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칠드런 - Goodbye Childre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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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그들의 마지막은 주인공 줄리앙의 입을 통해 몇 마디의 나레이션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관객들의 한숨과 함께, 영화는 끝나고, 슈베르트의 피아노 선율이 울리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영화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음악은 가정도 이루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던 슈베르트의 생애와 겹쳐져 관객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마침내 엔딩크레딧도 끝나고 관객들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 무거움과 한숨. 이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무기력함의 공유

영화는 두 소년의 우정을 담담한 어조로 시종일관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영화적인 수식이나 그럴듯한 사건은 없다. 두 소년은 보통의 소년들이 그러하듯이 한 두 가지의 비밀을 공유하며 친해지다가도, 금새 자존심을 내세우며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 말다툼은 주먹다짐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이 이야기가 1944년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보네가 유태인 소년이라는 것을 관객들이 알게 되면, 관객은 다가올 파국을 예감하게 된다. 두 소년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세계의 바깥에 도사리고 있는 이 위험은 엔딩이 다가오기 전까지 조금씩 이 두 소년 곁으로 다가오지만, 이 파국은 이 두 소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결말이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은 주인공 보네도 알고 있다. 보네는 담담하게 짐을 싸며 줄리앙에게 말한다. "언젠가는 잡힐 줄 알았어."

이 마지막을 어쩔 수 없이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은 줄리앙과 보네 뿐만이 아니다. 스크린 밖의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서 관객은 줄리앙과 함께 보네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다. 이 때부터 관객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저 비밀이 드러나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바라보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의 중반부 관객은 한 차례의 위기의 순간을 경험한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된 줄리앙과 줄리앙의 엄마와 형, 그리고 보네. 여기에 일단의 군인들이 나타나 신분증을 검사하기 시작한다. 이곳은 유태인이 출입할 수 없도록 금지되어 있는 곳. 이들은 한 유태인 노신사를 발견하고 그를 다그치기 시작하고 관객은 점점 불안해진다. 다음 차례가 보네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관객은 무기력하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조용히 그들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 다행히 한 독일 군인의 객기로 사태는 무사히 종결되지만, 관객은 서서히 그들의 무기력함을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식당 안의 다른 손님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 무기력함은 영화의 엔딩에 정점에 이른다. 줄지어 선 소년들은 잊을 수 없는 한 순간을 경험하지만, 그 경험은 오롯이 관객들에게도 전이된다. 무기력함과 공포. 그들에게는 친구를 구하고 싶은 심정과 살아남고 싶다는 심정이 교차하지만, 그 순간 실제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저 가는 친구의 손을 한 번 잡아주거나, "잘 가세요. 신부님."을 외치는 정도. 이 경험은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관객은 순간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그 소년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램일 뿐이다. 스크린 밖의 관객의 지독한 무기력감.  

이 무기력함은 필연적으로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과 죽은 자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연결된다.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그래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우리가 어떤 책임이 있다는 그런 생각. 그래서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물었고, 우리 나라의 많은 작가들 역시 "광주 이후에 문학이 가능한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이 무기력함과 죄책감은 자기합리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죄책감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합리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많은 사람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유지함으로써 유태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을 방조했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는 이 '침묵의 카르텔'과 자신들의 이성을 일치시키기 위하여 유태인들과 자신들을 애써 분리시키고, 유태인들이 탐욕스럽고, 자신들밖에 모르는 존재들이라 사라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다.


