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철학 ㅣ 고려대학교출판부 인문사회과학총서
여훈근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0년 6월
평점 :
품절


1. 책의 구성, 서술 및 논의의 방식과 깊이, 좋다고 할 수 없는 문장력, 더 나은 대안저서의 존재 등 많은 면에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진리론이 다뤄지는 1장을 제외하면 모든 장들이 기발표된 논문들을 수록한 것이기에, 당연히 단행본으로서는 통일성이 떨어지는 구성과 모양새이다. 전반적인 구성이 파편적이더라도 개별 챕터의 논증이나 해설이 내적으로 탄탄하게 구심을 갖췄다면 읽는 효용이 있겠으나, 각 장의 내용마저도 과거 논의나 연구성과를 그저 파편적, 사후적, 요약적으로 보고하는 식이어서, 해당 주제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개별사안들을 일별하는 데에만 그칠 뿐 철학적, 이론적, 논증적으로 확장성과 깊이감 있는 이해를 도모하기 어렵다. 이 책을 위해 새로이 쓰였다는 1장마저도 커크햄, 수잔 하크, A. C. 그렐링 등의 2차저술 내용을 파편적으로 요약 및 제시하는 수준이다. 철학적으로 쟁점이 될 만한 사안에 대한 논증(그마저도 저자 고유의 논평이 아닌 여타 학자들의 논증)이 간혹 제시될 때에도, 그 구성과 도출과정이 추정상 빈약하거나 도약이 있거나 맥락적으로 잘못된 듯한 추론과정을 노정하고 있어서, 결국 해당 쟁점이 어떤 근거에서 어떻게 해결된다는 건지 유의미하게 이해할 수 없다. 


2, 가령 타르스키의 의미론적 진리론에 가해지는 비판을 살펴보는 대목인 105쪽엔 이런 단락이 나온다:


 (가) 타르스키는 의미론적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참이다"라든가 "거짓이다"를 언어의 등급에 따라 상대화시키고 있다. 그는 문장들에 대한 참을 정의하였으며 동일한 문장이라 하더라도 상이한 언어에서는 상이한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상이한 언어에서 상이한 진리값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언어 L에서 참"이 항상 언어 L이 아니라, 언어 L의 메타언어의 술어라는 주장을 독립적으로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못된다는 것이다. 


(두 번쨰 문장은 후술할 '이론가 a는 명제 S라는 것이다' 꼴의 비문 내지 어색한 구문이다.) 언뜻 읽어서는 문제가 무엇이고 그것이 문제인 이유가 무엇이라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지막 문장엔 참조된 수잔 하크의 저서와 그 원서 쪽수가 각주로 처리되어있는데, 한국어 역본(김효명 譯, "논리철학", 종로서적, 1984.)에서 해당 대목으로 추정되는 부분(148-9쪽)을 찾아보면 저자가 하크의 해설을 오독했거나 최소한 맥락에 맞지 않게 활용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나) 타르스키는 참이 어떤 언어에 상대적으로만 정의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타르스키가 정의한 것은 '참이다'가 아니라 'O에서 참이다'란 것이다. 이렇게 정의했음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정의는 문장(명제와 같은 언어 외적인 것과는 다르게 구문론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에 적용되어야 하며, 동일한 문장이 한 언어에서는 참이지만 다른 언어에서는 거짓 또는 무의미할 수가 있다는 것이 그 첫째 이유요, 대상언어, 메타언어, 메타-메타언어 등으로 언어를 위계적으로 구분하여야만 의미론적 역설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 그 두 번째 이유이다. 


즉 타르스키가 진리술어를 상대화한 이유는 (i) 진리술어를 문장의 속성으로 귀속시키고자 하였는데, 문장 자체의 의미론적 작동방식이 언어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점, (ii) 거짓말쟁이 역설과 같은 의미론적 역설을 피하기 위한 메타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 두가지로 추려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생략했지만 이 인용문의 전후맥락은 타르스키의 진리정의가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객관적이라 할 수 있는지, 그래서 어떤 점에서 진리 대응론의 핵심 착상을 다소 보유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와 관련된 포퍼의 논평을 살펴보는 대목이다. 저자가 (가)에서 정리한 바와는 달리, 문장의 의미론적 작동방식의 상대성이 진리술어를 상대화시키는 데에 이론적으로 독립적인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식의 논평이나 이를 결론으로 도출하는 구체적인 논증은 등장하지 않는다. 혹여 우호적으로 해석해서 저자가 하크의 서술을 오독한 것이 아니라고 판정한다 쳐도, 각주처리는 (가)의 두 번째 문장에 한 뒤 마지막 문장의 논평에 대해서는 저자 고유의 논증을 별도로 제시했어야 한다. 105쪽의 전후 맥락 어디에서도 그런 논증이나 논증의 근거가 될 법한 전제에 대한 암시는 일절 제시되지 않는다. 

 해설이든 논증이든 이런 식의 빈약한, 혹은 맥락상 부적합한 서술들이 책 전반에 걸쳐 반복되다보니, 독자는 애당초 홀로 유의미하게 재구성할 수 없을 법한 내용을 추측해 보느라 시간을 허비하거나, '내가 모르긴 하지만 유의미한 뭔가가 있겠지' 하는 잘못된 착각만 지닌 채 그냥 넘어가버리게 된다. 그러니 완독을 꾸역꾸역 하고 나서도 최종적으로는 깊이 있는 소득이 없는 독서가 되어버린다.


