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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는 재미있는 에세이를 쓴다


 소설가들의 여행에세이는 늘 읽을 맛이 난다. 여행이라는 것은 대개 누군가의 경험이나 감상으로 귀결되기 마련인데 그 감흥이란 당사자에게나 스팩타클한 것이요, 눈물 나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그래서 수 많은 여행 에세이 작가들이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그 산 중턱에서 먹었던 소바가 한국의 어느 고급 일식집에서 먹는 요리에 비할 수 있을까!' 라고 말한 듯 공감하기 어렵다.


 그런데 소설가들은 해낸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어떤 느낌으로 좋게 생각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감동받았던 나무, 산, 사람들의 생김새와 자태를 '묘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그렇게 말했더랬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얼마나 감동받았는 지 쓰지 말고, 나를 감동하게 한 장면을 묘사해 보라고.  장유정은 자신이 걷는 히말라야의 모든 길목 어귀들을 그런 식으로 더듬어 갔다. 어떤 접속사도 생략하고 아주 스피디 하게. 



고수의 여행에세이보다 여행 초심자의 에세이가 늘 재밌다


 정유정은 여행의 고수가 아닌데도 에세이를 썼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바로 그 지점이 그녀의 글을 재밌게 한다. 정유정이 여행 초심자여서 혼자 가는 여행길을 두려워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스레 꼭 여행을 가야할 것만 같은 투지에 불 타고, 못 먹는 현지 향신료에 배변 활동을 해결하지 못하는 모습은 우리 보다는 용감하지만 꼭 우리 처럼 실수 하는 동네 언니 같다.


 대개 많은 여행 에세이에서 '여행 좀 해봤다' 하는 사람들은 너무 프로 같아 범접하기 어렵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조금 꼰대 같아 진다. 현지인처럼 놀지 못하면 인생을 제대로 못 즐기는 사람, 비포 선라이즈 마냥 하루의 일탈 좀 해봐야 제대로 된 추억을 만드는 사람, 생의 깊은 깨우침과 가르침을 해외 골목 어귀 어귀 마다 길러내는 사람. 우리가 궁금한 방황이 꼭 그렇지는 않을 때도 있다.



소설가는 모든 것에 다 산 사람 같을 줄 알았는데 


 소설가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같다. 사건의 표면이 아니라 이면의 사연을 읽어주는 사람들 같다. 신문 헤드라인의 '범죄자를 은닉한 남자'의 괘씸한 팩트를 한명의 인생과 또 다른 이의 인생이 만나 얽히고 설키는 트라우마와 용서의 여정으로 풀어낼 수 있다. 소설가라면 그래서 정말 많은 사회적, 대인 관계적 경험을 가진 이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들의 예민한 감각이 다층적인 인생으로 우리보다 농 익게 진화했으리라 - 


 그래서 정유정이 네팔 식 볶음밥을 거부할 때, 사교적인 해외 여행자들과 선뜻 현지식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쭈뼛거릴 때 나는 웃음이 난다.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들에게 늘 뜨거운 일이지만 여전히 그 속에서 숨 쉬고 살아가고 헤집고 다니는 일이란- 오랜 숙제이고 호기심어리고 서툰 일이구나.


  

옳은 여행 에세이란,


 능숙할 것 같은 사람이 능숙하게 여행한 이야기는 멋지지만 재밌지는 않다. 능숙할 것 같은 사람이 서툴게 여행한 이야기는 초보적이지만 흥미진진하다. 더구나 순간 순간의 여정의 어려움과 눈에 보이는 광경들을, 누구보다 세밀하고 경쾌하게 묘사해줄 소설가로부터의 여행이란 믿고 보아도 되는 글일 것이다. 



 출퇴근 길이 즐거웠던 환상방황, 모든 고수들의 서툰 환상방황을 응원해 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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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6월, 주목할 만한 신간들 :)


여름이면 스페인의 그 뙤약볕과, 노르웨이의 겨울 냄새 미처 가시지 못한 그 눈부신 초록과,

한국에서 기타 매고 내달렸던 여름 바다의 뮤직캠프를 잊을 수 없다.


