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 Soames, 『철학적 분석(2卷)』, 9章 '언어사용과 대화의 논리', 2節 'Grice의 핵심 착상: 대화의 논리' 中)



(前略)



Grice는 특수화된 대화적 함축(含蓄)(특수대화함축)particularized conversational implicauture과 일반화된generalized 대화적 함축(일반대화함축)을 대조한다. 일반대화함축이란 발화자가 대화적 준칙 내지 협조원리를 준수한다고 가정되는 그 어떤 통상적인 맥락에서든in any normal context 발화된 문장에 의해 전달되는 함축이다. 이의 적절한 사례이자 그 자체가 이론적으로도 흥미로운 사례로는 A 또는 B(A이거나 B이다) 형식으로 표기되는 선언문을 들 수 있다. 형식논리에서 선언문은 엄밀하게 진리-함수적인 연산에 따라 취급된다. 즉 논리학자가 사용하는 A 또는 B는, 두 선언지 중 하나 혹은 양자 모두 참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참이며, 양자 모두 거짓인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거짓이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또는(이거나)이 일상언어에서 사용될 때 갖는 의미meaning와 논리학에서 사용될 때 갖는 의미가 동일한지에 대해 종종 의문을 갖고는 했다. 이런 의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일상언어에서 A와 B로 이뤄진 선언문을 주장할 경우 대체로 우리는 A가 참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 혹은 B가 참임을 이미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런 문장을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A와 B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될 가능성이 매우 낮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경우 선언문을 사용한다. 그 경우 우리는 비록 A와 B 각각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더라도, A가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B는 참일 것이며 또한 B가 거짓으로 판명될 경우 A는 참일 것이라고 확신할 근거는 갖고 있는 셈이다. 이를 다르게 말해보자면, 선언문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가 일상대화에서 주장되는 근거는 일반적으로 진리-함수적인 근거와는 다르다는 것, 즉 선언지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주장할 근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일상에서 선언문이 사용될 때 매우 흔하게 관찰되기에, 또는(이거나)이 형식논리에서 사용될 경우에 갖는 의미의 일부는 아닌, 일상언어에서만 갖는 의미의 특징을 구성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Grice는 이러한 전통적인 견해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를 위한 논증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일상언어에서 또는(이거나)의 의미가 지닌다고 추정되는 특성을 Grice는 의미의 특수성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선언문이 전달하는 일반대화함축으로 설명해낸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A 또는 B를 주장하되, 자신이 협조원리 및 이를 구성하는 다양한 준칙들을 위반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이에 더해 우리가 그 사람의 발화에서 사용된 또는이 논리학자의 또는과 동일한바 해당 선언문의 진리조건을 형식논리에서 주어지는 표준적인 진리조건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해보자. 이러한 가정 하에서 보자면 화자가 만든 진술 즉 A 또는 B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은 단독으로 A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보다 약하고 덜 정보적이다weaker and less informative. 이는 선언문 전체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이 하나의 선언지 A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에 의해 함의되지만entailed 그 逆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A 또는 B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은 B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보다 약하고 덜 정보적이다. 대화준칙의 첫 번째 조항인 量의 준칙에 따르자면 화자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강하고 가장 정보적인 진술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해당 진술이 해당 대화의 맥락상 적절하다는 가정 및, 화자가 적절한 증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은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는 質의 준칙과 같은 여타 준칙 역시 화자가 준수하고 있다는 등의 추가적인 가정들도 선제되어야 한다. 앞선 가정에서 화자는 선언지들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하지 않고 선언문 전체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하기로 택했다. 그리고 추정컨대 선언문 전체가 당면 대화맥락에 적절하다면 각 선언지 역시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정 하에서 화자가 대화준칙들을 준수하고 있다 추정할 경우, 우리는 화자가 선언지들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할 만한 적절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선언문 전체에 의해 표현되는 진술을 주장할 법한 적절한 근거는 화자가 분명 지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근거는 진리-함수적 근거와는 다른 셈이다. 즉 선언지 중 하나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주장할 근거와는 다른 이유에서 전체 선언문을 발화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A 또는 B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주장하는 사람은, 자신이 단독으로 A에 의해 표현되는 명제를 모르거나 혹은 그 명제를 주장할 적절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음을 대화적으로 함축하며 이는 B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반면 해당 화자는 A와 B 양자가 거짓일 수는 없다고 생각할 법한 적절한 근거를 갖고 있다는 점 역시 대화적으로 함축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또는의 특수성이자 철학자들로 하여금 일상언어적 또는과 논리적 또는의 의미가 동일한지 여부에 의문을 갖게 만들었던 요인이다. 이에 Grice는 두 의미가 다르다고 의심할 이유가 없음을 보여준 셈이다. 비록 엄밀하게 논리적인 의미의 선언문에서 시작할지라도, 그러한 선언문이 주장적으로 발화될 경우 대화적으로 함축되는 바가 일상적 선언문이 발화될 때 함축되는 바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논리학에서 또는이 지니는 의미와 구분되는 특수한 의미를 일상언어에서 사용되는 또는에 대해 별도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 Grice와 여러 철학자들이 관찰한바 선언문이 사용될 때 드러나는 고유의 특징은, 대화와 정보교환의 작동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별도로 필요한 대화적 준칙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즉 별도로 필요한 설명항은 의미론적인 사안이 아니라 화용론적인 사안, 언어표현의 의미에 관한 규칙이 아니라 언어표현의 사용방식에 대한 준칙이다(역자 추가).]



