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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0, 논리주의 대 직관주의

 

예컨대 데데킨트는 공간과 시작의 직관으로부터 수를 도출할 수 없으며 다만 수는 "사고의 순수 법칙으로부터 즉각적으로 발현되어 나온다"라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그리고 수로부터 공간과 시간의 명확한 개념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는 논리학파의 기본 이론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지만, 거기에 깊이 천착하지는 않았다.

 

모리스 클라인, 수학의 확실성, 381




2. 수의 무한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대한 Dedekind의 설명

 

DedekindFrege가 자연수를 취급하는 방식은 대체로 유사하다. Frege의 정리가 보여주는 바는, 유한 기수(基數)finite cardinalsHume의 원리Hume's principle에 따라 도입되고 직후자(直後者) 관계(계승수 관계)successor relation가 기수성 연산자cardinality operator에 의해 정의되고 나면, 후자와 더불어 유한기수는 Dedekind-Peano 공리Dedekind-Peano axioms를 만족한다는 것이다. 역으로 Dedekind(정리 120)는 개념 변항concept variable이 오직 유한 개념finite concept만을 아우르는range over[유한 개념만을 논항으로 취하는?] 형태의 Hume의 원리가 무엇인가?[수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Was sind und was sollen die Zahlen?]에 제시된 체계 내에서 얻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이 자연수의 존재와 무한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앞서 Frege의 방법론을 꽤 상세히 살폈으므로 여기서는 Dedekind의 설명을 살펴보기로 한다.

Dedekind의 정의에 따르면 한 체계system[집합]는 그것의 -부분체계proper subsystem와 일대일 대응one-to-one correspondence될 수 있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Dedekind적으로) 무한하다(Dedekind) infinite. 이에 비해 단순 무한한simply infinite 체계란 Dedekind-Peano 공리를 만족하는 관계의 논의영역을 형성하는 임의의 체계로 정의된다. 이렇게 정의하고 난 뒤 Dedekind는 모든 무한체계가 단순 무한한 부분체계를 포함하고 있음을 증명한다(정리 72). 우리가 하나의 무한체계의 존재를 우선 증명했다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하나의 단순 무한체계 역시 존재해서 그 체계 및 체계 관계들이 Dedekind-Peano 공리의 모형이 됨을 알 수 있다. 단순 무한체계를 얻고 나면 우리는

 

[그 체계를 이루는] 요소element들의 고유한 특성special character을 전적으로 무시한 채, 각 요소들의 구별가능성distinguishability만을 유지하면서 그것들이 체계 내에서 맺는 상호관계만을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은 자연수natural numbers序數ordinal numbers 내지 그냥 단순히 수라고 불린다. 체계의 요소들이 갖는바 여타 모든 내용을 제거(추상화)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수를 인간 정신human mind의 자유로운 창조물이라고 정당하게 부를 수 있다. (무엇인가?, 68.)

 

여기서 수에 관한 FregeDedekind의 설명 간의 중요한 차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Dedekind의 관점에서, 단순 무한체계를 제시하는 일은 수에 대한 개념을 창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지, [Frege가 겨냥하였듯이] 개별 수들 간의 동일성을 고정시키고자 한 것은 아니다. 실지로 Dedekind는 자신의 착상을 그런 식으로 확장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했다. 반면 Frege는 개별 수들의 지위가 자립적인 대상self-subsistent object임을 보장하고자 그러한 작업[수 동일성 진술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것]을 수행했다. Dedekind의 분석에서 수의 존재는, 단순 무한체계를 이루는 요소들의 특정 성질들을 추상화함으로써 그 순서구조ordinal structure만을 얻게 해주는 정신적 능력mental power의 귀결일 따름이다.

Dedekind 방법론의 성공 여부는 무한체계의 존재에 달려있다. Dummett(1991a[Frege와 분석의 역설Frege and the paradox of analysis, 49ff.])이 지적했듯이, Dedekind는 방금 살펴본 방식에 따라 추상화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수 개념을 창출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함으로써 그러한 체계의 존재를 보장하고자 했다. 그 경우 그의 정언성 정리categoricity theorem(정리 132)에 따르면, 구성 초기에 드러났던 특수성peculiarity은 사라지고 무한체계 구성의 일반성generality이 보장될 수 있다. 이는 정리 66의 목표로서 그 증명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나의 사고thought의 세계, 즉 내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물들로 이뤄진 총체 S는 무한하다. 왜냐하면, sS의 한 요소를 지칭할 경우, s가 나의 사고의 대상이라는 내용의 사고 역시 S의 요소이기 때문이다. s´를 요소 s에 대한 image φ(s)으로 간주할 수 있다면, 그렇게 결정된 S로의 사상(寫像)mapping φ on S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갖는다: φ의 상 S의 부분이자 진-부분proper part이다. 왜냐하면 S에는 [φ에 의해 결정되는] 그러한 모든 사고 과는 다르기에 에는 포함되지 않는 요소(가령 나의 자아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abS의 각기 다른 요소들이라면 그것들의 상 역시 각기 다르며, 그런즉 사상 φ는 명백하게 잘 정의된다. 따라서 S는 무한하다. q.e.d.

 

Frege와 마찬가지로 Dedekind는 사유의 영역을 객관적인 것으로, 즉 우리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한 영역에 무리 없이 접근할 수 있음은 사고가 우리 이성에 투명하게 비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유 영역은 무한체계의 범형인바, xy라는 나의 사고의 대상이다라는 관계란 내 사고의 대상으로 이뤄진 부분체계로부터 그것 자체의 진-부분으로 사상하는 일대일 함수one-one function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범형으로부터 우리는 무한체계의 개념을 추상화하며, 그에 따라 수 개념을 추상화한다. Dedekind의 증명이 성공적이기 위해서는 사고라는 것 자체가 진정한 대상proper object이어야 한다. 1차 개념의 논항, 정확히 말해 사고와 그 자체로는 사고가 아닌 대상 간에 성립하는 관계로서 x는 나의 사고의 대상이다라는 개념의 논항이 될 수 있어야 한다. Dedekind가 사고의 본성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지는 않기에, [수 개념에 대한] 그의 설명이 일관적이지 않은 사고이론에 토대하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Dedekind(사고가 진정한 대상이라는 추가조건을 받아들임과 더불어) Frege의 것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고이론을 암묵적으로 가정했다고 간주한다면, [Frege의 사고이론에서 야기되는] 개념/사고 역설1)은 수의 무한성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도 걸림돌이 될 것이다. 즉 정리 66이 실패할 경우 우리는 수 개념을 추상화할 수 있는 범형을 잃는 셈이며, 그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수의 핵심적 속성을 알게 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불분명한 것으로 남게 된다.


1) 같은 책, 149(‘Russell의 명제적 역설과 Frege의 사고 개념) 참조.

 

William Demopoulos, Peter Clark, "The Logicism of Frege, Dedekind, Russell": S. Shapiro . The Oxford Handbook of Philosophy of Mathematics and Logic,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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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쪽


1. 어떤 형태 어떤 분야의 학문을 하든, 명시적으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기초적이고 원초적이고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적 개입이 그 학문에 필요불가결함을, 샤피로는 인정하고 들어가는 듯하다 그 학자가 그렇게 개입하는 형이상학적인 무언가something가 정확히 무엇<으로> 기술될 수 있는지, 아니면 여하간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지 정도의 수준에서만, 우리가 명시적으로 말할 수 있는 형이상학과 인식론 둘 중 하나에의 가중치가 변별될 수 있다* 이상화된 수학적 대상을 무엇<으로> 식별하는 일, 가령 논리주의마냥 논리학으로, 혹은 형식주의마냥 기호들과 그 체계의 규칙으로 식별하는 일이 가망이 없다면, 직관주의자는 이상화된 <대상>에서 눈을 거둬들이고 <이상화>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샤피로가 지적하는 점은 그런 식으로 초점을 맞추는 일 자체도 형이상학적 개입이 이미 이뤄진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ㅡ그에 덧붙여, 형이상학과 인식론 양자에서 제기돠는 부담을 덜고자** 비숍식의 중립적 구성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결국 여하한 수학철학적 사유도 경유하지 않은 채, 그저 일상적이고 평화롭게 이해되는 바로서의 수학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인바, 이는 ‘수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대해 ‘수학은 수학이다‘라고 답하는 격이다 그리고 이는 그 질문을 그냥 무시하는 것과 진배없다 직관주의 입장에서 ˝자유선택 수열이 없어˝진 그 수학을 하겠다는 말이 이러한 무시(무시1)에 해당한다면(즉 직관주의가 이해한 <수학>을 ˝빈약하게˝ 만든다면), 고전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중간 배제[배중률]가 없˝어진 그 수학을 하겠다는 말 역시 그러한 무시(무시2)에 해당한다(즉 고전주의가 이해한 <수학>을 ˝빈약하게˝ 만든다) 샤피로가 지적하는 점은, 전자가 그러한 무시1을 용납할 수 없을진대, 후자도 그러한 무시2를 용납할 수 없는 충분한 근거가 있으며, 그 근거는 초두에 말한바 그 어떤 학문분야에 대해서도 형이상학적 개입이 상정된다는 역사적, 원리적, 철학적 현실이라는 점이다

2. 불분명하고 무심하지만 날카로운 비평적 논증의 한 사례이다 (내가 재구성한)

3. 우리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일상적인 직관을 벗어나는 수준에서라면, 존재론적으로 기운 철락자에겐 인식론적 부담이 큰 반면, 인식론적으로 기운 철학자에겐 존재론적 부담이 크다는 일반적 경향이 철학사를 통틀어 관찰된다


** 나는 언어철학에서 내포 문재와 관련하여 비슷한 스탠스를 취한 인물로 R. 몬테규를 생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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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구문론으로의 도정, '단일언어 프로젝트' 절 중)


 ...Carnap이 칭한바 논리-수학적 표현에 대한 "구성주의적constructivist" 해석과 "절대주의적absolutistic" 해석 간의 충돌... (중략) 비록 Carnap은 수학적 진술에 관한 구성주의적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 사안에 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하려 하였다. 그에 따라 각각의 메타수학적 개념들에 대해 a-버전(절대주의적 버전)과 c-버전(구성주의적 버전) 모두를 도입한 뒤(대체로 c-버전에는 c-접두어가 붙는 반면 a-버전에는 그렇지 아니하다), 어느 해석을 활용할지에 대한 결정은 독자의 손에 맡겨두었다. 

 첫 번째로 설명되는 개념은 한 공리체계axiom system(이하 'AS'로 약칭)에 대한 모형model 개념이다. f(R, S, T)를 하나의 AS라 해보자(여기서 'R', 'S'. 'T'는 그 체계 내의 유일한 원초용어primitive 내지는 자유변항free variable이다). 그 경우, R1, S1, T1이 PM 내에서 정의 가능한 적절한 유형의 관계들이고 f(R1, S1, T1)가 "참"일 때, 우리는 관계체계relation system (R1, S1, T1)이 f(R, S, T)의 모형이라고 말한다("탐구Untersuchungen", 44쪽). (PM 내에서의(혹은 여타 올바른 논리체계 내에서의) 참 개념과 증명가능성 개념을 Carnap이 적절히 구분했는지 여부는 다소 의심스럽다.) 非-추상적인 대상들을 관계항으로 갖는 관계체계 역시 f(R, S, T)을 참이게 만들긴 하지만, Carnap은 '모형'이라는 용어를 오로지 수학적인 관계체계로만 제한하고, 그러한 비-추상적 구조는 별도로 "실현realization"이라 칭하였다. 

 어떤 공리체계 f(R)이 모형을 갖는 경우 즉 (E)f인 경우 그 체계는 "만족된다satisfied(erfuellt)". 그에 따라서, 그 체계에 대한 모형이 제시될present 수 있는 경우 그 체계는 "c-만족된다c-satisfied". f(R)이 아무런 모형도 갖지 않을 경우 즉 ~(E)f일 경우 그 체계는 '공허하다empty'. (Carnap의 표기법에서 '(E)f'는 '(ER1) ... (ERn)f(R1 ... Rn)'의 축약형이다; "탐구", 46쪽) 非-일관적 명제함수란 하나의 명제함수와 그 부정의 연언이다. "어떤 AS가 모순적인 귀결을 가질 경우 즉 (Eh)(f → (h & ~h))일 경우, 그 체계는 '비-일관적inconsistent'이라 말해진다. 그에 따라서, 그러한 모순적인 귀결이 제시될 수 있는 경우 그 체계는 'c-비일관적이다c-inconsistent'[강조는 인용자]. ... 어떤 AS가 비-일관적 귀결을 갖지 않을 경우 즉 ~(Eh)(f → (h & ~h))일 경우, 우리는 그 체계를 '일관적consistent'이라 칭한다." (46-7쪽)

 다음으로 Carnap은 여러 정리들을 증명하는데, 개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a) 비-일관적 공리체계는 공허하다, (b) 공허한 공리체계는 비일관적이다, (c) c-공허한 AS는 c-비일관적이다, (d) 그 역도 성립한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증명절차는 다음 절에서 탐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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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최근의 동향

 

이번 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언어철학자들에 의해 주로 논의되어온 다음 다섯 가지 영역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그 과정에서 앞선 들에서 탐구된 개념 및 이론들이 종종 활용될 것이다): (1) 주장(主張)(단언(斷言), 긍정적 서술)assertion, (2) 맥락-상대성context-relativity, (3) 허구적(虛構的) 실체fictional entity, (4) 추론주의(推論主義)inferentialism, (5) 슬러slur. 다만 이 주제들에 관한 모든 논의들을 철저하게 살펴보기보다는 독자의 흥미를 고취하는 정도로만 개관할 것이다.

 

 

주장

 

Frege판단(判斷)judgement한 명제를 참이라고 받아들임acceptance of a proposition as true으로, 그리고 주장(主張)(단언(斷言), 긍정적 서술)assertion판단을 언어적으로 표출(表出)(현시(顯示))verbal manifestation of judgement으로 특징지었다. 그는 주장이라는 표현 대신 말하기to say, 주장하기proclaim, 진술(陳述)하기state, 긍정(肯定)하기affirm, 언명(言明)하기declare, 선언(宣言)하기proclaim, 공표(公表)하기announce, 제언(提言)하기put forward, 공언(公言)하기avow 등등 미묘하게 다른 개념들을 표현하는 여타 용어들을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Frege의 선례를 따라 주장 개념을 핵심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7에서 우리는 Austin을 따라 주장이라는 화행(話行)speech-act이 규약(規約)convention에 지배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 바 있다. 지면상의 이유로 주장 화행이 주장하는 사람asserter의 심리psychology 내지 의도(意圖)intention의 측면에서 -규약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관점은 여기서 차치해두기로 한다. 이러한 견해는 Grice의 영향력 있는 두 논문 의미Meaning(1957) 화자 의미와 의도Utterer’s Meaning and Intention(1969)에 개진된 것으로서, 두 글에서 Grice는 다른 무엇보다도 주장을 화자의 의사소통적 의도communicative intention의 측면에서 정의하고자 시도하였다(이에 대한 맛보기로서 이번 말미의 탐구문제를 참조할 것).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도외시한 채 주장 화행을 최소한 부분적으로 규약적인 종류의 행위로, 즉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관습행위socially constituted practice로 가정할 것이다. 이러한 논점을 Michael Dummett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내비친 바 있다:

 

언어적 행위linguistic act는 내적 상태interior state의 외적 표현으로 분류될 게 아니라 규약적 행위conventional action로 분류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주장이라는 행위는 한 사람이 해당 문장을 참이라고 판단하는 내적 행위(혹은 믿는다는 내적 상태)를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그 문장을 발화하는 행위로 설명될 게 아니라, 주장적 효력assertoric force을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문장의 사용을 지배하는 규약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Dummett 1973[Frege: 언어철학Frege: Philosophy of Language], 311.)

 

주장이 규약적이라는 점을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이러한 특정 화행을 특징짓는 그 규약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Elizabeth AnscombeJohn Rawls를 따랐던) Searle을 따라 규제적(規制的) 규칙regulative rule구성적(構成的) 규칙constitutive rule이라는 구분을 도입하고자 한다. 먼저 규제적 규칙이란, 가령 영국 도로에서 통용되는 좌측통행운행규칙과 같이, 이미 이루어진활동pre-existing activity을 사후적(事後的)으로 규제하는 규칙이다. 영국 도로에서 좌측통행 규칙을 어긴다고 해서 그 행위가 자동차 운행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다만 이는 운전자의 목숨을 그의 것이 아니게 만들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구성적 규칙이란 그 규칙의 지배를 받는 해당 활동 내지 행위가 성립하기 위해 그 규칙 자체가 반드시 필요한 규칙이다. 가령 체스나 풋볼을 정의하는 규칙들은, 단순히 체스말을 배치하거나 공을 차서 네트에 넣는 방식을 규제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체스에서 말들을 운용하거나 풋볼에서 득점하는 것 자체를 가능케 하는 규칙이다. 좀 더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체스나 풋볼에서 통용되는 규칙이 없다면 우리가 아는 바로서의 체스나 풋볼 게임 역시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가령 어떤 게임에서 체스말과 체스판이 사용되더라도 우리가 아는 체스 규칙에 따라 게임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는 어쨌든 체스게임이 아니다.] 에서 살펴본바 삶의 형식들forms of life이 구성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 재산을 소유하는 것, 혼인하는 것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제도(制度)social institution 내지 삶의 형식들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들이 존립할 수 있게 해주는 특정한 구성적 규칙들이 존재하기 때문인 것이다.

