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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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라퍼와 꼰대들의 횡포에 지쳐버렸다면, 이 책을 읽고 부서진 멘탈을 주워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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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0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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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경제학 - 전투의 양상에 따라 승패를 좌우하는 최적의 전투 자원 활용은 따로 있다! KODEF 안보총서 83
권오상 지음 / 플래닛미디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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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경제학이 아니고 전투의 경제학이다. 양측의 교환비 같은 지수를 계산하는 것이 주된 내용. 기대했던 내용과는 많이 달랐지만 색다른 책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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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책읽기부터 시작하는 글쓰기 수업
이권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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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보다는 책읽기에 대한 비중이 더 크다. 읽기 쉬운 책이어서 좋기도 하지만, 평소 읽고 쓰는 것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는 그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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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시나공 정보처리기사 실기 (산업기사 포함) + 기출문제집 - 전2권 - 알고리즘 해법(DVD) + 기출문제 16회 2016 시나공 정보처리기사/정보처리기능사
최영근 외 지음 / 길벗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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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부분 분리가 안되어서 책을 찢어야하고, 종이는 번들거리는 재질이어서 스탠드 불빛이 반사되어서 읽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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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 독점계약 번역 개정판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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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리뷰어의 낮은 지적수준으로 인해, 본 저서에 대한 오독이 있을 확률이 농후합니다.

고전이란 무엇인가

 예전에 고전에 대해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고전이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다’. 이 명제에 따른다면,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역시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적어도 고등학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대부분 교과서에서 이 이름을 들어봤겠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 이름을 ㅌㅐ카라고 기억 할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고전의 기준 중 또 하나는, 전체 분량 중 몇 구절만 널리 알려진 책이다. ‘보이지 않는 손’의 <국부론>,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의 <햄릿>,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의 <공산당 선언>등이 이에 속한다. <역사란 무엇인가> 역시 책 전체 중 한 구절만 유독 유명하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 구절만 그렇게 유명한 이유는 이것이 교과서나 수능에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나도 이 책은 이제야 읽어봤다. 아마 유시민 작가의 추천사가 아니었으면 아직도 안 읽었을 것이다. 다른 재밌는 책도 많은데, 굳이 재미도 없고 곰팡내나는 옛날 책을 읽기는 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기회를 통해, 고전이란 언제나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책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폼은 잠시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했던가.


역사가란 무엇인가
 
 역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을 만드는 역사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보통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역사가의 종류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들을 수집하여 퍼즐을 맞추는 수집가고, 또 하나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역사를 재구성하는 소설가다. (물론 현실의 역사가는 이와 다르다.) 카의 말에 따르면, 이 두 가지 생각 모두 사실과 역사가의 관계를 오독한 것이다. 첫 번째 오해인 수집가형 역사가는 사실에 휘둘리는 수동적 존재이다. 그들의 지상과제는, 과거의 조각들을 모두 찾아서 역사를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역사가들의 주관은 없다. 역사가의 임무는 ‘객관적인’ 사실을 배열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는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객관적’이라는 것은 허구라고 말한다.

 
21쪽
-흔히 사실은 스스로 이야기한다고들 말한다. 이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 할 때에만 이야기한다: 어떤 사실에 발언권을 줄 것이며 그 순서나 전후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역사가이다.

22쪽
-역사가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딱딱한 속알맹이가 객관적으로 그리고 역사가의 해석과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믿음은 어리석은 오류이지만, 뿌리 뽑기는 어려운 오류이다.


 역사가는 기계가 아니고, 사실은 인격체가 아니다. 역사가가 어떠한 사실을 선택하는 순간, 이미 거기에는 역사가의 주관이 개입되어있다. 또한 사실이 기록되는 순간에도 누군가의 의도가 개입된다. 그렇기때문에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라고 해서 그 어떤 의도도 배제된 ‘객관적’ 기록일 수는 없다. 적어도 기록을 남기는 사람의 의도와 그것을 역사로 선택하는 역사가의 의도가 개입된 ‘주관적’ 기록으로 봐야 한다. 그렇기때문에 자신이 선택한 역사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 진의를 의심해봐야 한다.



