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타잔
정재환 지음 / 하다(HadA)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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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고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읽기 시작한 책인데, 기대했던 이상으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00여 페이지 정도되는 책인데 재미있게 술술 읽어져서 몇 시간이 안 걸려 다 읽어 버렸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학교에서 춤으로 날리더니, 중학교 때에는 일진회 회원이 되었다가, 고등학교 때는 전교회장까지 지낸 독특한 이력으로부터 시작해서, 호텔 서비스맨 아르바이트, 건설현장 노가다, 가락동 수산시장에서의 아이스크림 판매, 나이트 클럽의 관리 부장, 출판사의 박스 포장 아르바이트에서 교정 아르바이트, 수영장 안전관리요원, 파티 기획사 팀장까지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일을 하면서 자신의 젊음을 의미있게 보내고자 최선을 다하며 지내온 저자의 모습을 보며 지나간 젊은 세월을 다시 돌려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왜 나는 저렇게 진취적인 태도로 청년기를 보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자가 배울 것이 있을 만한 장소와 사람을 찾아다니며 인맥을 넓히고 견문을 넓히려 노력했던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유명 기업인들의 강연이 있는 곳에 찾아가 그들의 강연을 들으며 자신의 미래를 준비했던 모습이나 한국 땅에서 얻기 어려운 기회를 얻고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가서 세상을 보는 눈을 키우고자 노력했던 모습은 다른 젊은이들에게도 반드시 따라해 보라고 권해 주고 싶은 모습이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우리 아들에게도 이 책을 꼭 읽어보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결정하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아들이기에 든든한 마음도 있지만, 저를 닮아서 그런지 안전한 길로만 가고자 하는 모습이 보여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적극적인 성격을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 적극적인 태도로 세상과 부딪치는 일의 매력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기의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권해 주면 좋을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딸은 모르겠지만 아들이라면 확실히 권해 줄만한 책입니다.) 중고등학교의 도서관이나 학급문고에 비치해 두고 필독서로 읽히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은(읽기 쉽고, 재밌고, 유익하다는 점에서) 책이었습니다.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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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하나님의 격려 한마디 365 매일 아침 365 시리즈 4
찰스 H. 스펄전 지음, 장남혁.심광수 옮김 / 두란노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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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복주의적인 신앙에 대한 반발감 때문에 한동안 고난의 복음을 중심으로 설교하다 보니 성도들은 물론이고 저 자신도 약간은 힘이 빠지는 듯한 느낌을 받던 차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손에 쥐어지는 아담한 사이즈에 고급스러운 장정, 그리고 깔끔한 디자인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날마다 한 페이지씩 읽어 가며 묵상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매일에 해당되는 성경 한 구절과 그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 잘 연결 되어 있어서 말씀의 의미를 쉽게 이해하고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번역도 매끄러워 읽어 가면서 거슬리는 점을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책의 뒷쪽을 보니 주제별 색인도 있고, 날짜별 읽기표도 있었는데, 주제별 색인의 경우는 설교자들이 심방 설교를 할 때에 매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전 읽은 책에서 찰스 스펄전 목사님께서 때때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셨다는 글을 읽은 바 있습니다. 정성욱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으로 기억하는데, 그 글을 읽고 나서 이 책을 보니, 이 책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위로의 메세지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욥기 13:15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을 설교한 내용을 통해서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는데, 스펄전 목사님은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설교ㅏ고 계셨습니다. "욥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의 쓰사린 마음과 괴로운 영혼을 느껴 보십시오. 슬픔이 땅바닥으로 내친다면 땅바닥에서 예배드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속마음으로 털어 놓으십시오.. 하나님의 의지에 완전히 항복하여 욥처럼 외치십시오.." 이 글을 읽으면서 스펄전 목사님이 우울증에 사로잡힐 때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갔을지 마음에 그려졌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외에 수많은 성경 구절들을 통해 하나님의 위로의 메세지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계셨는데,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은혜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성경 구절과 설교의 내용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 부분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좀 이상하다 싶은 느낌이 들어 계속 읽어 보고 또 읽어 보고 결국에는 성경의 내용을 영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을 설교한 내용의 제목을 천국으로 이끄는 아이들이라고 잡고, 어린 자녀들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된 부모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여러 차례 읽어 본 뒤에야 성경 본문에 나오는 송아지와 어린 사자, 살진 짐승을 어린아이의 부모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설교문 전체를 읽어 가는 중이었다면 쉽게 이해할 수있었을텐데 설교 내용의 일부를 잘라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가끔씩 이렇게 이해하기 쉽지 않은 본문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 본문과 완전히 상관없이 따로 노는 내용은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설교의 대가인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문을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얼토당토 않은 해석을 하셨을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본문을 읽고 또 읽어 보면 결국에는 그 본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더군요.

