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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eBook]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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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버튼의 영화 중에, 빅피쉬라는 영화를 제일 좋아한다. 아버지의 무지막지한 허풍이라고 생각했던 젊은 날의 무용담들이, 사실은 자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빚어낸 우화라는, 이야기의 숭고함을 전해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영화 '빅피쉬'를 꺼내든 이유는, 영화가 이야기의 숭고함을 말하기 위해서 '죽음'의 서사를 굵직하게 차용하기 때문이다. 빅피쉬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어린시절,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 보여주는 마녀를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재미를 발하는 지점은 조금 더 뒤다. 주인공 아버지 '에드워드'는 위험 상황이 닥칠 때 이렇게 말한다. "난 알아. 난 이렇게 죽지않아."


  죽음을 안다면 사는 데 더 용감해질 수 있을까? 사는 게 뭔지 알게 된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


 일단 저자는 전체적으로, 죽음 이후에 인간의 정신 적인 세계나 혹은 사후 세계, 영혼의 자취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물리적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그러한 가정 자체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으로부터 불행을 생활로 편입시키는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견 타당한 주장이다. 실제로 우리가 죽음 이후에 아무런 고통도, 염려도, 후회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불행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감각'이라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우리가 죽음으로 부터 느끼는 안위의 불안과 안타까움이 증폭될 리는 없다. 영생이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오히려 해악이라는 저자의 논의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다. 꿈을 이뤘는데 인생은 지속된다는 것이 비극이라는 말을 누가 했던가. 


" 내가 죽고 나서 내 몸이 부활하거나 내 인격이 이식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이 나의 진정한 종말이라 생각한다. 죽음은 나의 끝이자 내 인격의 끝이다. 이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끝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논의에 동의를 한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을 뿐더러, 사후 세계에 대해 특별히 상상해본 적도 없다. 어쩌면 그래서 그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 보다는 사는 것에 대한 공포를 더욱 느꼈던 것 같다. 살아 가는 순간 순간에 행복을 느끼지 못할 때, 그것은 어느 순간 우리에게 죽음을 불사르고 싶어질 정도의 불안감과 불만족을 선사하지 않았던가.  


  죽음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풀어가기 위해 작가의 토론식의 서술방식은 충분한 생각을 해 볼 기회를 제공한다. 물론 이런 서술 방식은, 본래 책의 내용이 강의에서 발췌되고 편집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런 이유로 다소 장황하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마 그것은 이 두꺼운 책을,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올린 이 책을 단기간에 읽어내려가려 했던 내 탓도 클 것이다. 이런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의 논의들을 하루 한시간 강연 듣듯이 천천히 진도를 빼는 것이 좋을테니 말이다.


*


  하지만 적어도 저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영화 '빅피쉬'의 잠깐의 장면이 주는 은유보다 내게 약하게 다가왔던 것은, 이 두꺼운 책의 논의가 일상에 힘을 부여하는 추동력은 주지 못했다는 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감각과 영혼의 생명의 존속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 조차 확실하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무지하다. 그게 바로 죽음이다. '무지'의 상태.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죽음이란 무엇인지 궁금해 하지 않았던가? 그런 상태에서 이어진 책 속의 논의가 우리 무의식 속의 죽음에 대한 '무지'의 동어반복이라고 느낀 것은 나 뿐이었을까.


  죽음이란 무엇인가. 여전히 물음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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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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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인의 불안함과 강박증에 대해서 지적해온 것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지리멸렬한 삶 속에서 우리는 누구의 위로와 누구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 조차 귀찮을 정도니까. 학교, 회사, 노후, 이 세가지로 밖에 압축될 수 없는 우리의 삶 속에 필요한 감초는 무엇일까? 작년 한 해 힐링과 멘토라는 단어가 지친 사람들에게 많은 힘을 준 바 있다. 예능 프로그램 까지 힐링을 자처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그런 힐링의 한 해를 마감하는 때에, 우리에게 철학자가 말을 건다. 스피노자다.