규제적/구성적 규칙 구분은 많은 비판을 받아왔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 구분을 일단 문제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러한 구분을 도입하는 요지는 주장이라는 언어행위가 구성적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착상을 염두에 둔 채, 이제 Moore의 역설(逆說)Moore’s paradox(이는 Russell과 대략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향력 있는 철학자 George Edward Moore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이라 알려진 역설의 한 사례를 생각해보자. Gia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냉장고에 치즈가 있지만,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Gia의 발언은 어딘가 잘못된 것처럼 여겨진다. , Gia에 의해 발화된 문장 자체는 (‘p&p’ 형식과 같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냉장고에 치즈가 있는데도 Gia가 냉장고에 치즈가 없다고 믿는 것은 명백히 논리적으로 가능한 사태이기 때문이다.1) 여기서 문제는 그녀가 어떤 의미에서 스스로를 표상하는(드러내는)represent 방식, 냉장고에 치즈가 있다의 내용을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믿는 동시에, 그 내용을 믿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요컨대 위 발화의 부적절성infelicity은 문장의 진리치와 관련되는 의미론적인 층위에 있는 게 아니라, 문장의 발화와 관련되는 화용론적인 층위에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만을 말해야 한다는 것은 주장의 본성에 속하는 사안이다. 따라서 다음 규칙은 주장에 대한 구성적 규칙으로서, 이를 위반하는 것은 주장을 지배하는 규약을 위반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믿음-규칙Belief-rule) p라고 믿는 경우에만 p라고 주장해야 한다.

 

1) ‘x는 치즈이다‘Cx’, ‘x는 냉장고에 있다‘Rx’, ‘sp라고 믿는다‘Bs[p]’로 각각 기호화한 뒤, 본문의 예시문을 술어논리의 언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지표사 와 연관된 구문론적의미론적 문제는 차치한 채 단순히 ‘i’로 기호화하기로 한다):

 

(x)(Cx&Rx)&Bi[(x)(Cx&Rx)].

 

첫 번째 연언지 ‘(x)(Cx&Rx)’의 부정문은 두 번째 연언지에서 믿음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서 나타나고 있는바, 이 문장은 ‘p&p’ 형식의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 주의할 사항이 있다. Gia가 냉장고에 치즈가 있다고 믿지 않으면서 단지 냉장고에 치즈가 있다고만 주장한다면(어쩌면 그녀는 실제로도 냉장고에 치즈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수 있으며, 그 경우 Gia는 거짓말을 한 셈이다) 위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지만, 그 경우에도 어쨌든 그녀는 냉장고에 치즈가 있다는 주장을 한 셈이다. 즉 믿음-규칙은 주장행위가 이뤄질 때마다 자동적으로 적용되지만, 가령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하는 경우처럼, 그러한 규칙 내지 규범(規範)norm이 준수되지 않는 경우가 가능한 것이다. 약속의 경우 약속을 한 당사자는 그것을 이행할 의무(義務)obligation를 반드시 떠안게 된다. 즉 약속한 바를 이행할 의무가 부여된다는 것은 약속 행위에 대해 구성적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주장 행위에 대해 구성적이다. 믿음-규칙을 위반하는 주장행위는 신뢰할 수 없는 불성실한 행위이다.

지금까지의 관찰은 우리를 Grice적인 영역으로 이끄는 듯하다. 믿음-규칙을 위반하는 것은 Grice가 제시한 협조원리들 중 질의 준칙을 위반하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긴 하다. 그런데 Grice의 준칙들은 규제적인 규칙인 동시에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적용될 수 있는 대강의 규칙rules-of-thumb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 구성적 규칙이 가능할 수 있는지, 말하자면 주장을 정의해 줄 구성적 규칙이 무엇인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Grice의 질의 준칙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른 가능성이 발견될 수 있을 듯하다. 우선 질의 준칙 자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짓이라 믿는 바를 말하지 말라’, ‘적절한 증거가 결여된 바를 말하지 말라’. 이에 두 항목을 각기 적절히 활용하여 다음과 같은 두 규칙을 정립할 수 있겠다:

 

(-규칙Truth-rule) p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라고 주장해야 한다.

(정당화-규칙Justification-rule) p라는 정당화된 믿음을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라고 주장해야 한다.

 

유의할 사항은, 믿음-규칙과 마찬가지로 위 두 규칙 역시 무언가를 긍정적으로 주장하는 데 대한 충분조건을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두 규칙은 적절한 주장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만을 명시하고 있다. 다르게 말해 두 규칙은 우리가 무언가를 주장할 때 준수할 것이라 기대되는 제약조건만을 나타낸다.

이제 믿음-규칙과 위의 두 규칙을 모두 결합하면 다음을 얻는다:

 

(JTB-규칙JTB-rule) p라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 that p을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라고 주장해야 한다.

 

정당화된-참인-믿음(약칭 JTB)은 전통적으로 지식(知識)knowledge에 대한 정의항으로 간주되어왔다. 그런데 Edmund Gettier는 유명한 논문에서 JTB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지식이 아닌 사례를 제시하였다.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나는 우리 집 울타리 건너편에 개가 한 마리 있다고 믿는다. 울타리가 워낙 빽빽한 정원수로 뒤덮여 있기에 내가 개를 본 적은 없지만, 늘상 그 방향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에 나의 믿음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하지만 사실 평소 내가 들었던 소리는 실제 개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녹음된 개소리였다. 그런데, 비록 나는 모르고 있지만, 울타리 건너편에서는 개 한 마리가 늘상 조용히 어슬렁거리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건대, 나는 울타리 건너편에 개가 있다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을 갖고 있긴 하지만, 울타리 건너편에 개가 있다는 것을 내가 안다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내가 이러한 기이한 상황에 놓인 것은 순전한 우연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나의 믿음을 정당화해 주는 요인(녹음된 개소리)이 내 믿음을 참이게 만들어 주는 요인(조용히 어슬렁거리는 개)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듯 나의 믿음은 지식에 대한 JTB 조건을 만족함에도 이는 우연의 일치에 지나기 않기에 지식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JTB 조건은 지식에 대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지식에 대한 소위 Gettier 반례가 처음 제기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지식에 대한 정의인 JTB 조건을 약간만 수정하면 Gettier 사례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전개된 현대 인식론의 역사를 보면, 최초 Gettier 사례의 미묘한 변형태들이 수정된 JTB 정의의 반례로서 계속 제기되었으며, 최종적으로 JTB 정의를 만족스럽게 수정하려는 시도는 지난한 일로 판명되었다. 이에 Timothy Williamson은 지식이 이런 식으로 분석될 수 없으며 지식을 원초적(原初的)primitive(정의불가능한indefinable)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따라서 그는 주장에 대한 제약사항으로 다음을 제안한다:

 

(지식-규칙Knowledge-rule) p라는 것을 아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p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는 구성적 규칙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규칙들과 유사하게, 지식-조건이 만족되지 않는 주장들은 매우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약속할 때 약속 당사자가 약속을 이행해야 한다는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과 정확히 동일한 의미에서, 무언가를 주장할 때 주장하는 사람은 지식-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제안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화행은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된다(이 예시는 Moore의 역설을 확장시킨 것이다):

 

냉장고에 치즈가 있지만, 나는 그것을 모른다.

 

Williamson의 제안은 많은 지지를 얻음과 동시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을 들자면, 지식-규칙은 주장행위가 지식을 전달하는transmitting 하나의 방식이라는 생각 및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은 주장한 바를 방어하는defending 입장에 개입하게 된다는 생각과 잘 부합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지식-규칙보다 약한 규칙들, 가령 참-규칙 내지 심지어 믿음-규칙 역시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것으로서 주장되었다. 그리고 주장 개념을 언어철학 내지 화용론에서 핵심적인 사안으로 간주하는 것부터가 애초에 잘못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우리가 현실에서 실제로 수행하는 서술적 화행declarative speech-act들이 언어철학에서 생각되는 것만큼 균일하고 통일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말하기, 상기(想起)하기, 경고하기, 유발하기, 조언하기, 상담하기, 표현하기, 지도(指導)하기, 기술하기, 보고하기 등의 다양한 화행들이 지닌 차이점들은 매우 미묘하겠지만, 어쨌든 그 각각은 나름의 고유한 규범들 집합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맥락-상대성

 

독자들은 이제 지표사(指標詞)indexical에 익숙할 것이다. 지표사에 속하는 표현들로는 ’, ‘’, ‘우리’, ‘he/him’, ‘그녀’, ‘지금’, ‘그 때’, ‘오늘’, ‘어제’, ‘여기’, ‘저기’, ‘저것’, ‘이것등이 있다. 이러한 단순한 형태의 지표사뿐만 아니라 너희 어머니가 기르시는 고양이처럼 여러 표현들이 혼합된 형태의 지표적 표현도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맥락-상대적이다context-relative 내지는 맥락에-민감하다context-sensitive고 말해진다. 즉 지표적 표현들은 오로지 특정한 맥락(脈絡)context에서만 지시체를 가지며, 그것들이 사용되는 맥락(이러한 맥락으로는 시간, 장소, 화자 및 청자의 동일성, -지시화된demonstrated 대상의 동일성 등이 있다)에 따라 각기 다른 대상을 지시한다.

일찍이 지표사에 관한 에서 우리는 크다’, ‘부유하다’, ‘가깝다등 단어들을 언급한 바 있지만, 이에 관해 상세히 논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형용사들 역시 맥락에 민감한 것처럼 보인다.2) 예를 들어 누군가 쥐 한마리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보자:

 

(1) 저거 엄청 크다!

 

이 경우 이 문장에 의해 할당되는 사이즈의 범위는, 그와 동일한 문장이 하마를 가리키면서 말해질 경우 그 하마에게 할당되는 사이즈의 범위와 분명 다를 것이다. 그 하마가 평균적인 하마에 비해 현저히 작다면 전자는 참이더라도 후자는 거짓일 것이다. 물론 아무리 작은 하마라 하더라도 쥐보다는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하마는 하마치고는작은 셈이다. [즉 전자에서 할당되는 사이즈가 크다고 말해질 수 있다면 후자에서 할당되는 사이즈 역시 당연히 크다고 말해질 수 있어야 하겠지만, 이는 크다가 사용되는 맥락이 무시될 수 있는 경우에만 올바르다.] 이렇듯 크기에 대한 표준(標準)standard 내지 적절한 비교집합comparison calss은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듯하다.


2) (原註) 이외에도 맥락-상대성을 갖는다고 추정되는 표현들로는 다음을 들 수 있다:

(1) 한 용어가 자동사 형태로 나타나지만 암묵적으로 타동사 역할을 하는 경우. 가령 난 준비됐어라는 문장은, 어떤 행위나 사건을 나타내는 용어 𝜙에 대해 나는 𝜙할 준비가 되었다라는 문장의 줄임말인 셈이다. [그리고 𝜙가 나타내는 행위/사건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이 문장이 사용되는 맥락에 의해 결정된다.] 신나는 파티에 가기 위해 이제 막 외출하기 직전 상황에서 당신이 ‘Berta는 준비 안됐대라고 말한다. 통상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슨 준비?’ 하는 물음에 무리 없이 답할 수 있겠지만, 당신이 말한 문장 그 자체만으로는 Berta가 무슨 준비가 되지 않았는지를 알 수 없다.

(2) Putnam[]’과 같은 자연종(自然種) 용어natural kind term가 암묵적인 지표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논증한다. 자연종 용어가 지시하는 대상은 그 용어가 사용되는 가능세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서 2차원주의 의미론two-dimensional semantics을 논할 때 살펴보았듯이, 현실세계와는 다른 가능세계non-actual possible world에서 이 발화될 경우, 표현되는 개념 내지 의미는 동일하겠지만 그 지시체는 분명 다르다. 예를 들어 현실의 발화맥락context of utterance과는 다른 발화맥락에서 로 칭해지는 물질은 H2O가 아니라 XYZ일 수 있다.

(3) 통상적인 고유명ordinary proper name에는 지표성이 결부되어 있거나 혹은 그 자체가 지표적이라고 주장될 수 있다. 한 학생이 ‘John Smith’를 발화한다면 이는 누구를 지시하겠는가? 답은 다음과 같다: ‘John Smith’라는 이름을 가진 실존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 발화가 지시하는 이는, 그 이름에 대한 화자의 사용과 연결된 인과적 연쇄의 기원에 있는 한 사람이다. 따라서 화자와 연관된 적절한 인과연쇄를 골라내는 매개변수 x를 취하여, ‘John Smithx와 같은 식으로 표기할 수 있다


부유하다에 대한 표준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중산층 이하의 사람을 보고 부유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샌프란시스코 시민의 중위소득은 78,378달러이다. 그런데 중위소득이 590달러인 에티오피아에 사는 사람이 앞의 샌프란시스코 거주민과 동일한 소득을 번다면, 우리는 그 에티오피아 사람이 부유하다고 말할 것이다. ‘가깝다는 형용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녁을 먹기 위해 괜찮은 식당을 물색하면서 꽤 가깝네하고 말하는 경우와, 여행할 나라를 고르기 위해 지구본을 돌려보면서 꽤 가깝네하고 말하는 경우, 각각에 적용되는 근접성에 대한 표준은 분명 다르다.

이러한 비교급 형용사 및 비교급 전치사의 경우에 중요한 것은 표준 내지 비교집합에 대한 암묵적 상대성implicit relativity이다. 이에 대한 한 가지 설득력 있는 가설은 크다와 같은 단어들에는 각기 다른 표준 내지 비교집합을 지시하는 암묵적 지표사가 수반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암묵적 지표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크다x와 같은 식으로 표기할 수 있다(종종 지표사는 특정 규칙에 의해 논의영역이 제한된 자유변항free variables처럼 간주되고는 한다).

맥락-민감성이 부각되는 또 다른 종류의 사례는 양화사가 포함된 문장 및 모든 사람과 같은 양화사quantifier-phrase이다(이는 6첫 번째 말미에서 잠시 언급된 적이 있다). 다음 문장을 보자:

 

(2)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무례했다.

 

Sally가 파티장을 빠져나오면서 이 말을 중얼거렸다고 해보다. 이 경우 (2)에 대한 Sally의 발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무례한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인 게 아니라, 그 파티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혹은 그 파티에서 Sally와 대화하면서 무례하게 굴었던 모든 사람)이 무례한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라고 해야 한다. 이러한 사례에서 발화와 연관된 맥락은 부분적으로 화자의 의도intention에 의해 결정되는 듯하다. 다른 맥락에서 발화된다면 (2)에 대해 의도된 일반화의 범위는 이 이상으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가령 모든 사람Sally가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와 대화했던 모든 사람들을 아우를 수도 있다.

비교급 형용사에는 비교집합을 지시하는 암묵적 지표사가 수반된다고 생각해야만 하는 것과 유사하게, 양화사에는 대상들의 집합을 지시하는바 사실상 암묵적 지표사인 논의영역 제한자domain restrictor가 수반된다고 생각해야만 한다. 한정 기술구가 사용되는 방식을 Russell의 기술구 이론에 따라 생각해본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선 Russell에 따르면 F’는 사실상 양화사이다. ‘FG하다는 정확히 하나의 F존재하고 모든 FG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다. 정확히 하나의 F가 존재할 경우 한정 기술구 F’, Russell의 용어법에 따르면 특정 대상을 지칭denote하며, 우리의 느슨한 용어법에 따르면 특정 대상을 지시한다. 그런데 예를 들어 그 고양이라는 한정 기술구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양이가 그 논의영역으로 취해진다면 (고양이가 딱 한 마리만 남아있는 슬픈 세계가 아닌 바에야) 지시체는 특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그러한 표현은 분명 지시체를 갖는다. 굳이 고양이가 딱 한 마리만 남은 슬픈 세계가 아니더라도, 이 현실세계에서 우리는 종종 그 고양이는 침대 위에 있다는 말을 무리 없이 사용한다. 따라서 그 말은 그 고양이’(그리고 목전에 있는 침대를 가리키는 그 침대’)에 아래 첨자가 부가된 그 고양이x는 침대y 위에 있다와 같은 식의 발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여기서 xy에 대한 논의영역 제한자는 가령 화자가 기르는이 방에 있는 따위가 될 것이다.

암묵적인 맥락-상대성이 드러나는 또 다른 사례로서 일상에서 친숙한 것을 들 수 있다. 비근한 일이지만 비가 온다가 에딘버러에서는 참이면서도 아테네에서는 거짓일 수 있다. 동일한 한 진술의 진리치가, 발화의 시점이 주어진 경우 발화가 이뤄지는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발화의 장소가 주어진 경우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에딘버러에 있는 사람이 명시적으로 아테네에는 비 와하고 말함으로써 아테네의 날씨에 관해 말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바람이 분다’, ‘시끄럽다’, ‘자스민 향기가 난다’, ‘밝다등의 진리치 역시 발화가 이뤄지는 시점 및 장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철학적 개념: 가치(價値)value. 익숙하지만 다소 논쟁거리인 또 다른 사례는 일부 가치진술value statement들이 지닌 암묵적 상대성이다. Joe‘Beatles가 제일 위대한 가수야!’ 하고 말하고 Karen‘Rolling Stones가 제일 위대한 가수야!’ 하고 말한다. 두 사람의 의견 불일치는 진정한 불일치인가? 두 입장은 상호 모순되는가? 물론 두 사람은 이에 대해 논쟁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두 사람은 각자의 진술에 암묵적 지표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서 JoeBeatles그에게for him 가장 위대한 가수라고 말한 셈이며, KarenRolling Stone그녀에게 가장 위대한 가수라고 말한 셈이다. 그 경우 두 사람의 입장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이와 동일한 종류의 트릭은 윤리적 진술, 미학(美學)aesthetic 진술, 취향(趣向)taste에 관한 진술 등 가치에 관한 그 어떤 진술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가치평가와 얽힌 논쟁에 숨은 이러한 혼동은 JoeKaren 사례에서 충분히 해명되었을 것이다. 좀 더 뚜렷한 경우를 들자면, 민트초코가 맛있는지 여부에 대한 논쟁과 같이 미각적 취향에 관한 논쟁에서 이러한 혼동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민트초코는 어떤 사람에게는 맛있게 느껴지고 그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오로지 극단적인 객관주의자라든가 음식 스노비즘에 취한 사람만이, 둘 중 어느 취향이 옳은지를 결정해줄 객관적인 사실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민트초코를 좋아하고 그와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하는 것일 뿐, 그게 전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가령 임신중절이 올바른지 여부와 같은 무겁고 심각한 윤리적 사안에 관한 논쟁에서는 의견대립이 이런 식으로 해소되는 일이 드물다. ‘하지만 임신중절은 어쨌든 나한테는 나쁜 게 아냐!’ 하고 말한다 해서, 낙태를 공공연히 긍정하는 입장에 가담하지 않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는 중간지대로서, 외견상 분명해 보이는 논쟁이 진정한 논쟁인지, 혹은 n항 술어를 n+1항 술어로 변환하여 지표사를 삽입시킴으로써 그 논쟁이 진정 축소될 수 있는지 여부는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할 사안이다.[?]

