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소나타 - Tokyo Son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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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와 <강령>, <주온>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로>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신작 <도쿄 소나타>는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공포물들은 귀신과 악령들이 출몰할 것 같은 제목들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 영화에서는 그런 귀신이나 악령보다는 다른 어떤 것들이 더욱 큰 공포를 주곤 했다. 그 다른 어떤 것들이 무엇이냐고? 글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들, 보이지 않으나 저 어둠 속에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 그리고 미래에도 계속 내 주위에 머물 것들. 여러가지 이름을 가져다가 붙일 수는 있겠지만, 한마디로 자른다면, 그건 희망 없음의 공포였다. 현재보다는 미래가 더욱 무서운 것, 도저히 여기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가득찬 것이라고 말하면 될까. 그런 구로사와 기요시가 그려내는 가족 드라마라고 그랬다. 공포물이 아니라고 그랬다. 나는 속기를 기대하며 갔다. 그리고 속았다.

이 영화 <도쿄 소나타>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무서웠다. 물론 이 영화에는 귀신이 나오지도, 도플갱어가 나오지도, 검은 그림자로 이루어진 어떤 형체없는 무엇도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절망들은 우리 현실과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영화들보다 공포감을 준다. 영화의 아버지(카가와 데루유키)나 어머니(코이즈미 교코)는 간절히 소망한다. 다시 시작하면 안될까.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들 앞에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 앞에 있는 것은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이거나, 건널 수 없는 암흑의 망망대해이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reset 버튼을 누를 수 없다. 그들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른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 대한 희망없는 현실 속에서 절망한다. 이 절망은 정말 무섭다.

이 절망적인 마지막 장면 뒤에 마치 하나의 에필로그처럼 하나의 이야기가 더 추가된다. 몇년이 흘렀다는 자막이 스치고 지나간 후, 부모는 막내아들 켄지의 음악중학교 입학시험장에 앉아있다. 켄지는 드뷔시의 <달빛>을 아름답게 연주하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며, 부모는 켄지의 손을 잡고 나온다. 이것을 희망으로 볼 수 있을까. 이 마지막 장면은 상당히 모호하다. 실제 이들의 몇년 후로 볼 수도 있지만, 왠지 이는 아버지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서 보는 환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꿈속과 같은 희뿌연 화면 속에서 무표정한 사람들의 모습도 그렇거니와 이 아들이 연주하는 피아노곡의 제목부터가 미심쩍다. 드뷔시의 <달빛>이라. 달빛이 의미하는 환상성과 기이함. 어쩌면 이는 소나타 뒤에 이어지는 환상의 즉흥연주인지도 모른다.

이 마지막이 그다지 희망으로 느껴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 바로 전의 장면이, 다시 모인 가족들의 식사장면이기 때문이다. 차에 치여 쓰러졌던 아버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오고, 납치범과 같이 바다로 떠났던 어머니는 홀연히 돌아와 막내아들 켄지와 식탁에 둘러앉는다. 이 식탁에는 참을 수 없이 고요한 정적만이 흐른다. 단지 식구들의 밥먹는 소리만 미세하게 들릴 뿐이다. 그들의 지금까지의 식탁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반복. 이 식탁 위에는 그간 항상 정적만이 흘렀다. 아버지가 젓가락을 드는 것으로 시작하여, 모두들 조용히 밥을 먹고, "잘 먹었습니다."를 말하고 일어나는 동일한 형식. 이 식탁에는 대화가 필요없었다. 아니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두 아들은 모두 이를 잘 알고 있다. 두 아들은 모든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부모들에게 이야기해보아야 그들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변하는 것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식탁에서의 식사로부터의 시작 - 중간의 여러 사건들 - 그리고 다시 식탁에서의 식사로 이어지는 마지막은 왠지 제시부 - 전개부 - (제시부의 비슷한 반복인) 재현부라는 소나타 형식을 연상시킨다.

