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로 신경을 쓰다가 일을 하니 오전에는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점심을 넘겨 고객과 통화를 마치니 운동을 다녀오기엔 무리가 있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지난 팬데믹 기간동안 익숙해진 패턴으로 하체와 복근 및 어깨운동을 마치고 나서 잠시 뭘 좀 먹으니 금방 오후 세 시를 찍는다. 원래 여름은 slow한 편이기도 하고 불경기의 초입을 온몸으로 느끼는 요즘 더더욱 조용한 일상이라서 늘 하던 일을 하고 밀어내는 것 빼고는 달리 급하게 달려들 것은 없다. 그래서인지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설렁설렁 아까운 하루를 보내버리고 있다. 딱히 더 열심히 뭔가를 하거나 새로운 걸 시작할 것 같지도 않고 해서 엄청 밀려버린 책정리를 해보려고 한다. 


할 말도 많고 생각도 많은 한국의 대선과 동유럽의 대리전쟁, 예상은 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힐러리의 낙선이 아쉽게 느껴지는, 성큼 다가온 불경기의 조짐까지 제정신을 갖고 살아내기 어려운 요즘 오히려 말도 생각도 잠시 꺼버리고 속으로 다져보는 연습을 하곤 한다. 끝까지 변치 않는 신념으로 살아내려면 가끔씩 이렇게 쉬는 시간도 필요할 것이니, 좌충우돌 정신 없이 난리를 치다 문득 돌아보면 자신이 서있는 곳이 엉뚱한 곳이 되어있는 걸 발견하게 될 것 같아서다. 10년을, 아니 평생을 우리 앞에서 함께할 것 같았던 사람들의 우스운 꼬라지들을 보면서 그런 맘을 갖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 


기록을 보니 마지막으로 페이퍼를 남긴 것이 6월 16일이었으니 거의 한 달을 겨우 책을 읽고 짧은 후기만 남기면서 지나간 것이다. 이것도 슬럼프를 타는 것인지 예전 초기의 글들을 읽어보면 뭔가 기름끼는 많이 빠진 것 같으면서도 그만큼 심드렁해진 것 같다. 


















열 아홉 권을 세트로 구매하고 나중에 조금씩 나온 몇 권을 더해서 모두 스물 한 권으로 갖고 있었던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경감 시리즈를 시작했다. 모아놓은 홈즈, 뤼팽,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 그리고 캐드파엘 시리즈는 이미 예전에 다 끝냈고 구할 수 있는 일본의 고전추리도 되는 대로 구해서 읽은지 오래. 이번에 시작한 이 시리즈도 더 이상 안 나온지 오래라서 남은 걸 다 보면 다시 복습이라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번득이는 추리나 캐릭터의 소설적인 매력은 홈즈 같은 인물에 비해서는 많이 떨어지는 느낌이지만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의 사건과 해결은 매우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다. 발로 뛰고 탐문하고 심문하고 사건의 쟁점을 하나씩 펼쳐서 분석하면서 차분히 알아내는 과정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음미하게 되는데 이 나름대로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우연한 기회에 발견하여 구할 수 있는 대로 하나씩 가져다 보고 있는 셜록 홈즈 이야기. 당연히 코넌 도일의 작품은 아니고 아마도 무수히 많이 존재하고 있을 다른 작가들에 의해 파생된 셜록 홈즈와 닥터 왓슨의 이야기. 시대의 고증에도 나름 충실한 것 같고 있음직한 이야기가 잘 그려져 있어 읽는 맛이 좋다. 기왕 가상현실이나 평행우주론을 펼치려면 트럼프가 재선된 세상 따위를 믿지 말고 차라리 셜록 홈즈와 닥터 왓슨이 실존했다거나 지금도 베이커가 221B번지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 편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내일이면 도착할 것으로 트래킹 되는 이번의 주문에는 모처럼 장정일 작가의 신작 '신악서총람'이 들어 있다. 먼저 알았더라면 이 책은 사지 않았을 것인데. 짧은 후기에도 남겼거니와 이런 책은 나오지 말았어야 한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자체가 책을 읽고 남긴 짧은 후기들의 모음인데 그걸 다시 편집해서 책으로 만들어내니 나의 경우엔 시간도 돈도 다 아까웠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독서일기'가 나온 것도 오래전의 일이고 구할 수 없는 책도 있을테니 새롭게 장정일의 비평을 접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유용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시간의 흐름과 함께 좋은 변화를 보여주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정점에 이르지 못한채 시들어버리거나 정점을 지난 후 내리막을 줄창 내딛는 경우도 허다한데 장정일이 정말 간만에 정리한 책의 이야기는 그의 책을 접한 후 10년을 넘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온 세상 부의 90% 이상이 약 10%도 안되는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 있고 나머지 90%의 사람들은 10%의 부의 지분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 해야만 하는 세상에서 정규직과 보험, 땅과 집을 잃고 떠도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 필연이다. 발전된 부국이자 강국이라는 미국의 현실이고 일본이나 한국에서도 점점 더 늘어날 것 같은 이 새로운 breed의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혹은 주체적으로 스스로를 house-less라고 부르며 커뮤니티를 공고히 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뭔가 여행과 함께 정주하지 않는 삶에 대한 낭만이 느껴지지만 현실은 이들을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공짜로 차를 댈 수 있는 곳으로, seasonal job이 있는 곳으로, 국경 근처로, 물을 찾아, 주차장을 찾아 돌아다니게 만든다. 다쳐도 몸을 고칠 수 없고 노동권도 보장을 받지 못하지만 살기 위해서, 그리고 몸에 밴 습관으로 열심히 일하는 덕분에 아마존을 비롯하여 이런 seasonal 노동력을 원하는 곳에서는 꽤 우대를 받고 법정최하수준의 임금을 위해 빈약한 보호장치와 노령에도 불구하고 하루 열 두 시간 이상의 육체노동을 감수한다. 영화를 보면 뭔가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책에서 느껴지는 건 가난의 대물림, 중산층의 붕괴, 가족의 해체와 붕괴, 사실상 대다수에게서 사라진 upward mobility같은 냉혹하고 절망적인 현실 뿐이다. RV여행은 여전히 내 버킷리스트에 있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낭만의 지방이 싹 빠져나가버린다. 