(後略)



Scott Soames, Philosophical Analysis in the Twentieth Century, vol. 2, Princeton Univ Press, p. 206-8.





2. 역어에 대한 언급: 이전에는 통상적인 철학적 맥락에서나 혹은 그런 맥락에서 논리적 관계만이 논의될 경우엔 '함축/함의'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화용론적 'implicate/implicature' 개념이 함께 논의될 경우에만 논리적 관계로서의 '함축entailment'과, 화용론적 관계로서의 '함의implicature'를 구분하였다. 이론적인 숙고에 기반한 게 아니라 개인적 독서경험에 기반한 막연하고 자의적인 결정이었다. 전자의 경우엔 영어권 학자들이 논리적 관계에 대해 'entail/entailment'와 'imply/implication'를 혼용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후자 경우에서는 'implicate/implicature'를 따로 구분하여 사용하는데, 세 계열의 단어에 만족스럽게 대응되게끔 역어들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간혹 국내 학자들이 논리적 관계에 대해 사용하는 '필함(必含)'을 추가해, '함축/함의' 중 하나를 그와 짝지어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두 영단어에 대한 역어로 각각 할당한 뒤, 남는 것을 화용론적 관계의 역어로 할당하는 전략도 고려해볼 수 있겠으나, 그럴 경우 제기될 법한 여러 문제점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한 문제점은 두 가지로서, 우선 어느 한 쪽을 '필함'과 짝지어 논리적 관계의 역어로 할당하겠다는 결정이 어느 정도로든 자의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두 번째로 '必'자가 진리-함수적 관계보다 더욱 강한 관계를 환기하기에, 다소 중립적으로 여겨지는 '함축/함의' 중 그 어느 쪽과 짝짓든, 동일한 논리적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로서는 비대칭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이는 C. I. 루이스가 'material implication'과 'strict implication'을 구분할 것을 제안한 데 맞추기 위해 후자 관계에만 '필함'을 할당한 번역들이 간혹 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점으로 인해 앞의 영단어 세 쌍이 딱 구분되게끔 세 개의 역어를 도입하지는 않고, 전술했듯 논리적/의미론적 논의와 화용론적 논의가 함께 이뤄질 경우에만 '함축/함의'를 구분하였다. 이 중 전자에 '함축'을 할당한 이유 역시 그저 개인적 독서경험과 기억에 의존한 선택이었다. 국내 철학자들의 경우 논리적 관계에 대해 '함축'을 사용하는 비중이 더 높아보인다는 인상을 받았다. 반면 간혹 읽어본 순수 언어학자들이나 非철학자들의 저술에서는 반대로 의미론적 관계에 '함의'를 할당하고 화용론적 관계를 '함축'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폴 앨번, 『의미란 무엇인가』; 김방한, 『언어학의 이해』; 강범모, 『언어: 풀어 쓴 언어학 개론』; 옌황, 『화용론』). 철학서를 읽는 일이 많은 나로서는 논리적 관계에 대해 자연스레 '함축'을 떠올리게 되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이론적⋅논증적인 숙고를 해보자면, 이전의 결정과는 반대로 순수 언어학 쪽 저술들의 관행을 따라 논리적/의미론적 관계에 '함의'를 할당하고 화용론적 관계에 '함축'을 할당하는 편이 더 적합한 듯하다. 우선 '함의'에서 '意'가 의미론적인 요소나 측면을 환기하기에 논리적/의미론적 관계에 할당하는 편이 문자적으로 더 적합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라이스식 'implicate/implicature' 개념은 실제 발화된 언어표현의 문자적⋅축자적 의미 이외에 실제 발화에 의해 대화 맥락상 추가적으로 전달되는 바를 가리키기 위한 장치이다. 그런데 일상어나 문학적인 논의 맥락 등에서 언어표현의 논리적/의미론적 의미 이외의 추가적⋅암묵적⋅시사적인 정보나 느낌 등을 가리키고자 할 경우 한국어에서 '함의'보다는 '함축'이 압도적으로 더 많이 쓰인다. 그러니 그라이스의 개념에 '함축'을 할당하는 것은 이러한 한국어 관행과도 부합하는 데가 있다. 따라서 통상적인 논증적 맥락에서는 '함축/함의'를 혼용하더라도, 최소한 논리적/의미론적 관계와 화용론적 관계가 엄밀히 구분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각각 '함의'와 '함축'을 구분지어 할당하는 편이 적합한 듯하다. 





