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금년에는 하와이를 두 번 가게 된다. 이번 주말에 다녀오게 되는데 여러 가지로 마음이 급하다. 어지간한 사이 같았으면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로 무리가 되는 일정이지만 워낙 오래 알고 지낸 형이 상투를 튼다고 하니 아니 갈 도리가 없다.
지난 주에는 도착이 지연되었던 주문이 두 패키지가 한꺼번에 들어오는 바람에 이런 저런 가벼운 책을 위주로 실컷 읽을 수 있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어대는 편인데 문학은 워낙 늦게 즐거움을 알게된 탓도 있어서 그런지 흔히들 말하는 고전보다는 소설과 이런 저런 잡학의 책을 선호한다. 문학은 머리가 여유 있을 때 조금씩 읽기 위해서 꾸준히 모으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손이 덜 간 모양새.
보관할 공간이 있고 여유가 있다면 읽고 싶은 책은 어지간하면 모두 구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한국에 있었더라면 여러 모로 다른 형편이라서 또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현재의 살이에서 계산할 때 한국의 헌책방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쉽다. 여긴 여기대로의 나은 점이 있기는 하지만 가끔씩 보다 저렴하게 책을 구할 방법이 없나 생각하다 보면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또 특이한 서점은 책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서만 접할 뿐이지만, 한국에 있었더라면 '성지순례'는 어느 정도 하지 않았을까.
세 권의 각기 다른 책이지만 비슷한 것을 찾아 다니는 마음으로 읽었다. 우연이지만 나열한 순서가 그대로 만족도 1-2-3순위를 드러낸다.
'술 먹는 책방' 책을 사들고 옆의 바로 이동해서 가볍게 생맥주를 한 잔 마시면서 책을 볼 수 있는 '북바이북'은 무척 매력적인데 이 '술 먹는 책방'의 컨셉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조금 더 호사를 부리면 책방 옆에 이자카야를 붙여놓고 동업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한국에서는 프렌차이즈화가 되면서 좀 변질되었지만 사실 이자카야는 말 그대로 선술집으로 작고 아담하고 메뉴도 어정쩡, 술도 몇 종류만 팔아도 문제가 없는 작은 가게가 좋다. 서점 옆에 그런 작은 가게가 붙어 있으면 혼자 자리를 깔고 책을 보면서 가볍게 요기를 하고 술 한잔을 마시는, 늦가을 저녁이면 유난히 가고 싶어지는 곳이 될 것이다.
'술집 학교'는 상호인데 일본의 어떤 시인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차린 선술집이 계속 이어져내려오면서 쌓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역시 우연한 기회에 잠시 알바를 했던 저자의 눈으로 그려지는 노포의 추억담이랄까. 문제는 이 추억담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문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 다른 나라의 이야기라도, 심지어는 잘 모르는 것을 이야기하더라도 속에 잘 들어오는 책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정겨운 선술집의 풍경을 그려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지만, 우리네 80년대. 동네 어귀에는 하나씩 있었던 작은 포장마차가 갑자기 그리워진다. 낮에는 핫도그와 떡볶이, 튀김을 팔고 해가 진 저녁부터는 가벼운 안주와 술을 팔던, 필경 동네주민이었을 아주머니가 부업으로 하는 그런 수준의 포장마차 말이다. 지금은 말이 그렇지 '포장마차'라는 건 멸종되어 버린 지 오래가 아닌가.
'맛보다 이야기'에서는 미안하게도 '맛'도 '이야기'도 그리 맛깔스럽게 느끼지 못했을 만큼 모든 이야기가 뚝 떨어진 채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사는 곳이 문제인지, 아저씨라서 그런 건지.
책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팟캐스트 이곳 저곳에서 다뤄진 책. 상당한 고전(?)으로 알고 있는데 무대가 되는 시기는 '노르웨이의 숲'과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짧은 책이라서 그런지 상당히 함축적으로 전달되는 뭔가가 있는데, 난 그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하지만 늘 관념적으로 접근하는 버릇 때문인지 복잡하기 그지 없던 이십 대의 우리들을 추억해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순수했던 건지 항상 의식세계는 치열했었고 뜬구름을 잡는 듯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던 그 시절에는 누구나 그랬겠지만 세상은 그야말로 우리 앞에 펼쳐져 있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지금은 복잡한 주변환경과는 반대로 사는 건 심플 그 자체인데. 아침에 눈을 뜨면 씻고 나가서 일을 하고, 돈을 모으고 쓰면서, 주말에는 그저 쉬면서 온전히 자기의 시간을 갖기를 워하는 소박(?)함. 어인 일인지 달력이 2019년으로 넘어오면서 갑자기 맛이 없어진 술과, 줄어든 양에 우울해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그래도 우리의 나날'이라는 제목이 꽤 묵직한 울림을 준다. 그래도 젊었던 그 시절이 아닌가. 돌이켜보면 후회도 많고 부끄럽기도 한 일도 많았지만.
