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강의 - 순수 미술의 탄생과 죽음
조주연 지음 / 글항아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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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한 구성으로 알차게 쓰인 중급 수준의 현대미학 서적이다 목차에사부타 명료하게 드러나듯이, 대략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중후반에 이르기까지의 미술사를 모더니즘-아방가르드-포스트모더즘 계열로 대별하여 총론을 다룬 뒤, 각 챕터별로 특정 작가 및 작품군들을 총론에서 정립된 틀에 따라 종합적으로 해설해준다 양적으로 다소 방대하고 질적으로도 적잖이 학술적이지만 쉬운 서술과 깔끔한 구성이 읽는 피로감을 덜해주기에, 적당한 독서역량을 갖춤과 더불어 인문학적 논의스타일에 익숙해있다면 대학생 이상의 성인층이 교양서로 읽기에도 적합한 편이다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고백하는바 익명의 심사자가 지적했다던대로 특정 이론가들의 관점에 기대고 있는 부분이 많아 (이는 논의의 핵심적인 대목에서 인용 및 논지의 출처를 밝히는 주석만 일별하여도 쉬이 드러난다) 자칫 편향된 시각을 심어줄 위험성이 있긴 하지만, 해분야의 전문가로서 이 책을 엄밀한 학술적 근거로 활용하는 경우가 아닌 이상 교양서로 읽고 향유할 알반 독자층이 크게 괘념해얄 정도의 단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자로서의 분별력과 양심을 갖춘 전문가라면 이 정도의 특이사항은 알아서 잘 파악하고 참작하여 대처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방가르드‘라는 용어와 얽힌 개념적 혼란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 소득이다 그린버그의 불분명한 기준과 용어법으로 초래된 혼란이 80년대 후반까지 미술비평계에 만연해 있었다는 점, 미국의 비평적 미학적 담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국내에도 이런 경향이 강했다는 점, 후대의 역사적인 평가와 분석이 좀 더 진행되면서 이런 혼란에 대한 진단과 교정을 위한 논의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 등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돠었다 현대미술에 관심하기 시작한 고등학생 시절부터 모더니즘-아방가르드 개념 간의 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아 늘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는데, 해묵은 갈증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어 좋은 독서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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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는 ˝논리학은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러셀의 말이 퍽 인상깊었다 전제가 참<일 경우> 결론도 필연적으로 참<일 수밖에 없는> 관게를 다루는 게 논리학이라면, 전제가 실제로 참<인지> 여부를 따지는 일은 논리에 속하지 않는다 그 일은 세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여타 분과학문들의 소관이다 논리학은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실증과학이고, 논리학은 그 과학들이 말하는 것들 간의 논리적 관계만을 다룬다 ˝논리, 그것은 그 스스로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도, ˝논리는 논리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다자이 오사무의 말도,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갔다