힘겨운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가볍게 넘어가지 않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묵상하고 또 묵상한다면 스펄전 목사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었던 놀라운 은혜와 위로를 경험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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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열리는 영적전쟁 - 누구와 무엇으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적 답변
탐 마샬 지음, 유정희 옮김 / 예수전도단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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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어났던 봉은사에서의 땅밟기 기도 사건을 통해 과연 올바른 영적 전쟁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YWAM의 대표적인 강사인 탐 마샬에 의해 쓰여진 영적 전쟁에 관한 책이 나온 것을 보면서 꼭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책이었다는 점을 먼저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딘 셔먼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전쟁'처럼 영적전쟁에 관한 개념들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을 줄 알았었는데, 그러한 저의 생각과는 달리 대학교재나 강의안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었습니다.

정사각형에 가까운(가로로 넓은) 판형에 책의 본문은 일반 도서의 넓이로 되어 있고, 그 옆쪽으로 관련 성경 구절이 기록되어 있더군요. '성경으로 열리는'이라는 책 제목에 어울리게 성경 본문을 중심으로 모든 개념을 풀어 가려는 시도가 돋보였고, 또 관련 성경 구절들까지 옆에 기록해 줌으로써 저자의 주장에 신뢰를 더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관련 구절들이 내용 본문에서 괄호안에 소개하고 있는 성경 구절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지는 않았고, 개중에는 정말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본문을 건너 뛴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점이 정말 아쉽게 생각되었습니다.

