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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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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지도 수천 년이 흘렀다. 그리고 수 천년동안 문명의 가장 큰 숙제는 말 그대로 먹고 사는 문제였다. 굶주림과 질병은 끈질기게 사람들을 위협해왔고, 서구사회조차도 불과 백여 년 전에서야 이 문제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세계의 곳곳에 남아있는 굶주림과 질병은 끊임없이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있다. 서구문명사회는 인류의 오래된 숙원이었던 하늘을 나는 것과, 지구 밖을 탐사하는 것을 이뤄냈지만, 굶주림은 여전히 끈질기게 세계의 절반을 뒤덮고 있다. 그렇지만 서구사회로 대표되는 굶지 않는 사회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 굶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굶주림이란 중세시대의 페스트 이야기만큼이나 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과 중세시대의 페스트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몇 명이나 죽었는가 하는 통계일 뿐이다. 게다가 페스트와는 달리 생물학적 전염도 되지 않는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은 더더욱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장 지글러의 저서들은 굶주림에 의한 죽음을 멀리서 보고있는 사람들을 그 현장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는 유엔에서 기아와 질병을 막기 위해 유엔 식량조사관으로 일할 당시 직접 목격하고 느꼈던 것들을 그대로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처참한 현실을 느껴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험을 한 독자들은 굶주림에 대한 시선을 바꾸게 된다.
내가 몰랐던 굶주림의 모습
사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흔한 교훈을 주는 내용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기아에 대해서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저 ‘식량 분배가 잘 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의 아이들이 음식을 구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다‘는 정도의 개념만 있었을 뿐이다. 누가, 어떻게 식량을 통제하고 왜 아이들이 음식을 구하지 못해 죽는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고, 알 수도 없었다. 단순히 식량의 분배는 경제논리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굶어죽는 아이들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명의 아이들이라도 덜 죽도록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그쳤다. 그 때 나는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질병으로, 자살로, 사고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아사(餓死)또한 일종의 후진국에서 주로 나타나는 죽음의 한 종류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이 책 속에 그려진 굶주림의 모습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굶주림의 가장 잔인한 점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게 된다는 점인데, 그 고통은 사람들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하고, 짐승과 같이 만든다. 그에 관한 내용은 중국의 멍레이, 관궈펑, 궈샤오양이 쓴 ‘1942 대기근’이라는 책에 대한 출판사 서평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기러기 똥을 먹고, 흙을 먹고, 사람고기를 먹은 자들도 결국은 모두 굶어 죽었다”. 여기에는 심지어는 가족끼리 서로 잡아먹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결국 굶주림은 사람이 사람답게 죽을 권리도 빼앗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굶주림은 단순히 죽음만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다. 성장기의 어린아이나 태아의 경우 충분한 영양섭취를 하지 못할 경우에 몸에 갖가지 장애가 남게 되는데, 뇌가 덜 자라고, 눈이 안보이게 되고, 얼굴에 구멍이 나서 턱이 녹아내린다. 게다가 굶주림으로 약해진 몸은 기생충과 세균에 감염되어도 제대로 면역반응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이게 바로 현실에서 굶주림의 진짜 모습이었다.
후원은 값싼 면죄부일지도 모른다
TV를 보다보면 세계의 굶주리는 아이들, 특히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가끔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동정심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끼고, 식량지원과 구호활동을 위해서 얼마간의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죄책감을 벗게 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머릿속으로 ‘내가 얼마를 냈으니까 몇 명이 얼마동안 음식을 먹겠구나.’ 하는 구체적인 만족감을 얻을지도 모른다.
지구상의 굶주림으로 인해 생명이 위태로운 아이들을 보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거의 이와 비슷하다. 동정심과 죄책감. 그리고 이어지는 기부.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기부 활동, 더 나아가서는 적극적인 모금과 봉사활동으로 지구상의 굶주림을 퇴치해야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굶주림의 원인을 해결 할 수 있을까?
지글러는 자신의 저서에서 대자본이라고 불리는 거대기업들과 금융투자자들, 그리고 일부 선진국들의 정부를 굶주림을 이용한 학살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이 대자본들은 주로 식량과 연관되어 있는 기업들로, 직접적으로는 공급량 조절과 개발도상국 정부들에 대한 압박을 통해 자신들의 사업이익을 최대화 하려고 한다. 또한 일부 선진국 정부는 이러한 대자본들이 이익을 위해 벌이는 수많은 비도덕적인 행동을 묵인 할 뿐만 아니라, 자국의 이익을 위해 굶주림을 무기화하기도 했다.
