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 Soames, 『철학적 분석(2卷)』, 9章 '언어사용과 대화의 논리', 2節 'Grice의 핵심 착상: 대화의 논리' 中)



(前略)



Grice는 특수화된 대화적 함축(含蓄)(특수대화함축)particularized conversational implicauture과 일반화된generalized 대화적 함축(일반대화함축)을 대조한다. 일반대화함축이란 발화자가 대화적 준칙 내지 협조원리를 준수한다고 가정되는 그 어떤 통상적인 맥락에서든in any normal context 발화된 문장에 의해 전달되는 함축이다. 이의 적절한 사례이자 그 자체가 이론적으로도 흥미로운 사례로는 A 또는 B(A이거나 B이다) 형식으로 표기되는 선언문을 들 수 있다. 형식논리에서 선언문은 엄밀하게 진리-함수적인 연산에 따라 취급된다. 즉 논리학자가 사용하는 A 또는 B는, 두 선언지 중 하나 혹은 양자 모두 참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며, 양자 모두 거짓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거짓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또는(이거나)이 일상언어에서 사용될 때 갖는 의미meaning와 논리학에서 사용될 때 갖는 의미가 동일한지에 대해 종종 의문을 갖고는 했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일상언어에서 A와 B로 이뤄진 선언문을 주장할 경우 대체로 우리는 A가 참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 혹은 B가 참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런 문장을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A와 B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매우 낮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경우 선언문을 사용한다. 그 경우 우리는 비록 A와 B 각각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더라도, A가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B는 참일 것이며 또한 B가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A는 참일 것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갖고 있는 셈이다. 이를 다르게 말해보자면, 선언문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일상대화에서 주장되는 근거는 일반적으로 진리-함수적인 근거와는 다르다는 것, 즉 선언지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주장할 근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일상에서 선언문이 사용될 때 매우 흔하게 관찰되기에, 또는(이거나)이 형식논리에서 사용될 경우에 갖는 의미의 일부는 아닌, 일상언어에서만 갖는 의미의 특징을 구성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Grice는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를 위한 논증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일상언어에서 또는(이거나)의 의미가 지닌다고 추정되는 특성을 Grice는 의미의 특수성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선언문이 전달하는 일반대화함축으로 설명해낸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A 또는 B를 주장하되, 자신이 협조원리 및 이를 구성하는 다양한 준칙들을 위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이에 더해 우리가 그 사람의 발화에서 사용된 또는이 논리학자의 또는과 동일한바 해당 선언문의 진리조건을 형식논리에서 주어지는 표준적인 진리조건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해보자. 이러한 가정 하에서 보자면 화자가 만든 진술 즉 A 또는 B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은 단독으로 A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보다 약하고 덜 정보적이다weaker and less informative. 이는 선언문 전체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이 하나의 선언지 A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에 의해 함의되지만entailed 그 逆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A 또는 B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은 B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보다 약하고 덜 정보적이다. 대화준칙의 첫 번째 조항인 量의 준칙에 따르자면 화자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하고 가장 정보적인 진술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해당 진술이 해당 대화의 맥락상 적절하다는 가정 및, 화자가 적절한 증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은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質의 준칙과 같은 여타 준칙 역시 화자가 준수하고 있다는 등의 추가적인 가정들도 선제되어야 한다. 앞선 가정에서 화자는 선언지들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하지 않고 선언문 전체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하기로 택했다. 그리고 추정컨대 선언문 전체가 당면 대화맥락에 적절하다면 각 선언지 역시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정 하에서 화자가 대화준칙들을 준수하고 있다 추정할 경우, 우리는 화자가 선언지들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할 만한 적절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선언문 전체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할 법한 적절한 근거는 화자가 분명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근거는 진리-함수적 근거와는 다른 셈이다. 즉 선언지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주장할 근거와는 다른 이유에서 전체 선언문을 발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A 또는 B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단독으로 A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모르거나 혹은 그 명제를 주장할 적절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음을 대화적으로 함축하며 이는 B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해당 화자는 A와 B 양자가 거짓일 수는 없다고 생각할 법한 적절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 역시 대화적으로 함축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또는의 특수성이자 철학자들로 하여금 일상언어적 또는과 논리적 또는의 의미가 동일한지 여부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던 요인이다. 이에 Grice는 두 의미가 다르다고 의심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 셈이다. 비록 엄밀하게 논리적인 의미의 선언문에서 시작할지라도, 그러한 선언문이 주장적으로 발화될 경우 대화적으로 함축되는 바가 일상적 선언문이 발화될 때 함축되는 바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에서 또는이 지니는 의미와 구분되는 특수한 의미를 일상언어에서 사용되는 또는에 대해 별도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 Grice와 여러 철학자들이 관찰한바 선언문이 사용될 때 드러나는 고유의 특징은, 대화와 정보교환의 작동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별도로 필요한 대화적 준칙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즉 별도로 필요한 설명항은 의미론적인 사안이 아니라 화용론적인 사안, 언어표현의 의미에 관한 규칙이 아니라 언어표현의 사용방식에 대한 준칙이다(역자 추가).]



