들이 구할이다  하기사 찬란한 지식에 기생하되 그 자체로는 찬란하지 않은 후루꾸들 득실대는 분야가 의학 뿐이겠냐마는 말이다

- ‘22.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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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철학 - 현대철학시리즈 15
수잔 하크 / 종로서적 / 198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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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하크, 논리철학, 김효명 역, 종로서적, 1984, 54쪽(제4장, 양화기호;1절, 양화기호와 그 해석)

논리철학 연습 및 단상
: 콰인은 왜 양화사에 대한 대상적 해석을 지지하였는가?

1. 여타 철학자들이 그렇듯 콰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 역시 매우 많다 그 유명한 ‘gavagai‘ 사례에 의한 번역 불확정성 논제에서부터 지시적 불투명성 논제, 의미 회의론자, 외연주의자, 자연주의자, 철학-과학간의 연속성 논제, 인식론의 자연화 논제, 정합론 노선의 기수, 유명론자, 실용주의자, 극단적 경험론자, 논리실증주의 타도의 선봉장, 상대주의적 존재론 논제, 존재론적 개입 기준 논제, 좀 더 전문적인 데로 들어가면 양화양상논리학과 본질주의 대항마의 대부, 실용주의적 논리주의자 정도ㅡ이 모든 것 중 유명론자라는 타이틀과 양화사에 대한 대상적 해석은, 나처럼 철학적으로 미욱한 사람들에게는 일견 서로 잘 부합되지 않을 듯한 느낌을 준다 모든 개념 내지 언어에 대한 유명론적 관점을 견지한 그가, 왜 하필 존재 양화사의 속박변항의 값으로서 ‘대상‘이라는 형이상학적 냄새가 묻어 있는 것을 선택한 것일까

2. 양화사의 대상적 해석에 따르면, 콰인의 그 유명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 양화사의) 속박 변항의 값이 된다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변항의 값이 되는 것은 대상이다 여기서 콰인이 말하는 ‘대상‘은 결코 형이상학적 내지 본질주의적인 대상 또는 실체일 수 없고, 자연주의자로서 그가 존중하는바 ‘자연과학에서 말해지는 대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쯤에서 일상적인 철학적 직관에는 다소 아이러니하게 여겨지는 귀결이 따라나온다 철학-과학 간 연속성을 강조하는 자연주의자로서의 콰인이 존재를 결부시키고자 하는 것, 즉 존재양화사의 양화적 개입을 허용하고자 하는 것은, 유명론자라는 타이틀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항에 대입되는 단순한 벌거벗은 이름이 아니라 ‘자연과학이 이론적으로 규정해주는 <이름을 갖는> 대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대상‘이란 ‘자연과학에 의해 유명론적 경험주의적인 명명식이 이미 치뤄진 대상‘으로 이해되어야지, 그 어떤 형이상학적 본질주의적 함축을 갖는 일상적인 철학적 직관에 의거한 대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 양화사에 의해 속박된 변항의 값은 이미 자연과학에 의해 대입적 해석이 이뤄지고 난 이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3. 결국 콰인이 양화사에 대한 대상적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는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신뢰, 정확히 말해 자연과학 층위에서 이미 이뤄져 있는 대입적 해석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대상적 해석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자연과학자들이 베푸는 세례식으로서의 과학적인 대입적 해석부터가 옳은지, 즉 그의 포괄적인 자연주의적 태도 자체가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를 문제삼아야 한다

4. 나는 비판의 의도가 아니라 도통 모르겠다는 의문에서 시작하였기에, 콰인의 대상적 해석을 논하기 위해 그의 자연주의까지를 논할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외려 콰인이 이런 식으로 언어와 논리에 대해서까지 자연주의적 견지를 개입시키는 것이 한편으론 매우 인상깊고 다른 한편으론 작금에 대해 시의적절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농 식의 존재론적 빈민굴에 대해 그가 가졌던 적대감은, 언어나 개념을 선점함으로써 세계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과 정치권력을 선점하려는 작금의 반지성적이고 수사주의적인 세태에 대한 나의 적대감과 매우 공명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리철학 입문˝에서 자신의 기술구 이론을 재론하는 와중에 ‘실재에 대한 건전한 감각은 논리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한 러셀의 근본취지를 계승하여, 러셀의 기술구이론을 모든 고유명에 확장한 뒤 거기 나타나는 존재 양화사에 속박된 변항의 값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자 했던 콰인의 관점은, 지시체를 결여하는 공허한 기술구를 거리낌 없이 휘두르는 수사학적 깡패들의 헛소리에 대항할 수 있는, 보수적이지만 ‘건전한‘ 무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수사력에 쉬이 넘어가는 게 현대인이지만, 그만큼 현대인들은 외려 과학에 대한 ‘건전한 감각‘을 이론적 원리적으로라도 존중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한 감각을 호도한 채 단지 언어나 개념만을 선점하여 자신의 존재론적 양화문에 자신이 정착시키고자 하는 이름을 대입한 뒤 그 이론을 세계에 대한 참된 표상인 양 퍼뜨리려는 사이비 학자들 운동가들 정치인들 등등을 물리치기 위해선, 동일한 층위에서 대입될 수 있는 단순한 이름 내지 언어를 제시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존중하고 합의할 수 있는 이론이 존재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그러한 이름을 제시해야 한다 노이라트의 말을 빌어 우리는 우리가 탄 언어라는 배를 벗어날 수 없다 말한 콰인에게서, 정글 원주민이 발화한 ‘가바가이‘는 고사하고 이웃집 아주머니가 발화한 ‘토끼‘의 지시체마저 알 수 없다 말한 콰인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저 멀리 자신이 딛고 있는바 내 것과 똑같은 배를 숨겨놓고는 ‘가바가이‘를 와쳐대며 네 배를 버리고 그기로 오라고 강요하는 헛소리쟁이들을 물리칠 수단이, 존재 양화사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대상적 해석이라는 점일 것이다

5. 콰인에게서 박사학위논믄 지도를 받은 d.루이스가, 저 멀리 가능세계에서 자신만의 상대역-배를 타고 있는 자신의 상대역을 찾아나선 아이러니함은, 일단 제쳐두기로 한다

- ‘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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