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미국 미술 - 현대 예술과 문화 1950~2000
휘트니미술관 기획, 리사 필립스 외 지음, 송미숙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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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각적인 서술이 장점인 동시에 번거롭게 여겨질 수 있는 단점인 책이다. 우선 시기별 미술사조가 배태된 당대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사건이나 맥락들을 각 장 초입마다 여러 시각자료를 곁들이며 폭넓게 서술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미술사 외부의 역사적 맥락은 대강의 큰 줄기만 언급한 뒤 미술사 내부 영향사에 주로 치중하는 여타 통상적인 미술사 서적들에 비해, 적어도 양적으로는 역사적 서술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편이다. 또한 부제가 암시하듯 건축 사진 연극 무용 영화 문학 문예이론 대중음악 등 순수미술 이외의 예술 및 문화 분야들도 각 장에서 다뤄지는 미술사와 연관지어가며 시대순으로 간략히 살펴보고 있다는 점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이렇듯 다양한 내용을 입체적으로 담고 있는바 분명 많을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외려 그로 인해 여타 미술사 서적만큼 탄탄하고 깔끔하게 딱 꼴지어진 그림을 얻게 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두번째 특징의 경우 복수 저자들이 쓴 두어쪽의 글들이 본문 중간중간에 배치되어 있는 식이고 그 내용도 피상적 나열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폭넓은 선지식이 없는 한 그 글들만으로는 해당 예술분야나 그 사조를 맥락적으로 심도있게 이해하기는 어렵다. 

 이에 2차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동시대미술은 물론이요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모더니즘도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야, 이러한 풍부한 내용 속에서 필요한 내용들을 추려내가며 미진했던 부분을 메우는 데에 활용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은 초심자라면 많은 욕심을 내기보다는 다양한 도판들을 일별하며 '어떤 미술사조가 어떤 맥락에서 여차여차하게 등장했구나' 정도를 파악하는 식으로 가볍게 읽는 편이 좋겠다. 여러 시각자료와 도판들 역시 풍부하고 다양하게 실려 있기에 차후 여러번 들춰볼 마음이 먹어진다면 구매소장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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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 논리주의 대 직관주의

 

예컨대 데데킨트는 공간과 시작의 직관으로부터 수를 도출할 수 없으며 다만 수는 "사고의 순수 법칙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발현되어 나온다"라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수로부터 공간과 시간의 명확한 개념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논리학파의 기본 이론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지만, 거기에 깊이 천착하지는 않았다.

 

모리스 클라인, 수학의 확실성, 381




2. 수의 무한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대한 Dedekind의 설명

 

DedekindFrege가 자연수를 취급하는 방식은 대체로 유사하다. Frege의 정리가 보여주는 바는, 유한 기수(基數)finite cardinalsHume의 원리Hume's principle에 따라 도입되고 직후자(直後者) 관계(계승수 관계)successor relation가 기수성 연산자cardinality operator에 의해 정의되고 나면, 후자와 더불어 유한기수는 Dedekind-Peano 공리Dedekind-Peano axioms를 만족한다는 것이다. 역으로 Dedekind(정리 120)는 개념 변항concept variable이 오직 유한 개념finite concept만을 아우르는range over[유한 개념만을 논항으로 취하는?] 형태의 Hume의 원리가 무엇인가?[수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에 제시된 체계 내에서 얻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자연수의 존재와 무한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앞서 Frege의 방법론을 꽤 상세히 살폈으므로 여기서는 Dedekind의 설명을 살펴보기로 한다.

Dedekind의 정의에 따르면 한 체계system[집합]는 그것의 -부분체계proper subsystem와 일대일 대응one-to-one correspondence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Dedekind적으로) 무한하다(Dedekind) infinite. 이에 비해 단순 무한한simply infinite 체계란 Dedekind-Peano 공리를 만족하는 관계의 논의영역을 형성하는 임의의 체계로 정의된다. 이렇게 정의하고 난 뒤 Dedekind는 모든 무한체계가 단순 무한한 부분체계를 포함하고 있음을 증명한다(정리 72). 우리가 하나의 무한체계의 존재를 우선 증명했다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단순 무한체계 역시 존재해서 그 체계 및 체계 관계들이 Dedekind-Peano 공리의 모형이 됨을 알 수 있다. 단순 무한체계를 얻고 나면 우리는

 

[그 체계를 이루는] 요소element들의 고유한 특성special character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각 요소들의 구별가능성distinguishability만을 유지하면서 그것들이 체계 내에서 맺는 상호관계만을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자연수natural numbers序數ordinal numbers 내지 그냥 단순히 수라고 불린다. 체계의 요소들이 갖는바 여타 모든 내용을 제거(추상화)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수를 인간 정신human mind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라고 정당하게 부를 수 있다. (무엇인가?, 68.)