(後略)



Scott Soames, Philosophical Analysis in the Twentieth Century, vol. 2, Princeton Univ Press, p. 206-8.





2. 역어에 대한 언급: 이전에는 통상적인 철학적 맥락에서나 혹은 그런 맥락에서 논리적 관계만이 논의될 경우엔 '함축/함의'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화용론적 'implicate/implicature' 개념이 함께 논의될 경우에만 논리적 관계로서의 '함축entailment'과, 화용론적 관계로서의 '함의implicature'를 구분하였다. 이론적인 숙고에 기반한 게 아니라 개인적 독서경험에 기반한 막연하고 자의적인 결정이었다. 전자의 경우엔 영어권 학자들이 논리적 관계에 대해 'entail/entailment'와 'imply/implication'를 혼용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후자 경우에서는 'implicate/implicature'를 따로 구분하여 사용하는데, 세 계열의 단어에 만족스럽게 대응되게끔 역어들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혹 국내 학자들이 논리적 관계에 대해 사용하는 '필함(必含)'을 추가해, '함축/함의' 중 하나를 그와 짝지어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두 영단어에 대한 역어로 각각 할당한 뒤, 남는 것을 화용론적 관계의 역어로 할당하는 전략도 고려해볼 수 있겠으나, 그럴 경우 제기될 법한 여러 문제점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한 문제점은 두 가지로서, 우선 어느 한 쪽을 '필함'과 짝지어 논리적 관계의 역어로 할당하겠다는 결정이 어느 정도로든 자의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두 번째로 '必'자가 진리-함수적 관계보다 더욱 강한 관계를 환기하기에, 다소 중립적으로 여겨지는 '함축/함의' 중 그 어느 쪽과 짝짓든, 동일한 논리적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로서는 비대칭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이는 C. I. 루이스가 'material implication'과 'strict implication'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 데 맞추기 위해 후자 관계에만 '필함'을 할당한 번역들이 간혹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점으로 인해 앞의 영단어 세 쌍이 딱 구분되게끔 세 개의 역어를 도입하지는 않고, 전술했듯 논리적/의미론적 논의와 화용론적 논의가 함께 이뤄질 경우에만 '함축/함의'를 구분하였다. 이 중 전자에 '함축'을 할당한 이유 역시 그저 개인적 독서경험과 기억에 의존한 선택이었다. 국내 철학자들의 경우 논리적 관계에 대해 '함축'을 사용하는 비중이 더 높아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반면 간혹 읽어본 순수 언어학자들이나 非철학자들의 저술에서는 반대로 의미론적 관계에 '함의'를 할당하고 화용론적 관계를 '함축'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폴 앨번, 『의미란 무엇인가』; 김방한, 『언어학의 이해』; 강범모, 『언어: 풀어 쓴 언어학 개론』; 옌황, 『화용론』). 철학서를 읽는 일이 많은 나로서는 논리적 관계에 대해 자연스레 '함축'을 떠올리게 되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이론적⋅논증적인 숙고를 해보자면, 이전의 결정과는 반대로 순수 언어학 쪽 저술들의 관행을 따라 논리적/의미론적 관계에 '함의'를 할당하고 화용론적 관계에 '함축'을 할당하는 편이 더 적합한 듯하다. 우선 '함의'에서 '意'가 의미론적인 요소나 측면을 환기하기에 논리적/의미론적 관계에 할당하는 편이 문자적으로 더 적합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라이스식 'implicate/implicature' 개념은 실제 발화된 언어표현의 문자적⋅축자적 의미 이외에 실제 발화에 의해 대화 맥락상 추가적으로 전달되는 바를 가리키기 위한 장치이다. 그런데 일상어나 문학적인 논의 맥락 등에서 언어표현의 논리적/의미론적 의미 이외의 추가적⋅암묵적⋅시사적인 정보나 느낌 등을 가리키고자 할 경우 한국어에서 '함의'보다는 '함축'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그러니 그라이스의 개념에 '함축'을 할당하는 것은 이러한 한국어 관행과도 부합하는 데가 있다. 따라서 통상적인 논증적 맥락에서는 '함축/함의'를 혼용하더라도, 최소한 논리적/의미론적 관계와 화용론적 관계가 엄밀히 구분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각각 '함의'와 '함축'을 구분지어 할당하는 편이 적합한 듯하다. 





