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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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지도 수천 년이 흘렀다. 그리고 수 천년동안 문명의 가장 큰 숙제는 말 그대로 먹고 사는 문제였다. 굶주림과 질병은 끈질기게 사람들을 위협해왔고, 서구사회조차도 불과 백여 년 전에서야 이 문제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의 곳곳에 남아있는 굶주림과 질병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서구문명사회는 인류의 오래된 숙원이었던 하늘을 나는 것과, 지구 밖을 탐사하는 것을 이뤄냈지만, 굶주림은 여전히 끈질기게 세계의 절반을 뒤덮고 있다. 그렇지만 서구사회로 대표되는 굶지 않는 사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굶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굶주림이란 중세시대의 페스트 이야기만큼이나 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과 중세시대의 페스트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몇 명이나 죽었는가 하는 통계일 뿐이다. 게다가 페스트와는 달리 생물학적 전염도 되지 않는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은 더더욱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장 지글러의 저서들은 굶주림에 의한 죽음을 멀리서 보고있는 사람들을 그 현장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는 유엔에서 기아와 질병을 막기 위해 유엔 식량조사관으로 일할 당시 직접 목격하고 느꼈던 것들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처참한 현실을 느껴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험을 한 독자들은 굶주림에 대한 시선을 바꾸게 된다.


내가 몰랐던 굶주림의 모습

 사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흔한 교훈을 주는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기아에 대해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식량 분배가 잘 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의 아이들이 음식을 구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다‘는 정도의 개념만 있었을 뿐이다. 누가, 어떻게 식량을 통제하고 왜 아이들이 음식을 구하지 못해 죽는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고, 알 수도 없었다. 단순히 식량의 분배는 경제논리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굶어죽는 아이들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명의 아이들이라도 덜 죽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그쳤다. 그 때 나는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질병으로, 자살로, 사고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아사(餓死)또한 일종의 후진국에서 주로 나타나는 죽음의 한 종류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이 책 속에 그려진 굶주림의 모습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굶주림의 가장 잔인한 점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게 된다는 점인데, 그 고통은 사람들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고, 짐승과 같이 만든다. 그에 관한 내용은 중국의 멍레이, 관궈펑, 궈샤오양이 쓴 ‘1942 대기근’이라는 책에 대한 출판사 서평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기러기 똥을 먹고, 흙을 먹고, 사람고기를 먹은 자들도 결국은 모두 굶어 죽었다”. 여기에는 심지어는 가족끼리 서로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결국 굶주림은 사람이 사람답게 죽을 권리도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굶주림은 단순히 죽음만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다. 성장기의 어린아이나 태아의 경우 충분한 영양섭취를 하지 못할 경우에 몸에 갖가지 장애가 남게 되는데, 뇌가 덜 자라고, 눈이 안보이게 되고, 얼굴에 구멍이 나서 턱이 녹아내린다. 게다가 굶주림으로 약해진 몸은 기생충과 세균에 감염되어도 제대로 면역반응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이게 바로 현실에서 굶주림의 진짜 모습이었다.


후원은 값싼 면죄부일지도 모른다

 TV를 보다보면 세계의 굶주리는 아이들, 특히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가끔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동정심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고, 식량지원과 구호활동을 위해서 얼마간의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죄책감을 벗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내가 얼마를 냈으니까 몇 명이 얼마동안 음식을 먹겠구나.’ 하는 구체적인 만족감을 얻을지도 모른다.
 지구상의 굶주림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운 아이들을 보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거의 이와 비슷하다. 동정심과 죄책감. 그리고 이어지는 기부.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기부 활동, 더 나아가서는 적극적인 모금과 봉사활동으로 지구상의 굶주림을 퇴치해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굶주림의 원인을 해결 할 수 있을까?
 지글러는 자신의 저서에서 대자본이라고 불리는 거대기업들과 금융투자자들, 그리고 일부 선진국들의 정부를 굶주림을 이용한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이 대자본들은 주로 식량과 연관되어 있는 기업들로, 직접적으로는 공급량 조절과 개발도상국 정부들에 대한 압박을 통해 자신들의 사업이익을 최대화 하려고 한다. 또한 일부 선진국 정부는 이러한 대자본들이 이익을 위해 벌이는 수많은 비도덕적인 행동을 묵인 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굶주림을 무기화하기도 했다.