3. 내용이나 서술 상의 이러한 단점은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저자의 문장력이나 구문실력과 결합해 텍스트로서 읽는 효용마저 현저히 떨어뜨린다. 대표적인 것으로 앞서도 언급한바, 임의의 학자 x와 이론적 명제 P에 대해, 당면 맥락에서 결정적인 사안으로서 x의 주장 S를 강조하고자 할 때, '중요한 것은 x가 S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x에 따르면 S라는 것이다', 'x가 주장하는 요지는 S라는 것이다' 등으로 써야 할 곳에서, 'x는 S라는 것이다'와 같은 비문이 책 전반에 걸쳐 계속된다. 또한 내용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전술했듯 파편적이고 단속적이다 보니, '따라서, 그러나, 그런데, 하지만' 등의 접속사들도 논리적이고 유기적인 글의 흐름을 조성하기보다, 연결성 없는 내용들을 적절한 맥락 없이 병렬적으로 이어붙이는 데에만 쓰인다. 이 책이 다루는 내용들의 일부를 더욱 평이하고 매끄럽게, 혹은 심층적으로 능숙하게 다루는 여타 저서들이 다소 있다*는 점에서도, 절판되기까지 한 이 책을 굳이 선택할 필요성은 더욱 없어 보인다. 평점에 별 하나를 더 보태게 된 사소한 장점을 굳이 하나 꼽자면, 논문이 아닌 여타 단행본에서는 보기 힘든 다치논리, 시제논리, 규범논리 등의 일부 형식체계 및 그 의미론이 개관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다만 개인적으로 배경지식이 부족해 해당 부분들은 거의 건너뛰다시피 훑기만 했다).


* 야마오카 에쓰로, "거짓말쟁이의 역설", 영림카디널, 2004(절판).

  A. C. 그렐링, "철학적 논리학", 북코리아, 2023.

  수잔 하크, "논리철학", 종로서적, 1984(절판).

  송하석, "거짓말쟁이 역설에 관한 탐구", 아카넷,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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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 Soames, 『철학적 분석(2卷)』, 9章 '언어사용과 대화의 논리', 2節 'Grice의 핵심 착상: 대화의 논리' 中)



(前略)



Grice는 특수화된 대화적 함축(含蓄)(특수대화함축)particularized conversational implicauture과 일반화된generalized 대화적 함축(일반대화함축)을 대조한다. 일반대화함축이란 발화자가 대화적 준칙 내지 협조원리를 준수한다고 가정되는 그 어떤 통상적인 맥락에서든in any normal context 발화된 문장에 의해 전달되는 함축이다. 이의 적절한 사례이자 그 자체가 이론적으로도 흥미로운 사례로는 A 또는 B(A이거나 B이다) 형식으로 표기되는 선언문을 들 수 있다. 형식논리에서 선언문은 엄밀하게 진리-함수적인 연산에 따라 취급된다. 즉 논리학자가 사용하는 A 또는 B는, 두 선언지 중 하나 혹은 양자 모두 참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며, 양자 모두 거짓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거짓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또는(이거나)이 일상언어에서 사용될 때 갖는 의미meaning와 논리학에서 사용될 때 갖는 의미가 동일한지에 대해 종종 의문을 갖고는 했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일상언어에서 A와 B로 이뤄진 선언문을 주장할 경우 대체로 우리는 A가 참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 혹은 B가 참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런 문장을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A와 B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매우 낮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경우 선언문을 사용한다. 그 경우 우리는 비록 A와 B 각각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더라도, A가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B는 참일 것이며 또한 B가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A는 참일 것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갖고 있는 셈이다. 이를 다르게 말해보자면, 선언문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일상대화에서 주장되는 근거는 일반적으로 진리-함수적인 근거와는 다르다는 것, 즉 선언지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주장할 근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일상에서 선언문이 사용될 때 매우 흔하게 관찰되기에, 또는(이거나)이 형식논리에서 사용될 경우에 갖는 의미의 일부는 아닌, 일상언어에서만 갖는 의미의 특징을 구성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Grice는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를 위한 논증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일상언어에서 또는(이거나)의 의미가 지닌다고 추정되는 특성을 Grice는 의미의 특수성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선언문이 전달하는 일반대화함축으로 설명해낸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A 또는 B를 주장하되, 자신이 협조원리 및 이를 구성하는 다양한 준칙들을 위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이에 더해 우리가 그 사람의 발화에서 사용된 또는이 논리학자의 또는과 동일한바 해당 선언문의 진리조건을 형식논리에서 주어지는 표준적인 진리조건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해보자. 이러한 가정 하에서 보자면 화자가 만든 진술 즉 A 또는 B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은 단독으로 A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보다 약하고 덜 정보적이다weaker and less informative. 이는 선언문 전체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이 하나의 선언지 A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에 의해 함의되지만entailed 그 逆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A 또는 B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은 B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보다 약하고 덜 정보적이다. 대화준칙의 첫 번째 조항인 量의 준칙에 따르자면 화자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하고 가장 정보적인 진술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해당 진술이 해당 대화의 맥락상 적절하다는 가정 및, 화자가 적절한 증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은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質의 준칙과 같은 여타 준칙 역시 화자가 준수하고 있다는 등의 추가적인 가정들도 선제되어야 한다. 앞선 가정에서 화자는 선언지들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하지 않고 선언문 전체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하기로 택했다. 그리고 추정컨대 선언문 전체가 당면 대화맥락에 적절하다면 각 선언지 역시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정 하에서 화자가 대화준칙들을 준수하고 있다 추정할 경우, 우리는 화자가 선언지들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할 만한 적절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선언문 전체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할 법한 적절한 근거는 화자가 분명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근거는 진리-함수적 근거와는 다른 셈이다. 즉 선언지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주장할 근거와는 다른 이유에서 전체 선언문을 발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A 또는 B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단독으로 A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모르거나 혹은 그 명제를 주장할 적절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음을 대화적으로 함축하며 이는 B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해당 화자는 A와 B 양자가 거짓일 수는 없다고 생각할 법한 적절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 역시 대화적으로 함축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또는의 특수성이자 철학자들로 하여금 일상언어적 또는과 논리적 또는의 의미가 동일한지 여부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던 요인이다. 이에 Grice는 두 의미가 다르다고 의심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 셈이다. 비록 엄밀하게 논리적인 의미의 선언문에서 시작할지라도, 그러한 선언문이 주장적으로 발화될 경우 대화적으로 함축되는 바가 일상적 선언문이 발화될 때 함축되는 바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에서 또는이 지니는 의미와 구분되는 특수한 의미를 일상언어에서 사용되는 또는에 대해 별도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 Grice와 여러 철학자들이 관찰한바 선언문이 사용될 때 드러나는 고유의 특징은, 대화와 정보교환의 작동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별도로 필요한 대화적 준칙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즉 별도로 필요한 설명항은 의미론적인 사안이 아니라 화용론적인 사안, 언어표현의 의미에 관한 규칙이 아니라 언어표현의 사용방식에 대한 준칙이다(역자 추가).]



