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회사빌딩의 gym공간을 당분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걸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나도 평소 가던 gym이 COVID-19으로 잠정휴업에 들어갔기 때문에 사용하던 정도인데, 최근에 누가 뭘 봤거나 했는지 관리사무소에서 폐쇄통지를 붙여놨다.  지금 사무실에 가져다 놓은 역시는 이런 저런 가벼운 무게의 덤벨이 3세트, 바벨에 무게 10 lbs짜리가 4개, 요가매트, 악력기 두 개, 그리고 문설주에 매달아 사용하는 pull-up bar인데 pull-up bar는 문설주의 규격이 맞지 않아서 사용할 수 없으니 이제부터는 진짜 혼자서 맨몸으로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다.  gym을 사용하지 못하는 만큼 더욱 과부하운동은 불가능할 것이라서 달리기에 정말 공을 들여야 할 것 같다.  달리기와 줄넘기를 조합하고, Cross-Fit을 응용한 맨몸운동과 덤벨운동, 그리고 다양한 abs/core운동을 섞지 않으면 Shelter in Place가 풀림과 동시에 허리띠가 풀어지는 걸 보게 될 수도 있음이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압승했다고 나오는 반가운 뉴스의 와중에도 강남, 부산, 및 영남 등 어떤 곳은 그저 답이 없는 지역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결과가 나온 것 같다.  태영호, 권성동 같은 범죄자들이나 장제원 같은 자들이 꽤나 압도적인 표를 받아 국회에 입성 혹은 돌아갈 예정으로 보이는 바, 태영호의 경우 북한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벼슬아치가 미성년자 성폭행 및 공금횡령이 들통나자 송환 대신 귀순을 택한 것이니까 검찰은 조국을 털던 솜씨로 그를 탈탈 털어야 할 것이다만, 그럴리가 없겠지?  이름을 무려 태구민으로 바꿨던데, 이제 그가 극우보수의 대선후보로 나오게 된다면 그들에게 어울리는, 그야말로 막장의 개막장이 될 것 같다. 권성동의 경우 청탁을 했다는 사람은 처벌을 받았으나 청탁을 받은 사람은 혐의없음으로 귀결된 사건인데, 참 새끼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주인을 바꿔가며 대한민국현대사에 기생해온 검찰의 진면목이 또 한번 드러나는 경우라고 하겠다.


트럼프는 전국에 뿌려질 정부의 돈에 자기이름을 찍어넣는 새로운 low를 선보였는데, 기자회견을 보니 역시 이명박과 박근혜의 hybrid 잡종을 보는 듯, 뻔뻔스러움과 거짓말, 그리고 무지가 한꺼번에 뿜어져나온다.  제발 이번 11월 대선으로 날아가고, 온갖 민사와 형사로 집안이 결딴났으면 좋겠다. 이놈이 대통령이 된 탓에 죽고 다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제 4월의 반이 지났고, 대략 2주 반 정도면 일단 Shelter in Place가 끝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면 '정상화'와는 한참 먼 수준의 조심스러운 approach가 될 것 같고, gym이 제대로 operate할 수 있을지, 회사가 다시 정상화 될지 알 수가 없다.  


너무도 불확실한 시기를 지내고 있어 심적으로는 늘 불안하지만, 이런 시기에 빚도 없고 그간 열심히 저축도 해왔고, 은퇴연금도 붓고 있으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저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 밥을 굶지 않고, 머물 곳이 있다는 것 또한 감사하게 생각한다.  


새벽에 잠이 깼다. 날이 따뜻해지고 있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이렇게 몸의 밸런스가 깨진 적이 최근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무척 엉망이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일어난 것도 아닌 듯 지내는 밤이 늘었다. 기왕 이렇게 눈을 떴으니 그냥 일어나기로 했다. 메일이라도 확인하려고 했는데 별다른 소식이 없다. 이 또한 최근엔 거의 없었던 일이다. 해가 뜨는 시간이 대략 오전 여섯 시 반으로 나오니 이때 나가서 걷고 뛸 생각이다.  이제 매일 이렇게 하고 weight는 하루 걸러 하루로 전신을 하던가 이틀 단위로 나눠서 전신을 해야 할 것이다. 작지만 그래도 내가 가진 기구보다는 많은 걸 사용할 수 있었던 빌딩의 gym 마저 이제 갈 수가 없으니까.