그런 추억과 잘 어울리는 휴가 같은 이야기를 읽고 싶다.







 지구를 구하는 상상력

_ 탁소 지음.




상상력은 지구를 항상 망쳐왔다. 더 빨리 달리려는 작당이 지구를 더 빨리 시들게 했고, 더 멀리 가려는 욕망이 지구를 더 깊이 가라앉게 만들었고, 더 따뜻해지려는 생각이 지구를 더 무력하게 녹아들게 만들었으니까.


상상력은 지구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그래서 더욱 궁금해지는 크리에이터's 노트다.





마술 라디오

_ 정혜윤 지음



그녀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널리 알렸던 라디오 PD 정혜윤,

CBS 방송은 잘 몰라도 정혜윤 PD의 글들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녀가 이번엔 라디오 이야기를 한다니,

더욱 궁금해질 수 밖에.







청춘의 문장들 + 

_ 김연수 지음



'청춘'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서도 가장 진부하지 않은 청춘의 고민을 들려주는 기성 세대의 책이 있다면 '청춘의 문장들'이었으리라. 자신의 이야기를 고뇌를 실패를 부끄러움을 그리고 그보다 훨씬 짙은 외로움을 써내려갔기 때문에 - 우리는 기성 세대가 내뱉는 '청춘' 중에서 그가 만든 청춘의 문장들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리라.


그가 그 뒤로 나이가 들고 다시 던지는 질문들은 어떤 것일까.

빛바랜 어떤 것은 아니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그 문장들을 기대해 본다.




다시 동화를 읽는다면

_ 지은이 다수



어른이 되어서도 동화를 자주 읽었다.

읽을 때마다 달랐다.


내 생의 어딘가에서 늘 다른 색으로 나를 어루만져 주었다.

모습은 다를지라도, 그 온기 만큼은 해사했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읽는 유명인사들의 다른 이야기가 기대되는 이유다.







6월에도 어김없이 좋은 책들이 있다.

한 해의 절반이 간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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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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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어른이 되었을 때는 20살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 후, 학생 신분을 정말 '끝장'냈을 때, 나는 내가 어른이 되는 관문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무서웠다. 완벽하고 멋진, 노련한 어른은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고 욕심부리는 것도 많으면서 정작 책임져야 할 것은 하나 둘 뒤치닥거리도 못하는 모양새에 정말 실망하는 어른 초년생.

 삶은 꿈 꾸던 것과 비슷한 듯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균열이 가 있고,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은 어느새 소원해졌는지 돌아보고 센치해지다가도 지금 옆에 있는 이들과 시끄럽게 어울리느라 금방 잊어버리기 일쑤. 하고 싶어서 목 매던 일들은 어느새 마음에서 시들어지지만, 미처 지나간 시간에 도전해보지 못한 것들에 마음 뺏기는 것도 여전히 여러번이다. 




01. 여전히 기대하게 되는 것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상상도 못 했던 하루
이런 유쾌한 하루가 앞으로의 인생에도 분명 많이 있을 거라고기대해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p.61).


저자가 그러한 것처럼, 그러므로 나의 인생도 여전히 어린아이 것의 형태를 하고 있다. 아직도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많고 궁금하고 가고 싶은 곳이 많은 것은, 백발의 여선생님 어린 중학교 소녀들을 앞에 두고 '나도 아직 마음은 이팔청춘인데...' 하고 실 없는 한탄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우리는 어른이 되는 문턱에 들어서서야 나이 70을 먹고도 이팔청춘인 어른들의 마음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02. 문득 두려워지는 것


살짝 불안, 내 몸의 변화부모님의 건강.... 앞으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부디 잘 극복해 나가자, 우리. (p138)