상대화된relativised 형태의 가치진술에서 적절한 관계항이 될 수 있는 것은 개별 화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Ax에게 가치가 있다라는 형식의 진술에서 x는 개별 화자뿐만 아니라 특정 인종, 국가, 사회집단의 구성원들과 같은 복수의 사람들로 이뤄진 한 집합일 수도 있다.

 

철학적 개념: 지식. 당신이 다음 문장을 말한다고 상상해보자:

 

(3) 나는 그녀가 욕실에 있는 것을 안다.

 

(당신은 방금 그녀가 욕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으며 그 이후로 욕실 문은 줄곧 닫혀 있었다.) 그런데 당신은 철학 강의 시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4) 나는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두 진술은 동시에 참일 수 있는가? 우선 한편으로, (4)가 참이라면 (3)은 참일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신이 꿈꾸고 있는 게 아님을 전혀 알지 못한다면, 당신의 친구가 욕실에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경험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녀가 욕실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셈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식에 대한 기준이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도 있다. 가령 회의론을 논하는 철학 강의 시간에서라면 지식에 대한 엄밀한 기준을 가정하는 것이 올바른 반면, (3)과 같은 문장을 말하는 일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그 기준이 다소 완화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위 두 진술은 동시에 참이 될 수 있다.

인식론적 맥락주의epistemic contextualism에 따르면 'Sp라는 것을 안다' 형식의 주장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는, S가 누구이고 p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뿐만 아니라, 발화의 시점에 어떤 기준이 적용되고 있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식은 숨겨진 지표사를 지니고 있는바, ‘알다x와 같이 발화의 맥락에 의해 고정되는 변항을 암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매개변항 ‘x’의 자리는 특정 맥락에 따라 그 맥락에서 우세하거나 의도된 지식의 기준 내지 종류를 기술하는 어구로 채워진다. 따라서 우리는 그녀가 욕실에 있다는 것을 절대적으로simpliciter 알 수는 없지만, 그녀가 욕실에 있다는 것은 일상적인 목적에서 수는 있으며, 그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는회의론을 논박하려는 목적에서 못한다. 우리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일상적인 목적에서, 자신이 꿈으로 꾸고 있지 않음을 알지는회의론을 논박하려는 목적에서 못한다.

이보다 더욱 급진적인 견해로서 인식론적 맥락주의보다는 인식론적 상대주의epistemic relativism로 알려진 견해가 있다. 이에 따르면 예컨대 '나는 바닥이 평평하다는 것을 안다'가 발화될 경우 설사 그 발화맥락과 관계된 모든 사실들이 고정되더라도, 그 발화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갖는 정확히 하나의 진리치 같은 것은 없다. 발화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의 진리치는 진리치를 귀속시키는 [즉 명제의 진리치를 평가(評價)evaluate하는] 사람의 관점(觀點)perspective과 목적purpose에 따라서도 달라지는데, 대체로 진리치 평가자는 발화가 이뤄졌던 맥락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시로 든 발화가 동일한 특정 바닥에 관한 것이었다고 가정해보자. 그 경우 표현되는 동일한 명제는 일상적인 목적에 따르자면 참이겠지만 물리학 실험에 요구되는 엄밀한 기준에 따르자면 거짓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식론적 상대주의자에 따르면, ‘As라는 것을 안다에 대해 As와 발화맥락이 결정됨으로써 특정 명제 내지 내용content이 고정되더라도, 그 명제 내지 내용의 진리치는 평가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이 결코 주관주의(主觀主義)subjectivism는 아니다. 주관주의에 따르면 특정 표준들 집합이 선택되더라도 진술의 진리치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틀릴 수 있다(그리고 선택된 표준들이 올바른지 여부는, 항상 그렇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지식-주장을 평가하는 사람이 처한 맥락의 특징에 따라 합리적으로 제약된다).

 

철학적 개념: 사실적 조건문. 5장에서 우리는 사실적 조건문counterfactual conditional을 간략히 살펴본 바 있다. 사실적 조건문은 진리-함수적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다. pq의 진리치는 통상적인 (‘직설법적indicative’) 조건문 ‘p이면 q이다의 진리치를 결정해준다. 실질적 조건문의 진리표에 따르면 () 일단 전건 p일 경우, 후건 q가 참이면 조건문 ‘p이면 q이다전체는 참이고 q가 거짓이면 조건문 전체는 거짓이며, () 일단 전건 p거짓일 경우, 후건 q가 어떤 진리치를 갖든 조건문 전체는 참이다. 따라서 실질적 조건문은 ‘p가 아니거나 q이다[pq]’와 동치이며, 이는 p가 거짓이거나 q가 참일 경우 참이다. [그래서 실질적 조건문의 진리-조건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전건이 거짓이거나 후건이 참일 경우 조건문 전체는 참이다.]

물론 실질적 조건문을 진리-함수적으로 설명하는 데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p라면 q일 것이다If p were so, then q would be so’ (혹은 ‘p였더라면 q였을 것이다If p had been so, then q would have been so’)와 같은 형식의 사실적 조건문 내지 가정법적subjunctive 조건문의 경우에는 명백히 진리-함수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사실적 조건문을 발화하는 경우 우리는 p가 사실이 아님을 (그리고 보통 q 역시 사실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적 조건문이 참인지 여부가 분명하게 결정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다음 문장을 생각해보자:

 

(5) 만약 Ronald Amundsen이 최초의 남극 탐험가가 아니었다면, Robert Scott이 최초의 남극 탐험가였을 것이다.

 

실제로 최초의 남극 탐험가는 Scott이 아니라 Amundsen이었지만, 이 사실은 (5)의 진리치를 결정해주지 않는다.

사실적 조건문에 대한 영향력 있는 설명으로서 David Lewis의 설명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문의 진리치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따라 결정된다: 전건이 참이라는 점만 제외하고는 현실세계actual world와 가장 유사한 가능세계를 생각해보자. 위 사례의 경우 그 가능세계에서 Amundsen은 최초의 남극 탐험가가 아니다. 나머지 모든 가능한 사항들이 현실세계와 정확히 동일한 그 세계에서, 후건은 참인가? 만약 그렇다면 조건문 전체는 참이며 그렇지 않다면 조건문 전체는 거짓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마저 진리치를 결정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은 사실적 조건문의 사례들이 있다. 다음 두 문장을 보자(이는 Quine이 제시한 것으로서, 이 문장에서 배경으로 깔린 전쟁은 1950-3년까지 일어났던 한국전쟁이다):

 

(6) 만약 Caesar가 총사령관이었다면, 그는 원자폭탄을 사용했을 것이다.

(7) 만약 Caesar가 총사령관이었다면, 그는 투석기(投石機)를 사용했을 것이다.

 

일견 두 문장은 동시에 참일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Lewis에 따르면 이 두 조건문은 발화의 맥락에 따라 각기 참일 수 있다. 우선 우리가 Caesar의 무자비한 성격을 고정한 채, 전쟁무기에 대한 그의 지식을 기원적 1세기에 이용할 수 있었던 것에만 제한하는 게 아니라 그가 20세기의 전쟁무기 또한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가능세계를 선택할 것이며 그에 따라 (6)은 참이고 (7)은 거짓으로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정신적 상태나 성향들을 더욱 많이 반영하여 그의 성격 뿐 아니라 그가 과거에 지녔을 전반적인 지식(과 무지)마저 그대로 유지시킨다면, 우리는 (7)이 참이고 (6)은 거짓이라 판정할 것이다. 이렇듯 사실적 조건문의 진리-조건은 부분적으로 발화의 맥락에 의존적인바, 특히 조건문의 주제, 암묵적인 가정, 대화에서의 관심사 등에 따라 달라진다.

 

철저한 맥락주의radical contextualism. 우리는 명시적 지표사를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맥락-의존성을 띠는 많은 사례들이 있음을 확인해왔다(이번 각주1)(原註) 참조). 이쯤 되면 독자들은 맥락-의존성이 도대체 어디까지 뻗칠 수 있는지 궁금해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견해에 따르면 모든 언어표현들이 맥락에 민감할 수도 있다! 7장에서 만났던 인물인 Austin은 이러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유명한 구절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정 언어에서 온전하게 형성된 여러 다양한 문장들을 생각해본다면 그것들을 참인 것과 거짓인 것으로 단순하게 분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참과 거짓의 문제는 문장이 무엇이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따라서만 좌우되는 게 아니라,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문장이 발화되는 환경에 따라서도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장들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Austin, 1962[단어를 사용하여 어떻게 행위가 이뤄지는가How to Do Things With Words], 110-11.)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한다:

 

다음 문장을 생각해보라: ‘Raglan 경은 알마 전투에서 승리했다’. 여기서, 알마 전투는 설령 단 한 명만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쨌든 병사가 수행한 전투였으며, Raglan 경의 명령이 일부 부하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념하자. 그렇다면 Raglan 경은 알마 전투에서 승리한 것인가, 아닌가? 물론 특정 맥락에서라면, 가령 학교에서 사용되는 역사교과서에서라면 그렇게 말하는 게 충분히 정당화될 것이다. 이는 약간 과장된exaggerated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Raglan에게 승리의 메달을 부여하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Raglan 경은 알마 전투에서 승리했다[많은 세부사항들이 생략된 채 나머지 일부가] 과장된 문장으로서, 어떤 맥락에서는 적합하겠지만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니 그 문장이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한사코 고집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143-4.)

 

Austin의 이러한 기본 착상에 동의하는 인물들로는 後期 WittgensteinJohn R. Searle 및 비교적 최근의 인물들인 Charles TravisAvner Baz 등을 들 수 있겠다. 그 어떤 문장의 진리-조건도 맥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급진적인 맥락주의적 견해는, 다음과 같이 단순하면서도 문제될 것이 없는 명백한 사례를 통해서 살펴불 수 있다(이는 Travis에 의해 논의된 사례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당신이 새로 산 값비싼 명품 신발에 관해 내가 , 니 신발 니 침대 아래 있더라하고 말한다. 근데 사실 그 신발은 당신의 방 안에 있지 않다. 그러니 대부분의 발화맥락에서라면 내 말은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신발이 당신의 방 아래층에 있다고 해보자. 즉 그 신발은 당신의 침대와 지구표면 사이의 공간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당신의 침대는 물침대인 데다가, 이전에 한 번 터져서 아래층에까지 물난리가 난 적이 있다 해보자. 그러니 나는 그 비싼 신발을 포함하여 무엇이 되었든 당신의 침대보다 아래에 놓아진 물건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이런 맥락에서라면 나는 참된 무언가를 말한 셈이라는 것이다.

 

 

허구적 대상

 

Frege의 의미론에서는 문장에 포함된 이름이 아무 것도 지칭하지 않을 경우 문장 전체는 사고(思考)though(온전한 뜻)를 표현하더라도 진리치를 갖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 이름이 라고 믿는다와 같은 명제태도 연산자의 범위 내에 나타나는 경우는 제외). 그런데 이에 따르면, 일례로 Odyssey가 꾸며낸 이야기이고 그 등장인물들이 허구적(虛構的)fictional이라는 점(이러한 허구적 대상이 이번 에서 논의될 주제이다)을 감안했을 때, ‘Odysseus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백히 참인 문장은 참도 거짓도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 Russell의 이론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좀 더 나은 위치에 있다. 그에 따르면 일상적인 고유명ordinary proper name은 위장된in disguise 한정기술구이다. 일상적인 고유명 ‘Odysseus’, 특정 발화를 가정하건대 대략 ‘Cyclops를 눈멀게 만든 그리스의 전사정도의 한정 기술구가 축약된 것이다. 그리고 이 한정기술구는 Russell이 제시한 기술구 이론에 따라 분석될 것이다(3, ‘기술구 이론의 적용참조). 그렇다면 가령 ‘Odysseus의 아내는 20년 동안 그를 기다렸다‘Odysseus의 아내는 20년 동안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이름 ‘Odysseus’를 대체하는3) 한정기술구에 대한 넓은-범위 해석에 따르면) 똑같이 거짓인 것으로 판명된다.


3)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서 대체된 뒤 분석되어야 할 표현은 이름 ‘Odysseus’만이 아니라 ‘Odysseus의 아내라는 한정기술구인 듯하다.


(특정 사용 맥락 내에 있는) 이름이 실제로는기술구라는 생각은 다소 작위적이게 여겨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Russell의 추정에 따르면 가령 다음과 같은 한 쌍의 문장들을 거짓이라 해야 한다는 점이다:

 

(8) Odysseus의 아내는 20년 동안 그를 기다렸다.

(9) Odysseus의 아내는 그가 떠난 지 3개월 만에 그를 기다리길 포기하고 구혼자들 중 가장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였다.

 

기술구 이론에 따르면 두 문장 모두 거짓이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분명 (8)이 옳고 (9)는 뭔가 잘못되었다. 실제로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언어철학을 접해본 바 없는 사람이라면 (8)을 주장하고 (9)는 부인하고자 할 것이다. (8)인 반면 (9)는 거짓이라 말할 것이다.

 

가능적인 대상possible object.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자연스러운 답변은, Odysseus가 현실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가능적인 인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Homer의 이야기가 실제 역사인 가능세계가 있어서 그 세계에는 Odysseus가 실존하며 그 OdysseusHomer가 이야기해준 일들, Calypso에게 유혹을 당하고 외눈박이 괴물 Cyclops를 눈멀게 하고 전쟁과 모험이 끝난 뒤 20년 만에 자신의 신실하고 총명한 아내에게 돌아오는 등의 일들을 하였다. 위 두 문장의 앞부분에 ‘Odysseus가 실존하는 가능세계들에서는 라는 구가 암묵적으로 덧붙여져 있다고 상상한다면, (8)은 참이고 (9)는 거짓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안은 허구적 실체fictional entity들이 가능적 실체possible entity들의 부분집합이라는 견해로서, 그 대부분은 -현실적인 가능세계에만 존재한다(그리고 Odysseus와는 달리 결코 생각되어본 적도 없는 허구적 실체들은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여기서 제시된 상태 그대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문제점은 허구적 대상에 대한 과소-기술under-described의 문제이다. Odysseus에 관한 명제로서 Homer의 이야기와 일관적이지만 그 거짓 역시 Homer의 이야기와 일관적인 그러한 명제 p를 취해보자. 그 명제가 덧붙은 이야기에서는 가령 OdysseusCyclops를 눈멀게 하던 날 아침에 열일곱 개의 올리브 열매를 먹었다는 점 이외의 모든 것이 Homer의 원래 이야기와 정확히 동일하다고 해보자. Homer의 원래 이야기와 p가 둘 다 참인 세계를 Wp라 하고, Homer의 원래 이야기는 참인 반면 p는 거짓인 세계를 Wp라 해보자. 둘 중 어느 세계에 존재하는 Odysseus가 진짜real Odysseus인가? Wp-존재하는-Odysseus-유형인가 아니면 Wp-존재하는-Odysseus-유형인가?4) 현실에 존재하는 실제 인물에 관해서라면 그 사람이 특정 어느 날 아침에 올리브 열일곱 개를 먹었는지 여부와 같은 문제에 대한 명백한 사실이 존재한다. 하지만 Odysseus의 경우엔 그러한 사실이 결정되어 있지 않다.


4) ‘Wp로 칭해지는 가능세계, Odysseus가 본문에서 말해진 여차여차한 일을 한 가능세계는 많으므로, 그 중 특정 하나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Odysseus-개항이 아니라 그러한 가능세계들을 통틀어 존재하는 Odysseus-유형이 문제시된다. Wp들에 존재하는 Odysseus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한 가지 그럴 듯한 대응은 우리가 Odysseus에 관해 말할 때 실제로는 가능세계들의 한 집합에 관해, OdysseusHomer에 의해 명시적으로 귀속된 속성들 (및 그렇게 Homer에 의해 귀속된 속성들 집합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따라 나오는 속성들)을 갖고 있는 그러한 가능세계들의 집합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Homer에 의해 작품 Odyssey에서 Odysseus에 관해 표현된 명제들이라 할지라도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HomerOdysseus에 관해 기술한 여타 이야기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가령 그가 Siren의 노래를 들었을 때 뱃머리가 아니라 돛대에 묶였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인물은 여전히 Odysseus이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HomerOdysseus에게 연관시킨 속성들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다르게 상상해볼 수 있겠는가? 어느 정도라야 그것이 여전히 Odysseus의 특징을 이루는 이야기라고 인정될 수 있겠는가? 이는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바늘 위에서 춤출 수 있는가?’ 하는 고전적인 문제와 비슷하다. 이렇듯 명백히 쓸모없는 물음에도 분명한 해답이 있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이론이라면 그저 제쳐두어도 좋을 것이다.

 

-Meinong주의Neo-Meinongianism. 이는 19세기 말 Alexius Meinong에 의해 제안되었던 도식의 현대화된 버전이다. 허구적 실체가 통상적인 대상과는 달리 결정적indeterminate이라는 점을 받아들임으로써 허구적 실체를 그 어떤 의미에서든 확정적인definite 가능적 대상과 동일시하길 거부한다면, 앞서 살펴본 문제로부터 다소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Odysseus는 실존하지 않는다. 그는 Cyclops를 죽이는 등등의 일을 하긴 했지만, Cyclops를 죽이던 날 아침에 올리브 열매 열일곱 개를 먹지도 않았고 안 먹지도 않았다. 이 점에 있어서 Odysseus는 가능적인 대상들과 달리 결정적이다.

-Meinong주의는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변형은 허구적 대상이 통상적인 대상과 마찬가지로 구체적(具體的)concrete이라고(하지만 여전히 실존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OdysseusCyclops를 눈멀게 하는 따위의 물리적 행위를 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잘 부합한다. 두 번째 변형은 허구적 대상이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모종의 추상적인abstract 대상이라고 주장한다. 다음과 같이 특정 속성들 조합에 의해 개별화(個別化)individuate되는 포괄적(일반적) 개별자들generic individuals을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샌 프란시스코 49er 팀의 쿼터백이라는 것은 여러 속성들이 조합된 것으로서 시간을 걸쳐 다수의 구체적 개별자들에 의해 현실화된다. 이를 Russell이 제안하듯이 한정기술구로 간주하기보다는, 시간을 걸쳐 동일성을 유지하는 추상적 대상으로 간주해볼 수도 있다(그래서 가령 Joe Montana가 이 역할에 대해 맺는 관계는 특정 기간 동안 그 역할을 수행함이라는 관계이다). Odysseus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허구적 대상이 추상적이든 구체적이든 -Meinong주의가 주장하는 바의 핵심은, -실존적인nonexistent 대상들이 지니는 속성들에는 대체로 상당한 여유가 있다quite spare in their properties는 것이다. 그래서 매우 적은 수의 속성이라도, 심지어 단 하나의 속성이라도 -실존적 대상이 되는 데에는 충분하다.