특별히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은 2장에 수록된 '도시와 구조적 권력'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도시라는 것이 마치 인격체와 같이 권력을 소유할 수도, 그리고 타락할 수도 있다는 설명은 상당히 신선하고도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도시를 구속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7장의 내용도 상당히 좋았던 부분이었습니다. 저자는 이 장에서 조직의 배후에 있는 마귀의 세력에 대한 영적 전쟁과, 구조적 권력 안에 있는 영향력에 대한 구속의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들어 설명한 느헤미야의 예는 상당히 도전적인 내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자는 도시를 구속하기 위해 '도시를 돌보고(사랑하고), 도시를 위해 기도하고, 도시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도시에 서 살고, 도시를 알고, 운동을 시작하고, 운동의 성장을 촉진하고, 목표를 반복하고 보강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운동을 시작하라는 주장이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저자는 문화나 조직 생활의 철저한 변화는 항상 어떤 '운동'에 의해 성취된다고 설명하면서, 그 운동에는 바라는 변화를 가져 오겠다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고, 적은 수일지라도 헌신된 사람들이 모여서 운동을 시작하면 탄력이 붙기 마련이고, 느헤미야가 한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핵심 인물들이 문제에 직면하게 만들고,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을 그들이 품게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상당히 유익한 내용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상당히 실천적이고 실제적인 내용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2부(9~14장)에 기록된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한 자를 결박하는 방법이라던가 믿는 자의 권위, 성령의 능력 등은 매우 유익한 내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전쟁에 관한 다른 책들의 내용과 거의 겹치는 내용이라 생각되기도 하였지만, 성경적인 근거들을 자세하게 살명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읽어 가면서 동의하기 어려웠던 부분도 간혹 있었습니다. 25쪽에 기록된 사탄에 대한 설명이 가장 대표적인 내용이었습니다. "타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탄은 기름부음을 받았다. 즉 성령을 받았다. 따라서 그가 죄를 지었을 때는 기름부음을 거스르는 죄를 범한 것이다. 그의 죄는 성령을 거스른, 용서받지 못할 죄였다." 그리고 관련 구절로 막3:29(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 하시니)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순수한 영적 존재인 천사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사탄이 성령을 훼방하였기 때문에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라면 충분히 동의할 수 있지만, 타락 이전의 사탄이(사실은 어떤 천사를 막론하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상태였다는 표현은 충분한 근거가 확보되지 않은, 동의하기 어려운 추론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6쪽에 기록된 타락한 천사의 무리에 대한 설명 역시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습니다. 저자는 골로새서 1:16을 근거로 세상 주권자들, 이 시대의 통치자들, 권세자들, 지배자들, 통치자들을 구분하고 이에 대해 지정학적, 지리적, 지역적인 권세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고, 또 에베소서 6:12을 근거로 주권들, 권세자들, 통치자들,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구분하고 이에 대해 세력 범위를 다스리는 권세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이 각각 어느 구절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연결지어 놓지 않아서 처음에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구분했는가 하는 혼란스러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타락한 천사를 지칭하는 각각의 이름들 옆에 헬라어 이름을 붙여 놓고 있었는데, 그 헬라어 원어 이름을 기록해 놓은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근거 구절의 헬라어 본문도 함께 올려 주었어야 하는데, 그러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게다가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98쪽에서는 주권, 권세자, 통치자만을 기록하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해서는 누락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편집상의 실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123-124쪽에 기록되어 있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설명은 한편으로는 맞는 것 같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성령의 능력은 에너지의 흐름이나 힘의 장 같은 것이 아니라면서,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은 한 인격이시며, 그분의 능력은 인격적인 존재의 능력이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계신 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성령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예수님께 능력과 권세를 얻어 둘씩 짝지어 전도하러 나갔던 제자들에게도 과연 성령이 함께 하셨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고, 그렇다면 성령께서 가룟 유다와도 함께 하셨다는 말인가 라는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깊이 연구해 보아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영적전쟁이라는 영억이 워낙 생소하고 연구가 부족한 영역이다 보니 조직신학의 성령론에서와 같이 많은 논란의 여지가 많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래도 이 정도 수준의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전쟁에 관해 강의를 준비하고 계신 분이라면 이 책을 참고하시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영적 전쟁과 관련된 수많은 성경 구절들을 통해 영적 전쟁의 성경적인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인가 매끄럽지 않은 듯한 전개와 부족하게 느껴지는 설명이 아쉬움을 남깁니다. 영적 전쟁에 관해 더 깊이 알고 싶은 분은 이 책과 함께 딘 셔먼의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 전쟁'이라는 책을 함께 읽어 보시기를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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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 남자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
톰 데이비스.태미 몰트비 지음, 최종훈 옮김 / 포이에마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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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런 종류의 책을 좀 읽어 본 바 있기 때문에 중간 정도 읽어 가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점에서 임시로 정해 본 리뷰 제목은 "탁월한 도입, 적절한 전개, 아쉬운 마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마지막 장에서 다루어 준 내용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던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이 책은 '신실한 남자라면 이러지 않을텐데' 싶은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로워하는 남성들을 위해 쓰여진 책입니다. 각 장의 도입부에서는 남성이라면 대부분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고민들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내 이야기, 또는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남성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자가 알고 있는 어떤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남자의 이야기는 그 주제에 있어서 가장 적절한 예라고 생각될 정도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그 장의 주제에 빨려 들어간 독자들에게 이번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비슷한 사례의 인물을 소개합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소개한 그 남성이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헤쳐 나올 수 있었는지에 대해 소개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통해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던 독자들은 문제 해결에 대한 소망을 얻게 됩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음욕, 교만, 탐욕, 부자관계, 알콜중독, 부적절한 감정처리(두려움에 대한 두 가지 반응), 분노, 절망 등 여덟 가지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과 연관되어 있는 성경인물로 저자는 삼손, 느부갓네살, 사울, 다윗, 노아, 베드로와 요나, (다시) 사울, 야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사울을 탐욕과 연결지어 소개한 것은 참 신선한 시도였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사울을 불순종이나 교만을 대표하는 인물로만 생각했지 탐욕과 연결지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저자의 글을 읽다 보니 저자가 사울을 정확하게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적절한 감정처리에 관련된 인물로 베드로와 요나를 든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베드로야 원래 혈기방장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니 그렇다 치고, 요나는 왜일까 싶었는데, 저자는 베드로나 요나의 반응을 모두 다 두려움에 뿌리를 둔 반응으로 해석하고 있더군요. 충분히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저자는 요나에 대해 갈등 상황에 부딪쳤을 때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숨어버리는 남자의 대표적인 예로 설명하고 있었는데 아주 적절한 연결이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9장과 10장이 가장 좋았습니다. 만약 이 두 장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제게 있어서 그저 그런 책으로 기억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8장까지의 내용이 별로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어느 정도 이미 알고 있던 종류의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9장에서 소개된 조이라는 남자의 경험은 제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조이의 아내는 결혼한지 3개월 만에 큰 병을 얻어 결혼 생활 20년 중 6년 가까이를 병원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한동안은 특수한 치료를 받기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전문 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는데, 주말마다 비행기를 타고 아내가 입원한 병원으로 날아가기를 몇 달씩 계속해야 했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천문학적인 입원비를 의료보험으로 감당할 수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 마저도 끝나버린 상황이었습니다. 남은 길은 집을 팔고 적금을 해약해서 병원비를 충당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을 겪어온 자신을 향해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그가 하나님을 만난 것은 영화관에서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고 있을 때였다고 합니다. 그는 배의 침몰과 함께 물에 빠져 들어가는 남성들을 보면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속상한 마음에 눈물을 터뜨렸는데, 그 와중에 그는 불현듯 자신에게 소망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통해 그는 하나님께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말마따나 신령한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조이의 경험을 야곱의 얍복강가에서의 경험과 연결짓고 있습니다. 결국 절망 가운데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빠져 나올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9장의 결론은 10장으로 넘어가 이 책 전체의 결론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는 조이가 경험했던 것처럼 신령한 체험으로만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에 들어오는 통로로 다른 신실한 동역자들의 도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부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숨기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이 여기에서 부각됩니다. 동시에 그러한 문제가 드러났을 때 주변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마땅한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부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그를 외면하고 멀리할 것인가, 아니면 가까이 다가가 도울 것인가.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들은 돕는 것이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찾아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 때밀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의 도구로 사용해 그들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저자는 또한 이러한 은혜를 얻기 위해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을 이야기합니다. 현실에 절망하여 그대로 있으면 변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직 끊임없이 자신의 문제와 싸우는 사람만이 새로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나의 싸움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것을 저자는 강조합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누군가를 교정하거나 그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다..  그건 모두 하나님의 몫이며 그분은 그 일들을 멋지게 해내신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책임지는 분은 주님뿐이다.. 롤로코스터처럼 요동치는 세상에서 보살펴 주시는 분 역시 하나님 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자는 그 일이 생각보다 간단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일견 복잡하다는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것만큼은 저자의 실수라고 생각됩니다. 저자는 그 대답을 오직 한 문장으로 끝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자를 대신해 제가 그 일을 해야 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끝까지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저자의 주장에 '아멘'이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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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의 심리학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15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황 스데반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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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왜 이 책에 '구속의 심리학'이라는 제목이 붙어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백금산 목사님의 "교리 공부가 즐거운 4가지 이유와 3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도 기독교 교리에서의 '구원론'과 세계관에서의 '기독교 심리학'을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심리학'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다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하였습니다.

