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 홀 1 -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
힐러리 맨틀 지음, 하윤숙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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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 소설이라 하면 대체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차원에서 쓰여지기 마련인데, 이 작품의 주인공인 토머스 크롭웰은 헨리 8세나 앤 불린, 또틑 울지 추기경이나 토머스 모어와 같은 인물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기에 책을 읽기에 앞서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펴본 내용에 의하면 토머스 크롬웰은 대단히 야심이 많은, 그리고 처세에 능한 인물로 그려져 있더군요. 

토머스 크롬웰의 초상화도 세 개 정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한결같이 탐욕스러워 보이고 야비해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아마도 당대의 유명한 초상화가인 홀바인이 그린 초상화도 그 가운데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책의 뒷 표지에 기록되어 있는 옵저버지의 소개에도 초상화 이야기가 나와 있더군요. "홀바인의 초상화에서 토머스 크롭웰은 엄격하고, 계산적이며, 무자비해 보인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그는 오히려 인간미 넘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이어지는 옵저버지의 소개는 이 소설을 정확하게 평가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맨틀은 이 소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속 인물을 삭제하고, 공식 기록에서는 말소되어버린 인간미 넘치는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냈다."

그런 점에서 맨틀이 그려낸 토머스 크롭웰은 역사 속에서 숨겨져 버린 실제의 인물을 그려낸 것일 수도 있지만, 반면에 역사적인 인물과 전혀 상관없는 가상의 인물을 그려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작가가 왜 그와 같은 모험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책을 읽다 보면 그와 같은 시도가 결코 헛된 모험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정치라는 세계에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야비함과 탐욕스러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러나 그들 중에는 원치 않는 가운데서도 살아남기 위해, 또는 자신의 삶에 충실하려다 보니 그와 같은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토머스 크롭웰과 같이 말입니다.

이 책에서 토머스 크롭웰은 자신의 가족들을 깊이 사랑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섬기던 추기경에 대해서 끝까지 의리를 지켰던 인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가 헨리 8세의 총애를 받게 된 것도 어쩌면 추기경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켰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헨리 8세가 울지 추기경에 대한 연민으로 인해 추기경의 오른팔이었던 그를 곁에 두고자 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헨리 8세의 선택을 받게 된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탁월한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대단한 기억력과 계산능력,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과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이 그로 하여금 헨리 8세의 총애를 받게 했던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그에 대하여 탐욕스럽다거나 야비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적대자들의 입장에서 내려진 평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섬기던 주인의 마음을 읽고 그가 원하는 말을 해 주는데 탁월하였을 뿐이며, 또한 주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최선을 다해 감당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권력자들은 누구라도 그를 곁에 두고 자기의 편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조건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손해를 보게 될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몰락한 추기경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추기경이 죽은 뒤에야 새로운 주인을 찾아나섭니다. 찾아나섰다기 보다는 새로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그 새로운 주인은 헨리 8세였고, 그 이후로 8년간 자신의 최선을 다해 그를 섬겼습니다. 그는 후에 헨리 8세와 독일 클레브의 공주 앤의 결혼을 주도했다가 그 일이 잘못되는 바람에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헨리 8세는 홀바인이 그린 앤의 초상화를 보고 그 모습에 반해서 데려왔는데 실물이 실제로는 너무 못생겨서 한 번도 동침하지 않고 내쳤다고 합니다. 그래도 독일과의 동맹관계를 생각해서 그녀와는 계속해서 우정을 나누는 관계로 남았다고 하는데, 그 결혼을 추진했던 토머스 크롬웰은 그 일로 헨리 8세의 미움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죽일 것까지 있을까 싶은데 사형에 처하고 말다니 헨리 8세도 보통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괄호 안의 내용은 소설 속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토머스 크롬웰이 마침내 헨리 8세가 바라마지 않던 캐더린과의 이혼을 성공시키고, 앤 불린을 왕비의 자리에 앉히는 데에서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울지 추기경 이후에 대법관이 된 토머스 모어의 몰락과 죽음에서 끝을 맺습니다. 토머스 모어가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그가 헨리 8세의 이혼에 끝까지 반대했기 때문인데, 사형을 위해 갖다 붙인 죄목은 반역이었습니다. 왕보다 교황을 더 따랐다는 것입니다. 울지 추기경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툭하면 반역이라는 죄목을 걸어 정적을 제거하려 들던 당시의 정계는 실로 목숨을 걸고 건너가는 살얼음판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 소설이 여기에서 끝을 맺는 것이 아님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토머스 크롬웰은 토머스 모어의 사형 뒤에 제인 시모어의 집인 '울프 홀'에 갈 계획을 메모하는데, 제인 시모어는 앤 불린에 이어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가 된 여인입니다. 그녀는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에서 그 누구보다 헨리 8세의 사랑을 받았던 왕비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후에 이어지게 될 소설의 내용은 토머스 크롬웰이 제인 시모어가 왕비가 되는 데에 있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1,000여 페이지가 넘는 내용이라 책이 두 권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분량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가독성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는데, 그렇다고 넘치게 낭비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조금 아쉽게 느껴졌던 것은 표지 디자인을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Wolf Hall에서 o자와 a 속에 들어가 있는 초상화 그림만 아니었어도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 같은데, o자에 넣어진 헨리 8세의 초상화 일부가 왠지 영국 사람이 아닌 중동 사람의 모습처럼 느껴지는 바람에 책의 이미지 전체를 망쳐 버린듯 했습니다. 