 

여기서 수에 관한 FregeDedekind의 설명 간의 중요한 차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Dedekind의 관점에서, 단순 무한체계를 제시하는 일은 수에 대한 개념을 창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 [Frege가 겨냥하였듯이] 개별 수들 간의 동일성을 고정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다. 실지로 Dedekind는 자신의 착상을 그런 식으로 확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했다. 반면 Frege는 개별 수들의 지위가 자립적인 대상self-subsistent object임을 보장하고자 그러한 작업[수 동일성 진술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것]을 수행했다. Dedekind의 분석에서 수의 존재는, 단순 무한체계를 이루는 요소들의 특정 성질들을 추상화함으로써 그 순서구조ordinal structure만을 얻게 해주는 정신적 능력mental power의 귀결일 따름이다.

Dedekind 방법론의 성공 여부는 무한체계의 존재에 달려있다. Dummett(1991a[Frege와 분석의 역설Frege and the paradox of analysis, 49ff.])이 지적했듯이, Dedekind는 방금 살펴본 방식에 따라 추상화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수 개념을 창출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체계의 존재를 보장하고자 했다. 그 경우 그의 정언성 정리categoricity theorem(정리 132)에 따르면, 구성 초기에 드러났던 특수성peculiarity은 사라지고 무한체계 구성의 일반성generality이 보장될 수 있다. 이는 정리 66의 목표로서 그 증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나의 사고thought의 세계, 즉 내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물들로 이뤄진 총체 S는 무한하다. 왜냐하면, sS의 한 요소를 지칭할 경우, s가 나의 사고의 대상이라는 내용의 사고 역시 S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s´를 요소 s에 대한 image φ(s)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그렇게 결정된 S로의 사상(寫像)mapping φ on S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갖는다: φ의 상 S의 부분이자 진-부분proper part이다. 왜냐하면 S에는 [φ에 의해 결정되는] 그러한 모든 사고 과는 다르기에 에는 포함되지 않는 요소(가령 나의 자아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abS의 각기 다른 요소들이라면 그것들의 상 역시 각기 다르며, 그런즉 사상 φ는 명백하게 잘 정의된다. 따라서 S는 무한하다. q.e.d.

 

Frege와 마찬가지로 Dedekind는 사유의 영역을 객관적인 것으로, 즉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한 영역에 무리 없이 접근할 수 있음은 사고가 우리 이성에 투명하게 비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 영역은 무한체계의 범형인바, xy라는 나의 사고의 대상이다라는 관계란 내 사고의 대상으로 이뤄진 부분체계로부터 그것 자체의 진-부분으로 사상하는 일대일 함수one-one function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형으로부터 우리는 무한체계의 개념을 추상화하며, 그에 따라 수 개념을 추상화한다. Dedekind의 증명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사고라는 것 자체가 진정한 대상proper object이어야 한다. 1차 개념의 논항, 정확히 말해 사고와 그 자체로는 사고가 아닌 대상 간에 성립하는 관계로서 x는 나의 사고의 대상이다라는 개념의 논항이 될 수 있어야 한다. Dedekind가 사고의 본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기에, [수 개념에 대한] 그의 설명이 일관적이지 않은 사고이론에 토대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Dedekind(사고가 진정한 대상이라는 추가조건을 받아들임과 더불어) Frege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고이론을 암묵적으로 가정했다고 간주한다면, [Frege의 사고이론에서 야기되는] 개념/사고 역설1)은 수의 무한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다. 즉 정리 66이 실패할 경우 우리는 수 개념을 추상화할 수 있는 범형을 잃는 셈이며, 그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수의 핵심적 속성을 알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불분명한 것으로 남게 된다.


1) 같은 책, 149(‘Russell의 명제적 역설과 Frege의 사고 개념) 참조.

 

William Demopoulos, Peter Clark, "The Logicism of Frege, Dedekind, Russell": S. Shapiro . The Oxford Handbook of Philosophy of Mathematics and Logic,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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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 불완전성 정리 - “이성의 한계”의 발견
요시나가 요시마사 지음 / 전파과학사 / 199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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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끄럽고 압축적이게 구성되어 있기에 숙련자에게만 추천될 법한 교양서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부터 괴델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수학기초론 소사를 다루고 있다 하겠는데, 방대하고 전문적인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안들만을 저자 나름대로 취사선택하여 깔끔하게 요약 및 정리해냈다. 칸토어의 집합론 및 그와 연관된 역설의 발견에서부터. 힐베르트의 "기하학의 기초"에 의해 대두된 공리주의, 수학기초론 삼파의 논쟁, 괴델의 정리와 그 이후까지의 수학철학적 이야기들을, 저자 나름의 시각으로 정연하게 이어맟줘 재구해냈다. 

