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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눈꽃 에디션)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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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마지막 날 저녁, 며칠 때 읽어 온 <작별하지 않는다>의 막바지를 읽어 나가고 있었다. 읽은지 삼 십 여분 쯤 되었나. 얼마 전 새로 산 원목 테이블 위에서, 일찍이 따라놓은 와인 한 잔을 비운지도 벌써 이미 오래였다. 그즈음 아마 인선의 어머니가 대구를 오가며 보고 겪은 대목을 지나는 중이었던 것 같다. 목이 말라 물 잔을 집는 다는다는게, 그만 붉은 와인 한 방울 정도가 얇게 말라 굳어 버린 둥근 빈 잔을 치고 말았다.


얇고 호리호리한 와인잔은 자비 없이 쓰려져 무참히 깨져 버렸다. 그러니까 ‘와장창’ 그랬다. 잘게도 깨진 유리 파편은 크고 작은 형태로 새로 산 원목 테이블 상판과, 거실 바닥을 뒤덮은 채 정지 했다. 독서를 위해 간접등만 켜놓던 자리는 황급히 킨 거실등으로 하얗게 채워졌고, 나는 벌떡 일어나 책을 덮었다. 나의 현실 감각은, 눈 쌓인 제주에서 내가 사는 경기도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청소기가 요란한 소음을 내고, 행주로 야무지게 테이블을 훔친다. 우스운 걱정이 앞섰다. 어쩌지. 치우긴 치우겠는데. 유리 파편이 남았으면 어쩌지. 혹시 아주 작은 점같은 조각이 나도 모르게 상처를 내면 어쩌나.


청소기와 행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박스 테이브를 반쯤 뒤로 감아 와서는 쪼그리고 앉아 바닥과 테이블을 뗐다 붙였다. 유리 파편이 놓인 자리 그대로 테이프의 끈적거리는 면에 닿아 움직임 없이 그대로 옮겨지길 바랐다. 유리가 헝겊에 쓸리고 닦이면 조각을 따라 가구에 흠집이 날 게 분명했다. 그때 깨달았다. 그건 정말 같잖은 마음이다, 이거. 아주 방금 거실등이 켜지기 직전의 세상에서 나는 울고 있었는데. 빨갱이를 잡아 절멸시키겠다는 극우 청년 군경들에 의해서 갑작스레 집에서 끌려나와 운동장으로 몰려갔을 무고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울고 있었는데.


와인 잔 깨진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가구의 흠집이 뭐가 어쨌다고 내가.


책에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고통을 온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 나왔다. 그것은 책의 주인공인 경하가 친구인 인선의 요청으로 제주의 인선의 집에 있는 인선의 반려동물인 앵무새 ‘아마’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깨닫게 된 진실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였다. 경하는 인선의 집에서 꿈인듯 현실인듯 무아지경인 그 와중에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인터뷰 자료와 신문 스크랩을 찾아 낸다. 거기에는 아들이 빨갱이냐고 의심받으면서 곤봉을 맞거나 총구에 위협을 당하면서도, 우리 아들이 지금 집에 없어 다행이라고 안심했을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존재했다. 빨갱이가 뭔지도 모르는데 너 빨갱이 맞잖아! 소리지르는 군경들 앞에서 거꾸로 매달리고, 매를 맞고, 어딘가 모르는 고문 기구에 살이 뜯기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제 오라비가 그런 고문을 당했을까봐 두려워 하면서도 입밖으로 내지 못하는 어린 여동생들이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와인잔을 치우며, 내 마음은 이상한 데로까지 흘러갔다. 그것은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성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었다.


- 끔찍한 역사로구나.

- 그때 말고 이 시대에 태어나서 감사한 일인 것 같아.


곧바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제주의 1950 전후에 스러져갔던 무수한 영혼들이 들으면 뺨을 칠 생각은 아닐까 싶어서.