3. 1의 본문은 선언문의 일상언어적 사용과 논리적 의미 간 차이점에 관한 논의로 인해 내용이 길어지긴 했지만, 일반화된 대화적 함축 개념에 대한 그라이스의 특성화 자체는 간단하다. 본문에서 기술되듯 "발화자가 대화적 준칙 내지 협조원리를 준수한다고 가정되는 그 어떤 통상적인 맥락에서든 발화된 문장에 의해 전달되는 함축"이 바로 일반대화함축이다. 2에서 언급된 옌황의 저술도 "어떤 특정한 문맥 조건들 없이도 일어나는 대화함축", "어떤 특정 문맥을 요구하지 않고서도" "무표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대화적 함축이라고 설명한다(『화용론』, 이해윤 譯, 휴인(한국외대지식출판원), 2016, 38-9쪽.).



하지만 이렇듯 개념 자체는 간단한 데 반해 본문 내용이 길어지게끔 만드는 사례논의를 솜즈가 제시한 이면의 의도가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웠다. 그라이스가 일반대화함축의 사례로 조건문을 선택하여 그 일상언어적 특수성을 화용론적으로 처리한 방식에서, 좀 더 깊은 논리철학적⋅언어철학적 〈함축〉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본문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일상어에서 선언문이 발화되는 근거가 진리-함수적이지 않다는 데에는 일단 전통논리학자와 그라이스 모두 동의한다. 하지만 전자는 그러한 분기가 발생하는 이유를 그저 단순히 의미론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반면, 그라이스는 선언 연결사의 논리적 의미를 일상언어에서도 유지시키되, 일상어와 논리적 언어에서 선언 연결사가 작동하는 방식의 명백한 차이점은 협조원리와 이를 구성하는 대화적 준칙들에 의해 발생하는 대화적 함축 개념으로 설명해낸다. 다만 이는 특수한 언어적 의미로 인해 함축이 발생하는 〈규약적〉 함축과 달리, 발화가 이뤄지는 대화 맥락상 협조원리의 준수를 통해 발생하는바 〈대화적〉 함축으로 분류되며, 발화의 전후 맥락이나 정보와 무관하게 임의의 맥락에서 동일하게 발생한다는 점에서 〈특수화된〉 대화함축과 달리 〈일반화된〉 대화함축으로 분류된다. 



여기서 각종 함축의 개념과 그 명칭을 구분하는 것은 기술적인 세부분류일 뿐, 철학적으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언어의 작동방식 및 그에 따라 의미상의 변화가 발생하는 방식에 접근하는 그라이스의 이론적 태도이다. 어떤 언어표현이 일상언어와 논리적 언어에서 (구문론적으로는 동일하되) 그 의미상 다르게 작동할 경우 이를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해당 표현에 대해 각기 다른 의미론을 할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외견상으로만 간단한 설명방식일 뿐, 그렇게 각기 다른 의미를 할당하는 데에 적절한 이론적 동기가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동기가 의미론적 체계성이나 통일성을 희생시킬 만큼 강력한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내가 짐작하기에 그라이스는 적어도 전통적 해결방식의 설명적 간명함보다는 이론적 체계성에 더 우위를 부여한 듯하다. 언어체계에 최소한으로 할당되는 의미론으로서 논리적 의미체계는 가급적 동일하게 유지하되, 논리적 의미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일상언어적 측면이 포착될 경우 이를 화용론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다. Grice 이전이나 당대의 일상언어철학자들은 전자를 도외시하고 일상언어적 사용방식에만 천착함으로써 언어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체계성을 상실했으며, 전통 논리학자들은 후자의 방책을 고려하지 못한 채 적절한 이론적 동기 없이 의미론 자체를 불필요하게 복수화함으로써 설명의 통일성을 희생시킨 셈이다. 



