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생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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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 전 흙서점에서 익숙한 표지이길래 샀어. 아마도 서점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에 꾸준히 오랫동안 아니면 지금까지도 진열되어있는 책인가봐. 제목도 몰랐는데 되게 익숙해. 4일간 내리 잡고 있었고, 아마 포기하겠거니 했지만 읽어냈다. 용하다. 기록에 대한 집착의 힘인가. 이걸 읽다니. 난해하다고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어렵다고들 하는 차라투스트라도 재밌게 읽어냈고, 헛소리하다 끝난다 평을 듣는 고도를 기다리며도 되게 재밌게 읽었고, 한 편의 두꺼운 시집 같던 꿈 속에서 허우적대는 지상의 양식도 읽었잖아. 근데 진짜 이건 읽는 내내 맞게 읽는 건지 얼빠진다. 근데 신기한건 평점도 높고 꾸준히 팔리나봐. 대체 이걸 누가 왜 읽는거지? 그리고 이걸 의미있게 읽을만큼 잘 읽어내는 사람이 한국에 이렇게 많다고? 대단하네 다들.

장르는 무어라고 해야할까. 에세이, 소설, 시 세 가지의 짬뽕? 주제는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 줄거리는 없고 역사 속 철학자들의 사상과 신화 속의 이야기와 고전 소설 속의 연인 이야기 등이 자주 등장해. 화자는 아마 작가 파스칼 키냐르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고 화자 자신의 연애 이야기도 간간히 등장해. 그리고 욕정, 연애와 사랑은 엄연히 다르다며 그 `사랑`의 모습과 사랑할 때 갖춰야할 자세와 감정들과 태도와 뭐뭐뭐뭐 뭐 말이 이렇게 많아!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한 주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하고 있는데 내가 정리해볼게.

침묵이 중요하다.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힘이나 노력이 가해질 필요도 가해질 수도 없다.

강약중강약 식으로 엇! 이제 재미 붙었다! 했다가 /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일까 했다가 / 어머 동감이요! 했다가 /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것일까 / 조금만 더 읽으면 감이 잡힐까 했다가 / 어머 감 잡혔다!했다가 / 아니다 감 놓쳤다 를 500페이지 동안 반복했더니 너덜너덜 지친쳐가던 차에 거의 끝 부분에 나온 파스칼의 고백에 나는 욕을 할 수 밖에 없었지.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 수있는 그런 책을 쓰려고 했다. 사유, 삶, 허구, 지식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몸인 듯 뒤섞였다.
​-지가 몽상하려 쓴 글을 내가 어찌 완벽히 읽어낼 수 있겠노.... 일기는 일기장에.

뭐 순수한 관계에 의식이 더해지면 더이상 진실될 수 없다는 주장엔 공감해. 작가가 인위적인 것을 경계하는 것, 자연스러운 사랑을 외치는 것은 요즘 내가 ˝감정이 섞이면 연애는 망해!˝ ˝모든 행동은 계산 되어야해!˝ ˝좋아한다 표현하면 망한다˝따위로 계산적으로 게임하 듯 하는 연애(혹은 사랑)에 적절한 조언이 되었고 상당히 낭만적으로 느껴졌어. 흐늘흐늘 그럼 난 그냥 좋음 좋다하면 되는거야? 하면서 근데 문제는 이사람 문장들이 너무너무 시적이고 극단적이야. 사랑은 죽음이고 이별은 탄생이라는 이런 뭔 말이냐 방귀냐 하는 식의 뜬구름 허우적 허우적 문장들. 알다가도 모르겠어.

그래도 그 와중에 느낀점- 친구나 가족이나 나중에 생긴 연인에게나 말 좀 줄이자 / 사랑이 찾아오면 너덜너덜 차일지언정 모든 걸 내던지고 집중하고 진실하자 / 관계에 노력하지 말자 / 스탕달 작품을 멀리하자(여기 자주 등장하는데 헬 기운이 스멀스멀)

지쳤으니, 다음은 쉽고 명확하고 유쾌한 책 읽읍시다.


발췌( 음? 발췌 많음_어리둥절 @_@)

아직은 전혀 알지 못하는 한 여인의 팔에 우연히 팔꿈치가 스칠 때, 영혼은 왜 떨리는 것일까?

사랑의 발생은 어떤 목소리에 대한 복종일 수있다. 어떤 목소리의 억양에 대한 복종.

환영의 습격을 받는 것, 여행을 하는 것만이 예술의 본질은 아니다. 되돌아와서 악보를 기록하는 작은 용기가 추가로 필요하다.

여명(태고 시대) 이래로 최고령자는 이전 시기를 더 좋아하는데, 그 때는 그의 나이가 적었으므로 그렇다.

전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함은 굉장한 전달 수단이다.

성실하려고 애쓴 무수한 말들이 도리어 우리를 허위로 변질시켰다.

욕망하다desirer는 이해할 수 없는 동사다. 그것은 보지 않기다. 탐색하기다. 부재를 아쉬워하기, 희망하기, 꿈꾸기, 기다리기다. 욕망desir이라는 라틴어 단어와, 2천 년 후에 재앙desastre이라는 프랑스어 단어가 정확히 같은 어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기이하다.

인간들의 삶이 복잡한 까닭은, 이중성이 그들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성적으로 그리고 언어학적으로.반만 동물적이고, 반은 언어적인 삶.

독서는 자신에 대한 망각이다. 피를 흘리면서 책을 읽기란 불편하지만 죽어가면서도 책을 읽는 것은 가능하다. 책읽기는 이 세상과 어긋나고 알 수 없으며 그 자체로 좋은 다른 세계에 두뇌를 집중함으로써 또 하나의 세계에 접속되는 일이다. 그 세계가 나의 구석진 장소였다. 나는 온 세계에서 휴식을 찾았으나, 한 권의 책과 더불어 구석진 곳이 아닌 어디에서도 휴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바라보여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않다.

누가 암시해주기 전에 이미 모든 것을 느꼈으므로, 느낌을 표현하려는 생각을 버린다면, 그때 사랑이 시작된다. 언어가, 손이, 성기가, 입이 할수 있는 것보다 더 가깝게 타인에게 다가간다면,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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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2-2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저도 한번 도전해봐야겠네요.
p.s 흙서점이라하면 낙성대 흙서점인가요? 저도 거기서 이 책 샀는데요 ~~

Cindy.K 2016-02-22 20:12   좋아요 0 | URL
아 흙서점 아시는군요! 낙성대주민이라 벌써 10년 넘게 애용하고 있어요

시이소오 2016-02-22 20:18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 이사와서 흙서점에 갈일이 없지만 오랜만에 흙서점 들으니까 반갑네요.
흙서점 애용해주세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