그제야 번뜩 알 수 있었다. 이 소설 속 경하가 왜 죽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왜 삶에서 내내 고통스러워하고 우울해하며 부유했는지 말이다. 소설 속 경하는 사는 내내 직업인으로서 <광주 민주항쟁>으로 암시되는 역사적 사건을 비롯해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의 고통을 ‘소설’로 표현하는 작가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 시대의 아픔을 자성하는 소설을 쓰면서도 악몽을 꾸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며 사는 내내 괴로워한다. 옆에서 보면 마치 어딘가 빚진 사람처럼 살아가는 것처럼. 그래, 이제 나는 알겠다. 소설 속 경하가 왜 이제는 유서를 완성해 죽어야 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자신의 괴로움을 방패 삼아 삶의 의지를 외면했는지.



경하가 제주로 가야했던 이유


아마도 경하는 제 자신의 뻔뻔함이 역겨웠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무리 공을 들여 취재를 하고 머리를 쥐어 싸매며 단어와 문장을 직조한들, 그것은 인선이의 말처럼 현실을 온전히 담지 못해 실재를 삭제하는 일에 가까울까봐 내내 부끄럽고 두려웠을지 모른다. 그것이 사람들이 몰랐던 역사의 한 면을 들추어내고, 역사 속 우리가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희망을 제언하는 일이라 해도, 결국 그들의 역사를 바꿔줄 수 없다는 사실에, 역사의 광기를 정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종종 몸서리쳤을 것이다. 그녀가 찾은 역사는 그녀가 아름다운 문장으로 써내려 갈 수 있는 이야기보다 잔혹한 모습으로 인간의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나는 경하에 대한 이해가 강하게 느껴질 수록 이 소설에서 경하에게 ‘인선’의 존재가 왜 필요했는지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또한 오랜만에 만난 ‘인선’이 왜 그리도 엉뚱한 이유로 경하를 꾸역 꾸역 제주로 보냈는지도 알게 되었다. 경하가 ‘이제는 역사를 자성하고 위로하는 프로젝트 따 위는 그만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을 즈음에, 인선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라도 그녀에게 다시 불씨가 되어주어야 한다고. ‘아마’로 대변되는 작고 나약한 존재와도 같은 삶과 문명의 진실에 대해서 경하 스스로 알아가고 마주하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그녀를 진짜 제주로, 아니 제주의 모든 기록이 모인 우리 엄마의 집으로 불러야 겠다고.


그런 인선의 안내로 당도하게 된 ‘인선의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의 힘은 절실했다. 지난 시간 동안 어떤 정부도, 언론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인선의 어머니는 끈질기게 제주의 진실을 추적하고 있었다. 거기에 에너지를 쏟은 나머지, 그의 삶은 내내 딸인 인선에게 나약하고 우울하게만 보여 혐오스러웠을지 모르지만, 그는 내내 경하가 사진으로 알아차린 젊은 날의 그 눈빛처럼 강인했다. 그것은 자신의 가족의 원통함을 해명하려는 일이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쫓는 연서에 가까웠다. 그래서 ‘기억’의 노력과 ‘그리움’에 대한 표현은 그것이 정령 갱도에 깔린 유해들을 해집는 괴로움일 지언정, 외부의 힘에 의해 결코 회피되거나 좌초되지 않았다.


경하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책을 덮고 그 뒤를 상상해본다. 나는 감히, 경하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계속했으리라 가늠해 본다. 경하가 인선의 집에서 인선의 어머니가 모은 제주 4.3사건을 중심으로 한 역사적 진실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본 것을 계기로 오히려 그런 역사를 자성하고 위로하는 일과 ‘작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경하는 역사와 인간의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겠다는 올곧고 굳건한 의지를 가진 인선의 안내로, 작가로서 더 큰 사랑의 세계로 접어든 게 아닐까? 경하는 앞으로 써내려 가야만, 앞으로의 인류가 인간의 한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희망을 다짐하게 만들 수 있다. 이제는 그것을 안다.


그동안 한강의 소설을 읽을 때에 나는 많은 오독을 목격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을 때에, <검은 사슴>을 읽을 때에, 다시는 이런 소설을 읽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을 여럿 보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하고 잔혹했다. ‘읽는 내내 우울해서’였다. 책 좀 좋아한다는 배운 사람들이 모인 유료 독서 모임에서도 그런 반응은 잦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그럴 때마다 우울하고 불운하고, 슬프고 괴로운 것들은 저렇게 쉽게 잊혀지고 외면당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아팠다, 그래서 한강의 소설책을 더 세게 움켜쥐었을 뿐이다. 아니 이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일 뿐인데.