영화가 아닙니다 여러분, 실화입니다

 이 책에서 대자본과 정부가 결탁해서 벌인 사건 중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사건은 칠레의 아옌데 정권에서 일어난 피노체트의 쿠데타였다. 이 배후에 네슬레와 미국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여기서 네슬레는 여러분이 마시는 바로 “그” 네슬레다) 그들이 쿠데타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더 충격적이었다. 당시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의 정권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일정 연령 이하의 어린이들에게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자 네슬레는 이 정책이 자신들의 이윤을 감소시킬 것을, 미국은 칠레의 사회주의화가 남미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결국 그들은 아옌데 정권을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이 콤비는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칠레정부를 고립시켜서 정부정책들을 방해하기 시작했고, 결국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한국 네슬레 홈페이지에 가서 네슬레 사업운영 원칙을 보면 1번에 소비자의 영양과 건강, 복지를 추구한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과연 칠레 정부에 대한 쿠데타가 칠레 국민들의 복지를 증가 시켰는가? 또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피노체트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미국은 선거방식에 의해 성립된 정부보다 쿠데타로 성립된 정부가 더 민주적으로 수립된 것으로 보는가? 결국 이들의 이러한 명분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들의 진짜 관심은 자국의 이익, 또는 자사의 이익일 뿐이었다. 그리고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는  저개발 국가들의 국민들이 대자본과 선진국 정부가 맘먹기에 따라서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도, 빈곤에 허덕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글러는 바로 이런 점에서  거대 권력들이야 말로 세계의 굶주림에 가장 큰 책임이 있으며, 이들이 굶주림이라는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학살자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Good Market, Good Money


주의: 중심을 잘 잡을 것

 그러나 이 책을 읽을 때 주의 할 점이 있다. 첫째는 지글러가 묘사한 끔찍한 죽음을 보고나서 너무 큰 자책감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은 주로 거대 권력들의 비도덕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속의 끔찍한 죽음을 간접적으로라도 인지하게 되면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런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을 보게 되면 그들에 비해 풍족한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자책감에 빠질수 있다. 굶어죽는 사람들은 빵 한 덩어리도 먹지 못하는데, 자신은 혀를 즐겁게 하기위해 미식을 즐긴다. 심지어 과도한 열량과 영양소 때문에 인위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에너지를 소비해야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죄책감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생활이 아프리카의 난민들처럼 비참해 진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즉, 나의 삶의 질을 낮추는 것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게 놔둬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을 때 두 번째 주의 할 점은 앞의 것과는 반대다. 독자가 지글러의 거대 권력에 대한 비판을 보고나서 그의 주장을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한 면죄부로 삼는 것이다. 물론 지글러는 대자본과 정부들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는 어떠한 책임과 의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굶주림에 의한 대학살에 침묵으로 동조한 것과 다름없다. 이런 행동은 멜서스의 주장을 바탕으로 빈곤과 기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외면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지구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120억 가량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선진국 정부들과 대자본의 다국적 기업들은 시장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식량생산을 제한하거나 식량폐기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공급량을 조절해서 충분한 수준의 이윤을 내는 것은 기업의 합법적인 경영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가격정책으로 생명을 잃는다면 이러한 경영활동을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기업들이 아프리카나 남미 등지에서 지역경제를 파괴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경작지에 바이오 연료를 만들 작물을 심어서 대량의 계절적 실업과 식량부족 사태를 야기하는 것 또한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 정부와 세계기구들이 정말로 기아를 퇴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려고 했다면 먼저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국가들에게 비료공장을 세워주거나, 트랙터 같은 농기계들을 지원하고, 기업에 대한 적절해 적절한 규제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지원은 겨우겨우 먹고 살 음식을 지원해 주는 것에 그쳤다. 사람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데 기계를 멈출 생각은 않고, 사람을 잡아당기기만 한 꼴이었다.