 책은 요수타인 가아더의 유명한 철학 책 <소피의 세계>를 연상 시키는 구조다. <소피의 세계>는 총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매일 소피가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편지를 받으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편지는 소피에서 '철학'에 대해서 알려준다. 세상의 만물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을 것이며, 그것에 대한 고민을 해왔던 그리스 자연 주의 철학자들과 이후의 실존 주의 철학자들을 알려주기도 한다. 소피는 여느 때처럼 일상을 보내면서도 철학을 알려주는 편지가 도착하면 세상을 향해, 소피를 향해 던져지는 어려운 질문들과 이야기에 매료된다. 


 <눈물 닦고, 스피노자>는 고시원 청년이 새벽이면 화장실 거울을 통해 스피노자를 만나는 이야기다. 88만원 세대를 대표하는 고시원 청년은 스피노자에게 갖은 신세 한탄을 실시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그런 그에게 진심어린 조언과, 다양한 철학적인 이야기로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떄로는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눈물 닦고 스피노자> 가 <소피의 세계>와 다른 점은, 소피가 세상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 편지라면, 거울 속의 스피노자는 청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불안과 강박증을 이해하고 그것을 소화시키는 방법을 일러주는 처방전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어려운 철학 이야기를 새롭게 조망하려고 했던 소설 형식의 단행본 구성은 다소 성공적이지 못하다. 안타깝게도, 모든 문체는 어떤 '쉽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독자를 배려하는 모습이 부재하다. 가령 <스피노자의 신체 변용 모델은 발작을 일으키는 평행으로부터 벗어난 신체 상태를 변용의 흐름을 통해서 공황 발작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에서..> 와 같은 매우 정제되지 않고 어려운 표현이 책 페이지들을 도배하고 있다. 이런 이론의 정확한 적용은 스피노자의 철학 이론과 사상을 오해 없이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이 한 사람의 철학 사상을 통해 현대인의 우울함과 인간 소외를 위로하고 슬기롭게 해결하는 지혜를 선물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조금 더 쉽고 가벼운 표현으로 책을 구성했어야 한다.


 요수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는 노르웨이에서 출간 되고 지금 한국에서 조차 철학 코너의 스테디셀러일 정도로 유명한 철학 입문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이 처음에 어린이를 위한, 혹은 철학 입문자를 위한 판타지 소설을 표방하며 등장했을 당시에도 어린이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다만 성인의 동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 받았다. 철학은 그만큼 추상적이고 어려운 이론이다. 몇 백년, 천여년에 걸쳐서 쌓아올린 사상이 현대인에게 쉽게 다가올 리 있을까 ? 재미있고 쉬운 소설을 통해 어려운 철학을 쉽게 담아내려는 노력은 돋보이지만, 그 속에 녹아든 철학에 관한 스피노자 캐릭터의 설명은 전혀 풀어 쓰여져 있지 않다. 과연 갖은 스트레스와 경쟁의 소화 불량, 강박증을 앓고 있는 독자들에게 결코 새롭지도 않은 판타지 픽션과 그 속에 녹아들지 못한 어려운 문체의 철학의 위로가 얼마나 달콤할 지는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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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쓰기 - 전방위 문화기획자를 위한
장상용 지음 / 해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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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 <미생>을 참 좋아한다. 나 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전국의 직장인들과 웹툰 독자들이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보면 작품의 매력이야 내 주관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당연히 매주 공짜로 받아보는 이 만화의 후광을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이 없을 리 없다. 얼마 전 <미생>의 작가 윤태호 만화가의 한겨레21 인터뷰 글을 보니 드라마 제작진들이 <미생>의 판권을 구입하려고 참 많은 연락을 보낸단다. 그런데 덧붙인 작가의 얘기가 재밌다. "(드라마 제작진들이 전화가 오면) 그럼 전 그래요. '잘 할 수 있어요? 정말 관심 있어요?' " 작가는 만화 <미생>은 매회 에피소드와 갈등으로 시청자의 몰입을 추구하는 드라마 장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다. 