본문에서 솜즈가 선언문의 대화적 함축에 관한 그라이스의 논의를 다소 길게 해설한 것은, 그라이스의 철학사적 입지에 대한 솜즈 자신의 해석을 예증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보았다. 그의 철학사적 해석과 평가에 따르면, 일상언어철학의 방법론적 패러다임이 라일, 오스틴, 스트로슨, 헤어, 맬컴 등을 중심으로 절정에 달했던 1950년대 및 6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 방법론의 非체계성과 그로 인한 철학적 문제해결력의 한계점이 노정되기 시작한다. 이를 자각함에 따라 철학자들은 일상언어학파의 反체계적⋅反이론적 접근으로부터 방향을 선회하여 언어의 의미와 사용 양자에 대한 체계적 이론화를 차츰 모색하기 시작했으니, 그 선봉에서는 데이빗슨과 그라이스가 각각 의미론과 화용론에서 체계화의 기수를 맡고 있었다고 솜즈는 정리한다. 그라이스 자신도 말하길, 본문에서 솜즈가 주요 텍스트로 삼은 논문 「논리와 대화」에 제시된 착상에 대해 "언어 사용에 대한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화용 이론으로 나아가는 '비틀거리는 걸음'이라고" 칭했다 한다(옌황, 같은 책, 29쪽.). 물론 논리학과 의미론에 대한 그라이스의 심층적인 논리철학적⋅언어철학적 세부 견해가 무엇이었는지는 추가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다만 그가 "의미와 사용을 단순히 동일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단절시키지도 않는 언어이론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의미 이외에 언어표현의 사용을 지배하는 또 다른 핵심 요소가 무엇이며 그것이 의미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밝혀줄 언어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책, 199쪽.)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는 솜즈의 철학사적 해설은, 그라이스를 통상적인 일상언어학파에 속했던 인물로 뭉뚱그려 이해하는 조악한 철학사적 상식을 교정하기에는 충분한 논평이라 할 수 있겠다.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분석철학 내에서 주된 테마였던 이상언어 및 형식의미론에 대한 천착에 반발하면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으로 일상언어학파가 대두 및 발흥하였고, 그 전통 내에서 그라이스와 썰이 개발 및 발전시킨 이론적 틀을 거쳐 앵글로 아메리칸 계열의 화용론이 정착되었다는 식의 단선적이고 단순화된 그림을 다시 톺아보면서, 무엇이 선별되어 무엇이 취해지고 무엇이 교정되었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주는 것이다.  





4. 이번이 4회차 재독인데도, 새로이 이해하게 되는 사안은 어째 이전에 비해 양적으로도 더 많고 질적으로도 더 세밀한 듯하다. 빈틈없이 빡빡하고 치밀한 솜즈의 재구성과 해설과 평가에 진절머리가 나서 대강 이해한 척 스스로를 속이고 넘어갔던 부분들이, 당연히 마무리되지 않은 숙제로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겠다. 일상언어학파의 반체계적 기조가 그라이스 이후 교정되기 시작했다는 단순한 지식은 이전 독서에서도 인상깊다고 여겼던 사안이지만, 이를 명제적 형태로 머리에 욱여넣는 것과 그 명제를 맥락적이고 논증적으로 도출해가며 이해하는 것은 분명 별개의 문제다. 1권 서문에서 언급하듯 솜즈가 이 책에서 분석철학사를 취급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거대한 철학적 지형을 유의미하고 정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나무에서 시작해 숲으로 넓혀가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는 이 두 권을 보완 및 확장한 5권짜리 『분석철학 전통』의 1권 서문에서 밝히는바, 철학사를 전반적으로 〈기술〉하는 것 자체가 개별적인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논증〉을 요한다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철학적 사태와 역사가 여차여차했다는 단순한 사실기술의 나열이 아니라, 그러한 사태와 역사흐름이 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논증적 재구성을 꾀하는 저술이었던 것이다ㅡ그런 책을 무슨 자신감으로 무턱대고 펼쳐 들고는 이미 다 아는 〈사실〉 이라며 대강 글자들만 훑고 넘긴 탓에, 세밀하고 정교한 구성을 통해 의도된 철학적 작업과 그 진의는 전연 길어올리질 못했으니, 책 읽는 재미가 났을 리가 없다. 텍스트를 읽는 일이 재미가 없고 진전이 되지 않는 이유로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해당 텍스트의 특수성에 비췄을 때 내 독서태도가 적합했거나 성실했는지 여부를 문제삼아 보아야 할 경우도 있음을 새로이 깨닫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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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하크, 논리철학, 김효명 역, 종로서적, 1984, 54쪽(제4장, 양화기호;1절, 양화기호와 그 해석)

논리철학 연습 및 단상
: 콰인은 왜 양화사에 대한 대상적 해석을 지지하였는가?