 

창조주의Creationism. 그런데 허구적 대상에 대한 -Meinong주의적 관점은, 가령 Odyssey2,800년 전에 지어진 작품이기에 Odysseus2,800살 먹은 우연적인contingent 대상이라는 생각과 잘 부합하지 않는다. Kripke에 따르면 전형적인 고유명의 지시체는 한 대상에 대한 최초 명명(命名)식에까지 이어져 있는 의사소통의 연쇄 내지 지시 의도referential intention의 연쇄에 해 결정된다. 대체로 그 최초 명명식은 칭명하고자 하는 대상을 목전에 둔 채 이 대상을 ‘N’이라 칭하자와 같은 식으로 말함으로써 이뤄진다. Kripke는 허구적 이름이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도입된다고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Odysseus보다는 훨씬 최근의 예시로서 Jane Austen의 소설 오만과 편견의 등장인물인 Darcy를 생각해보자. Austen은 그 작품을 저술함으로써, 가령 Elizabeth Bennet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여러 행위들을 한 특정 인물 Darcy에 관해 말하는 하나의 관습practice을 도입한 셈이다. 그녀가 Darcy를 창조한 것은 하나의 추상적 대상을 창조한 것이긴 하지만, 이 대상은 마치 지구의 적도와도 같은 우연적 대상으로서 시간 내에서 시작점을 가지며, 부분적으로는 언어적개념적지향적intentional 실체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녀의 창조이다. 그러므로 이 견해는 앞서 가능적 대상 이론에 가해졌던 반박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물리칠 수 있다: 어떤 하나의 기술구가 Jane Austen의 창조에 대해 참이고 인과적으로 올바른 방식에 따라 Darcy와 연결된 경우, 그 기술구는 오로지 Darcy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실존과 얽힌 퍼즐은 아무것도 없다. DarcySnoopyOdysseus와 마찬가지로 정말로 실존하되 살과 피로 이뤄진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기술구의 형태로서, 지향된 것으로서, 이미지로서, 혹은 영화에서 배우에 의해 연기된 역할로서 존재할 뿐이다.

 

허구성 연산자fictional operator. 또 다른 견해는 우리가 Odysseus에 관해 말할 때 그 화행을 지배하는 암묵적인 연산자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 연산자를 언어적으로 명시하자면 다음곽 같은 이야기에 따르면 〔…〕내지는 통상 Homer가 지었다고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와 같은 식이 될 것이다. 이 연산자는 -내포적인hyper-intensional 연산자로 간주될 수 있는바, 그 경우 허구적 대상에 관한 화행은 그 연산자의 영향권 내에 나타나는 문장(및 그 문장이 함의(含意)implicature하는 바와 그 문장에 선제(先提)presupposition된 바)의 뜻 내지 개념적 내용에 기반한다. 이러한 접근법에 속하는 한 가지 흥미로운 관점으로서 가식(假飾) 이론pretense theory으로 알려진 견해에 따르면, 허구성 연산자를 특정 심리적 태도인 가장하기(인 척하기)pretending라는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즉 허구성 연산자는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태도를 취하게끔 지시한다instruct. 이는 어린아이들이 허구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이야기가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진지하게 들으며 즐긴다는 평범한 사실과 잘 부합한다.

허구성 연산자를 도입하는 견해들이 공통적으로 직면하는 난점은 참과 허구가 혼합된 진술들, 가령 ‘Snoopy는 종종 자신의 개집 위에 누워있고는 한다. 그런 이미지는 매우 널리 알려져 있다라든가 ‘PlatonOdysseus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그를 만나본 적은 없다와 같은 진술들을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진술들에서 허구성 연산자가 작동하고 있다고 간주한다면, 특정 단일 문장 내에서는 그 연산자가 외견상 임시방편적인ad hoc 방식으로 소멸되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번 단락에서 제시된 사례들에서는 두 번째 문장들에서 그 연산자가 소멸되어야 하는바, 그 문장들은 허구적 이야기 내의 사태들에 관한 문장이 아니라 그 허구적 이야기 자체에 관한 현실의 사태를 말하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허구성 연산자의 범위를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임의적으로 이뤄질 수 밖에 없는 듯하다는 점이다.]

 

 

추론주의

 

의미에 관한 전통적인 이론가들은 언어의 사용에 관한 화용론이 의미론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여기고는 한다. 의미론은 다음과 같이 기본적으로 지시 개념과 연관되어 있다: 단칭용어는 전형적으로 대상을 지시하며 술어는 속성 및 관계를 지시한다. 일단 의미론을 학습하고 나면 우리는 갖가지 단어들을 다양한 화행에서 사용할 수 있는바 이에는 추론(推論)하기drawing inference라는 화행 역시 포함된다.

이러한 전통적 관점과 대조적으로, Wilfrid Sellars(1912-89)에 의해 표명되고 최근 Robert BrandomJaroslav Peregrin에 의해 옹호된 견해에 따르면, 언어에서 근본적인 것은 화용론 특히 추론하기라는 화행이다. 이러한 견해는 추론주의inferentialism이라 불린다. ‘그리고라는 논리상항을 생각해보자(여기서 말해지는 그리고‘LaurelHardy’처럼 주어나 명사를 결합시키는 역할이 아니라, 온전한 문장들을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는 논리적 연결사로서의 그리고이다). 우선 12.1그리고의 진리표로서, 여기서 ‘P’‘Q’는 임의의 서술문을 나타낸다:

 

12.1 그리고의 진리표

P

Q

P 그리고 Q

T

T

T

T

F

F

F

T

F

F

F

F

 

이 표에 따르면 PQ 양자 모두가 개별적으로 참일 경우 ‘P 그리고 Q’ 역시 참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P 그리고 Q’ 전체는 거짓이다. ‘그리고에 대한 표준적인 추론규칙inference rule, 그리고가 형식적인 추론reasoning증명(證明)proof도출(導出)(유도(誘導))derivation에 도입되는 경우의 규칙은 12.2와 같다:

 

12.1 그리고의 추론규칙

P, Q

P 그리고 Q

P 그리고 Q

P 그리고 Q

P

Q

 

이 표에 따르면 PQ 각각이 전제로 주어진 경우 ‘P 그리고 Q’를 추론하는 것이 허용되며, ‘P 그리고 Q’가 전제로 주어진 경우 PQ 각각을 추론하는 것이 허용된다.

전통적인 이론가들은 논리적 연결사에 대한 진리표를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즉 우리가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지도하는 지침으로서의 추론규칙은 진리표에 토대를 두고based 있는바, 진리표는 그리고의미 내지 의미론을 명시한다. 하지만 추론주의자에 따르면 실상은 그 역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언어사용에서 근본적인 것은 오히려 추론규칙이다. 우리가 그리고라는 낱말[의 의미]을 숙달mastery했다고 장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에 관한 추론규칙[즉 추론에서 그리고를 사용하는 방법]을 먼저 암묵적으로라도 알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에 관한 추론규칙에 숙달되어 있는 한 그 낱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 이상의 것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고에 대한 추론규칙에 의해 명시된 바에 따라 그 낱말을 사용할 줄 아는 한 우리는 그 단어를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추론규칙은 한 단어가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방식, 즉 그 단어에 대한 명제적 지식(무엇-에 대한 지식)know-what과 대비되는 실천적 지식(어떻게-에 대한 지식)know-how을 명시한다.

상술한바 그리고에 대한 추론규칙은 언어-규칙inter-linguistic” rule이다. 반면 언어-intra-linguistic규칙은 언어-진입linguistic-entry규칙과 언어-이탈linguistic-exit규칙으로 구성되는데, 이들 규칙들은 논리-적인non-logical 단어들의 사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예를 들어 빨갛다라는 단어를 설명하는 경우 그 단어의 지시가 특정 속성이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 단어의 사용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명시할 수 있다: 한 대상이 빨갛게 보인다면 그것은 빨갛다고 주장하는 것이 허용되며[(언어-진입 규칙)], ‘빨간 거 가져와라는 명령을 받는다면 빨간 것을 가져와야 한다should[(언어-이탈 규칙)]. (그리고 이 경우 다음과 같은 언어-) 규칙 역시 존재한다: ‘그것은 빨갛다로부터 그것은 색깔을 갖고 있다’, ‘그것은 파랗지 않다등을 추론하는 것이 허용된다.)

이러한 접근법은 지시 진리개념보다는 상술한 바와 같은 규칙들에 대한 진술을 더욱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추론규칙은 특히 우리가 단어들을 갖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obligated 그리고 무엇을 하는 게 허용되는지may를 말해준다. 요컨대 추론규칙은 의미론적 개념이 아니라 규범적normative 개념이다. ‘를 지시하다은 참이다라는 낱말들 자체 역시 이런 식으로 다뤄져야 한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우리는 P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는entiled to assert경우에만 P는 참이라고 주장할 자격이 있다. 마찬가지로 b = A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경우에만 ‘b’의 지시체 = A라고 주장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추론들 중 단어에 대한 우리의 숙달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합당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방에 샌드위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보자. 그 경우 그 사람이 여기 내 가방이 있다로부터 여기 점심거리가 좀 있다를 추론하는 것은 정당화되지만, 이는 그 사람이 몇몇 단어들에 숙달해 있기 때문에만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 추론들은 이런 식으로 단어의 숙달로 인해 정당화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AB의 북쪽에 있다‘BC의 북쪽에 있다로부터 ‘AC의 북쪽에 있다를 추론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추론주의의 요지는 이런 종류의 추론들의 총체가 언어적 숙달 및 의미에 대한 지식을 구성한다constitute는 점이다.

 

 

슬러

 

여기서 우리가 논의하게 될 슬러slur5)란 보통 특정 인종, 성별, 성적 지향, 사회집단 등에 속하는 사람들을 폄하하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들을 말한다. 남부 유럽, 특히 이탈리아인에 대한 멸칭표현인 ‘wop’이라든가, 여성을 비하하는 ’, 동성애자를 낮잡아 부르는 속어 ‘fairy’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번 절에서 주의할 점은, 슬러 표현의 경우 그것을 실지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가령 인용 부호로 처리함으로써 그 표현을 단지 언급한다고 해도, 그에 담긴 모욕감이나 무례함이 무효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사용되든 언급되든 슬러가 그 자체로 모욕적이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만 우리는 슬러를 논함에 있어 마치 끔찍한 질병의 표본을 연구하는 과학자와 같은 자세로 그 불쾌감을 무릅써야 한다. 여기서는 짱깨라는 단어를 예시로 삼아 논의를 진행하고자 한다.6)


5) ‘slur’란 특정 대상이나 대상들 집단에 대한 멸칭표현 내지 경멸적 비속어를 총칭하는 용어로서, 우리에게 친숙한 역어로는 혐오표현을 들 수 있겠다. 그런데 혐오표현혐오발언으로 번역되는 ‘hate speech/utterance’와 더불어 경멸적인 느낌을 지닌 모든 형태의 언어적 표현 및 언어적 행위까지도 총칭하는 용어로 통용되는 편이다. 반면 이번 을 읽다 보면 알 수 있듯이, ‘slur’는 기본적으로 대상 내지 대상들 집합을 지시하는 단칭용어 혹은 일반용어 형태의 언어표현만을 일컫는바, 슬러의 뜻 및 지시와 같은 의미론적 속성은 무엇인지, 슬러가 문장에서 나타나는 경우 진리-함수적 상항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슬러가 사용되는 경우 화용론적으로 어떤 특성을 보이는지 등이 이번 의 주된 논의사항이다. 이런 구문론적의미론적화용론적 사안을 감안하여, ‘혐오표현이라 번역하는 대신 원단어를 굳이 번역하지 않고 한글로 슬러라 표기하였다. (참고로 William G. Lycan, 언어철학: 현대적 입문Philosophy of Language: A Contemporary Introduction, 서상복 , 책세상, 2012에서는 중상/비방으로 번역되었다.)

6) 원문의 사례는 앞서 언급된 ‘wop’으로서, 저자는 이 표현을 사례로 삼은 이유로 친숙하면서도 작금엔 잘 쓰이지 않는 구식 단어라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짱깨는 지금도 일상에서 아주 빈번히 사용되는 단어이다.


슬러는 (과연 의미라는 것을 갖고 있다면) 대체 어떤 종류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우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은, 슬러 표현의 슬러적-의미slurry-meaning란 그 표현과 동일한 외연을 가지되 모멸적이지는 않은 용어의 뜻 내지 내용에 부가되는 내지 내용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짱깨중국인’(또는 중국 혈통’)과 동일한 외연을 갖지만 중국인과 달리 모욕적이다. 짱깨단지 중국인이라는 것만으로 경멸을 받을 만하다와 같은 식의 내용이 부가된 슬러이다.

하지만 혹자는 슬러가 -슬러적인 대응표현non-slurry counterpart과 동일한 외연을 갖는다는 주장을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다. 분명 다음 문장이 이라는 주장에는 논쟁의 여지가 매우 많다고 하겠다:

 

(10) 모든 중국인, 그리고 오로지 중국인만이 짱깨이다.

 

어떤 사람은 적어도 일부 중국인들, 그리고 아마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짱깨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사실상 아무도 짱깨가 아니라 말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필연적으로 아무도 짱깨가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어쨌든 슬러가 뜻 내지 내용의 층위에서 불쾌감을 유발하도록 작동한다는 다소 일반적인 관점에는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발생한다. 만일 슬러가 그런 식으로 작동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러한 불쾌한 작용이 부정될negated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짱깨도 하지 않다'짱깨의 모멸함을 무효화시켜야만 한다. 어떤 인종차별주의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보자:

 

(11)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올 것이다.

 

이 화행에 포함된 불쾌감은 다음을 주장함으로써 거부될 수 있어야 한다:

 

(12) 아니다, 그 어떤 짱깨도 파티에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12)를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인종차별적 용어를 묵인하고 있으며 따라서 인종차별적 화행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 문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13) 짱깨가 파티에 온다면, 나는 다른 맥주를 마실 것이다.

 

설사 이 조건문의 전건이 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이 문장을 발화하는 것은 명백히 인종차별적이다. 요컨대 슬러에 담긴 모멸감은 아니다라면 이다와 같은 진리-함수적인 수단에 의해 격리quarantine하고자 하여도 그 시도를 벗어난다leap out’.

뿐만 아니라 슬러slurriness은 타인의 발화에 대한 간접보고indirect report, 그녀는 S라고 말했다said that S형식의 문장을 통해 분리confinement하고자 하는 시도 역시 벗어나버린다. (14)(15)에 비해서는 조금이나마 덜 무례한 발언으로 여겨질 것이다:

 

(14) Jolind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올 것이다.’

(15) Jolinda는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올 것이라고 말했다.

 

두 문장은 각각 직접보고와 간접보고의 형태를 띠고 있는바, 전자에서는 단어들이 발화되었던 그대로 보고되는 반면 후자에서는 반드시 그럴 필요가 없다. 그렇다보니 (14)와 달리 (15)(11)에 포함된 인종차별적 느낌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는 듯하다. [간접보고에서는 발화된 슬러를 그대로 사용할 필요가 없는데도 (15)는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5)를 말하는 사람은 중국인을 대하는 Jolinda의 태도를 공유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고찰하다 보면 슬러를 화용론적으로 설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지는 듯하다. 슬러가 지닌 경멸적 내용이 Grice인 대화적 함의(含意)conversational implicature에 속하는 사안이라 해보자. 그 경우 슬러취하될 수cancellable 있어야 한다(7, ‘함의 개념의 적용참조). 친구가 나를 저녁 파티에 초대했는데 내가 나 지금 과제 중이야하고 말한다면, 나의 말은 파티에 가지 못한다를 대화적으로 함의한다. 하지만 내가 곧바로 근데 한 시간이면 끝날 듯?’ 하고 덧붙인다면 앞선 발화에서 함의된 바는 취소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슬러가 발화될 때 진행되는 모든 일들이 단지 함의에 속하는 사안이라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분명 모욕적이지 않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16)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오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16)(11)만큼이나 인종차별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역시 7, ‘Russell의 기술구 이론에 대한 StrawsonDonnellan의 반박에서 살펴본 바 있는 전문적인 의미의 선제 개념을 활용하여, 인종차별적 태도가 슬러의 사용에 선제(先提)되어presupposed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어떤 내용이 대화에 선제되어 있다면 그 선제된 바는 취소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냉장고에서 맥주를 가져올 사람을 정하는 상황에는 냉장고에 맥주가 있다가 참이라는 것이 선제되어 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내가 , 그거 알아? 여기서 누가 갔다 올지 정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 사실 냉장고에 맥주 없음하고 말한다면, 우리의 대화에 선제된 바는 취소되고 냉장고에 갔다 올 사람을 정하는 일 자체가 중단될 것이다. 하지만 슬러의 경우 그것이 지닌 경멸적 내용은 특정 화행을 통해 일단 표현되고 나면 결코 소멸될 수 없다.7) 스컹크가 방귀를 뀌면 그 냄새가 자연히 퍼지듯, 슬러은 일단 표현되고 나면 되돌릴 수가 없다.