무기력함의 이후는

결국 비밀을 공유하면서 시작된 주인공들과 관객들의 공유 의식은 엔딩 장면에서의 무기력함의 공유로 이어진다. 이 순간을 어쩌면 영화라는 공적체험이 관객 개개인의 사적 체험으로 전이되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고보니 <굿바이 칠드런 An Revoir Les Enfants>라는 제목이 심상치 않다. 이 말은 떠나는 신부가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간 마지막 말임과 동시에 스크린 밖의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스크린 속의 아이들에게 겨우 던져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독한 무기력의 체험 이후는, 즉 엔딩크레딧 이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두 갈래의 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해하는 것. 그러나 홀로코스트에서 겨우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그 때의 경험을 이야기한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다고. 인간의 의도와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것을 수용한다는 것, 즉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이다. 이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도 거기에 줄리앙의 꿈이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줄리앙은 오줌싸개이다. 번번이 꿈을 꾸다가 침대보를 더럽히곤 한다. 그가 보네에게 들려준 이유는 간단했다. 꿈 속에서 시원하게 오줌을 누는데, 꿈에서 깨어나보면 현실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꿈과 현실의 연결. 꿈에서의 행동으로부터 이어지는 현실에의 결과. 이것을 관객들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스크린과 현실의 연결. 스크린에서 벌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들이 관객 각자의 현실에서도 여러 다른 양상으로 일어난다. 그것을 이해하려들지 말고 스스로가 행동하고 싶은 대로 행동으로 옮길 것. 그것이 스크린 속의 소년들과 스크린 밖의 관객들을 무기력함으로부터 구원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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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질링 - Changelin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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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아주 가득함)


글쎄. 무엇을 얘기해야 할까?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맥주를 한 캔 마시고, 비스듬히 누워 핸드볼 경기를 보았다. 그러나 경기를 보면서도 줄곧 머리 속으로는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모호한 상징이나 느슨한 알레고리, 혹은 꼬인 이야기로 머리를 아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명확하며, 주인공들이 부딪히는 지점도 비교적 명확하다. 그러나 그 영화들은 도중에 조금씩 관객을 끌어당겨 결국 일정 지점에 이르러 모호한 어떤 방으로 관객을 내몰고는 살짝 문을 닫아버린다. 그러면 관객은 깜깜한 방 안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멍한 머리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본다. 이것은 기이하다. 그저 맥주 맛이 살짝 쓰게 느껴질 정도로 기이하다.

영화가 2시간 정도에 이르렀을 때, 영화는 마무리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당한 형사는 영구 정직당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고, 살인마는 사형을 언도받고,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되었던 안젤리나 졸리는 이제 재판정에 앉아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라면, 여기서 끝내야 한다. 안젤리나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 그러나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가 아닌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기어이 나머지 장면들을 채워넣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하는 많은 관객들의 희망을 무너뜨린다. 졸리는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사형을 지켜본다. 그리고 아이 한 명은 살아 돌아와 부모 품에 안기고, 졸리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영화를 끝낸다. 이것은 나를 멍하게 만들고, 질문을 하게 한다. 왜 이 장면들이 필요한 것인가? 모든 관객들은 이미 그 살인마가 사형을 당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스트우드는 굳이 그 장면을 꼼꼼하게 관객들에게 지켜보도록 한다. 그리고는 월터의 용감함을 이야기하며 졸리의 '희망'을 이끌어내고 영화를 끝낸다. 이제서야 희망이 있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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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시작부분에 졸리가 아들 월터에게 하는 말이 있다. "네가 먼저 싸움을 시작하지는 말아라. 그러나 시작된 싸움은 네가 끝내라." 그리고 이 말은 영화 중반에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글쎄. 왠지 몇 년 전에 이스트우드로부터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것 같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늙은 관장 프랭크는 매기에게 여러 번 반복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네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싸움은 피할 것. 그러나 싸움이 시작되었으면 네 자신을 보호할 것.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싸움은 결국 자신이 끝내지 못하는 싸움이다. 매기는 결국 이 원칙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을 끝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졸리는 싸움을 끝냈는가. 이 질문은 아마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졸리는 자신을 보호하였는가.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요소를 고려하여야 한다. 그 싸움은 공정한 싸움인가. 사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는 자신을 보호하려 최대한 노력했다. 매기가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순간은 불공정하게 진행된 순간이었다. 공이 울리고 매기의 승리가 확정된 순간에 상대는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매기는 쓰러졌다. 한편 졸리는 어떤가. 졸리 역시 매우 불공정한 위치에 서 있다. 졸리는 하나의 도시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졸리 역시 쓰러진다. 정신병원에 갖히고, 강제로 약을 먹어야 하고, 급기야는 침대 위에서 치료를 가장한 전기 고문을 당해야 하는 위치에까지 온다. 그렇다면 졸리 역시 이 거대한 불공정한 싸움의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인 걸까. 불공정한 싸움에서 개인은 보호될 수 없는 것일까.

