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훌륭한 교회에서 위대한 교회로 -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겸비한 교회
더그 배니스터 지음, 조계광 옮김 / 규장(규장문화사)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에서 청년부 수련회를 다녀온 후로 성령님에 대해 설교하지 말라는 담임목사님의 경고를 받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청년부 수련회에서 있었던 예기치 않았던 신비스러운 일들(방언)과,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설교했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청년부 소속이었던 담임목사님의 딸이 제가 했던 설교의 내용을 수용하기 힘들어 했고, 그것 때문에 사모님과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었고, 자신의 딸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사모님 역시 제 설교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담임목사님을 종용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물론 그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던 데에는 그 외에도 여러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제 입장에서 그 교회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인 성령님에 대해 설교하는 것을 제한당한 이상 그 교회에 설교자로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에 사역했던 교회에서나 이후에 사역했던 교회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성령님에 대한 제 입장이 유독 그 교회에서만 문제가 되었던 터라 그 일은 제게 매우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출간된 몇 권의 책들을 통해 촉발된 개혁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의 논쟁은 그 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논쟁에 휘말려 또 다시 상처에 상처를 더하는 경험으로 이어졌습니다.
극단주의적인 은사주의자들과 극단적인 은사중단주의자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균형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균형잡힌 시각이 은사주의자들 쪽에서는 그나마 받아들여진 반면, 은사중단주의자들 쪽에서는 완전히 이단처럼 취급당하는 경험을 통해 이 문제가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극단적인 은사주의자들의 광적인 모습들이 인터넷을 통해 소개되면서,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만연한 성적인 일탈에 대한 고발이 이어지면서 은사중단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말씀과 은사의 조화로운 이해 역시 설 자리를 잃어 버린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답답한 상황 가운데에서 이 책을 만났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 속의 답답함이 조금이나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조금이나마 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 책의 탁월한 논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복음주의와 은사주의의 전통 모두가 개신교의 소중한 유산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점을 강조해서 그렇지 그 모두가 성경에 근거를 두고 도출된 진리이기 때문에 어느 한 편을 취할 것이 아니라 서로의 장점을 함께 취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각각의 전통에서 강조하는 강조점들을 각각 다섯 개 씩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주의 전통에서는 '강해 설교, 성경의 권위 인정, 하나님 나라를 아직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시각, 영적 성장을 과정으로 보는 시각, 말씀은 관계의 상황에서 가장 잘 배워 적용할 수 있다는 시각'을 언급하고 있었고, 은사주의 전통에서는 '기도에 대한 강조, 하나님 나라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시각,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말씀하신다고 보는 시각, 참여하는 예배의 강조, 성령의 은사는 관계의 상황 속에서 가장 잘 경험될 수 있다는 시각'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강 줄기를 하나로 합칠 때마다 요란한 충돌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에 따라 말씀과 능력을 조화시키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려해 보아야 할 부분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선 계시로서의 성경과 은사로서의 예언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대해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예언의 권위를 성경의 권위 아래 있는 것으로 분명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성경에서 에언의 은사에 대해 강조한 부분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과, 실제로 교회의 예언 사역 속에서 드러난 다양한 유익에 대해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 챕터에서 설명된 내용은 충분치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책의 부록에 가서 이 부분에 대한 더욱 분명하고 확실한 신학적인 논증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두 부분이 서로 나누어지지 않고 한 군데서 다루어졌더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방언의 유익과 그보다 더 중요한 사랑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또 신앙 감정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저자는 신앙 감정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영리에 소개되어 있는 신앙의 열차 비유가 감정이라는 부분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비판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저 역시 이전부터 느껴오고 있던 바였기에 전적으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앙은 분명 지식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그 뒤에는 반드시 감정이 따라와야 하고, 감정이 따라올 때 의지적인 순종 또한 수월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 부분에서 신앙 감정에 대한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저서를 길게 인용하여 신앙에 열정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유익한 내용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살아있는 예배, 치유를 위한 기도, 다양한 은사의 사용을 통해 진리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또한 신자들의 절실한 필요를 채워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챕터들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저자가 몇 차례에 걸쳐 언급했던 말이 특별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것은 "치유기도를 받고 싶은데 그런 기도를 해 주지 않아서 교회를 옮겨야 했다"라는 성도들의 말과, 또 이와는 반대로 "더 깊은 진리를 배우고 싶은 데 그런 가르침을 얻을 수 없어서 교회를 옮겨야 했다"는 성도들의 말이었습니다. 