오늘의 책, <전방위 문화기획자를 위한 스토리텔링 쓰기(이하 전방위 스토리텔링)>는 장르별 요긴한 스토리텔링 수칙을 일러주는 지침서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만화를 원작으로한 스토리텔링의 다른 장르로의 각색의 유의점이 중점적으로 서술된다. 아마 책을 덮으면 윤태호 만화가가 왜 <미생>의 드라마화를 확신하지 못하는지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그에 앞서서 주요 인물들과 사건과 갈등을 전개해 나가는 스토리텔링의 기본 수칙을 알려주는 전반부도 매우 재미있다. 왠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은 내용도 깔끔한 텍스트로 확실히 정리를 해주니 이해가 쉽다. 사전 취재를 통해 스토리의 견고함이 형성된다는 지침이나, 무조건 멋지고 아름다운 인물보다 결핍이 존재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지침은 콘텐츠 생산자들이 알면서도 종종 간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만화'원작이 다른 장르로의 각색할 때 가져야 하는 스토리텔링 수칙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챕터 7에서는 미디어의 조건에 따라 스토리를 조정할 것을 가장 기본적으로 알려준다. 예를 들면 일상 속에 집안 풍경의 일부로서의 스토리텔링을 담당하는 '드라마'의 경우 지나치게 문학적이거나 주관적인 감정과 묘사를 피하라는 지침, 그리고 그것은 드라마 시청자의 입맛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을 일러준다. 또한 게임 장르 같은 경우는 스토리텔링이 공간 중심적이지 시간 중심적이지 않다는 점도 재미있다. 원작이 <만화>이든 <소설>이든 간에 이러한 장르적 특수성을 반영하지 않은 스토리텔링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잘 알려준다. 그렇다면 만화 <미생>이 드라마로 성공할 가능성도 있을까? 


중요한 점은 인물의 장기적인 목표와 그로 인한 갈등의 설정이다. 드라마는 웹툰과 비교했을 때 작품을 구성하는 하나의 스토리가 분절적으로 노출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드라마와 웹툰은 타겟 대중이 다르다. 드라마는 보통 30대 이상의 여성이 주된 시청층이지만 웹툰은 인터넷 사용에 능숙하고 트렌드에 민감한 20,30대 젊은 층. 게다가 스마트폰으로 주로 이용하는 웹툰은 킬림타임 용이라는 점에서 스토리의 극적 장치가 단편적이어도, 또 자극적이지 않아도 집중력을 가질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는 갈등 요소가 직장 생활에 한정되어 있는 <미생>이 시청자들에게도 매력적일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면서 윤태호 만화가의 인터뷰를 우연찮게 떠올린 것은 사실이지만, 이쯤되니 진짜 각색의 가능성이 궁금해진다. 


일단 <미생>은 극적인 사건의 발생과 변화보다는 주인공 장그래의 성장과 그것을 짧지만 분명한 문장과 바둑의 이미지로 구현하는 게 매력이다. 매 회마다 화해와 성장으로 마무리되는 잔잔한 정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드라마로 이 매력을 살리기가 쉽지 않다. 드라마는 '대화 중심'의 대본 의존적인 구성물이며, 인물의 고민은 내레이션이 아니라, 갈등 상황에서 주고 받는 대사로 드러나야 훨씬 재미있다. 또한 시청자들은 인물이 플롯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미션을 응원하고자 할 때 채널을 고정할 수 있고, 그것을 방해 하는 인물이 등장할 때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장그래가 보통 사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일을 스스로 기획하고 배우기 위하여 요르단 대사관에 직접 방문하는 행동만으로도 시청자가 드라마의 감동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보통 훌륭한 원작의 각색 작품은 잘해야 본전인 법이라 <미생>의 각색을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은 모양. 강풀 만화들이 극장에서 실패하는 것을 보며 원작의 매력을 의심해야 했던 독자들의 쓰라린 마음이 읽히는 대목이다. 물론 애독자 중 하나인 나의 마음은 그렇다. 재미있는 콘텐츠를 더 많은 방법으로 즐기고 싶은 마음도 져버릴 수 없다는 것. 그래도 MBC 드라마 <골든타임>의 나름의 성공을 보면 <미생>이 갖는 단편적인 에피소드가 인물의 성장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드라마로 구현될 가능성도 나름 있어 보인다. 