나중에 인터넷을 뒤지다가 그 그림이 헨리 8세의 초상화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책 속에라도 초상화 전체의 그림을 실어 놓았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번째 장에서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갈 때 무언가 내용이 끊어진 듯하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도입부에서는 내용 이해를 위해 조금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첫 번째 장은 주인공이 고향을 떠나게 된 일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두 번째 장에서는 갑자기 추기경의 비서로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정말 부드럽고 매끄럽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가끔은 각 장의 내용이 시간적인 순서를 따르지 않고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는 일들도 있었는데, 그로 인해 벌어지는 혼동은 각 장의 제목 밑에 기록된 연도를 확인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어 가면서 잘 만들어진 대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깔끔하게 정제되어진 글투에서 작가의 필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문장이 단문이었는데, 깔끔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문장들이었습니다. 특히 상황을 묘사하는 저자의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적절한 비유를 통해 인물들의 얼굴 표정이나 기분 상태를 잘 묘사하고 있었고, 건물이나 거리의 풍경 또한 마음 속에 그려 볼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생소한 내용, 독자들이 잘 모를 것 같은 내용들을 난하주로 처리한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등장 인물이 다양한 데다 익숙하지 않은 영국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흐름을 쫓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깊은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작가가 그러낸 토머스 크롬웰이라는 인물에 깊이 빠져 들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자식들을 잃고 슬퍼하는 그의 모습에 깊으 연민을 느꼈고, 추기경의 몰락을 함께 하며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인생의 위기 앞에 선 중년의 고민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작가가 토머스 크롬웰을 슬퍼할 줄 아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남자로 그려 놓았던 점이 그를 악인으로 보기 어렵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역시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고, 그런 이유로 그의 이야기가 먼 옛날 어느 먼 나라에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조금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초에 읽었던 '소현'이라는 소설에서 느꼈던 것은 '글 맛'을 느낄 수 있었던 책이었기에 몇 번은 더 읽어 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세 네 번 정도 더 읽으면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숨겨진 의미들까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많은 소설들에 견주어 결코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 소설입니다. 별 여섯 개를 주고 싶은, 추천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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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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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통해 이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벌들의 악행이 알려진지 근 8개월정도가 지났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X파일이라는 형태로 그 내용들이 나돌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세하고도 적나라하게 밝혀진 것은 이 나라 역사에 있어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번에 조정래 작가님이 써 내신 허수아비춤이라는 소설도 어쩌면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와 같은 맥락에 서 있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 두 권의 책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동일한 신념과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이 나라의 경제구조가 재벌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뒤틀려지는 것에 대한 글로 쓰여진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수아비춤이 보여주는 재벌들의 어두운 단면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중심적인 얼개가 얼마 전 제 큰외삼촌을 통해 들었던 말씀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책도 읽을 만큼 읽었고, 신문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읽어 왔다는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대부분 마음 속에 품고 있을만한 이야기, 술이 한 잔 들어가면 속에 품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답답함과 함께 풀어 놓는 그런 류의 이야기라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흡입력으로 인해 이 책의 내용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들과는 조금 다르게 우리의 마음을 찔러 들어옵니다. 실제로 벌어진 듯한, 아니 지금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으로 인해 우리는 그들이 벌이고 있는 더러운 일들에 대해 더욱 더 역겹고 추하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작가가 전지적인 시점에서 들여다 보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은 더러운 탐욕과 지독한 경쟁심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 적나라한 느낌이 몸서리쳐 질 정도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태봉 그룹은 아마도 삼성을 모델로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몸답고 있는 일광 그룹은 어쩌면 모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기업일 수도, 아니면 LG나 현대를 모델로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소설에서는 일광 그룹이 태봉 그룹이 이미 가동하고 있는 '조직'을 벤치 마킹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이 적나라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묘사된 일들은 태봉 그룹에서 이미 다 벌였었던 일들입니다.