그들의 이러한 식탁에서의 대화의 단절은 세대간의 단절을 떠올리게 한다. 미래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한편으로는 미래가 변하지 않기를 은연중에 갈망하는 기성세대와 미래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자식세대와의 단절.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그 자식세대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란 또 얼마나 얄팍해지기 쉬운 것인가. 미군이 우리나라를 지켜주기 때문에 미군에 들어가는 것이 가족을 지키는 것이고, 세상의 평화를 지키는 것이라는 큰아들의 논리는 그 미군이 어느 중동 전쟁터에 파병되면서 여지없이 깨진다. 이러한 세대간의 단절을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두루두루 큰 무리없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와 특정의 어떤 것만 잘하면 된다고 믿는 자식세대간의 단절이라고 말이다. 영화 속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면접을 보러간 아버지는 면접관에게 시켜만 주면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면접관은 어떤 특정의 일을 잘 해낼 수 있는가 중요하지,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것은 의미없다고 그를 조롱한다. 그래서 또 한편으로는 이 마지막이 더욱 의심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이 절망한 아버지가 음악영재인(즉 '음악'이라는 특정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아들에게서 희망을 찾는다라. 이것을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또다른 단절의 시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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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기 며칠전 2006년도 영화 <미스 리틀 선샤인>을 우연히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 속 식탁 장면을 보면서 자주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의 가족의 식탁, 이 실패자들의 집합이 벌이는 식탁에서의 대화가 떠올랐다. 음식 취향만큼이나 다른 그들 각자의 생각들이 벌이는 충돌의 하모니와 유쾌하고도 아이러니한 봉합. <도쿄 소나타>와 <미스 리틀 선샤인>의 식탁 장면은 이들 영화가 달려가는 마지막 결말만큼이나 매우 다르다. 그러고보면 세계 어느 곳에서나, 가족간의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대화를 가장한 충돌은 식탁 위에서 이루어지는 듯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나와 가장 가까운 타인인 가족. 이 가족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자신과 친밀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또다른 나인 동시에, 나의 숨기고 싶은 모든 치부를 알고 있는,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상처들은 종종 날카로운 말이 되어 식탁위를 가로질러와 우리의 심장에 박히지만, 때로는 침묵의 공기로 변해 조용히 식탁 위에 내리깔린다. 날카로운 말은 상처를 주고 지나갈 뿐이지만, 침묵의 공기는 중금속처럼 우리의 심장에 켜켜이 쌓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내리깔린 공기 속에서 메인 심장 위로 밥을 밀어넣는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기어(gear)가 고장난 차를 타고 달리는 이 가족. 차를 달리게 하기 위해서는 가족 중에 몇몇이 내려 차를 밀어 일정 속도에 이르게 한 후 차에 올라타야 한다. 매번 약간 위태위태하기는 하지만, 이 가족은 그래도 모든 구성원들을 멋지게 태워 출발한다. 특히 멋진 주제곡 'The Winner Is'가 울려퍼지며, 가족들이 뛰어 달려와 차를 타고가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 속 가장 즐겁고도 사랑스러운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가족이라면, 우리가 가족이라면, 아무리 열없는 실패자들일지라도 모두 남김없이 태우고 출발해야만 하는 거겠지. 그러나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떼놓고 가려고 해도, 어딘가에 버리고 가고 싶어도 어느 틈에 달려와 내 옆자리에 앉아있고야 마는 사람들. 그것이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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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 - The R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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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영화의 이야기는 복잡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의 이야기가 복잡하다기 보다는 그 영화가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이 우리를 복잡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영화는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자신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기술했던 프리모 레비의 유명한 책과 질문이 겹친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무엇이 인간인가.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니 어려운 일이라기 보다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머리 속이 복잡하다 못해 텅 비어 버린 채로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서 겨우 떼내는 일 뿐이다.

영화의 시작. 한 15세 소년과 연상의 여인의 위태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흔한 소년 판타지물, 혹은 역 로리타물로서의 상투적인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여인 한나는 꽤나 많이 해본 솜씨인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석탄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을 빌미로 옷을 벗기는 저 능숙한 솜씨라니. 뭐 아무튼 여기에서부터 질문을 던져볼 수 있기는 하다. 도대체 이런 관계를 용납해도 되는 것인가 하고. 성에 대해서는 꽤나 관대하다고 여겨지는 서양에서도 이러한 관계는 꽤나 중대한 범죄로 여겨진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속으로는 더 꼬여 있지만, 겉으로는 꽤나 엄숙한 체 하는 우리의 '위원회'가 어째 이 수상한 영화를 아무 말 없이 통과시켜 줬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것만 궁금하냐고? 글쎄, 나로써는 이에 대해서 정말 할 말이 없다. 그런 경험도 없을 뿐더러(!), 겉으로는 책임 있는 리버테리언을 표방하는지라, 본인들이 뭐 책임만 잘 진다면...쿨럭...하고 넘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영화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해보기도 전에 2라운드로 넘어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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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의 법정에서의 대답을 들으면서 우리는 모두 아연해진다. 이것이 아연한 이유는, 이 대답들에는 모두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나의 대답들은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일자리를 준다기에 자원했다, 방이 모자라기 때문에 뒤에 온 사람들을 위해, 있는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이 질문들은 중요한 원칙들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틀린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그 원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되며, 더 나아가 그들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원칙이라면 그녀의 이 대답들은 절대적으로 틀린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피해자들과 이를 바라보는 우리 관객들은 심정적으로는 그녀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그녀를 용서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용서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녀를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원칙을 저버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한나에게는 이 원칙들이 결여된 것일까. 이것이 그녀의 문맹과 어떤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추측해 볼 수 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는 이 아연하다 못해 순수하기까지 보이는 결여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녀는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해서건, 혹은 난독증이 있어서건 문맹인 상태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이 문맹은 그녀가 아우슈비츠에서 저지른 이 일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왜 그렇게 그녀의 문맹을 수치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그렇게 문맹을 벗어나려고 하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법정에서의 위증을 굳이 지적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말하는 그녀의 그 욕망, 그것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이에서 벗어나기를 욕망하는지 알 수 있다. 어쩌면 너무 욕망하면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수없는 시도를 그녀는 지금까지 계속 실패해오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앞의 질문들은 바보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아무튼 여러가지를 고려해보아도 이는 간단한 문제가 될 수 없다. 문맹이라고 해서 그녀의 그런 범죄 행위들이 용납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역으로 말해 그것이 범죄행위임을 충분히 인식했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더 큰 형벌을 내릴 수 있는가. 아니 그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로, 법으로서 이들을 단죄하는 것이 가능한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이들을 처벌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까지 수송한 기관차의 기관사는 처벌을 받아야 할까.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면, 그 철로를 설치한 모든 노동자들도 처벌해야하는 것이 아닐까...법정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영화 속 교수의 세미나에서 혼란을 느끼던 학생들과 동일한 혼란을 우리 모두 겪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도 매우 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과연 실제의 재판은 어땠는지 궁금해졌다.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 아우슈비츠의 범죄자들을 심판하는 재판은 여러 번 열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가 재판받았던 뉘른베르크 재판도 있고, 아이히만 재판도 있지만, 영화 속 경우와 가장 비슷한 사례로는 196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렸던 아우슈비츠 재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2명의 피고인은 아우슈비츠에서 보초병, 방역소 직원, 게슈타포, 수용소 책임자, 수용소 의사 등으로 일했고, 이들은 1963년 현재 수출업자, 회사원, 남자 간호사, 농업협동조합 조수, 산부인과 의사, 목수 등의 일을 하다가 재판에 회부되었다. 사람들은 놀랐다. 그들은 가정을 가진 보통 사람들로, 성공하려고 노력하고, 세금도 잘 내고, 점잖고,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는, 괴물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들은 증인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자신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리고 판사는 판결을 내렸다. "피고인들이나, 책상에서 인간말살 계획을 수립한 사람들은 다같이 아우슈비츠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판사는 피고인들의 정치적, 도덕적 책임은 묻지 않았다. 다만 오늘날과 똑같이 아우슈비츠 시절에도 유효했던 형법의 자구(字句)를 기준으로 선고를 내렸다. (크리스티안 마이어,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에서 부분 발췌)