이 극적인 순간에서 졸리는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승리한다. 그러나 이 승리는 어쩐지 조금은 이상한 방식으로 찾아온다. 졸리를 구해내는 것은 한 장의 신문이다. 그 순간 우연히도 살인마가 잡혔고, 살인마의 공범이 월터를 알아보았고, 결국 졸리의 말이 입증되는 것이다. 즉 이 승리는 졸리 내부에서 온 승리가 아니라, 외부에서 가져다 준 승리다. 우연으로 빚어진 승리. 결국 이 승리로 부당한 형사는 정직되고, 경찰청장은 해임되면서 시스템이 살짝 무너지지만, 이 승리로 졸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이 승리가 덧없음은 어쩌면 이 장면으로 말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승리한 졸리에게 변호사(목사였나?)가 찾아와 월터가 죽었으니 그만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졸리는 아직 월터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믿는다며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그는 아마도 하늘나라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글쎄. 이와 비슷한 장면을 우리는 처음에도 보았다. 졸리는 데려온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항변했지만, 형사는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라고 일축했다. 결국 그녀가 승리한 이후에도 월터의 생사는 여전히 모호하며,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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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마도 이 두 장면이 필요할 것이다. 졸리는 살인마의 전보를 받고 살인마를 찾아가 그에게 진실을 말하라며 다그친다. 이 죽음 며칠 전의 졸리와의 대면 순간에도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던 살인마는 교수대가 눈앞에 보이고서야 죽음의 공포에 떨며 삶을 구걸한다. 그리고 졸리는 강인하고 단호한 태도로 그것을 지켜본다. 옆에 서 있는 부인의 손까지 잡아주며 말이다. 이는 부당한 시스템의 공격 속에서 우연으로 가져온 승리와는 다르다. 졸리는 기꺼이 살인마를 찾아가고 그의 최후를 지켜본다. 그녀는 이제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몇년 후 극적으로 살아난 한 소년은 죽음과 삶의 교차하는 순간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월터의 모습을 증언한다. 그리고 졸리는 그제서야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계속 끝까지 아들을 찾아다녔다는 그녀의 마지막 이야기가 자막으로 올라가며 영화는 끝난다.

이 마지막 두 장면은 영화가 그 이전에 끝났으면 가져오지 못했을 새로운 희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그 희망은 불공정한 시스템에 맞서서 얻은 승리로 주어진 게 아니다. 즉 졸리가 변호사와 손을 맞잡고 울음을 떠뜨리고, 옆에서 플래시가 터지는 아름다운 결말로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것은 승리와 패배가 모호한 이 세계에 맞서는 개인의 자유의지이며, 옆 부인의 손을 잡아주는 졸리의 손이며, 되돌아와 철조망에서 소년의 발을 꺼내준 월터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이 공화당 지지자이면서도 이라크 전쟁은 반대하는, '건전한 보수주의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이스트우드는 아직 '매그넘 44'를 내려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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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발키리 - Valkyri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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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브라이언 싱어는 솔직한 감독이다. 이번주 <씨네 21>에 실린 인터뷰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말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전기영화가 아니라 서스펜스 스릴러라는 거다." 역사에 기록된 실패한 작전. 이 작전을 영화화하고자 했을 때 브라이언 싱어는 선택을 해야했을 것이다. 역사의 재현인가, 역사의 제거인가. 감독이 선택한 건 후자였고, 그 후자의 극대화였다.