정부의 정보기관 간부를 직원으로 영입해서 그룹 내의 동향이나 사회 동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현직 검사를 채용해서 법조계에 대한 로비를 펼치고 하는 일들이, 이전에 태봉 그룹의 '조직'내에서 그와 같은 일들을 담당했던 박재우라는 인물을 통해 일광 그룹에서 다시 한 번 그대로 재현됩니다. 그리고 작가는 박재우의 후배이자 직속 부하였던 강기준이 사직서를 던지고 거상 그룹으로 옮겨가는 것으로 이 소설을 마무리함으로써 거상 그룹 역시 태봉 그룹과 일광 그롭에서 벌였던 그 일을 벤치 마킹하고자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태봉 그룹에서 시작된 그 모든 일들이 그 뒤를 따르는 모든 재벌들에 의해 끝없이 반복되고 재생산 될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나 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어떻게든 끊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작가의 바램이요,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불러 일으키고자 하는 공감이었을텐데,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 과연 이 문제가 우리의 힘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일까 하는 답답함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예전과 같이 군부 독재가 이루어진다면 과연 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와 같은 상황이 온다면 재벌은 더 큰 힘을 얻어 예전보다 더 무서운 일들을 저지르게 될 지도 모릅니다.

결국 작가가 허민이라는 극중 인물의 글을 통해 내비치는 것처럼 이러한 문제들은 의식이 깨어 있는 국민들의 불매운동 같은 소극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 작가가 내린 결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 어떤 국민이 그와 같이 부도덕한 문제들에 항의하기 위해 고장없고 사용하기에 편리한 좋은 제품을 거절하고 그보다 못한 제품을 구입해서 사용하겠는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부도덕한 재벌들에 맞설 만한 실력있고 정의로운 기업들이 많이 일어날 수 있도록 국민들이 후원하고, 또 스스로 그와 같은 기업을 일구고자 하는 기업인들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철수 연구소와 같은 건전한 기업 철학을 가진 기업들이 일어나도록 돕는 일들 말입니다.

결국 재벌들이 벌이는 이와 같은 불의한 일들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의식 개혁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하나의 입문서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입문서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교과서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경제 정의에 관한 많은 책들이 이미 시중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책들은 대부분 딱딱하고 건저하기 그지 없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통해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재벌들에 의한 심각한 경제 독재 상황에 많은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되기를 바라고, 또 그와 같이 깨어 난 사람들이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발견하고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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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바로보기 - 감추어진 유대인 2000년 역사를 찾아서
류모세 / 두란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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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이 '유대인 바로보기'라고 되어 있는데, 유대인을 비뚤어지게라도 본 적이 있어야 뭐라 말할 수 있을텐데,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하나 하나가 새로울 뿐이라 열심히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알고 있다 싶었던 부분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된 내용이나 히틀러 시대의 홀로코스트, 그리고 이스라엘 건국에 관한 내용 정도 였는데, 중세 시대나 종교개혁 시대에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서는 거의 캄캄할 정도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카톨릭 교도들이나 개신교도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핍박을 받았는지에 관한 내용을 보면서 안타까움과 동시에 분노를 느껴야 했습니다. 동일한 하나님을 섬기면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 치가 떨릴 뿐이었습니다. 교회 내에 있는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민도 없던 사람들이 단지 교회 밖에 있다고 해서 유대인들을 대하여 죽여도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교회가 얼마나 맘몬에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나 개신교 교회나 유대인들을 핍박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돈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는 것은 허울좋은 핑계일 뿐 결국 그들이 노렸던 것은 유대인들의 돈이었던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교부들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신념으로 인해 유대인들을 미워했다지만, 그 이후로 계속된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은 오직 돈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환영해서 자국에 뿌리내리게 했던 이유도 돈이었고, 그들을 자국에서 내쫓아 버렸던 이유도 바로 돈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증언을 살펴 보면서 교회가 맘몬에 사로잡힐 때 얼마나 무서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저자가 인용한 한 이스라엘 작가의 말이 마음에 비수같이 꽂혀왔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무서운 증오의 종교다. 모든 역사는 이 종교가 모든 면에서 완전히 파산했음을 끊임없이 증명해 주고 있다." 