7) 앞선 냉장고 맥주 사례의 경우, 사실은 냉장고에 맥주가 없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냉장고에 다녀올 사람을 정하는 우리의 대화 자체가 소용없어지게 되었다. 즉 선제된 바가 취소됨으로써 그 선제에 토대를 둔 화행이 무효화되었다. 이는 7에서 살펴본바 임의의 문장 PQ에 대해, PQ를 선제할 경우, Q가 거짓이라면 P는 진리치를 결여한다는 선제 개념의 분석과 일치하는 결과이다. 반면 슬러의 경우 적어도 슬러에 대해서는 이런 식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내가 , 오늘 파티에 짱깨 한 명 온다더라.’하고 말한다. 여기서 말해지는 중국인을 a라 한다면, 나의 발화에는 ‘a는 짱깨이다가 참이라는 것과 더불어 짱깨에 결부된 경멸감이 선제되어 있다. 그런데 곧바로 내가 근데 전에 봤는데 걔는 짱깨는 아니더라. 깔끔하고 얌전해.’ 하고 덧붙인다면, 설령 ‘a는 짱깨이다가 참이라는 선제는 취하될지 몰라도, 앞선 발화에 결부되었던 경멸감마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떤 식으로든 중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슬러에 관한 논의의 주된 영역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런 사안들이다. 슬러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과 더불어 이 문제에 대한 많은 해결책들이 제안되어왔다. 언어철학 입문서로서 그 모든 것들을 낱낱이 살펴보기에는 지면이 부족하다. 다만 여기서는 David Kaplan이 제시한 해결책의 대략적인 윤곽 정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슬러에 관한 Kaplan의 견해. Frege는 뜻과 지시 이외에도 단어의 어조(語調)tone내지 색채colouring에 관해 언급한 바 있다. 가령 똥개cur와 다르다는 점을 설명할 때 그가 염두에 둔 것이 바로 이러한 어조 내지 색채이다. 두 단어는 동일한 지시 및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지만, 발화에서 사용될 경우 그가 칭한바 각기 다른 주관적심리적 이미지가 환기(喚起)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p 그리고 q’‘p 그러나 q’와 다르다. 전자와 달리 후자의 연언문은 청자로 하여금 첫 번째 연언지(連言枝)와 대조적인 내용이 두 번째 연언지로 말해질 것이라 기대하게끔 유도한다. [하지만 연언문 전체의 진리-조건은 둘 다 동일하다. 이렇듯 언어표현의 인지적 내용과 분명 구분되는 특성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 바로 어조 내지 색채 개념이다.]8)


8) “Frege는 표현의 사고와 그가 말한 색채라는 것을 구분한다. 과학적 언어는 사고를 명확하게 나타내고자 한다. 반면 인문학의 문장들은 아뿔싸!’맙소사와 같은 단어나 구를 중간에 삽입함으로써, 혹은 대신 개새끼와 같이 비하하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특정 느낌을 표현하는 색채의 옷을 걸치고 있는 경우가 있다. 문장의 그런 특성이 문장의 참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가 사용된 자리에 개새끼를 대체한 문장의 경우, 설사 그 문장을 발화하는 화자가 그 말이 표현하는 적대감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그 문장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PW[遺稿集Posthumous Writings, Blackwell, 1979], 140.) (中略) 자연언어의 문법에는 논리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이 혼합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언어는 동일한 문법을 지닐 것이다. 언어의 미묘한 색채는 번역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긴 하지만, 다른 언어를 학습할 때 그 뼈대가 되는 논리적 뜻과 그 언어가 지닐 수 있는바 뜻과는 다른 종류의 요소를 구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색채가 문장의 아름다움에 중요할 수는 있겠지만, 아름다움이 진리는 아니며 그 역도 아니다.” (Anthony Kenny, Frege, 현대 분석철학의 창시자에 대한 소개Frege: An Introduction to the Founder of Modern Analytic Philosophy, 최원배 , 서광사, 2002, 255-6. 본디 해당 저서에서는 ‘colouring’묘미로 번역되었다.) 이에서 알 수 있듯 Frege가 어조나 표현의 색채 개념에 주목한 본래 목적은 언어의 객관적인 뜻(및 지시)과 주관적심리적 느낌을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슬러을 이러한 어조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왜냐하면 슬러과 비슷하게 어조의 경우에도, 단어가 사용됨으로써 그 어조가 일단 작동하고 나면 그것을 격리하고자 하는 시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특성을 갖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건문 형식의 니가 그 똥개를 데려온다면, 우리 고양이는 달아나버릴 거다는 말은, ‘너 그 똥개를 기어이 데려왔구나!’ 못지않게 비방적인 말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어조 개념이 슬러을 적절히 설명해줄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지 여부는 다소 의심스럽다. ‘그녀는 흡연자이고 술은 마시지 않는다그녀는 흡연자이지만 술은 마시지 않는다의 어조 차이, 즉 후자 연언문의 경우 첫 번째 연언지에서 기대되는 바[(그녀는 흡연자이니 자연스레 음주도 할 것이라는 예상)]가 두 번째 연언지에서는 좌절될 것이라는 어감의 차이가 환기된다는 사실은 관습(慣習)convention의 문제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어조가 관습에 속하는 사안이라면, 어조는 그저 의미의 일부로 편입되어버리는 그 무언가인 셈이다. 다시 말해 어조는 Frege가 예상한 식으로 단지 주관적 세계에 속하는 게 아니라 언어의 객관적 사용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짱깨의 슬러역시 언어에 관한 객관적 사실이 되어버린다.

이 지점에서 Kaplan이 제안하는 방책은, Frege적인 어조를 본질적으로 객관화objectivise하는 규약적 의미convention meaning라는 범주를 도입하는 것이다.9) 이에 따르면 적어도 일부 단어들의 경우 지시 및 진리-조건과 같은 기술적(記述的) 기능descriptive function 이외에도, Kaplan이 칭한바 표현적(表現的)expressive 의미 내지 기능을 지니고 있다. 단어의 표현적 의미란 화자의 상태state 내지 태도attitude로서, 이는 기술적으로 전달descriptively convey되지는 않지만, 즉 문장의 진리-조건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지만, 그 용어의 사용에 관습적으로 결부된다conventionally tied. 예를 들어 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네저기 Smith 씨가 오고 있네와 기술적으로 동등descriptively equivalent하지만 표현적으로는 동등하지 않다expressively inequivalent. 또한 표현적 의미는 진리-함수적 연산자 내부에 삽입되지 않는다. ‘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는 상호모순이지만, 양자의 표현적 의미는 동일하다. 즉 표현적 의미 역시 진리-함수적 수단으로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를 벗어난다. 그렇기에 만일 당신이 Smith 씨에 대한 화자의 태도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아냐, 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라고 말하기보다는] ‘! 뭔 말을 그렇게 해!’ 하는 식으로 반응할 것이다.


9) (原註) 물론 윤리학 이론에서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정서주의(情緖主義)emotivism를 옹호하는 사람들 역시 이러한 견해에 개입한다.


표현적 의미를 도입하는 이론이 그 자체로 합당하게 여겨지는 이유들 중 하나는, ‘아야!’, ‘젠장!’, ‘안녕!’과 같은 표현들이 문장 내에 적절히 삽입될 수 없음에도 왜 유의미한지를 잘 설명해낸다는 점이다. 그런 표현들은 기술적으로 무의미하기에 의미론의 구성적 규칙에 따라 적절히 연산될 수 있는 항목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표현적으로는 유의미하다. 하지만 각기 다른 언어로 된 인사말들이나 감탄사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표현들은 모두 관습적이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짱깨중국인의 기술적 기능은 동일하지만 양자의 표현적 기능은 극적으로 다르다. ‘짱깨의 표현적 기능은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나 경멸감을 표현하는 것to express이다. 이를 화행론(話行論)speech-act theory의 관점에서 설명하자면, 슬러가 사용될 때 이뤄지는 발화수반행위는 모욕하기 내지 욕설하기라는 행위이다(이런 점에서 슬러는 V자 표시나 손가락 욕설과 표현적으로 다소 비슷하다). 그리고 이것이 슬러가 불쾌한 말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이다. 보통 상황에서라면 짱개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중국인에 대한 경멸감을 표현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짱깨 하나가 파티에 올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아무 짱깨도 파티에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인 단어racist word이다.

실제로든 가짜로든 화자의 태도를 표현하는 것은, ‘빌어먹을 Smith 라든가 고결한 Smith 와 같은 별칭표현들이 일반적으로 지니는 표현적 기능이다. 여기서 한 가지 있을 수 있는 오해를 불식할 필요가 있겠다. 한 태도를 표현하는 것과 그 태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르다. 왜냐하면 ‘Smith 씨가 오고 있다저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의 진리-조건이 동일하다면, 분명 둘 중 어느 것도 화자에 관해 무언가를 말하는 진술과 동등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표현적 의미는 진리-조건과 같은 기술적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두 문장의 진리-조건은 동일하다. 그런데 특정 태도를 표현하는 것과 화자가 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진술이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후자 문장은 화자의 태도에 관한 진술인 셈이고, 따라서 전자 문장과 다른 진리-조건을 지니게 되어버린다. 이러한 귀결은 (동일성의 이행성 원리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표현적 의미가 기술적 의미와 무관하다는 기본 논제와 배치되는바, 이를 막기 위해서는 태도를 표현하는 것과 화자의 태도를 진술하는 것 간의 동일성 가정이 거부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단어가 전용(轉用)appropriation되는 현상과 같은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술적 내용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으면서도 표현적 의미가 변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퀴어queer라는 단어를 들 수 있겠다. 이는 과거에 동성애자들을 비하하고 모욕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지만, 작금에는 동성애자나 양성애자뿐만 아니라 이성애자들 사이에서도 모욕적이지 않은 용어로 통용되는 추세이다.

 

 

이번 의 요약

 

우리는 주장이 규칙에 지배되는 행위, 특히 규제적 규칙과 대조되는 구성적 규칙들 집합에 의해 성립하는 행위라고 가정하였다. 구성적 규칙이란 그 규칙이 없이는 특정 행위가 존재할 수 없는 규칙이다. 예를 들어 체스에서 한 게임말을 특정 방식으로 움직이는 수가 룩의 운용법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체스의 규칙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체스의 규칙은 구성적이다. 반면 속도제한과 같은 도로교통법은 규제적 규칙이다. 도로교통법이 준수되지 않는다고 해서 차량운행행위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논의 초입에 우리는 주장을 구성하는 규칙으로서 p라고 믿는 경우에만 p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규칙을 고찰해보았다. 무언가를 주장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주장을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경우 Moore의 역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역설에 따르면, ‘p이지만 나는 p라고 믿지 않는다형식의 주장은 논리적 모순은 아니지만, 이러한 문장을 말하는 사람은 모종의 논리적 곤경에 처한다. 여기서 감지되는 부적절성은 A를 이행할 의도가 없으면서도 ‘A를 하겠다고 약속한다고 말하는 경우와 유사하다. A를 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약속을 지배하는 규범, A를 이행해야만 한다는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p를 주장하는 사람은 주장을 지배하는 규범, p를 믿어야한 한다는 규범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고 약속의 경우 진실되지 못한 약속을 하는 게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주장의 경우 거짓말(혹은 실제로 참이지만 주장하는 사람 자신은 거짓이라 생각해서 의도한 거짓 말)을 하는 게 가능하다. 주장을 비재하는 규칙의 후보로서 믿음-규칙 이외에도 진리-규칙, 정당화-규칙, 지식-규칙 등을 들 수 있다.

 

우리는 맥락-의존성이 언어에서 명시적 지표사 이외의 부분들로 확장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탐구하였다. 다음 사례들을 고찰해보면 그렇게 확장되어야만 하는 듯하다: (1) ‘크다와 같이 암묵적 상대성이 포함된 표현들. 이러한 표현들의 경우 맥락-의존성과 연관된 지표는 정도의 표준 내지 비교집합이다. (2) 일상에서 사용되는 양화사. 가령 담임선생님이 학급 학생들에게 다들 준비 됐니?’ 하고 묻는 경우, 그 발화에 사용된 보편 양화사의 속박범위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아니라 그 학급 학생들로만 암묵적으로 제한된다. (3) 발화의 시간 및 공간이 암묵적으로 제한되는 경우. 일상에서 사용되는 지금 비 와같은 문장은 여기라는 지표사에 의해 암묵적으로 제한되어 있다. (4) 가치에 관한 진술. ‘그것은 좋다와 같은 가치진술은 실상 그것은 나에게 좋다와 같이 암묵적으로 상대적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암묵적인 관계항은 단일 화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 집합일 수 있다. 이외에도 지식-주장이 맥락에 민감하다는 견해를 살펴보면서 인식론적 맥락주의인식론적 상대주의를 구분하였다. 그리고 사실적 조건문과 얽힌 퍼즐, 즉 적형well-formed이면서 동일한 전건을 갖되 상충하는 후건들을 지닌 두 사실적 조건문의 진리치를 결정하는 문제에 대한 Lewis의 맥락주의적 해결책을 살펴보았다. Lewis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조건문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자 의도되는 맥락에 상대적이다. 마지막으로 보통 Austin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간주되는 견해로서 사실상 일상언어의 모든 문장들이 맥락-민감성을 갖는다는 제안을 고찰해보았다.

 

허구적 이름에 대한 FregeRussell의 설명을 거부한 채 그러한 이름들이 진정한 고유명 즉 지시적 이름referring name이라고 가정해보자. 따라서 우리는 그런 이름들이 지시하는 적절한 대상을 찾아내야 한다. 우선 한 가지 가능한 방책은 허구적 이름이 단지 가능적 대상들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많은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이를 위해서는 여타 목적을 위한 가능자(可能者)possibilia 내지 가능세계들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능적 대상이 [속성의 측면에서] 충분히 결정되어 있는 데 반해 허구적 대상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Snoopy와 동일한 대상이 되는 후보는 한 배에서 태어난 특정 수의 강아지들 중 하나여야 한다. 하지만 Snoopy 만화의 작가 Charles SchultzSnoopy와 함께 태어난 강아지들이 정확히 몇 마리인지 언급한 바가 없다. 그러니 우리는 Schultz의 이야기를 참이게 하는 대상들 부류에 개의치 말고 그 가능적 대상을 생각해야 한다.하지만 이조차도 너무 엄격한지 모른다. 세상 사람들 전부 SnoopyCharlie Brown의 개라고 알고 있더라도, SnoopyLinus의 개라고 생각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전략은 허구적 대상이란 매우 기이한 종류의 대상으로서 특정 속성들을 지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여하한 사실도 없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Snoopy의 형제 강아지들이 몇 마리였는지에 관한 문제를 결정해줄 사실이란 일절 없다. 이러한 -Meinong주의에 따르면 허구적 대상은 실존하지도 않고 가능적 대상을 통해 설명되지도 않는바, 단지 존재론적 결정성ontological indeterminacy이라는 기이한 특성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살펴본 방책은 상당히 범용한 관점으로서 SchultzSnoopy를 창조했다는 평범한 사실을 진지하게 문자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Snoopy는 만화에 그려진 그림으로서, Schultz가 지어낸 이야기에 따른 여차저차한 기술구들로서, 혹은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애니메이션 프로그램 등의 형식으로서 실존한다. 요컨대 Snoopy는 우연적 대상이자 문화적 산물의 형태로 실존한다.

 

의미론 및 언어표현의 지시적 힘은 표현의 사용 및 특히 추론에서의 사용에 우선하는 것으로 여겨지고는 한다. 추론주의는 이러한 그림을 역전시켜 추론을 지시에 우선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실제로도, ‘그리고라는 논리상항이 사용된 특정 추론 패턴을 올바르거나 그릇된 것으로 식별하는 일 자체가 바로 그 논리상항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이는 여타 논리상항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추론 개념을 확장하여, 가령 빨강색 공의 색깔에 관해 질문을 받을 경우 빨갛다라고 답하는 것, 그리고 빨간 공 가져와라는 명령을 받을 경우 실제 빨강색 공을 가져오는 것 역시 추론에 포함시킨다면, 이런 식의 추론주의적 설명은 언어 전체에 적용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기존에는 명백해 보였던 지시 개념의 필요성은 상당 부분 축소된다(하지만 추론주의적 설명은 우리가 지시하다와 같은 단어에 숙달되는 것에도 적용될 수 있다). 추론주의자에게 핵심적인 개념은 규칙 혹은 규범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이다. 언어란 근본적으로 대상이나 사태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들의 체계system of rules이며, 전자는 원리적으로 후자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슬러 현상은 일견 슬러 표현의 뜻 내지 내용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추정컨대 모든 슬러에 대해, 그와 동일한 외연 혹은 지시를 지니되 그 뜻을 달리하는 -슬러적인 표현이 존재한다. 가령 짱깨에 대응하는 슬러적 표현은 중국인/중국 출신의정도가 될 것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견해가 모든 중국인 그리고 오로지 중국인만이 짱깨이다가 참임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부 중국인은 짱깨라는 것인가? 아니면 아무 중국인도 짱깨가 아닌가? ‘그 어떤 중국인도 필연적으로 짱깨가 아니다는 어떠한가? [이 모든 질문에 어떻게 답하든, ‘짱깨라는 단어가 갖는 모욕감은 소멸되거나 상쇄되지 않는다.] 진짜 난점은 그 어떤 목적으로 짱깨사용하더라도 불쾌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다. 가령 부정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서 여기엔 아무 짱깨도 없다여기 짱깨가 있다만큼이나 무례하게 받아들여진다. 슬러 현상을 선제라든가 대화적 함의와 같은 화용론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더라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 슬러 현상에 대한 수많은 설명들이 제시되었는데, 그 중 우리는 상술된 문제를 아주 간편히 처리하는 관점 한 가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Frege는 슬러가 지닌 무례함을 슬러 표현이 환기하는 주관적심리적 태도의 측면에서 고찰한다. 이를 Frege는 슬러 표현의 어조혹은 색채라 칭하였다. 하지만 색채가 언어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작동하게 된다면, 이는 표현에 의해 환기되는 경향이 있는 주관적 연상의 문제라기보다는 관습에 속하는 사안이며, 따라서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의미와 연관된 사안인 셈이다. Kaplan은 기술적 의미 이외에 의미의 또 다른 차원으로서 그가 칭한바 표현적 의미라는 것을 상정한다. 표현적 의미는 기술적 의미에 영향을 미치지 않기에 언어표현의 지시 내지 그것이 기여하는 문장 전체의 진리-조건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저기 빌어먹을 Smith 씨가 오고 있다‘Smith 씨가 오고 있다의 진리-조건은 동일하지만, 전자는 대체로 화자가 Smith에게 좋지 않은 태도를 지니고 있는 경우에만 사용된다(그 태도가 정당한지 여부는 무관하다). 표현적 의미는 객관적이고 규약적인 사안이라는 점에서는 기술적 의미와 일치하지만, 의미론적으로 구성적이지는 않다는 점에서 기술적 의미와 다르다. 가령 언어표현이 부정문에 나타나거나 조건문의 전후건에 삽입되더라도 그 단어의 표현적 의미에는 아무런 영향도 가해지지 않는다.