글쎄. 이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히틀러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슈타펜버그 대령과 그의 동지들. 영화에 묘사된 대로, 그들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고, 역사적 범죄자인 히틀러를 죽이고, 정의를 되살리려다 희생당한 영웅들인 걸까. 어쩌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들이 거사를 실행했던 1944년 7월, 독일은 침몰하고 있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동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44년 6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전세는 단숨에 역전되었다. 독일은 구멍이 뚫린 배였고, 침몰이 서서히 가까이 오고 있다고 배에 탄 사람들은 느끼고 있었다. 슈타펜버그와 그의 동지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전쟁이 이대로 끝난다면 전범(戰犯)이 되어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거나 그 전에 권총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겨냥해야 할 운명이었다. 어쩌면 그 전에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더욱 강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에도 나오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히틀러를 죽이고 나치 정부를 전복한 후 연합군과 휴전을 맺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급해한다. 연합군이 그들을 필요로 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연합군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전쟁을 끝낸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그들은 어쩌면 한편으로 침몰하는 배에서 빨리 탈출하려고 하는 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러한 해석을 단호히 거부한다. 아니 이러한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 슈타펜버그 대령(톰 크루즈)은 비망록을 적고 있다. 반(反) 히틀러의 결연한 의지. 이 의지에는 어떤 인간적인 고뇌나 의심은 묻어나지 않는다. 나치당의 일원으로서 전쟁에 참가하였던 슈타펜버그 대령은 왜 반 나치 전선에 서게 된 것일까. 영화는 이를 묻지 않는다. 대령은 이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그보다는 어떤 더 큰 대의를 위한 것임을 비망록에 적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는 이를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보여줄 뿐이다.

이는 왠지 슈타펜버그 대령이 비망록을 적으며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브라이언 싱어도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역사의 재현이 아니라고. 아마도 그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선택인 것 같다. 영리한 브라이언 싱어는 이 영화를 성공시키려면 역사를 제거하고, 그 작전을 마치 하나의 허구적 사실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는 실패한 작전이니까. 여기서의 역사의 재현이란 결국은 실패한 작전임을 잘 알고 있는 많은 관객들에게 그의 실패의 체험을 고스란히 바라보게 하는 무기력의 경험이니까. 그보다는 서스펜스의 극대화라는 자신의 장기를 드러내보이는 것이 브라이언 싱어에게는 좋은 선택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예의 그 장기를 드러내보였고, 관객들은 결말을 알면서도 혹시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마지막까지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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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브라이언 싱어가 역사를 제거하기 위하여 쓴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의 전략은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화(化)하는 것이다. 발키리 작전의 다른 장교들과는 달리 슈타펜버그 대령은 시종일관 확신하고 있다. 이 확신은 그를 조금씩 인간이 아닌 신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의 신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장엄하고 영웅적인 죽음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혹 그것으로 모자랄까봐 감독은 엔딩 자막으로 이 신화에 토핑을 올린다. 신화화함으로써 역사를 제거하기. 어쩌면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라면 이를 필연적이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두 가지가 의미심장하다.

하나는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 <슈퍼맨 리턴즈>와 같은 전작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를 극복하고 승리를 성취해내는 영웅들의 모습. 그것은 슈타펜버그 대령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전쟁에서 한 쪽 눈과 한 쪽 팔과 세 개의 손가락을 잃은 전쟁영웅. 그러나 그가 이를 극복하고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이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는 인물은 톰 크루즈이다. 확신에 찬 미소를 가지고 있는 제복이 잘 어울리는 남자. 신화화된 슈타펜버그 대령을 연기하기에 이보다 더 적당한 배우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자 작전명인 '발키리'는 의미심장하다. 북유럽 신화에서 용감한 전사자의 영혼을 천계로 인도하는 발키리(Valkyrie). 그것은 명백하게도 슈타펜버그 대령의 상징이다. 결국 슈타펜버그는 작전의 실패와 함께 그와 그의 동지들의 영혼을 고스란히 천계로 데려갔으니까. 그러나 뭐가 어찌되었던 간에 '발키리'도 결국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즉 브라이언 싱어는 슈타펜버그 대령을 신화의 하나로 봐주기를 계속적으로 항변하는 중이다.