“여러분, 객관적인 인형들에게 인사하세요~제 손과는 상관 없는 ‘객관적’인 인형이랍니다"


31쪽
-그 문서들은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일어났다고 슈트레제만이 생각한 것만을, 혹은 그가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해주기를 원했던 것만을 … 말해줄 뿐이다.

36쪽
-첫째,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한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 그것들은 기록자의 마음을 통과하면서 항상 굴절된다.


 하지만 카는 이렇게 역사가의 ‘객관성’을 부정하면서도 모든 역사는 역사가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역사를 구성하는데는 역사가의 해석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사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는 역사가가 사실로부터 계속 영향을 받으면서, 사실에 형태와 목소리를 부여하는 상호작용과정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과거의 조각을 끼워 맞추는 수집가도 아니고, 자기마음대로 사실을 기워붙이는 소설가도 아니다. 역사가는 역사에 영향을 받으며 만들어진 시대의 대변자이다. 그들은 당대의 사회가 과거를 보는 시각을 대변하며, 그럼으로써 역사가들이 과거의 사실을 선택하는것과,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영향을 미친다.


45쪽
-즉 역사란 사실을 객관적으로 편찬하는 것이며 해석보다는 사실이 무조건 우월하다고 간주하는 역사이론과 역사란 해석과정을 통해서 역사의 사실들을 확정하고 지배하는 역사가의 정신의 주관적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역사이론, 똑같이 지지할 수 없는 이 두 이론 사이에서….

46쪽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드는 끊임없는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53쪽
-역사가는 역사의 일부이다. 그 행렬 속에서 그가 있는 그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


역사는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흔히 역사를 만든 것은 몇몇 위인들이라고 생각한다. '2차대전은 히틀러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경제대공황은 루즈벨트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의 발전 역시 특정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식의 논리이다. 이 논리를 가진 사람은 어떤 인물이 있고없고에 따라 국가와 세계의 역사가 요동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믿음은 역사 속 우연에 집착하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아, 광개토대왕이 오래 살았더라면’, ‘아, 정조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과 같이 작은 우연이 역사의 큰 흐름을 바꿨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생각이 사실이라면 역사의 주인은 유능한 소수의 인물이다. 역사란 그들의 의지가 구현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역사관에서는 역사의 공과 과가 오롯이 특정인의 소유가 된다. 평범한 다수에 속하는 사람은 유명인 뒤에 숨어 면죄부를 받기도 하고, 자신의 공적을 그에게 빼앗기기도 한다. 결국 2차대전은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의 책임이 될 것이고, 한국의 산업화 역시 특정한 인물에게 모든 공이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위인론’적 시각은 온당하지 않다. 카의 말마따나 위인은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자 대리인이다. 즉, 역사의 흐름이 그 인물을 만들어내고 시대를 대변하게 한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알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없었다면? 누군가 그 역할을 대신 했을것이다. 물론 나폴레옹과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겠지만, 그 시대가 원했던 방향에서 유사하게 흘러갔을것이다. 가을산에 산불을 내는 것은 담뱃불만이 아니다. 누군가의 취사용 버너에서 불이 옮겨 붙을수도 있고, 하다못해 날벼락에도 불이 날 수 있다. 역사 속의 위인이란 그런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무대가 준비 되었을 때만 나타날 수 있다. 나폴레옹이 아무리 뛰어난 알렉산더 대왕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해도, 왕족이 아니었다면? 조선시대 노비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능력을 발휘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75쪽
-역사의 사실은 분명히 개인에 관한 사실이지만, 고립된 채 행한 개인의 행동에 관한 사실, 또는 실제적인 동기든 상상적인 동기든 개인 스스로가 자신들을 움직이게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런 동기에 관한 사실은 역사의 사실이 아니다.

79쪽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인을 역사적 과정을 산물이자 대리인이면서 이와 동시에 세계의 모습과 인간의 사유를 변화시키는 사회세력의 대변자이자 창조자인 탁월한 개인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109쪽
-그렇기 떄문에 개인에 대해서 도덕적인 유죄를 매우 열렬히 주장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집단과 사회 전체에 대해서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나 없이는 좀 힘들지 않았을까?"