...어쩌면, 그래서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은 '원칙을 저버린, 혹은 원칙을 배우지 못한 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언제 어느때나 유효하다. 예를 들어 광주에서 민간인들을 잔혹하게 학살한 공수부대원들 중에는 "나는 국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애국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도(혹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이 믿음은 틀렸다고 믿고 싶다. 국가는 항상 옳은 것을 지시하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다. 국가가 내려준 '명령을 따르라'는 원칙 위에는 '민간인을 죽여서는 안된다'라는 대원칙이 있다. 설령 그 원칙을 배우지 못했다고 해도, 그들에게서 어떤 책임을 묻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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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한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영화라고 보았을 때, 그 중심 인물을 서술하는 다른 한 축에는 마이클(랄프 파인즈)이 있다. 생각해보면, 이 마이클도 불행한 인물이다.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마이클. 그는 옥중의 한나에게 여러 책을 읽은 녹음들을 보낸다. 그가 이 녹음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에게는 그가 어떤 반성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이클은 다시 처음으로 한나를 대면하는 자리에서 묻는다. 그 때의 일을 기억하냐고. 여기서의 기억이란 반성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한나의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아마 여기서 한나는 깨닫고, 마이클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반성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반성할 수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반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녀는 반성할 수 없으며, 반성해서도 안되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아우슈비츠는 이해될 수도 이해되어서는 안되는 일이라는 것. 그녀는 그 깨달음을 다른 방식으로 증명해 보였다. 책을 통해 더 가깝게 다가가는 방식으로. 그녀가 책에서 어떤 원칙을 얻었음을 그녀는 정신적으로도, 물질적으로도 증명해 보였다.

그래서 이 마지막은 마음에 든다. 이 마지막에서 마이클은 자신의 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 책의 효용이란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후세에게 무엇인가 이야기를 남기는 것 말이다. 후세들이 그 책을 읽음으로써 과거의 이야기에서 무엇인가 교훈을 얻기를, 그리고 절대적인 원칙을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요즘 물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뉴라이트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친일의 경험, 베트남 전에의 참전, 군사 쿠데타, 민주에의 탄압 등등을 이야기하는 것을 자학 사관이라고 자학하는 뉴라이트들에게 말이다. 과거의 비극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자는 미래의 희극을 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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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 토리노 - Gran Tor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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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 나오는데 두통이 밀려왔다.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 해서 그런걸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들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지만, 자꾸만 울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애이불비(哀以不悲). 마음 속으로는 슬퍼해도 그렇게 슬퍼하고나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그리고 자꾸만 무엇인가를 적어내려 가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영화 그 이상의 무엇을 적는 것을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마도 영화 속 월트(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 영화에 대해서 고귀한 희생이니, 가슴이 벅찬 감동이니 하고 적은 여러 리뷰들을 보았다면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시니컬하게 되뇌었을 것 같다. "다 쓸데없는 소리지." 그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다.

그러나 또 나는 그 쓸데없음 속에도 어느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며, 뭔가를 캐내기 좋아하는 종류의 인간이다. 그저 기억하기 위해 몇 가지를 간단하게 월트 몰래 적어두도록 하자. 
 

1.