<전방위 스토리텔링>의 챕터 13에서는 성공한 만화 <슬램덩크>을 각색한 애니메이션 <슬램덩크> 가 '최적의 발화점'을 잃지 않은 덕분에 역시 성공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장르가 바뀌더라도, 가장 핵심 주제의식을 갖춘 장면이 있어야 성공 자격을 갖춘다는 얘기. 정말 뻔한 얘기지만 그렇단다. 물론 <미생>은 따끔한 불꽃같은 발화점이 매 회 등장하니 더 다루기 어려울 수도. 첫편부터 마지막화까지 진행 되는 동안 가장 돋보이는 '발화점'이 어디인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래도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나 연극이나 게임보다는 '드라마'가 제일 어울릴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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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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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기준에서 아름다움이란, 결코 완벽하게 파악되는 균형적이고 정확한 어떤 것이 아니라 불명료하고 모호한 형태가 감상자에게 새로운 여운을 남기는 것이었다.

- 서양 미술사 1 (진중권) 본문 ' 명료성에서 불명료성으로' 中, p.242 -


*

 초기 미술사는 한 인간의 성장기와도 비슷한 것 같다.


 신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지상에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제 발로 찾아 나서기 시작한 것이 그리스 시대였다. 중세에서 근대 사상으로 이전하는 과도기적 시기에는 미술 또한 다시 이 그리스의 이성주의와 감각주의를 부활 시켰는데, 이가 바로 르네상스다. 당시의 미술사는 인간이 스스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이성을 펼칠 수 있다는 근대 철학, 과학과 맞물려 문명의 변화 행적을 같이 한다. 


르네상스의 변천, 그리고 미술사의 성장


 객관적인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다빈치는 이상적인 신체비율을 경험적으로 종결한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라는 걸작을 남겼다. 생각하니 고로 존재한다는 위대한 명제가 17세기에 기록 될 수 있도록 시대 과도기적인 자양분을 조성한 것도 르네상스다. 이제 르네상스는 어디로 변천하고, 미술사는 어느 방향으로 성장 하는가?


 슬프게도 인간은 그만큼 불행해졌다. 인간은 객관적으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진실하고, 가장 본질적인 진리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검증하고 신뢰할 수 있는 명제는 겨우 '나 자신이 존재한다' 는 고독하고도 처연한 한 문장뿐이었다. 더 객관적이고 진실한 것을 스스로 구하겠다는 발걸음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 더 많은 논쟁과 대립을 불렀다. 


 긍정적이고 건강한 과정들은 때로는 지나쳐 반목과 전쟁으로 변질되기도 하였다. 결국 신의 보금자리를 잃은 개인은 더욱 고독해졌으며 성서의 가르침을 의심하기 시작한 인간은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는 만큼, 찾아내야 할 것도, 의심해야할 것도, 더 많아졌다. 서양 사상사에도 드디어, '사춘기'가 찾아온 것이다.


사춘기의 인간들은 그럼 어디로 향했을까?


  제 발로 가장 아름답고 절대적인 것을 찾아 나섰던 인간들이, 단 하나의 완벽한 이상향을 거부하고 각기 사물과 개인의 모호한 아름다움을 주관적으로 추구하는 바로크 미술로 안착하는 스토리텔링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사춘기를 겪은 소년은 이제 제 방에서 무엇이 자신을 이야기 하는지 발견하였을까?


  인간의 만족도를 이루는 것 중에 주된 것으로 꼽을 수 있는 '미(美)'에 대한 세계관이 초월적 세계에 의존한 직관적인 담론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 드디어 르네상스를 거친 바로크다. 단 하나의 이상적인 기대치를 향한 엄격한 잣대도 내려놓은 채, 작가의 주관적 표현을 중시하고 색채가 표현하는 정서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은 신이 없어도, 절대적인 평가 잣대가 없어도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것을 '주관적인 아름다움의 존재론' 에서 획득 했다는 것이 큰 의미다.


  물론 바로크 이후로도 미술은 변한다. 


 물론 바로크 이후로도 미술은 변한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미술사의 초기 변천사와 서양 사상사의 궤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 자아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관의 美' 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바로크 시대 미술로의 서사는 개인의 자아 발달사의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한하다. 우리는 선택과 가치 설정에 있어서 늘 절대적으로 옳은 것에 대한 목마름을 갖는다. 