1. 여타 철학자들이 그렇듯 콰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 역시 매우 많다 그 유명한 ‘gavagai‘ 사례에 의한 번역 불확정성 논제에서부터 지시적 불투명성 논제, 의미 회의론자, 외연주의자, 자연주의자, 철학-과학간의 연속성 논제, 인식론의 자연화 논제, 정합론 노선의 기수, 유명론자, 실용주의자, 극단적 경험론자, 논리실증주의 타도의 선봉장, 상대주의적 존재론 논제, 존재론적 개입 기준 논제, 좀 더 전문적인 데로 들어가면 양화양상논리학과 본질주의 대항마의 대부, 실용주의적 논리주의자 정도ㅡ이 모든 것 중 유명론자라는 타이틀과 양화사에 대한 대상적 해석은, 나처럼 철학적으로 미욱한 사람들에게는 일견 서로 잘 부합되지 않을 듯한 느낌을 준다 모든 개념 내지 언어에 대한 유명론적 관점을 견지한 그가, 왜 하필 존재 양화사의 속박변항의 값으로서 ‘대상‘이라는 형이상학적 냄새가 묻어 있는 것을 선택한 것일까

2. 양화사의 대상적 해석에 따르면, 콰인의 그 유명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 양화사의) 속박 변항의 값이 된다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변항의 값이 되는 것은 대상이다 여기서 콰인이 말하는 ‘대상‘은 결코 형이상학적 내지 본질주의적인 대상 또는 실체일 수 없고, 자연주의자로서 그가 존중하는바 ‘자연과학에서 말해지는 대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쯤에서 일상적인 철학적 직관에는 다소 아이러니하게 여겨지는 귀결이 따라나온다 철학-과학 간 연속성을 강조하는 자연주의자로서의 콰인이 존재를 결부시키고자 하는 것, 즉 존재양화사의 양화적 개입을 허용하고자 하는 것은, 유명론자라는 타이틀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는 다르게 변항에 대입되는 단순한 벌거벗은 이름이 아니라 ‘자연과학이 이론적으로 규정해주는 <이름을 갖는> 대상‘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하는 ‘대상‘이란 ‘자연과학에 의해 유명론적 경험주의적인 명명식이 이미 치뤄진 대상‘으로 이해되어야지, 그 어떤 형이상학적 본질주의적 함축을 갖는 일상적인 철학적 직관에 의거한 대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존재 양화사에 의해 속박된 변항의 값은 이미 자연과학에 의해 대입적 해석이 이뤄지고 난 이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3. 결국 콰인이 양화사에 대한 대상적 해석을 지지하는 근거는 자연과학에 대한 그의 신뢰, 정확히 말해 자연과학 층위에서 이미 이뤄져 있는 대입적 해석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대상적 해석을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에 앞서 자연과학자들이 베푸는 세례식으로서의 과학적인 대입적 해석부터가 옳은지, 즉 그의 포괄적인 자연주의적 태도 자체가 받아들일 만한 것인지를 문제삼아야 한다

4. 나는 비판의 의도가 아니라 도통 모르겠다는 의문에서 시작하였기에, 콰인의 대상적 해석을 논하기 위해 그의 자연주의까지를 논할 생각은 없다 (그럴 능력도 없다) 외려 콰인이 이런 식으로 언어와 논리에 대해서까지 자연주의적 견지를 개입시키는 것이 한편으론 매우 인상깊고 다른 한편으론 작금에 대해 시의적절한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이농 식의 존재론적 빈민굴에 대해 그가 가졌던 적대감은, 언어나 개념을 선점함으로써 세계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과 정치권력을 선점하려는 작금의 반지성적이고 수사주의적인 세태에 대한 나의 적대감과 매우 공명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했다 ˝수리철학 입문˝에서 자신의 기술구 이론을 재론하는 와중에 ‘실재에 대한 건전한 감각은 논리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한 러셀의 근본취지를 계승하여, 러셀의 기술구이론을 모든 고유명에 확장한 뒤 거기 나타나는 존재 양화사에 속박된 변항의 값만을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자 했던 콰인의 관점은, 지시체를 결여하는 공허한 기술구를 거리낌 없이 휘두르는 수사학적 깡패들의 헛소리에 대항할 수 있는, 보수적이지만 ‘건전한‘ 무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수사력에 쉬이 넘어가는 게 현대인이지만, 그만큼 현대인들은 외려 과학에 대한 ‘건전한 감각‘을 이론적 원리적으로라도 존중하고 있는 셈이기도 하다 그러한 감각을 호도한 채 단지 언어나 개념만을 선점하여 자신의 존재론적 양화문에 자신이 정착시키고자 하는 이름을 대입한 뒤 그 이론을 세계에 대한 참된 표상인 양 퍼뜨리려는 사이비 학자들 운동가들 정치인들 등등을 물리치기 위해선, 동일한 층위에서 대입될 수 있는 단순한 이름 내지 언어를 제시할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존중하고 합의할 수 있는 이론이 존재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그러한 이름을 제시해야 한다 노이라트의 말을 빌어 우리는 우리가 탄 언어라는 배를 벗어날 수 없다 말한 콰인에게서, 정글 원주민이 발화한 ‘가바가이‘는 고사하고 이웃집 아주머니가 발화한 ‘토끼‘의 지시체마저 알 수 없다 말한 콰인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저 멀리 자신이 딛고 있는바 내 것과 똑같은 배를 숨겨놓고는 ‘가바가이‘를 와쳐대며 네 배를 버리고 그기로 오라고 강요하는 헛소리쟁이들을 물리칠 수단이, 존재 양화사에 대한 자연과학적인 대상적 해석이라는 점일 것이다