월트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다. 어쩌면 월트는 집안에서 소외된 가장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자식들은 친밀하지만, 아버지와는 아무도 대화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집안말이다. 그러나 이제 아내는 죽었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의 시작이 아내의 장례식임은 의미심장하다. 전작 <밀리언달러 베이비>에서도 나이든 트레이너 프랭크는 아내가 없었다. 그리고 딸과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체인질링>에서도 크리스틴은 혼자 아들을 키웠다. 그리고 그 아들을 잃어버렸다. <그랜 토리노>에서는 월트는 영화의 시작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자식들은 그를 싫어한다. 이 상황에서 <밀리언..>의 프랭크와 <그랜 토리노>의 월트는 모두 같은 길을 걷는다. 프랭크가 매기를 딸을 삼았다면, 월트는 몽족소년 타오를 아들을 삼는다. 또다른 가족의 탄생.

왜 스스로도 의아해하면서 월트는 타오의 아버지가 되는 것일까.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월트가 타오에게서 그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이발사가 폴란드 놈이라고 놀려대는 것처럼, 어쩌면 월트도 가난한 이민자 출신이었을 것이다. 가난한 집안의 이민자 소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군인이 되어 전쟁에 나가는 것이 그 중 하나. 그리고 그가 전쟁에서 무리한 작전에도 용감하게 나섰던 것은 어쩌면 빨리 어메리칸이 되고 싶은 욕망, 그것의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항상 미국적인 가치를 강조하고, 유색인종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의 성향도 어쩌면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하나는 월트가 타오에게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것이다. 차를 훔치려던 것에 대한 반성의 의미라고는 하나, 시키는 모든 일들을 별 군말없이 묵묵히 해내는 소년. 이 소년에게서 뭔가 '괜찮은' 부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월트가 수를 청년들에게서 구해주던 장면에서도 그렇다. 월트는 차를 세워놓고 조용히 그들을 관찰한다. 이들을 도와줄까 말까 망설이는 것처럼. 그리고 수가 청년들을 겁내지 않고 맞서려 하자, 그제서야 차를 몰고 그들에게로 간다. 월트가 보았던 '괜찮은' 부분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수의 경우에서처럼 두려움 없이 무엇인가를 대하는 태도였을 것이다. 타오는 갱단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갱단이 되는 청년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갱단이 된다. 총과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세상에 맞설 용기가 없는 것이다. 
 

2.

이스트우드 감독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무엇일까. 그가 이 세상이 아름답고 평온하기만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음은 분명해보인다. 그는 <밀리언...>에서는 '네 자신을 보호하라'고 말했고, <체인질링>에서는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는 말되, 시작된 싸움은 스스로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아마도 이 세상은 어느 정도의 싸움이 불가피한 곳이며, 아니, 어느 정도의 싸움은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싸움을 피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가 항상 강조하는 것은 공정한 룰의 필요이다. 싸움은 하되, 공정한 룰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영화 속 월트의 대사처럼 세상은 공정하지 않다. <밀리언...>에서는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 진행되었고, <체인질링>의 크리스틴은 그녀 혼자의 힘으로 여러 권력기관들과 맞서야 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총과 커다란 폭력 앞에 노인과 아이들이 맞서야 한다. 이렇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수 있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항상 되묻는다.

이와 관련해 전작에서도 그렇고 '종교'라는 것의 역할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월트는 나름 독실한 신자인 듯 하나, 모든 것을 종교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고해하러 찾아간 신부에게도 기대한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하고 나온다. 이 모습은 <밀리언...>에서 교회에서 귀찮은 질문만 해대던 프랭크의 모습과 겹친다. 아마도 이스트우드는 신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즉 어차피 신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그저 자신의 할 일을 다하면 된다는 것. 용서와 참회와 기적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 그저 인간은 그 전에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라는 것 말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에는 살짝 의문이 든다. 이 마지막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희생을 통한 고귀함이고, 자신이 한국전에서 죽인 소년병에 대한 참회의 마음인가. 도리어 나는 그 반대의 인상을 받았다. 참회나 용서는 나의 몫이 아니라는 것. 신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저 내가 해야할 몫을 할 뿐이라는 것 말이다. 왜냐하면 이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큰 죄악이기 때문이다.  




3.

영화를 본 후 몇 개의 리뷰를 보았는데, 인종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는 시각도 있었고, 또 그에 더 나아가 미국인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관점에서의 불편함, 혹은 유사한 의미의 '팍스 아메리카나'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이 영화에서는 인종 문제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는 인상이 짙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종 문제를 넘어선 그 이상(以上)의 시각, 인종 문제가 언급되지 않는 그 이상의 세계를 그리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다. 사실 역설적으로 보았을 때 인종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세계에서는 인종이라는 것은 더 이상 전혀 언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결국에는 수와 타오를 괴롭히는 것이 다름 아닌 자신들과 같은 몽족의 갱단이라는 것이다. 즉 흑인이나 백인의 갱단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도 이스트우드 감독은 이 영화에서 비롯된 결정적인 대립이 인종으로서 비롯된 문제라기보다는 인종을 벗어난 다른 것의 문제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또 하나는 영화 속 월트와 이발사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인종에 대해 유쾌하게 농담을 나누며 서로에 대한 막말(?)을 서슴치 않는다. 이들에게서 인종간의 긴장이란 찾을 수 없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해서 역설적으로 이들의 관계에서 인종이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이 그들 사이에서 아무 문제 없는 농담이 될 수 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실제로 전혀 중요한 것으로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이스트우드 감독이 인종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일 것이다.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이민자들의 국가, 미국. 이 미국 땅에서 순수 어메리칸을 이야기하는 것, 혹은 인종간의 대립과 차별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는 정말 우스운 것이 아닌가 라는 시각. 그것은 이제는 더 이상 고려되지 않아야 된다는 것, 하나의 농담이 됨으로써 말이다.