(後略)



Scott Soames, Philosophical Analysis in the Twentieth Century, vol. 2, Princeton Univ Press, p. 206-8.





2. 역어에 대한 언급: 이전에는 통상적인 철학적 맥락에서나 혹은 그런 맥락에서 논리적 관계만이 논의될 경우엔 '함축/함의'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화용론적 'implicate/implicature' 개념이 함께 논의될 경우에만 논리적 관계로서의 '함축entailment'과, 화용론적 관계로서의 '함의implicature'를 구분하였다. 이론적인 숙고에 기반한 게 아니라 개인적 독서경험에 기반한 막연하고 자의적인 결정이었다. 전자의 경우엔 영어권 학자들이 논리적 관계에 대해 'entail/entailment'와 'imply/implication'를 혼용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후자 경우에서는 'implicate/implicature'를 따로 구분하여 사용하는데, 세 계열의 단어에 만족스럽게 대응되게끔 역어들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혹 국내 학자들이 논리적 관계에 대해 사용하는 '필함(必含)'을 추가해, '함축/함의' 중 하나를 그와 짝지어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두 영단어에 대한 역어로 각각 할당한 뒤, 남는 것을 화용론적 관계의 역어로 할당하는 전략도 고려해볼 수 있겠으나, 그럴 경우 제기될 법한 여러 문제점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한 문제점은 두 가지로서, 우선 어느 한 쪽을 '필함'과 짝지어 논리적 관계의 역어로 할당하겠다는 결정이 어느 정도로든 자의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두 번째로 '必'자가 진리-함수적 관계보다 더욱 강한 관계를 환기하기에, 다소 중립적으로 여겨지는 '함축/함의' 중 그 어느 쪽과 짝짓든, 동일한 논리적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로서는 비대칭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이는 C. I. 루이스가 'material implication'과 'strict implication'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 데 맞추기 위해 후자 관계에만 '필함'을 할당한 번역들이 간혹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점으로 인해 앞의 영단어 세 쌍이 딱 구분되게끔 세 개의 역어를 도입하지는 않고, 전술했듯 논리적/의미론적 논의와 화용론적 논의가 함께 이뤄질 경우에만 '함축/함의'를 구분하였다. 이 중 전자에 '함축'을 할당한 이유 역시 그저 개인적 독서경험과 기억에 의존한 선택이었다. 국내 철학자들의 경우 논리적 관계에 대해 '함축'을 사용하는 비중이 더 높아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반면 간혹 읽어본 순수 언어학자들이나 非철학자들의 저술에서는 반대로 의미론적 관계에 '함의'를 할당하고 화용론적 관계를 '함축'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폴 앨번, 『의미란 무엇인가』; 김방한, 『언어학의 이해』; 강범모, 『언어: 풀어 쓴 언어학 개론』; 옌황, 『화용론』). 철학서를 읽는 일이 많은 나로서는 논리적 관계에 대해 자연스레 '함축'을 떠올리게 되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이론적⋅논증적인 숙고를 해보자면, 이전의 결정과는 반대로 순수 언어학 쪽 저술들의 관행을 따라 논리적/의미론적 관계에 '함의'를 할당하고 화용론적 관계에 '함축'을 할당하는 편이 더 적합한 듯하다. 우선 '함의'에서 '意'가 의미론적인 요소나 측면을 환기하기에 논리적/의미론적 관계에 할당하는 편이 문자적으로 더 적합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라이스식 'implicate/implicature' 개념은 실제 발화된 언어표현의 문자적⋅축자적 의미 이외에 실제 발화에 의해 대화 맥락상 추가적으로 전달되는 바를 가리키기 위한 장치이다. 그런데 일상어나 문학적인 논의 맥락 등에서 언어표현의 논리적/의미론적 의미 이외의 추가적⋅암묵적⋅시사적인 정보나 느낌 등을 가리키고자 할 경우 한국어에서 '함의'보다는 '함축'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그러니 그라이스의 개념에 '함축'을 할당하는 것은 이러한 한국어 관행과도 부합하는 데가 있다. 따라서 통상적인 논증적 맥락에서는 '함축/함의'를 혼용하더라도, 최소한 논리적/의미론적 관계와 화용론적 관계가 엄밀히 구분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각각 '함의'와 '함축'을 구분지어 할당하는 편이 적합한 듯하다. 