그런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신화화 전략은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 이 신화화야말로 나치즘의 중요한 거점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나치주의자 혹은 파시스트들은 신화가 가진 힘을 알고 있었다. 파시즘(나치즘)이 신화의 세계를 개척했던것은 부분적으로는 공산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신화의 세계를 비합리적인 요소로 가득한 불가해한 영역으로 보아 단념했던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신화의 세계를 개척함으로써 나치즘 혹은 파시즘은 대중적 호소력을 지닌 이미지와 상징들을 활용할 수 있었다. 신화화된 세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앞장선 한 남자의 행동을 그리는 데에 신화화의 전략을 사용한다- 나의 석연치 않음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그러고보니 화면가득 줄지어 나부끼던 나치 깃발이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브라이언 싱어의 다음 영화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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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맥거핀 > 데이빗 린치 감독전- 박찬욱 감독과의 시네토크 후기

데이빗 린치. 그의 영화들을 보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다. 불쑥불쑥 끼어드는 괴이한 장면들과 불친절한 이야기의 흐름과 가끔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들. 그래서 그의 영화들을 보기로 하는 것은 '마음먹고' 해야 하는 일이다. 뒹굴뒹굴 구르다 채널을 돌리면서 봐도 되고, 배가 고프면 사과를 깎아먹고 와서 봐도 되는 어떤 영화들과는 매우 다른 지점에 와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만은 피할 길이 없다. 친절한 알라딘에서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를 주었고, 무엇보다도 데이빗 린치와 박찬욱의 만남이 아닌가. 물론 박찬욱 감독님 스스로가 데이빗 린치의 열혈광팬임을 밝히고 있기도 하지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의 어떤 부분은 데이빗 린치의 영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하니까. 불쑥불쑥 끼어드는 괴이한 장면들과 불친절한 이야기의 흐름과(물론 박찬욱 감독이 데이빗 린치보다는 훨씬 친절한 면이 있지만) 가끔 깜짝 놀라게 하는 소리들. 이 말은 그대로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에 가져와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감독전에 가는 길에 친구를 기다리며 잠깐 들른 교보문고에서 본 <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은 한편으로는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씨네토크 시간에 박찬욱 감독님이나 김영진 평론가님이 말씀하신대로 나도 "이게 데이빗 린치가 직접 쓴 책인가?"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영화들에서 상상할 수 없는 조용하고 짤막한 이야기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조금은 데이빗 린치스러웠던 것이 짧은 글에서 강단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고집이 느껴진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데이빗 린치의 빨간 방>을 보다가 혹은 박찬욱 감독님의 책 <박찬욱의 오마주>를 보면서 다가올 시간을 기다렸다. (<박찬욱의 오마주>는 박찬욱 감독님의 평론가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책으로 이 책에는 곧 보게될 영화 <광란의 사랑>의 영화평이 나와있기도 하였다. 다른 부분 보다도 이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는 로드무비라고. 이것은 집 잃은 자들의 이야기라고.) 

친구가 서둘러 도착했고, 허겁지겁 저녁을 먹은 후 7시 30분 시간에 맞춰 씨네토크 및 영화상영이 진행되는 씨네큐브에 도착하였고, 8시부터 씨네토크가 시작되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금 더 여유있게 도착시간을 말해주었어도 좋을 뻔 했다. 햄버거를 깨물어먹으며 서둘러 도착했는데, 30분 동안 하릴없이 기다려야 했으니까.) 씨네토크는 혼자 진행하기 버거워하시는 박찬욱 감독님의 요청으로 김영진 평론가님과 대화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나름 영화 내외적인 내용을 고루 전달해주신 것 같다. 특히 영화 내부의 이야기들보다는 우연히 린치를 마주친 일이며,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여 심사위원장 카트린드뇌브 이하 모든 심사위원들과 함께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러갔던 일 같은, 박찬욱 감독님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님이 린치와의 인연을 개인적인 회상으로 들려 주는 사이에 김영진 평론가님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린치의 작품 세계나 (최근에는 린치가 안드로메다로 갔다는 말씀 ㅋ) 린치의 작품에 얽힌 일화들 및 배경들을 들려주며 박찬욱 감독님의 이야기에 보완을 해 주었다. 