잊지만 않으면, 행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은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세계의 굶주림은 개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자본과 각국 정부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은 기업과 정부에 대해서 각각 소비와 투표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비도덕적인 경영을 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소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소비자들의 뜻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다수의 개인 소비자들이 연대할수록 더욱 큰 위력을 발휘 할 수 있다. 스타벅스나 나이키의 경우도 저개발국가의 노동자들과 아이들까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하게 한 것이 드러나자, 전 세계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져서 기업 경영진이 사과하고 문제개선을 약속한 적이 있다. 이렇게 단결된 소비자들의 의식은 기업의 역기능들을 해소하고 순기능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움직임이 다국적 식량회사를 향해서도 일어난다면, 한두 푼의 기부금보다 기아해결에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국민이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정부에 영향을 미치고 압력을 행사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이 세계의 기아 퇴치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면, 그날로 한국정부는 기아 퇴치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전 세계의 민주주의 선진국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다.



4월13일 오늘,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날


돈은 좋다, 하지만 생명보다는 아니다

 나는 단순히 시장의 기능을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비난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살다가 목숨을 잃고 있는 이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원칙만을 강조하면서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이념적, 경제적 가치보다 중요하다. 굶주림으로 인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죽음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책임을 자각하고 책임에 따른 행동을 해야 한다. 결국 그 행동들이 더 많은 생명을 기아로 인한 비참한 삶에서 구해 낼 것이고, 모든 인류의 생존권을 지켜 줄 것이다.


자본 <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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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내가 쓴 글, 내가 다듬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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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하는 문장 응급처치 매뉴얼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글을 잘쓰고 싶은 욕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해지기 마련이다. 구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단은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 문장은 어떻게 써야하는지 등등 어려운 점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문장이다. 구성이나 문단이야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대충 말이 되게만 하면 중간은 가겠지만, 문장은 혼자 깨닫는데 한계가 있다. 게다가 우리가 실생활에서 접하는 문장들은 높은 확률로 이상하게 꼬여서 서로 들러붙어 있기때문에(특히 기업이나 단체들이 이런 문장을 자주 사용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괴이한 문장에 익숙해지기도 한다.
 
 글에서 문장은 걸음마와 같다. 그런데 주변사람들이 이상한 자세로 어기적 어기적 걸어다니니, 그것을 보고 자란 사람들도 괴상한 걸음걸이를 갖게 된다. 이 책은 자신의 걸음걸이가 이상한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운동을 할 때도 거울을 보면서 자신의 자세를 교정하듯이, 좋은 문장을 구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보면서 스스로의 문장을 점검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지시를 따라서 문장을 교정해 본다면, 손상된 문장에 응급처치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가야, 문장을 똑바로 쓰라니까!” 


어떤 문장이 나쁜 문장인가

 그렇다면 어떤 문장이 괴상한 문장일까? 일단 위엄을 갖추려다가 망한 문장이 있다. 이런 케이스는 주로 중장년층이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적,의,를 드러내는 것,들’이다. 이 문장들은 '~적, ~의, ~것이다’와 같은 어미를 자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글에 위엄을 싣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 특히 ~적 과 ~의 는 정말 많이 볼 수 있는데, 굳이 안써도 될 것 같은 곳에도 이것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문장을 보면 눈이 피곤해질 지경이다.

 번역어투의 문장도 망한 문장 중 하나다. 특히 수동태는 이제 거의 모든 글에서 볼 수 있다. 심지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나 조차도 나도 모르게 수동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학교에서 하도 영어독해를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한데, ‘되어진다’, ‘먹혀진다’ 와 같은 수동태 문장은 언뜻봐도 구린 맛이 나는 문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도 수동태는 되도록 쓰지 않기를 권한다. ‘시키다’ 같은 사역동사도 조심해야 한다. 소개는 ‘하는’것이지 ‘시켜주는’것이 아니다. 말이 되는 문장을 쓰는 것이 글쓰기의 기본이다.