3. 1의 본문은 선언문의 일상언어적 사용과 논리적 의미 간 차이점에 관한 논의로 인해 내용이 길어지긴 했지만, 일반화된 대화적 함축 개념에 대한 그라이스의 특성화 자체는 간단하다. 본문에서 기술되듯 "발화자가 대화적 준칙 내지 협조원리를 준수한다고 가정되는 그 어떤 통상적인 맥락에서든 발화된 문장에 의해 전달되는 함축"이 바로 일반대화함축이다. 2에서 언급된 옌황의 저술도 "어떤 특정한 문맥 조건들 없이도 일어나는 대화함축", "어떤 특정 문맥을 요구하지 않고서도" "무표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대화적 함축이라고 설명한다(『화용론』, 이해윤 譯, 휴인(한국외대지식출판원), 2016, 38-9쪽.).



하지만 이렇듯 개념 자체는 간단한 데 반해 본문 내용이 길어지게끔 만드는 사례논의를 솜즈가 제시한 이면의 의도가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웠다. 그라이스가 일반대화함축의 사례로 조건문을 선택하여 그 일상언어적 특수성을 화용론적으로 처리한 방식에서, 좀 더 깊은 논리철학적⋅언어철학적 〈함축〉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본문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일상어에서 선언문이 발화되는 근거가 진리-함수적이지 않다는 데에는 일단 전통논리학자와 그라이스 모두 동의한다. 하지만 전자는 그러한 분기가 발생하는 이유를 그저 단순히 의미론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반면, 그라이스는 선언 연결사의 논리적 의미를 일상언어에서도 유지시키되, 일상어와 논리적 언어에서 선언 연결사가 작동하는 방식의 명백한 차이점은 협조원리와 이를 구성하는 대화적 준칙들에 의해 발생하는 대화적 함축 개념으로 설명해낸다. 다만 이는 특수한 언어적 의미로 인해 함축이 발생하는 〈규약적〉 함축과 달리, 발화가 이뤄지는 대화 맥락상 협조원리의 준수를 통해 발생하는바 〈대화적〉 함축으로 분류되며, 발화의 전후 맥락이나 정보와 무관하게 임의의 맥락에서 동일하게 발생한다는 점에서 〈특수화된〉 대화함축과 달리 〈일반화된〉 대화함축으로 분류된다. 



여기서 각종 함축의 개념과 그 명칭을 구분하는 것은 기술적인 세부분류일 뿐, 철학적으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언어의 작동방식 및 그에 따라 의미상의 변화가 발생하는 방식에 접근하는 그라이스의 이론적 태도이다. 어떤 언어표현이 일상언어와 논리적 언어에서 (구문론적으로는 동일하되) 그 의미상 다르게 작동할 경우 이를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해당 표현에 대해 각기 다른 의미론을 할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외견상으로만 간단한 설명방식일 뿐, 그렇게 각기 다른 의미를 할당하는 데에 적절한 이론적 동기가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동기가 의미론적 체계성이나 통일성을 희생시킬 만큼 강력한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내가 짐작하기에 그라이스는 적어도 전통적 해결방식의 설명적 간명함보다는 이론적 체계성에 더 우위를 부여한 듯하다. 언어체계에 최소한으로 할당되는 의미론으로서 논리적 의미체계는 가급적 동일하게 유지하되, 논리적 의미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일상언어적 측면이 포착될 경우 이를 화용론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다. Grice 이전이나 당대의 일상언어철학자들은 전자를 도외시하고 일상언어적 사용방식에만 천착함으로써 언어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체계성을 상실했으며, 전통 논리학자들은 후자의 방책을 고려하지 못한 채 적절한 이론적 동기 없이 의미론 자체를 불필요하게 복수화함으로써 설명의 통일성을 희생시킨 셈이다. 



본문에서 솜즈가 선언문의 대화적 함축에 관한 그라이스의 논의를 다소 길게 해설한 것은, 그라이스의 철학사적 입지에 대한 솜즈 자신의 해석을 예증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보았다. 그의 철학사적 해석과 평가에 따르면, 일상언어철학의 방법론적 패러다임이 라일, 오스틴, 스트로슨, 헤어, 맬컴 등을 중심으로 절정에 달했던 1950년대 및 6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 방법론의 非체계성과 그로 인한 철학적 문제해결력의 한계점이 노정되기 시작한다. 이를 자각함에 따라 철학자들은 일상언어학파의 反체계적⋅反이론적 접근으로부터 방향을 선회하여 언어의 의미와 사용 양자에 대한 체계적 이론화를 차츰 모색하기 시작했으니, 그 선봉에서는 데이빗슨과 그라이스가 각각 의미론과 화용론에서 체계화의 기수를 맡고 있었다고 솜즈는 정리한다. 그라이스 자신도 말하길, 본문에서 솜즈가 주요 텍스트로 삼은 논문 「논리와 대화」에 제시된 착상에 대해 "언어 사용에 대한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화용 이론으로 나아가는 '비틀거리는 걸음'이라고" 칭했다 한다(옌황, 같은 책, 29쪽.). 물론 논리학과 의미론에 대한 그라이스의 심층적인 논리철학적⋅언어철학적 세부 견해가 무엇이었는지는 추가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다만 그가 "의미와 사용을 단순히 동일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단절시키지도 않는 언어이론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의미 이외에 언어표현의 사용을 지배하는 또 다른 핵심 요소가 무엇이며 그것이 의미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밝혀줄 언어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책, 199쪽.)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는 솜즈의 철학사적 해설은, 그라이스를 통상적인 일상언어학파에 속했던 인물로 뭉뚱그려 이해하는 조악한 철학사적 상식을 교정하기에는 충분한 논평이라 할 수 있겠다.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분석철학 내에서 주된 테마였던 이상언어 및 형식의미론에 대한 천착에 반발하면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으로 일상언어학파가 대두 및 발흥하였고, 그 전통 내에서 그라이스와 썰이 개발 및 발전시킨 이론적 틀을 거쳐 앵글로 아메리칸 계열의 화용론이 정착되었다는 식의 단선적이고 단순화된 그림을 다시 톺아보면서, 무엇이 선별되어 무엇이 취해지고 무엇이 교정되었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주는 것이다.  





