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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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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의 지위로서 아무런 불편도 모자람도 불안도 없던 그가 그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던

투명한 계급으로서의 삶으로 풀쩍 내려간다. 그 세계에서 그는 관찰자로서 그저 탐색전만 

펼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세계에 뛰어들어 그 세계의 사람이 되어보기로 한다.


이는 <긍정의 배신>으로 사회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긍정적' 태도와 사고로 치환시켜버리려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파헤쳤던 저자,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이야기다.

이번엔 <노동의 배신>이라는 책으로 돌아온 그의 '배신' 시리즈 2부작인 셈이다. 


긍정에 이어 우리를 배신하는 것은 다름아닌 '노동'이다. 무슨 연유에서인가 하니,

저자가 2000년대 초반 미국의 노동시장에서 겪었던 노동경험이 적나라하게 이를 고발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노동에 대한 기본적인 것들-충분히 상식적인 수준의 것들-은 무시되고

잊혀진지 오래다. 그것도 무참히. 


노동.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

이 행위를 통하여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얻고 이를 통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으며

삶을 살아간다. 노동과 삶은 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이 책에 드러난 그 세계 사람들의

삶과 노동은 그 연결고리가 부실하다. 제목 그대로 삶과 이어저야 할 노동이 삶에게 고하는

배신인 것이다.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당연한 명제는 이들에게 너무나 벅찬 기대다.

하루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은 더 나은 노동환경을 위한 그들의 마땅한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그들의 삶을 그러한 노동으로 매번 새롭게 적응시켜 나간다. 한마디로 그들에겐 그들의 삶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기 위한 '여유'가 없다. 그들의 노동은 그들의 삶을 야금야금 빼앗아간다 Nickel and Dimed.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더이상 힘쓸 힘이 없도록 그들의 노동은 에너지를 고갈시켜간다. 방관자 혹은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체험자로서 그들의 노동과 삶에 뛰어든 

저자의 르포르타주가 타당한 설득력이 느껴지는 것도 이 대목이다. 저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그들을 생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의 입장이 되어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삶과 노동을 겪는다. 

그리고 그들이 어째서 더 나은 노동환경으로 옮겨가지 못하는지를 분석해간다. 그곳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결코 단순하지 않은 문제들이 얽혀있기에

읽는 이들은 씁쓸함을 더해가지만, 그럼에도 책장을 덮으며 약간의 희망 또한 조심스레 걸어본다.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시간을 쪼개가며 일하지만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들, 워킹푸어. 그들은 자신의 건강과 가정, 삶을 포기하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의 '갑'이 되는 주체들에게 '주고 또 준다'는 박애주의자라는 웃지 못할 이 표현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이며, 어디에서부터 고쳐나가야 하는 것일까. 


소설만큼 흥미진진하고 에세이처럼 진솔한 이 책이 어느 순간부터 두렵고 무서워지고 있었다.

나도 이들이 될 수 있음을. 

혹은 보이지 않는 이들의 손길과 희생으로 마음껏 누리고 사는 그들이 될 수 있다는 것.

이 둘 다 무섭고도 소름끼치는 일이다.  


이 책을 쓴 저자도 결국은 자신의 원래 삶으로 돌아온다. 중산층으로서,

이들의 서비스로 이루어진 편리함과 안락함을 누리는 위치로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숨은 주인공들은 여전히 노동의 배신을 매일같이 겪고 있는 삶을 진행중이다.

언젠가는 여기서의 삶을 끝내고 다르게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이들에게 애초부터 허락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은 끝이 날 체험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삶'이라는 사실이 이 책을 두렵고 무섭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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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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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알라딘 책이 도착했다는 택배안내 문자를 받고서, 얼른 집으로 달려가 확인하고픈 맘으로 가득했었다. 어떤 책이 왔을까 궁금해하며 소포를 뜯는 순간, 흠칫 놀란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책 표지부터 풍겨져 나오는 음산한 기운에 등줄기엔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듯 했다. 그리고 실제로 책을 읽으면서 올 여름 내내 지독했던 열대야를 그나마 등골 오싹하게 보낼 수 있었기에, 알라딘에 뒤늦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뱀파이어라던가 드라큘라라던가, 아무튼간에 공포물과 관련된 것에는 문외한을 넘어 꺼려하는 나에게 이 책은 쿨매트보다도 더한 서늘함을 선사해줬기에)