글은 머리에서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피곤한 문법경찰로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잘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가 싫어하는 것은 문법에 어긋나는 문장이나, 번역어투의 문장이 아니다. 그가 지양하는 문장은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 한 것이 역력한 문장이고, 글 맛이 없는 문장이다. 저자는 불필요한 어미나 단어가 비슷한 형태로 반복되어서 문장이 단조로운 글이 탄생하는 원인이 생각없이 쓰는 태도에 있다고 본다. 다양한 표현을 적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근거중심의학과 같다. 여기에서는 각각의 증상에 맞는 대응을 해야하기 때문에 여러종류의 치료법(표현)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의사(글쓴이)는 더욱 많은 생각과 노력을 해야한다.
 반면 생각없이 쓴 단조로운 문장을 돌려쓰는 사람은 만병통치약을 바라는 의사다. 이들은 모든 증상에 하나의 치료법만 사용한다. 정확한 표현을 상황에 맞게 사용하지 않고, 두리뭉실한 표현을 여기저기 돌려가며 갖다 붙인다. 의사(글쓴이)입장에서는 굉장히 편하겠지만, 환자(문장)의 상태는 점점 악화된다.
 다채로운 문장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나, 읽는 사람에게나 큰 즐거움을 준다. 글을 쓴 사람은 자신이 쓴 풍성한 표현에 만족할 것이고, 읽는 사람은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니 글을 쓰면서 생각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도록 하자.


어떤 문장이 좋은 문장인가

 내가 읽어본 글쓰기 관련 서적들은 모범적인 글에 대해 서로 비슷한 기준을 갖고 있다. 문장은 명확하고 간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접속사가 많으면 좋은 글이 아니다. 필요없는 조사(~이,~가…)를 많이 쓰는 것도 좋지 않다. 부사를 많이 넣는 것은 글을 망치는 길이다 등등…. 물론 간결한 글이 복잡한 글보다 무조건 우월한 것은 아니다. 누가 헤밍웨이와 도스토옙스키의 우열을 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같은 일반인들이 만연체를 쓸 경우, 높은 확률로 문장을 망치게 되기 때문에 되도록 간결한 문장을 권한다. 
 
 그렇다고 문장을 쓰고나서 무조건 곁가지만 떼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단어를 넣고 빼는 차원을 벗어나서, 어색한 문장은 싹 뜯어 고칠 줄도 알아야 한다. 프라모델의 팔이 다리에 가서 붙었는데 분리하지 않고 계속 팔만 돌린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문장을 쓰고나면 문장이 아까워서, 혹은 엉망이 될 것을 걱정해서 되도록 문장을 보존하려고 한다. 이제 그런 걱정은 버리자. 문장을 통째로 버리더라도, 소중한 내 글에 함량미달인 문장을 넣지 않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문장을 다듬어야 한다. 한 단어도 아니고, 한 글자만으로도 문장의 본질이 달라질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뒤쪽은 에세이만 읽게 되는 단점이….그럼에도