한강이라는 소설가가 그렇게 유명하냐고, 그 사람 돈 잘 벌겠네 라고 말하는 지인에게 ‘아니 한강이 돈 때문에 글을 쓰는 거 아닌데?’ 라고 맥락에 맞지 않게 힘주어 발끈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동안 한강 덕분에 나아갔으니까. 그의 글 덕분에 갱도의 세계에서, 양지의 세계로. 무지의 세계에서, 외면의 세계로 가다가도, 외면의 세계에서 괴로움의 세계로 가다가도, 결국에는 사랑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인간의 희망에 한발짝 다가서는 존재이고 싶다고 감히 다짐했으니까.


작별하지 않는다


책을 읽던 자리에, 깨진 와인잔을 거의 다 치웠다. 크게 조각난 유리들은 손으로 집어 쓰레기 봉투에 버렸다. 점처럼 얇게 파괴된 파편들이 원목 테이블 위에 흩뿌려져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이들을 문데지 않고 얌전히 끈적이는 테이프로 건져 올리거나, 바람결에 날려보내야 가구가 상하지 않는 다는 것을 모르지 않다. 그러나 성급한 손은 행주를 짚고, 아직은 눈에 띄지 않은 유리 파편들이 있을지 모르는 나무 가구의 상판을 쓸어 버린다. 잊지 말라는 듯이, 이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듯이. 아니나 다를까 원목 테이블 위에는 꼭 점 만 했던 유리 조각 크기로 상판에 생채기가 생겼다.


내심 와이퍼처럼 길죽한 생채기가 아니라서 안심했다.

그리고 읊조렸다. 점같은 생채기는 더이상 나와 무관하다고.


이런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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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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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서 목소리라는 것은, 삶에 대한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적 사고 같은 것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에게 휩쓸리지 않고 제 처지를 파악해서 그를 성장시킬 욕망과 기호를 구축하는 자유는 삶의 여러 순간에 유용하니까.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적합한 표현으로(Proper Expression) 전달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그것을 지성이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성은 공평하지 못하다. 누구나 삶에서 늘 최선의 수를 두고 고군부투하고 욕망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건 이래서 좋아요. 그건 싫습니다. 더 원해요. 이제 바꿉시다.’ 모두가 자신의 입장을 타인이 오해하거나 무시하지 않을 만한 표현으로 문해력과 문장력, 나아가 매체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너무 가난했거나, 배우지 못해서, 목소리가 작아서. 그래서 지성은 곧잘 권력이 된다.

바로 그 권력을 갖지 못한 집단 중 하나가 20세기 여성들이다. 20세기의 여성들은 제대로 말할 기회가 없었다. 과거를 치를 권리, 조정에 진출할 권리, 투표를 할 권리, 제단에서 설교를 할 권리. 권리가 생겨도 어색해 했다. “오빠가 대학에 가야 하니 너는 일찍 시집이나 가라”. 배우고 말하는 방법 대신, 더 큰 목소리를 가진 남성에게 선택 받는 법에 길들여진 여성들에게, 역사의 불공평한 기록에 항의하고 수정을 제안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옅어지는 희망이 있더라도 높은 확률로 대물림될되었을 것이다.

<시선으로부터>의 ‘심시선’이 빛나는 이유는 바로 ‘그 목소리를’ 전달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20세기라는 혼란한 시대의 무자비한 굴곡을 동일하게 겪었음에도, 투박하고 고집스러운 노인이 아니라 다음 세대로부터 세련되고 자유분방한 작가로 대접받는다. ‘매일 더 나아지는 섹스의 미덕’을 말하는 세련된 위트를 가졌으며, 자신을 사랑한다며 자살한 ‘남성 예술가의 폭력성’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고 고발할 줄 아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여성들의 입에서 들어보지 못한 21세기의 무엇과 가까운 발언은 멋스럽고 신선하고 강하다.

