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식론 - 정당화의 사회실천에 의한 접근, 개정판
이병덕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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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견 초보적 수준의 입문용 교재처럼 보이지만, 부제가 시사하듯이 인식론적 정당화 개념을 특정 관점에서 논증적으로 해명하는 것을 전반적인 목표로 삼는 심층 연구서로 보아야 적절할 듯하다. 목차를 일별하면 통상적인 인식론 저술들에서 다뤄지는 주요 이론들을 마찬가지로 통상적인 저술들과 유사한 순서 및 구성으로 배치하여 서술한다. 하지만 본문을 본격적으로 읽어보면 해당 주제들을 해설적으로 설명한다기보다는, 저자가 견지하는 셀라스식 모델로서의 사회실천적 정당화 모델과 특정 형태의 정합론을 결합한 이론을 통해 인식론의 주요 난제들을 해결하는 논증들이 책 전반을 통틀어 제시된다. 형식 면에서도 게티어문제나 토대론/정합론, 신빙론, 회의주의 등의 논제들이 매우 개괄적으로 해설되는 1, 3, 6, 13장을 제외하면, 여타 9개 장들은 저자의 기존 연구논문들을 토대로 재구성된 형태이다. 후자 장들에서는 때에 따라서 언어철학, 과학철학, 형이상학, 논리철학에서 다뤄지는 극히 전문적인 사안들이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 탓인지 상기한 네 장과 나머지 장들 간 논의 밀도와 호흡이 현저하게 달라 독서 난이도와 피로감의 비대칭성이 다소 심한 편이다. 초심자의 경우 전자 장들에서는 설명이 너무 개략적이어서 철저하거나 풍푸한 이해를 도모하기 어렵고, 반면 후자 장들에서는 전문적인 개념, 논제, 원리들에 정신이 팔려 제대로 된 독서 자체를 해나가기 어려울 듯하다. 그러니 전문가의 지도를 받을 수 없는 초심자라면 더욱 초보적인 수준에서 해설적으로 서술된 김도식의 "현대 영미 인식론의 흐름"이나, 그 책과 난이도가 비슷하면서 양적으로 더 풍부한 마티아스 슈토이프의 "현대 인식론 입문"을 읽길 권한다. 이후 심화교재라 할 수 있는 김기현의 "현대 인식론" 정도를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비로소 이 책 고유의 셀라스식 모델과 그에 기반한 논증들을 제대로 음미하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반면 이 책과 유사한 난이도를 지닌 해설적 연구서이되 상반되는 기조인 토대론을 중심으로 인식론적 문제들을 검토하는 윤보석의 "현대 토대론 연구"를 읽으면 추가적인 균형감을 갖출 수 있겠다. 


 사족.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본인이 개입하는 해당 이론에 너무 많은 우위를 부여하면서 케익을 먹으려는 동시에 갖고 있으려는 과한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의심이 들기도 했다. 가령 셀라스식 정합론을 진리 축소론과 결합함으로써 정합론에 으레 제기되는 고립반론이나 정합적 복수체계 반론을 물리칠 수 있다면, 이는 마찬가지로 전체론적 정합론과 진리 축소론을 견지하되 전체론적 망의 최후 보루로서 과학적 자연주의를 내세우는 콰인식 모델과 얼마나 다른가? 셀라시언 정합론에 따를 경우 우리의 인식목적과 규범이 정당화를 둘러싼 디폴트-도전 구조 내에서 최선의 설명적 정합성을 갖는 세계상을 획득하는 것이되, 차후 제기될 법한 정당화-도전에 직면하여 새로운 세계상에 부여될 설명적 효력의 상한선이 개정될 여지도 허용된다면, 그런 개정이 <우리의> 개념체계 내에서 정당한지 여부를 판정해줄 기준은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데이빗슨이 강조하듯 우리의 것과 비교했을 때 진정 이질적이면서 대안적인 개념체계란 <우리의> 정당화 모델에서 무의미한 것인바 그런 체계가 기실 존재할 수 없을진대, 그 경우에도 우리가 마지막까지 포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개념체계는 결국 자연과학적 체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인식론적 규범성이나 목적성, 합리성 등의 개념을 과감히 포기하고 콰인식 자연주의와 전체론을 받아들이는 편이 더욱 <최선의 설명성>을 갖는 경제적 모델이 아니겠는가? 예컨대 선험적 지식이 다뤄지는 11장에서 도입되는바 보고시안이 제시한 형이상학적/인식론적 분석성 개념이 철학적으로 합당한 구분이어서 후자의 분석성이 선험적 지식의 정당화에 활용될 수 있다면, 콰인도 존재론적/의미론적으로는 무해한 그런 의미의 분석성을 받아들이되 다만 그 분석성을 판가름하는 인식론적 배경을 자연과학적 지식으로 잡은 뒤 선험적 지식은 여전히 거부할 수 있지 않은가?ㅡ저자가 워낙에 다양한 이론과 논제들을 능숙하고 기교적으로 활용하여 상당히 구성적인 논증들을 펼쳐보이기에, 그런만큼 철학적으로 공격해볼 여지가 많다는 느낌이 든 독서였다. 다만 나는 철학적 언어만 많이 익혀왔을 뿐, 진정으로 철학적인 논증을 엄밀하고 만족스럽고 안전하게 구성하는 능력은 아직도 한참 미진하다는 것 역시 절감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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