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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광안리 바닷가의 한 맥줏집에 있었습니다. 저녁 바다는 말을 걸고 싶어하는 전학생처럼 우리 발치까지 밀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더군요. (중략) 눈을 감고 옛일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내게 남은 인생과, 또 다음 광안리 바다를 볼 때까지 그 인생을 가득 채울, 하지만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p.31)
밤하늘의 별자리들은 언제나 거기 그대로 있는 것 같지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들이 그렇듯 언제나 그대로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늘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에게 잊힌 별자리들도 있습니다. 나중에 별자리들을 정리할 때, 그만 탈락한 비운의 별자리들이죠. 예를 들어 고양이 자리. 고양이를 무척 사랑한 랄랑드란 사람의 추천으로 만들어졌습니다만, 지금은 사라졌어요. (애묘인들은 복원 운동이라도 벌이시길.) (중략) 보이는 세상 뒤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p.68)
기자는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그 조용한 시골 마을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으나, 제대로 된 부대시설과 볼거리가 없어서 대부분 마을만 둘러보고 황급히 발길을 돌린다면서 대책이 시급하다고 진단하더군요. 옛 정취가 고스란히 보존됐다는 이유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마을에서 부대시설과 볼거리를 찾는 사람들이라니. 그렇게 고요하고 적적한 마을에 가서도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리지도 못하고 황급히 발길을 돌려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니. 경주 양동마을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대책을 마련하지 않아도 좋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대책이 시급한 것은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p.72)
또 몇백 년 전에는 큰 화재가 발생해 집들이 다 타버렸다는군요. 다음 날, 골목을 걸어가다가 건축 양식이 서로 다른 두 집이 빈틈없이 맞붙은 모습을 발견했어요. 두 집의 건축 시기는 몇백 년 차이 난다고 하더군요. 화재의 흔적. 그건 화재를 이겨낸 흔적이라는 뜻이더군요. 모든 상처가 그 고통을 이겨냈다는 걸 말하듯이. (p.109)
미안해요. 하지만 실수를 오랫동안 생각하는 건 제 버릇이랍니다. 반성하고 후회해서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놀라기 위해서. 동네를 산책하다가 잘못 들어선 길에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작은 공원을 발견하고는 놀랐던 지난해 여름처럼. 거기 그렇게 예쁜 공원이 있을 줄이야.... 그 공원 벤치에 앉아 어쩌면 실수가 지금의 나를 만든 건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할 때처럼. (p.115)
몸무게가 30g인 지느러미발좀도요는 캐나다 툰드라 지대에서 남아메리카 북부까지, 몸무게가 불과 5g인 붉은멱벌새는 미국 뉴햄프셔 숲 속에서 코스타리카까지 날아가고요. 철새들이 자기 몸으로 긋는이 세계의 경계란 이처럼 넓다고 해야할지, 좁다고 해야할지, 그렇다면 몸무게가 60kg이 넘는 나는 이 지구의 어디에서 어디까지 갈 수 있다는 건지. 갑자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요. (p.187)
인생은 놀이공원이야, 해볼 건 다 해보고 나가야지 본전을 건지는 거야. 우리는 자유이용권을 끊고 들어온 거예요. 그렇다면 그게 아무리 무서운 놀이기구라도, 또 아무리 오래 기다려야만 탈 수 있는 것이라도 다 타보고 나가는 게 좋겠어요. 막상 타보면 당장 토할 것처럼 어지럽기도 하고, 이제는 집에 가서 쉬고 싶을 만큼 지치기도 하겠지만, 아직 날이 저물려면 멀었고 놀이공원 안에는 안 타본 것들이 너무 많아요. 아마 집에 가면 푹 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놀이공원 안에 있는 동안에는 잘 놀다가 갑시다. 무려 자유이용권을 가졌다고 치자구요. 그게 너무 부담스럽다면, 빅 파이브로 바꿔드릴게요. 사는 동안 다섯 가지 정도 소원은 꼭 이루도록 합시다. (p.219)
* 책 정보
