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제이 보고서; 킨제이, 자신에 대한 보고서
#1. 왜 진작 몰랐을까. 덩치 크고 복잡해도 인간도 흑벌이란 걸
자연과 야생을 벗삼아 자라온 한 소년이 있다. 하루종일 숲에서 뒹굴고 만나는 동물마다의 그림을 그리던, 절대 혼자가 아니었던 소년은 자연과 생물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공부를 해보고자 생물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바로 이 소년이 후에 남성과 여성의 성행동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한 알프레드 킨제이다. 흑벌에 대한 연구를 주제로 강단에 선 그를 아버지는 탐탁지 않게 여기고, 당시 그의 제자였던 아내는 존경과 사랑의 눈길로 바라본다. 서로의 '남다름'에 이끌린 킨제이와 아내 맥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게 된다. 킨제이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를 '벌레나 모으러 다니는' 한심한 인간으로 취급하고 그런 아버지를 아내에게 보인 후 아이처럼 운다. 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갖추고 자신의 분야에 열심히 매진을 하며 살아온 그도 정상적이지 못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언제나 트라우마였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트라우마 앞에서 그는 아버지의 관심과 사랑을 바라는 마냥 어린 자식일 뿐이었다.
아내와의 결혼과 결혼생활에 대한 강의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사람들의 성행동에 대한 연구를 하기로 결심한다. 자연을 벗삼아 왔던 그에게 자연이 탐구대상이었듯이, 결혼 후의 그의 일상 또한 그의 또 다른 탐구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킨제이 그는 무엇을 바라고 얻기 위해 연구를 행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궁금했고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파고들었다. 그렇기에 킨제이 보고서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흑벌 연구에 매료됐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흑벌 하나하나 마다의 다양성과 특별함이었다. 그리고 그는 성 연구를 통해 인간을 탐구해나가면서 깨닫게 된다. 덩치 크고 복잡하긴 해도 인간 역시 흑벌처럼 저마다 다른 '특별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영화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한다. '모두가 다 다르다'는 것을. 다름을 연구하는 영화 속 인물들의 다름은 '킨제이보고서'와 더불어 또 다른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저마다 다름을 지닌 킨제이를 비롯한 여러 등장인물이 다름을 풀어나가는 것. 바로 이 영화의 숨겨진 묘미다.
#2. 사회적 제약- 서로 상처주지 않기 위한 배려
인간 성행동 연구의 사전조사 격으로 킨제이와 그의 제자 마틴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기 위해 각지를 떠돌며 막무가내 들이대는 인터뷰를 하게 된다. 그러다 동성애에 대한 연구로 이성애와 동성애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면서 킨제이와 마틴은 사회적으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아내는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린다. 사랑 없이도 섹스는 가능하다며 본능을 자제하는 것은 사회적인 제약 때문이라는 남편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상처주지 않기 위해 제약한다고 생각하지 않느냐고. 당신과의 결혼 때문에, 그리고 아이 때문에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남자와 자지 않는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는 아내 앞에서 남편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킨제이는 이 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신의 성행동 연구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킨제이가 제자와 성관계를 가졌느냐 하는 것이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남성 성행동에 이어 여성의 성행동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면서 킨제이 연구단은 내부 자체적으로 실험을 하게 된다. 바로 연구원 서로 간의 아내를 바꿔 성행동을 연구해보는 것이었다. 과학실험 연구에 있어 결코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시킬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킨제이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그 실험연구로 인해 연구원 간의 불화가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실험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게 될 줄 예상치 못했던 킨제이에게 제자 마틴은 쏘아붙인다. 사람들 모두가 교수님처럼 냉철하고 매정하진 않다고. 우리는 실험용 쥐가 아니라고. 망할 섹스가 인간에게 전부가 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킨제이는 정말로 사랑이라는 감정과 섹스를 완전한 별개의 것으로 여겼을까? 동물과는 다른 '인간'만의 성행동을 연구하고자 했던 킨제이는 오히려 사랑이라는 감정을 더욱 염두해두지 않았을까. 그랬기에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과학적인 연구방법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을 아니었을까.
