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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지옥 紙屋 - 신청곡 안 틀어 드립니다
윤성현 지음 / 바다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중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되면서 혼자 외가집에 맡겨진 일이 있었습니다. 한 3개월 정도 혼자 지내면서 상당한 외로움을 느껴야 했는데, 그 때 우연히 라디오를 친구로 삼게 되었습니다. 누가 사용하던 것인지 모를 라디오였는데, 틀어 보니 소리가 나왔고, 또 듣다 보니 외로움도 덜하고 해서 그 3개월 동안 밤마다 라디오를 틀어 놓고 지냈습니다. 이종환씨가 진행하던 '밤의 디스크쇼'와 이문세씨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던 밤에'가 당시에 즐겨 들었던 프로그램이었는데, 주말에 들려주던 '별이 빛나던 밤에'의 공개방송은 특히 그 즐거움이 더 했습니다. 이택림씨가 등장하면서 '마귀 나타났다'고 하면 오늘은 또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줄까 하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시작된 라디오와의 인연은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라디오 기능이 있던 워크맨을 분실하고 한동안 라디오를 듣지 못하고 지내야 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학 입시 전까지는 꾸준하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는 라디오를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었는데, 그래도 간간히 들을 기회가 없지 않았고, 라디오에 관한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의 제목과, 저자에 대한 자극적인 소개에 마음이 끌려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저자에 대해 아는 바도 별로 없었고, 저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들어 본 적도 없었지만, 저자가 벌였던 인상적인 사건(저자가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한 아이돌 그룹의 가수가 내놓은 음반의 표절 시비에 대해 논란이 될 만한 기획을 했던 일)에 대한 뉴스를 들은 기억이 있어서 저자가 평범한 인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습니다. 책을 읽어가면서 보니 예상과 그리 다르지 않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세계가 보통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는 차원이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해 대단히 솔직하고, 하고 싶은 말을 돌려말하거나 숨기지 않는다는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어 가면서 이 사람 참 시원시원해서 좋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라디오 피디가 된 이유가 놀고 싶어서 라고 말하는 것에서부터 그런 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취직 시험을 앞두고 영국에 가서 물질적으로는 어렵지만 문화적으로는 풍성한 삶을 통해 군생활로 피폐해진 정서를 회복하고 돌아왔다는 고백을 들으며 이 사람, 정말 깨인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하는 일견 까칠해 보이기까지 하는 말에도 별 거부감이 들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호감을 느꼈고, 그가 나누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읽으며 오랜 친구로부터 자신의 삶에 대해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중간에 소개해 준 추천곡들은 라디오 피디라는 저자의 신분으로 인해 한 번 쯤 꼭 들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쓸만한 정보였던 반면에, 그 외에 다른 이야기들은 정보라 할만한 것은 거의 없고, 그저 저자의 신변 잡기 같은 내용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무언가 의미있고 깊이있는 정보를 얻고자 기대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라디오 피디의 세계에 대해 뭔가 숨겨져 있는 비밀 같은 것에 대해 알고 싶었던 사람들이라면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저 예세이 정도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것이 나은 책이고, 그런 장르의 책으로서는 충분히 만족할 만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아쉬웠던 것은 가끔 등장하는 저자의 사진에서 얼굴은 항상 가려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보통 이런 책에서는 얼굴을 공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왜 그랬을까 싶었습니다. 게다가 얼굴도 안 보여주면서 '혹시라도 이태원이나 논현동의 일본식 선술집에서 자기를 우연히 보게 된다면 괜히 아는 체 하지 말고 무심한 듯 시크하게 타코 와사비나 한 접시 주문해 달라'니 이건 무슨 뜽금없는 소린가 싶기도 하더군요. 이 부분만 빼면 말 안 되는 소리는 거의 없다고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노란색 표지를 보니 저자가 좋아한다는 카레 생각이 나는군요. 저자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카레를 먹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