그런데 나는 독자로서 시선의 반짝이는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시선처럼 세련되지 못했던 20세기의 수많은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들의 그림자를 만났다. 시선처럼 살아 남지 못해 자신의 문장을 남기지 못한 그들이 살아남았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한편으로는 그들보다 더 배운 내가 때로 ‘그 시절 그들은 그저 순종적이었다’거나, ‘너무 무지했다고’ 쉽게 오해했던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들도 다만 모두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끝에서, 혹독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여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생존을 위해 노력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고 싶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매체를 갖지 못했을 뿐이라고.

시선이 이번 생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림만 잘 그려서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시선이 학대와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지키고 그것을 발휘할 ‘매체’를 사수하는 노력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소품 취급하던 남성 작가 마티어스의 유화 나이프에 맞아 피를 흘리면서도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텨 예술 학위를 따냈고, 힘든 시기 속에서도 만난 여러 네트워크를 활용해 한국 예술계로 데뷔하기도 했다. 남편인 요제프 리가 혼자 독일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정도로 ‘시선은 사랑과 자신의 언어 중에서 언어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 시절 여성에게 목소리는 그만큼 중요한 것이었는데, 갖기도 어려운 것이었던 것이다.

심시선이 아닌 20세기 여성들을 떠올리며, 극중에서 화수의 어느 대사를 떠올려 보았다.

“할머니도 PTSD에 시달리고 있었던 게 아닐까? (중략)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p.111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화수의 대사

나는 이 문장이, 시선 처럼 세련된 글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역시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20세기 여성들에게 전하는 21세기의 격려처럼 읽혔다. ‘당신들이 쓰지 못한 이야기 속의 학대와 불균형, 소외와 기회의 불공평함을 우리도 잘 알고 있다고. 구구절절 쓰지 않아도. 기억을 메우지 못하신다 해도.

“언니, 할머니를 원망하면 안 돼.”

“원망하지 않아.”

“할머니는 할머니의 싸움을 했어. 효율적이지 못했고 이기지 못했을지 몰라도. 어찌되었든 사람은 시대가 보여주는 데까지만 볼 수 있으니까.”

p.182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화수와 지수의 대사

나도 어른이지.

나도 어른이지."

"언제까지고 딸, 손녀, 보호의 대상일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하면 어른으로 살 수 있지? 이미 어른이지만 제대로 된 어른으로? 하루 종일 잠으로 시간을 보내서는 어려울 것이다.”

p.182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화수의 대사

전쟁터를 지나, 굶주림과 환난을 지나, 국경을 넘어.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해낸 가장 멋진 일은 말할 권리를, 쓸 수 있는 언어를 배울 기회를 물려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세련되고 자유분방한 심시선의 외연은 아닐지라도, 억척스럽고 느리며 찌든 모습일지라도, 덕분에 우리는 전보다 더 들리는 목소리를 갖게 되었다. 매체에 자리가 없으면 달라고 할 줄도 알게 되었다. 소설 속 ‘가짜 희망’이라도 되어 보겠다며 있는 힘껏 회사를 지키는 경아처럼, 여자가 아니라 컨셉 아티스트로 평가받을 우윤이처럼, 이대로 라면 '새'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잘 들리는 목소리와 매체를 점유할 해림이처럼.

<시선으로부터>가 보여주는 어느 여성 예술가의 성공과 부, 그리고 그의 일가가 해낸 어느 환상 제사가 반가운 것은 그래서다.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삶에 대한 경의를 나누는 즐거움이 있어서다. 그들은 이제 없다. 그들이 남긴 글만이, 그들의 실제 삶과는 무관하게 남거나 상상될 뿐이다. 그러나 그들을 기리는 마음 속에서 가족들은 각자의 성장과 행복을 찾아 훌라 춤을 추고, 무지개를 찍고, 커피를 구한다. 누구 하나 비슷하지 않지만, 누구 하나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제사였다.

그래서 이 책이 보여준 하와이의 어느 제사는, 우리 공동체의 아직 닿지 못한 세계로운 단맛 나는 상상이다. 우리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하고 있찌 않을까? 물론 그것은 여자만 하는 일은 아니다. 온화하고 투명한 태도로 단 맛을 나눌 줄 아는 태호와, 잘못을 사유하고 변화에 도전할 줄 아는 규림처럼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여정은 우윤이 서핑을 배우는 것만큼 느리고 위태로운 질감으로 나아가겠지만 분명한 계단의 형태로 좋아졌으면 한다. 여자 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지나간 여성의 서사가 부재한 시절에, 드물게 삶을 딛고 일어선 여성을 희망 삼아 더 나은 공동체의 완성을 이야기하는 소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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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은 고마운 서점입니다.