4.

그랜 토리노. 1972년 포드에서 생산된 옛날 자동차. 옛날 자동차를 가지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항상 관리를 해주어야만 자동차가 굴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능 그 자체로만 따진다면, 옛날 자동차는 절대 최신의 자동차를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옛날 자동차를 가지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건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아도 당연하다. 그것을 소유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명예와 긍지, 그것을 가지고 싶은 것이다. 그 명예와 긍지는 간단한 것이 아니다. 지난 몇 십년 동안의 차에 대한 정성과 애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는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복잡하고 다층적인 스토리로 이루어진 영화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스토리로 이루어진 작은 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은 영화는 커다란 울림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며, 영화 이상의 어떤 순간을 관객들에게 느끼도록 한다. 그 작은 이야기가 그렇게 커다란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해답은 그가 살아온 몇 십년 간의 영화에 대한 정성과 애정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몇십 년 동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쌓아온 가치의 힘에 있다. 그가 살아온 몇십 년 간의 삶에 대한 자세가 이 영화에는 담겨 있다. 그래서 영화는 때로 보이는 것 이상의 많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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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레슬러 - The Wrest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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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 머틀리 크루(Motley Crue), 본조비(Bon Jovi), 데프 레파드(Def Leppard)를 좋아했던 적이 있는가. 이 물음에 '그래'라고 대답했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보고 슬플 것이다. 그리고 '그래'라고 대답한 당신은 영화 속 랜디(미키 루크)와 캐시디(마리사 토메이)의 대화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건즈 앤 로지스의 음악을 들으며) 이런 게 음악이라구. 너바나(Nirvana)가 망쳐버렸지. 우울하기나 하구...그랬다. 그들의 매력은 그랬다. 아무 생각 없이 술이나 마시고 놀자고, 즐겁게 파티나 하고 섹스나 하자고, 내가 왕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너바나는 반항하는 10대가 되어 출구가 없는 미래에 절망했고, 라디오헤드(Radiohead)는 자기는 바보고, 패배자라고 자학했다. 80년대와 90년대는 그렇게 달랐다. 그리고 또 90년대 전반과 90년대 후반은 그렇게 달랐다. 나는 어중간했다. 파티하는 건즈 앤 로지스를 좋아하며 중학교에 입학했고, 반항하는 너바나를 들으며 고교 시절을 보냈으며, 자학하는 라디오헤드를 흥얼거리며 대학에 입학했고, 대학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들을 다 어느 정도는 좋아했다.

랜디 램이 말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프로레슬링의 시대는 건즈 앤 로지스와 머틀리 크루의 시대였다. 우리 어머니는 지금도 어느정도는 그러시지만, 전쟁물과 격투기와 스포츠를 좋아하신다. 아직도 생각이 난다. 토요일 낮에 학교에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머나먼 정글>을 보며 점심을 먹고, 잠시 기다렸다가 오후 3시쯤 AFKN으로 채널을 돌려 프로레슬링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가 열심히 보셨고, 나는 아이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 조금은 억지로 보았다. 그것을 보지 않으면 월요일에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의 대화에 낄수가 없었다. 그들은 워리어와 헐크호간 중에 누가 더 멋진 피니쉬 블로를 가지고 있는지 말싸움을 벌였고, 이번 로얄럼블에서는 누가 우승할지 갑론을박을 벌였다. 그러다 말싸움이 격렬해지면 그 중에 누군가는 직접 기술을 시연해보였고, 기술을 당한 누군가는 아픔보다는 쪽팔림에 이를 갈며, 새로운 기술을 연마해올 것을 다짐하곤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도 지치면, 건즈 앤 로지스의 슬래쉬와 머틀리 크루의 믹 마스 중 누가 더 나은 기타리스트인지를 놓고 이야기를 했고, 본조비 따위는 듣지 않기로 결심하고는 몰래 집에서 혼자 본조비를 들었다.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주인공 랜디 램의 링 등장음악이 건즈 앤 로지스의 'Sweet child O' Mine'이라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가 좋았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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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 앤 로지스와 너바나의 거리만큼이나 프로레슬링과 K-1, 프라이드 등의 격투기의 세계는 멀다. 나는 그 둘의 차이는 그들의 이름에 있다고 생각한다. 프로레슬러의 이름들을 먼저 보자. 워리어, 헐크호간, 달러맨, 홍키통크맨, 빅보스맨, 브렛하트, 그리고 이 영화의 랜디 램과 아야톨라. 그들의 이름은 대체로 만들어진 가명이자, 하나의 캐릭터이다. 워리어는 전사답게 무서운 가면을 쓰고 등장하고, 헐크호간은 헐크처럼 티셔츠를 찢어발기고, 달러맨은 비서를 데리고 달러를 흩뿌리면서 등장한다. 그들의 그 캐릭터는 강렬한 판타지를 구축한다. 그들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 대결하고, 구축된 캐릭터는 그 안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하고 사람들을 환호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기꺼이 그 만들어진 판타지를 즐기며 선인이 악인을 벌하기를 원한다. 캐릭터와 환영의 힘이다.