[심리학 : 생물체의 의식과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 심리학을 어원상으로 보면 사이키(psyche)의 학문이라는 말로, 즉 ‘마음의 학문’이라는 뜻이 되지만 그렇다고 심리학을 마음의 학문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심리학이 연구대상으로 삼는 ‘마음’이라는 것은 다의적()인 동시에 다차원적()이기 때문에 이 마음의 어떤 측면, 어떤 차원을 대상으로 삼는가에 대해서는 시대적으로도 입장과 학파에 따라 차이가 있고, 각 학파나 시대에서 제기하는 정의라는 것 또한 꼭 같지는 않다. 예컨대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마음의 탐구는 전적으로 마음을 구성하는 실체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이른바 영혼심리학이었고, 근세 이후 경험적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부터는 우선 마음의 경험적 측면인 ‘의식’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의식심리학이 대세를 차지했는데, 그것과는 대립되는 심적 작용()의 연구가 심리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작용심리학도 출현하였다. [출처] 심리학 [心理學, psychology ] | 네이버 백과사전]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기독교의 '구원론'이 '심리학'이라는 학문과 접촉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심리학'이 바로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 점에서 '구속의 심리학'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인간의 영혼과의 상관성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제목으로부터 유추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인간의 영혼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가 계속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위로부터', 또는 '외부로부터'라는 단어입니다. 저자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것은 '내부로부터',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오직' 외부로부터 주어진 새로운 생명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태어나게 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외부로부터 인류에게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날 때 주의 생명은 외부로부터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17쪽)." "외부에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처럼, 주님은 외부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다(42쪽)."

그리고 저자는 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사셨던 그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오직 주님의 십자가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중생할 때 주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옴으로써 그 생명에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주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150쪽)." 