 진리에 대한 수많은 견해 속에서 우물 안 경쟁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세계가 가진 모호성과 주관적인 표현을 존중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때 개인은 새 길을 열고 역사를 쓴다. 바로크뿐만 아니다. '독립적인 표현'과 '창의적인 세계관'으로 '시대의 정신'을 공유하는 작품이 대중의 찬사를 받는 현대도 동일한 상황을 보여준다. 


 서양미술사와 그로 보는 사상사를 통해서 인간 발달사를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인류 역사의 발전사를 통해 개인의 자아 성장이 어떤 부침을 겪는지 유추해보는 것도 짐작키가 어렵지 않다. 문명사에 관한 공부는 역사에 대한 탐닉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탐구가 된다. 그래서 서구 회화 변천사의 방향성을 통해서 동시대의 세계관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또 어떤 새로운 사고관의 반영과 반추를 발굴했을 지, 다른 독자들의 발견이 궁금하다.



* 추천하기 전에


 책은 읽기 쉽게 구성되어있다. 친절한 작품 설명이 시대 사상의 변천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 등장한다. 그러나 서양 미술사에 관한 개괄적인 배경 지식 없이 이 책을 접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지라도, 서양 근대 사상사에 대한 개괄적인 배경 지식 없이 이 책을 접하는 것은, 책에서 보다 얻을 수 있는 유익함을 조금 접고 시작하는 일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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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유토피아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2
박해천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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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의 주부들은 종교 모임이나 반상회를 통해 정기적으로 만나 주부 교양, 일상 생활, 자녀 교육, 재산 투자 등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스스로의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결속한다. 바로 이 주부들의 네트워크, 수다와 소문의 사교 공동체가 거실의 프레임을 응시하는 타자이다. 그녀들은 관상학자의 눈매로 이웃집의 생활 수준과 행복 지수를 가늠해본다. (p.82)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이 가져온 고성장의 신화는 시중의 유동 자금을 증가시켜 주가와 더불어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부추기고 있었다. 특히 가파른 상승의 그래프를 그리던 아파트 가격의 폭등세는 중산층으로의 진입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기능했다. 그로 인한 피해는 1955년 이후 출생해 이제 막 내 집 마련을 준비하고 있던 베이비 붐 세대의 몫이었다. (p.94)


- 콘크리트 유토피아 (박해천) 본문 中 - 







 자, 여기. 경기 북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음모론이 있다. - 휴전선 근방에 왜 하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을까? 그건 바로 남북전쟁시 북침에 대비한 수도 방위 방패막이야! - 이 음모론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에 건설된 아파트 단지의 존재는 팩트요, 도시 계획의 숨은 군사 전략은 픽션이다. 


 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두려움과 동시에 발생한 유머는 시대 정신이다. 안타깝게도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한민국 아파트 공화국의 가장 큰 넌센스 퀴즈는 해결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많은 사람들이 인지 하거나 인지해볼 엄두도 못냈던 수많은 아파트의 시대적 의제를 이끌어내고 긁어 주며 논의 한다. 


 아파트가 읽어주는 사회는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콘텐츠들이 서로 가까이 혹은 멀리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예를들면, 아파트의 공간 구조가,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문화콘텐츠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을 낳았다고 보는 일견을 살펴보자. 텔레비전 드라마의 수많은 장면들이 쌍방 클로즈업을 반복적으로 비추며 대화로 70%의 이야기의 비밀과 복선을 개진 하는 이유의 한 켠에는 아파트가 자리 한다는 논리다. 


 아파트에서는 기존의 주택에서 마루 밖에 독립적으로 위치하던 부엌이 거실과 붙어 있다. 설거지하며 요리를 하는 주부는 거실의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일일드라마를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주부를 배려하는 아파트 거실 구조의 매카니즘은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끌어 내고 주부에게 멀티태스킹의 묘미를 학습 시킨다. 


