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에 맞는 음식만 먹으면서 건강을 도모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독서 또한 다양한 장르, 작가, 지역, 주제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종류의 책을 읽어야 지적 생활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 것을 넘어, 사고의 건강함을 위해서는 더욱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하다못해 정규재 같은 사람도 책은 많이 읽지 않는가? 하지만 그의 사고와 지적 수준이 그가 내세우는 이미지에는 한참 못 미친다고 보며 그저 읽은 것들을 왜곡하여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시도에 쓰일 뿐, 적어도 제대로 된 인간들 중에서 그를 지식인으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대충 내가 책을 열심히 종류를 따지지 않고, 대단한 목적의식 없이 그저 계속 읽어나가는 건 아마도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토요일의 센 운동을 하고 나면 확실히 다음 날 오전에 다시 운동을 갈 수 있을 정도로의 회복이 어려운 것 같다. 적어도 정신적인 면으로는 그렇다.  몸이 엄청나가 두들겨 맞는 듯한 강도와 시간이기에 2000 kcal의 운동을 한 날의 저녁이면 젓산 과부하라도 걸리는 것인지 누워서 아무것도 못할 만큼 피곤하기 그지 없고, 그 피로는 다음 날, 그러니까 운동이 끝난 시간에서부터 24시간이 꼬박 소요되어야 풀리는 것 같다.  오늘의 운동이 오후에 시작되어야 하는 이유가 되겠다.


책을 계속 읽어왔기 때문에 아무런 액션이 없다가도 어느 시점이면 갑자기 완독을 마치는 시간이 온다. 한꺼번에 여러 권을 여러 장소에서 읽고 있기 때문에 완독이 겹치면 하루나 이틀 사이에 갑작스럽게도 많은 책을 끝내게 되어 오늘처럼 대략 금요일 오후부터 여섯 권 이상의 책과의 만남이 끝나버린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세 곳의 미술관을 연중 무료로 다닐 수 있는 회원권을 구매한 것이 작년이다. 그전에도 물론 특별전시가 오면 가곤 했는데 회원권을 구한 덕분에 그리고 두 번 정도만 가면 회원권의 비용이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 제때 전시회를 찾아다닌 2019년이었다.  서울처럼 종합전시회가 자주 오거나 DC나 NYC처럼 상시 전시회가 있는 환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윌리엄 터너, 고흐, 고갱, 모네, 마네, 램브란트, 루벤스, 앤디 워홀, 르네 마그리드, 로댕, 클림트, 블랜차드 등의 작품을 볼 수 있었고 (나열할 수 있을 정도로 적지만) 앞으로도 기회가 될 때마다 좋은 작품을 보러 다닐 것이다.  당장 3월 초순에는 프리다의 전시가 있고, 4월에는 폼페이의 유적을 전시한다고 하며 종종 vault에서 보관중인 작품을 새롭게 전시하기도 하니까 꾸준히 다녀갈 것이다.  사실 복도에 아무렇게나 전시된 것들조차도 에게해나 지중해에서 건져온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미케네의 흔적들이 많아서 늘 흥미롭다.  색감에 무척 약한 편이지만 조금씩, 노력하는 만큼 뭔가 더 보게 되는 것 같은데, 클레식 음악이나 독서와도 이런 면에서는 통하는 면이 있다.  


서두가 길었는데 책은 사실 survey형식의 개론서로써, 뭉크, 고갱, 고흐, 피카소, 모네, 미켈란젤로, 다빈치 등의 굵직한 예술가들과 그들의 대표적인 작품들에 얽힌 스토리를 풀어내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디스커버리나 넷지오 채널이 활자화된 것처럼 조금은 밋밋하고 더러는 화보집 같은 그런 느낌으로 천천히 읽었다.  교양서적으로는 손색이 없는 이 책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찾아서 빌려 읽은 책이다.  이 책과 함께 빌려온 그간 쌓인 한국어책들도 이제 대충 두세 권을 더 읽고 갖다주면 당분간은 그 도서관에서 빌려올 한국어책은 없게 된다.