책을 읽는 내내 감탄했던 것은, '뱀파이어'라는 주제로 이렇게 장대한 글로 한 권의 책을 만들어낼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그리고 지금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영역으로 변주된 뱀파이어의 역사를 깊이 있게 그려냈다는 것이 그저 놀라웠다. 뱀파이어에 대한 책이라는 소개를 읽고서, 뱀파이어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바닥인 나로서는 살아있는 육체에 흐르고 있는 피를 생명수 삼아 죽음도 삶도 아닌 그것의 연장을 일궈내는 뱀파이어에 대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을까 했었다. 그러나 작가는 누구나 생각할 법한 차원의 뱀파이어 이야기를 넘어서, 뱀파이어라는 존재를 다각적인 차원에서 분석하고 해석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새로운 관점과 통찰을 제시한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 희생자와 악령 등의 이분법 논리는 뱀파이어의 세계로 넘어오는 순간,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헝클어진다. 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희생 제물 삼아 그것으로 영속해나가는 무서운 그 무엇에 대한 이야기들은 고대 신화에서부터 종교를 통해서도 빗대어 찾아볼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 이성의 빛으로 인해 사그라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낭만주의 시대의 환상에 덧입혀져 더욱 매혹적인 형태로 거듭난 뱀파이어들의 존재는 인간의 죄와 공포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이 상상력에 더해져 탄생한 만큼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그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시간과 공간에 따른 뱀파이어의 화려한 변주를 따라가는 이 책이 결국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뱀파이어라는 것이 실제로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피상적인 물음이 아니다. 저자는 단 한번도 책에서 뱀파이어는 실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마치 실재하는 듯 글을 써내려가고 있으며, 뱀파이어를 생생히 기술하면서도 실존하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글과 그림과 영화와 음악과 문학에 존재하는 뱀파이어를 찾아내 이야기를 풀어낸다. 결국은 뱀파이어라는 상상의 산물을 만들어낸 것은 인류 세계 속에서 살아나간 인간들의 감정과 생각과 나름의 철학과 논리가 실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뱀파이어가 진짜로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뱀파이어라는 것이 가지는 인간 세계속의 의미를 인류 문화사적으로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가장 큰 핵심을 가져가는 것이 될테니 말이다. 


덧. 뱀파이어의 존재 유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며 자신있게

     뱀파이어?그런게 어딨어-하면서 책장을 넘기고 잠을 청했지만,

     방문의 창을 넘어 내 피를 노릴것만 같은 뱀파이어와 다음 날 일어나보면 

     나도 그와 같이 되어있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뒤척이던 밤이 있었음을 털어놓는다. 

     

무덤 속 망자들이 씹고 쩝쩝거리며 먹는 일에 관한 이 이야기가

폭염과 열대야로 지친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줄, 귀곡산장체험 뺨칠만한 책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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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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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의 신간추천목록을 작성하려, 한달 동안 새로 나온 책을 훑어보고 있던 중에

단연 내 눈과 맘을 사로잡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이 책'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중전공 과목인 사회학에 푹 빠져 본 전공을 제쳐두고 더 열심을 내어

공부했던 나의 전력 때문이리라. 1학년 신입생 시절, 심리학과 사회학 두 과목 중에

택일해 수강했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모든 친구들이 심리학을 택할 때

나와 몇몇 소수의 친구들만 사회학을 택했더랬다. (사회학은 딱딱해 보이는 반면에

심리학은 재미있어 보인다는 것이 다수 친구들의 선택 이유였지만 난 단언할 수 있다.

사회학은 심리학만큼 재미있다. 아니 어쩌면 심리학보다  더 재미있다고.)