 하지만 그러한 치기 어린 모습을 아직 잃지 못한 욕망도 시들 시들 그 생기가 예전 같지 않을 때가 그 어른의 초입이다. 우리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늙어가고 우리는 서서히 고아가 되어가리, 예약된 꿈들은 미처 실현되지 못하거나 더 예상치 못한 환상의 결말이 있을 수도 있을 터.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어른의 자세란, Keep cal and Carry on이라는 오래된 문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곧 알게 되리라.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거다. 어른이 되는 게 싫다고 그것을 피할 수 있었던 이는 없었다. 나이 먹는 일이란 어쨌든 현대의 과학 기술로 저지할만한 것이 못된 다는 뜻이다. 허나, 이래저래 마음에 안 되는 어른이 되는 게 싫으니 조금이라도 스스로를 사랑하는 어른이 되는 것은 더러 많은 이들이 해내곤 한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장점은 사랑하고 단점은 보듬어 주었던 노력이 그거다.


 이도 저도 어렵게만 느껴진다면, 마스리처럼 일단 일기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작은 고민도, 후회도, 걱정도, 모두가 인생의 그림이 되는 것을 안다면 한발짝 물러서서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는 일도 고통은 아니니까. 그게 어른일지도 모르겠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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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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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작가가 되려면

 신으로부터 특별히 은총 받은 타고난 재능이 100%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비단 나 하나뿐만 아니라, 대개 작가의 글을 선망하거나 작가는 자신과 먼 직업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글이란 '작가'라는 특정한 부류의 집단만 작성 가능한 창조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글을 많이 써보지 않았을 경우 그렇다.

 그런데 내가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재능도, 영감도 아니고 단지 '성실함'과 그 성실함을 닮은 '글에 대한 의지'라고 생각된 것은 소설가 김연수를 만나면서부터다. 김연수는 스스로 재능이 많지 않은 작가라고 더러 칭한 바 있다. 그리고 그는 매일 같이 글을 썼다. 그리고 그 일을 거르지 않은 결과 그는 소설을 여러 편 완성해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좋은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테지만, 스스로는 대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어제보다 나은 인간이 되었다고" (지지않는다는말/김연수)

 이런 태도는 김연수뿐만 아니라 김연수와 조금은 닮은 것도 같은(문체라기 보다는 소설과는 또 다르게 작가의 에세이가 재미있다는 특징과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서도 발견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새벽부터 오전까지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운동과 식단 조절 등 철저한 자기관리로 유명한 사람이다. 공무원도 아니고, 비즈니스맨도 아닌데 그는 소설가의 규칙을 스스로 세우고 제대로 지킨다.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나 김연수뿐만 아니라, 추리 소설로 사뭇 다른 글을 쓰고 아니 오히려 더 획기적으로 타고난 영감과 재치가 필요한 장르 소설을 남긴 챈들러 또한 그런 성실한 소설가의 자세를 보여주니 이제 앞서 내가 가졌던 소설가에 대한 게으른 선망이 얼마나 기만이었는지 인정해야겠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거만함이었을 테기에.

 챈들러는 '전업 작가라면 적어도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정한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는 글쓰기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p.56)"고 말하는 작가였던 것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노래부르기든 밥벌이를 위한 사무실에서의 하얗고 차가운 노동이든지 간에, 언제나 자신의 손 위에 있는 노동을 책임지는 일이란 그런 집중력을 요하는 법이다.

 오히려 전혀 그렇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문학, 예술, 비일상적인 글짓기의 영역에서조차 그런 성실함을 지키는 유명한 작가들의 모습은 새삼 새롭다. 삶의 자세를 다시 겸허하게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아무리 상투적인 기교를 많이 익혔다 한들, 작가에게 지금 도움이 되는 것은 열정과 겸손함뿐(p.78)'이라고 말한 챈들러의 메시지가 인생의 어느 한순간이라도 통하지 않을 때는 없을 것이다.