「우리가 보낸 순간 - 시」, 김연수,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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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연수가 경향신문에서 '시로 여는 아침'이라는 기획으로 연재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그가 좋아하는 시가 있고, 그 시를 읽고 난 뒤에 그가 하고 싶은 말들이 적혀있는 구성이다. 천천히 집중해서 참을성있게 읽지 않으면 도대체 김연수가 단행본에 수록한 시들이, 김연수가 나란히 늘어놓은 이야기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하지만 조금만 더 여유를 갖고 읽는다면, 김연수가 시를 읽고 왜 그런 생각을 떠올렸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서 독자가 어디서 공감해야할 지 알게 된다. 예컨대 소설가 김연수는 '눈을 깜빡일 때'라는 시를 읽고서, 눈을 깜빡이는 순간에 인생이 영겁처럼 스쳐지나갔고 앞으로도 스쳐지나갈 것 같지만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삶의 막연함이 느껴진다고 말할 줄 안다. (p.30 참고 ) 그리고 그런 모습은, 책 전반을 차지하고 있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행간의 의미가 드러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일 같다. 선택된 단어와 심사숙고하여 다듬어진 문장들 사이에서 시가 처음부터 드러내지 않았지만 점차 특정한 의미들은 독자가 찾아줄 수 있다. 따라서 시를 유익하게 읽고 싶은 이라면, 그것에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겠다. 그게 바로, 인내심이다. 빨리 지나치려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려하지 않는대신, 조금 느리게 읽고, 시어에 담아볼 수 있는 나만의 기억도 투영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점차 좁은 행간에 깊이 심어진 어떤 의미가 생겨난다. 삶을 시에 빗댈 수 있다면, 그것은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느날에는, 페이스북 담벼락에 누군가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라며 황인숙의 '강'이라는 시를 올렸다. 시를 한번, 두번, 세번을 읽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라고 말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서 조금 더 천천히 여러번 읽었다. 정성스럽게 쓰인 시 같기는 한데, 유명한 것도 같은데, 어찌 이것이 그대의 인생을 흔들었을까. 그녀에 대해서 생각했고, 혹시나 나도 누군가를 강물에 보내버리고 싶었던 적이 있었나 드문 드문 기억을 헤집어봤다. 나는 그런 시간들이 시의 행간, 여백, 함의와 생략들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시를 읽는 동안 조금 더 그녀를 인내심있게 바라보게 되었을까.
그래서 누군가는 시를 읽는 일을 참 사랑하는 것 같다. 시 읽기는 세상을 천천히 이해하고, 그 안에서 공감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준다. 비교적 적은 개수의 단어들이, 비교적 짧은 운율의 옷을 입고서 어떤 문양 처럼 한장의 종이를 장식하고있는데 그것의 의미를 기다려주고 헤아려주는 특별한 시간을 독자가 선물받는 것이다. 시를 읽는 일이 행간을 천천히 지나, 네 의미를 묻고, 내 의미를 묻어내는 것이라면 산다는 것도 그러하다. 글을 읽는 일도, 밥을 먹는 일도,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는 일도. 잠들기 전에 낮에는 이해 못한 네 말을 곱씹어보는 일도 그러하다.
끝으로, 이 책에 수록된 시는 아니지만 - 본 포스팅에서 언급되었던 황인숙의 시, '강'을 소개해본다.
강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시 속의 화자가 아무리 강으로 가라 소리친다하더라도,
나는 누군가의 행간을 읽어주고 싶다.
아무리 그대의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이 지긋지긋하다 해도.
하염없이 흐르는 강물을 두고 누군가와 눈도 마주칠 수 없다 하여도,
삶의 행간을 읽어주기 위해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고 싶다. 무심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인내심있게.
* 추천하기 전에
그러한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야한다. 다른 책에 비하면 소장가치가 높은 책은 아니지만, 김연수를 특별히 좋아하는 독자라면 「우리가 보낸 순간 - 소설」 과 함께 읽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