4. 이번이 4회차 재독인데도, 새로이 이해하게 되는 사안은 어째 이전에 비해 양적으로도 더 많고 질적으로도 더 세밀한 듯하다. 빈틈없이 빡빡하고 치밀한 솜즈의 재구성과 해설과 평가에 진절머리가 나서 대강 이해한 척 스스로를 속이고 넘어갔던 부분들이, 당연히 마무리되지 않은 숙제로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겠다. 일상언어학파의 반체계적 기조가 그라이스 이후 교정되기 시작했다는 단순한 지식은 이전 독서에서도 인상깊다고 여겼던 사안이지만, 이를 명제적 형태로 머리에 욱여넣는 것과 그 명제를 맥락적이고 논증적으로 도출해가며 이해하는 것은 분명 별개의 문제다. 1권 서문에서 언급하듯 솜즈가 이 책에서 분석철학사를 취급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거대한 철학적 지형을 유의미하고 정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나무에서 시작해 숲으로 넓혀가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는 이 두 권을 보완 및 확장한 5권짜리 『분석철학 전통』의 1권 서문에서 밝히는바, 철학사를 전반적으로 〈기술〉하는 것 자체가 개별적인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논증〉을 요한다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철학적 사태와 역사가 여차여차했다는 단순한 사실기술의 나열이 아니라, 그러한 사태와 역사흐름이 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논증적 재구성을 꾀하는 저술이었던 것이다ㅡ그런 책을 무슨 자신감으로 무턱대고 펼쳐 들고는 이미 다 아는 〈사실〉 이라며 대강 글자들만 훑고 넘긴 탓에, 세밀하고 정교한 구성을 통해 의도된 철학적 작업과 그 진의는 전연 길어올리질 못했으니, 책 읽는 재미가 났을 리가 없다. 텍스트를 읽는 일이 재미가 없고 진전이 되지 않는 이유로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해당 텍스트의 특수성에 비췄을 때 내 독서태도가 적합했거나 성실했는지 여부를 문제삼아 보아야 할 경우도 있음을 새로이 깨닫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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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인식론 - 정당화의 사회실천에 의한 접근, 개정판
이병덕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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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초보적 수준의 입문용 교재처럼 보이지만, 부제가 시사하듯이 인식론적 정당화 개념을 특정 관점에서 논증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전반적인 목표로 삼는 심층 연구서로 보아야 적절할 듯하다. 목차를 일별하면 통상적인 인식론 저술들에서 다뤄지는 주요 이론들을 마찬가지로 통상적인 저술들과 유사한 순서 및 구성으로 배치하여 서술한다. 하지만 본문을 본격적으로 읽어보면 해당 주제들을 해설적으로 설명한다기보다는, 저자가 견지하는 셀라스식 모델로서의 사회실천적 정당화 모델과 특정 형태의 정합론을 결합한 이론을 통해 인식론의 주요 난제들을 해결하는 논증들이 책 전반을 통틀어 제시된다. 형식 면에서도 게티어문제나 토대론/정합론, 신빙론, 회의주의 등의 논제들이 매우 개괄적으로 해설되는 1, 3, 6, 13장을 제외하면, 여타 9개 장들은 저자의 기존 연구논문들을 토대로 재구성된 형태이다. 후자 장들에서는 때에 따라서 언어철학, 과학철학, 형이상학, 논리철학에서 다뤄지는 극히 전문적인 사안들이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 탓인지 상기한 네 장과 나머지 장들 간 논의 밀도와 호흡이 현저하게 달라 독서 난이도와 피로감의 비대칭성이 다소 심한 편이다. 초심자의 경우 전자 장들에서는 설명이 너무 개략적이어서 철저하거나 풍푸한 이해를 도모하기 어렵고, 반면 후자 장들에서는 전문적인 개념, 논제, 원리들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된 독서 자체를 해나가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니 전문가의 지도를 받을 수 없는 초심자라면 더욱 초보적인 수준에서 해설적으로 서술된 김도식의 "현대 영미 인식론의 흐름"이나, 그 책과 난이도가 비슷하면서 양적으로 더 풍부한 마티아스 슈토이프의 "현대 인식론 입문"을 읽길 권한다. 이후 심화교재라 할 수 있는 김기현의 "현대 인식론" 정도를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이 책 고유의 셀라스식 모델과 그에 기반한 논증들을 제대로 음미하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이 책과 유사한 난이도를 지닌 해설적 연구서이되 상반되는 기조인 토대론을 중심으로 인식론적 문제들을 검토하는 윤보석의 "현대 토대론 연구"를 읽으면 추가적인 균형감을 갖출 수 있겠다. 