유럽의 근대문화사 3부작의 첫 번째 '벨 에포크 - 아름다운 시대'를 읽고나서 갑작스럽게 에밀 졸라를 다 읽고 싶어졌고, 지금 같았으면 못 했을 엄청난 충동구매로 졸라의 책을 사들였다. 꽤 오래전에 '열린책들' 판본으로 읽은 '목로주점'에서 이어지는 '나나'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들을 통해 이 시대를 엿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침체와 부진, 그리고 연일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숫자, 매일 노력을 해도 유지하기 어려운 몸과 마음의 밸런스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제 문득 무엇이라도 한 권을 다 읽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 짧은 '결혼, 죽음'을 읽었다. 


'결혼, 죽음'은 졸라의 눈으로 그려진 19세기 프랑스의 계층유형별 결혼과 죽음의 모습이다. 귀족과 부르조아는 정략적인 결혼, 잠깐의 신혼, 그리고 일생을 사실상 별거처럼 따로 보내다가 죽음을 통해 살아남은 한쪽을 해방시켜주는 모습으로, 상인은 그저 돈의 논리로 합쳐 마치 동업자의 관계처럼 지내던 부부가 역시 돈의 논리로 끝을 맺는 것으로 결혼에서 죽음에 이른다. 서민은 '목로주점'에서 묘사된 것과 매우 흡사하게 우연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연애를 하고 열정적인 결혼을 하지만 신혼은 금방 출산과 생활고로 이어지고 남편은 술에 쩔어서, 그 남편과 그의 일당을 찾으러 주점에 출입하기 시작한 부인 또한 결국 술을 배우고, 하루살이처럼 그날을 살아간다. 그들이 맞는 죽음 또한 그 비참함을 거쳐야 완성이 되는데, 구빈원의 도움은 늘 한 발 늦게 찾아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 시대나 지금이나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이 사는 모습이란 것이 결국 그런가 싶을 만큼, 지금의 신귀족을 형성한 부유층이 살아가는 모습, 중상류층이 보여주는 삶, 그리고 중산층과 그 밑의 서민계층의 삶이 그나마 달라보인다면 그건 발전한 경제와 의료 및 과학기술을 통해 (최소한 발전한 국가에서는) 국가안전망이 19세기에 비해 더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쪽방촌과, homeless와 drug문제는 가난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양극화가 심해진 21세기엔 그 세를 불리고 있는 것 같다.  재화가 점점 더 소수에게 몰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가 사라져가는 지금은 그런 의미에서 인류문명은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것 같다. 더 나누고 다같이 풍요롭게 일에서 해방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상위 10%의 유토피아에 나머지 90%는 슬럼에서 사는 개발도상국의 모습으로 가게 될 것인지.  이건 인류의 보편적인 정신과 덕의 성장과도 맞물려 있는 중요한 선택이 될 것이다. 희망보다는 절망을 더 많이 보는 요즘 같아서는 미래를 보는 것이 두렵다.


'벨 에포크'에서 다뤄지는 시기는 정치와 경제적으로는 혼란스러우면서도 서구문명의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팽창한 시점이기도 하다. 여전히 재화의 소수집중으로 귀족과 부르주아층을 빼면 상당히 어려운 생활을 했지만, 예술이 꽃피려면 어쩄든 '돈'과 '넘치는 시간', 그리고 '허영'이라는 토양이 마련되어야 한다. 모두 다 굶주리는 시기에 그림과 음악을 즐길 여유도 없거니와 이를 비싼 값으로 사줄 계층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아주 소수만이 구매를 독점할 정도라면 예술가의 창의성이나 전위성이 꽃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세기의 예술가 - 문인, 화가, 작곡가 등 - 는 여전히 가난했지만, 최소한 잘 풀리면 부유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실제로 부유한 후원자의 지원을 받거나 작품을 고가에 팔아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책 자체는 조금 dense한 reading이지만 여러 모로 이 3부작을 완독하는 건 좋은 배경지식을 줄 것이다.  덕분에 난 더욱 많은 책을 탐하게 되겠지만.


'나, 제왕의 생애'만큼은 아니지만 '측천무후' 또한 간만에 읽은 쑤퉁의 시대극으로써 상당히 인상적이고 무엇보다 재미가 있다. 어떤 가치평가를 담지 않고서 수정주의시각으로 보면 특히 아주 controversial한 희대의 여걸이 당왕조를 휘어잡는 시작과 권력의 정점에서 끝으로 돌아가는 부분까지 깔끔하게 보여준다. 