더 좋은 책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파하려는 노력을 가진 서점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정말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인가봐요.


전국 각지에 펼쳐진 국내최초 중고서점 매장에서도 

원클릭으로 해결하는 중고서적 매입 프로세스에서도


그런 정성이 드러납니다.


이와 더불어 신간평가단으로 활동을 마감하는 지금, 저도 그 알라딘의 마음에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BEST OF BEST 

2014년 상하반기를 아우러 가장 좋았던 책입니다.



CBS 라디오 PD 정혜윤 씨가 지은 책입니다.

책을 사랑하는 마음과 더불어, 라디오를 사랑하는 그녀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직업정신이 돋보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와,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에 한사람의 '생'에 불어넣는 애정과 예찬이 아닐까 싶습니다.


상담은 민폐가 되고, 사색은 허세가 된 이 세상에

어쩌면 우리가 가장 마지막 내 가슴 안에서 도피할 타인의 흔적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책이나 라디오의 공통점이 아닐까요.




 TOP FIVE

그 밖에, 신간을 넘어 스테디셀러 혹은 오랫동안 의미있는 도서로 꼽힐 책들을 추려보았습니다.




광고는 변합니다. 예능방송 같아지기도 하고, 하나의 인터넷 플랫폼같아지기도 합니다.

참여 공유 확산 -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통찰력이 필요한 마케팅 전략가들에게

유의미한 시대의 변화를 제시하는 책입니다.




그녀의 술술 읽히는 소설만큼이나 술술 읽히는 에세이입니다.

큰 사건이나 눈이 휘둥그레해질 만한 대리만족은 없습니다만

어쩐지 내가 여행 가면 이럴 것 같은 미숙함과 친근함이 이 책의 묘미입니다.

제목에 비하면 아이러니한 매력이죠.




하와이에 다녀오지 않았더래도 크게 상관은 없는 것 같습니다.

즐거운 것은, 사물과 사건과 사람과 추억에 대한

요시모토 바나나의 애정어린 시선, 그 자체입니다.





글 쓰는 사람이, 더 나아가 깊이있는 거짓말로 세상의 진실을 보여줘야 하는 소설가가

실제로 주어진 세상을 보고 느끼는 눈은 어떤지 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글을 읽기를 좋아하는 분들 중에

글을 쓰는 일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또한, 글을 쓰는 일은 어떻게 일어나는지 궁금한 분들도 많을 겁니다.


당연히 이 제목만으로도, 읽고 싶은 책일겁니다.













2015년에도 더 좋은 책을 읽고 싶네요.


알라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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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4-10-28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리님. 좋은 활동 감사드려요 ^^ 신간평가단 활동이 알라딘에 대한 좋은 이미지로까지 연결됐다니, 저도 즐겁고 기쁩니다!
건강하고 즐거운 계절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헤세의 여행]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헤세의 여행 - 헤세와 함께 하는 스위스.남독일.이탈리아.아시아 여행
헤르만 헤세 지음, 홍성광 옮김 / 연암서가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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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의미에서 하나의 체험이 되려면 확고하고 특정한 내용과 의미를 지녀야 한다.  p.13


나의 23살적 여행, 카우치서핑

 카우치서핑이라는 웹사이트가 있다. 세계 배낭여행자들에게 자신의 거실 카우치(소파)에서 잠자리를 청하고 갈 수 있도록 하는 현지 여행애호가들의 열린 내 방 공유 플랫폼이랄까. 흔히들, 여행에 대한 로망을 말할 때 현지인의 생활에 스며들듯 호흡해보기를 꿈꾼다. 용감한 어느 여성 여행가는 일찍이, 자신의 담대함으로 길거리에서 사귄 친구의 집에서 무료로 잠자리를 청하고 친구가 된 사례를 몸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 즈음 도전 지구 탐험대와 같은 TV 프로그램들 역시, 홀홀단신으로도 오지마을 부족들과 함께 어울리는 도시인들의 적응력을 자랑하며 범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았나. 카우치서핑이라는 것은 그런 여행의 체험을 '인터넷 플랫폼'이라는 제법 현실적이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누구나 참여하도록 돕는 도구였다.