심리학이 인간의 내면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사회학은 막연히 사회를 공부하는 것일 거라는

얄팍한 배경지식만으로 첫 수업에 들어갔던 나는 수업계획표에 적힌 배울 내용을 보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 꽁트부터 시작해 맑스니, 베버니, 뒤르케임이니 하는 사회학자들의

사상을 둘째 치고(이들을 이해하는데는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였고, 지금에서도 난 다 이해

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들이 건드렸던 사회의 여러 모습들; 노동, 종교, 이주, 교육, 시민, 성

등등의 각종 문제들을 배우는 것이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었다. 사회학 입문을 듣고나서

난 결정했다. 내가 대학에 와서 배워야 할 내용은 다 여기있구나. 무릎을 탁 치며

이중전공으로 삼을 것을 말이다.


비록 학문에 대한 흥미와 학점은 비례하지 않았지만, 사회학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그 누구 못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나는 이 책의 제목을 본 순간, 흡사

사회학 입문 첫 수업을 듣던 순간과 비슷한 감정을 받았다. 어쩌다 들었던 사회학 수업이

만들어놓은 지금의 내 모습처럼, 이 책의 저자 역시 '어쩌다'라는 그 순간의 선택이

그로 하여금 이 책을 쓰게 만들었을 것이리라.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저자는 어쩌다가 사회학을 만나게 되어서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어쩌다 이런 책을 쓰고,

나는 또 어쩌다 이 책을 이렇게 만나게 되었을까.


오스트리아 출신인 미국 사회학자인 저자 피터 버거는 루터파 사제가 되려다

이주한 미국 사회부터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사회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회학에

발을 내딛었다며 자신과 사회학의 첫 만남의 순각을 회고했다. 

사회학을 공부하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란

자그마한 믿음을 내가 가졌던 것처럼 저자 역시 막연히 사회를 알 수 있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에 사회학을 선택한 것이다. 

사회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을, 내가 속한 이 사회를 

좀 더 잘 이해하고 깨달을 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환상적인 이야기인가.

사회를 알고자 할수록 알 수없는 미지의 영역은 불어나기만 하고,

도저히 갈피가 잡혀지지 않는 미궁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내가 사회학자가 될 운명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던 것 같다.

이런 지나한 과정마저도 즐기고 결국에는 이겨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사회와 사람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사회학자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피터 버거는 내가 생각해왔던 사회학자 상에 딱 들어맞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서전이라기엔, 사회학자로서의 피터버거의 모습이 중점적으로 다뤄져있긴 하지만

그래도 난 감히 이 책을 피터버거의 자서전에 버금간다고 말하고 싶다.

어쩌다 사회학의 세계에 발을 내딛은 저자는 사회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회와 사람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성찰하려는 열망은 절대 그저 주어질 수가 없다.

사람과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지속적인 관심을 쏟아부을 수가 

없다. 저자는 늘 그것에 관심을 두고 항상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고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사회현상을, 사람들을 공부해나갔다. 

사회학자라는 직업적 지위는 단지 저자의 꿈을 뒷받침해주었던 수단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회학자 피터버그 안에는 피터버그라는 한 인간이 있었다.

그 인간은 젊어서도, 늙어서도 한결같이 세상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그 모든 것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사회학을 알고있든, 모르든 간에 이 책을 집어든 독자라면 누구든, 피터 버거가 나눈

세상과의 대화속으로 초대받은 것이다. 그리고 기꺼이 그 대화속에 끼어든다면 좋겠다. 

피터버거가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었다고 고백한 이 한권의 책을 통해 

우리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것일지 모른다.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을, 당신이라는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은 저자의 빛나는 눈망울과

그가 누빈 세상 속 흔적을 공유할 수 있는 값진 기회가 이 책 한 권에 다 들어있다.