 사족.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본인이 개입하는 해당 이론에 너무 많은 우위를 부여하면서 케익을 먹으려는 동시에 갖고 있으려는 과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의심이 들기도 했다. 가령 셀라스식 정합론을 진리 축소론과 결합함으로써 정합론에 으레 제기되는 고립반론이나 정합적 복수체계 반론을 물리칠 수 있다면, 이는 마찬가지로 전체론적 정합론과 진리 축소론을 견지하되 전체론적 망의 최후 보루로서 과학적 자연주의를 내세우는 콰인식 모델과 얼마나 다른가? 셀라시언 정합론에 따를 경우 우리의 인식목적과 규범이 정당화를 둘러싼 디폴트-도전 구조 내에서 최선의 설명적 정합성을 갖는 세계상을 획득하는 것이되, 차후 제기될 법한 정당화-도전에 직면하여 새로운 세계상에 부여될 설명적 효력의 상한선이 개정될 여지도 허용된다면, 그런 개정이 <우리의> 개념체계 내에서 정당한지 여부를 판정해줄 기준은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데이빗슨이 강조하듯 우리의 것과 비교했을 때 진정 이질적이면서 대안적인 개념체계란 <우리의> 정당화 모델에서 무의미한 것인바 그런 체계가 기실 존재할 수 없을진대, 그 경우에도 우리가 마지막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개념체계는 결국 자연과학적 체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인식론적 규범성이나 목적성, 합리성 등의 개념을 과감히 포기하고 콰인식 자연주의와 전체론을 받아들이는 편이 더욱 <최선의 설명성>을 갖는 경제적 모델이 아니겠는가? 예컨대 선험적 지식이 다뤄지는 11장에서 도입되는바 보고시안이 제시한 형이상학적/인식론적 분석성 개념이 철학적으로 합당한 구분이어서 후자의 분석성이 선험적 지식의 정당화에 활용될 수 있다면, 콰인도 존재론적/의미론적으로는 무해한 그런 의미의 분석성을 받아들이되 다만 그 분석성을 판가름하는 인식론적 배경을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잡은 뒤 선험적 지식은 여전히 거부할 수 있지 않은가?ㅡ저자가 워낙에 다양한 이론과 논제들을 능숙하고 기교적으로 활용하여 상당히 구성적인 논증들을 펼쳐보이기에, 그런만큼 철학적으로 공격해볼 여지가 많다는 느낌이 든 독서였다. 다만 나는 철학적 언어만 많이 익혀왔을 뿐, 진정으로 철학적인 논증을 엄밀하고 만족스럽고 안전하게 구성하는 능력은 아직도 한참 미진하다는 것 역시 절감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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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철학이란 무엇인가?
쇠렌 오버가르 외 지음, 김랜시 옮김 / 생각과사람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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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포괄적인 신생분야를 평이하고 깔끔하게 전달하는 전문적 입문서이지만, 번역상태가 다소 의심스러워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존재), 철학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방법), 철학은 왜 해야 하며 어떠한 소용이 있는가?(가치)' 라는 세 물음을 중심 삼아, 철학에 관한 철학으로서의 메타철학이라는 분야를 평이한 서술과 깔끔한 구성으로 전달하고 있다. 저술 의도도 그렇고 책의 실제 난이도나 서술스타일도 그렇고 분명 입문서이긴 하지만, 주제 자체가 메타적인 분야인 만큼 통상적인 철학사 전반과 개별 철학자들의 이론은 물론이요, 논리학, 인식론, 형이상학, 언어철학, 과학철학, 대륙/분석철학, 현상학, 자연주의 등과 같은 철학의 하위 분야나 주제들에 이르기까지ㅡ1계 철학 전반에 대한 선지식이나 감각을 간략하게나마 폭넓게 갖추고 읽어야 유의미한 입문서 노릇을 할 수 있겠다. 통상적인 학부 커리큘럽상 개별 강의를 통해 그러한 선지식들을 다소 갖춰 놓았을 철학과 학부생 3, 4학년이라면(혹은 그에 준할 정도로 철학에 숙달해 있는 일반 독자층이라면) 요즘 같은 방학 시즌에 편하게 일독해볼 가치가 있겠다. 강의를 통해 다양한 1계 철학이론들을 배우면서 각 철학자들이 지녔던 메타적 철학관에 관한 <막연한> 시사점을 분명 접하겠지만, 철학 자체가 그 학문적 지위와 정의특성에 관한 논쟁이 다발하는 학문인 만큼, 무릇 진지하게 공부하는 철학도라면 자신의 전공분야를 한층 더 높은 시각에서 <체계적, 논증적으로>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조금이나마 더 안전하고 실패 여지가 적은 탐구의 시작점과 사유의 재료를 확보케 해주는 희소성 있는 문헌으로서, 적어도 철학과 학생들에게는 구매소장이 추철될 법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부분적으로나마 주제가 겹치면서 메타적인 성격의 저술로 니킬 무커지, "실험철학", 제임스 체이스 外, "분석철학 대 대륙철학", H. J. 글록,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 등 세 권을 읽은 바 있는데, 이 책에서도 모두 언급 및 간혹 인용되고 있어 반갑기도 했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논의가 폭넓고 또한 번역이 딱히 유려하진 않지만, 해당 책들도 가까운 시일 내에 함께 읽는다면 철학이라는 거대한 분야 자체에 대한 메타적 감각을 갖춰놓는 데에 일익이 있을 것이다. 