 

 

탐구문제

 

1 주장에 대해 Williamson이 제시한 지식-규칙은 너무 엄격하지 않은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주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생각해보라.

 

2 Grice는 주장이 그보다 넓은 범주로서 다음과 같은 -자연적 의미non-natural meaning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다: S는 다음의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A의 행위에 의해 p라는 것을 -자연적으로 의미한다non-naturally mean: 특정 청자 H에 대해 (1) AS를 통해 H로 하여금 p라는 믿음을 형성하도록 의도한다intend. (2) SH로 하여금 (1)을 알아채도록recognise 의도한다. (3) SH로 하여금 (1)을 근거로 p라는 것을 믿도록 의도한다.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무언가를 -자연적으로 의미한다는 것은, 화자가 청자로 하여금 화자의 행위에 근거하여 무언가를 믿도록 의도하고 있음을 청자가 알아차리게끔 행위하는 것이다. Grice가 제시한 유명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내가 YX의 부인과 부적절하고 지나치게 친밀해 보이는 그림을 그려서 X에게 보여줄 경우, 그럼으로써 나는 YX의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자연적으로 의미한다. Grice의 견해의 반례로서 -자연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주장의 사례가 있는가?

 

3 Le VerrierVulcan 행성(수성의 공전궤도 안쪽에 있다고 믿어졌던 실존하지 않는 작은 행성)의 존재를 믿었다. Vulcan허구적 대상인가? 우리가 살펴본바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 관한 다양한 설명방식들을 이 사례에 적용해보라.

 

4 -실존적 대상 내지 허구적 대상에 대한 또 다른 아이디어는 그러한 대상이 실제로는 단지 마음--관념idea-in-one’s-mind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반박들이 가해질 수 있다: (1) 동일한 허구적 대상인 Santa Claus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관념은 분명 각기 다르지만, 위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일은 불가능해야 한다. (2) Le VerrierVulcan이 실존하는 이유가 그가 특정 사고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거부했을 것이다. 그는 Vulcan이 실존하는 것은 천문학적 사실에 근거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러한 논박은 효력이 있는가?

 

5 자연언어로 이뤄진 거의 모든 문장들이 맥락에 민감하다는 생각은 정말로 합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6 Dummett(Brandom)은 슬러적 현상이 추론주의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제안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옛날에 독일인에 대해 쓰였던 인종차별적 용어 ‘Boche’는 다음과 같은 추론규칙에 의해 그 슬러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Boche’ 도입규칙: ‘x는 독인인이다로부터 ‘xBoche이다추론한다.

‘Boche’ 제거규칙: ‘xBoche이다로부터 ‘x는 다른 유럽인들보다 상스럽고 잔혹한 경향이 있다추론한다.

 

이는 ‘x는 녹색이다로부터 ‘x는 색깔을 지니고 있다로의 추론이 허용되는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전략은 합당한가? 이 전략은 ‘Boche’가 부정 연산자의 범위 내부나 조건문의 전후건에서 나타나는 경우를 설득력 있게 처리해낼 수 있는가? 여타 슬러 역시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7 다음 추론을 생각해보자:

 

() Smith가 오고 있다. 따라서 저 빌어먹을 Smith가 오고 있다.

() 저 빌어먹을 Smith가 오고 있다. 따라서 Smith가 오고 있다.

 

두 추론은 올바른가? 타당성(妥當性)validity진리-조건의 보존preservation으로 간주한다면, 위 추론들은 타당한가? 타당성 개념을 정보information의 보존으로 간주한다면 어떻겠는가?

 

 

주요 읽을거리

 

이번 장에서 다뤄진 주제들에 관한 주요 문헌 및 추가적인 문헌 목록은 다소 역사적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작성되었다. 실상 일반적으로 우리 논의에 더 적합한 것은 추가적인 문헌들이지만, 일부 고전적인참고자료들은 1차적인 주요 문헌으로 분류될 법하다. 각 목록은 우선 주제별로 나뉜 뒤 한 주제 내에서 연대순으로(즉 해당 문헌이 저술된 시기에 따라) 작성되었다.

 

주장: Charles Sanders Pierce, 믿음과 판단Belief and Judgement」〔1877; Gorrlob Frege, 사고(思考)Thought」〔1918, Frege 選集The Frege Reader(1997), 325-45쪽에 수록; Herbert Paul Grice, 의미Meaning」〔1957화자의미와 의도Utterer’s Meaning and Intentions」〔1987, 단어 사용에 관한 연구Studies in the Way of Words(1989), 213-23쪽 및 86-116쪽에 각각 수록; Michael Dummett, 의미이론이란 무엇인가?()What Is a Theory of Meaning?()」〔1975, 언어의 바다The Seas of Language(1993b), 34-93쪽에 수록: John Rogers Searle, 화행: 언어철학 小論Speech Acts: An Essay in the Philosophy of Language(1969); Donald Davidson, 의사소통과 규약Communication and Convention, 진리와 해석에 관한 탐구Inquiries into Truth and Interpretation(1984), 268-80쪽에 수록, 그리고 그의 Davidson 주요 選集The Essential Davidson(2006)도 참고할 것.

맥락-상대성: John Langshaw Austin, 단어를 사용하여 어떻게 행위가 이뤄지는가, 2(1962); Ludwig Wittgenstein, 철학적 探究Philosophical Investigation』〔1953, 4.

허구적 대상: Gottlob Frege, 뜻과 지시에 관하여On Sinn and Bedeutung」〔1892, Frege 選集The Frege Reader(1997), 151-71쪽에 수록; 논리학Logic, 같은 책, 230-31쪽에 수록; 논리학 입문Introduction to Logic, 遺稿集Posthumous Writings(1979), 191-2쪽에 수록; Alexius Meinong, 대상에 관한 이론The Theory of Objecs, 실재론과 현상학의 토대Realism and the Backgrounds of Phenomenology(1981), 76-117쪽에 수록; Bertrand Russell, 지칭에 관하여On Denoting(1905), 479-93.

추론주의: Wilfred Sellars, 경험주의와 심리철학Empiricism and the Philosophy of Mind(1956), 253-329; Robert Brandom, 이유를 명시하기: 추론주의 序說Articulating Reasons: An Introduction to Inferentialism(2000)

슬러: 어조 혹은 색채에 관한 Frege의 견해는 뜻와 지시에 관하여, Frege 읽기, 151-71쪽 중 155쪽 및 논리학, 같은 책, 227-50쪽 중 240쪽 참조.

 

 

추가적인 읽을거리

 

주장 개념을 다루는 최근 문헌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Timothy Williamson, 아는 것과 주장하는 것Knowing and Asserting(1996), 489-523쪽이다. 또한 그의 지식과 그 한계Knowledge and Its Limits(2000)는 인식론과 연계하여 주장 개념을 고찰한다. 이 노선에서 영향력 있는 논문은 Keith DeRose, 주장, 지식, 맥락Assertion, Knowledge and Context(2002), 167-203쪽이다. 주장 개념을 다루는 논문들을 모은 탁월한 選集으로는, 편자들의 글 역시 포함된 Jessica Brown, Herman Cappelen , 주장: 최근의 철학적 小論(2011)이 있다. Sanford Goldberg , 옥스포드 핸드북: 주장The Oxford Handbook of Assertion(출간예정)도 참고할 것.

허구적 대상을 가능대상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David Lewis, 허구에서의 진리Truth in Fiction에서 탐구되고 있으며, 이 논문은 철학논문 選集 卷Philosophical Papers Volume(1983), 261-75쪽에 수록되었다. -Meinong주의는 Terence Parsons, 허구적 대상에 대한 Meinong주의적 분석A Meinongian Analysis of Fictional Objects(1975), 73-86쪽 및 -실존적 대상Nonexistent Objects(1980)에서 옹호되었다. 창조주의 견해에 대해서는 Saul Kripke, 1973[: Oxford대학교에서 행한 John Locke 강연], 지시와 실존Reference and Existence(2013)와 더불어, Anthony Everett, Thomas Hofweber , 공허한 이름과 허구, 그리고 -실존에 관한 퍼즐Empty Names, Fiction and the Puzzles of Non-existence(2000) Graham Priest, -존재에 대하여: 지향성의 논리학과 형이상학Towards Non-Being: The Logic and Metaphysics of Intentionality(2005)도 참조할 것.

맥락-상대성을 옹호하는 문헌으로는 Charles Travis, 상황-민감성: 選集Occasion-Sensitivity: Selected Essays(2008), Avner Baz, 단어가 요구되는 때-일상언어철학을 옹호하여When Words Are Called For-In Defense of Ordinary Language Philosophy(2012), Anne Bezuidenhout, 맥락주의의 정합성The Coference of Contexualism(2006)을 보라. 맥락-상대성을 공박하는 문헌으로는 Herman Cappelen, Erine Lepore 共著, 둔감한 의미론: 의미론적 최소주의와 화행 다원주의에 대한 옹호Insensitive Semantics: A Defense of Semantic Minimalism and Speech-Act Pluralism(2005) 및 좀 더 최근의 것으로는 Emma Borg, 의미를 추구하기Pursuing Meaning(2012)를 보라. 맥락주의와 대조되는 상대주의에 대해서는 John MacFarlane, 민감성 평가: 상대적 참과 그 적용Assessment Sensitivity: Relative Truth and Its Applications(2014)를 보라.

추론주의에 관해서는 Jaroslav Peregrin, 추론주의: 왜 규칙이 중요한가Inferentialism: Why Rules Matter(2013)을 보라.

Slur에 관한 Kaplan의 예비적 논의에 대해서는 David Kaplan, 아야와 이런의 의미The Meaning of Ouch and Oops(2004)를 보라. Christopher Hom인종차별표현의 의미론The Semantics of Racial Epithets(2008), 416-40쪽에서 슬러에 관한 영향력 있는 설명을 개진하는데, 그에 따르면 슬러은 내용 층위의 현상으로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에 의해 제공된 인종차별주의가 지닌 경멸적인 내용이다. Elizabeth Camp슬러적 관점(觀點)Slurring Perspectives(2013), 330-49쪽에서 흥미로운 관점적perspectival설명을 제시하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는 슬러를 사용함으로써 청자로 하여금 사회적으로 구성된 관점perspective을 지니도록, 슬러의 대상 및 그와 연관된 집단을 대하는 모멸적 태도에 동참하도록 유도한다. Daniel Whiting그건 당신이 말한 게 아니라 당신이 말한 방식이다: 슬러와 규약적 함의It’s Not What You Said, It’s the Way You Siad It: Slurs and Conventional Implicature(2013), 364-77쪽에서 매우 통찰력 있는 착상의 윤곽을 제시한다. Luvell AndersonErnie Lepore슬러적 단어Slurring Words(2013), 25-48쪽에서 개진하는 견해에 따르면, 슬러의 해악성은 아무리 넓게 해석하더라도 내용의 측면에서 설명될 게 아니라 금지(禁止)prohibits의 측면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David Sosa가 편집한 나쁜 말Bad Words은 매우 고무적인 책이 될 것 같다(이 책을 집필하던 당시에는 출간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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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期 Wittgenstein

 

Ludwig Wittgenstein이 공식적인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저서는 논리-철학 論考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1)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死後 1953년에 출간) 단 두 권이다. 두 저서는 표면적으로는 매우 비슷하다. 두 권 모두 대체로 언어철학에 관해 논하고 있으며, 논증을 통해 특정 결론을 납득시키는 연속적인 산문 형식이 아니라 짤막한 글들이 모여 단속적으로 배열된 형식으로 저술되었다. 번뜩이는 단상들이 풍부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결합된 이러한 스타일은, 최종 목적을 지향하는 일반적인 선형적 글쓰기 방식에 저항하는 듯하다.

하지만 내용 측면에서 두 저서의 차이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논의의 목적상 우리는 論考의 저자로서의 젊은 Wittgenstein을 언어의 기능에 대한 Frege-Russell적인 관점의 핵심적인 부분을 받아들였던 인물로 간주할 수 있다4에서 살펴보았듯 적어도 論考에서 제시되었던 원자문장에 대한 그림이론은 언어, 언어의 객관성, 마음과 세계 간의 관계 등이 바로 지시reference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Frege-Russell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구상되었다. 물론 論考의 저자로서의 Wittgenstein은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는 FregeRussell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데 탐구의 저자로서 後期 Wittgenstein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불일치는 더이상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後期 Wittgenstein은 지시reference가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핵심적인 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언어의 헤아릴 길 없는 다양성과 다층성을 기술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최종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언어에서 체계적인 일반성generality을 찾아내려 시도하는 것은 마치 중세 이탈리아의 도시를 인위적인 격자판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것과 같다. 그 도시에는 구불구불한 도로들, 막다른 골목, 규칙적인 형태의 광장들, 터널, 다리, 심지어 길 위에 나 있는 길들도 있다. 물론 굳이 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시도를 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그 도시 본연의 모습을 작위적으로 왜곡하는 처사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식으로 얻어낸 정보는 그 도시를 실제로 답사해서 얻어낼 수 있는 정보와 판이할 것이다. 이것이 이번 에서 보게 될 後期 Wittgenstein의 더욱 급진적인 언어관에 대한 비유이다.

 

 

언어게임

 

FregeRussell 및 젊은 Wittgenstein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언어철학자들에 따르면 지시 내지 명명(命名)naming하기라는 개념은 언어에서 매우 근본적인fundamental 것이다. 論考의 언어를 활용하여 말해보자면 지시는 언어가 실재(實在)reality 즉 세계와 접촉하는 지점이다. 언어에 대한 고전적인 구상에서 근본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또 다른 단어는 이해(理解)understanding의미이다. 後期 Wittgenstein에 따르면 이러한 단어들은 명료성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문장을 이해하는 것이란 그 의미파악grasp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저 종교적인 기도문을 암송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반면 우리가 현실의 언어를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본다면 언어에 매우 다차원적인 사태들이 있음(가령 한 단어를 이해한 것으로 간주되는 바가 다른 단어를 이해하는 일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인간이 갖는 여타 기술(技術)skill이나 기능들로부터 특별히 언어적 능력만을 따로 떼어내어 탐구할 방도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양한 현상들이 지닌 세부 사항에 따라 달라지는바 이해를 구성하는 단일한 그 무엇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이해했느냐 아니냐 하는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라 정도(定度)degree의 문제이다.

이러한 점은 탐구의 초입에서 Wittgenstein이 묘사한 언어게임language game을 생각해보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킨다. 나는 그 사람에게 빨간 사과 다섯 개라고 적힌 쪽지를 준다. 가게에 간 그 사람은 점원에게 쪽지를 건네고 점원은 사과라 적힌 수납장을 연다. 표에 적힌 빨강색이라는 단어를 본 점원은 그 반대편에서 색깔 샘플을 찾아낸다. 그는 일련의 기수를 다섯에 이르기까지 세면서(아마 이를 마음속으로 세었을 것이다) 그에 맞춰 앞의 샘플과 동일한 색상의 사과를 수납장에서 꺼낸다. 우리가 단어들을 사용하는 일은 이런 식으로 이뤄진다.

(Wittgenstein 1953, 1)

 

이는 무척이나 평범하고 하릴 없이 따분한 일이 묘사된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게임을 하기 위해 점원과 심부름꾼은 기실 엄청나게 다양한 기술들에 숙달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가 숙달해야 할 단 하나의 기술이란 없으며, 숙달되어야 할 다양한 기술들 중 일부를 언어적 기술이라 칭하는 것은 매우 자의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언어적인 기술과 그 외의 기술들을 깔끔하고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쇼핑목록을 특정 장소에 가져가서 건네는 것, ‘사과라고 적인 수납장을 찾아내는 것, 필요한 색상 샘플을 찾아내어 그에 걸맞게 대응하는 것, 정확한 개수의 사과를 수납장에서 꺼내는 것 등, 이 모든 기술 내지 활동들은 Wittgenstein이 칭한바 삶의 형식forms of life들을 구성한다constitute. 이것들은 부분적으로 언어적인 측면과 언어적인 측면을 모두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행위들이 유의미해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전반적인 삶과 문화의 좀 더 넓은 영역에서 구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 중 언어적인 현상이라 할 만한 것을 외따로 떼어내어 조사하는 것은 이 활동들이 유의미해지는 맥락을 일절 무시하는 처사이다. 이는 마치 쓸개를 신체에서 떼어내어, 그것이 신체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완전히 무시한 채 그 기능이나 특성을 조사하는 것마냥 터무니없는 일이다.

언어게임이라는 명칭은 이러한 활동들을 폄하하거나 경시하고자 붙여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활동들을 언어게임이라 부르는 요지는 현실의 삶에서 사용되는 단어들과 게임에서 쓰이는 말piece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특정 말을 rook이라고 식별하는 것은 특정한 틀framework에 따라, 즉 체스 게임에서 통용되는 전반적인 규칙과 관행에 따라 유의미해지는바, 이러한 규칙 및 관습의 총체는 게임 참여자가 룩을 갖고 둘 수 있는 특정한 수()move를 기술한다. 뿐만 아니라 체스에서 게임 참여자는 규칙을 그저 무작정 따르지만은 않는다. 정해진 규칙 내에 주어진 수많은 기회와 경우의 수를 활용하여 창조적이고 극적으로 게임을 이끌어가기도 하는 것이다. 언어게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다만 언어게임이 이뤄지는 전반적인 틀이란 것이 지시 내지 의미에 대해 통상 요구되는 기준에 비해서는 훨씬 더 넓고 덜 결정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이해될 수 있는바 적절성을 갖춘 언어행위에 대한 필요조건이 언어게임의 규칙에 의해 일단 결정되고 나면, 실제 언어현상에서 그러한 제한사항들은 다양하게 변형되는 주제로 취급되기도 하고 다른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는 수단으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 자체는 통상적인 언어적 기술(記述)linguistic description을 전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치부하는 게 아니다. ‘다섯이 다섯을, ‘빨강이 빨강을, ‘사과가 사과를 지시한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올바르며,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그 요지를 이해할 것이다. 다만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앞서 살펴본 언어게임에 무언가 더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실제로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더 명료한 설명을 제공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언어현상을 그런 식으로[의미론적으로] 기술하는 것이 어쨌든 모종의 유의미한 설명을 제공한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지시하다’, ‘뜻하다’, ‘의미하다등의 단어들이 으레 지니고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일반성(一般性)에 대한 갈망carving for generality에 굴복하는 셈이다. 이러한 단어들은 다양한 언어활동들을 간략하게 제시하는 데에는 유용하겠지만, 이를 통해 얻어진 통찰력이란 그저 매우 일반적이기 때문에 극히 피상적인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단어들은 다양한 언어게임들 간의 차이점을 조명함으로써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진정한 통찰력을 가져다준다기보다는, 그 차이점들을 단지 은폐할 뿐이다(WittgensteinLear 의 한 대사를 인용하여 내가 너희에게 차이들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말한다).