측천무후는 한나라의 여태후와 함께 내가 기억하는 바, 중국의 이대악녀처럼 불리우는, 당시로는 흔치 않게 권력의 정점에 오른 여성들이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차지한 후, 유지를 위해 그들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공포정치를 펼치긴 했다. 하지만 전제군주정, 특히 중국의 군주들 치고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는 사람이 몇 이나 있겠으며 권력을 쥐고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공포정치를 하지 않은 전제군주가 몇 이나 있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더 중요학 척도는 백성들의 생활이 어떠했었는지가 될 수도 있는데, 이 또한 내 기억이 좀 틀릴 수도 있겠지만 여태후나 측천무후의 시대는 달리 백성들에겐 좋은 정치가 펼쳐졌던 시기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측천무후의 경우 당왕조의 중흥기였던 태종 이세민의 시재와 버금갈 정도였다고 하는 경우도 있으니 후세 사가들의 sexism을 좀 걷어내고 보다 더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다르게 평가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아마 지금 시대였다면 훌륭한 정치를 했거나 거대한 재벌을 일궈냈었을, 한 시대를 열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가진 인재였을 것 같다.  


역사에 이런 걸출한 여제들이 더욱 나쁘게 평가되는 건 소위 성적으로 문란했다는 것 때문인데, 우스운 건 남자들은 얼마든지 축첩을 하는 것이 당연시 되던 시대에 여자라고 해서 남자를 거느렸다는 것이 '성적인 문란함'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이런 건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꾸준히 계승(?)되는 바, 룸싸롱은 괜찮고 호스트바는 '변태영업'으로 치부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사실 룸싸롱이든 호스트바든 돈을 주고 사람에게 술시중을 받고 몸을 사는 행위라는 점에는 차이가 없고 둘 다 똑같이 변태적이고 나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언론에서 이런 걸 접할 때마다 우습기 짝이 없다.  여자가 나오는 술집은 성매매로 연결되었음을 모두가 알지만 애써 무시하면서 직접적인 형태의 '성매매'만 문제시하는 건 그야말로 코미디가 아닌가 싶고, 같은 맥락에서 룸싸롱은 그대로 두면서 호스트바에 대한 문제의식엔 열을 올리는 언론의 행태도 개그스럽다. 뭐 둘 다 나쁘다고 생각하기 떄문에 특별히 호스트바를 두둔하는 것이 아니고 둘 다 불법인데 왜 하나만 갖고 더 뭐라고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역사에서 여제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한 생각과 묘하게 이어져 있어 말이 길어졌다.


다양한 출품작가들의 얼굴에 따라 판본이 나온 특이한 모음집.  제 1회 폴라리스 선정작품집. SF의 저변이 많이 확대되고 있는 한국의 지금이 보인다.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 이상 중요한 건 많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라서 앞으로도 더욱 많은 SF관련 문학상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미 휴고상이나 네뷸러상 같은 SF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상이 미국에 있고 추리소설에서도 그런 수준의 좋은 무대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유독 '문학'과 '소설'을 구분하는 이상한 전통이 있는데, 이걸 깨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만 이런 의미와는 별개로 작품들은 여전히 한국의 현대문학의 고질적인 문제 - 로쟈선쟁이 훌륭하게 표현하고 정리한 바 - 를 넘지 못하는 건 불만스럽다. 유독 단편이나 중편에서 멈추는 경향이 시대별로 전혀 발전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 한국의 소설인데 이번 모음에서도 뭔가 시작하려는 지점에서 소설이 멈춰버리는 것이 무척 아쉽다.  여기에 나온 작품들은 모두 장편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가 신선한데 그렇게 길게 가져갈 수 있는 필력이 따라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단편 외에도 장편에 대한 별도의 기준을 마련하여 상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남은 4월이 어떻게 지나갈지 모르겠다. 지겨움과는 별개로 하루의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이 공포스럽기 짝이 없다. 회사는 지지부진한데, 일은 해야 하고, 월급은 나가야 하니까.  


이번 일을 겪으면서 느낀 바, 역시 기본적인 운동이 가능할 수준의 home gym, 그리고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 물품과 식량,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기본적인 수준의 무술습득과 무기가 구비된 방어체계를 갖춰야 할 필요가 있다.  사회의 발전, 안정성에 대한 믿음이 산산조각이 나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두 시간 정도는 가볍게 일을 하고 나가서 걷고 뛸 것이다. 그리고 오후엔 사무실에서 다시 근육운동을 하는 것으로 단련이라는 발버둥을 쳐볼 것이다.  모두들 건강하게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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