 이 책의 큰 특징은 저자의 에세이와 문장강의가 번갈아가며 들어있다는 점이다. 물론 에세이도 문장교정에 관한 내용이긴 하지만, 이런 구성을 취하는 글쓰기 책은 처음봤다. 사실 나는 이 에세이 부분이 본 강의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글에서 소설같은 느낌이 나기도 하고, 문장이 유려하기도 하고…. 오히려 문장강의 부분은 뒤로 갈수록 실망스러웠다. 문장강의는 앞에서 대강의 문법을 설명하고, 흔히 잘못쓰는 문장들을 소개한 후에 뒤에서 바로잡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 포맷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앞 강의는 재밌게 읽었지만 뒷 강의는 휙휙 넘어가게 된다. 계속해서 기본 문제풀이만 시키는 토익 입문책 같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 대해 전반적으로 만족한다. 이 책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의 문장을 망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고, 어떻게 문장을 써야하는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알려주기 때문이다. 내가 그동안 내 글을 보고 들었던 고민들, ‘왜 이렇게 단조롭지?’,’왜 이렇게 어미가 반복되지?’,’왜 이렇게 부자연스럽지?’, 이런 질문들의 답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같이 읽으면 좋을 책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유시민 : 말이 필요없다. 바로 그 유시민이 쓴 글쓰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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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정치적 기초
E. E. 샤츠슈나이더 지음, 이철희 옮김 / 페이퍼로드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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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예전에 책애서 봤던 좋은 내용이 기억나서 뒤늦게 적어본다. 이것은 비단 정치인들에게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규정지어서 매도하는 행동을 즐기는 한국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39쪽
 -민주적 정당 체계는 자유로부터, 그리고 자유로운 인민의 권리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권리는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권리는 의무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론자유란 권리 속에는 다른 사람의 언론자유, 즉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존중해야 하는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또 동의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충분히 경청할 의무도 있다. 내 집회는 되고 네 집회는 안 된다면 집회의 자유는 사라진다. 반대편 사람들의 모임을 분쇄하려 해선 안 된다. 이것은 의무다. 일부에서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려 하더라도 되레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 마땅하다. 

 자기 편을 들어주기만 하면, 가스통을 들고 나오거나, 사람을 때리고 혐오발언을 일삼을지라도 “애국”어르신으로 지칭하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서든지 입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정치적 기초’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다. 어차피 그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으니 별 상관은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말은 하지 말아줬으면 한다. 민주주의는 원래 시끄러운 것이다. 사회가 하나가 되어 조용한 것 처럼 보인다면 그 사회는 둘 중 하나겠지. 소련 아니면 북한. 나는 둘 중 어느 사회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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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6
마이클 하워드 지음, 최파일 옮김 / 교유서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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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1차대전을 무시하지 마라

 우리는 대부분 제 2차세계대전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알고 있다. MBC 서프라이즈와 같은 각종 TV프로그램, 영화를 통해서 자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1차대전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아마 2차대전에 비해 1차대전이 극적인 요소(나치, 홀로코스트, 전차전 같은)가 적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심의 크기차이와는 별개로, 1차대전이 가지는 의미는 2차대전에 비해 절대 작지 않다. 1차대전은 2차대전의 가능성을 잉태한 사건이었고, 동시에 2차대전의 모습을 보여준 예고편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1차대전과 2차대전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만 사실은 하나의 방향성을 갖는 시리즈물이었다. 그러나 본편에 비해 속편이 너무나도 강렬했던 탓에 본편에 대한 기억은 뇌리에서 잊혀지고, 지금은 속편 만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다

 사람들은 역사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거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 전쟁의 역사가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치있는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는가?”이다. 이 책에서는 전쟁의 원인으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바로 국민들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이다. 그리고 이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정말 이해하기가 어려운 지점이기도 하다. 전쟁터에서 가장 많이 죽는 것은 평범한 시민들이고, 전시체제에서 극심한 고난을 요구받는 것 역시 일반인들이다. 그런데 전쟁을 통해 얻을 것은 적고, 잃을 것은 많은 그들이 왜 그렇게 전쟁을 열광적으로 수행했을까? 

50쪽
 -서유럽의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부의 선전으로 강화된 대중의 여론은 전쟁에 덜 열성적인 소수의 목소리를 휩쓸어버렸다. 더 후진적이고 교육을 덜 받은 동유럽 사회들에서는 전통적인 봉건적 충성심이 종교 집단의 승인에 더욱 힘을 얻어대중 동원에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98쪽
 -대체 무엇때문에 전쟁이 그토록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간단한 대답이 하나 있다. 바로 모든 교전국 국민들의 지속적인 지원이다. 그들은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감내했을 뿐 아니라 전쟁 수행에 따른 곤경과 통제를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51쪽
 -그러나 굳이 정부가 나서서 선전으로 국민들을 채찍질할 필요가 없었다. 국민들은 단순한 애국적 의무감에 취해 군에 입대하고 전쟁에 나갔다.