공원국이란 작가의 이름은 익히 들어왔으나 이번에 보니 그의 책을 읽는 것 처음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작가와 책은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이래 지금까지 숱한 부침을 겪고 사라져버린 것들을 빼고라도 깊고 넓은 세계라서. 중국과 티벳으로 몽골로 중앙아시아를 누비면서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도 궁금하여 몇 권을 더 주문했고 그가 쓴 춘추전국이야기도 언젠가 구해서 읽을 생각이다. 여행기도 자계서도 독서에 대한 책도, 인생 코칭도 넘쳐나지만 최소한 여행에 대한 책들 중에서는 단연코 발군의 수준이 아닌가 생각될 만큼 한번 책을 펼치면 닫기 어려웠던 지난 6월의 기억이 있다. 현대에도 모험가 혹은 탐험가가 있다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여행하면서 쉽게 사람들과 친해지는데는 역시 술과 음식을 나누는 것이 최고이자 최선의 방법임을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는데 나름 두주불사의 몸이었던 나는 더 늙기 전에, 그러니까 술이 약해지고 음식의 양이 줄기 전에 이런 여행도 해봐야할텐데 하는 막연한 조바심을 갖게 된다. 여전히 술은 어느 정도 마실 수 있지만 마신 후 다음 날 몸이 회복하는 시간이 갈수록 많이 걸리고 종종 잠을 들기 직전부터 잠에서 깨는 시간까지의 기억이 사라져버리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책에서 본 갑작스럽지만 호쾌한 대포지교를 맺을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다. 


 














한번 시작했으니 끝까지 가려고 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구해보는 만화 시리즈. 반 정도 가까이 왔고 내용도 이젠 많이 비슷한 구조라서 대충 넘겨볼 때도 있다. 한때 식객이나 맛객을 표방하는 블로그로 유명세를 타던 사람들도 많이 사라져버렸고 YouTube에서는 이런 것보다는 그저 많이 먹고 많이 마시는 것이 대세가 되어 버렸으니 이런 먹부림계도 유행을 타는 것 같다. 한때 방송도 타고 요리와 먹부림 하면 대명사 같이 나오던 '건다운'의 YouTube채널의 초라한 구독자수와 구독횟수를 보니 뭔가 격세지감 같은 것이 몰려온다. 황교익 선생 정도가 남아서 방송도 타곤 하지만 이 분은 이명박근혜-문재인 정권을 거쳐 신정국가이자 섭정체제에 다다른 한국에서는 요리보다는 반체제인사에 가깝게 취급되고 있으니. 

















드디어 마지막으로. 지난 한 달간 공원국의 책, 그리고 Nomadland와 함께 단순히 즐거움만 추구한 것이 아닌 책 몇 권을 읽었더랬다. 뭔가 위안이 되는 듯한 산티아고 순례의 고생길 엿보기, 서경식 선생의 기행은 예전에 본 걸 어쩌다 보니 다시 읽었고,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기차를 타면서 철학을 이야기하는 기발함과 친절한 에세이풍의 글에 취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뭘 해도 심드렁한, 반세기의 삶을 몇 년 앞둔 아저씨의 일상은 특별한 것도, 특별할 것도 없이, 심지어 즐거워야 하는 일도 무덤덤하게 느껴지는 삶의 연속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밥을 먹고 회사에 와서 일하고 밥을 먹고, 다시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서 마무리로 좀 걷고 들어와 두어 시간 노닥거리다 보면 잘 시간이 된다. 이걸 은퇴할 때까지 매일 반복해야 하는데, 이미 15년 정도 (최종학력을 기준으로) 반복하고 나니 남은 15년의 지난함에 속이 콱 막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많은 것들이 아주 bleak하게 느껴지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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