거기나, 여기나.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E.H.카의 자료철> 챕터에 나와있는 일화를 읽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36쪽
-즉 보수적인 정치가들과 역사가들은 애국적인 영국사를 역사 교과과정의 중심적인 위치에 다시 올려놓음으로써 미래에 대한 확신을 고취시키려고 엄청나게 기를 쓴 것이다.키스 조지프 경은 교육부 장관으로 재임했을 당시 그를 보좌한 휴 토머스 경과 함께 각급 학교가 영국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세계사에는 관심을 덜 기울여야 한다고 요구했다.

-카에게 이러한 사건들은 영광스러운 과거를 회상하는 데에서 위안을 얻으려고 했던 병든 사회의 증상으로 보였을 것이고, 또한 역사가들이 어느 정도까지 사회의 지배적인 경향을 반영하는지에 관한 뚜렷한 증거로 보였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영국사를 한국 고대사로, 고유명사들을 한국식으로 바꾼다면, 2016년 한국의 신문기사를 오려낸 것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애국적’ 역사, 세계사 축소, 영광스러운 과거…. 다른 점이 있다면, 영국은 지금으로부터 따져봐도 영광의 시대가 얼마 멀지 않기 때문에 그 시대에만 집중하면 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에는 존재하지 않는 영광의 시대를 만들어 내느라 신화에 가까운 이야기가 등장하는 희한한 상황이 펼쳐진다. 거기다가 근현대의 흑역사를 지우는 작업까지 하느라 품이 두 배로 든다. 이 상황을 보고 있자면, 오히려 한국에 대한 자괴감만 더 든다. 영국은 실제로 있었던 세계지배의 역사(도덕적 판단은 뒤로 미루고)를 기억하며 정신승리를 했다지만, 한국은….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에 집착하고, 그것이 ‘애국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역사가 반드시 애국적이어야 하는가? 일제의 침탈은 비난하면서(요즘엔 그나마도 빠졌다), 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역사가 정상인가? 나는 이 우스꽝스러운 콩트에 부역하는 역사가들이야 말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집단주의적)국가는 역사를 대중통제에 이용하려고 하고, 몇몇 ‘역사가’들은 국가의 의도에 충실히 따른다. 그들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님을, 따라서 자신도 역사가가 아님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체제선전에 동참한 불쌍한 지식인이다.



시간을 달리는 장관


27쪽
-잘못되어간 것은 견고한 사실들을 그렇듯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축적하는 것이 역사의 토대라는 신념, 그 시대에는 너무나 분명한 것이어서 거의 모든 역사가들에게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든 그런 신념이었다.



진보에 대한 믿음과 현실 사이

 내가 이 책에서 가장 감동받았던 곳은 저자가 가진 진보에 대한 확신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책의 전반부에서는 카의 입장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그의 집필 스타일이기도 한데, 그는 어느 한 입장을 선택해서 명확한 메시지를 주거나 하지 않는다. 계속 하나의 입장과 그것에 반대되는 입장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부적절함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인 제3의 입장을 드러낸다. 그렇기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그의 주장을 정확히 짚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입장이 뚜렷해지고, 메시지가 명확해진다. 그는 인간 사회가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물론 그 진보는 ‘약속된 땅’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가 진행됨에 따라 인간의 의지로 방향을 잡아야 하고, 앞으로 내딛어야 하는 것이다. 카의 시각에서는, 진보를 ‘절대적인 자연법칙’ 따위로 믿는 사람은 대책없는 ‘낙관주의자’일 뿐이다.


164쪽
-진보는 추상적인 용어이다.; 그리고 인류가 추구하는 그 구체적인 목적들은 그때그때마다 역사과정에서 생기는 것이지 역사의 외부에 있는 어떤 원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나는 인간의 완전성이나 미래의 지상천국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전진해야만 밝혀질 수 있고,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만 그 타당성이 입증될 수 이는 목표들을 향해서 나아가는 무한한 진보의 가능성에 찬성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진보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카가 말하는 진보란, 인류의 경험이 쌓여감에따라 점점 더 나은, 자신들의 의지가 더욱 크게 반영된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는 그 목적을 위해 기성세대의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의 희생은 미래세대가 그 다음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발판이 된다. 이렇게 역사가 진행되면서 진보가 이뤄진다.