 위에 있는 단 몇 문장 만으로 모든 설명이 끝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민족주의가 한창이던 당시 인민들의 정신은 바짝 마른 짚단과 같았다. 거기에 애국심이라는 불씨가 떨어지자, 그들의 열정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각종 선전물은 상대방을 악의 화신으로, 자신을 정의의 “십자군”으로 묘사했다. 결국 민족주의적 애국심과 종교적 경건함이 합쳐지면서, 국민들 스스로가 지배층들의 전쟁놀음에 희생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한 판 승부를 벌이는 중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것이 1차대전을 단순히 위정자들에 의해 벌어진 비극이라고만 여길 수 없는 이유이다. 결국 전쟁의 책임은 그들 모두에게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지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박스를 주워서 하루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이, 국가의 GDP나 각종 지표, 정치인들의 이념논쟁에 흥분하고, 계급배반 투표를 행하는 현실. 이것이 21세기 한국도 민족주의와 집단주의가 활개를 치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도 민족주의가 어떤 파국을 불러왔는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닐까? 자신들의 권리보다 민족적 자존심을 더욱 앞세웠던 20세기 초 유럽의 시민들. 노동자들의 삶은 경시하면서 국가지표와 한류에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는 21세기 한국. 과연 무엇이 나아진 것일까.
 
 흔히 "두유 노?"라고 일컬어지는 국x, 한류와 K-팝으로 문화영토를 넓히겠다는 모 기업의 광고, 어린이들이 각종 민족주의적 행사와 군사캠프에 노출되는 현실. 개인주의를 혐오하는 한국사회의 지배층은 민족주의를 매개로 대다수의 시민을 통제하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민들은 역사 속에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그것을 자신의 의지라고 믿고 앞장서서 지배층의 의지를 대변할 것이다. 설령 그들이 자신을 기관총 진지 앞으로 밀어 넣더라도.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가벼우면서도 깊은 1차세계대전 입문서

 한국에서 1차대전이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원인 중에는 관련 서적들의 불친절함이 가장 클 것이다. 1차세계대전에 관련된 개설서는 우리나라에도 몇 권이 나와있지만, 대체로 분량이 많은 탓에 한 번 읽어보기에는 부담이 많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교유서가의 첫단추 시리즈 6번째 <제1차 세계대전>은 의미있는 책이다. 옥스퍼드대 출판부라는 명성은 차치하고서라도, 책 자체의 내용만 봐도 굉장히 알차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게다가 분량도 적고 책의 크기 자체도 작아서, 해당 이슈에 관심은 있으나 책을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매우 반가울 것이다. 



**같이 읽으면 좋을 책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존 엘리스 : 마이클 하워드의 <1차 세계대전>이 거시적인 시각에서 전쟁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참호 속의 병사 개개인의 시각으로 전쟁을 서술하고 있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참호전과 총검돌격에 대한 낭만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 책을 통해 그 환상을 남김없이 깨뜨리기를 권한다. 개인에게 전쟁은 RTS가 아니라 FPS이고, 우리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아니라 총 맞고 죽는 엑스트라 2임을 기억하라. (요즘 드라마를 보고 군대에 대한 환상을 갖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 같은데, 이 책을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살인의 심리학> - 데이브 그로스먼: 전쟁의 사례들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나약한 지를 보여주는 책. 1차세계대전 파트를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위의 책과 마찬가지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뚝딱뚝딱 방아쇠를 당기고, 칼을 휘두르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 묘사인지를 잘 설명해준다.


 <EUROPE> - 브랜든 심스: 위의 두 책과는 반대로 마이클 하워드의 <1차 세계대전>보다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서술되어있는 유럽의 역사. 정치와 외교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1차세계대전 이전부터 형성된 유럽 국가간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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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4-06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의식 부재의 바짝 마른 짚단....불씨를 땡기면 타버리고 마는.....은유가 참 재대로네요....하루 점심값도 없는 사람이 상속세를 걱정하는 웃지 못할 비극이었네요..
 