 참, 이 시대의 다양한 젊은 인생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챈들러의 한 삶의 단면은 이렇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하며 자신의 적성을 제법 펼치는 듯도 했으나 대부분의 날들을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빅 슬립>을 발표한 이후 20년간 전부 일곱 편의 장편을 쓰고 이렇게 그의 글쓰기 비법까지 궁금해하는 한국 독자들도 만들어버렸다.



무언가를 어쨋든 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인생을 바꿀 수도 있고, 겸손함 속에서 찬사를 만들 수도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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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순간 : 시 - 날마다 읽고 쓴다는 것 우리가 보낸 순간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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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광안리 바닷가의 한 맥줏집에 있었습니다. 저녁 바다는 말을 걸고 싶어하는 전학생처럼 우리 발치까지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더군요. (중략) 눈을 감고 옛일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내게 남은 인생과, 또 다음 광안리 바다를 볼 때까지 그 인생을 가득 채울, 하지만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p.31)

 

밤하늘의 별자리들은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는 것 같지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듯 언제나 그대로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늘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에게 잊힌 별자리들도 있습니다. 나중에 별자리들을 정리할 때, 그만 탈락한 비운의 별자리들이죠. 예를 들어 고양이 자리. 고양이를 무척 사랑한 랄랑드란 사람의 추천으로 만들어졌습니다만, 지금은 사라졌어요. (애묘인들은 복원 운동이라도 벌이시길.) (중략) 보이는 세상 뒤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p.68)

 

기자는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그 조용한 시골 마을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으나, 제대로 된 부대시설과 볼거리가 없어서 대부분 마을만 둘러보고 황급히 발길을 돌린다면서 대책이 시급하다고 진단하더군요. 옛 정취가 고스란히 보존됐다는 이유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마을에서 부대시설과 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니. 그렇게 고요하고 적적한 마을에 가서도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리지도 못하고 황급히 발길을 돌려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니. 경주 양동마을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책이 시급한 것은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p.72)

 

또 몇백 년 전에는 큰 화재가 발생해 집들이 다 타버렸다는군요. 다음 날, 골목을 걸어가다가 건축 양식이 서로 다른 두 집이 빈틈없이 맞붙은 모습을 발견했어요. 두 집의 건축 시기는 몇백 년 차이 난다고 하더군요. 화재의 흔적. 그건 화재를 이겨낸 흔적이라는 뜻이더군요. 모든 상처가 그 고통을 이겨냈다는 걸 말하듯이. (p.109)

 

미안해요. 하지만 실수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건 제 버릇이랍니다. 반성하고 후회해서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놀라기 위해서. 동네를 산책하다가 잘못 들어선 길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작은 공원을 발견하고는 놀랐던 지난해 여름처럼. 거기 그렇게 예쁜 공원이 있을 줄이야.... 그 공원 벤치에 앉아 어쩌면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때처럼. (p.115)

 

몸무게가 30g인 지느러미발좀도요는 캐나다 툰드라 지대에서 남아메리카 북부까지, 몸무게가 불과 5g인 붉은멱벌새는 미국 뉴햄프셔 숲 속에서 코스타리카까지 날아가고요. 철새들이 자기 몸으로 긋는이 세계의 경계란 이처럼 넓다고 해야할지, 좁다고 해야할지, 그렇다면 몸무게가 60kg이 넘는 나는 이 지구의 어디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다는 건지. 갑자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p.187)

 

인생은 놀이공원이야, 해볼 건 다 해보고 나가야지 본전을 건지는 거야. 우리는 자유이용권을 끊고 들어온 거예요. 그렇다면 그게 아무리 무서운 놀이기구라도, 또 아무리 오래 기다려야만 탈 수 있는 것이라도 다 타보고 나가는 게 좋겠어요. 막상 타보면 당장 토할 것처럼 어지럽기도 하고, 이제는 집에 가서 쉬고 싶을 만큼 지치기도 하겠지만, 아직 날이 저물려면 멀었고 놀이공원 안에는 안 타본 것들이 너무 많아요. 아마 집에 가면 푹 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놀이공원 안에 있는 동안에는 잘 놀다가 갑시다. 무려 자유이용권을 가졌다고 치자구요. 그게 너무 부담스럽다면, 빅 파이브로 바꿔드릴게요. 사는 동안 다섯 가지 정도 소원은 꼭 이루도록 합시다. (p.219)