 23살 노르웨이에서 체류하고 있었던 나는 그 카우치서핑을 통해서 유럽 전역의 다양한 대학생, 커플들, 독신주의자 여성의 집에 머무를 수 있었다. 인터네셔널 소통 방식, '영어'를 무기로, 그 즈음 23살이 궁금해 할 법한 사랑이나 인생에 대한 다양한 키워드를 나누면서도, 내가 살아보지 못한 문화권의 일상을 체험해보고 - 내가 낯선 환경 속에 얼마나 잘 적응하는 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카우치서핑은 내가 열어준 것이다. 깊은 의미에서 하나의 체험이 되는 계기말이다. '여행' 그 자체를 넘어, 인생 전체에 어떤 흔적이나 터닝포인트가 될만한 끓는점으로 가는 궤도였다.


헤세의 여행, 평생의 토대가 되다

뜨거운 거리를 피해 달아난 도시인에게 바닷가나 산 속의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해한다. 그는 더 신선한 기분을 느끼고 더 심호흡을 하며, 잠을 더 잘 잔다. 그리고 '자연'을 이제 제대로 즐기고 내부에 흡수했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귀향한다. 그런데 그는 그 자연으로부터 가장 피상적인 것, 가장 비본질적인 것만 받아들이고 이해했으며, 가장 좋은 것은 발견하지 못하고 길가에 놓아두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런 자는 보고 찾아내며 여행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  p42



내가 나름의 여행에 대한 의미를 세운 것이 카우치서핑(혹은 그 이전의 다양한 여행 경험들) 덕분이라면, 헤세의 책은 그 후기를 나눌 귀한 인물과의 조우가 될 만했다. 젊은날, 유럽 전역을 여자 혼자의 몸으로, 내가 살아보지 못했지만 마치 살아봄직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유럽 여행에서 내린 여행의 의미는 헤세가 책에서 보여준 그것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나는 덕분에 헤세가 보여주는 여행의 의미들, 현지의 어떤 체험과 테마로서 일생에 도움이 되는 시간을 가지라는 말들에 고개를 끄덕이고 지난 시간을 추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여행의 테마들이, 그의 문학에도 드러나 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렇다면 내가 여행에서 터득하고 숙달했던 현지의 노하우와 가르침들도 내 인생에 스며들고 있을까? 책을 보며 여행의 의미에 공감한 만큼, 내 일상과 인생 그리고 가치관에도 헤세가 문학으로 승화시킨 여행에서의 체험처럼 구체화 되고 있으리라 꿈꿔본다.



헤세를, 20대의 여행 메이트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랬다. 아름다운 별 빛이나 기타음악소리에 취하게 되는 순간은 잠깐이기 마련이고 그것은 매우 좋은 것이라고. 어쩌면 20대 초반에 유럽이나 동남아나 아프리카 같은 곳곳으로 여행하게 되는 꿈을 꾸는 것은 누구나 해봄직한 일이리라. 문학에 심취하는 것도 마찬가지짐나 말이다. 하지만 그 시간이 지나고 일상에 무뎌지게되면 문학과 친해지는 것도, 여행을 실천에 옮기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니 그렇게 일상에 익숙해지기 전에 헤세가 권하는 여행과 문학에 빠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여행의 시학은 일상적인 단조로움, 일과 분노로부터 휴식을 취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우연히 함께 하고, 다른 광경을 관찰하는 데에 있다. p.36



그 짧은 시절, 무언가에 흠뻑 취하고 오로지 그 안에서 사랑을 느끼는 시절에 세운 단단한 '체험'과 '감동'의 기록은 훗날 굉장한 예방주사가 되어주기도 하니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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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10 -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2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정여울을 좋아한다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미디어 아라크네'에서였다. 신문방송학과 전공학생이었던 나는 미디어 비평을 제법 세련되게 하는 일련의 글쟁이들을 좋아했다. 영화평론가 허지웅이라든가, 시니컬한 애티튜드만큼이나 섬세한 미학 칼럼들을 꾸준히 써온 진중권의 책들은 주변 학생들도 많이 읽어보며 문화 비평의 센스를 늘려가던 레퍼런스였다.


