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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평점 :
품절
12월의 마지막 날 저녁, 며칠 때 읽어 온 <작별하지 않는다>의 막바지를 읽어 나가고 있었다. 읽은지 삼 십 여분 쯤 되었나. 얼마 전 새로 산 원목 테이블 위에서, 일찍이 따라놓은 와인 한 잔을 비운지도 벌써 이미 오래였다. 그즈음 아마 인선의 어머니가 대구를 오가며 보고 겪은 대목을 지나는 중이었던 것 같다. 목이 말라 물 잔을 집는 다는다는게, 그만 붉은 와인 한 방울 정도가 얇게 말라 굳어 버린 둥근 빈 잔을 치고 말았다.
얇고 호리호리한 와인잔은 자비 없이 쓰려져 무참히 깨져 버렸다. 그러니까 ‘와장창’ 그랬다. 잘게도 깨진 유리 파편은 크고 작은 형태로 새로 산 원목 테이블 상판과, 거실 바닥을 뒤덮은 채 정지 했다. 독서를 위해 간접등만 켜놓던 자리는 황급히 킨 거실등으로 하얗게 채워졌고, 나는 벌떡 일어나 책을 덮었다. 나의 현실 감각은, 눈 쌓인 제주에서 내가 사는 경기도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청소기가 요란한 소음을 내고, 행주로 야무지게 테이블을 훔친다. 우스운 걱정이 앞섰다. 어쩌지. 치우긴 치우겠는데. 유리 파편이 남았으면 어쩌지. 혹시 아주 작은 점같은 조각이 나도 모르게 상처를 내면 어쩌나.
청소기와 행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박스 테이브를 반쯤 뒤로 감아 와서는 쪼그리고 앉아 바닥과 테이블을 뗐다 붙였다. 유리 파편이 놓인 자리 그대로 테이프의 끈적거리는 면에 닿아 움직임 없이 그대로 옮겨지길 바랐다. 유리가 헝겊에 쓸리고 닦이면 조각을 따라 가구에 흠집이 날 게 분명했다. 그때 깨달았다. 그건 정말 같잖은 마음이다, 이거. 아주 방금 거실등이 켜지기 직전의 세상에서 나는 울고 있었는데. 빨갱이를 잡아 절멸시키겠다는 극우 청년 군경들에 의해서 갑작스레 집에서 끌려나와 운동장으로 몰려갔을 무고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울고 있었는데.
와인 잔 깨진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가구의 흠집이 뭐가 어쨌다고 내가.
책에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온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나왔다. 그것은 책의 주인공인 경하가 친구인 인선의 요청으로 제주의 인선의 집에 있는 인선의 반려동물인 앵무새 ‘아마’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깨닫게 된 진실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경하는 인선의 집에서 꿈인듯 현실인듯 무아지경인 그 와중에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인터뷰 자료와 신문 스크랩을 찾아 낸다. 거기에는 아들이 빨갱이냐고 의심받으면서 곤봉을 맞거나 총구에 위협을 당하면서도, 우리 아들이 지금 집에 없어 다행이라고 안심했을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존재했다.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는데 너 빨갱이 맞잖아! 소리지르는 군경들 앞에서 거꾸로 매달리고, 매를 맞고, 어딘가 모르는 고문 기구에 살이 뜯기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제 오라비가 그런 고문을 당했을까봐 두려워 하면서도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어린 여동생들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와인잔을 치우며, 내 마음은 이상한 데로까지 흘러갔다. 그것은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성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었다.
- 끔찍한 역사로구나.
- 그때 말고 이 시대에 태어나서 감사한 일인 것 같아.
곧바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제주의 1950 전후에 스러져갔던 무수한 영혼들이 들으면 뺨을 칠 생각은 아닐까 싶어서.
그제야 번뜩 알 수 있었다. 이 소설 속 경하가 왜 죽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왜 삶에서 내내 고통스러워하고 우울해하며 부유했는지 말이다. 소설 속 경하는 사는 내내 직업인으로서 <광주 민주항쟁>으로 암시되는 역사적 사건을 비롯해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의 고통을 ‘소설’로 표현하는 작가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아픔을 자성하는 소설을 쓰면서도 악몽을 꾸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사는 내내 괴로워한다. 옆에서 보면 마치 어딘가 빚진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처럼. 그래, 이제 나는 알겠다. 소설 속 경하가 왜 이제는 유서를 완성해 죽어야 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자신의 괴로움을 방패 삼아 삶의 의지를 외면했는지.