그래서 프로레슬러에게 기술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랜디 램은 바쁘다. 그는 캐릭터를 유지하기 위해 약으로 근육을 만들어야 하고,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야 하고, 기계에 들어가 태닝을 해야한다. 그래서 트레일러에서 사는 퇴물 레슬러일뿐인 그는 '로빈 람진스키'라는 본명으로 불리우는 것을 한사코 거부한다. 프로레슬러에게 본명은 수치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랜디 램이거나 또는 워리어거나 헐크호간이어야 했다. 링에서 '텍사스에서 온 로빈 람진스키'라는 식으로 소개되는 것은 달러맨이나 언더테이커의 희생양이 되는 신출내기 무명레슬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전설의 랜디 램이거나 '중동의 짐승' 아야톨라이어야 했다. 그저 나이든 중고차 판매상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K-1이나 프라이드의 스타들은 다르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싸운다. 그들은 효도르이고, 최홍만이고, 레미 본야스키이다. 물론 그들에게도 별명이 붙을 수는 있다. 크로캅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는 만들어진 캐릭터와는 다르다. 크로캅이라고 해서 경찰복을 입고 곤봉을 돌리며 링에 등장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들은 판타지와 캐릭터와는 반대 지점에 있다. 그들의 싸움은 만들어진 판타지이기를 한사코 거부한다[각주:2].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혹 그들의 이 차이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의 차이를 말해준다면 지나친 말일까. 만들어진 판타지 안에서 그것을 고양(高揚)함으로써 적과 우리를 갈라놓고 그안에 숨어있도록 했던 20세기 말, 그리고 명확한 적은 사라지고, 깨어진 판타지 안에서 그저 실물로써 적의 잔상들과 마주해야 했던 21세기 초의 차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허술하고 초라한 진짜보다 잘 구축된 가짜가 더 좋은 것으로 대접받았던[각주:3] 80년대에서, (90년대의 혼돈을 거쳐) 모든 것이 리얼이어야 했던, 심지어는 TV 쇼마저도 리얼이어야 하는 21세기의 반영으로써의 효도르와 최홍만. 그 차이는 너무나도 먼 것이다. 작은 TV로 하는 옛날 닌텐도 레슬링 오락과 1080i 화면으로 즐기는 '콜오브듀티 4' 만큼이나 먼 것이다[각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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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 램은 링을 떠나려고 한다. 그에게 링을 내려오는 것은 링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무서운 현실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휘장을 걷고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지는 않지만, 마트에서 샐러드 파는 일을 하러 들어가며 휘장을 걷을 때에는 약간은 주저한다[각주:5]. 그는 가능하다면 이 곳에 들어서고 싶지 않다. 설혹 링에서 철심이 몸에 박힐지라도 그에게는 그곳이 낫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의 몸 상태는 더 이상 링에 서기를 그에게 허락하지 않는다.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캐시디와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도 그는 마트라는 사각의 링에 들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에게 현실의 링은 허용되지 않는다. 덜어내면 더 달라고 하고, 더 담아주면 덜어내라고 말하는 깐깐한 아주머니도 잘 버텨내던 그는 누군가가 그 자신, 랜디 램을 알아보자 더 이상 그곳에서 버텨내질 못한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그가 유일하게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방식은 이제는 허물어진 예전의 판타지 스타로서임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제는 허물어진 예전의 판타지로만 기억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 슬픈 세상에 엿먹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 판타지에 복종하는 것. 그래서 언젠가 링에서 심장이 터져나가는 영웅이 되는 것. 예전에 바스라졌다고 생각한 그 판타지가 언젠가는 영원한 신화가 되는 것. 바로 램 잼을 날리는 것이다.

뭐 더 이상 덧붙일 말은 없다. 다만 이 말 한 마디만은 해두고 싶다. 나에게는 미키 루크를 보는 것보다 마리사 토메이를 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나는 <나인 하프 위크>의 미키 루크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온리 유>의 마리사 토메이는 기억한다. 그래서 어찌 되었거나, 마지막에 랜디와 캐시디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잘 되었을까. 나는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그 희망이란 캐시디가 랜디의 경기를 차마 다 보지 못하고 경기장을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캐시디가 랜디의 손님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각주:6]. 랜디나 캐시디에게 상대방에 대한 최고의 모욕은 마치 '손님처럼' 구는 것. 그것을 캐시디가 거부했다면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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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건즈 앤 로지스의 앨범을 들었다. MP3에 담아두고 거의 듣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손이 갔다. 그러나 왜 이렇게 들리는 것일까. 이렇게 비장한 건즈 앤 로지스라니. 그리고 뭐? chinese democracy? 아..정말 싫다. 그저 술이나 먹고 마약이나 하며 파티나 하자고 해야하는데, 이렇게 정중하고 비감한 건즈 앤 로지스라니.

그래서 영화를 본 후 워리어나 헐크호간, 달러맨과 홍키통크맨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하는지 궁금해졌지만, 찾지 않기로 했다. 보고 싶지 않다. 그게 무엇이든, 영화보다 훨씬 더 슬플 것이기 때문에.