내가 정여울을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그녀의 책에서는 그녀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다. 대개 심드렁할 것 같은 그녀의 저자소개 사진을 보아서 그런 걸까, 그녀는 어딘가에서 몹시 화나거나 어떤 사상에 몹시 과민 반응한다거나 하는 대신 동시대인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하고 의문을 제기할 만한 사실을 부드럽게 서술한다. 적어도 미디어 아라크네는 그랬다.


그런 그녀에게 유럽이라면? 그러니까 어떤 지리적 공간, 거기서 사랑도 할 수 있고 맛집도 찾을 수 있고 사건 사고도 겪을 수 있다는 조건 하에서 - 그녀는 사실 그녀의 성품이나 감수성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욕구는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유럽은 얼마나 아름답고 부럽고 또 행복한 곳이었기에 - 자기만 알고 싶은 걸까?


나도 그런 유럽이 있다. 나는 노르웨이에서 1년을 살았다.


내게는 노르웨이에서의 1년이 그랬다. 사실 1년 중 3개월 정도는 해외에 나가있었으니 (잠깐 잠깐 씩) 1년 꽉 채워 있었다고 말하지 못한다해도 어쨌든 2011년 1월초부터, 2011년 연말까지- 나는 노르웨이에 있었다. 


노르웨이는 하나부터 열까지 내게 정말 낭만적인 나라였다. 여름이면 호수에서 누가 보든 말든 수영을하고, 겨울이면 동네 어귀에서 우리가 조깅을 하듯이 스키를 탄다. 자연에 동화되어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 것이 새삼 뭐 그리 몰랐냐는 듯이 노르웨이 사람들은 문명의 휩쓸려 소외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물론 나는 단편적인 것만 보고 노르웨이를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단기간의 여행이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1년 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그곳에 있으면서 - 그 모든 마음의 여유가 석유 덕분에 쌓인 나라의 넉넉한 재정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그 모든 자연에 대한 어울림이 혹독한 날씨를 극복해야 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 인의 투쟁으로부터 얻어낸 지혜였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굴지의 건축물이나 걸작으로 가득 찬 미술관은 우리가 지금 당장 가질 수 없지만, 광장의 문화, 골목길의 문화는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함께 누릴 수 있는 기쁨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p.91



그래서 나만 알고 싶은 어떤 '나라'가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막연한 여기 아닌 다른 어디에 대한 무한정 동경보다, 지금 내가 있는 곳에 대한 활력과 의미를 부여한다고 본다. 노르웨이에서 지낸 경험과 사색 덕분에 내가 한국에 돌아와 누리는 삶이 더 질적으로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르웨이 눈 밭을 비키니 입고 뛰어다니다 숲 속 사우나에 들어가보는 상쾌함이, 하늘에 펼쳐진 오로라를 보면서 삶에 감사하게 된 경이로움이, 노르웨이 남자를 만나 낯선 나라에 정착하면서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인으로부터의 새로운 발견이 - 내게 한국이라는 기존에 익숙했던 문화권에서 두려워하거나 어렵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했기 때문이다.


여행은 그렇다. 내가 오랫동안 머물러있던 곳의 사상과 통념들이 사실은 일정한 규칙에 불가하며, 지금 나와 다르게 살아도 전혀 문제 될게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한다. 또 여행은 그렇다. 내가 목말라하는 것들과 사랑하는 것들이 언제나 전혀 색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또 여행은 그렇다. 그래서 내가 언제 외롭고 행복하며 언제 비겁하며 언제 즐거운지 알게 하기에 - 원래 지내고 있던 곳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나의 맨 얼굴을 보며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늘 노르웨이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곳에서 내가 언제 외로웠고 언제 건강했고, 언제 용감했는지 늘 이야기한다. 그것은 끝나지 않는 자랑스러움이고 즐거움이다. 아마도 그래서 정여울은 '나만 알고 싶은 유럽'을 이렇게 길게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나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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