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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의 심리학 ㅣ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15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황 스데반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왜 이 책에 '구속의 심리학'이라는 제목이 붙어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백금산 목사님의 "교리 공부가 즐거운 4가지 이유와 3가지 방법'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에서도 기독교 교리에서의 '구원론'과 세계관에서의 '기독교 심리학'을 연관지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심리학'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다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발견하였습니다.
[심리학 : 생물체의 의식과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 심리학을 어원상으로 보면 사이키(psyche)의 학문이라는 말로, 즉 ‘마음의 학문’이라는 뜻이 되지만 그렇다고 심리학을 마음의 학문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심리학이 연구대상으로 삼는 ‘마음’이라는 것은 다의적(多義的)인 동시에 다차원적(多次元的)이기 때문에 이 마음의 어떤 측면, 어떤 차원을 대상으로 삼는가에 대해서는 시대적으로도 입장과 학파에 따라 차이가 있고, 각 학파나 시대에서 제기하는 정의라는 것 또한 꼭 같지는 않다. 예컨대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마음의 탐구는 전적으로 마음을 구성하는 실체는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이른바 영혼심리학이었고, 근세 이후 경험적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부터는 우선 마음의 경험적 측면인 ‘의식’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의식심리학이 대세를 차지했는데, 그것과는 대립되는 심적 작용(心的作用)의 연구가 심리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작용심리학도 출현하였다. [출처] 심리학 [心理學, psychology ] | 네이버 백과사전]
이러한 자료를 통해서 기독교의 '구원론'이 '심리학'이라는 학문과 접촉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심리학'이 바로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 점에서 '구속의 심리학'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인간의 영혼과의 상관성을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사실을 제목으로부터 유추해 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인간의 영혼에 일어난 변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가 계속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위로부터', 또는 '외부로부터'라는 단어입니다. 저자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것은 '내부로부터', 그리고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오직' 외부로부터 주어진 새로운 생명이 그 사람의 마음 속에 태어나게 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외부로부터 인류에게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우리가 거듭날 때 주의 생명은 외부로부터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17쪽)." "외부에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신 것처럼, 주님은 외부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신다(42쪽)."
그리고 저자는 주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서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이 사셨던 그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오직 주님의 십자가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중생할 때 주의 생명이 우리에게 들어옴으로써 그 생명에 들어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주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다(150쪽)."
그러면 왜 주의 십자가가 주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됩니까? 그것은 바로 주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죽여야, 우리 안에 주의 생명이 머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죄가 죽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이 죽어야 한다(153쪽)." 저자의 이러한 설명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거듭난 자로서, 주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서 왜 자신의 내면에 죄가 머무르게 놓아 두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확실히 깨닫게 됩니다.
저자가 성결교단의 목회자로서 '완전 성결'에 대해 말할 때 장로교인인 저로서는 조금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계속해서 접하다 보니 그래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저자는 '완전 성결'의 의미를 '새출생의 체험'으로 설명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구속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새출생 이후의 삶은 매우 단순한 특성을 지닌다면서 그 특징을 모두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설명하는 새 출생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특징 -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된다.
두 번째 특징 -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로 여기게 된다.
세 번째 특징 -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보게 된다. (그래서 염려하지 않게 된다.)
네 번째 특징 - 죄 짓기를 멈춘다.
다섯 번째 특징 -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모든 것에 순종한다.
특히 네 번째 특징에 대한 설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교리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이 명하시는 체험의 문제이다.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이 효과적으로 활동하면,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 즉, 죄를 짓지 않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죄를 멈추게 만드는 훨씬 더 실제적인 효력이 나타난다. 새출생의 체험, 곧 완전 성결로 우리는 죄를 그칠 수 있다. 새로운 영역으로 태어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태어난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은 죄를 지을 수 없다. 이 말은 우리가 죄를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불가능의 뜻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순종할 때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51-52쪽).."