그리고 곧 이어 데이빗 린치의 1990년도 작품 <광란의 사랑 Wild At Heart>이 상영되었고, 마법의 110분이 지난 후 'Love Me Tender'가 울려퍼지는 속에서 니콜라스 케이지와 로라 던의 자동차 위에서의 익히 잘 알려진 키스신과 함께 엔딩크레딧을 보게 되었다.  

글쎄. 이 영화를 보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뭐 어쩌면 작품의 구조나 이야기,장면들의 분석, 영화가 가지고 있는 상징 및 함의를 쓰려고 한다면 몇 페이지에 걸친 긴 분석을 해야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능력도 안될 뿐더러, 여기는 영화평을 쓰는 공간도 아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를 가지고 이야기의 구조를 분석하는 것이나 스토리를 논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느낌이다. 물론 이 영화는 린치의 다른 영화들에 비하여(<스트레이트 스토리>를 제외한다면) 훨씬 구조가 눈에 드러나고 스토리도 눈에 보이는 영화이긴 하나, 이 영화에서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뭐 스토리라고 해봤자 결국은 여자친구 어머니의 반대 속에서 여러 고초를 겪으면서 감옥을 다녀오고도 사랑을 이루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 밖에는.) 하기는 뭐 데이빗 린치는 매번 그래 왔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저 다만 몇 가지 것들만을 기억해두기로 하자. 시작 부분에 <Love Me>를 부르며 타인의 코를 박살내는 니콜라스 케이지와 다시 코를 얻어맞고 <Love Me Tender>를 부르며 사랑을 이뤄내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대구(對句). 그 당시에도 여전히 느끼해주시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눈빛 연기(!)와 뱀가죽 자켓(이런거는 어디서 팔죠?). 주라기 공원에서 애들을 보호하던 그 모습은 어디가고, 로라 던의 섹시한 망사그물스타킹(왜 혼자 있을 때 이런 걸 입고 있는지..)그리고 몇 가지의 데이빗 린치의 유머들. 예를 들어 시작부분의 그 세밀한 장소 묘사 자막하며, 니콜라스 케이지가 감옥에 있던 날들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 하며, 튜나 간판 뒤의 'fuck you'와 같은 것들. 그리고 우리의 바비 페루(윌렘 데포)와 그의 교정이 꼭 필요한 잇몸들(그의 악당 연기의 원형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훗날 다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지막 니콜라스 케이지의 'Love Me Tender'의 느끼한 목소리가 울려퍼지는 속에서 자동차 보닛 위에서의 로라던과 니콜라스 케이지의 키스신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았다는 사실만은 기억할 것 같다. 비록 그것이 가끔 비가 내리는 화면이었더라도 말이다. (영화사 관계자께서 화질 안 좋다고 무지 미안해하셨는데, 괜찮았어요. 옛날 영화가 이 맛이죠.) 