 결국 드라마를 적절하게 시청하며 거실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주부의 생활 경험치가 확장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물론 드라마의 매카니즘과도 연계될 수 있다. 텔레비전 연속극은 주로 가정에 머물러 있는 주부들을 공략해야 하는 형편이고, 매일 방영하다보니 아주 신속하게 제작되어야 한다. 수많은 부연설명을 위해, 찻집에서 벌이는 두 여자의 날서린 한판승 한 장면이면 충분할 것을, 수려한 앵글 전환으로 수고를 늘릴 필요는 없다. 


 한때 설거지 하는 동안에도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어떤 모략을 펼치는지 다 외우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그녀의 뒤통수에 경외감을 표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공간 구조학적이고 매체 특수성 반영적인 고찰을 시도한 것은 이 책이 나보다 먼저가 아닐까, 음? 하고 펼쳐 들어 오! 하고 읽게 되는 책이다.



콘크리트로 보는 사회학, 우리 시대의 성찰


  이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주는 재미는 다채롭고 또 깊이 있다. 시대 문물을 통해서, 개인의, 가계의, 사회의 유토피아를 꿈꿨던 사람들의 욕망과 소비의 발현이 어떤 주소를 거쳐왔는지 살펴 보는 일은 즐겁다. 이는 작가의 박학다식함과 다방면에 걸친 사료 수집 능력으로 견고하게 도움 받는다.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 김영하와 유하를 오가는 문학적 감수성과 배경 지식은, 작가가 건축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에 자기의 전문 분야로 시대를 읽어 내기 위한 지식과 통찰력을 가진 지식인에 대한 경외감 까지 느껴지게 한다.



 그렇다면 아파트로 읽는 현 시대는 어떤 사회학적 콘텐츠들이 유기적인 모습으로 존재하며 동시대 과제를 반영하고 있을까? 부동산 가격은 치솟고, 직장 5년차 봉급 모아서는 서울 근교에 집 한채도 사지 못하는 형편이니 집 사서 장가 가고싶은 예비 신랑들의 초혼 연령대는 자꾸만 높아 진다. 점진적으로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결혼을 꿈꿔야 하는 남성의 상대적인 기존 권위는 낮아진다. 이는 건강한 남녀평등의 정착이 아니라 건전한 논의를 생략한 기형적인 젠더 균형의 맹점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한편 높은 집 값은 장성한 성인 자녀가 부모의 경제적 원조를 받아야 하는 순간이 잦아졌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하기도 한다. 결국 개인의 부모로부터의 독립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어렵다.


 집값, 양육비, 교육비, 겨우 겨우 모으고 나면 노후 대책할 시간도 없이, 다시 자녀 아파트 값. 이렇게 평생 하는 일이라고는 예정 되어 있는 소비를 위해 빚지고 돈 버는 일 뿐인 시대. 정해진 인생 주기의 소비 패턴은 개인의 만족감이 돈 버는 데서만 급급하도록 만들었으니 직장 생활 틈틈이 어렵게 확보한 여가 시간에도 빠르고 쉽게 재미를 주는 것은 소비이고 소유다. 놀이 문화의 상실. 자기 표현의 소외. 속도 숭배와 물질 만능 주의! 유토피아는 콘크리트 처럼 딱딱하게 굳어간다. 


 아파트라는 키워드로 살펴 본 사회의 어느 단면은, 그저 일면으로 그치지 않는다. 때문에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짚어주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흥미롭지만,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읽어준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가 반드시 '아파트'로만 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오늘의 팩트는 무엇이고 픽션은 무엇이며 시대 정신은 무엇인가? 오늘도 우리는 농담을 한다. 당신의 그것이 아파트에 관한 것은 아닐지라도. 

 


* 추천하기 전에


 일단 책을 읽게 되면 작가의 박식함에 놀라고, 그 박식함이 새어 나갈 틈 없는 그의 문장력에 놀란다. 덕분에 주관적인 시대 기호 읽기가 거부감 들지 않을 만큼 공신력있게 느껴진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아파트와 대한민국 사회학이 '픽션' 이라는 재미있는 구성으로 살아나 여가 시간에 신선한 사회 참여를 독려할테니, 적지 않은 책의 두께에 미리 겁 먹지 말았으면.


   forested-island.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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