그러면 왜 주의 십자가가 주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까? 그것은 바로 주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죽여야, 우리 안에 주의 생명이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죄가 죽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이 죽어야 한다(153쪽)." 저자의 이러한 설명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거듭난 자로서, 주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왜 자신의 내면에 죄가 머무르게 놓아 두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저자가 성결교단의 목회자로서 '완전 성결'에 대해 말할 때 장로교인인 저로서는 조금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계속해서 접하다 보니 그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저자는 '완전 성결'의 의미를 '새출생의 체험'으로 설명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구속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새출생 이후의 삶은 매우 단순한 특성을 지닌다면서 그 특징을 모두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명하는 새 출생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특징 -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된다.
두 번째 특징 -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로 여기게 된다.
세 번째 특징 -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보게 된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게 된다.)
네 번째 특징 - 죄 짓기를 멈춘다.
다섯 번째 특징 -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에 순종한다.

특히 네 번째 특징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교리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명하시는 체험의 문제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이 효과적으로 활동하면,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 즉,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죄를 멈추게 만드는 훨씬 더 실제적인 효력이 나타난다. 새출생의 체험, 곧 완전 성결로 우리는 죄를 그칠 수 있다. 새로운 영역으로 태어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태어난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죄를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불가능의 뜻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순종할 때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51-52쪽).."

이러한 저자의 설명을 듣다 보면, 과연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 얼마나 되는 신앙인들이 새출생을 경험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저 자신에 대하여 죄 지을 필요가 없는데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를 중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왜 계속해서 죄를 지을까'라는 이 질문에 대해 저는 바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이 책의 6장의 내용을 통해 얻은 결론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기는 권세'를 주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혹을 받을 때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하지 앟고 '예수님께로 가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께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것이라'고 한다(92쪽)." 

그리고 저는 주님께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기도'라고 보았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든, 죄악으로부터의 구원이든, 유혹으로부터의 구원이든, 모든 구원은 주님을 통해 이루어지며, 결국 주님께 구원을 부르짖는 자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물론 주님의 주권적인 은헤로 부르짖음 없이도 구원을 얻는 자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의 중보기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자들도 있겠지만, 구원은 기본적으로 구원을 위해 부르짖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자가 구속의 과정에 있어서 최종적인 목표를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이 성장해서 열매맺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주의 놀라운 구속에 의해 우리 안에 형성되었으며, 이 형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현실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때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 또한 주님의 사역이며, 우리가 기도함으로 받는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 역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발생한 것이라면, 우리는 친구들이 거듭나는 자리에 이를 때까지 밤낮으로 기도하게 될 것이다(210장)."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변화가 자신에게 먼저 일어나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도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라고 할 때, 우리의 거룩 또한 기도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저자가 책의 중간 중간에서 '기도하라'고, '주님께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을 자신의 구원이나 거룩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서로의 상관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분명하게 직설적으로 '구원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거나, '거룩하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러한 상관 관계를 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이 강의를 했으리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책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이러한 상관 관계를 발견하게 된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가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과 '인자'라는 개념을 구분해서 말하는 데에는 약간의 생소함과 이상함이 느껴졌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논리적인 측면에서 그와 같은 구분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7장에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베다니에서 승천하신 것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정말 탁월한 설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8장에서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은 것이 아버지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가 아니었다는 설명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이러한 절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로서 부르짖은 것이라고 것이 바로 저자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깊은 묵상에서 우러나오는 신선한 해석들은 가끔은 위험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신실함에 대한 신뢰로 인해 우리는 그러한 위험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그렇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법을 그로부터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 또한 우리에게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법을 우리에게 일러 주고 있습니다. 아니,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할 필요를 가르쳐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 중에서 '산상수훈'에 이어 두 번째로 좋았던 책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주님은 나의 최고봉'까지 포함한다면 세 번째 자리에 놓아야 하겠지요. 제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얼마전 읽었던 '오스뢍드 챔버스의 기도'나,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죄의 철학'보다는 더 좋았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구원, 그리고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는 분들에게 커다란 유익을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천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이 왜 어렵게 느껴지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글은 설교를 옮겨 놓은 것이라서 그런지 접속사가 중간 중간에 많이 생력되어 있습니다. 회중석에 앉아서 이 강의 내용을 직접 듣고 있었다면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었겠지만 책으로 읽을 때에는 접속사의 생략이 문맥을 많이 끊어 놓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을 읽다 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 고리가 가끔씩 사라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부분을 감안해서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어색한 곳에는 독자가 직접 어울리는 접속사를 찾아 넣어가며 읽는다면, 저자의 책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오타는 두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84쪽의 세째줄에서 네째줄로 넘어갈 때 '주님께게'에서 '게'자가 잘못 들어갔습니다. 186쪽의 세째줄에 기록된 '성경'은 '성령'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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