같은 작가의 책을 한 권, 정말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나서 읽고 나서 찾아보니 이렇게 두 권이 셋트로 나와 있었다. 엊그제 도착했는데 들어온 당일 집에서 저녁 때 휘리릭 읽어버렸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참 서정적이고 뭔가 감성이 충만해지게 하는 힘이 있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추억담 같은 회상에서의 쓸쓸함 보다는 지금에서 오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설레임이 가득하게 그려진 것 같다.  주인공은 갓 이혼하고 그간의 삶은 거의 다 파탄난 결혼으로 정리가 되고, 다시 혼자가 되어 어쩌다 보니 고택을 수리해서 살면서 인생을 새롭게 꾸려나가게 된다. 그 와중에 또 우연히 이혼을 하게 된 이유의 일부가 되기도 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조심스럽게 다시 이어지는 그 인연과 일상의 소소함이 어우러지고, 미래로 나아가는 것에서 끝을 맺는 이야기는 모두에게 편하거나 모두에게 설레임을 줄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요즘 시대에 단독주택을 개조해서 책을 가득 쌓아둘 수 있고 정원을 가진 그런 집에서 steady한 job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는 나이의 사람이라서 일부 공감하고 부러워하며 즐길 수 있었던 나 같은 사람은 이 책을 즐겁게 읽을 것 같다.  다른 이들을 모르겠고 더러는 불쾌할 수도 있겠고. 그런데 삶은, 특히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계획한 대로, 마음 먹은 대로 성실하게만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늘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그걸 해결하거나 그로 인해 길을 돌아가거나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서 그저 꾸준히 최선을 다해 걸어갈 뿐이라는 생각.  아들의 커밍아웃은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심어둔 metaphor가 되려나?


지금도 그럴 것으로 생각되지만 과거의 작가들, 특히 서구의 영향을 받아 근대화를 이루어내고 발전시키던 시기의 작가들은 여러 모로 서구의 영향을 받았고, 이를 토대로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간 것 같다. 일본추리소설의 아버지라고 하는 에도가와 란포가 딱 그 시기를 지낸 작가인데, 이름부터 지향하는 바를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무려 800권이 넘는 외국작가들의 추리소설을 읽고 정리하면서 이런 저런 법칙으로 분류한 트릭의 수법에 대한 이야기.  소품집 같은 느낌으로 가볍게 팬의 마음으로 읽으니 다소 낡은 이야기지만 꽤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참 덕후스럽기도 한데, 전통적인 방식에서 당시로는 파격적인 서구의 작품세계를 지향하고 배우고, 다시 생산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정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그냥 이루어지는 건 없으니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갈수록 공장형 작품을 양산하는 것 같다. 최근에 읽은 그의 책들치고 딱 평균의 이쪽저쪽을 벗어난 파격성을 주는 작품은 못 본 것 같아서 그런 마음이 든다.  '용의자 X의 헌신'같은 그런 작품이 매번 나올 수는 없겠지만, 초기에 그의 작품들을 섭렵하던 시기, 중고로 구해서 읽은 많은 소설들에서 받은 그런 느낌은 이제 없다.  이 작품의 경우 모티브도 그냥 그렇고, 트릭도 별로 그리 인상이 깊게 남지 않았다.  



'나, 제왕의 생애'이후로 무척 좋아하는 작가인 쑤퉁의 소설집. 도서관에서 구했고, 맘에 드는 작품이 있어 사려고 보니 이미 절판된 책이다. 최근에 나온 책이 두 권 정도 있던데 기회가 되면 구할 생각으로 장바구니에 넣어놨고, 절판된 책들 중에서는 '측천무후'가 상당히 관심이 간다. 