지시하다’, ‘뜻하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등의 표현들이 수행하는 진정한 역할은, 하나의 배경background이 일단 이해되고 나면, 즉 한 언어게임이 이뤄지는 지점이 개념적으로 정립되고 나면, 그 언어게임에서 특정 목적을 위해 어떤 단어를 사용(使用)use해야 할지를 나타내는 일일 따름이다. 다소 인위적이지만 분명한 예를 들자면, 달리기 경주에서 선수들이 출발하기 전에 심판이 준비하고 말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그 말은 달리기 경주와 연관된 다양한 규칙, 예측, 전통적인 관습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하나의 배경이 일단 갖추어져 있다는 특정 맥락에서 발화됨으로써만 비로소 유의미해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 단락에서 기술 것처럼 빨강이 빨강을 지시한다는 식의 언어게임에 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많은 사안들이 선제(상정)presuppose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식의 언어게임과 연관된 배경을 우리가 상당 부분 이미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우리는 매우 다양한 삶의 형식들을 무의식중에 공유하고 있으며, 굳이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들에 의존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통화하면서 복닥거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이는 실제로는 매우 복잡한 활동이지만 우리는 그에 완전히 숙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매우 쉽게 해낸다. 재삼 강조하지만 의미론적 어휘semantical vocabulary들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다양한 습관과 성향을 구성하는 삶의 형식들이 배경에 갖춰진 것으로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념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앞서 기술된 대로의 언어게임이 완전하다complete는 것이다. 언어게임이 완전하다는 말의 요지는 앞서 묘사된 언어게임에 그 이상으로 추가될 세부 사항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언어게임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 유일하게 숙달되어야 할 것으로서, 혹은 우리가 숙달master해야 할 소위 언어적 기술로서, 그러한 기술들 집합 이외의 무언가가 더 요구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게임이 불완전하다거나 부분적partial이라고 생각할 이유란 없다. 앞의 언어게임에서 가게 점원은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는 단어들을 통해 특정 활동을 충분히 능숙하게 해내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의 언어게임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이다.

 

 

가족 유사성, 도구, 도시

 

한 아이가 앞서 기술된 언어게임에서 점원의 역할을 숙달하게 되었다 해보자. 이제 그 아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몇몇 요소들을 차용하기도 하고 아예 새로운 형식의 용어들을 습득하기도 하면서 점점 더 많은 언어게임들을 차츰 숙달해갈 것이다. 그 경우 우리는 그 아이가 숙달한 전반적인 기술들 집합의 그림을, 각각이 상호 얽혀 있으면서도 고유의 영역 및 고유한 목적들을 지니고 있는 다양한 셀cell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한 요소들로는 이야기하는 것storytelling, 믿는 체 하는 것(가장(假裝)하는 것)making-believe, 학교에서 학생으로서 처신하는 것, 농담하는 것, 원하는 바를 드러내는 것,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 등등 매우 다양한 활동들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그 아이가 언어를 온전히 숙달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명확한 시점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도의 문제matter of degree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언어를 습득한다는 것은 매우 다양한 능력 및 다양한 종류의 숙달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다면 언어란 무엇인가? Wittgenstein의 대답은 이 물음이 단 하나로 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Wittgenstein은 언어에 대한 -본질주의자anti-essentialist이다. 언어를 깔끔하고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보다 언어라는 개념은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 개념이라고 해야 한다.

가족 유사성 개념의 또 다른 예가 있다. 게임의 개념을 생각해보자(이는 Wittgenstein이 직접 들었던 유명한 예시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가 언어게임이라는 착상을 제시한 것은 상당히 미묘한 데가 있다). 게임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어떤 것이 게임이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인가? Wittgenstein에 따르면 이 질문에는 답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게임이라는 개념 내지 단어에는 문제될 것이 없다. 어떤 게임에서는 게임판과 말들이 쓰이지만(주사위놀이)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 어떤 게임에서는 참여자들이 경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혼자 하는 카드게임, 몸짓 알아맞히기 놀이). 어떤 게임에는 운이 작용하지만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체스, 오목, 틱택토 게임). 어떤 게임은 팀을 구성하여 진행되지만 그렇지 않은 게임도 있다(전문 스포츠 경기). 이렇듯 게임 개념의 사례가 되는 데 대한 충분조건이라 할 수 있는 특성들은 매우 다양한바, 속성 AB, 또는 BC, 또는 CD를 갖는 것은 게임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게임에 고유하거나 공통되는 단 하나의 특성은 없다. 뿐만 아니라 게임 개념은 선언적 속성을 통해 온전히 정의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즉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게임들이 갖는 속성들을 한데 모아 유한한 수의 선언지들로 취하여, 속성 AB, 또는 BC, 또는 CD 등을 갖는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게임이라는 식으로 정의될 수는 없다. 이러한 선언적 정의는 Wittgenstein이 말하였듯이 단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이런 식의 선언문을 실제로 진지하게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Wittgenstein이 드러내고자 했던 가족 유사성 개념의 기본적인 특징, 즉 게임 개념이 열린-구조open-textured를 지니고 있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를 놓치고 있다. 모든 게임들이 갖는 속성들을 남김없이 포괄하는 선언적 정의가 실제로 규정된다고 해도, 이러한 정의는 과거에 실현되지 않았던 가능성들과 미래에 실현될 가능성들을 고려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한 언어 공동체linguistic community가 어떤 새로운 사례를 마주할 경우, 즉 과거에 적용되었던 게임 개념에 포함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전적으로 새로운 속성들 집합에 직면할 경우, 그것이 아무리 생소하더라도 기존의 게임 개념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공동체에 받아들여진다면, 기존의 게임 개념은 그 새로운 사례 역시 포함되게끔 확장될 것이다. 이렇듯 게임과 같은 가족 유사성 개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올바르게 적용되는 영역을 넓혀나가는 열린-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런 식의 열린-구조 모형은 시간에 따른 개념적 변화 및 언어표현의 역동성을 수용한다.

가족 유사성 개념을 일단 파악하고 나면 우리는 이를 다양한 분야에서 발견해낼 수 있다. 특히 좋음[]goodness, 지식, 예술 등의 개념과 같이 철학적으로 중요하고 민감한 영역들에 이 개념을 적용해볼 수 있다.

언어 개념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전술했듯이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족 유사성 개념을 표현한다. 우리가 언어라는 단어로써 특징짓는 모든 잡다한 활동들에 공통되는 단 하나의 것이란 없다. 언어의 본질을 원리적으로 명료하게 특성화할 수 있다는 생각 대신, Wittgenstein은 도시와 언어 간의 유사점을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그가 말하는 도시는 밀턴 킨즈1)나 브라질리아 같은 계획도시가 아니라, 런던이나 뭄바이 같이 오랜 역사에 걸쳐 유기적으로 발전해온 도시이다. 전자에 속하는 도시는 실제 건설되고 사용되기에 앞서 단일한 사람에 의해 계획되고는 한다. 언어에서 이에 상응하는 것으로는 화학적 표기법이나 논리계산을 위해 고안된 표기법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후자에 속하는 도시는 우리 일상에서 쓰이는 자연언어natural language가 그러했듯이 극히 오랜 시간에 걸쳐 매우 서서히 발전해왔다(또한 단일한 사람이 그에 관한 모든 것을 반드시 알아야한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도시들이 발전해온 과정을 모종의 단일하고 전반적인 논리를 통해 추적할 수는 없다. 가령 런던은 2천년이라는 매우 긴 기간에 걸쳐 급격히 확장되기도 하고 발전상의 정체기를 겪기도 하며 때로는 위축되기도 하면서 뒤죽박죽으로 발전해왔다. 한국어나 영어 같은 자연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도시와 자연언어 양자는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진화의 산물로서, 그로부터 어떤 전반적이고 포괄적인 틀을 추출해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 도시들에서 잘 생활할 수 있으며, 도시 내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무리 없이 이동할 수 있다. 가령 역사적 도시라고 해서 모든 도로가 죄다 막다른 길은 아니지 않는가. 자연언어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서, 주지하다시피 영어의 문법이나 어휘 규칙이 아무리 뒤죽박죽이고 엉망이더라도, 영어가 전적으로 불규칙적이고 무질서하게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2) 뿐만 아니라 Haussmann의 디자인에 따라 파리 중심지가 재개발되었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중심가든 교외지역이든 역사적인 도시의 일부 지역이 의도적인 설계 하에 개발되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자연언어의 일부도 계획적이고 엄밀한 방식으로 개조될 수 있는바, 가령 일상에서 느슨하게 쓰이던 특정 용어들이 과학적학문적인 전문용어로 엄밀하게 정의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뚜렷한 사례일 것이다.


1) 1967년 버킹엄셔 북부에 건설된 영국 최대의 도시.

2) 그리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전적으로 규칙적이게 사용되는 언어란 언어조차도 아니며, 언어의 불규칙적인 사용이란 사용조차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언어게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상호 얽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아이가 언어를 습득하는 과정은 그렇게 복잡다단하게 얽힌 각각의 언어게임들을 차츰 숙달해 가는 과정으로서, 어떤 언어게임이 다른 것보다 먼저 익혀지기도 하고, 어떤 언어게임의 숙달은 다른 것의 숙달을 상정하기도 하며, 일부 언어게임의 경우 여타의 것들과 동시에 익혀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단편적으로 차츰차츰 진행된다. 눈치 빠른 독자는 예상했겠지만, 이러한 고찰에 따라 Wittgenstein은 사실을 기술하는 언어, 무언가를 주장하는 언어, 진리-조건과 논리적 함축을 갖는 언어 등과 같은 소위 인지적 언어cognitive language7에서 살펴본 개념인 화행speech-act보다 선행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어에는 주장이나 진술 외에도 인사하기, 모욕하기, 명령하기, 내기를 걸기, 흥정하기, 도덕적 칭찬과 비난, 위협하기, 감탄사, 욕설, 압박두려움혐오고통기쁨 등을 느낄 때 내뱉는 말 등 매우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각각의 언어표현들은 이러한 다양한 목적들을 위해 존재하며, 그 중 어떤 것들은 지시하기referring의 기능을 일절 수행하지 않는다. ‘안녕!’, ‘Come on!’, ‘지금 비 와등의 말을 생각해보라.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모든 언어표현 내지 언어행위들이 무언가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모든 언어게임들이 이론적으로 중요한 공통점을 갖는다고 선험적으로 가정할 수는 없다.

Wittgenstein이 언어게임의 다양성을 강조한 것을 감안하건대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의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대부분의 경우, 그 단어는 이렇게 정의될 수 있다: 단어의 의미는 언어에서의 그 사용use in language이다.” (1953, 43) 모든 단어가 의미를 표현한다는 식으로 말함으로써 언어에 그럴듯한 획일성을 부여하기보다는, 단어들이 다양하게 사용use되는 방식에 관해 묻는 것이 더 유익하고 오해의 소지가 덜하다는 것이다.

Wittgenstein이 들었던 또 다른 유명한 유비는 언어를 도구상자에, 단어를 도구에 비유하는 것이다. 모든 도구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말하려 해본다면, 우리는 모든 도구는 무언가를 고치는 데에 사용되는 물건이다’(또는 심지어 도구는 사용되는 물건이다’)와 같은 식으로 전혀 정보적이지 않거나 대체로 거짓인 답만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 망치, , 줄자, 바이스, 드라이버, 접착제, 페인트 붓, 펜치, 수평자, 소켓 렌치, 납땜용 인두, 사포 등을 생각해보라. 대체로 철학자들은 사실을 진술하는 것 내지 사실적 정보를 전달하는 것(그리고 이와 연관된 언어행위로서 정보를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질문을 하는 것)만이 언어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말하고는 한다. 이는 마치 도구상자를 뒤적거리면서 망치와 못만 찾느라 혈안이 된 사람의 행태와 다를 바가 없다. 물론 이러한 유비에는 분명 제한사항이 있으며, 어찌 보면 선결되어야 할 문제 자체에 호소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언어와 도구 사이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언어가 기여하는 모든 목적이 언어와 독립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도구의 경우엔 한 도구를 사용하여 의도했던 결과가 달성되었을 때, (도구를 사용하여 다른 도구를 고치는 경우가 아닌 바에야) 굳이 그 도구를 지시하지 않고도 결과가 달성된 과정을 설명해낼 수 있다. 반면 언어의 경우 어떤 식으로든 무언가를 사고하는 우리의 능력은 언어를 숙달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여 특정 사고내용을 기록하거나 전달할 때 의도되는 결과(대체로 특정 사람으로 하여금 특정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는 언어 숙달과 무관하게 설명될 수 없다. 대부분의 언어적 활동들은 Wittgenstein이 말한 삶의 형식들과, 즉 우리 삶의 특정 부분들을 구성하는 규약적인 관행들이자 특정 목적이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는 다양한 삶의 형식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규칙 따르기

 

이제 우리는 Wittgenstein이 제기했던 또 다른 유명한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1982KripkeWittgenstein의 규칙과 사적 언어Wittgenstein on Rules and Private Language가 출간된 이래 이 주제는 수많은 해설과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이와 연관된 논의는 상당히 복잡하게 진행되었지만, Wittgenstein이 제기했던 핵심 논점 자체는 꽤 단순하다.

여기서는 아주 기초적인 예시가 취해지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일반적인 요점을 간추리는 데에는 충분할 것이다. 당신이 공항 복도를 따라 걷다가 ‘Y’자 형태의 갈림길에서 다음 기호가 적힌 표지판을 마주쳤다고 해보자:

 

(null)

 

당연히 당신은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향할 것이다. 이 기호는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기호가 말해주는 바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이와 관련하여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란 무엇인가? 대체 어떤 요인으로 인해 당신은 이 기호의 그러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모종의 정신적인 사건을 제시해볼 수 있다. 즉 우리가 위 기호를 이해할 때 어떤 정신적인 (이미지)mental image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신적인 대상 내지 상태라는 것은 이 기호에 적절히 대응하는 데에 필요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우선 심적 이미지는 기호를 이해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다. 특정한 정신적 이미지가 수반되지 않더라도 이 기호에 적절히 대응하는 경우를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저 화살표 기호를 보고는 오른쪽으로 갔을 뿐, 이러한 사건을 설명해줄 또 다른 정신적 처리 과정이 추가로 상정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다음 더욱 중요한 사안으로서, 심적 이미지는 기호를 이해하는 데 대한 충분조건도 아니다. 즉 정신적 사건을 들먹인다고 해도 무언가를 이해하는 절차가 충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당신이 화살표 기호를 이해하는 시점에 당신의 내적인 정신적 스크린에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고 해보자. 이 경우 당신의 정신에 떠오른 그 이미지는 표지판에 그려진 화살표 기호와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다. 다시 말해, 표지판의 기호가 읽히고 적절히 해석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의 정신에 떠오른 이미지 역시 읽히고 적절히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 심적 이미지의 의미는 또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느냐 하는 앞서와 동일한 물음이 다시 제기될 뿐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라. 외적인 물리적 기호와 그에 대한 내적인 정신적 복제물이 있어서, 전자를 이해하는 데 대해 후자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점을 일단 받아들여 보자. 그 경우, 그렇다면 내적인 기호 자체에 대한 해석은 또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이 다시 제기되는 것이다. 화살표가 그것이 그려진 방향과 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에서라면 위 기호는 왼쪽으로 가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이는 충분히 상상가능하다. 심지어 어떤 사회에서는 위 기호가 진입금지라든가 휴대전화 사용금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한 공동체 내에서 통용되는] 규약convention이다. [그리고 심적 이미지는 이렇듯 기호가 규약에 따라 의미하는 바를 가려내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정신적 스크린에 떠오르는 또 다른 심적 기호는 외부 기호를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효력도 발휘하지 않는다. 이에서 더 나아가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그 무엇이 되었든, 설사 그것이 여기서 살펴본 형태의 내적 복제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상세하더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그 어떤 내적 현상도 이해를 구성(構成)constitute하지 못한다. Wittgenstein의 말을 빌자면 그 어떤 심적과정mentalprocess도 의미를 가져다줄 수는 없다.”(1953, :218)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의 이해를 구성하는가?] 이에 대해 Wittgenstein이 전적으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거나, 혹은 의미와 이해에 관한 생각들이 모조리 헛된 것이라 주장하지는 않는다. Wittgenstein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호에 대한 파악이 기호를 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해석이라는 것이 한 기호를 통해 다른 기호를 이해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한, 바로 앞 단락에서 살펴본 문제가 곧바로 대두된다. 그렇다기보다 기호를 따르거나 준수하는 것은 특정 성향(性向)disposition을 습득하는 훈련(교육)training의 문제이다. 공항 사례의 경우 우리가 그 기호를 이해하고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환경에서 그러한 기호를 마주쳤을 때는 오른쪽으로 간다는 성향을 훈련을 통해 습득했기 때문이다. 탐구의 초입에서 Wittgenstein은 이렇게 강조한다: “설명은 어딘가에서 멈춰야 한다.” 계속 파헤쳐 내려가다 암반(巖盤)에 도달하면 삽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평소에 하던 대로 반응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경향이 있기inclined to do때문이다. 그게 바로 우리가 행하는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배우는 능력은 우리의 자연사(自然史)natural history의 특징이다. 우리와 매우 다른 성향을 지닌 다른 종의 생물체들은 우리가 훈련하는 방식으로 반응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Wittgenstein이 말하듯이 의사소통의 가능성은 판단에서의 일치agreement in judgement에 달려 있다(1953, 242). 거꾸로 말해 만약 우리 각자가 어떤 사건들에 대해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의사소통은 애초에 시작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종종 이러한 논점은 Platon의 대화편 Menon에 나오는 노예 소년 이야기와 비교되고는 한다. 그 대화편에서 Socrates는 한 노예 소년에게 일련의 질문들만 던지면서 그 소년으로 하여금 한 기하학 정리를 증명하도록 유도함으로써, 기하학적 지식이 선천적innate임을 실증해보이고자 한다. Wittgenstein은 우리가 기하학에 관한 지식을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기하학을 배우기 위한) 특정 성향을 이미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Socrates가 보여주었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규칙 따르기