오늘날에도 개신교 내의 교파 간에 벌어지고 있는 다툼을 볼 때 이 말이 결코 근거없는 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과 교리가 다르면 이단이고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편협한 모습을 우리는 언제쯤 버릴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도왔던 노르웨이나 덴마크, 핀란드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기독교에 여전히 소망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히틀러의 위협 앞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유대인들을 탈출시키고 보호해 주었던 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신 사랑의 계명이 실천되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에필로그가 없었다면 아마 이 책은 유대인들에 대한 기독교 핍박사 정도에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메시아닉 유대인들의 교회에서 들은 설교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을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 지에 대해 성경적인 관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요셉을 예수님의 모형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요셉이나 예수님이나 모두가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자에 의해 은 몇 십개에 팔렸다는 점과, 또 요셉이 형제들에게 배척받은 뒤에 이방인의 총리가 된 것과 예수님이 동족에게 배척받은 뒤에 이방인들의 구주가 되셨다는 것 사이에서 상호간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요셉이 훗날 자기 형제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그들을 구원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시고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 주장합니다. 또 요셉을 아는 바로는 히브리인들을 선대했지만, 요셉을 모르는 바로는 히브리인들을 팝빅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바로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선대하지만,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핍박하기 마련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유대인들을 향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는 그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기를 위해 기도하며 그들을 선대하는 것이라는 점을 저자는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대충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유대인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저로서는 유대인들의 역사를 통해 그들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카톨릭과 개신교가 그들에게 저질러 온 범죄에 대해 알게 되었던 기회였으며, 또한 그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한 태도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해 오던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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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비밀
톰 녹스 지음, 서대경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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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그저 역사 추리 소설이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잔혹한 스릴러적 요소가 포함된 소설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소설은 각각의 두 장소에서 시작된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사건이 사실은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구조로 진행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 두 사건이 하나로 합쳐지는 시점이 상당히 뒷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가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느리게 전개되다 보니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도대체 언제쯤 이 사건들의 연관성이 드러나게 되는 거야 하는 답답함을 참을성 있게 달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기다림에 지친 지루함은 갑작스럽게 끝이 나고 언제 그랬나 싶게 빠른 전개가 펼쳐지면서 소설 속으로 깊이 빨려 들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앞부분에서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뒷 부분에 가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앞에서 잔혹한 스릴러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 소설 속에는 왠만한 스릴러 소설에 묘사된 연쇄살인들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모든 사건들이 오컬트적인 제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지 자신이 과거에 받았던 학대의 결과로 인해 벌어지는 불가항력적 살인이 아니라, 신의 만족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벌이는 살인(인신제사)이기에 더욱 더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미 예상하고 있었듯이 이 소설은 창세기의 기록을 신화로 보는 관점에서 내용을 풀어 나갑니다. 현생 인류가 순수한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기간토피테쿠스라는 종족과의 교배에 의해 태어난 새로운 인류이며 기간토피테쿠스가 가진 공격성과 폭력성이 인류에게 그대로 유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인신제사가 기간토피테쿠스의 성향을 물려받은 결과 인류 가운데 뿌리내리게 된 의식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간토피테쿠스는 인류와 유전자 구조가 다른 유인원류의 일종으로 판명되었고, 네안데르탈인 역시 크로마뇽인이나 호모 사피엔스와 유전자 구조가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가정한 북부인은 기간토피테쿠스일 수도 없고, 네안데르탈인일 수도 없습니다. 결국 이 소설의 내용은 사실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적인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 내용의 사실성이 결론부에서 완전히 흐지부지해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기간토피테쿠스 대신 지금은 멸종된 알려지지 않은 어떤 종족으로 묘사를 했다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용의 전개면에서는 사실적인 묘사가 상당히 뛰어난 소설이었습니다. 저자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쌓은 필력과 현지 답사를 통해 얻은 정확한 지역 정보들은 이 소설에 기록된 내용들이 모두 다 사실이며,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던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결론부에서 저자가 저지른 실수(과학적 근거라는 측면에 있어서)만 아니었다면,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이 소설이 말하는 창세기의 비밀을 진실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남긴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설사 내가 그런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일 뿐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정말로 그러한 성향이 숨어 있다 해도, 그것이 내 운명의 행로를 결정짓는 건 아니죠. 