5. 콰인에게서 박사학위논믄 지도를 받은 d.루이스가, 저 멀리 가능세계에서 자신만의 상대역-배를 타고 있는 자신의 상대역을 찾아나선 아이러니함은, 일단 제쳐두기로 한다

- ‘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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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투성이인 사람으로 자라버렸구나

십 년만 되돌린다면 그 모든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으며 다시 자랄 수 있을까 눈 뜨고 입만 벌리면 푸르딩딩 멍든 살점들마냥 어버버 쏟아지는 죄의식들, 한새벽까지 잠 못들면 여직껏 소화시키지 못해 푸더덕 게워내는 잘못의 시간들, 붙들고 통사정하며 용서를 구할 만한 옷자락도 없는 통한에 하릴 없이 깨먹은 술잔들ㅡ열흘, 열 시간, 혹여 십 초를 되돌린다 해도, 내가 받은 사랑과 보살핌 만큼한 기여를 세상에 유의미하게 덧칠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악마는 멀리 있는가

- ‘19.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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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년 전 초여름 일이다. 엄마가 오토바이로 신문배달을 하다 넘어져 왼손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떨어졌을 때였다 아프고 겁나는 와중에도 엄마는 피투성이 마디 하나를 오른손에 꼭 쥐고 있었다 부모님 주변 누군가 절단된 데 봉합 신경치료는 평택 모모한 병원이 알아준다길래 그 곳으로 갔다 마침 2학년 여름방학 초엽이던 나는 달포 조금 넘는 동안 병원에서 엄마와 지냈다 보르헤스와 데리다를 많이도 읽던 날들이었다 8인실 넓은 창으로 지는 초여름 오후 태양이 그리는 동그라미가 나만의 알렙 같다고 느꼈다 매일 아침 회진을 올 적마다 모호하거나 별 정보적이지 않은 허툰 말만 되뇌던 주치의는, 결국 신경이 살아나지 못해 다시 절단수술을 해야겠다는 통첩을 팔 월 중순에야 내뱉었다 작으나마 신체 한 부위가 없이 살아야된다는 생각에 엄마는 손가락 마디 떨어지던 날보다 더 섧게 울었다 그 해를 비롯, 몇 녗간 가을 겨울만 되면 엄마는 중앙시장서 장봐온 껌은 봉투를 왼손에 들질 못하였다 마디 없는 절단면이 시렵다 했다

2. 재작년 12월 말일이자 딱 연말이던 낮, 오토바이 사고로 발목 골절을 당했다는 전화를 아빠에게 받았다 코로나 검사로 아산 충무병원에 갔다가 별 문제 없으면 천안 충무병원으로 이동한다 하였다 늦오후 즈음에야 코로나 음성이 확정되어 나는 해 져가는 매선 바람에 충무병원으로 가 응급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코로나 관련 사항은 아빠를 실어온 사설 응급차 관계자가 알려주었고 응급실 접수처 측에도 그리되었다 병실을 안내받고 올라갔는데, 코로나 검사결과가 어떻게 됐냐는 질문을, 간호사를 비롯 병원 내 서로 다른 관계자들이 도대체 세 번 씩이나 묻는 꼬라지를 보며, 여기는 이런 사소한 사항에도 일을 개떡으로 처리하는 곳이구나 바로 직감이 왔다 사흘 뒤 수술 집도가 예정된 의사에게 내려가 동의서를 쓰기 앞서 아빠의 다친 상태에 대한 설명과 수술 계획을 듣는데, 대충 여차저차 배치된 이런 형태의 뼈 두 개 이상에 발생한 복합골절을 필론식 골절이라 한다 했다 방금까지 논리학사를 읽으며 필론식 조건언에 대해 읽다 내려온 나는, 필론식 골절 수술이 무척 까다롭고 실패율도 대체로 높단 말에, 논리학 강의에서 필론식 실질 조건문의 진리조건을 처음 배우던 때처럼 긴장이 되었다 이레 조금 지나 수술날, 수술이 끝난 직후 의식이 돌아온 아빠는 동물처럼 울부짖으며 아파했다 수술 동의서에서 동의체크했던 추가 마약성 진통제를 간호사에게 신청하려 중앙으로 가 말하니, 집도 의사의 구체적인 지시가 있어야는데 지금 바로 연속으로 다른 수술을 들어가 당장은 지시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란다 이게 도시 뭔 쌉똥같은 소린지, 이미 동의체크한 사항이면 미리 지시받고 준비를 해둬야 하는 거 아닌지, 일을 왜 이따구로 처리하는지 따져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렇게 아빠가 세시간 여를 울부짖는 소릴 듣고 나서야 진통제가 왔다 주변에 개 웬수같은 새끼가 혹여 손모강지나 발모강지라도 뿌러지면 반드시 천안 충무병원을 추천하겠다고 저주스런 마음으로 다짐짓했다.