1. 예전 AFKN에서 본 많은 게임들은 이미 양 선수의 소개에서부터 누가 이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헐크호간과 본명 레슬러 누구, 그리고 워리어와 본명 레슬러 누구의 게임의 승패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모든 관객들과 시청자들은 이미 그것을 다 알고 있다. 그들은 '누가' 이길지 궁금해서 그것을 보지 않는다. 그 '승리' 자체가 보고 싶은 것이며, 그 승리를 같이 즐기기 위해서 그것을 볼 뿐이다.

2. 어쩌면 그래서 예전의 프로레슬러들은 그렇게 링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떠벌이기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선인, 혹은 악인임을 그들은 계속 관객들에게 증명해야 했으니까. 그러나 K-1 같은 데에서는 이런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마이크를 잡는 효도르의 모습이 있었던가. 그리고 한편으로 이와 관련해 가끔 격투기 게시판에 올라오는 우스꽝스러운 질문들이 흥미롭다. '효도르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와 같은 질문들. 그렇다. 그들에게는 그저 효도르는 리얼일 뿐이다. 반면 그 당시의 우리들에게는 이는 금기시되는, 혹은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헐크호간과 호랑이를 비교하다니. 헐크호간은 호랑이를 찢어발길거야.

3. 여기서 조금은 동떨어진 얘기지만, 어쩌면 이는 <씨네 21>에서 제기했던 잘 구축된 환영의 농촌이 강조된 <워낭소리>와 배우들이 다큐멘터리처럼 연기를 하는 <24 시티>의 차이. 그리고 그 둘 중 어디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의 문제.

4. 랜디 램은 동네 꼬마에게 같이 닌텐도 게임을 하자고 한다. 요즘 나오는 그 '닌텐도'가 아니라 작은 화면에서 큰 도트로 움직이는 그 옛날 닌텐도 말이다. 꼬마는 지겨워하며 '콜오브듀티4'가 훨씬 재미있다고 말하지만, 랜디 램은 발음조차 잘 못한다. 랜디 램이 콜오브듀티(Call of Duty) 4를 잘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아마도 별 재미를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에게 판타지가 없어진, 진짜와 거의 같은 전쟁은 힘겹고 무서운 것일 테니 말이다. 그러고보면 요즘에 모든 게임들은 진짜가 되기를 원한다. '콜오브듀티'마저도 지겨워지면 그들은 뭐를 하려고 할까. 진짜 전쟁을 하자고 할까.

5.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의식적으로 이 두 장면을 같은 각도로 찍는다. 그리고 영악하게도 마트로 들어가는 랜디 램과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귀에 링의 환호성이 환청으로 들리도록 한다.

6. 랜디의 직업은 프로레슬러, 캐시디의 직업은 스트리퍼. 둘다 이른바 '몸으로 말하는 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항상 랜디가 손님이었다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처음으로 이 관계는 역전된다는 점도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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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시티 - 24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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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지 2주 가까이 된 영화인데, 별로 할 말이 없어서 계속 쓸까말까 망설이다가 이제서야 적고 있다. 무엇인가를 적어 놓지 않으면 잃어버릴 것 같다. 그래,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잃어버릴 것 같다. 잃는다는 것은 기억 속에서 무엇인가를 잊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다. 내게 있어 잃어버리는 것은 잊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내용은 잊어도 되지만, 그 영화로 인해 느끼게 된 어떤 것은 잃어버리면 안될 듯 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할 말이 없다기 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너무나도 잘 구축한 두 편의 글을 보았기 때문에 뭔가를 더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씨네 21>에 실린 두 편의 글. 허문영 님의 글과 정한석 님의 글. 허문영 님의 글은 전문배우가 마치 다큐멘터리인 양 비전문배우임을 가장하고 구술하는 이 영화의 방식에 대해, 영화에서 말해진 구술 이상의 것, 구술 이외의 어떤 것, 프레임의 바깥에 있을 어떤 것을 주목해서 볼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정한석 님은 이 영화의 운동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지한 듯 보이지만, 프레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운동성에 대해, 그리고 스크린의 내부와 외부를 연결하는 작은 지점들에 대해,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을 넘나드는 이 영화의 움직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때로는 잘 구축된 글은 영화만큼 아름답다. 영화에 대해 논하고 있는 글에서 영화를 빼고도 남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어쩌면 그것은 그 영화를 보는 화자의 태도이다. 그 태도가 그 글에 절실히 묘사될 때, 그 글은 영화가 무엇이든지 간에 의미를 획득한다. 뭐 읽고 판단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허문영 님의 글
정한석 님의 글