이러한 저자의 설명을 듣다 보면, 과연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 얼마나 되는 신앙인들이 새출생을 경험했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저 자신에 대하여 죄 지을 필요가 없는데 여전히 죄를 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를 중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왜 계속해서 죄를 지을까'라는 이 질문에 대해 저는 바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이 책의 6장의 내용을 통해 얻은 결론입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이기는 권세'를 주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유혹을 받을 때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하지 앟고 '예수님께로 가라'고 말한다. 그러면 주께서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것이라'고 한다(92쪽)."
그리고 저는 주님께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기도'라고 보았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이든, 죄악으로부터의 구원이든, 유혹으로부터의 구원이든, 모든 구원은 주님을 통해 이루어지며, 결국 주님께 구원을 부르짖는 자만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물론 주님의 주권적인 은헤로 부르짖음 없이도 구원을 얻는 자가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의 중보기도를 통해 구원을 얻는 자들도 있겠지만, 구원은 기본적으로 구원을 위해 부르짖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저자가 구속의 과정에 있어서 최종적인 목표를 우리 안에 있는 새 생명이 성장해서 열매맺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주의 놀라운 구속에 의해 우리 안에 형성되었으며, 이 형상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의 거룩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현실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은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 때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 또한 주님의 사역이며, 우리가 기도함으로 받는 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 역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발생한 것이라면, 우리는 친구들이 거듭나는 자리에 이를 때까지 밤낮으로 기도하게 될 것이다(210장)."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변화가 자신에게 먼저 일어나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도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라고 할 때, 우리의 거룩 또한 기도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저자가 책의 중간 중간에서 '기도하라'고, '주님께 나아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을 자신의 구원이나 거룩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서로의 상관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좀 더 분명하게 직설적으로 '구원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거나, '거룩하기 위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러한 상관 관계를 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이 강의를 했으리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책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이러한 상관 관계를 발견하게 된 것이 이 책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가 6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과 '인자'라는 개념을 구분해서 말하는 데에는 약간의 생소함과 이상함이 느껴졌었는데, 책을 읽다 보니 논리적인 측면에서 그와 같은 구분을 하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7장에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승천하지 않으시고 베다니에서 승천하신 것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정말 탁월한 설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8장에서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은 것이 아버지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가 아니었다는 설명은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이러한 절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로서 부르짖은 것이라고 것이 바로 저자의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저자의 깊은 묵상에서 우러나오는 신선한 해석들은 가끔은 위험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파격적인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신실함에 대한 신뢰로 인해 우리는 그러한 위험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가 그렇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법을 그로부터 배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책 또한 우리에게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법을 우리에게 일러 주고 있습니다. 아니,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할 필요를 가르쳐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 중에서 '산상수훈'에 이어 두 번째로 좋았던 책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주님은 나의 최고봉'까지 포함한다면 세 번째 자리에 놓아야 하겠지요. 제가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얼마전 읽었던 '오스뢍드 챔버스의 기도'나,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죄의 철학'보다는 더 좋았다고 생각됩니다. 자신의 구원, 그리고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는 분들에게 커다란 유익을 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천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이 왜 어렵게 느껴지는지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의 글은 설교를 옮겨 놓은 것이라서 그런지 접속사가 중간 중간에 많이 생력되어 있습니다. 회중석에 앉아서 이 강의 내용을 직접 듣고 있었다면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었겠지만 책으로 읽을 때에는 접속사의 생략이 문맥을 많이 끊어 놓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책을 읽다 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의 연결 고리가 가끔씩 사라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부분을 감안해서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어색한 곳에는 독자가 직접 어울리는 접속사를 찾아 넣어가며 읽는다면, 저자의 책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오타는 두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184쪽의 세째줄에서 네째줄로 넘어갈 때 '주님께게'에서 '게'자가 잘못 들어갔습니다. 186쪽의 세째줄에 기록된 '성경'은 '성령'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