 그런데 (내용 측면에서) 학술적인 스타일이나 나름의 엄밀함을 좀체 벗어나지 않기에, 선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평이하게 읽어갈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하게 서술되어있는 편은 아니다. (일본어식 문어체를 그대로 직역한 것도 매끄러운 독서를 방해하는 사소한 요인 중 하나이다.) 글의 진행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나 이론들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은 독자라면 논의를 피상적으로만 따라가게 될 뿐 철학적, 수학적인 핵심과 그 의의를 파악하고 깊게 음미하며 읽어내지는 못할 것 같다. 특히 간간히 제시되는 수학적, 準-형식적 증명들 및 책의 중심주제인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 자체가, 이런 내용에 이미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거의 불가능한 형태로 제시되어 있다.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먼저 증명가능성 술어와 자기-지시성 구조를 도입하기 위해 괴델이 칸토어의 대각선 논법과 리샤르의 역설을 활용한 방식이 형식적으로 제시되고, 이후 괴델수 부여를 통한 구체적인 증명 절차 자체는 그 핵심 착상과 개요만이 자연언어로 짧게 기술된다. 보통 전자보다 후자를 상세하게 기술하는 여타 책들에 비하자면 분명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반면, 초두에 말했듯 학술적으로 잘 마물러진 교양서이기에, 이러한 어려움들에 개의치 않을 만큼 수학기초론과 그 역사 및 형식적 논의에 충분히 숙달된 독자라면 일독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취향에 따라 구매소장하여 생각날 적마다 거듭 읽다보면, 미진하거나 파편적으로 알던 사항들을을 이 책을 통해 빠른 호흡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2. 보통 불완전성 정리의 의의를 '인간 이성의 한계를 엄밀하게 밝혀냈다'는 식으로 부정적, 소극적으로만 해석하는데, 이와 대조되는바 책 말미에 짧게 언급된 저자의 긍정적, 적극적 해석이 인상깊었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그러한 전능하고 절대적인 이론이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역으로 말해 이 정리는, 현재 아무리 완전하게 보이는 이론일지라도 언젠가는 앞지름을 당하는 것이고, 인간에게는 항상 기성의 이론을 앞질러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남겨져 있음을 보증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인간 이성의 '강함'에 대한 선언으로서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 정리의 적극적인 파악방법이고 이 정리가 갖는 궁극적 일면이다." (226쪽)


읽자마자 U. 에코, "장미의 이름"의 두 등장인물 호르헤 노수도사와 윌리엄 수도사가 떠올랐다:


 "「우리 교단의 사명이자 우리 수도원 수도사들의 의무인 이 근행 가운데에는, 공부하고 지식을 보존하는 의무가 들어 있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공부하고 그 지식을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의무의 노른자위 같은 것이지요. 나는 〈탐구〉라고 하지 않고 분명 〈보존〉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까닭인가요? 하느님께 속하는, 지식이라는 재산은 완전한 것이고, 태초부터 완전한 것으로 정제된 것이고, 말씀의 완전함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탐구〉라고 하지 않고 〈보존〉이라고 했습니다. 부슨 까닭에서일까요? 선지자들의 설교로부터 초대 교부들의 해석에 이르기까지 수세기에 걸쳐 정제되고 완성된 이 지식이야말로 인간에게 할당된 몫으로는 최상의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의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가 있을 리 없습니다. 애오라지 연속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요점 약설이 있을 뿐입니다. (…) 나는 성서의 마지막 권에서, 마지막 천사가 한 말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누구든 여기에 무엇을 덧붙일진대 하느님께서 그를 벌하실 적에 이 책에 기록된 재난도 덧붙여 주시리라. 또 누구든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에서 무엇을 때어 버릴진대,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 대한 그의 몫을 하느님께서 떼어 버리시리라.〉」" (이윤기 譯, 열린책들, 2006(보급판), 526-8쪽)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물질로 되어 있는 권능이 아니야. 악마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 …… 이런 게 바로 악마야! (…) 저잣거리로 나가 이렇게 외치고 싶군.〈이 영감이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한다. 진리란 것이 죽을 맛이라 하고 있으니 여러분은 영감의 말을 믿은 게 아니라 이이의 엄격함을 믿은 것이다!〉」(…)

 「너는 나를 악마라고 한다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니라. 나는 하느님의 손이었느니라.」

 「하느님의 손은 창조하지, 감추지는 않는다.」" (621-3쪽)