2. 다만 초두에 언급했듯 간혹 발견되는 오역에서도 그러하고, 전반적으로 읽어가며 느껴졌던 스타일이나 문장력, 논의의 이해가능성 측면에서도 그러하고, 번역 상태가 딱히 안전하지 않아보인다는 점이 가장 큰 단점이라 여겨졌다. 주제의 특성상 이렇게 1계 수준의 다양한 이론, 논제, 관점, 개념, 방법론 등에 대한 메타적 논의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는 저술의 경우, 인용되거나 논의에 활용되는 다양한 주제와 입장들을 1차적으로 만족스런 수준에서 이해하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원저자가 그러한 자료들을 어떤 논의맥락 내에서 어떤 결론이나 함의를 위해 활용하고 있는지를 2차적으로도 충분히 간파하고 이해한 채 번역에 임할 것이 역자에게 요구된다. 그래야만 인용문과 본문, 1계수준과 2계수준 서술, 다양한 철학자들의 입장 사이를 오가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논의 속에서, 독자가 (흥미를 잃지 않는 건 고사하고) 최소한 언어적으로 방황하지 않고 논의의 길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는 물건이 나온다. 간혹 보이는 오역이나 미심쩍어 보이는 문장들, 이해가 잘 안되거나 한국어 맥락상 오도적이게 배치된 구문들 등을 보건대, 이 책은 그런 면에서 만족스럽게 번역된 물건은 아니라 생각한다. 

 가령 53쪽을 보자:


  해커가 설명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메타철학적 입장에 따르면, 철학은 자연과학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인간 지식에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는다. 


추정컨대 원문은 'not …, nor' 형식의 문장이었을 듯한데, 그렇다면 "철학은 자연과학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가 아니라 "철학은 자연과학의 일부가 <아닐> 뿐만 아니라"로 번역되어야 한다. 원문에 대한 추정과는 별개로도 위 번역은 논의 맥락상 모순되는바, 해당 문장의 앞 문단 중심내용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치유적 철학관에 관한 것으로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과학과 매우 다르다'는 슐릭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라고 명시적으로 언급되어있다. 논의 맥락에 대한 고려와 별개로도, 비트겐슈타인은 전후기를 통틀어 철학이 자연과학의 일부라 생각한 적이 없다는 철학사적, 해석적 상식을 감안하건대, 해당 부분의 논의맥락에도 철학사적 배경지식에도 민감하지 않은 정신상태에서 야기된 사소하지만 한심한 오역이라 평할 수밖엔 없는 대목이다. 

 152쪽도 내가 생각기로는 명백한 오역이다:


  아마도 쿠퍼가 암시하듯이, 하이데거와 다른 철학자들은 후설의 주관성(subjectivity)이 데카르

  트식 실체 개념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주체 영역 안에서만 지향적 경험"을 한다고 비판해 왔

  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후 등장한 후기 현상학자 미셸 앙리는 후설의 주관성이 불필요한 

  편재성(insufficiently immanent)을 띤다고 비판했다. 


후미의 'insufficiently'를 '불충분하게'가 아니라 '불필요하게'로 오역했으며 'immanent'를 두 의미 중 '내재적인'이 아니라 '편재하는'으로 잘못 선택하여 번역했다. 미셸 앙리라는 현상학자의 이론을 나는 일절 모르지만, 논의 맥락상 추정컨대, 하이데거, 메를로-뽕띠, 레비나스, 사르트르 등 후설 현상학을 일부 계승하였다고 자처하는 현상학자들은 후썰식 주관성이 과도하게 주체 내재적이라고 비판했음과 달리, 미셸 앙리는 도리어 후썰식 주관성이 <불충분하게 내재적>이었다고, 즉 더욱 철저하게 내재성을 띠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모종의 문제가 발생했다고 진단했다는 내용이, 원저자의 의도였을 듯하다. 논의맥락상으로도 번역된 단어의 의미 자체로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되어버린 셈이다. 주체가 <편재성>을 띤다는 말은 소박한 형태의 관념론이나 범심론이 아닌 바에야 철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에서 더 나아가 주체의 편재성이라는 게 어떤 의미에서 <불필요>하다는 것인지조차 전연 이해할 수 없다. 53쪽에서와 달리 원어를 병기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걸 보면, 앞서와 마찬가지로 논의 주제가 되는 1계 이론이나 해당 논의맥락에 대한 면밀한 검토 및 충분한 이해 없이 사소하지만 무책임하게 오역된 사례라고 의심할 여지가 다분하다. 

 161쪽엔 내 배경지식으로는 추정상으로도 도저히 이해를 기도해볼 수 없는 문장이 나온다:


  언뜻 보면 엄밀해 보이는 정의에 호도되지 말라.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저자 A는 형식어원

  (formal derivation) D를 사용하는 그 어떤 유용성 U도 취하지 않는다.


콜린 맥긴이 자신의 '인지적 폐쇄' 개념을 분석철학전통 특유의 준형식적 언어로 기술한 데 대해 대니얼 데닛이 비꼬면서 제시한 문장이다. 문장 전체의 의미를 짐작하긴 어려워도 'formal derivation'이 '형식적 도출'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 만큼은 추정할 수 있겠다. 어떤 단어의 어원이 '형식적'이라는 말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다행히 해당 본문이 1에서도 언급한 글록의 책 인용문이어서 해당 부분을 찾아보았다:


  이 정의의 외관상의 엄밀성 되문에 오도되지 말라. 필자 A는 임의의 형식적 명제 D를 도출할 

  때 결코 어떠한 용도로도 U를 이용하지 않는다.

  (H. J. Glock, "분석철학이란 무엇인가?", 한상기 譯, 서광사, 2008, 322쪽.)


기실 이 문장도 원문(데닛의 1991년 논문 '뇌와 그 경계The Brain and its Boundaries')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보거나 이해한 채 번역된 문장은 아닌 것처럼 짐작되지만, 적어도 'derivation'을 '도출'로 번역해내긴 했다. 데닛의 문장을 인용한 글록의 문장을 인용한 이 책의 문장에 대해, 그 맥락과 의도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채 다의적 단어를 부주의하게 번역함에 따라, 철학적 맥락을 떠나 한국어 문장 자체로서도 전혀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무책임한 문장이 나와버렸다. 

