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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비밀
톰 녹스 지음, 서대경 옮김 / 레드박스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책을 읽기 시작할 때에는 그저 역사 추리 소설이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잔혹한 스릴러적 요소가 포함된 소설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소설은 각각의 두 장소에서 시작된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사건이 사실은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구조로 진행되어 갑니다. 그런데 그 두 사건이 하나로 합쳐지는 시점이 상당히 뒷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가 그 지점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느리게 전개되다 보니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 도대체 언제쯤 이 사건들의 연관성이 드러나게 되는 거야 하는 답답함을 참을성 있게 달래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기다림에 지친 지루함은 갑작스럽게 끝이 나고 언제 그랬나 싶게 빠른 전개가 펼쳐지면서 소설 속으로 깊이 빨려 들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앞부분에서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뒷 부분에 가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앞에서 잔혹한 스릴러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했는데, 이 소설 속에는 왠만한 스릴러 소설에 묘사된 연쇄살인들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그 사건들이 다른 사건들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그 모든 사건들이 오컬트적인 제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지 자신이 과거에 받았던 학대의 결과로 인해 벌어지는 불가항력적 살인이 아니라, 신의 만족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벌이는 살인(인신제사)이기에 더욱 더 끔찍하게 느껴집니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이미 예상하고 있었듯이 이 소설은 창세기의 기록을 신화로 보는 관점에서 내용을 풀어 나갑니다. 현생 인류가 순수한 호모 사피엔스가 아니라 기간토피테쿠스라는 종족과의 교배에 의해 태어난 새로운 인류이며 기간토피테쿠스가 가진 공격성과 폭력성이 인류에게 그대로 유전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인신제사가 기간토피테쿠스의 성향을 물려받은 결과 인류 가운데 뿌리내리게 된 의식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과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기간토피테쿠스는 인류와 유전자 구조가 다른 유인원류의 일종으로 판명되었고, 네안데르탈인 역시 크로마뇽인이나 호모 사피엔스와 유전자 구조가 다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자가 가정한 북부인은 기간토피테쿠스일 수도 없고, 네안데르탈인일 수도 없습니다. 결국 이 소설의 내용은 사실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적인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소설 내용의 사실성이 결론부에서 완전히 흐지부지해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차라리 기간토피테쿠스 대신 지금은 멸종된 알려지지 않은 어떤 종족으로 묘사를 했다면 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론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용의 전개면에서는 사실적인 묘사가 상당히 뛰어난 소설이었습니다. 저자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쌓은 필력과 현지 답사를 통해 얻은 정확한 지역 정보들은 이 소설에 기록된 내용들이 모두 다 사실이며,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던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해 줍니다. 그런 점에서 결론부에서 저자가 저지른 실수(과학적 근거라는 측면에 있어서)만 아니었다면,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은 이 소설이 말하는 창세기의 비밀을 진실이라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남긴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하지만, 설사 내가 그런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아들일 뿐 아니라 어머니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정말로 그러한 성향이 숨어 있다 해도, 그것이 내 운명의 행로를 결정짓는 건 아니죠. 그러한 성향이 발현되려면 어떤 특정한 환경 조건이 마련돼야 하니까요.." 이처럼 저자는 주인공의 입을 빌어 인간의 폭력성이 발현되는 것은 인간에게 대를 이어 내려오는 폭력성향의 유전자와 생존을 위해 처절히 몸부림쳐야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정말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우리의 의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유전적 성향과 환경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있는 의지라는 존재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의지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원죄(소설이 말하고 있는 유전적인 폭력성)를 해결하려면 환경도, 의지도 아닌 외부의 초자연적인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류는 진작에 깨닫고 있었습니다. 인류의 시초부터 존재해온 다양한 종교들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과학적 근거가 미비하기 때문에 이 소설의 뼈대가 되는 가정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저자의 상상력에 대해서만큼은 나름대로 괜찮은 수준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재미를 위해서 읽는 소설이기 때문에 제가 앞에서 지적한 내용들 역시 그렇게 중요한 측면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적어도 내용의 구성이나 재미 면에서는 만족할 만한 수준의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