 

그렇다면 기호에 반응하는 성향을 갖는 것은 기호에 대한 이해를 구성하는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최소한 기호에 올바르게in the right way 반응하는 성향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즉 언어적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하는 방식대로 기호에 반응하는 성향을 지녀야만 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Kripke의 책 Wittgenstein의 규칙과 사적 언어의 핵심이 되는 주제로서, Wittgenstein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를 눈치챘을 것이다. 이 주제는 두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첫 번째로, 주어진 규칙이 사용되는 범위가 실제적으로도 잠재적으로도 무한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한 사람은 분명 상당히 많은 경우에 걸쳐 그 규칙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올바른 성향을 갖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 결코 확신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지닌 성향과 그 규칙이 실제로 지시하는 바가, 그 사람이 이제껏 마주쳐온 경우들에서는 부합했을지라도 그 사람이 아직 마주쳐본 적 없는 경우들에서는 부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향을 갖는 것과 규칙을 준수하는 것 간에는 다음과 같은 회의적인 문제 혹은 인식론적인 틈epistemic gap이 있는 셈이다: 우리는 자신이 규칙을 올바르게 준수하고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두 번째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기호에 반응하는 성향을 갖는 것과 기호를 이해하는 것 간에는 규범적인 normative gap이 존재한다. 실제로 올바른 방식으로 하는 성향을 내가 갖고 있다 하더라도 [즉 내가 나의 성향에 따라 행했던 바가 실제로도 올바른 것이었더라도], 나의 그 행동이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성향 그 자체는 아무런 규범적 효력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 생물체가 특정 성향을 갖고 행동한다는 사실이, [그 성향이 산출하는 행동이 실제로 올바른 것이라 해도,] 그 생물체가 올바른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뿐만 아니라 성향을 갖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ought 하는지를 말해줄 수도 없다. 이는 등을 긁어줄 때 개가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인다고 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올바른 행위를 그 개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이 규칙과 의미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요점의 전부이다. 우선 한편으로, 나는 체계적으로 실수할systematically make mistake 수 있다. 이는 나의 수행이 규칙에 비추었을 때 체계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경우로서, 성향을 갖는 것이 규칙 준수와 연관된 전부라면 이러한 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당연하고 사소한 말이겠지만, 사람은 자신이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규칙을 파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실수를 하는 것과, 그와 정확히 동일한 행동인데도 아무런 규칙에 따르지 않은 채로 행동하는 것 간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내 행동이 규칙과 정확히 일치하더라도, 그 행위는 규칙에 의해 인도된guided 게 아니라 단지 규칙에 부합하게끔match the rule 행해진 것일 수 있다(와플 굽는 틀이 아무리 완벽한 모양으로 와플을 구워낸다고 해도 그것은 규칙을 따르고 있는 게 아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Wittgenstein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혹은 취했을지와 관련하여 매우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KripkeWittgenstein을 대신하여 제시한 답이 상당히 많은 지지자를 얻긴 했지만, 그와 다른 답변들도 많이 제안되었다. 여기서 나는 두 번째 난점에 대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Wittgenstein이 다소 동의했을 법한 해결책을 간략히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은 언어적 행동이 발생하는 사회적 맥락social context이다. 우리가 행하는 다양한 언어게임들 중에는 타인의 잘못된 언어적 성향을 올바르게 교정하려는 습관이 있다. 바로 이것이 규범성normativity을 설명해주는 우리 관행의 기본적인 요소로서, 그 이상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되거나 탈선적인 언어행위를 꾸짖거나 지적하고는 한다(심지어 처벌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식의 제재를 가하는 공동체가 없는 한 어떤 발화를 옳거나 그르다고 규정하는 것은, 언어-사용자가 보기에는 외견상 그런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실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이는 주어진 기호의 해석과 관련하여 현실적으로나 잠재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한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 공동체 전체 역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어 공동체는 그러한 문제를 상당량 처리할 수 있지만, 그 전부를 남김없이 깔끔하게 해결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애초의 문제는 공동체의 관행 내에 규범성을 허용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지금 제시한 해결책이 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즉 규칙 준수의 올바름을 규정하는 규범성의 원천은 특정 관행이 통용되는 언어 공동체 자체일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Wittgenstein은 첫 번째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을 듯하다. 이에 대해서는 소위 귀납(歸納)induction의 문제, 즉 관찰된 사례에 근거하여 아직 관찰되지 않은 사례들을 추론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그가 취했던 입장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Wittgenstein그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침묵할 것을 권하는바, 그 문제와 관련하여서는 단순히 삶의 형식을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이를 상세히 논의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이다.

 

 

사적 언어

 

탐구243절에서 Wittgenstein은 단어들이 적 경험inner experience에 적용되는 언어, 오로지 말하는(혹은 글로 쓰는) 사람 자신에게 알려질 수 있는 그런 언어에 대해 고찰한다. 필연적으로 화자 자신에게만 이해되는 이러한 사적(私的) 언어private language의 이해 가능성에 대해 Wittgenstein은 의구심을 던진다. 다만 이는, 단어들이 원리적으로 타인에게 이해될 수 있는 한, 우리가 자신의 내적 경험에 관해 말하기 위해 단어들을 사용한다는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이에 관해서는 잠시 뒤에 살펴볼 것이다). 그는 필연적으로 사적일 수밖에 없는 언어라는 생각을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러한 사적 언어를 고안하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 느낀 한 감각(感覺)sensation을 당신은 ‘S’라고 부르기로 한다. 당신은 ‘S’를 노트에 적어 놓고는 그것이 S의 이름이 된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 당신은 또 어떤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S인가? 단순하게 생각해보자면 마음속으로inwardly 그 감각을 이전의 경우와 비교해볼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내적 비교inner comparison라는 게 전연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준(基準)criterion 자체가 없다. 왜냐하면 어떤 내적 감각이 존재하는 것existence과 그것이 단지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seeming to exist간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없다: 그 감각이 S인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S이고, 그렇지 않다면 S가 아니다. 한 단어가 유의미해지기 위해서는 그 단어가 실수로 오용(誤用)되는mistakenly misapply 경우가 상상가능해야 한다. 즉 실제로는 S가 아닌데도 S인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상상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S’라는 단어로 무언가를 의미하고자 하는 시도는 실패한다.

Wittgenstein은 이렇게 말한다:

 

첫 번째 경우[(최초에 한 감각을 ‘S’라고 칭했던 경우)] 나에게는 올바름correctness에 대한 기준이 없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것은 올바르다. 이는 우리가 여기에서 올바름에 관해 더 이상 논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1953, 258)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규칙을 따르는 것은 관습이다. 그리고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은 다르다. 따라서 규칙을 사적으로따른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규칙을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을 따르는 것과 같아질 것이다.

(1953, 202)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감각의 동일성 기준은 무엇인가? 감각 S-확인하는re-identifying 기준은 무엇인가? 또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어떤 감각이 S가 되는 기준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이 단 하나라도 답해질 수 없는 한 ‘Sbeing S에 대해서는 아무런 표준도 없으며, 따라서 [그에 대한 명칭으로 의도된 ‘S’ 역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셈이다. 사적 언어 개념에 대한 Wittgenstein의 반대를 간결한 논증 형태로 구성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한 단어로 무언가를 의미하기 위해서는 그 단어가 올바르게 적용되는 경우와 올바르게 적용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

2 사적 단어는 필연적으로 그러한 구분을 결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적 단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탐구가 첫 출간되었을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 논제가 감각이 필연적으로 공적(公的)public이라는 논제를 함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혹은 Wittgenstein이 모종의 행동주의(行動主義)behaviourism를 주장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상당히 복잡미묘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고통-단어pain-word를 배우는 것은 실제로 약간의 행동을 배우는 것이긴 하지만, 다음과 같이 고통 및 그에 수반되는 것과 관련되어 습득된다:

 

단어들은 감각을 원초적(原初的)primitive이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과 연관된다. 아이는 아픔을 느끼면 일단 운다. 어른들은 아플 때 내뱉는 단어들과 문장들을 그 아이에게 말해주며 가르친다. 이제 아이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고통-행동pain-behaviour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1953, 244)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단어들은 특정한 맥락 내에서 사용되는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다. 단어들은 풍부한 삶의 틀 내에서 상호 얽혀있으며 그렇게 얽힌 전체 체계 내부에서만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앞서 말한바 우리는 언어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성향을 [언어를 실제로 습득하기에] 앞서 이미 지니고 있다. 위 인용문에서 Wittgenstein이 기술하듯이 그러한 성향 중에는 자연스런 표현방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고통과 같은 내적 감각을 나타내기 위한 단어들은 그러한 자연스런 표현 방식 위에 올라타 있는ride atop 셈이다. Wittgenstein은 내적 상태inner state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의미에서의 행동주의자는 아니다. 단지 그는 내적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는 단어들에 대한 기준이 인간 존재가 갖는 자연스런 행동방식과 결부되어야한 한다는 것을 주장할 뿐이다.

이러한 사적 언어 반대 논변을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신조와 연관지어볼 수 있다. 2에서 살펴본 형태의 Russell의 언어이론은 감각-자료sense-data 개념 및 그와 밀접히 연관된 직접대면의 원리를 기초로 구성되었다. 그 원리에 따르면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명제는 우리가 직접대면하는 요소들로만 구성된다.” 여기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직접대면하는 것이란 바로 감각자료로서, 이를 수단삼아 우리는 물리적 대상을 지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감각-자료는 가장 탁월한 사적 실체private entities par excellence. 하지만 분명 Wittgenstein은 이러한 신조뿐만 아니라, 감각-자료의 좀 더 현대적 버전으로서 심리철학에서 논의되는 감각질(感覺質)qualia3) 개념 역시 극도로 의심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3) 우선 첫 번째로 심적 현상들mental phenomena 중에서 고통스러움, 가려움, 간지러움, 잔상을 느낌, 둥근 녹색 조각을 봄, 암모니아 냄새를 느낌, 메스꺼움 등과 같이, 감각 내지 감각적 특질sensory quality과 연관된 것들을 구분해볼 수 있다. 이러한 심적 상태들은 현상적내지 질적(質的)qualitative특성을 갖는다고, 즉 그것들이 느껴지거나feel 보이거나look 나타나는appear 고유한 방식을 갖는다고 말해진다. 종종 선호되는 용어를 사용해 말해보자면, 그러한 현상을 경험하거나 그러한 상태에 처할 경우 여차하게 느껴지는 어떤 느낌something it is like이 존재한다. 그래서 고통은 고통에만 고유한 질적 느낌 즉 아프다는 느낌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가려움은 가렵게 느껴지고 간지러움은 간지럽게 느껴진다. 당신이 녹색 조각을 볼 때 그 조각은 독특한 방식으로 보인다. 그것은 녹색으로 보이며 당신의 시각 경험에는 그러한 녹색의 느낌이 동반된다. 이러한 갖가지 감각들은 나름대로의 독특한 느낌을 지니고 있으며, 최소한 각각이 속하는 일반적인 유형들(가령 고통, 가려움, 녹색을 봄 등)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식별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질적 특질에 따라 특성화된다. 이러한 항목들은 현상적 상태질적 상태내지는 간혹 날 것 그대로의 느낌raw feel등으로 칭해진다. 작금에는 이러한 감각적질적 상태 내지 그러한 상태에서 경험되는 감각적 특질을 가리키기 위해 감각질이라는 용어가 표준적으로 널리 쓰인다. 이러한 부류의 심적 현상들은 총괄적으로 현상적 의식phenomenal consciousness을 구성한다고 말해진다.” (김재권, 심리철학Philosophy of Mind, 3, Routledge, 2011, 15.)

     

 

역사적 사항

 

(前期 Wittgenstein履歷에 관해서는 4, ‘역사적 사항참조) 1929년 철학계에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캠브릿지로 복귀한 Wittgenstein은 곧 급진적이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는 1930년대에 비공식적인 필사본 형태로 유포되었던 청색책The Blue Book갈색책The Brown Book에 개진되었으며, 최종적으로는 그의 死後 2년 뒤인 1953년에 출간된 철학적 탐구로 집결된다. Wittgenstein의 철학을 다루는 책들은 엄청나게 많다. 그 중 가장 예리한 것들은 Wittgenstein의 저술들을 거의 신성시하는 그의 추종자들의 관점에서 쓰인 경우가 많다. 이는 그의 추종자들을 폄하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의 後記 저술들이 상당히 독특하고 매력적이라는 점을 언급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Wittgenstein의 사고노선을 명시적으로 따르지는 않았더라도, Crispin Wright부터 John McDowellStanley Cavell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은 범위에 걸친 철학자들의 저술이 Wittgenstein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의 요약

 

後期 Wittgenstein은 언어에 대해 FregeRussell의 견해 및 Wittgenstein 자신이 이전에 견지하였던 바와도 상당히 다른 사고방식을 제안한다. 이에 따르면 언어란 다양한 언어게임들로 이뤄진 조직fabric과도 같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며, 그 조직 전체를 통괄하는 단일한 실이 존재한다고 상정할 수는 없다. 언어란 가령 총각과도 같이 필요충분조건 형식으로 정의될 수 있는 명료한 개념이 아니라 가족 유사성 개념으로서, 다양한 언어게임들이 상호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유기적이고 변화무쌍한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그 전체가 바로 언어이다. 언어에 존재하는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을 지시라든가 의미와 같은 개념을 통해 추상화하여 이론화하고자 할 경우, 지시와 의미 개념은 언어게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왜곡할 뿐이다. 예를 들어 Wittgenstein이 묘사한 심부름꾼과 점원 사례를 우리가 그저 살펴본다면”, 그러한 언어게임을 기술하는 데에 의미론적 개념들이 더이상 특권적priviledged이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의미론적 어휘들의 적용가능성에는 상당한 배경이 상정되어 있지만, 하나의 배경이 일단 정해지고 나면 그 어휘들은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당초에 생각했던 것만큼 크게 기여하지는 않게 된다.

언어에 대한 사고방식에 만연해 있는 가장 심각한 환상은, 의미라는 것이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유령처럼 단어에 깃들어 있어서, 우리가 단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알려준다는 생각이다. 단어들이 실제로 사용되는 많은 경우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런 식으로 생각된 의미란 언어를 이해하는 데에 일절 무력하다는 점이 드러난다. 가령 단어의 의미란 단어가 사용되거나 이해될 때 파악되는 모종의 정신적인 실체라고 해보자. 그 경우, 본래의 단어 자체가 해석되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어의 의미라고 여겨진 그 정신적 실체 역시 어떻게든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단어의 의미를 찾는 시도를 포기하고, 언어를 이해하는 일이란 의미에 대한 해석 없이 언어를 파악하는 문제라는 점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즉 신발끈 묶는 법을 배울 때처럼, 우리는 가장 낮은 단계에서 [즉 그 이상 이론적으로 더 파고들어갈 수 없는 원초적인 수준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반응하도록 훈련될 뿐이다. 다만 이러한 훈련은 조련된 앵무새가 보여주는 기계적인 반응처럼 단순한 행동으로만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언어에 대한 이해를 산출한다. 왜냐하면 훈련 과정에서 우리는 언어 공동체에 통용되는 관습적인 배경에 알맞게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바, 그 배경은 규범 즉 올바름에 대한 기준을 구성하며 언어 사용자는 이 규범에 부합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Russell을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은 물질적 대상에 관해 말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이 감각자료에 대한 직접대면에 의존한다고 주장해왔다. Wittgenstein은 감각-자료와 같이 내적이고 사적인 것에 적용되는 언어란 불가능하다고 논증한다. 단어가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으려면 그 단어가 올바르게 적용되는 경우와 단지 올바르게 적용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구분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감각-자료와 같은 내적 현상에 적용되는 사적 단어는 이러한 구분을 결여한다.

 

 

탐구문제

 

1 이번 장의 초입을 되돌아보건대 우리가 가져봄직한 의문은, 구성성 원리가 제시하는 요구사항에 Wittgenstein이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미를 등한시함으로써, 구성성 원리가 부과하는 조건을 충족해야 할 의미론적 개념 자체를 폐기해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Wittgenstein의 입장에서 이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는가?

 

2 공장 작업대에서 사용되는 언어, 연인들이나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 사용되는 언어, 길거리, 술공집, 법정 등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되는 언어 등을 생각해보라. 분명 그러한 언어들에서도 모종의 규칙들(짐작건대 대체로 Grice적인 준칙들)이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규칙들이 맥락에 따라 변하는가? 변한다면 어떤 식으로 변하는가? 대화 참여자들은 그 규칙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3 언어에 관한 Wittgenstein의 그림은 각기 다른 유형의 언어들 간 차이점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뿐, 그 유사성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은가?

 

4 타인의 마음에 관한 문제, 즉 다른 이에게도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John Stuart Mill은 다음과 같은 해결책을 제시한 바 있다: 내가 고통을 느낄 때 나는 울부짖는다. 다른 인간 존재자들 역시 나와 유사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이 울부짖을 때, 유추에 의해 나는 그 사람이 고통을 느끼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Wittgenstein의 사적-언어 반대 논증을 감안하건대, Mill의 해결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요 읽을거리

 

Wittgenstein, L. (2009),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4.

 

 

추가적인 읽을거리

 

Ahmed, A. (2010), Wittgenstein의 철학적 탐구Wittgenstein’s Philosophical Investigation.

Lugg, A. (2000), Wittgenstein의 탐구 1-133: 안내 및 해설Wittgenstein’s Investigation 1-133: A guide and interpre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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