저자의 교회는 그런 아쉬움 때문에 찾아온 성도들로 인해 놀라운 성장을 이루었는데, 어떤 이들은 그것에 대해 수평이동이라느니 양 도둑질이라느니 비판할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그렇게 교회를 옮겨서라도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성도들의 결단이 눈물겹게 느껴졌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문제로 교회를 옮겼을까 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들의 갈급함에 대해 교회가 무관심했으면 그들이 교회를 옮겼을까 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자는 말씀과 능력이 조화를 이룬 교회를 세워야 할 필요성에 대해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시대가 다원주의적인 시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진리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득되어서 신앙을 갖기 보다는, 내가 경험한 바에 따라 진리라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는 성향이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양한 종교 가운데 자기 마음에 드는 종교 하나를 선택해 진리라고 믿기로 결정해 버리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기독교의 하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 역시 전부터 생각해 오던 내용이었기에 너무나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초대교회가 세워졌을 당시의 이방 세계 역시 다원주의적인 시대였었고, 그러한 시대에 수많은 교회를 개척했던 바울 사도가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표적으로 복음을 전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제가 예전에 부교역자로 섬겼던 교회의 어떤 권사님은 젊어서 자궁암에 걸려 죽게 되었다가 교회에 나온 뒤에 기적적으로 치유받고 살아나셨습니다. 원래는 조상 대대로 절에 다니시던 분이었는데, 아무리 불공을 드려도 낫지 않아 죽음만 기다리고 계시다가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교회에 가자고 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따라 나왔는데 말기암이 사라지는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흔이 넘은 그 때까지도 건강하게 살아 오고 계셨습니다. (그 교회를 떠난 지 오래 되어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확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간증을 통해 많은 불신자들이 하나님께 인도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시는 표적과 기사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요한 전도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요소를 외면하고 자기들의 논리적인 설득만으로 복음을 전하려 하니 오늘날의 교회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가 책의 마지막에 실어 놓은 부록은 단지 부록으로만 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출판사에서 소책자로 따로 떼어 출간해 준다면 성도들에게 한 권씩 나누어 드리고 성령론 특강 교재로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저자는 복음주의 신학자로 이름 높은 은사중단주의자들의 논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주장인지를 철저하게 분석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속이 다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특히 워필드나 존 맥아더의 주장이 비성경적이고 비논리적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밝혀 주고 있었는데, 저자에게 찾아가서 큰 선물이라도 안겨 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은사중단주의가 성경적이 아니라는 분명한 근거가 이렇게 제시되고 있지만, 극단적인 은사주의자들에게 질린 사람들은 이것마저도 외면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사단이 기대하고 있던 결과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짓된 역사를 끊임없이 일으킴으로써 진실된 하나님의 역사 마저도 외면하게 만들어 버리려는 사단의 수법에 더 이상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다른 모든 진리에 대해서는 바른 태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왜 성령님의 역사나 은사에 대해서만큼은 편협하고 치우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 대략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의 교만한 태도와 이로 인해 받은 상처와 열등감이 그 이유겠지요. 하지만 은사주의자들 역시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상처를 받았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서로 다투고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곡식이 익어 밭이 희게 되었습니다. 두 흐름이 하나로 모여 함께 힘을 모아 추수에 나설 때입니다. 우리의 대적은 기독교와 참종교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거짓된 종교들이지 우리의 지체들이 아닙니다. 이 사실에 대해 이 책이 가르쳐 준 교훈은 우리가 두 흐름의 전통 중에 어느 편에 서 있든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교훈이라 생각됩니다. 별 여섯개가 아깝지 않은 책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제 리뷰가 약간은 은사주의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것은 제가 경험했던 개인적인 상처 때문임을 밝혀 드립니다. 저자는 복음주의 전통에서 자란 분으로써 자신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 모든 사안에 대해 매우 온건하고 겸손한 태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제 리뷰로 인해 선입견을 갖게 되는 분들이 계시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