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책인데, 색이 유치하게 화려한 본이 내가 가진 초기본이고 좀더 심플하게 디자인 된 옆의 것이 다음에 나온 본이다.  지금은 둘 다 절판되었고, 나 역시 이 시리즈는 중고로 구매해서 읽었다.

 

어제부터 조금 한가했어야 하는것을, 별로 영양가 없는 미팅때문에 토요일에도 사무실에 잠깐 나왔어야 했다.  그 덕분에, 주말이 짧아진 것을 President's Day 연휴로 살짝 땜질이 되어, 오늘은 본가에 돌아와서, 아파트에서 들고온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고 있다.  연초부터 한 동안 소설을, 그것도 현대소설을 위주로 책을 읽었더니 슬슬 조금 지겹기도 하고 - 같은 패턴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덧 아무리 잘 읽던 것도 조금 물리기 마련이다 - 해서, 비판적인 읽기랄까, 다시 들여다보고 싶어 그간 모아놓은 장정일의 독서후기를 꺼내어 놓았다. 

 

새삼 느끼지만, 참으로 많은 책을 무지막지하게 읽어 내려간 흔적이거니와, 비교적 세심하게 그리고 적나라하게 자기의 평과 느낌을 갈겨내려간 기록은 '독서일기' 일곱 권, '빌린책...' 두 권, 그리고 '공부' 한 권 이렇게 모여있다.  다뤄진 책만 해도 필경 천 권은 훌쩍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지금 보고 있는 이 책은 그 모든 것들의 시작인 93년도에 처음 나온 장정일의 첫 독후감 모음집인 셈.

 

그의 신랄한 비판이나 찬사를 받은 수 많은 책들 중 내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좀 신경쓰이게 한다.  단순히 내 독서가 좁다 넓다를 떠나 출판되고 나서 이십 년을 채 살아남지 못하는 책들이 이렇게 많은가에 대한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상당히 많은, 장정일이 93년을 전후하여 읽은 책들 중, 90년대 초반에 나온 책들을 보면, 제목은 커녕 저자조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경우가 허다한데, 내 독서력의 한계도 분명하지만, 그 이상, 한 권의 책, 또는 하나의 작가가 timeless classic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사실, 책에 대한 생각을 쓰려고 여기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오늘은, 이번에는.  예전에도 다른 곳에서 본 내용을 이 책에서 다시 보게 되면서 서재를 통해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보니, 그 전에 한번 페이퍼에 쓴 적인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주변사람들과 이야기만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애시당초 페이퍼나 리뷰를 쓰기 시작한 것이 읽은 것을 덜 까먹기 위해서였는데, 이제는 그것도 어려운 것 같다.  아무튼, 내가 소개하려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장정일의 독서일기'에서 츠바이크의 '어떤 정치적 인간의 초상'의 후기를 보고 좀 짧게 고쳐 올린 것이다.  즉 내가 정리한 글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한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시절에 요제프 푸셰라는 인간이 있었더랬다.  1759년에 낭트란 도시에서, 한 잡화상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수도원 부속학교의 교사로 전전하다가 "이런 저런 기만"으로 구민들을 속여 32세의 나이에 프랑스 혁명의 권력중추였던 국민회의의 대의원이 된다.  처음의 소속은 온건파였지만, 로베스 피에르의 급진파가 권력을 잡자, 바로 (1) 급진파로 변신한다.  그 후, 로베스 피에르의 실각 후에는 (2) 5인 집정내각을 조종하여 (3) 나폴레옹에게 권력을 내준다.  나폴레옹이 제정을 부활시킨 후 푸셰는 (4) 오토라토 공작에 봉해지는데,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연패하자, (5) 다시 나폴레옹을 실각시키는 음모로 그를 밀어낸다.  그 후 (6)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가, 다시 루이 18세 (푸셰가 포함된 400인 투표로 목이 잘린 루이 16세의 동생) 에게 프랑스를 넘긴다.  

 

장정일은 이 책의 후기를 쓰면서 푸셰만큼이나 다양한 정치행보와 변신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늘리고 종국에는 갓 싹이 트던 한국의 민주주의를 밟고 18년간의 왕정을 이어간 다카키 마사오의 커리어를 오버랩 시킨다.  이 책을 쓰던 93년 당시는 이인제가 김영삼 정부의 첫 노동부 장관으로 재직하던 시절인데, 88년에 통일민주당을 통해 국회의원으로 데뷔한 그의 정치적 행보와 변신이 원조격인 푸셰를 능가하게 될 줄은 장정일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로, 지금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쓴다면, 장정일은, 아니 나라면, 마사오 보다는 이인제의 - 심지어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의 정치력 - 변화무쌍함이 푸셰의 그것과 더 오버랩 시키게 될 것이다. (이 책도 품절이다. 아무튼 책이 마구 나왔다가 빨리 사라지는 한국의 출판문화는 내 큰 불만의 대상이다) 

 

이인제의 연표는 (1) 통일민주당, (2) 민주자유당, (3) 신한국당, (4) 국민신당, (5) 새정치국민회의, (6) 새천년민주당, (7) 자유민주연합, (8) 국민중심당, (9) 새천년민주당, (10) 통합민주당, (11) 무소속, (12) 자유선진당, (13) 선진통일당, 그리고 (14) 새누리당인데, 그야말로 돌고 돌아 제자리라는 말이 딱 이인제를 두고 한 말 같다.  이놈의 지분정치...

 

언제나 '승자'의 편에 있지는 않았고, 시대를 쫓아가는 기민함도 떨어지지만, 이인제를 비롯한 이런 '정치적 인간'들에게는 '이념'이라는 것이 없다고 츠바이크는 말한다.  매우 공감하게 되는 촌철살인의 분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읽을때 여러 가지 이유로 밑줄을 긋지 못한 부분들을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표시해 놓으리라 했건만.  어떻게, 지난번과 똑같은 부분을 똑같은 이유로 놓치게 되는 것일까?  예컨대, 자 혹은 자를 대체할 책갈피가 없다던가, 화장실 변기 혹은 gym의 자전거에 앉아있을때에만, 밑줄 긋고 싶은 페이지와 글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딱, 그때와 같은 그 부분들, 한 두 개도 아닌 그 부분들을 읽을 때,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렇게 무엇인가 모자랐더랬다.  여전히 줄을 긋지 못하고 보내버린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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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2-19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셰 저 사나이 결국 권력 줄타기하다가 마지막에 줄에서 떨어지죠.워낙 적이 많아서 늘 견제당하기도 했고요.술수로 흥한 자 술수로 망하죠.

transient-guest 2013-02-19 23:5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지금 한국에서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하네요. 계속 생명을 이어가는 것을 보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