며칠이 지났는데도, 영화의 음악들이 머리를 떠돈다. 이 영화는 음악영화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음악들이 머리에 계속 맴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영화의 음악들을 모아놓은 앨범이 있다면 구해서 계속 듣고 싶다. 영화 수입사의 홈페이지에도 가보았더니 나와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 질문도 있다. 그러나 영화사 측의 대답은 기대를 무너뜨린다. 국내 OST 발매 계획도 없고, 중국에도 발매 계획은 없다고. 어쩌면 이 영화의 OST를 찾는 것이 조금 우스운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의 음악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original'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인민들 속에서 흘러나오는 구전의 음악.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그 기원이 존재하지 않는, 혹 기원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전해내려오는 도중 어딘가에서 달라진 그런 음악들일 것이다. 그 음악들은 모두 멜로디도 다르고 느낌도 약간은 다르지만, 대체로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다. 삶은 비루하고, 주위의 여러 난관들은 많지만, 나는, 혹은 그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그들은) 때로는 여러 어려움을 겪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자신을 지키면서 꿋꿋하게 살아나겠다는 것. 그러다 보면 언젠가 좋은 날도 오겠지요..하는 구슬프고 안타깝지만 낙관적인 노래. 어쩌면 이 스크린을 보면서 그 음악들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공간, 지금 무너져내리고 있는 공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그 음악이 무엇인가 달랐던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명동 스폰지하우스 1관 2층에서 봤다. 2층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옛날 일들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교 때 한 달에 한 번 꼴로 학교 문화관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을 열심히 챙겨보곤 했다. 그럴 때,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 항상 2층에 올라가서 영화를 보았다. 항상 아슬아슬 늦게 가서 자리가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고, 2층의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을 수도 있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2층은 뭔가 특이한 느낌이 있다. 나른하고 지루하고 소외된 느낌. 나혼자 외따로 떨어져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랬다. 2층에 있으면 1층에 있는 관객들과 분리되, 마치 나 혼자서 이 영화를 보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2층의 관객들은 대체로 잠을 청하러 올라온 친구들이 많다. 대부분 잠든 와중에 혼자 영화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뭔가 나 혼자 따로 떨어져 있는듯한 느낌을 주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유치하게도 그 때는 그런 것을 멋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거기서 참 많은 영화를 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초록물고기>와 그 커다란 버드나무는 기억에 남는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그 영화를 보는 도중 "이 2층은 언제 없어질까. 그리고 나는 그 이후에 이를 무엇으로 기억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사라져가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24 시티를 만들기 위해 허물어지는 공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갔던 420 팩토리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안 첸과 같은 전문배우들이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마치 실제로 자신들이 겪은 일처럼 이야기를 하는, 즉 가짜의 구술을 하는 이 특이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 영화가 진행되는 것도 아마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즉 지아장커는 이를 각각 인물들의 분절된 이야기로 보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보다는 이 공간에 대해 증언하는 증언자로서의 의미, 이 공간에 대해 구술하는 단순한 구술자로서의 의미에 더 큰 뜻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이 2층의 의미를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 영화에 구술된 진짜처럼 구축된 가짜의 기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이 2층에서 옛날의 기억 속의 2층을 불러와 되새김질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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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지아장커가 사라져가는 중국에 대해 추억하고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다. 사라져가는 공간,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제거되는 과거의 기억들에 대해 지아장커는 이렇게 추억하고, 이렇게 애도를 보내고, 이렇게 안타까워한다. 어쩌면 누구나가 그렇지 않느냐고 말할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장소에서 있었던 과거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누구가 과거의 공간을 추모하고 있지 않느냐고.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어떤 공간을 기억하기 보다는 그 공간에서 있었던 일, 그리고 그 공간에 같이 있었던 사람만을 기억한다. 그것은 과거의 사람만 존재한다면 고스란히 리플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공간은 그것이 사라져 버리면 더 이상 기억에 남지 않는다. 공간을 위주로 기억하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방식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어떤 것을 제거하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섭다. 내가 옛날의 문화관을 찾아간다고 해도 그것이 더 이상 2층이 아니라면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기이하게 생각한 장면은 영화 중간에 곳곳이 삽입되어 있는 사람들의 정지장면이다. 마치 스틸 사진을 찍는 듯, 모여 서서 카메라를 조용히 응시하는 정지의 몇 초의 순간들. 아마도 이를 가지고 2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것이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하지만, 자꾸 이는 다큐멘터리가 아님을 관객들에게 일깨워주는 것. 즉 조용히 응시하는 정지의 순간을 삽입하는 것으로, 이것이 외부의 카메라로 구축된 극영화의 세계임을 관객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떤 다큐멘터리에서, 나오는 인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카메라를 사진을 찍는 것처럼 몇 초간 조용히 들여다 보겠는가.

그리고 또 하나는 이는 위에도 말한 것처럼 결국 스틸 사진이라는 것이다. 곧 허물어질 공간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은 어떠한 의미일까. 우리가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는 그 공간을 기억하기 위함에 있다. 사진으로 고정시켜두지 않으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그 공간들을 영원히 남겨두기 위해서 우리는 사진을 찍고 기록하고, 기억에 남긴다. 예를 들어 싸이월드에 올라와 있는 많은 사진들이 자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 영화 안에서의 스틸 사진 씬은 사라져가는 공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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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가는 모든 것들을 너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영화는 묻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것이 우리가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과거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과거에 대해 기억하고 애도한다고 해서 미래를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 과거의 기억에서 얻는 것으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으로 삼자는 것일테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목이 <24 시티>임을 기억해야 한다. <420 팩토리>가 아니라 말이다. 이제 곧 사라져갈 420 팩토리를 기억에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24 시티에서 또다른 기억을 만들어나가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허물어져 가는 420 팩토리,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지는 24 시티를 위해. 그리고 언젠가 허물어질 24 시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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