3. 병원을 동네 근처로 옮기고, 재활과 물리치료를 받고, 퇴원을 하고 나서도, 한달 두달 세달이 지나도록 아빠 발목의 붓기는 여름 초입에 시장으로들 나오는 통연근마냥 땡땡하게 부어만 갈 뿐 가시질 않았다 미심쩍었던 아빠가 다시 충무병원을 찾았는데 당시 집도했던 의사는 그만 두고 새 의사가 와 있었다 사진을 찍어보고 난 그 의사가 하는 말이 ‘수술이 안 되었다‘ 이런 표현을 썼다 작은 뼛조각 하나가 봉합되지 않아 염증이 발생해 속에서부터 난 부종이 계속되어온 것이다 분명 수술 직후 확인했던 사진은 뼈 모양새가 아주 온전하고 이렇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된거냐는 아빠의 물음에, 겉모양과 다르게 애초에 수술이 제대로 안된 케이스라 했다 한다 그 얘길 들은 나는 몇 달포 전의 저주스런 마음을 더욱 강하게 되새김하고는 다가동에 지진이라도 나서 병원 건물이 폭삭 무너지길 신에게든 악마에게든 간절히 염원했다 결국 그 뼛조각은 그 의사가 써준 추천서로 순천향 병원에서 빼게 되었다

4. 아빠 사고나기 전 겨울 초입에 엄마는 눈이 자꾸 시리고 눈물이 나서 버들육거리에 있는 큰 안과를 찾아갔다 1층 안경집만 가본 바 있던 나는 접수실부터가 삐까번쩍한 걸 첨 보고 놀랐다 진료를 금방 마치고 내려온 엄마에게 어찌됐냐 물으니, 식당 일을 그만두는 수밖엔 없다는 말을 들었단다 식당일 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종일 눈앞에 섰는 가스불 때문에 으레 이렇게 눈시리고 아픈 거 세상천지 삼척동자 해남 윤씨 종갓집 막냇며느리 배냇딸도 다 아는 사실인데, 하나도 의학적이지 않은 그딴 개쌉소리를 진찰결과랍시고 내뱉으며 이 큰 건물로 안과 짓고 퍼질러 앉아 의사선생님 소리 들을라 치면 까짓거 나도 다 하겠다며, 삐까번쩍한 병원건물 뒤편 쥐좆만한 주차장에서 차를 돌리며 쌍욕을 퍼부었다