 하지만 한국은 어떤가? 기성세대는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내가 보기에 한국의 기성세대는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를 태어나게 해 줄 생각도 없는 것 같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지만, 자식’세대'를 위해서는 희생할 의지가 없다. 그저 다수결의 절대반지인 인구구조만 쥐고 휘둘러 댈 뿐이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가까운 시일내에 역사적인 진보가 진행되는 것은 요원하다. 오히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는 이 상황은 사회전반의 진보를 향한 의지를 꺾어 놓는다. 카는 획득된 기술이 세대를 이어서 전승 됨으로써 진보가 이뤄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의 기성세대는 후세대에게 어떤 기술을 전승할 것인가? 독재와 인권탄압의 기술? 집단주의와 낡은 농업사회의 가치관? 내가 죽을 때까지 사회의 진보를 목격이나 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157쪽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라고 할 수 있다.

164쪽
-모든 문명사회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위해서 현존하고 있는 세대의 희생을 요구한다. 미래의 보다 나은 세계라는 명분을 내세워 이러한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은 신의 어떤 목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 희생을 정당화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현실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노코멘트


 그럼에도 우리가 진보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그의 자료철에서 등장한다.


242쪽
-‘유토피아의 기능은 공상을 구체화시키는 데에 있다…….유토피아는 개인을 보편적인 이해와 조화시킬 것이다. 한가한 (아무런 동기도 없는) 낙관주의와 구별되는 진정한 유토피아.


 스웨덴 복지의 아버지, 비그포르스는 자신의 노선에 대해 이러한 표현을 사용했다. ‘우리는 몇십 년, 몇백 년 후에나 찾아올 낙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소위 ‘잠정적 유토피아’ 모델이다. 카의 진보관은 이 모델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유토피아의 목적은 인간에게 공상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지, 유토피아 자체가 목적이 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진정한 목적이란, 역사 속에서 단기적인 목표들(예를들어 노예해방, 여성인권 등)을 이뤄내는 것이다. 인간은 고작 80년을 살 뿐이다. 꿈과 희망이 가득찬 유토피아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구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유토피아라고 추정되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진정한 진보일 것이다.


242쪽
-‘유토피아의 기능은 공상을 구체화시키는 데에 있다…….유토피아는 개인을 보편적인 이해와 조화시킬 것이다. 한가한 (아무런 동기도 없는) 낙관주의와 구별되는 진정한 유토피아.


그는 그것을 확신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수 많은 번역어투의 문장과 복문, 어려운 개념을 쏟아내는 저자의 만연체 문장…. 솔직히 몇 번이고 그만 읽을까 하는 유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다 읽었다. 사실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꾹 참고 읽으면 못 읽을 수준도 아니었다. 물론 읽는데 오래걸리긴 했다. 메모한 분량만 A4 3장분량이었고, 아직도 확실하게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 나온 말들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진보를 확신하는 저자의 태도가 뭉클하다고 해야할까, 소름돋는다고 해야할까…. 특히 글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한마디야말로 이 책의 백미였다. 책을 읽는동안 쌓였던 피로감을 한 번에 날려버릴 정도로 짜릿했다. 나는 그 문구를 받아적고 그 옆에 이렇게 적었다.

“!!!!!!!"


211쪽
‘-그렇기 때문에 루이스 네이미어 경이 … 나는 격동하는 세계, 진통하는 세를 내다보고 나서 진부하기조차 한 어느 위대한 과학자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도-그것은 움직인다.'



-이 책의 가장 아쉬웠던 점: 저자가 중간에 -이렇게- 넣는 문장을 괄호 안에 넣어줬으면 더 읽기 편했을 것 같다. 하도 복문이 많고 문장이 길다보니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구분이 잘 안되어서 가독성이 굉장히 떨어진다. 그리고 내용도 볼드체로 쓰거나 했으면 더 읽기 편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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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6-04-2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개정판을 읽으면서 구판의 번역체와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긴 문장은 여전했어요.

Postumus 2016-04-23 13:20   좋아요 0 | URL
네 제가 봐도 좀 손봤으면 좋았겠다 하는 문장이 많더라구요. 원문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지만 그것때문에 접근성이 완전히 없어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