중국의 근대화에서 지금까지의 시기는 나중에 보면 엄청난 혼란기를 거친 질풍노도의 시기로 남지 않을까 싶을만큼 빠른 변화의 연속이었는데, 그 세월의 한 귀퉁이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그 모진 세월을 살아남았는지 엿보게 된다. 기생의 입장에서, 여자의 삶에서, 무명배우에서, 이런 저런 모습으로 세대가 그려진다. 현대의 중국은 그런 토대위에서 세워졌는데 좋은 건 다 사라지고, 공산당과 돈과, 무식과 상식의 부재만 남은 것 같다.  


볼 때마다 90년대의 게임을 하고 싶게 만드는 이 멋진 추억담.  OVA로 보면 딱 반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어떻게 이어지려나. 주인공의 현재는 프로게이머라면 어울릴 것 같은데 고도의 신분제사회가 이어지는 일본의 (한국도 그런 면이 있지만) 특정계층의 여주는 남주와 이어져있기엔 무리가 있다.  차라리 동네의 쌀가게집 딸래미가 남주와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이 시점에서는 끝난 이야기 같고.  역시 오락은 32비트까지가 좋았고 지금은 미래를 그리기보다는 현재를 따라잡기에 바쁜 것이 콘솔시장이라서 흥미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서재를 잘 꾸미는 날에는 그간 모아들인 미디어도 잘 정리해서 즐기고 싶다.  늘 꾸는 꿈이지만.




너무 오래 두고 읽은 것이 패착. 챕터를 짧게 끊어서 쓰면서도 끊임없이 스토리가 시간과 사람으로 나뉘어 흐르는 건 무척 특이하다. 폴란드작가의 책은 기억하기론 거의 처음으로 읽은 것 같은데, 핀란드나 스웨덴처럼 소위 영미권의 문학이나 너무도 유명해서 교양처럼 생각되는 러시아/독일/프랑스를 벗어나면 당장 서술의 느낌이나 문체부터 확연히 다른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더더욱 여러 나라의 책을 다양하게 장르와 주제 등 더욱 세부적인 분류에 따라 많이 읽어보고 싶다.  시대, 장르, 주제, 작가 등 모든 요소를 고려할 때 그저 그렇게 많은 책을 읽는 것으로도 낯선 나라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으니까.  


테마를 잡아내거나 행간을 찾아서 분석하는 능력이 너무나도 떨어지는 나는 이렇게 2-3주를 두고 읽은 책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듯한 문학적 서사에 대한 정리가 어렵다.  노벨상을 받은 책인데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걸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오랜 세월의 시험을 이겨내고 문학이나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책들조차도 한 시절에는 재미를 위해 읽는 이야기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부나 학습을 위한 가이드북, 개론서, 논픽션은 조금 다르지만 그래서 난 모든 책은 일단 소설이라는 정의를 두고 접근한다. 마찬가지로 가이드북이나 자계서, 논픽션은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읽으면 그만이지만 창작의 세계는 일단 시작에서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독서론이다. 


요 근래 독서의 구루 같은 것이 직업이나 커리어로 자리를 잡으면서 마케팅 차원에서인지 1년에 천 권을 읽었다는 둥, 3년간 만 권을 읽고 뭔가를 깨우쳤다는 지랄들이 종종 눈에 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이런 자들은 (1) 일단 책 한 권을 다 읽지 않아도 된다, (2) 모든 건 책이다, (3) 고로 몇 페이지 읽은 책이나 잡지까지 (4) 몽땅 다 '완독'의 뉘앙스를 주는 '읽은' 책의 범주로 잡고 통계를 쌓아 부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록 '완독'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사기에 가까운 마케팅이 아닌가 싶다.  


독서에는 왕도가 없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역시 '완독'이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읽고 금방 다 잊어버리더라도, 기본적으로 일부의 장르를 제외하면 독서은 '완독'이 기본전제이고 이 토대를 잡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기본이 안된 인간들이 너무도 많이 '선생'행세를 하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책은 끝까지 읽어내야 제맛이다.  최소한 완독을 여러 번 한 작품에 대해서 분석을 하고 이야기를 펼치는 건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한다.  제대로 끝내지도 않은 책에서 뭘 그리 할 말이 많은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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