2. <논리적 관계>라는 것을 우리는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가? 전제가 참일 경우 결론이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다는 그 논리적 관계를 우리가 진정 이해하고 있을진대, 하면 우리는 무언가가 참이라는 것을 진정 이해하고 있는가?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참 개념을 우리는 견실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여기서 참에 대해 으레 상당히 포괄적으로 제시되는 조건을 논리적 귀결개념에만 걸맞게 약화시켜 논리학에서의 참이란 논리적 형식에 의해서 참이 되는 것이라 할진대, 그럼 그 때 우리는 <논리적 형식>이랄 것을 진정 가지고 있는가? 직관주의자가 수학에서 건져내는 논리적 형식은 무엇인가? 일상적 논쟁이나 인터넷상 키배에서 우리는 ‘니 논리대로라면 여차여차하다‘라는 말을 자주 쓴다 이 때 말해진 <논리>란 형식논리에서의 논리가 아니라 외려 그 진술에서 선제되는바 세상의 어떤 이치, 법칙, 당연한 귀결관계 등지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이해된 바로서의 논리적 형식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는 논리적 형식이 그렇게 이해되는 소이연은 결국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있다고 여김이 아닌가? 논리적 귀결관계가 전제에 따른 필연적 참됨의 보존성에 달려 있다면, 필연적 참됨 개념에 대한 이해란 우리가 갖는바 세계 전체 혹은 세계의 특수 부분을 관장하는 이치에 대한 이해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럼 헤겔이 옳았다는 건가?ㅡ논리와 이성과 실재는 결국 하나이고 하나여야 하는 방향으로 전개되는가? 헤겔을 원용한 셀라스와 브랜덤은 이에 러셀에 반하여 ‘논리학은 세계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그 때문에 논리학일 수 있다‘는 식의 체계를 전개한 것인가? 비트가 수학적 명제의 참이란 형식에 의한 동어반복일 뿐이라 정의한 데에 러셀이 고통스러웠던 이유도, 그 형식에 의한 동어반복이란 개념이 므엇임지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다던 이유도, 결국 그도 은연중에 수학이 세계에 대해ㅡ혹은 뭐가 되었는 논리 이외의 것에 대해 개입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겠는가? 우리는 결국 삶에서 많은 논리<들>을 이야기하며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수학의 논리, 자연과학의 논리, 역사의 논리, 문학과 예술의 논리, 인생의 논리ㅡ개중 형식논리가 스스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 있는가? 직관주의논리 다치논리 퍼지논지 초일관논리 등, 일탈논리 내지 논리적 다원주의를 지향하는 입장들이 대두한 근본적인 이유는, 논리가 이렇듯 최종적으로는 논리만을 위한 건 아니라는 착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대적 시대상에 기인한 게 아닐까?

3. 논리학 역시 언어로 된 체계이다 콰인에 따르면 언어체계는 자극에 따른 반응을 현시하는 성향들이 조직화된 체계이다 논리학은 특정 언어적 자극에 대한 언어적 반응성향을 현시하는 성향, 즉 언어적 성향에 대한 성향으로서의 메타-성향이다 골자는, 논리적 체계 역시 어디까지나 자연적 자극-반응의 테두리 내에서 조율되는 전체론적 체계의 일부로서, 전체 체계를 고려하건대 자극-반응 간 입출력 관계가 상당부분 미결정적일 경우 논리학 역시 수정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 부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 학습 및 현시에 대한 여타 언어학적 심리학적 인지과학적 이론들을 차치하고, 막연한 수준에서 콰인의 자연주의와 (언어 특정화된)전체론을 받아들인다면, 콰인이 주장하는 바와는 반대되게도 논리적 다원주의는 필수인 듯하다 다만 이를 거부하는 콰인 최후의 보루는 그의 과학주의 내지 물리주의지만(이런 점에서ㅡ즉 그가 이해한 <이성>이란 것이 <과학적 이성>이란 점에서ㅡ콰인은 과학주의적 헤겔주의자였다), 그 요소가 논리학(및 수학)이라는 요소와 맺고 있는 전체론적 망-관계가 나는 상당히 약하다고 본다 다르게 말해 논리학이 과학의 시녀가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는ㅡ즉 과학적 존재론의 언어를 규율짓고 정돈하는 역할에만 머물 필요는 없을 정도로는ㅡ자율적일 수 있으며, 따라서 과학적, 물리주의적 일원주의와는 별도로 다원적일 수 있다고 본다(다원주의를 제외하면, 페넬로페 매디는 수학에 대해 이런 성격의 자율성을 옹호한 셈이다) 그럼 다시 제시되는 선택지는 몇인가?ㅡ우리는 자연주의적 의미론과 함께 논리적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든지, 혹은 자연주의를 받아들이되 콰인식으로 정통적인 1계술어논리만을 오롯이 적법한 논리학으로 받아들이든지, 둘 다를 무시한 채 논리 자체를 위한 추상적 논리체계를 단지 형식과학으로서 계속 구성하든지, 이도저도 아니하고 그저 삶을 살아내든지, 그러면 결국 말년의 비트처럼 철학을 하지 말아야하는지ㅡ이외의 또다른 선택지인가?