경하가 제주로 가야했던 이유
아마도 경하는 제 자신의 뻔뻔함이 역겨웠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무리 공을 들여 취재를 하고 머리를 쥐어 싸매며 단어와 문장을 직조한들, 그것은 인선이의 말처럼 현실을 온전히 담지 못해 실재를 삭제하는 일에 가까울까봐 내내 부끄럽고 두려웠을지 모른다. 그것이 사람들이 몰랐던 역사의 한 면을 들추어내고, 역사 속 우리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제언하는 일이라 해도, 결국 그들의 역사를 바꿔줄 수 없다는 사실에, 역사의 광기를 정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종종 몸서리쳤을 것이다. 그녀가 찾은 역사는 그녀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내려 갈 수 있는 이야기보다 잔혹한 모습으로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나는 경하에 대한 이해가 강하게 느껴질 수록 이 소설에서 경하에게 ‘인선’의 존재가 왜 필요했는지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또한 오랜만에 만난 ‘인선’이 왜 그리도 엉뚱한 이유로 경하를 꾸역 꾸역 제주로 보냈는지도 알게 되었다. 경하가 ‘이제는 역사를 자성하고 위로하는 프로젝트 따 위는 그만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을 즈음에, 인선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라도 그녀에게 다시 불씨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아마’로 대변되는 작고 나약한 존재와도 같은 삶과 문명의 진실에 대해서 경하 스스로 알아가고 마주하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그녀를 진짜 제주로, 아니 제주의 모든 기록이 모인 우리 엄마의 집으로 불러야 겠다고.
그런 인선의 안내로 당도하게 된 ‘인선의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의 힘은 절실했다. 지난 시간 동안 어떤 정부도,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인선의 어머니는 끈질기게 제주의 진실을 추적하고 있었다. 거기에 에너지를 쏟은 나머지, 그의 삶은 내내 딸인 인선에게 나약하고 우울하게만 보여 혐오스러웠을지 모르지만, 그는 내내 경하가 사진으로 알아차린 젊은 날의 그 눈빛처럼 강인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의 원통함을 해명하려는 일이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쫓는 연서에 가까웠다. 그래서 ‘기억’의 노력과 ‘그리움’에 대한 표현은 그것이 정령 갱도에 깔린 유해들을 해집는 괴로움일 지언정, 외부의 힘에 의해 결코 회피되거나 좌초되지 않았다.
경하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책을 덮고 그 뒤를 상상해본다. 나는 감히, 경하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계속했으리라 가늠해 본다. 경하가 인선의 집에서 인선의 어머니가 모은 제주 4.3사건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진실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본 것을 계기로 오히려 그런 역사를 자성하고 위로하는 일과 ‘작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경하는 역사와 인간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올곧고 굳건한 의지를 가진 인선의 안내로, 작가로서 더 큰 사랑의 세계로 접어든 게 아닐까? 경하는 앞으로 써내려 가야만, 앞으로의 인류가 인간의 한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희망을 다짐하게 만들 수 있다. 이제는 그것을 안다.
그동안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에 나는 많은 오독을 목격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에, <검은 사슴>을 읽을 때에, 다시는 이런 소설을 읽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고 잔혹했다. ‘읽는 내내 우울해서’였다. 책 좀 좋아한다는 배운 사람들이 모인 유료 독서 모임에서도 그런 반응은 잦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그럴 때마다 우울하고 불운하고, 슬프고 괴로운 것들은 저렇게 쉽게 잊혀지고 외면당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아팠다, 그래서 한강의 소설책을 더 세게 움켜쥐었을 뿐이다. 아니 이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뿐인데.
한강이라는 소설가가 그렇게 유명하냐고, 그 사람 돈 잘 벌겠네 라고 말하는 지인에게 ‘아니 한강이 돈 때문에 글을 쓰는 거 아닌데?’ 라고 맥락에 맞지 않게 힘주어 발끈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동안 한강 덕분에 나아갔으니까. 그의 글 덕분에 갱도의 세계에서, 양지의 세계로. 무지의 세계에서, 외면의 세계로 가다가도, 외면의 세계에서 괴로움의 세계로 가다가도, 결국에는 사랑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인간의 희망에 한발짝 다가서는 존재이고 싶다고 감히 다짐했으니까.
작별하지 않는다
책을 읽던 자리에, 깨진 와인잔을 거의 다 치웠다. 크게 조각난 유리들은 손으로 집어 쓰레기 봉투에 버렸다. 점처럼 얇게 파괴된 파편들이 원목 테이블 위에 흩뿌려져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들을 문데지 않고 얌전히 끈적이는 테이프로 건져 올리거나, 바람결에 날려보내야 가구가 상하지 않는 다는 것을 모르지 않다. 그러나 성급한 손은 행주를 짚고, 아직은 눈에 띄지 않은 유리 파편들이 있을지 모르는 나무 가구의 상판을 쓸어 버린다. 잊지 말라는 듯이,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듯이. 아니나 다를까 원목 테이블 위에는 꼭 점 만 했던 유리 조각 크기로 상판에 생채기가 생겼다.
내심 와이퍼처럼 길죽한 생채기가 아니라서 안심했다.
그리고 읊조렸다. 점같은 생채기는 더이상 나와 무관하다고.
이런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