힐베르트를 완고하고 비뚤어진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에 빗대는 게 불경한 일이겠지만, 이 빗댐에 기대 저자의 해석을 재해석해보자면, 비뚤어지거나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은 건강한 형태의〈엄격함〉이나 〈완전함〉이라도, 체계 외부의 시각에서는 모종의 또다른 광기나 비뚤어짐일 수 있음을 보여준 게, 괴델 정리의 적극적인 의의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에게서 찾아내야 할 것은 그의 〈완전함〉이 아니라 무한한 〈창조력〉인바, 후자를 볼 수 있을 때에야 그가 우리게 부여한 〈이성의 강함〉 역시도 제대로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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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쪽


1. 어떤 형태 어떤 분야의 학문을 하든, 명시적으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기초적이고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적 개입이 그 학문에 필요불가결함을, 샤피로는 인정하고 들어가는 듯하다 그 학자가 그렇게 개입하는 형이상학적인 무언가something가 정확히 무엇<으로> 기술될 수 있는지, 아니면 여하간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지 정도의 수준에서만, 우리가 명시적으로 말할 수 있는 형이상학과 인식론 둘 중 하나에의 가중치가 변별될 수 있다* 이상화된 수학적 대상을 무엇<으로> 식별하는 일, 가령 논리주의마냥 논리학으로, 혹은 형식주의마냥 기호들과 그 체계의 규칙으로 식별하는 일이 가망이 없다면, 직관주의자는 이상화된 <대상>에서 눈을 거둬들이고 <이상화>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샤피로가 지적하는 점은 그런 식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 자체도 형이상학적 개입이 이미 이뤄진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ㅡ그에 덧붙여, 형이상학과 인식론 양자에서 제기돠는 부담을 덜고자** 비숍식의 중립적 구성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여하한 수학철학적 사유도 경유하지 않은 채, 그저 일상적이고 평화롭게 이해되는 바로서의 수학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인바, 이는 ‘수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수학은 수학이다‘라고 답하는 격이다 그리고 이는 그 질문을 그냥 무시하는 것과 진배없다 직관주의 입장에서 ˝자유선택 수열이 없어˝진 그 수학을 하겠다는 말이 이러한 무시(무시1)에 해당한다면(즉 직관주의가 이해한 <수학>을 ˝빈약하게˝ 만든다면), 고전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중간 배제[배중률]가 없˝어진 그 수학을 하겠다는 말 역시 그러한 무시(무시2)에 해당한다(즉 고전주의가 이해한 <수학>을 ˝빈약하게˝ 만든다) 샤피로가 지적하는 점은, 전자가 그러한 무시1을 용납할 수 없을진대, 후자도 그러한 무시2를 용납할 수 없는 충분한 근거가 있으며, 그 근거는 초두에 말한바 그 어떤 학문분야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 개입이 상정된다는 역사적, 원리적, 철학적 현실이라는 점이다

2. 불분명하고 무심하지만 날카로운 비평적 논증의 한 사례이다 (내가 재구성한)

3.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상적인 직관을 벗어나는 수준에서라면, 존재론적으로 기운 철락자에겐 인식론적 부담이 큰 반면, 인식론적으로 기운 철학자에겐 존재론적 부담이 크다는 일반적 경향이 철학사를 통틀어 관찰된다


** 나는 언어철학에서 내포 문재와 관련하여 비슷한 스탠스를 취한 인물로 R. 몬테규를 생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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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성 - 쿠르트 괴델의 증명과 역설
레베카 골드스타인 지음, 고중숙 옮김 / 승산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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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 관해 평이하면서도 알차게 알아갈 수 있는 좋은 교양서이다. 괴델 증명의 개요를 비형식적으로 평이하게 해설할 뿐만 아니라, 그와 얽힌 전기적 사실 및 가벼운 철학사적 사안들도 자연스럽게 엮어내고 있어, 불완전성 정리는 고사하고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수학철학을 전연 모르는 일반적인 독자층도 아주 쉽게 읽어나갈 수 있겠다. 이 책마저 버거울 듯한 수준이라면 이보다 앞서 박정일, "괴델&튜링: 추상적 사유의 위대한 힘"을 먼저 읽은 뒤 이 책으로 넘어오면 될 일이고, 이 책을 읽고 더 흥미를 느낀다면 M. Klein, "수학의 확실성"과  E. Nagel, "괴델의 증명"으로 심화시켜볼 수 있겠다. 다만 책 전체에 걸쳐 괴델의 수학적 실재론 입장이 자주 환기 및 강조되는데, 그러한 부분들에 대한 저자의 서술을 좀 더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수학철학에서 전개된 실재론-반실재론 논쟁을 다소 이해하고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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