마지막으로 좋은 기회를 주신 알라딘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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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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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시작머리에서 김연수는 말한다.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질문하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여행을 할 권리’. 과연 여기가 어떠하길래, 우리는 ‘겨우’ 이것 뿐인가라고 말하며 새로운 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여행기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눠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른바, 정보 전달 유형. 세계 각국의 신기한 풍물과 다양한 공간들, 음식들, 음악들, 그림들을 소개하며, 그곳에 다다르는 방법들과 즐기는 방법들을 가이드가 된 심정으로 자세하게 소개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는 자기 과시 유형. 이런 유형의 저자들은 대체로, 꽤나 방송을 통해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외우기가 힘든 긴 이름을 가진 음식을, 그보다도 더 긴 이름을 가진 와인을 곁들여 먹고는 그것을 자랑스레 사진을 찍어 실어 놓는다. 마치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주문한 음식을 찍어서 올려놓고는 밑에 짤막한 감상을 단 많은 미니홈피들이 그러하듯이, 그 커다란 사진 밑에는 아주 짤막한 감성적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게 매끄러운 감상이 달려 있다. 그리고 세 번째 유형은 이 김연수의 책 <여행할 권리>와 같은 유형이다. 여행기를 가장한, 사실은 여행기가 아닌 유형. 이런 여행기에서는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누구를 만났는가, 혹은 누구를 만나러 갔는데 만나지 못했는가가 훨씬 중요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런 여행기에는 글 전체를 꿰뚫는 맥락, 또는 스토리가 있다. 그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와 얽혀진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은 다음의 여행지의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고, 그 마지막에는 그 여행기를 쓴 저자 자신이 있다.


이 책에 실린 11곳의 여행기, 아니 정확히 말해서 11가지의 이야기를 꿰뚫는 키워드는 ‘월경’, 즉 국경을 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니 넘지 못하더라도 국경 근처까지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국경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물리적인 ‘국경’ - 총을 든 군인이 지키는, 혹은 철조망이 세워져 있는 - 만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국경, 또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암묵적인 국경. 따라서 이 국경이라는 말을 ‘한계’라는 말로 바꿔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각각의 개인들이 가지는 한계란, 어떻게 만들어져서 각 개인들을 어떻게 억압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공유되고, 어떻게 넘어서야만 하는가. 그들에게 국경을 넘는다는 것, 즉 한계를 넘어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책에 실린 몇몇 여행기에서 살펴본다면, 조선족 이춘대 씨에게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향한다는 것은 그에게 깐두부를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경제적 풍요를 제공해주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아버지가 해방 후 일본을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리얼리티를 버리고 막연한 이상을 찾는 것이었다. 일본어로 소설을 써 아꾸따까와 상 후보가 되었던 조선인 작가 김사량이 1945년 중국 태항산 조선의용군 근거지로 탈출하는 것은 미래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가 이상(李箱)이 현해탄을 건너 토오꾜오로 가는 것, 즉 국경 근처까지 가는 것은(아직 해방되기 전이었으므로), 경계가 있음을 확인하는 것, 혹은 경계 바깥의 세상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김연수의 말을 빌자면, ‘어두운 방, 오들오들 떨면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일’.

이상(李箱)의 죽기 직전 몇 달 간의 행적을 좇는 마지막 여행기를 제외하자면, 김연수는 여행을 간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 한국에서 사만부가 채 안 팔리는 소심한 작가 김연수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꽤나 긴장하지만, 결국 그가 마지막에 얻는 깨달음은 하나인 것 같다. 그 사람들이라고 별 것 없다는 것. ‘시차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나이차가 있을 뿐이었다’는 것. 참 별 것도 아닌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인 것은 이는 우리가 국경을 넘어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혹은 국경 근처에 가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아마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만이’. 국경을 넘는다는 것, 혹은 이상과 김수영과 같이 ‘국경을 넘어보지 못한 몸으로 월경’하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내가 할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일. 그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아마도 김연수가 명쾌하게 지적한 바대로 최소한의 나를 확인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김연수의 ‘공항의 우화’는 완성되는 것이다.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기재돼 있다. 이름과 국적과 생년월일과 주민등록번호. 직장에서의 평판은 어떤지, 가족들은 어떤 사람인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인지 따위는 불필요하다. (중략)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느 시공간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처럼 최소한의 나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내게는 우화처럼 느껴진다. 거기에는 치명적인 진실이 있다. 공항을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그저 여권에 적혀 있는 생물학적인 존재, 그 이상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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