#3. 킨제이보고서가 남기고 간 것
킨제이는 미국 전역을 돌며 만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 개별적인 인터뷰를 통해 미국사회의 다양한 성행동에 대한 보고서를 세상에 알리게 된다. 이 보고서는 세간의 이목을 끌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뒤 이은 여성 성행동 보고서는 금기시되던 여성성에 대한 내용으로 사회적 논란이 일었고, 록팰러 재단의 자금 지원이 중단되면서 킨제이의 연구는 난항을 겪게 된다.
그러나 킨제이의 연구에 있어 가장 큰 치명타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연구자 자기 자신의 연구와 삶에 대한 의지 상실이었다. 삶이 곧 연구이며 연구가 곧 삶이었던 킨제이에게 연구와 삶의 의지 상실은 곧 킨제이 자신의 상실과도 이어지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나락에 떨어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연구와 삶 이었다. 자신의 연구로 인해 사회가 변화했다며 자신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손을 꼭 잡아주는 피실험자, 아버지의 힘들었던 유년 시절을 이해할 수 있게 된 아버지와의 성행동 인터뷰는 연구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그의 의지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만 명이 넘는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 피실험자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있다. Am I normal? 제가 정상인가요? 저 평범한가요? 이런 게 일반적인가요?
남들과 다르다는 것에 사람들은 대부분 불안함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다. 성행동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성행동이 특이한 것인지, 남들과 다른 자신은 변태취향인 것인지 걱정하며 그들은 한결같이 묻는다. 이런 나는 정상인가요? 남들과 같나요?
이에 킨제이는 답한다.
"자신이 하는 성적인 행동을 남들도 할거라고 여기지. 허나 소위 변태성욕이라는 것도 생물학적으로 정상적인게 많아. 사회는 도덕적인 잣대로 이를 비난하겠지만 그걸 이상하다고 하면 오히려 우스운 거야.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야. 문제는 다들 같아지길 원한단 거지. 다르다는 기본적인 조건을 무시하고 대다수와 같아지고자 열망하여 본능에 충실하지 못하고 말아. 금지된 것에 쾌감을 느끼면 강박관념이 돼."
모두가 같아지는 사회. 그 얼마나 단조롭고 재미없을까. 만약 사람들의 성행동이 모두 다 지극히 평범하고 동일했다면 킨제이보고서는 탄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모두가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서 살아가는 사회는 그 역동성만큼이나 아니 그 보다 더 가치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제2의 킨제이가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킨제이보고서는 단순히 남녀의 성행동만을 담고있지 않다. 다름의 가치. 킨제이보고서가 남긴 또 다른 흔적이다.
+) 영화를 보면서 인간 킨제이를 엿볼 수 있었던 장면이 있다.
인터뷰 사전연습을 하면서 제자 마틴과 킨제이가 나눈 대화 장면이다.
-하나 더 묻겠습니다. 개인사를 다 말씀하셨죠. 유년시절, 가족, 경력, 성관계를 가졌던 사람들까지. 근데 사랑에 대한 언급이 없군요.
- 사랑은 측정할 수 없으니까요. 측정하지 못한다면 과학이 아니죠. 그 문제점을 골똘히 생각해봤어요.
- 문제점이요?
- 사랑에 관한한 우리는 문외한이니까요.
- 사랑이 중요하다고 보시는군요.
이처럼 객관적인 통계를 다루는 과학자이면서도 사랑을 중요하게 생각한 킨제이. 마지막 장면에서 유년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던 숲에서 아내에게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어떤 종족은 나무가 불완전한 인간이라며 한자리에 붙박인 걸 슬퍼한다고 믿지만 자신은 불평하는 나무를 본적이 없다고. 나무는 나무란 사실을 사랑한다며 아내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던 그 손에는 언제나처럼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한 여자의 남자로서 한 곳에 뿌리내렸던 그는 과학자이기 전에 삶을 사랑했던, 사랑할 줄 알았던 한 인간이었다. 이제 '킨제이'하면 '보고서'가 아니라 '인간' 킨제이가 떠오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