리틀 브라더
코리 닥터로우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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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반어법이 있을수도 있음

*판사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글은 고양이가 쓴 것입니다.





1

 2016년, 병신년이자 레이디가카 즉위3년. 대한민국은 진정한 국가의 질서를 되찾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불충한 역당의 무리가 있어, 감히 각하의 치세를 부정하고 비웃는 패관소설이 그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 제목은 <리틀 브라더>이며, 작가는 캐나다 출신의 양인 코리 닥터로우이다. 여러 불순세력들(주로 트잉여)들의 말과 달리, 이 책은 결코!절대로! 현실을 다루고 있지 않다. 만약 당신이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이 책과 같은 상황을 보았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착각이다. 그러니 어서 모피어스의 파란약을 복용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하는 애국보수의 품으로 돌아가시라.
 
 지금 대한민국은 너무나도 행복한 사회이다. 일례로, 취업을 하지 못한 청년의 비율이 역대 최고점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취업을 할 가능성이 있는 청년의 비율이 역대 최고라는 것이 아닌가?(취업을 하려면 실업부터 해야지!) 우리는 항상 '물이 반이나 남았네'하는 '긍정적'으로 '노력'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역사상 가장 안전한 시대를 살고 있다. 국정원은 종북IS세력을 찾아내기 위해 각종 게시판의 댓글창을 주시하고 있으며, 신속한 테러행위 방지를 위하여 영장없이도 통신정보 등을 들여다 보고 있다. 아, 이 얼마나 마음든든한 사회란 말인가? 가톨릭의 교종이 종북좌파이고, 천조국 대선의 민주당 후보들 역시 공공연하게 자신이 종북좌파임을 드러내는 이 시대에, 우리 대한민국이야말로 진정 자유세계의 등불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리틀 브라더>는 모범적인 시민들을 선동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눈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못된 범죄소설이다. 이들은 모든 형태의 권력을 조롱한다. 또한 국가의 감시망을 무력화하고, 자유라는 미명하에 방종을 일삼는다. 아,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소설인가? 요즘같은 자유로운 태평성대에 이런 책을 출간하다니, 출판사의 정신상태도 의심해 볼 만 하다. 나는 대외적으로는 이 소설이 거짓 투성이라고 생각한다고 국씨 성을 가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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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소설 속 마커스가 아니다. 파이썬이고 뭐고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높은 보안등급은 크롬 시크릿모드이고, 보안이라고는 유료 백신으로 실시간감시를 하는 것 밖에 모른다. 그렇기때문에 나도 모르게 인터넷에 글을 쓰면서 자기검열을 하고는 한다. 사실 국정원이나 경찰이 내 아이디를 들여다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바쁜데, 별볼일 없는 인터넷 글쟁이에게 무슨 관심을 가지겠나?

 하지만 인간의 상상력과 두려움은 불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국가는 그 불안을 이용해서 수 많은 개인들을 통제하려고 한다. 즉, 쪼는 순간 지는 게임인 것이다. 만약 당신이 국가권력에 쫄기 싫다면 <리틀 브라더>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17세 소년의 저항을 통해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하지만 이 <리틀 브라더>를 읽는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마커스와 같은 능력을 얻을 수는 없고,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유를 쟁취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를 얻는데 마커스가 이용한 방법만 있는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방식으로 자유를 쟁취하면 된다. 광장에서 정치적 행동을 할 수도 있고, 지인들과 토론을 할 수도 있다. 그럼으로써 아직까지 남아있는 한국의 정치제도를 발판 삼아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우리 중 대다수는 마커스와 같은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그러나 현실의 악당들도 소설 속 악당과 같은 능력을 갖추지는 못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실의 악당들은 대체로 바보같고, 가끔 발이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들은 윽박지르는 것을 좋아하지만, 의외로 겁이 많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 사회에 공포를 주입하고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니 겁먹지 말자. 우리가 겁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악당들이 우리를 무서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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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3-2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버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군요. ^^

Postumus 2016-03-28 18:41   좋아요 0 | URL
요즘 고양이들이 글을 많이 쓰더라구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