3. 1의 본문은 선언문의 일상언어적 사용과 논리적 의미 간 차이점에 관한 논의로 인해 내용이 길어지긴 했지만, 일반화된 대화적 함축 개념에 대한 그라이스의 특성화 자체는 간단하다. 본문에서 기술되듯 "발화자가 대화적 준칙 내지 협조원리를 준수한다고 가정되는 그 어떤 통상적인 맥락에서든 발화된 문장에 의해 전달되는 함축"이 바로 일반대화함축이다. 2에서 언급된 옌황의 저술도 "어떤 특정한 문맥 조건들 없이도 일어나는 대화함축", "어떤 특정 문맥을 요구하지 않고서도" "무표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대화적 함축이라고 설명한다(『화용론』, 이해윤 譯, 휴인(한국외대지식출판원), 2016, 38-9쪽.).



하지만 이렇듯 개념 자체는 간단한 데 반해 본문 내용이 길어지게끔 만드는 사례논의를 솜즈가 제시한 이면의 의도가 개인적으로 더 흥미로웠다. 그라이스가 일반대화함축의 사례로 조건문을 선택하여 그 일상언어적 특수성을 화용론적으로 처리한 방식에서, 좀 더 깊은 논리철학적⋅언어철학적 〈함축〉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본문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일상어에서 선언문이 발화되는 근거가 진리-함수적이지 않다는 데에는 일단 전통논리학자와 그라이스 모두 동의한다. 하지만 전자는 그러한 분기가 발생하는 이유를 그저 단순히 의미론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치부하는 반면, 그라이스는 선언 연결사의 논리적 의미를 일상언어에서도 유지시키되, 일상어와 논리적 언어에서 선언 연결사가 작동하는 방식의 명백한 차이점은 협조원리와 이를 구성하는 대화적 준칙들에 의해 발생하는 대화적 함축 개념으로 설명해낸다. 다만 이는 특수한 언어적 의미로 인해 함축이 발생하는 〈규약적〉 함축과 달리, 발화가 이뤄지는 대화 맥락상 협조원리의 준수를 통해 발생하는바 〈대화적〉 함축으로 분류되며, 발화의 전후 맥락이나 정보와 무관하게 임의의 맥락에서 동일하게 발생한다는 점에서 〈특수화된〉 대화함축과 달리 〈일반화된〉 대화함축으로 분류된다. 



여기서 각종 함축의 개념과 그 명칭을 구분하는 것은 기술적인 세부분류일 뿐, 철학적으로 더욱 흥미로운 것은 언어의 작동방식 및 그에 따라 의미상의 변화가 발생하는 방식에 접근하는 그라이스의 이론적 태도이다. 어떤 언어표현이 일상언어와 논리적 언어에서 (구문론적으로는 동일하되) 그 의미상 다르게 작동할 경우 이를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방식은 해당 표현에 대해 각기 다른 의미론을 할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외견상으로만 간단한 설명방식일 뿐, 그렇게 각기 다른 의미를 할당하는 데에 적절한 이론적 동기가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동기가 의미론적 체계성이나 통일성을 희생시킬 만큼 강력한지는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다. 내가 짐작하기에 그라이스는 적어도 전통적 해결방식의 설명적 간명함보다는 이론적 체계성에 더 우위를 부여한 듯하다. 언어체계에 최소한으로 할당되는 의미론으로서 논리적 의미체계는 가급적 동일하게 유지하되, 논리적 의미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일상언어적 측면이 포착될 경우 이를 화용론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도모하는 것이다. Grice 이전이나 당대의 일상언어철학자들은 전자를 도외시하고 일상언어적 사용방식에만 천착함으로써 언어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체계성을 상실했으며, 전통 논리학자들은 후자의 방책을 고려하지 못한 채 적절한 이론적 동기 없이 의미론 자체를 불필요하게 복수화함으로써 설명의 통일성을 희생시킨 셈이다. 