그러한 성향이 발현되려면 어떤 특정한 환경 조건이 마련돼야 하니까요.." 이처럼 저자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인간의 폭력성이 발현되는 것은 인간에게 대를 이어 내려오는 폭력성향의 유전자와 생존을 위해 처절히 몸부림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우리의 의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유전적 성향과 환경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는 의지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의지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원죄(소설이 말하고 있는 유전적인 폭력성)를 해결하려면 환경도, 의지도 아닌 외부의 초자연적인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류는 진작에 깨닫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시초부터 존재해온 다양한 종교들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과학적 근거가 미비하기 때문에 이 소설의 뼈대가 되는 가정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저자의 상상력에 대해서만큼은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재미를 위해서 읽는 소설이기 때문에 제가 앞에서 지적한 내용들 역시 그렇게 중요한 측면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내용의 구성이나 재미 면에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의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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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자
막심 샤탕 지음, 이원복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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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읽은 소설 중에 최고의 소설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로 별 여섯개를 주더라도 전혀 아깝지 않은 소설이었습니다. 범인이 누구일까 얼마나 궁금했던지 소설의 초반부에서부터 시작해서 소설이 끝나기 전까지 끊임없이 맨 뒷장을 들춰보고 싶다는 욕망과 싸우느라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매 장이 끝날 때마다 곧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드는 저자의 글솜씨는 기가 막힐 정도였습니다. 도저히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설은 전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한 군함에서 오컬트를 연상하게 할 만한 잔혹한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연쇄적인 살인. 그 범인을 쫓는 헌병대의 군수사관들, 이 사건에 이상할 정도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수사에 끼어드는 미모의 여간호사, 범인이 소속되어 있는 부대라 여겨지는 레이븐 중대 3소대, 이 여러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고 위협하고 공격하며 마침내 범인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여정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입니다.

소설을 읽어가는 내내 범인이 누구일까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생각했지만 끝까지 범인은 제 생각의 테두리 밖에 숨어 있었습니다. 크리미널 마인드와 같은 범죄심리관련 드러마를 즐겨 보아왔던터라, 극중 인물들의 정서를 쉽게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데에서 제 자신에 대해서는 실망했고 작가에 대해서는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아무런 개연성없는 사람을 데려다가 이 사람이 범인이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범인은 분명 군수사관들의 프로파일과 일치하는 사람이었는데, 저자가 피워놓은 연막이 너무나 훌륭해서 제 시선을 완벽하게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너무나 탁월해서 그들 모두에 대해 혹시 저 사람이 범인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저자는 등장인묻들의 내면에서 그와 같은 갈등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모두가 공감할만한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의 행동에 대한 공감을 훌륭하게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저자의 안내를 좇아 한걸음씩 나아가다 보면 누구의 마음 속에나 어두운 부분이 존재하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게 됩니다. 저자는 그 어두운 측면에 대한 감정을 누구에게 어떻게 발산하느냐에 따라 진짜 악인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어두운 측면에 대한 분노를 자신에게 쏟느냐, 아니면 타인에게 쏟느냐, 또 어느 정도의 선에서 멈출 것이냐가 우리로 하여금 인간으로 남아있게 해 주느냐 아니면 인간 아닌 어떤 것이 되게 해 주느냐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와 같은 어두움을 인식한 자들은 어찌보면 모두 다 불행한 사람들이고, 또 그 불행에서 벗어나기 이해 어떠한 선택이든 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소설 속의 범인과 같은 식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스스로에게 분노하여 스스로에게 벌을 주며 사는 편이 더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흠 잡을 것 없어 보이는 이 책에서 유익하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약탈자라는 책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서의 제목은 프랑스어로 프레데터스(predateurs)인데, 고어로 약탈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현대어로는 포식자(포식동물, 포식식물)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설의 내용 중에서는 포식자라는 이름으로 여러 차례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내용과도 전혀 연결되지 않는 약탈자라는 번역을 제목으로 삼다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소설의 내용에 중에서 발견되는 포식자라는 번역을 제목으로 삼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막심 샤탕이라는 저자가 무척이나 궁금해 졌습니다. 아마도 이 저자의 책은 발견하는 대로 무조건 읽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을 샤타미스트라고 한다더군요. 아마 저도 샤타미스트가 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을 느낍니다. 이 소설을 읽어 보니 제임스 패터슨의 스릴러 소설들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스릴러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정말 강력 추천하고 싶은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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