911 테러 당시만 해도 PATRIOT ACT가 2019년 현재까지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끝나지 않았고 끝날 수도 없는 '전쟁'이 미국의 일상에 자리잡을 줄도 몰랐다. 패닉에 빠져 우왕좌왕하는 국민을 몰아서 '안전'을 핑계로 자유와 권리를, 사생활침해를 허락해버린 끝에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게 검색대에서 짐과 몸을 스캔당하고 국내선여행에 30분 이상을 보안통과에 쓰고 있다. 911 직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가라앉은 지금에도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미국인'이 또는 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영장도 없이 체포를 당했는지, 구금되었었는지, 불법감금 후 고문을 outsource된 나라로 끌려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알카에다만 잡으면 모든 것이 끝날 듯 선전했지만 모두 알다시피 알카에다는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병을 위한 협상대상이고 엉뚱한 불똥이 튄 이라크는 80년대까지는 미국을 위해 일하던 독재자가 날아간 후 지금까지도 엉망이 된 상태이고 그 속에서 태어난 IS는 이제 범국가적인 테러세력이 되어있다. 911이 터졌을 때 지성인들이 경고했던 대로, 미국의 경제와 사상이 큰 영향을 받았고 더욱 통제되었어야 할 부의 사유화와 세습화는 통제를 벗어나고 시민의 자유와 인권은 911 이전과 비교해서 훨씬 더 큰 틀에서 정부의 간섭을 받고 있는 것이 2019년 미국의 현실이다. 이걸 작은 스케일로 극화한 것이 '리틀 브라더'에서 보여진 샌프란시코의 모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낯익은 지명과 거리, 서점의 이름들까지 이곳에 사는 덕분에 아주 친숙하게 들여다 본 소설의 세계는 언제든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읽는 재미를 넘어 꽤나 등골이 서늘한 경험을 했다. 놓기는 쉽지만 다시 찾기는 어려운 시민의 권리와 정의를 얻기까지 200년이 넘는 시간과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요구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가와 인종을 넘어 지구인이라는 하나의 공통분모을 테제로, 넓고 큰 시각에서 접근한 세계사의 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웰스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무척 잘 쓰인 책이다. 아주 평범한 사실적인 내용을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술술 넘어가는 좋은 flow를 보면 이 책은 잘 쓰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열정적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100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책인데 시간의 차이를 많이 느끼지 못할 만큼 timeless한 면이 있다. 이 책에서 다뤄진 아시아의 이야기에 한국이 누락되었음은 많이 아쉽다. 한글의 과학성과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알았더라면 웰스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더욱 아쉽다. 대문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문화와 그의 손으로 그려지는 서술이 궁금하기만 하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은 책의 세계에서는 항상 맞아떨어지는 표현이 아니지만, '경관의 피'는 띠지에 엮인 이런 저런 선전문구가 전혀 과정이 아님을 보여줄 대단한 스케일과 재미가 있다. 전후 일본의 경찰, 그 아들이 자라서 보여주는 전공투시대에서 버블붕괴직전까지의 일본, 그리고 손자가 보여주는 현재의 일본까지 삼대에 걸쳐 그려지는 이야기가 전혀 지겹지 않게 펼쳐진다. 전후에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면서 마쓰보토 세이초나 요코미조 세이시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다가 어느새 현대작가들의 작품으로 옮겨진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하는 면도 있어서 여러 모로 변화를 볼 수 있으면서도 탄탄한 구성이다. 과연 그렇게 끝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결말의 당위성 또한 수긍할 수 있을만큼 지극히 현대적인 맺음이 매끄럽다. 다음의 책을 바로 읽을 생각이다.
그럭저럭 정리를 했으니 하루의 마무리를 향해 달릴 시간이다. 벌써 2019년의 1/4이 지나고 있으니 금년도 금방이다. 결코 젊지 않은 나이임에도 이룬 것이 없다는 생각에 우울하지만,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것 빼고는 신통하게 잘 하는 것도 없으니 그렇게 순간 순간을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조금 더 건강하고 부지런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