보다 살아있는 사회학을 접하고 싶은 분들, 

사회학이 뭐하는 학문인지 알고 싶으신 분들,

사회학이 무엇이든 관심없고, 세상과 사람이 궁금한 분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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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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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버리라는, 프울 첼란의 <빛의 강박>(1970)의 시구를 인용한

이 도발적인 제목의 책은 구성과 내용에서도 그  참신성이 돋보인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처럼, 책은 2010년 6월부터 7월에 걸쳐

5일 밤동안 글로써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그 독특한 문체와 그것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저자와 함께 독자마저 밤을 지새우며 기어코 책을 읽어내려가도록 만드는 힘이 있다.

2년전 여름밤에 쓰인 이 글들을 2년 후 여름인 지금 이 때 읽는다는 짜릿함도 느낄 수 있다.


마치 녹취록을 풀어낸 듯한 이 책은 책과 혁명에 대한 주제로, 역사적 인물들과

종교, 철학, 사상이론을 함께 다루고 있음에도 그리 어렵거나 난해하지만은 않다.

반복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저자는 간결한 문체를 통해 끊임없이 일관된 주제를 향해

독자들을 이끌어 올리는 일관성을 책 전반에 걸쳐 보여주고 있다. 


얼핏 보기에 연관성을 퍼뜩 떠오르기가 힘든 책과 혁명이라는 두 키워드는 그 일관성으로

하여금 동의어로 묶이게 된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책을 '읽는' 그 행위는 그 자체로 혁명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러나 읽는다는 것이 그저 도처에 널려있는 

정보를 눈으로 보고, 그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독선이나 오만이 아니라,

'제대로' 읽는 조건 하에서 혁명은 가능하다. 제대로 읽는다는 것에 대해 저자는

읽을 수 없는 것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제대로 읽어버린다는 것은

미쳐버리는 것이기에 그런 미치는 경지에 도달하지 않은 모든 읽기의 행위는

읽는다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읽음, 텍스트, 책을 둘러싼 모든 것은 '문학'이라는 큰 범위에 속하게 된다.

텍스트를 읽고, 제대로 깨달아 미쳐버린 이들은 현대에서도 그 이름이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 되었고 그들의 혁명으로 지금이 만들어진 셈이다.

마르틴 루터도, 무함마드도, 니체도,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버지니아 울프 등도

그런 의미에서 모두 혁명가이면서 문학자였다는 것이 저자의 표현이다.

이들은 책을 고쳐읽으며, 고쳐 썼고, 그 행위는 법을 고쳐쓰는 것이었고

법을 고치는 것이 결국 혁명이라는 고리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혁명이라는 것은 폭력에 선행하는, 아니 폭력을 수반하지 않아도 되는

성질의 것임에도, 혁명은 역사적으로 대개가 투쟁과 혈을 그 대가로 치뤄왔다. 

이는 제대로 '읽음'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일까. 제대로 읽기만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비극들은 그래서 안타까울 뿐이다. 


경어체와 나에게 직접 말하는 듯한 생동감으로 가볍게 책을 읽어내려가던 나의 마음가짐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없다고.

제대로 읽는다면 미쳐버리는 것이라고. 

반복되는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읽는다는 행위를 그 무엇보다도 숭고한 행위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태껏 책을, 문장을, '제대로' 읽었던 적이 있던가.

그랬다면 나는 내 안에서 작은 혁명을 일으켰을지도 모를 일인 걸 보면, 아직은 아닌 것 같다.


무함마드가 천사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았을 때 받았던 첫마디처럼,

이 책 역시 나에게 이 한마디를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읽어라-. 


이 여름, 책을 제대로 읽고 싶은 모든 이들이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앞서

읽어볼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단 한 문장이라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도록,

되짚고, 반복하고, 곱씹어 책을 읽는 경험이 이 여름밤의 기록을 통해 가능해질 것만 같다. 

 


첫째 밤 문학의 승리 2010년 6월 15일

둘째 밤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2010년 6월 28일 

셋째 밤 읽어라, 어머니인 문맹의 고아여 2010년 7월 6일

넷째 밤 우리에게는 보인다 2010년 7월 15일 

다섯째 밤 그리고 380만년의 영원 2010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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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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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으며 세 가지 점에서 놀라웠다. 