본문에서 솜즈가 선언문의 대화적 함축에 관한 그라이스의 논의를 다소 길게 해설한 것은, 그라이스의 철학사적 입지에 대한 솜즈 자신의 해석을 예증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보았다. 그의 철학사적 해석과 평가에 따르면, 일상언어철학의 방법론적 패러다임이 라일, 오스틴, 스트로슨, 헤어, 맬컴 등을 중심으로 절정에 달했던 1950년대 및 60년대가 지나가면서, 그 방법론의 非체계성과 그로 인한 철학적 문제해결력의 한계점이 노정되기 시작한다. 이를 자각함에 따라 철학자들은 일상언어학파의 反체계적⋅反이론적 접근으로부터 방향을 선회하여 언어의 의미와 사용 양자에 대한 체계적 이론화를 차츰 모색하기 시작했으니, 그 선봉에서는 데이빗슨과 그라이스가 각각 의미론과 화용론에서 체계화의 기수를 맡고 있었다고 솜즈는 정리한다. 그라이스 자신도 말하길, 본문에서 솜즈가 주요 텍스트로 삼은 논문 「논리와 대화」에 제시된 착상에 대해 "언어 사용에 대한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화용 이론으로 나아가는 '비틀거리는 걸음'이라고" 칭했다 한다(옌황, 같은 책, 29쪽.). 물론 논리학과 의미론에 대한 그라이스의 심층적인 논리철학적⋅언어철학적 세부 견해가 무엇이었는지는 추가적으로 공부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다. 다만 그가 "의미와 사용을 단순히 동일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단절시키지도 않는 언어이론을 발전시킬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의미 이외에 언어표현의 사용을 지배하는 또 다른 핵심 요소가 무엇이며 그것이 의미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밝혀줄 언어이론을 구성하는 것"(이 책, 199쪽.)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는 솜즈의 철학사적 해설은, 그라이스를 통상적인 일상언어학파에 속했던 인물로 뭉뚱그려 이해하는 조악한 철학사적 상식을 교정하기에는 충분한 논평이라 할 수 있겠다. 20세기 초중반에 걸쳐 분석철학 내에서 주된 테마였던 이상언어 및 형식의미론에 대한 천착에 반발하면서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으로 일상언어학파가 대두 및 발흥하였고, 그 전통 내에서 그라이스와 썰이 개발 및 발전시킨 이론적 틀을 거쳐 앵글로 아메리칸 계열의 화용론이 정착되었다는 식의 단선적이고 단순화된 그림을 다시 톺아보면서, 무엇이 선별되어 무엇이 취해지고 무엇이 교정되었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주는 것이다.  





4. 이번이 4회차 재독인데도, 새로이 이해하게 되는 사안은 어째 이전에 비해 양적으로도 더 많고 질적으로도 더 세밀한 듯하다. 빈틈없이 빡빡하고 치밀한 솜즈의 재구성과 해설과 평가에 진절머리가 나서 대강 이해한 척 스스로를 속이고 넘어갔던 부분들이, 당연히 마무리되지 않은 숙제로 여전히 남아있는 탓이겠다. 일상언어학파의 반체계적 기조가 그라이스 이후 교정되기 시작했다는 단순한 지식은 이전 독서에서도 인상깊다고 여겼던 사안이지만, 이를 명제적 형태로 머리에 욱여넣는 것과 그 명제를 맥락적이고 논증적으로 도출해가며 이해하는 것은 분명 별개의 문제다. 1권 서문에서 언급하듯 솜즈가 이 책에서 분석철학사를 취급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거대한 철학적 지형을 유의미하고 정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라면 오히려 나무에서 시작해 숲으로 넓혀가는 방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는 이 두 권을 보완 및 확장한 5권짜리 『분석철학 전통』의 1권 서문에서 밝히는바, 철학사를 전반적으로 〈기술〉하는 것 자체가 개별적인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논증〉을 요한다는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철학적 사태와 역사가 여차여차했다는 단순한 사실기술의 나열이 아니라, 그러한 사태와 역사흐름이 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논증적 재구성을 꾀하는 저술이었던 것이다ㅡ그런 책을 무슨 자신감으로 무턱대고 펼쳐 들고는 이미 다 아는 〈사실〉 이라며 대강 글자들만 훑고 넘긴 탓에, 세밀하고 정교한 구성을 통해 의도된 철학적 작업과 그 진의는 전연 길어올리질 못했으니, 책 읽는 재미가 났을 리가 없다. 텍스트를 읽는 일이 재미가 없고 진전이 되지 않는 이유로는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해당 텍스트의 특수성에 비췄을 때 내 독서태도가 적합했거나 성실했는지 여부를 문제삼아 보아야 할 경우도 있음을 새로이 깨닫게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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