 역시 사소한 것이긴 하지만 1계이론에 대한 무지의 증거로서, 246쪽에서 Russell의 'definite description'이 '명확한 기술'로 번역된 것을 들 수 있겠다. 원저자가 칭하는바 철학의 효용 중 '삭제기능(substractive function)'을 지닌 이론들이 논의되는 맥락인데, 통상 '한정 기술구, 확정 기술구' 등으로 번역되는 definite description에 대한 러셀의 논리적 분석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과 절차를 통해 존재론적으로 절약적, 삭제적, 축소적인 효과를 가져오는지를 <명확히> 숙지하고 있다면, 게다가 이런 철학적 함의가 해당 단어가 등장하는 본문의 전후에서도 논의되고 있음을 맥락적으로 <명확히> 숙지 및 이해하고 있다면, 이 영단어를 최소한 '<명확한> 기술구'로는 번역하지 않았을 것이 <명확하다>.


 이렇듯 외견상으론 사소한 실수인 듯 보여도, 기실 뜯어보면 단순한 착오에 기인한 오역이라기보다는 본문의 논의맥락이나 본문에서 인용되는 논의들에 대한 주의깊은 검토와 이해가 미진한 탓에 기인한 심각한 형태의 오역으로 의심되는 문장들이 매우 많다. 이런 의심이 쌓여가다보니, 책 후반부로 갈수록 어렵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을 만나도 정합적으로 해석하려 시도하며 읽기 보다는 그저 이해가 안 가는 채로 내버려두고 글자만 읽어내려가게 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점에서, 앞서 말했듯 미심쩍은 번역들을 자체적으로 교정 및 보정해가며 나름대로 유의미한 이해를 건져낼 수 있을 만큼의 배경지식과 철학적 숙달 수준을 갖춘 독자층에게만 구매소장이 추천될 법하다. 가장 좋은 선택지야 원서를 읽는 것이겠지만, 메타철학이라는 분야를 전공할 전문연구자가 되길 희망하는 게 아닌 바에야 이 역본을 읽어보고픈 일반 독자층이라면, 이해가 안 가는 구절에서 괜히 씨름하지 말고 쿨하게 넘기면서 대략적인 그림만을 접한다는 데에 의의를 두는 쪽으로 독서호흡을 잡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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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수학입니까? - 자연수, 0, 음수, 분수 그리고 사칙연산의 논리
데이비드 벌린스키 지음, 이경아 옮김 / 에이도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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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학의 근본원칙들을 중심으로 자연수론과 그 연산체계 등 초등수학의 논리적 토대를 평이하게 해명하는 교양서로서 신선한 지적 경험을 주긴 하지만, 서술과 구성의 난삽함으로 인해 구매소장까지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원제에서 부제로 붙은 " the beauty and symmetry of absolutely elementary mathematics"에서 시사되듯이, 대수학의 기본적인 원리들을 토대로 수 체계 및 그 기초적인 연산체계가 논리적으로 증명되는 절차를 평이한 언어로 해설하면서, 초등수학체계의 공시적 발전사와 통시적 완결태에서 길어올릴 수 있는 논리적 대칭성이나 항구성, 공리적 완결성 등에 이목을 집중시킨다. 작금의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막무가내로 배우고 익혀 일상에서 무리없이 사용하는 초등수학의 기초적인 체계가, 모종의 완전성과 대칭성을 도모하면서 더욱 근본적인 논리적, 대수적 원리에 부합하게끔 정비 및 발전되어 온 체계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는바, 수학의 지루한 기계적 연산성 이면의 기초론적이고 철학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갖게 해준다는 점에서 분명 일독해볼 가치는 있는 교양서이다. 가령 자체로는 무의미한 기호를 그에 대해 명시된 원리나 규칙에 따라 형식적으로 조작함으로써, 우리가 실질적으로 원하는 동시에 형식적으로도 올바른 수학적 결과가 어떻게 일관적으로 도출될 수 있게 되는가 하는 형식주의적 기조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학창시절 배운 수학지식을 다 잊어먹은 일반 성인독자층은 물론이요 수학에 즐거움을 전연 못 느끼는 중고등학생에게도 새로운 지적 자극과 경험을 안겨다줄 수 있겠다. 

 하지만 전반적인 서술과 챕터 구성 일부가 대체로 난삽하게 여겨진다는 점이 텍스트로서는 큰 단점이다. 핵심 논의를 이어가다가도 다소 뜬금없는 일화나 희한한 수사적 언술을 맥락상 부자연스럽게 덧붙인다든가, 아벨라르, 드 모르건, 코발레프스키 등 한 챕터 전체가 개별 인물들과 관련된 에피소드에 할애되되 그 내용이 여타 장들의 본격적인 논의들과 별 접점이 없는 일화들로만 꾸며져 있다든가 하는 식이다. 기등록된 100자평에서 "전반적으로 헛소리"라는 평이 나온 이유는 이런 식의 난삽함이나 매끄럽지 못한 서술스타일에 기인한 게 아닌가 싶다. 근자에 동 저자의 간략한 수학사 책을 만족스럽게 읽어놔서 이 책에도 다소 기대를 했었는데, 서술스타일이나 논의방식이 매끄럽지 못해 <상대적으로> 조금 실망스런 독서였다. 다만 앞서 말했듯 책의 벼리가 되는 논의 자체는 분명 유익하고 유의미한 지적 경험을 주기 때문에, 호기심에 굳이 일독하고자 한다면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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