하나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저자의 글재주에 있었다. 주변사람에게서 작가 '강신주'씨의 글솜씨에 대한 칭찬은 들어왔던 터였다. 머리말만 읽고도 나는 절로 감탄이 나왔다. 대단한 글솜씨였다. 말의 형식은 현학스러움에 절어있지만 실상 그 내용은 비어있는, 뭔가 사기를 당한 듯한 느낌을 주는 글이 있는가하면, 글이 담고 있는 내용은 굉장한데도 글이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가벼운 느낌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 글은 글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나무랄 데 없이 잘 읽히는 깔끔한 문체와 더불어 그 글들이 담고 있는 내용 또한 울림을 주고 있다. 이는 아마도, 강신주라는 작가와 김수영라는 시인의 삶이 혼연일체된 듯한 완벽한 만남에서 기인한 듯 하다. 


두번째는, 시인 김수영의 재발견이었다. 김수영 시인의 대표시인 <풀>을 처음 접했던 건, 교과서와 문제집에서였다. 시인의 삶과 생애는 생략된 채, 시의 프로필을 암기해야 했던 주입식 국어교육의 피해자가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 시를 토해낸 시인의, 그 시인만의 삶을 알지 못한 채, 그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리고 시인의 의도한 바를 '고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놀라웠다. 내가 익숙하게 잘 안 다고 생각했던 시들도, 그 시인이 어떠한 인생 속에서 뱉어내고 토해낸 것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된 순간이었고, 그 순간마다 전율을 느꼈다. 시처럼 솔직하고 진솔한 말의 모음이 있을까. 고르고 골라, 거르고 걸러, 그렇게 정제된 시어 하나하나는 자신을 만들어낸 주인의 생애만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마치 충신처럼 혹은 자식처럼, 그렇게 시들은 자신을 키운 주인을, 자신을 낳은 부모를 그리고 있다. 그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절대 시는 읽힐 수가 없다는 진리와도 같은 이 명제를 나는 이 책을 통해 실감했던 것이다.


세번째는, 강신주와 김수영의 교감이었다. 이 둘은 분명 만난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 철저히 다른 시대를 살아갔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터이다. 하지만 이들은 마치 원래 알고 있던 사이인 마냥, 이 책을 통해 둘 만의 교감을 다른 이들에게도 알리고 있는 듯하다. 진정한 시인으로서 살아갔던 김수영이 사람을 사랑하는 철학가 강신주에게 자신의 삶을, 그리고 시 속에 담긴 자신의 세세한 감정과 느낌들을 모조리 내어보이고 있는 듯이, 이 책은 그렇게 시와 김수영의 삶이 어우러져 그 전체가 하나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시와 삶을 엮고 있는 작가 강신주의 삶 역시도 빠져서는 안 될 이 책의 필수성분이다. 그래서 이 책은 강신주만의 것도, 김수영만의 것도 아닌, 이 둘의 교감을 적어내려간 소통과 공감의 기록이다. 실제로 이 두 사람을 이어주고 있는 것은 김수영이 살아 생전 이 땅에서 써내려간 시, 시 뿐이다. 시가 매개가 되어 이 둘을 이어주고 그 탄생품인 책은 나아가 독자까지도 연결해주고 있다. 길지도 않은 그 시들이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렇게 하나로 이어주고 있다는 것이 그저 놀랍고 감사했다. 


시인 김수영이 지금 살아있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리고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을 읽었더라면 그는 어떤 표정으로 자신의 시와 삶이 얽혀있는 이 글을 읽어내려갔을까. 자신의 삶과 작품을 위한 책을 세상속에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시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시대를 넘고, 세대를 넘어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이 전해진다는 것은,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진정성의 힘만이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기에. 그리시인 김수영은 그런 진정한 시인으로서의 삶을 온전히 겪어냈노라고 이 책은  증명하고 있기에. 



시인 김수영이, 그리고 그가 살아낸 단독적인 삶과 시들이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추천한다.

더불어 시가 낯설다고만 생각하는 모든 이들에게는, 시와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될 책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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