 

 

* 책 정보

 

우리가 보낸 순간 - 시」, 김연수, 마음산책

 

*

 

 소설가 김연수가 경향신문에서 '시로 여는 아침'이라는 기획으로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가 좋아하는 시가 있고, 그 시를 읽고 난 뒤에 그가 하고 싶은 말들이 적혀있는 구성이다. 천천히 집중해서 참을성있게 읽지 않으면 도대체 김연수가 단행본에 수록한 시들이, 김연수가 나란히 늘어놓은 이야기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하지만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 읽는다면, 김연수가 시를 읽고 왜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독자가 어디서 공감해야할 지 알게 된다. 예컨대 소설가 김연수는 '눈을 깜빡일 때'라는 시를 읽고서, 눈을 깜빡이는 순간에 인생이 영겁처럼 스쳐지나갔고 앞으로도 스쳐지나갈 것 같지만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삶의 막연함이 느껴진다고 말할 줄 안다. (p.30 참고 ) 그리고 그런 모습은, 책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행간의 의미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일 같다. 선택된 단어와 심사숙고하여 다듬어진 문장들 사이에서 시가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았지만 점차 특정한 의미들은 독자가 찾아줄 수 있다. 따라서 시를 유익하게 읽고 싶은 이라면, 그것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겠다. 그게 바로, 인내심이다. 빨리 지나치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대신, 조금 느리게 읽고, 시어에 담아볼 수 있는 나만의 기억도 투영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점차 좁은 행간에 깊이 심어진 어떤 의미가 생겨난다. 삶을 시에 빗댈 수 있다면, 그것은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날에는, 페이스북 담벼락에 누군가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라며 황인숙의 '강'이라는 시를 올렸다. 시를 한번, 두번, 세번을 읽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 조금 더 천천히 여러번 읽었다. 정성스럽게 쓰인 시 같기는 한데, 유명한 것도 같은데, 어찌 이것이 그대의 인생을 흔들었을까. 그녀에 대해서 생각했고, 혹시나 나도 누군가를 강물에 보내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드문 드문 기억을 헤집어봤다. 나는 그런 시간들이 시의 행간, 여백, 함의와 생략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를 읽는 동안 조금 더 그녀를 인내심있게 바라보게 되었을까.

 

  그래서 누군가는 시를 읽는 일을 참 사랑하는 것 같다. 시 읽기는 세상을 천천히 이해하고, 그 안에서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준다. 비교적 적은 개수의 단어들이, 비교적 짧은 운율의 옷을 입고서 어떤 문양 처럼 한장의 종이를 장식하고있는데 그것의 의미를 기다려주고 헤아려주는 특별한 시간을 독자가 선물받는 것이다. 시를 읽는 일이 행간을 천천히 지나, 네 의미를 묻고, 내 의미를 묻어내는 것이라면 산다는 것도 그러하다. 글을 읽는 일도, 밥을 먹는 일도,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는 일도. 잠들기 전에 낮에는 이해 못한 네 말을 곱씹어보는 일도 그러하다.

 

 끝으로, 이 책에 수록된 시는 아니지만 - 본 포스팅에서 언급되었던 황인숙의 시, '강'을 소개해본다.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시 속의 화자가 아무리 강으로 가라 소리친다하더라도,

 

나는 누군가의 행간을 읽어주고 싶다.

아무리 그대의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이 지긋지긋하다 해도.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두고 누군가와 눈도 마주칠 수 없다 하여도,

 

삶의 행간을 읽어주기 위해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고 싶다.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인내심있게.

 

 

 

 

* 추천하기 전에

 

  그러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야한다. 다른 책에 비하면 소장가치가 높은 책은 아니지만, 김연수를 특별히 좋아하는 독자라면 「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 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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