5. 아침에 일어나 앉자마자 목과 코 사이가 따끔거렸다 바로 감기임을 알아챘지만 몸을 못 가눌 정도는 아닌 거 같아 출근을 했다 오전 내내 라인에 서서 물건 받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더 버티다 병 키우지 말고 오후엔 쉬자 마음먹어 부장님께 조퇴를 구하고 나왔다 숙소 근처 달랑 하나 있는 의료원이 신통찮다는 말에, 차로 삼십 분을 달려 백암 쪽으로 갔다 가보니 역시나 신속항원검사부터 하는데, 결과 뜰 때 까지 병원 밖 뒷골목에서 기다리다 들어가니, 코로나는 음성인데 이틀 후에도 상태가 호전이 안 되면 다시 오라는 말만 하고 진료가 끝났다 음성이어서 다행인 거도 알겠고 잠복기 고려해서 다시 오라는 말도 이해를 하겠는데, 정작 지금 내가 아파서 찾아온, 이틀 후에도 호전이 안 되면 다시 와야하는 바로 그 증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질문은 일절 없다 어디가 가장 아픈지 무엇이 가장 심한 증세인지 평소와 다른 부수적인 신체 변화는 없는지 아무 묻는 것 없이, 압설막대로 혀 눌러 목구녕 한 번 들여다보는 일 없이, 그저 처방전을 받으란다 으레 이런 식으로 처리해온 동네 병원이겠거니 싶다 환자가 ‘감기로 왔어요‘ 그러면 그 환자가 앓는 감기만의 특수성을 상세히 알아내려는 여하한 노력도 없이, 그저 이적진 처방해추면 귀납적으로 높은 확률로 잘 들어왔던 고만고만한 약들 띡 처방해주면 그만인 그런 형편없는 여러 동네 소아과들 중 하나였던 것뿐이다 몸살에 운전하느라 지친 나는 역시 또 따져 묻는 일 없이 병원을 나섰다 약 먹고 오후에 푹 자고 일어나니 괜찮아지긴 했지만, 모든 학문과 그 응용에서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답을 구내해는 과정이다

6. 일련의 크고작은 일들을 겪으며 나는 의사 및 의료 관계자란 존재자들을 일절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안 믿는 것 이상으로 쌍욕을 퍼붓게 되었다 인간 신체를 탐구하며 그 기능적 결함을 해결하고자 분투해온 의학적 노력이 쌓아올린 지식 자체는 분명 찬란하고 대단한 것이지만, 그 지식을 여하한 창의성도 없이 기계적으로만 십 몇년을 달달 대가리에 쳐 욱여넣어 의사면허 받고 병원 하나 떵 차려놓고는 그저 매일 똑같은 모양새로 처방해내는 지식 소매상에 지나지 않는 의사들의 행태가 너무나 혐오스럽다 하나도 전문적이지 않아 보이는 형편 없는 똑똑한 멍청이들이 구할이다  하기사 찬란한 지식에 기생하되 그 자체로는 찬란하지 않은 후루꾸들 득실대는 분야가 의학 뿐이겠냐마는 말이다

- ‘22.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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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에 동치관계가 주어지면 그 집합은 동치류로 분할된다. 이 과정은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 활용된다. (중략) 정수 전체의 집합 Z에서는 덧셈과 곱셈을 할 수 있다. 이는 Z에 대한 동치류 분할 Z5에서의 동일 구조 연산을 정의할 수 있게 함으로써, 대수적 구조 Z로부터 새로운 대수적 구조 Z5를 얻게 한다.
대수적 구조를 얻는 이러한 과정은 다항방정식의 가해성solvability에 대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인 2차방정식의 풀이는 x^2=A 꼴의 풀이로 귀착된다. 일반적인 3차다항식의 풀이를 특수 형태의 2차방정식 x^2=A와 특수 형태의 3차방정식 x^3=B의 풀이로 귀착시키는 과정이 가능한 이유는, 일반적인 3차방정식이 갖는 대수적 구조가, 동치관계 및 분할의 과정을 거쳐 위의 두 가지 특수 형태의 방정식이 갖는 대수적 구조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동치관계와 분할에 의한 이러한 절차는 5차 이상의 방정식에는 일반적으로 근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게 해준다.

- 신기철 외, 무한: 수학적 상상


나는 군론이나 대수방정식의 가해성에 관한 연구라곤 쥐똥만큼도 모르지만, 갈루아가 죽기 점날 밤 왜 그리 미친듯이 증명을 해나갔는지, 칸토어가 왜 연속체 가설을 틀어쥐고 끙끙대다 할레대학 네르벤클리닉 정신병동에 들어가게 됐는지, 프레게가 왜 그리도 논리주의에 천착하다 종내는 그 기획을 단념했는지,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던 수학기초론 심포지엄에서 좌중에 앉았던 노이만이 왜 ˝끝장났구나˝ 하고 탄식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뭔갈 공부하는 최소한의 재미를 찾자면 이런 거 같다ㅡ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이해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거, 당장이든 나중이든 세계를 다 꿰뚫어 알진 못하더라도 언젠간 세계의 일부라도 납득하겠다는 자세나마 갖추는 거

-‘21. 11. 9


고대의 어떤 작가가 잘 표혔했듯이, ˝자유로운 학문이란 우리를 직접 미덕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미덕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는 것이다.˝ 이는 멜란히톤의 ˝지식은 습관이 된다˝라는 격언으로 발전되었다.

- 조지 불, 논리의 수학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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