4. 분명한 건, ˝논리학은 세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러셀의 철학적인 말도, ˝논리학과 윤리학, 그것은 그것 스스로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라는 비트의 현실적이고 체념적인 말도, ˝논리는 논리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다자이의 문학적인 말도, 각각 어떤 면에서는 이제 올바르지 않은 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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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모든 것
요나스 피스터 지음, 손영식 외 옮김 / 북코리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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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하위 분야별 주요 주제들을 철학사 순으로 간략하게 정리한 개론서이다 모든 내용이 간결하고 압축적인 논증과 반박논증으로 구성되어 있어 철학사에서 굵직한 주제들과 그에 대한 주요 철학자들의 입장을 개략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 배치는 철학사 순이지만 철학사 책이라기보단 주제별 입문서라 봐야겠다 논의가 극히 개괄적이고 피상적이어서 숙달자에겐 필요가 없고, 이제 갓 입학한 철학과 학부 1년생 내지 철학사 교양강의를 수강하는 대학생에게 보조수단으로 추천될 법하다 적당한 독서역량과 더불어 추상적이고 생경한 논의에도 기죽지 않을 지적 배짱을 갖추었다면 고등학생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겠다 간략하고 기초적인 교과서같은 느낌의 책이기에 지적 흥미를 느끼며 읽을 교양서로는 적합지 않고, 쉬운 난이도와 피상적인 논의로 인해 반복적으로 활용할 책으로도 요긴한 편이 아니니,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든 구매소장보다는 빌려서 일별하기를 추천한다

사족. 다뤄지는 주제뿐만 아니라 주제에 대한 접근법 역시 영미철학 내지 분석철학쪽으로 다소 치우쳐 있다 이는 20세기 철학이 다뤄지는 4부에서 저자가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니 초심자라면 좀 더 균형있는 시각을 위해 비슷한 분량과 난이도에서 대륙철학 위주로 쓰인 남경태, ˝한눈에 있는 현대철학˝을 병행하여 읽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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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년전 여름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때려부시며 엄마아빠 싸우는 소리에 주말 새벽에도 잠을 설치다가 둘 다 지쳐 잠들어 조용해질 늦은 오전 즘이면 숨죽여 거실로 나와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 하나 틀어놓은 채 하염없이 맑고 파랗고 투명한 배경으로 하얗게 웃는 구름들 흐르는 창밖 풍경만 벗삼아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던 여름방학이었다 즐거운 기분이라곤 하냥 없이 외롭고 괴롭고 좆같기만 하던 기억인데 헤겔도 하이데거도 읽은지 몇 년은 좋이 지나 지랄맞은 한파에 살만 에이는 한겨울밤, 왜 문득 추억으로 솟아대는 일인지, 모르다가도 모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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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로 보는 패러독스 패러독스로 배우는 논리
손병홍 지음 / 새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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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뚜렷한 주제의식 하에 깔끔하고 알뜰하게 구성된 초중급 교양 논리학 저서이다. 제목에 충실하게도, 철학사의 주된 역설들을 기초적인 논리학 수준에서 분석하고 재구성하여 평가하면서,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러 역설과 얽힌 논리적, 철학적, 수학기초론적 사안과 쟁점들을 초보적인 수준에서 논구 및 해설해준다.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책 전체에 걸쳐 모든 역설들을 자연언어로 준형식화하여 논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해당 역설의 도출과정에서 어떤 지점에 논리적, 의미론적, 철학적으로 문제성이 있는지를 분명하고 깔끔하게 드러내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기초적인 논리학 지식이 있다면 무리 없이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겠으나, 논리학을 학습해본 적 없는 사람이어도 통상적인 논리적 직관만으로 충분히 논의를 따라갈 수 있게끔 서술되어 있다. 철학적으로 적잖이 복잡하고 난해한 주제임에도 이렇듯 초보자에게 접근성이 좋은 탁월한 교양서이니, 개인의 기호와 관심하는 정도에 따라 구매소장도 적극 추천할 법하다. 


 절판되긴 했지만 입수하거나 이용할 경로가 있다면 야마오카 에쓰로의 "거짓말쟁이 역설"을 함께 읽는 것도 좋겠다. 이 책과 비슷한 분량과 난이도로 쓰였으면서 이 책에 제시된 바보다 좀 더 다양한 접근법이나 이론들을 조금 더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으니, 이 책으로 먼저 입문한 뒤 개괄적으로 이해한 바를 보강 및 확장하기에 매우 적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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