영화가 아닙니다 여러분, 실화입니다
이 책에서 대자본과 정부가 결탁해서 벌인 사건 중 내가 가장 충격을 받은 사건은 칠레의 아옌데 정권에서 일어난 피노체트의 쿠데타였다. 이 배후에 네슬레와 미국정부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여기서 네슬레는 여러분이 마시는 바로 “그” 네슬레다) 그들이 쿠데타를 지원하게 된 동기는 더 충격적이었다. 당시 칠레의 아옌데 대통령의 정권은 사회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일정 연령 이하의 어린이들에게 분유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자 네슬레는 이 정책이 자신들의 이윤을 감소시킬 것을, 미국은 칠레의 사회주의화가 남미에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결국 그들은 아옌데 정권을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이 콤비는 아옌데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칠레정부를 고립시켜서 정부정책들을 방해하기 시작했고, 결국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한국 네슬레 홈페이지에 가서 네슬레 사업운영 원칙을 보면 1번에 소비자의 영양과 건강, 복지를 추구한다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과연 칠레 정부에 대한 쿠데타가 칠레 국민들의 복지를 증가 시켰는가? 또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피노체트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미국은 선거방식에 의해 성립된 정부보다 쿠데타로 성립된 정부가 더 민주적으로 수립된 것으로 보는가? 결국 이들의 이러한 명분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들의 진짜 관심은 자국의 이익, 또는 자사의 이익일 뿐이었다. 그리고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는 저개발 국가들의 국민들이 대자본과 선진국 정부가 맘먹기에 따라서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도, 빈곤에 허덕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지글러는 바로 이런 점에서 거대 권력들이야 말로 세계의 굶주림에 가장 큰 책임이 있으며, 이들이 굶주림이라는 대량살상무기를 가진 학살자들이라고 말한 것이다.
Good Market, Good Money
주의: 중심을 잘 잡을 것
그러나 이 책을 읽을 때 주의 할 점이 있다. 첫째는 지글러가 묘사한 끔찍한 죽음을 보고나서 너무 큰 자책감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은 주로 거대 권력들의 비도덕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속의 끔찍한 죽음을 간접적으로라도 인지하게 되면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런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을 보게 되면 그들에 비해 풍족한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자책감에 빠질수 있다. 굶어죽는 사람들은 빵 한 덩어리도 먹지 못하는데, 자신은 혀를 즐겁게 하기위해 미식을 즐긴다. 심지어 과도한 열량과 영양소 때문에 인위적으로 몸을 움직여서 에너지를 소비해야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죄책감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생활이 아프리카의 난민들처럼 비참해 진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나아질 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즉, 나의 삶의 질을 낮추는 것이 굶주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게 놔둬서는 안된다.
이 책을 읽을 때 두 번째 주의 할 점은 앞의 것과는 반대다. 독자가 지글러의 거대 권력에 대한 비판을 보고나서 그의 주장을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한 면죄부로 삼는 것이다. 물론 지글러는 대자본과 정부들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자신에게는 어떠한 책임과 의무도 없다는 생각을 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굶주림에 의한 대학살에 침묵으로 동조한 것과 다름없다. 이런 행동은 멜서스의 주장을 바탕으로 빈곤과 기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외면한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지구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양은 120억 가량의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선진국 정부들과 대자본의 다국적 기업들은 시장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식량생산을 제한하거나 식량폐기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공급량을 조절해서 충분한 수준의 이윤을 내는 것은 기업의 합법적인 경영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가격정책으로 생명을 잃는다면 이러한 경영활동을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수많은 기업들이 아프리카나 남미 등지에서 지역경제를 파괴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경작지에 바이오 연료를 만들 작물을 심어서 대량의 계절적 실업과 식량부족 사태를 야기하는 것 또한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각국 정부와 세계기구들이 정말로 기아를 퇴치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려고 했다면 먼저 식량부족에 시달리는 국가들에게 비료공장을 세워주거나, 트랙터 같은 농기계들을 지원하고, 기업에 대한 적절해 적절한 규제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지원은 겨우겨우 먹고 살 음식을 지원해 주는 것에 그쳤다. 사람이 기계에 빨려 들어가는데 기계를 멈출 생각은 않고, 사람을 잡아당기기만 한 꼴이었다.
잊지만 않으면, 행동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은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세계의 굶주림은 개개인이 어찌 할 수 없는 거대한 자본과 각국 정부에 의해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개인은 기업과 정부에 대해서 각각 소비와 투표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비도덕적인 경영을 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소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소비자들의 뜻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방법은 다수의 개인 소비자들이 연대할수록 더욱 큰 위력을 발휘 할 수 있다. 스타벅스나 나이키의 경우도 저개발국가의 노동자들과 아이들까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일하게 한 것이 드러나자, 전 세계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져서 기업 경영진이 사과하고 문제개선을 약속한 적이 있다. 이렇게 단결된 소비자들의 의식은 기업의 역기능들을 해소하고 순기능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움직임이 다국적 식량회사를 향해서도 일어난다면, 한두 푼의 기부금보다 기아해결에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정부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원칙적으로 국민이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정부에 영향을 미치고 압력을 행사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이 세계의 기아 퇴치에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면, 그날로 한국정부는 기아 퇴치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은 전 세계의 민주주의 선진국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다.
4월13일 오늘,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날
돈은 좋다, 하지만 생명보다는 아니다
나는 단순히 시장의 기능을 부정하고 자본주의를 비난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살다가 목숨을 잃고 있는 이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원칙만을 강조하면서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에 대해 손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이 세상의 어떠한 이념적, 경제적 가치보다 중요하다. 굶주림으로 인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죽음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은 모두 그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책임을 자각하고 책임에 따른 행동을 해야 한다. 결국 그 행동들이 더 많은 생명을 기아로 인한 비참한 삶에서 구해 낼 것이고, 모든 인류의 생존권을 지켜 줄 것이다.
자본 <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